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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 시대 카타프락토스의 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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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타프락토스(κατάφρακτος, 단수형) 또는 카타프락토이(κατάφρακτοι, 복수형[1])란 중갑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말에게도 마갑을 입힌 병종이다.카타프락토이는 고전 그리스어로 '완전히'란 뜻의 접두사 카타-(κατα-)와 '방어하다'라는 뜻의 프라소(φράσσω)가 합쳐진 단어로, 완벽하게 무장한 자(들)를 뜻한다. 이 외에도 '중장기병', '중갑기병', '철기군(鐵騎軍)', '개마무사'(鎧馬武士) 등 한자어로 비슷한 뜻을 지닌 어휘들이 존재한다. '개마무사'의 경우에는 주로 한반도, 특히 고구려의 마갑을 착용한 기병을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하며, 반대로 '카타프락토이'는 서양권의 것만을 가리킬 때 쓰기도 한다. 물론 본래의 뜻은 같으므로 모두 묶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용어 '중기병'의 경우, 경기병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중세 유럽의 기사나 근세의 퀴레시어 등 카타프락토이로 불리지는 않는 많은 병종까지 총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아래 서술에서는 위 어휘들이 문장 중간중간 섞여서 사용되나,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이므로 읽거나 서술할 때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2. 역사
2.1. 고대
카타프락토이의 기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기원전 5 ~ 6세기를 전후하여 이란 고원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중장기병들이 그 기원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사실 메디아 왕국이나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 왕조, 파르티아처럼 이란 고원에서 발흥했던 세력들은 항상 북동쪽의 트란스옥시아나나 스텝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유목민들의 위협을 받았으므로 기병 전력을 강화시켜야 할 동기가 있었다. 게다가 메디아인과 파르티아인, 페르시아인들 모두 기병으로 유명할 정도로 말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고대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오리엔트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다.그림은 크세노폰의 저서 아나바시스에 등장하는 소(小) 키루스[2]의 근위병에 대한 묘사를 토대로 그려진 것이다. BCE 401년에 등장하는 모습인데, 80여 년 전 페르시아 전쟁 때의 페르시아 기병이 흉갑과 투구만 썼던 것에 비해 말의 콧잔등과 가슴을 가리는 마갑을 입혔으며 팔과 다리 역시 갑옷과 보호대를 갖추고 있다. 여전히 활과 투창을 주 무기로 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인 기병 운용법, 즉 기동력을 이용해 투사 무기를 활용한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으므로 유목민 궁기병들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나 그리스 중장보병과의 근접전 등 새로운 전투 상황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유목민들 역시 그런 추세에 맞춰 갑옷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동원한 사카족 카타프락토이는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예 기병대인 헤타이로이보다 더욱 중무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순간 스키타이인 기병과 스키타이인과 한 부대를 이루고 있는 박트리아인들은 그들에 맞서 기세등등하게 돌격했고, 수적인 우세로 말미암아 그들의 배후로도 달려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가 지휘하는 부대의 파이오니아인들과 용병들에게 스키타이인을 공격하여 야만인들을 꺾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파이오니아인들 및 외국 군대와 접전하지 않은 나머지 박트리아인들이 그 순간 지휘자가 편대를 선회시키면서 전투에 복귀하였고, 그로써 기병들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많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이 쓰러졌는데, 야만인들의 군세가 압도적인 데다가 또한 스키타이인들이 기수와 말을 동급의 방어구로 더욱 단단히 방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들의 공격에 맞서 버티었고, 결연히 그들에게 달려들어 부대와 부대의 전열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 루키누스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 3권 13장
─ 루키누스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 3권 13장
마갑은 이와 같은 추세로 발달했지만, 카타프락토이의 탄생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으니 바로 대형 기병창을 이용한 강력한 돌격의 발달이었다. 이런 기병창을 그리스어로 콘토스(kontos), 혹은 크시스톤(xyst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딱히 정설이 없다. 확실한 것은 BCE 3~2세기 이후가 되면 마갑과 함께 스텝 지대의 유목민 전반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충격기병 전술을 발전시킨 마케도니아의 헤타이로이가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는 점이다. 우측의 사르마티아 기병 그림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새겨진 모습과 타키투스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려진 것으로, 스텝 지대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카타프락토이 형태를 보여 준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멸망 이후 그 영토 대부분을 승계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애초 헬레니즘 계열 왕조로써 팔랑크스와 마갑 없는 충격기병이라는 마케도니아식 군대를 고수했지만, 점차 군대가 중장화되는 과정에서 점차 마갑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 이후에는 특히 박트리아의 것을 모방한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하였다. 심지어 말뿐만 아니라 전투용 코끼리까지 갑옷을 입혔을 정도였다. 그 결과 BCE 200년 파니온 전투에서 명장 스코파스가 이끄는 라이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병들을 압도하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그네시아 전투의 참패로 빠르게 몰락한 이후에는 북방 유목민들 중 하나인 파르티아가 이란을 장악했으며, 그들의 주력 역시 카타프락토이였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폰토스, 페르가몬, 팔미라, 나바테아 등 북방 유목민들과 별 관련이 없는 동방의 중소 세력들도 모두 카타프락토이를 채용하였다.
