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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0:26:57

중세/정치사/중기/중부유럽 일대


1. 개요2. 독일(신성 로마 제국)
2.1. 11세기2.2. 12세기2.3. 13세기
3. 헝가리
3.1. 11세기3.2. 12세기3.3. 13세기
4.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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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독일(신성 로마 제국)

2.1. 11세기

밀레니엄이 될때까지 오토 3세는 로마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헝가리 대공국의 대공 이슈트반이 로마 교회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찬성하여 헝가리하고도 우호관계를 맺는 등 다양한 활동에 매진했으나 1001년 로마 인근의 경쟁 도시 티볼리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평화협상이 시도되긴 했지만 오토는 로마 바깥으로 피신해야 했고, 북쪽의 도시 치비타 카스텔라나에 머물면서 섭정으로 독일에 남겨둔 육촌 형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1002년 1월 24일 갑작스런 고열에 시달리다 서거했다.

한편 오토 3세가 죽었다는 소식에 이브레아 백작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외손이며 베렝가리오 2세의 조카 손자인 아르두이노 디브레아가 2월 15일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했다. 나중에는 밀라노 주교 아르눌프는 그를 황제라 선언하였고 롬바르디아의 귀족들 또한 그를 카이사르로 불렸다.

그의 뒤는 독일에 남아 섭정으로 독일 지역을 통치하던 육촌 형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가 오토 가문의 종주가 되었다. 오토 3세의 운구 행렬이 알프스를 넘어 바이에른에 도착했을 때 하인리히 3세는 독일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선 제국회의에서 귀족들의 표를 얻고, 또한 권위를 증명하는 보물이 필요했다. 하인리히 3세는 행렬에 속한 쾰른 대주교 헤리베르트에게 오토 3세의 보물 중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알려진 성창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귀족들에게 자신을 선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

방법을 바꾼 하인리히 2세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를 회유해 독일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왕가의 보물인 성창과 다른 징표들도 손에 넣었다. 이어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에게 통치권 보장을 약속하고 지지를 얻어냈다. 빌리기스 대주교에게 자신의 부인 쿠니군데를 독일 왕비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치러달라고 부탁해 성사시켰다.

이런 식으로 독일 전역을 다니며 귀족들을 포섭한 하인리히 2세는 오토 대제의 손녀와 결혼해 적통임을 주장하는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나머지 경쟁자들도 물리쳐 마침내 독일 국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인리히 2세는 육촌 동생인 오토 3세와 달리 로마 제국 복구보다는 프랑크 왕국 복구가 현실적이라고 여겼고, 이를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했으며 선교사들이 동유럽의 슬라브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했다.

또한 귀족 세력을 억눌렸는데, 그의 전임자 오토 2세와 오토 3세 때처럼, 제국의 다양한 독일 공작들은 하인리히 2세로부터 점점 더 독립적이 되면서.지역별로 독자적인 정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했다.알프스 산맥 남쪽 이탈리아에서도 다양한 지역 영주들이 독립했다. 점점 제국의 영지들은 제국의 일부분이 아닌 각각의 공작 가문의 개인 소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후들에 대한 하인리히 2세의 정책은 황실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작들 내의 이러한 가족 구조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하인리히 2세는 다른 전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공작들에 대한 그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연계에 의존했다. 하지만, 오토 1세와 오토 2세 치하와는 달리, 다양한 독일 공작들은 더 이상 하인리히 2세와 긴밀한 혈연 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프랑켄 공국과 작센 공국이 제국의 핵심 지지층을 형성한 반면, 슈바벤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은 점점 더 반항적이 되었다.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하인리히 2세는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든 공작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것은 세속적인 귀족들과의 급격한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은 하인리히 2세가 제국의 통치에서 성직자들이 누렸던 지위를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하인리히 2세가 통치 첫 10년 동안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든 수많은 귀족 반란에서 살아남은 것은 성직자들의 지지를 통해서였다. 심지어 그의 처남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5세와 모젤 백작 프리드리히와 같은 그의 친척들도 반란을 일으켰다.그 결과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의 내부 권력 구조를 체계적으로 축소했다.

한편 독일왕으로 선출된 직후 그는 보헤미아의 자칭타칭 공작이었던 블라디보이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내리게 되었고, 이로써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 공작이 다스리는 정식 공국으로서 제국에 편입되었는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블라디보이는 프르셰미슬 가문 소속이 아니라 계승 분쟁 중에 폴란드 왕국의 지원을 받아 보헤미아의 지배자가 된 피아스트 왕조 소속으로 추정되는 폴란드 계통의 인물로 추후 폴란드 영지와의 분쟁에서 아군으로 포섭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다.

이후 선거 당시 자신의 정적을 지원한 폴란드 영지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아르두이노의 반대 세력의 요청을 받았지만 이때까지 폴란드 영지를 통치하던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의 산발적 분쟁에 집중해야 했기에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쓰지 못했다. 1003년 볼레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 모라바, 슬로바키아를 복속시키면서 하인리히 2세는 동쪽의 일에 더 집중해야 했다. 그는 당시 현재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남동쪽과 오늘날의 브란덴부르크 북쪽에 거주했던 슬라브계 루티젠족과 군사동맹을 맺어 볼레스와프 1세와 전쟁을 이어나갔고, 이후 볼레스와프 1세를 패배시키자 곧 이탈리아에 간섭,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공하였다.