그 후 카타프락토이가 전쟁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부터다.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와 벌인 티그라노케르타 전투,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헤 전투에서 카타프락토이를 상대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대승을 거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참패했다. 이후 로마와 파르티아가 양강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양자의 전쟁은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이를 주력으로 한 파르티아 군대가 로마군의 견고한 군단병 전열을 뚫느냐 못 뚫느냐 하는 양상이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타프락토이를 로마군에게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만한 사치스러운 병종으로 묘사했지만, 로마군도 적극적으로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하려 했던 현실과 카타프락토이를 막기 위해 로마군이 필사적으로 방어진을 짜고 측면 돌파를 막으려고 노력했던 것 또한 제대로 서술하지 않고 무시한 평가로 보인다. 각자 시대는 다르지만, 플루타르코스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파르티아/페르시아 중장기병의 돌격은 창으로 로마 병사 두 명을 꿰뚫어 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묘사했다. CE 3세기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사산 왕조 페르시아 역시 카타프락토이를 군의 주력으로 유지했다. 특히 유목민 출신 지배층이 세운 파르티아와 달리 파르스를 거점 삼아 건국된 사산 왕조는 경무장 궁기병은 주변의 유목민들을 끌어들여 충당했으며, 매우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페르시아 귀족들로 구성된 중장기병(Savaran)에 더욱 치중하였다. 우측의 사산 왕조 기병 그림은 타키 보스탄(Taq-e Bostan)의 암벽 부조를 참고하여 그린 것이다.
3세기 이후 로마군 역시 군대 내에서도 카타프락토이의 비중을 급격하게 늘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군단병들을 이용한 중장보병 위주의 전술과 선방어 전략으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야만족의 공세를 감당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군이 점차 국경에서 수비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정예한 기동군이 적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교리를 전환하면서 주력 부대도 기병으로 바뀌었고, 이 때 카타프락토이의 비중도 높아졌다. 실제 고대 로마 후기의 근위병대 중에서는 마갑을 입힌 기병이 25%가량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은 말의 전체를 가리는 마갑을 입힌 기병을 클리바나리(Clibanarii), 말의 머리와 앞부분만 가리거나 아예 마갑이 없는 중장기병은 카타프락타리(Cataphractarii)라고 불렀으나 아주 엄격하게 구별한 개념은 아니어서 니키포로스 2세가 직접 집필한 'Militaria Praecepta' 같은 동로마 서적에서도 그냥 카타프락토이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2.2. 중세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가 나란히 아랍 이슬람 세력의 흥기로 몰락하면서 이후 카타프락토이의 활용은 크게 줄어들었다. 항상 카타프락토이를 주력으로 유지하던 페르시아는 아랍 제국에게 멸망하면서 완전히 아랍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는데, 아랍 군대는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거점으로 한 정주민들이 국가 건국의 주축이라 중장보병이 발달했고 기병은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부족들이 담당하는지라 경기병의 뛰어난 기동력을 기본으로 했기에 유럽과 페르시아처럼 마갑을 갖춘 중장기병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3][4]에 동로마 역시 시리아와 이집트 등의 알토란 같은 땅을 전부 이슬람에게 내줘서 더이상 강력한 중장기병을 양성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동로마와 이슬람 세력간의 싸움은 타우로스 산맥을 경계로 한 유격전 및 약탈전 양상으로 변했으므로 회전에서나 유용한 중장기병의 필요성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레온 6세의 전술서인 탁티카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 기병의 1, 2열 부대는 마갑을 전면에 입히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를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300여 년 전의 병법서인 스트라테기콘을 그대로 따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적어도 회화 자료에서는 마갑을 입힌 기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카타프락토이가 다시 동로마 군대에 등장한 것은 10세기 하딧 전투인데, 군인 출신으로서 중장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황제 니키포로스 2세는 이 중무장한 기병대를 클리바노포로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부대로 끌어모았다.[5] 클리바노포로이의 재등장 배경으로는 동로마 제국이 서서히 회복기에 들어가면서 공세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늘어났고, 이때 적의 기병을 압도하고 보병 대열을 돌파할 수 있는 기병의 필요성과 더불어 제국의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클리바노포로이 부대 편성은 일반 기병 4명이 돈을 모아 한 명의 중장기병을 만들어 교대로 복무했으리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주로 사다리꼴 대열을 짜고 창보다는 검과 철퇴를 들고 적진에 돌진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한 걸 보면 돌진 - 충돌보다는 백병전 비중이 더 높은 부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바노포로이 부대가 동로마 제국에서 얼마나 더 활용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바실리오스 2세 치하에서 니키포로스 우라노스가 이끄는 정예 중기병대를 '카타프락토이'로 묘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마갑을 입히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따라 마갑을 입히지 않은 카타프락토이가 클리바노포로스를 대체했다는 설, 별개의 부대라는 설, 같은 부대이지만 임무에 따라 마갑을 벗겼을 것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지만, 어쨌건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는 이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아예 없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서아시아에서도 압바스 왕조 이후 점차 아랍인들의 정치/군사적 위상이 추락하고, 그 공백을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 특히 고도로 훈련된 직업군인 집단인 굴람과 맘루크가 메꾸기 시작하면서 마갑을 입한 중장기병이 다시 주력 병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6] 상술했다시피 페르시아는 중장기병의 본고장이고, 튀르크인들 역시 유목민 출신으로써 항상 기병을 주력으로 활용해 왔다. 그 결과 셀주크 제국 이후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가 서아시아 일대를 주도하게 되면서 다수의 경무장한 궁기병과 소수의 중무장한 엘리트 기병의 조합이 다시 전장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몽골 제국 군대, 그리고 튀르크-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 칸국 이나 티무르 제국 같은 몽골의 계승국가들 역시 마갑을 갖춘 중장 돌격기병을 적극 활용하였다. 15세기 페르시아의 화가 카말 웃 딘 베흐자드가 그린 티무르 군대와 이집트 맘루크 군대의 전투에 당대 튀르크-몽골 양식의 중장기병들이 잘 묘사돼 있다.
냉병기의 시대에서 화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던 초창기 오스만 제국 역시 근위대인 카프쿨루 시파히 기병대에게 마갑을 입혔다. 오스만 제국의 마갑 유물(read more 클릭)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서쪽에 있는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 일대의 무슬림 세력들은 페르시아나 튀르크 계통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은 덕인지 맘루크 왕조 이전까지는 장식용 이외에는 실전에서 마갑을 많이 쓰지 않은 듯하다. 왜냐면 십자군 전쟁기의 자료 중에서 당시 레반트의 이슬람 군대에게서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 관련 기록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장기병이 주력인 십자군에게 근접전에서 패하는경우가 많다보니 이슬람 기병들은 십자군 기병과의 근접전을 기피할 정도가 되었다.[7]
인도에서도 중장기병이 운용되었다. 그림은 무굴 제국의 중장기병들이다.
유럽의 기사들 역시 처음에는 마갑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13~14세기 이후 갑옷과 전술의 발달, 경제적 성장 등의 요인 때문에 점차 마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말에 직물제 외투를 장비했다가 갑옷의 발달에 따라 중기에는 사슬 갑옷, 후기에는 판금 갑옷으로 무장하게 되면서 근세 초기까지 사용된다. 직물이건 판금이든 주로 찰갑으로 마갑을 만들었던 동로마나 서아시아의 중장기병들과는 외형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대개 동로마의 클리바노포로이 이후로 마갑을 입은 중장기병들은 굳이 카타프락토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 시기(CE 10세기경)를 전후로 등자가 완전히 정착되고, 유럽 기사들을 중심으로 카우치드 랜스 방식이 도입되어 중장기병 전투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활용" 부분에 나온다. 유럽과 서아시아 모두 마갑의 사용은 14~15세기에 절정을 이뤘다가, 16세기 이후 총기의 발달로 인해 기병의 방호력보다 기동성이 중요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보기 드문 경우지만 16세기 중엽 잉글랜드 튜더 왕조 무렵에는 권총과 방패를 함께 지닌 중장기병이 존재했다. 다만 말이 짊어져야 하는 갑옷의 무게를 감안해서인지, 말에 씌우는 마갑은 대폭 간편화한 차림이었다#.