아르두이노는 하인리히 2세가 보낸 독일 군대를 패퇴시켰고, 하인리히 2세의 명을 받고 온 케른텐의 오토 1세는 소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직접 출병했고, 아르두이노는 아디제 계곡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가로막았지만 하인리히는 바르수가나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하인리히 2세의 출현에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고, 아르두이노는 이브레아로 퇴각해야 했다.

1004년 초, 독일 왕 하인리히 2세는 아르두이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신이 정당한 이탈리아의 왕이라 주장했다. 1004년 3월 하인리히 2세는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북부로 와 트렌토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과 그 후계자인 독일 왕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반발과 불만은 심했고, 하인리히 2세는 아르두이노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체포, 처단하였다. 그러나 아르두이노는 이탈리아의 지형을 이용해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계속 전쟁을 벌였다.

치열한 싸움으로 독일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황폐화 시키고 베로나를 점령, 하인리히 2세는 일단 1004년 5월 15일 파비아에서 밀라노 대주교 아르눌프 2세에게 이탈리아의 왕관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교황 요한 18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받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독일 왕국의 통치를 거부한 파비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하인리히 2세에게 즉시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1004년 9월 아르두이노는 하인리히 2세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가 계속 저항하자 하인리히는 결국 아르두이노를 물리치르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폴란드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로 돌아온 이후 볼레스와프 1세의 플란드 영지의 이탈을 막기 위해 분주했으며 1005년까지 이어졌고, 하인리히 2세의 군대가 포츠난까지 진입하면서 결국 하인리히 2세에게 굴복하고 다시는 독일 왕국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포츠난 조약을 채결했다.

하지만 1007년 블레스와프는 다시 조약을 철회하고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블레스와프의 폴란드 군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후령까지 진군했으며 바우첸까지 손에 넣었다.1010년이 돼서야 하인리히 2세는 반격을 시작했으나 1012년 새로이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8세가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로 인한 위기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탈리아로 떠나야 계획이 생겼고, 볼레스와프 또한 키예프 루스와의 분쟁이 생기면서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하인리히 2세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할 때 북이탈리아 일대는 여전히 아르두이노가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에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내 아르두이노파 제후국들을 토벌, 복종 서약을 받아내고 독일로 되돌아갔다. 그해 말 그는 군사 충돌을 피하고 하인리히 2세에게 조건부 항복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하인리히 2세는 1014년 2월 알프스를 넘어 2월 14일 로마 가서 대관식을 치뤗는데 이에 대해 동로마 제국바실리우스 2세의.반발을 불려왔다. 그러나 2월 21일과 22일 로마에서는 아르두이노 지지 귀족 및 반 독일 세력이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고, 하인리히는 그해 4월부터 5월 한달 간 로마에 체류하였다.

1015년 아르두이노가 프루투아리아의 수도원에서 사망하면서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가 다시 평화조약을 깨면서 하인리히 2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아들인 미에슈코와 함께 독일 동부를 유린했지만 보헤미아 공작령을 이끌던 올드르지흐의 분투 등으로 인해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결국 폴란드가 우세한 상태에서 바우첸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이 한참일 때 하인리히 2세는 서쪽의 부르군트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하인리히 2세의 모친 지젤은 부르군트 왕 루돌프 3세의 동생이엇는데 그에게 딸 세 명이 있었고, 전부 결혼은 해 자식을 남겼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테였기에 하인리히 2세는 외숙에게 자신의 계승권을 인정해달라는 주장했다.

이미 부르군트 왕국의 국력으로 독일 왕국을 이기기 힘든 상태였기에 루돌프 3세는 조카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사루 조카 하인리히 2세, 혹은 그의 후계자에게 부르군트의 왕위를 넘기겠다는 조약을 채결하고 우선적으로 바젤을 양도했다.

1020년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상술한 하인리히 2세의 황제 즉위에 바실리우스 2세가 반발한 것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바리의 롬바르디아계 귀족인 멜루스가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해 동로마 제국에게 반란을 일으키다가 반란이 진압당하자 교황령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하인리히 2세로부터 아폴리아 공작을 받지만 며칠 만에 죽었고, 이에 하인리히 2세는 마인츠와 뷔르츠부르크의 주교들과 회의 끝에 이탈리아 내륙으로 다시 확장하는 동로마 제국을 저지하기로 했다.

1022년 하인리히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부 이탈리아로 향했다.그는 카푸아 공국을 정복할 목적으로 쾰른 대주교 필그림에게 티레니아 해를 따라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전진시킬 것을 명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포포의 지휘 아래 더 작은 세 번째 군대는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하여 하인리히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트로이아 요새를 포위했다. 필그림 총대주교는 카푸아의 판둘프 4세를 생포하고 카푸아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지만, 하인리히 2세의 세 군대는 트로이아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동로마 제국군은 장기전을 강용햇고, 하인리히 2세는 역병으로 인해 군대에 큰 손실을 입은 채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하인리히 2세는 카푸아 공작을 처형할 뻔했지만 필그림의 간청으로 살려두는 대신에 하인리히 2세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서 독일로 보내고 판둘프 5세를 카푸아의 공작로 임명했다.이 원정은 결국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24년 부활절 기간에 로마에 있었던 하인리히 2세는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밤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몸져누웠다.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북쪽의 괴팅엔에 마련된 왕궁에서후사도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에 오토 왕가가 단정되자 독일 내의 제후들을 다시 독일 왕을 선출해야 했다.