베트남의 쩐 왕조에서도 동남아시아 국가 중 드물게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다.# 중국, 한국, 일본과 함께 유교 문화권으로 분류될 정도로[8] 동남아지만 동북아권과 유사한 문화를 보였기에 동북아 국가들의 영향을 받은 덕으로 추정된다. 특히 베트남은 후한 시기 교주 지역으로 불렸는데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사섭이 동오에 말을 공물로 보냈을 정도로 좋은 말이 나오는 지역이기도 했다.
2.3. 동아시아
여당전쟁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 좌측의 당 중기병/당 보병을 우측의 고구려 중기병/고구려 경기병이 협공하고 있는 모습이다. |
고대에 로마와 페르시아 다음으로 중장기병이 발달한 지역이라면 동북아시아 일대를 들 수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해서 고대부터 문명이 발달해 왔고, 북방, 서방의 기마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부대껴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동아시아에서도 마갑을 갖춘 기병들은 카타프락토이의 범주에 들어가며, 그 형태와 활용법 역시 거의 비슷하다. 특히 등자의 보급이 훨씬 빨랐던 고대 동양에서 중장기병의 충격전술은 동시대 서양에 비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4세기 초 흉노 선우의 친위 중장기병을 묘사하면서 마갑을 입힌 기병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위의 카타프락토이가 전래되었다는 설, 동아시아에서 자체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 전자가 좀 더 유력한 듯하나, 이미 중국에서도 전차를 끄는 말에게 마갑을 입힌 선례가 있고 하니 반드시 서방에서 전래되었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고구려 통구 12호분 벽화에 그려진 개마무사 |
고구려의 개마무사 상상도 |
회화 자료로만 따지면 안악 3호분에서 등장하는 고구려 중장기병, 흔히 일명 개마무사라고 불리는 것이 완벽한 형태의 카타프락토이로는 최초이기는 하나, 얼마 안 되어 중국 곳곳에서도 관련 기록이 보이므로 고구려가 특별히 카타프락토이의 형태를 더 빨리 갖추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중장기병의 활용은 5호 16국시대부터[9] 수나라 때까지 전장을 지배했으나, 예산 부족과 경기병 및 이민족 기병에 의지하는 비율을 늘린 당나라 이후부터는 쇠퇴했다가[10][11] 요나라와 금나라가 발흥하면서 부터 다시 늘어났다. 요나라에서는 철요군(鐵鷂軍) 혹은 철요자(鐵鷂子)라 하여, 병사와 말이 모두 철갑옷을 입고 있는 중장기병이 운용되었다. 이 철요자는 중무장을 하고 있어서 칼로 찌르거나 찍어도 칼날이 갑옷에 들어가지 않으며, 병사가 말 위에 끈으로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전투 중에 전사해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링크 철요자는 요나라 뿐만 아니라 서하에서도 운용되었다.[12]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해 송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활약했다고 알려져있다. 사실이라면 북송군이 석궁과 신비궁 등 기계식 노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중기병의 방어력을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나 연환돌격은 후대의 학자들이 중장보병인 철부도를 괴자마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거나 쇠사슬로 연결한 듯한 편제와 협동능력이란 뜻일 수도 있다. 실제론 후술되듯이 말을 쇠사슬로 묶는 것은 위험하고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
금나라 중장기병을 재현한 12인치 피규어 |
한국사에서는 위 그림에도 나오는 '개마무사'로 유명한 고구려 중장기병들이 가장 유명하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에 대해서는 개마무사 문서로. 그러나 이런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 활용은 한국사에서 고구려만 했던 것은 아니고 백제, 신라, 가야 등 한국사 다른 국가들도 모두 사용한 기록이 있다. 당의 대두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전체적인 트렌드가 개마무사였기 때문이다.