오토 가문의 여계쪽 친척들이 있긴 했지만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회의에 어느 누구도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 오토 왕조와 대립 노선을 걷던 콘라트 2세가 귀족 세력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경쟁자는 오히려 같은 살리 가문에서 나왔다. 이름 또한 동일한 사촌 동생 콘라트였다.

그러나 어린 콘라트는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국왕으로 선출된다 하더라도 후사가 없으면 다시 한 번 권력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에 의장을 맡은 마인츠 대주교 아리보를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은 이미 아들을 두었으며 성숙한 인품을 지닌 콘라트 2세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서른넷의 젊은 국왕이 선출되었다.

국왕이 되긴 했지만 선거에서 패배한 사촌 동생뿐만 아니라 오토 왕조의 종말을 안타까워하는 각지 귀족들의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지어 1025년 의붓아들인 슈바벤 공작인 에른스트 2세가 반기를 들었고, 폴란드에서 볼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콘라트 2세는 정치계와 종교계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이때 볼레스와프 1세가 죽고 미에슈코 2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추방시키자 둘 중 한 명이었던 오토의 독일 망명을 받아들였다. 1025년 6월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가 하인리히 2세 죽음 후 북이탈리아 귀족들 사이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치적 혼란이 생기자 이를 종식시키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콘라트 2세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026년 2월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인 부르노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마인츠 대주교 아라보와 쾰른 대주교 필그림과 함께 군대를 몰고 간 콘라트 2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의붓아들을 굴복시킨 후 강제로 원정에 참여시켰고, 계속 이탈리아로 진군해 3월에 밀라노에 들어온 후 이탈리아 국왕 선출 회의에서도 아리보 대주교를 의장으로 앉혔고 계획대로 왕관을 얻어냈다. 또한 1028년에는 장남 하인리히 3세를 독일의 공동국왕으로 앉혀서 계승 체계를 확고히 했다.

두 번의 국왕 선출로 빚을 진 콘라트 2세는 아리보 대주교에게 보답 차원에서 마인츠 인근의 슈파이어에 당시로서는 유럽 최대 수준의 대성당 건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리보 대주교가 국왕 부부의 결혼이 가문 계승법에 위반된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부인 기젤라는 왕비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콘라트 2세는 아리보 대신에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왕실의 종교 수장으로 내세웠고, 가문 계승법을 인정받아 왕비 즉위식도 순조롭게 치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토 왕조에 이어 살리 왕조 때도 종교계 인물들이 교황의 지시보다는 국왕의 경제적 지원에 허리를 굽혔다. 이로써 훗날 ‘카노사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정치와 종교 간 서임권 투쟁의 불씨가 커졌다.

한편 슈바벤 공작령 내의 반란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카린시아 공작 콘라트와 알트도프 백작 벨프 2세가 슈바벤 지역의 반란을 주도했다. 섭정으로 임명한 부르노마저 반란군에게 패배하자 1026년 9월, 콘라트는 에른스트를 독일로 돌려보내 반란을 종식시키려했으나 에른스트는 다시 반란군에 가담했다. 반란군들은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독일 국왕 겸 이탈리아 국왕에 오른 콘라트 2세는 1027년 3월 26일 교황 요한 19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대관식은 7일 동안 계속되었고, 주변국의 군주들 직접 참여하거나 사절을 보냄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관할하에 놓인 지역은 더욱 늘어났다. 대관식을 마친 콘라트는 서둘러 슈바벤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법정을 열고 반란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에른스트는 신하들의 수와 충절을 믿고 평화 제의를 거절하고 슈바벤의 백작들에게 반란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백작들은 어니스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황제에게 반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고, 백작들의 지원을 받게 될 수 없자 1027년 9월 9일 반란의 수괴들이 콘래트에게 항복하여 반란을 종식시켰다. 콘래트는 에른스트의 공작위를 박탈 작센의 기비첸슈타인 성에 감금했다. 했지만 이후 황후 기셀라의 탄원에 그를 풀어주었지만 이름뿐인 공작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하인리히 2세가 먼저 죽자 부르고뉴 국왕 루돌프 3세는 자신의 왕국이 독일 왕국에 병합되는 사태를 피한 것에 대해 안도하게 되었고, 자신의 외손자들 중 한명을 후계자로 내정하려 했다. 하지만 콘라트 2세는 자신이 모계쪽으로 하인리히 2세의 인척이기에 부르고뉴에 대한 계승권 또한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는 이를 반박한데다가 루돌프와 가족관계가 두터웠던 블루아 백작 오도 2세도 승계를 주장했다. 콘라트 2세는 1027년 8월 바젤 근처에서 하인리히 2세의 황후인 룩셈부르크의 쿠니군드의 중재하에.루돌프 3세를 만나 분쟁을 해결했다. 콘라드 2세가 헨리 2세와 같은 조건으로 루돌프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대가로 루돌프는 그의 왕국에 대한 독립된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28년 보헤미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폴란드에 상실한 올디치는 상실된 영토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콘라트 2세 또한 폴란드를 다시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있길 원한데다가 슈바벤 반란에 개입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기에 이를 좌시할 수 없었기에 동방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1027년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국왕인 크누트에게 슐레스비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는 등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기에 콘라드 2세는 보헤미아 공국을 지원하면서 폴란드를 공격했다.

1029년 보헤미아 공국이 폴란드군을 동부 땅에서 몰아냈던 것에 비해 독일군은 바우첸을 공격했으나 루티치 부족의 약속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원정은 실패했고,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헝가리의 위협을 받고 콘라트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에슈코 2세는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다시 한번 작센을 침공했다.그러는 동안, 그의 남쪽 동맹은 바이에른을 공격했고 일시적으로 비엔나를 점령했다.

이에 콘라트 2세는 미에슈코 2세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폴란드 왕에 대항하는 또 다른 원정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1031년 보헤미아 공국이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이스트반 1세와 합의를 이룬 콘라트 2세의 계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에 올디치는 더 이상 콘라트 2세의 동방 원정에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헝가리와의 동맹은 폴란드에게 압박이 되었고, 무엇보다 각각 키예프 루스에 망명 중이었던 이복동생 베즈프림이 폴란드오 돌아와 추종자들을 규합해 반란까지 일으키자 미에슈코 2세는 동생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하다가 거부당하자 보헤미아에 명명을 요청하다가 그에게 앙금이 있던 오디치 공작에게 투옥되었다. 1032년 베즈프림이 추종자들에게 살해되면서 폴란드의 왕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으며 그 결과 폴란드는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영토 또한 분할되면서 다시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한편 9월에 루돌프 3세가 죽으면서 바젤에서의 조약대로 부르고뉴 왕국을 이어받은 아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해 오늘날의 스위스 서부와 프랑스 동남부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그는 오토 대제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획득했다. 부르고뉴는 완전한 제국 통치하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많은 자치권을 허용받았다. 콘라트는 즉위식 이후 아를 왕국의 내정에 않았지만 황제의 영향력과 존엄성을 제국의 이익으로 증대시켰다. 부르고뉴가 확보되면서 콘라드는 서부 알프스의 이탈리아 진출입로를 통제했고 외세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콘라트 2세는 원칙에 의거한 통치 체계를 구축했다. 독일 중부의 작센 지역에서 관습법을 성문화시켜 분란을 없앤 것과 더불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에 위치한 자치도시들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1036년 즈음,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는 지역 귀족들과 연합해 자치도시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분명한 원칙을 고수했던 콘라트 2세는 자치도시의 시민과 하급 기사들로 이루어진 발바소레 계층의 권리를 옹호했다. 하급 기사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의 내란 진압과 동유럽 원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리베르토와 귀족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까지 내려가 아리베르토를 체포한 후 ‘하급 기사들도 영지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확보했다.

1038년에야 돌아와 아들 헨리를 아를 왕국의 미래 통치자로 공표했으며 이후 살레르노의 가이마르 4세가 1024년 감옥에서 석방한 카푸아 공작 판돌로 4세와 카푸아에 대한 분쟁에서 콘라드에게 재판할 것을 요청하자 콘라트 2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4세 역시 같은 요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콘라드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와 아베사 지방으로 갔다. 그는 독일 출신의 리차르를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판두프에게 몬테 카시노에서 훔친 수도원 재산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돌프는 아내와 아들을 보내 평화를 요청하면서 금 300파운드(140㎏)와 자녀 2명을 인질로 내세웠다. 콘라트는 판두프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판두프가 자신의 외딴 성인 산타가타 데 고티에 숨고 인질들 또한 탈출했다. 콘라드는 카푸아를 포위하고 정복하여 가이마르에게 카푸아 공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는 또한 아베사를 노르만 모험가 레이놀프 드렝고트 휘하의 살레르노 군으로 인정했다.

1038년 독일로 되돌아오는 중 전염병을 만나 많은 병사가 죽는 중에도 콘라트 2세는 무사했지만 이듬해 병을 얻어 오늘날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지역에서 서거했다. 유해는 아직 건설 중이던 독일 슈파이어 대성당으로 이관되었다. 왕위는 아들 하인리히 3세가 이어받았다.

하인리히 3세는 즉위 첫해에 전국을 순방하며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반대파를 설득했다. 서부의 고지 로트링엔과 그 위의 저지 로트링엔을 순방한 후 작센과 튀링엔을 거쳐 남부의 바이에른과 슈바벤을 지나 독일 땅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경로를 완주했다.

이듬해, 그는 제국의 위협이 되는 해외 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 우선 동쪽의 보헤미아를 공격했지만 매복에 당하는 바람에 승리를 놓쳤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 군대를 재정비해 더 동쪽의 헝가리로 원정을 떠났고 이번에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이어진 몇 년간의 전투에서 그는 연달아 이겼다. 이로써 그는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를 복속시키고 독일의 경계선을 다뉴브강 너머로까지 확장시켰다. 이 경계선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될 때까지 1천 년간 유지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전쟁으로 포획한 수많은 포로에게 가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의 뜻에 따라 평화와 휴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국으로 하달해 포로들을 대가 없이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1043년 10월에 시행된 이 조치를 기려서 ‘대사면의 날’이라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경건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같은 해 11월, 하인리히 3세는 아키텐 공작 기욤 5세의 딸 아녜스를 만나 혼인했다. 이 결혼 덕분에 그는 프랑스 동부 아를 왕국과 프랑스 서부 아키텐 공작령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아들 하인리히 4세도 얻었다. 이후 그는 동부의 헝가리, 서부의 로트링엔, 남부의 이탈리아 등 각 변경지를 다니며 내란을 진압했다.