가야의 중장기병을 묘사한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대한민국의 국보 제275호. 김해시 출토. |
경주 황오동 출토 신라마갑 |
신라의 중장기병 |
삼국시대는 한국 역사에서의 중장기병의 전성 시대였고 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 가야 할 것 없이 마갑 유물이 많으며 이는 유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2009년 기준으로 동북아에서의 마갑유물은 21점인데 그중 16점이 우리나라에서 출토되었는데 완전한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말갑옷 전체가 완전히 출토된 유적 사례는 경남 함안군 마갑총에서 출토된 온전한 마갑, 그리고 경주 황오동에서 발견된 신라 중장기병 갑옷 풀세트 이렇게 2건이 유이하다. 이는 동북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드문 출토 사례로 그만큼 당시 삼국은 중장기병을 적극적으로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통일신라 이후로는 중장기병이 별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나당전쟁 당시에 신라는 장창당 부대를 신설하고 쇠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보병 전술로서 당나라의 기병에 대응했다. 이후 나당전쟁이 당나라의 퇴각으로 끝나고 주변국과 국교를 정립해 평화를 되찾아 신라가 외국과 대규모 전면전을 할 일이 거의 없어지면서 비용이 많이 드는 중장기병은 더더욱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사장되던 중장기병이 다시금 빛을 본 건 수백 년 후인 후삼국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통일신라 체제에서 백제계 호족들과 고구려계 호족들이 반기를 든 결과 신라는 다시금 경상도 쪽으로 밀려났고 고구려의 자리에 고려가, 백제의 자리에 후백제가 세워져 기존 통일신라의 국토가 다시금 셋으로 쪼개지면서 대규모 전면전을 할 일이 늘어났기 때문에 중갑기병의 수요 역시 늘어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견훤이 대규모 중장기병 부대를 운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13] 이들 중기병은 후삼국을 거쳐 고려 시대에도 계속 운용되었는데 한국사에 몇 안 되는 대규모 회전인 귀주대첩에서 고려 중기병들이 궁기병 위주의 거란 군대의 후방을 쳐서 대승을 거둔 예가 있다. 당시 고려 기병들이 마갑을 입은 중장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거란의 중장기병을 묘사하는 벽화에서 마갑의 존재가 확인되는 만큼, 그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기술을 교류했던 고려의 기병도 마갑을 입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고려 기병도 마갑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에서도 예전에 비해 중기병의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비중은 크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료가 많이 남아 있는 덕에 마갑을 쓰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의장용 마갑을 입은 일본 사무라이의 모형.(출처) |
일본도 길지는 않지만 마갑을 사용하던 시대가 있었다. 일본은 봉건제 국가라는 특성상 말을 탈 수 있는 신분이 엄격히 정해져 있었는데, 귀족의 시중역할을 하던 무사계급인 사무라이가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은 귀족에 의해 말을 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주된 업무는 오늘날의 장교처럼 영주 휘하 병졸들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무라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기병 같은 일반 병과도 아니었고 부대로 운용할 만큼 수가 많지도 않았다.[14]
이런 사회적 통념 때문에 실제로 사무라이의 갑옷과 마갑은 의장용이나 과시의 목적이 더 강했다. 가마쿠라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14세기 일본 남북조 시대 등 대체로 소규모 전투만이 진행되던 시대에는 이런 중무장 마갑을 입힌 사무라이들이 꽤나 활약을 했었다. 이 시대와 같은 무렵인 고려 말에 쳐들어온 왜구들의 경우는 아기발도의 사례처럼 그들와 접촉한 고려인들에 의해 철기 부대가 운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1380년 고려군의 젊은 장수인 배검이 왜구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왜구들은 배검을 철기(鐵騎)로 호송하였다.[15] 또한 1370년에 나온 일본의 문헌인 태평기에 보면, "시오즈구로라는 5척 3촌 되는 말에 쇠사슬로 된 갑옷을 입히고..."라는 구절이 나온다.링크
이후 총포의 발달, 대규모 전투 등으로 전쟁양상이 바뀌는 전국시대가 되자 기마 사무라이의 역할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아예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말기에는 말을 타고 싸울 줄 아는 사무라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선조 실록 93권 (1597년) 10월 20일,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군의 시종노릇을 하던 '김응려'란 사람이 탈출해 말하기를, "칼을 쓰는 것은 그들의 장기이지만 말을 타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린 후에야 싸움을 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3. 운용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로마군이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와 교전할 때에는 말갑옷 사이로 드러난 말의 배 아래부분과 말의 다리 부분을 노려 공격해서 승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 1,000명과 카이사르가 애지중지하던 1,000명의 갈리아 귀족 중기병이 포함된 3000명의 로마군 기병이 격돌한 카르헤 전투에서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는 전멸했다. 