1046년, 하인리히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를 위해 로마로 향했다. 당시 로마에는 세 명의 교황이 있었다. 원래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9세는 성직자를 그만둘 계획이어서 교황직을 그레고리오 3세에게 넘겼고, 이에 반대한 실베스테르 3세가 진정한 교황을 자처했다. 교황청의 분열을 목격한 그는 로마 출신이 아닌 사람을 추대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민중에게 인기를 얻고 있던 밤베르크 주교 주이트거를 교황으로 지명해 클레멘스 2세로 탈바꿈시켰다. 클레멘스 2세는 즉위 다음 날인 1046년 성탄설에 하인리히 3세를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로마의 문제는 해결된 듯했으나 이듬해 10월 클레멘스 2세가 서거하는 바람에 새로운 교황이 필요했다. 하인리히 3세는 알자스 주교 브룬을 교황 레오 9세로 지목했으나, 그는 교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황제가 임명한 각 지역의 대주교보다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쟁을 벌이다 포로로 잡혔는데, 그는 풀려난 이듬해에 병을 얻어 서거했다.

이후 선출된 빅토리우스 9세는 하인리히 3세를 보필하며 안정된 노선을 걸었다. 그 덕분에 독일 각지와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황제의 편을 들어 교권을 안정시키고 귀족들의 참여를 독려해주었다.

하인리히 3세는 국내 각지와 변경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집권 내내 기나긴 여행을 반복해야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독일 중부의 고슬라에 왕궁을 지었으나 항상 머문 것은 아니었다. 1056년에도 그는 동북쪽의 슬라브족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병을 얻어 10월 5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을 하인리히 4세가 여섯 살 남짓에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 아녜스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어린 시절에 그는 쾰른 대주교 안노 2세에게 교육을 받았다.

하인리히 4세의 인생은 각지의 반란과 종교계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주된 원인은 어머니의 판단력 부족에서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바이에른, 슈바벤, 케른텐 등 왕권 기반을 이루던 지역의 권력을 귀족들에게 나누어준 것이 화근이었다. 자치권을 얻은 귀족들은 어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종교적으로는 아버지 때부터 조언자 역할을 해온 교황 빅토르 2세가 1057년 사망한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실수가 계속되었다. 로마 교황령측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제하고 선출 절차를 개정했다. 아녜스 황후는 뒤늦게 개입을 시작했지만 기존 황제들이 지원해온 개혁파가 아닌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개혁파들이 선출한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아닌, 반대편의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를 지지한 것이다. 이마저도 적극적이지 않아 개혁파 교황의 우세가 계속되었다.

우왕좌왕하던 황후의 행보는 마침내 반란을 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62년 쾰른 대주교 안노 2세가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하고 황후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아녜스 황후는 섭정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권력을 차지한 안노 2세는 개혁파 교황을 옹호했다. 이로써 로마와 독일 간의 알력이 해소된 듯했으나, 뒤이어 섭정을 시작한 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사제와 주교 임명 과정에서 부패를 저지르자 다시금 종교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1065년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혼란스러운 권력 쟁탈전에 휘둘리느라 그는 지식과 성품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렸다가 갑자기 번복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069년에는 베르타 왕비와 이혼을 발표했다가 귀족과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취소하기도 했다. 귀족들에게 나누어준 영지에 왕궁을 짓고 그 소유권을 관리들에게 넘겼다가 소요가 발생하는 바람에 다시 철회하는 등 내분을 자초했다.

1073년 밀라노 대주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알력은 계속되었다. 성직자들의 부패에 반대하는 개혁파 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허락을 받아 대주교를 새로 옹립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기를 들어 다른 대주교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시기 라인 강 일대에 코뮌 운동이 시작되었다.

1075년 교황은 “왕이라 해도 평신도에 불과하므로 대주교와 수도원장 등 로마 가톨릭의 주요 직책을 직접 임명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라며 ‘서임권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 순순히 처분을 받아들였던 하인리히 4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밀라노 대주교 임명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가 점잖게 경고하자 1076년 1월 1일 교황을 폐위시키기에 이르렀다.

화가 난 그레고리우스는 오히려 하인리히의 편에 선 주교들을 파문했고, 국왕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 서약까지 무효화했다. 주종관계에서 자유로워진 지역 귀족들은 새로운 국왕 선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인리히 4세는 이듬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논쟁을 결론 내기로 합의해놓고 곧바로 이탈리아로 비밀 원정을 떠났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등극을 지원했던 투스카니 여후작 마틸데는 전쟁이 닥칠 것이라 생각하고 교황을 카노사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오히려 사죄를 청했다. 그는 추운 겨울날 성문 앞에서 맨발로 3일을 기다린 끝에 허락을 받아 교황을 만났고, 땅바닥에 엎드려 십자가 자세를 취했다. 이것이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시간을 끈 것은 고압적인 태도로 괴롭히기 위해서였다기보다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는 것과 결별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이득을 가져다줄지 판단이 늦었던 이유로 보인다. 이때부터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은 국왕에게서 교황으로 옮겨졌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관계로 굳어졌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4세를 따르던 주교들에 대한 파문 조치는 철회되었지만, 귀족들은 약속을 깨고 몰래 교황과 접촉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결국 슈바벤 공작 루돌프가 1077년 대립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3년 동안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는 독일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1080년 그레고리우스는 루돌프의 손을 들어주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권의 강화를 우려한 귀족들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하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돌프가 사망하자, 기세가 높아진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직접 쳐들어갔다. 1084년까지 버티던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도피했고, 클레멘스가 단독 교황이 되었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4세는 3월 31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1087년 부인 베르타 황후가 서거하자, 그는 1089년 키에프 공국의 공주 유프락시아와 재혼했다. 유프락시아는 프락세디스 또는 아델하이트로도 불린다.

한편으로 정신을 바로 잡았는지 반란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재건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여 하급 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카노사 성의 주인 마틸데 여후작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1089년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 2세를 통해 바이에른 공작 벨프 5세와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중에는 1087년 독일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은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 2세도 있었다.

콘라트 2세는 1093년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기반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인리히 4세는 수세에 몰렸지만 벨프 5세가 마틸데와 결별하고 자신을 찾아온 덕분에 1097년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듬해, 콘라트 2세를 대신해 동생 하인리히가 독일 공동 국왕으로 새로이 선출되었다. 1099년 우르바노 2세가 사망하고 새로 파스칼 2세가 선출되었는데, 그 역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2.2. 12세기

이러한 다툼이 일년 넘게 진행되자 1102년 파스칼 2세또한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고한다. 1104년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의 퇴위를 요구하며 귀족들과 연합해 반기를 든 것이다. 체포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1105년의 마지막 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독일 국왕, 이탈리아 국왕, 아를 국왕 등 네 개의 직위를 모두 아들에게 넘겼다. 물론 변덕 많은 인물이 이대로 물러설 리 없었다. 이듬해 3월, 로트링겐 귀족들을 포섭해 군사를 일으킨 하인리히 4세는 전투를 계속하며 승기를 잡았다.

게다가 민중은 배신한 두 아들보다는 왕권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하는 하인리히 4세에게 감정적 지지를 보냈다. 여기에 하인리히 4세는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또한 양심에 따라 개종이 가능하다고 선포함으로써 각 지역이 독자적 문화를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런 만큼 하인리히 4세의 인기는 높아졌다. 하지만 그는 7월 말 갑작스레 질병을 얻었다. 오늘날 벨기에 리에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9일 동안 병상에 누웠다가 그는 결국 1106년 8월 7일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자신의 변덕과 상황의 격변에 시달렸던 하인리히 4세는 죽음 후에도 온전히 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리에주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나 후일 슈파이어로 유해가 옮겨졌다.[1] 뒤를 이어 하인리히 5세가 즉위했다.

독일의 단독왕으로 즉위한 이후 하인리히 5세는 동쪽으로 원정을 떠나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데 노력했다. 1107년과 1108년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어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의 즉위를 도왔지만 폴란드 국왕 볼라스와프 3세의 침략으로 인해 동유럽에서 철수해야 했다. 1110년 다시 보헤미아에 개입해 블라디슬라우스 1세의 집권을 이뤄냈다.

로마 가톨릭과의 서임권 논쟁도 계속되었다.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성직자 임명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오히려 교황은 “서임권을 포기한다면 독일 내 주교들에게 왕에게 받은 토지와 재산을 돌려주도록 명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하인리히 5세는 협상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전부 빼앗기게 생긴 독일 성직자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하는 수 없이 이탈리아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교황과 16명의 추기경을 전원 체포했다. 그는 생포한 교황을 데리고 독일로 돌아왔고, 결국 교황은 서임권을 넘겨준 뒤 1111년 4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도 거행해주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그 다음 해에 독일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작센 공작 로타르 3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원인은 미니스테리알렌 계층에 대해 호의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살리 왕조 최초의 국왕 콘라트 2세 때부터 각지의 능력자들을 선출해 국왕의 가신으로 임용시켜 관료와 기사 역할을 맡겼는데, 이들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진압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에 가담하는 귀족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113년의 바른슈타트 전투에서도 하인리히 5세는 승리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반란을 도모했다.

1114년 하인리히 5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제국의 통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쾰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5세는 라인 강변에 진지를 구축해 쾰른으로 유입되는 물자의 이동을 막았다. 그러나 저항은 강렬했고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병력 손실이 늘어났다. 이에 일단 후퇴했다가 다시 공격을 감행하는 등 공방전이 이어졌고, 1115년 로타르 3세까지 끼어든 벨페스홀츠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쾰른을 포기해야 했다.

같은 해 로마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하인리히 5세의 파문을 결정했다. 독일 내에서도 대다수 주교가 교황의 결정을 옹호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강행했고, 2년에 걸친 전투로도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1118년 새 교황 젤라시오 2세가 선출되자, 하인리히 5세는 그레고리우스 8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원래 그레고리우스는 전 교황 파스칼 2세를 대신해 협상 사절로 나섰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에게 포섭되었고 결국 파문당했다. 갈 곳을 잃은 그레고리우스는 대립교황 역할을 수락했으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싸우는 도중 독일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았다. 귀족들이 자신을 폐위하려고 회의를 소집했다는 내용이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하인리히 5세는 양쪽의 요구에 치여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결국 그는 1122년 9월 보름스 협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황제, 귀족들이 모두 참여한 보름스 협약은 서임권 논쟁을 명확하게 종식시키는 내용을 담았다. 주교, 대주교, 수도원장 등 성직자는 종교적으로 평신도인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 직접 임명한다. 다만, 후보가 여럿으로 갈리면 황제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임명된 성직자는 황제에게도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으로서 영지와 권력을 부여받지만 동시에 교황과 대주교로부터 종교적 권능과 교구를 인정받는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황제의 권한이 축소되는 셈이었다.