이들이 얼마나 결사적으로 싸웠는가 하면, 도무지 갑옷을 뚫을 틈이 안보여서 일부 갈리아 중기병들은 말에서 떨어져도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말의 배 밑으로 기어들어가 갑옷이 없는 말의 배를 창으로 찌르거나 말에 매달려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장창을 피한 다음 반격하는 등 장렬하게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전멸당했다.이처럼 상반된 결과가 나온 것은 두 전투의 상황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의 경우 강둑을 끼고 있던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를 상대로 로마군이 일부 병력을 우회시키는 데 성공하여 포위망을 이뤘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는 아군 병력으로부터 고립당한채 좁은 곳에 갇혀 중장보병들과 백병전을 치르게 되어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반면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는 탁 트인 개활지에서 다수의 궁기병들이 화살을 쏟아부어 적진을 교란시키는 가운데 적진의 약점을 찾아 돌격력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싸울수 있었다. 게다가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은 용맹하고 기동성이 뛰어나긴 했지만 카타프락토이와 비교하면 기병만 투구와 사슬갑옷을 갖추고 있어서 무장면에서 딸렸다. 거기에다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기병은 후방에서 궁기병들의 지원사격까지 받고 있었으며 처음부터 로마 기병대를 유인했다가 포위해서 기습한거 였다. 게다가 갈리아 귀족 중기병들도 100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0명은 서남아 출신 경기병이라 그 상황에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 이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와 사르마티아의 중장기병 양식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이후 사산 왕조와 로마 제국의 중장기병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등자 없이 충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큰 창을 양손으로 잡고 돌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갑옷이나 투구의 형태는 다음 유물들을 참고할 것. 두라-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파르티아 기병 그림, 사자와 싸우는 파르티아 기병 부조, 사산 왕조 시대의 은제 접시, 사산 왕조 시대의 암벽 부조
카타프락토이는 기본적으로 돌격기병이므로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돌격이다. 돌격 시에는 보통 창을 양손으로 잡고 돌격했는데, 그나마도 돌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창은 길이가 최소 4미터는 넘는 굵고 무거운 것을 썼다. 발을 디디고 말 위에서 단단히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등자, 한쪽 겨드랑이에 랜스를 끼우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잡거나 방패를 들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방식 등을 갖춘 중세 중기병들의 돌격에 비하면 불안정한 동시에 훈련하기는 더 어려운 방식이었다. 따라서 양성하기 어려운 충격기병들을 더 잘 보호하고, 질량과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강화시켜 돌격에 이어지는 백병전에서 적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발전한 결과물이 카타프락토이였다.
중세 기병들은 일단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한 번에 적진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대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 돌격을 재개하는 식으로 여러 번 돌격하여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16], 카타프락토이는 매우 중무장하여 이런 기동이 쉽지 않았고, 양성하기 어려워 숫자가 적었으므로 한 차례의 돌격과 이어지는 백병전으로 적진을 무너뜨려 승부를 보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물론 다른 병과의 지원 없이 카타프락토이만 가지고 돌격을 했다가는 상술된 아르메니아 기병들과 비슷한 꼴이 나기 십상이니 신중한 활용이 필요했다. 고구려 중장기병들이 스파이크 덧신을 신은 것도 돌격 후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적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쨌든 당대 전장에서는 압도적인 돌격력과 방어력을 가진 특수한 병종으로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카르헤 전투의 파르티아처럼 다수의 궁기병으로 스웜 전술을 펼쳐 적을 괴롭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카타프락토이를 돌격시켜 무너뜨리는 전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 외에도 경무장한 궁기병들에 대항해 중장갑을 바탕으로 사격전[17]에서 우위를 점한 뒤 돌격하여 격퇴하거나,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로 활용하거나, 앞장서 돌격하여 적진에 틈을 만든 뒤 좀 더 경무장한 기병이나 보병의 연이은 공격으로 그 틈을 넓히는 방식으로 적진을 무너뜨리는 등 지휘관의 역량이나 전장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활용이 이루어졌다.