보름스 협약 이후에도 로타르 3세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하인리히 5세의 거듭된 패배로 국내 정치는 혼란에 빠졌다. 때마침 하인리히 5세의 처남이자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윌리엄이 이북형제들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도중 배가 나파당해 익사하면서 부인 마틸다가 상속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에서 밀리는 바람에 1124년 프랑스의 루이 6세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했다.

육체적인 피로와 심리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하인리히 5세는 1126년 5월 23일 위트레흐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비어버린 옥좌는 하인리히 5세의 외조카들인 호엔슈타우펜의 슈바벤공 프리드리히와 그 동생 콘라트, 주플린부르크의 로타르 3세가 치열하게 경합을 한 후에 1127년 로타르 3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의 콘라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뉘른베르크에서 추종자들에게 대립왕으로 즉위해 프랑켄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1128년 6월 몬차에서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1130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투스 2세등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어 대립하였을 때 로타르는 인노첸시오의 편을 들어주었고 1132년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아나클레투스와 그의 동맹인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싸웠다. 로타르는 이듬해 6월 인노첸시오로부터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받았다.

그러나 콘라트가 독일로 돌아와 형 프리드리히와 함깨 로타르 3세에게 계속 반기를 부추기자 독일로 돌아온 로타르는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와 콘라트 형제와 다시 다툼을 벌였는데 곧 진압하고 1135년 두 형제와 모두 협정을 맺었고 제위를 안정시켰다. 이듬해에는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1137년까지 로타르의 독일군대는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을 대부분의 남부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협정을 맺었다.

로타르는 그해 겨울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알프스산맥을 넘다가 죽었다.이후 1138년 3월 7일 콘라트는 로타르의 후계자로 선출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들어섰다. 주로 남부 독일의 제후들은 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만공은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콘라트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약 5년간의 내전을 치르고 114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벨프가문과 화해했다.

1142년 콘라트는 보헤미아 원정을 성공시키고 매부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군주에 임명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이 콘라트의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146년 콘라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제2차 십자군 제창에 호응하여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하인리히 베렝가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확실하게 한 뒤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7세보다 먼저 11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 소아시아에 도착했지만 그의 독일 군대는 셀주크 제국의 군대를 만나 패배하고 나중에 프랑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콘라트는 곧 병이 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간호를 받았다. 그는 성지에서 몇 차례 성과 없는 원정을 했고 마누엘 1세와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를 공격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루지에로가 프랑스의 루이 7세 및 바이에른의 벨프 가문와 연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라트는 서둘러 독일로 돌아갔다.

1150년 아들 하인리히가 죽고 벨프가문과 전투 중에 죽었고 1152년 벨프 가문과 휴전을 맺었다. 콘라트는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황제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식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로마왕의 칭호만 받았다. 1152년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조카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지명하고 죽었고, 프리드리히 3세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로 독일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목표는 먼 조상인 샤를마뉴, 즉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와 오토 왕조의 오토 대제를 본받아 호엔슈타우펜 왕가 중심의 대제국을 건설하고, 교황권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일이었다. 그 출발점은 당시 수 백 여개에 달하는 독일 내 소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호엔슈타우펜과 벨프라는 가장 강력한 두 가문의 피를 이어받기도 했지만, 스스로 카리스마를 갖춘 덕에 지역 귀족들을 충성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이탈리아에 가장 많은 정성을 들였다. 이탈리아 북부는 경제적 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 곳이고, 이탈리아 중부는 교황이 거주하는 로마가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 남부는 동로마제국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즉위 2년 후 1154년에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당시 이탈리아 곳곳은 북유럽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연이어 승리를 쟁취해 1155년에는 이탈리아 국왕의 왕관을 받았고, 로마까지 진격해서 교황 하드리아노 4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대관식이 거행되자마자 로마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의 군대는 1천 명 이상을 사살함으로써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1156년 부르고뉴 백작 르노 3세의 외동딸 베아트리스와 재혼했다. 베아트리스는 첫째 부인 아델라와 달리 12명의 아이를 낳았다.

1157년 교황 하드리아누스가 서신을 보내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황제 직위가 교황의 선물인 것처럼 말하며 일종의 신하 취급을 했다. 그는 이를 문제 삼으며 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족을 몰아내겠다는 계획까지 덧붙여서 1158년 이탈리아 지배권을 주장하는 론칼리아법령을 발표, 이탈리아 도시들의 포데스타 행정관들을 자신이 파견한 관리들로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에 해당 도시들이 반발하자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실행했다. 밀라노를 점령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1159년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대립교황 빅토리우스 4세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한발 물러나 사태를 지켜보았다. 이에 실망한 알렉산데르는 다른 나라에 서신을 보내 그와 협약을 맺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프리드리히 1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163년 제3차 이탈리아 원정 때 밀라노를 공격해 동방박사 3인의 유물을 획득해 쾰른으로 가져옴으로써 종교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 유물들은 지금도 쾰른 대성당이 보유하고 있다. 1165년에는 빅토리오에 이어 대립교황에 오른 파스칼 3세를 아헨으로 데려와 자신이 존경하는 카롤루스 대제를 성인으로 시복하게 했다.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을 남기거나 발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성인이 되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66년 제4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고, 이듬해 로마 공격 때 알렉산데르가 탈출하자 파스칼리스를 정식 교황으로 세웠다.