고구려 삼실총 벽화. 두 중장기병이 서로 싸우는 모습.
그러나 완전 철제 마갑은 그 무게 때문에 말의 기동성을 크게 해치고 말이 쉽게 지치게 하였기에, 서양의 경우 1500~1600년대에 가면 중요 부분만 철제로 만들고, 다른 부분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뒤 겉에 철을 덧대 중량을 줄이면서 방호력을 최대한 유지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동양의 경우 이미 수나라 때 기록인 <수서>에 가죽마갑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관련 사이트) 당나라는 유목민족의 경기병 전술을 받아들이면서 예전의 무거운 전신마갑에서 옛날의 부분 마갑을 쓰거나 아예 마갑을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주변국들 역시 점차로 마갑의 사용빈도가 낮아진다. 물론 이 때 마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당나라의 뒤를 이은 북송과 비슷한 시기 주변 세력들도 여전히 마갑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장기병의 고질적인 단점인 낮은 기동력과 말의 체력 저하 때문에 마갑의 퇴보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거란의 기록에도 철제 마갑은 말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말만이 버텨낼 수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18] 몽골의 경우 철제마갑도 물론 있었지만 옻칠한 가죽제 마갑이 많이 쓰였다.
몽골 기병을 묘사한 삽화, 그림에서 말들이 입은 마갑들은 가죽제라고 한다.
금나라 중장기병이 3인 1조가 되어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이유는 한 명이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을 못치게 하겠다는 전의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느려터진 중장기병이 투사무기에 엄청나게 얻어맞아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할 거면 애초에 전차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물론 저 정도로 중무장시킨 말로 전차를 끌게 만들면 더 끔찍한 속도가 나왔을 것이다. 지형 문제도 있고 속도로도 전차 특유의 충격력을 잡아먹었을 테고, 백병전에서도 위력을 장담할 수 없다. 여진족이 기마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이기도 하고.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말을 쇠사슬로 연결했을 경우 3마리 중 1마리가 전사하면 다른 2마리도 죽은 말의 시체 때문에 행동불능에 빠진다는 점을 들어, "쇠사슬로 연결했다"라는 문구는 실제로 쇠사슬로 연결한 게 아니라 단지 말 세 마리가 한 조를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는 점을 비유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청나라의 건륭제 역시 금나라 기병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고 송나라 측에서 착각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1. 말과 말의 힘은 당연히 다를 것인데 같이 묶어놓으면 힘 센 말이 힘 약한 말의 방해를 받으니 비효율적이고 2. 관련 기록은 송나라 측의 사료에서만 보일 뿐, 금나라 측의 사료에서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4. 창작 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카타프락토이/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그리스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당대의 정확한 발음은 현대 그리스어와 마찬가지로 카타프락티(katafrakti)가 된다.[2] Cyrus the Younger. 다리우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의 왕자였으나, 친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쿠낙사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고용한 1만 명의 그리스 용병대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는데, 그가 고용주를 따라 페르시아의 심장부까지 갔다가 패전한 뒤 그리스로 돌아오는 여정을 쓴 것이 아나바시스다.[3] 비록 카타프락토이처럼 중무장만 하지 않았지 아랍 경기병의 주 역할도 망치 역할이었다. 오히려 망치의 역할로서는 기동성 면에서 더 우수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카타프락토이보다도 우수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활도 없는 경기병이니만큼 역으로 말한다면 기동력을 상실하거나 제대로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원거리 무기 샤워를 맞는 순간 방어력이 떨어지기에 우수수 갈려나갈수 밖에 없다는 말도 되고 실제로 이들 아랍 경기병은 정신을 추스른 동로마의 카타프락토이들과 궁병들에게 지속적으로 밀려났으며 십자군 전쟁 시기에 카타프락토이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중세 기사들과 서방의 주력 원거리무기인 쇠뇌병에게 추풍낙엽처럼 털려버렸다. 이후 중동 국가들은 기존 아랍 경기병의 한계를 깨닫고 중기병을 본격적으로 양성하거나 튀르크인들을 궁기병으로 적극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떠오르는 병종이 바로 맘루크이다.[4] 거기다 이시기 아랍이 천운도 타고난게 아랍의 원정 시기에 맞춰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가 서로의 국운을 건 캐삭빵을 떴던지라 국력도 깎여있었고 특히 사산 왕조는 이후 사산 공위기를 맞으며 정치적으로도 혼란한 상태였던지라 국력을 온전히 모으는 것이 불가능했다. 즉, 병종 차이보다는 정세가 아랍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 이슬람 제국의 정복 사업 성공의 가장 큰 이유였다. 아울러 아랍인들은 오랫동안 동로마와 페르시아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면서 두 나라의 내부 사정과 군대의 전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동로마와 페르시아라는 두 초강대국과 싸워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5] 니키포로스 황제는 "전쟁터에서 카타프락토스 6천 명이 있으면 더 이상 (걱정을) 할 일이 없다."라고 하면서 이들의 강력한 전투력을 칭송했다. 출처: 중세의 전쟁 378~1515/ 찰스 오만 저/ 안유정 역/홍용진 감수/ 필요한책[6] 아랍하면 경기병을 주로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의외로 이들의 주력은 중장보병이었다. 위에서 설명 했듯 아랍 제국의 기반은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무역으로 부를 쌓은 정주민들이었기 때문. 이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7] 심지어 십자군 전쟁 초기에는 고작 300명의 십자군 기사들이 무려 7천 명의 이슬람 군대를 전사시키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출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아침이슬/ 106~107쪽.[8] 물론 일본은 유교보단 신토나 불교의 영향력이 더 강하긴 했지만 중국이나 한반도 국가들로부터 유학 서적을 들여올 정도로 유교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9]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에서 운용했던 철기병들을 복원한 그림출처[10] 엄밀히 말하면 당나라는 초기엔 수나라에 비해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해 값비싼 중장기병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경기병을 채택한 것에 가깝다. 당나라 때에도 중장기병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엄연히 존재했다.출처1,출처2[11] 중장기병의 가치 자체는 몽골 제국, 멀게는 청나라까지도 쇠퇴하지 않았다.[12] 서하의 철요자는 갑옷이 두꺼워서 적의 공격에 잘 버텼으며, 병사들이 탄 말을 3~5마리씩 쇠갈고리로 단단히 묶었다. 철요자의 총 병력 수는 3천 명 정도로 서하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이들은 하루에 100리에서 1000리까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기동성이 뛰어났다. 서하 철요자의 명성은 서하의 적국인 송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땅 위에서는 당해내기 어렵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7쪽[13] 이를 반영해서인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정예부대를 두고 철기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당시 견훤의 정예 중장기병 부대는 갑사라고 불렸다. 견훤은 신라군 지휘관이란 신분을 이용해 백제 지역에 주둔중이던 신라 정규군 기병 부대인 거사물정을 흡수해 후백제군의 주력으로 삼았다.[14] 일본의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기마부대는 사실 연출을 위한 고증 오류에 가깝다. 일본은 에도 막부 말기인 1862년 서양의 삼병(三兵) 제도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기병부대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15] 출처: 고려사 권126, 열전 제39, 변안열전.[16] 다만 최근 들어서는 이런 돌격법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대세다. 즉 중세시대에 들어서도 카타프락토이의 전투방식은 계속 쓰였을 것이라는 것. 물론 이것도 전장 상황에 따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 일격에 무너뜨리고 돌파해서 와해시키는 것을 고대부터 근대까지 최상으로 치기는 했으나 여의치 않으면 찌르자마자 퇴각해서 전열을 가다듬기도 했다. 당장 카르헤 전투에서도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는 수적 열세를 감안해 깊숙히 돌격하지 않으면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17] 유목민들이나 페르시아처럼 기마궁술의 전통이 있는 이들의 경우 대다수의 중장기병들이 활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카타프락토이가 활을 포기한 경우는 갑옷을 너무 빡빡하게 입어서 활을 땡길 수가 없을 정도로 중무장한 일부, 혹은 로마처럼 기마궁술의 전통이 아예 없는 경우였다. 대신 로마는 궁보병을 대폭 늘려 이에 대처했다.[18] 출처 -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수막새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