독일로 돌아가려던 프리드리히 1세의 앞을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동맹이 가로막았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충성과 용맹을 겸비한 부하들 덕분이었다. 실제로 1174년 프리드리히 1세는 전열을 가다듬어 제5차 이탈리아 원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밀라노 근처 레냐노에서 패배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바르바로사의 무용담이 생겨났다. 예수가 열두 사도를 거느렸듯이 바르바로사가 열두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속에 잠들어 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내려와 구원할 거라는 믿음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프리드리히 1세가 몇 번이고 다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로마에 대한 지배권도 포기하고 1177년 베니스 협정을 통해 알렉산데르 3세의 복귀를 지지했으며 이때 교황령 또한 이탈리아 왕국으로 부터 독립했다. 물론 1178년 6월에는 부르고뉴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등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이탈리아에서 연패한 것은 국제적 망신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4차와 제5차 이탈리아 원정 때 참여하지 않은 벨프 가문의 사촌동생 사자공 하인리히를 희생양으로 여겼다.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번번이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기에 불충을 문제 삼을 만했다. 1181년 귀족회의에서 유배가 결정되면서 사자공 하인리히는 장인이자 영국 국왕인 헨리 2세의 궁성이 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유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장남 프리드리히 5세가 1170년 요절한 이후 무사히 성장한 두 아들 하인리히 6세와 프리드리히 6세가 1184년 기사 작위를 받게 되자, 전국의 기사 수천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1186년에는 하인리히 6세를 시칠리아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 디 시칠리아와 혼인시켜서 평화를 유지했다.

1189년, 성지 탈환을 주장하는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에 박자를 맞추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영국 국왕인 리처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도 함께했다. 2만 명의 기사와 8만 명의 병사가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인원은 이보다 몇 배나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 헝가리 국왕 벨러 3세도 군대를 보탠 덕분에 지금의 터키 땅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는 공동왕이었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맡았다. 프리드리히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지역 귀족들의 동요가 불거졌다. 하인리히 6세는 타협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하나씩 해결했다. 1181년 영국으로 유배됐다 돌아온 벨프 가문의 친척 사자공 하인리히에게는 옛 영지인 작센 지역 남은 영지인 브라운슈바이크를 돌려주어 화해를 이끌어냈다. 또한 독일 북서쪽에 거주하던 브라반트 공작 헨드릭 1세와 에노 백작 바우드베인 5세에게도 영토와 작위를 주어 같은 편으로 포섭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터키의 살레프강을 건너던 도중 프리드리히 1세가 익사를 하고만다. 당시의 경위에 대해 말이 많지만 어째든 그의 익사로 육로로 행군하던 신성 로마 제국군은 그대로 본군으로 회군해야 했다. 당시 독일의 공동왕이었던 하인리히 6세는 단독왕이 되자 당황하지 않고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각 지역 가문을 위로하고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 유지를 위해 군사를 준비했다. 이듬해 1191년 마침내 이탈리아로 진군한 그는 협상 능력을 발휘해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을 막아냈고, 4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아내 콘스탄차의 고향인 시칠리아 왕국이 문제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의 조카손녀 베아트리스로서 국왕 루제로 2세의 셋째 부인이었다. 앞선 결혼에서 얻은 8명의 이복 남매들이 모두 요절함에 따라 하인리히 6세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귀족들은 노르만족 출신의 레체 백작 탕크레드를 왕으로 옹립했다. 공격을 준비하는 중에 비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군대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독일의 귀족들도 국왕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인리히 6세는 어쩔 수 없이 독일로 복귀했다.

그러나 우연찮게 행운이 찾아왔다. 영국 국왕으로 십자군 원정을 벌이던 사자심 왕 리처드가 예루살렘에서 살라흐 앗 딘과 휴전을 한 후 영국으로 돌아오다 배가 아퀼레이아 부근에서 배가 난파하여 매형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극소수의 부하들만 이끌고 비밀리에 유럽 대륙을 횡단하다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크레에서 모욕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어 포획한 후 빔에서 뒤른슈타인 성, 트리펠스 성을 걸쳐 1193년 3월 23일 슈파이어로 압송되어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플랜태저넷 가문의 앙주 제국을 붕괴시키려한 필리프 2세는 하인리히 6세에게 가능하면 리처드를 석방시키지 말 것을 서한으로 요청한 것도 있었다.

법정에 선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렸다. 또한 법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유도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십 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다만 잉글랜드의 종속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리처드 1세가 슈파이어로 이송되는 동안 영국에서 태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에게도 이사실이 보고되어 하인리히 6세가 제시한 보석금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면서 존과 잉글랜드의 토착 세력에게 밀려 프랑스로 망명한 처지였던 전 잉글랜드 대법관 기윰 드 롱샴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려가 하인리히 6세와의 협정을 도왔던 덕에 리처드는 독방 감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트리펠스 성에서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동안 리처드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뇌부와 친분을 쌓으며 동맹을 다졌고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이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회담은 겨울까지 진행되었고, 이후 엘레오노르가 직접 신성 로마 제국으로 와서 아들의 몸값을 후하게 지불했다. 또한 리처드 또한 하인리히 6세의 봉신이 될 것도 약속했다.

돈과 군사를 모두 손에 쥔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월에 북부 이탈리아인들과 협정을 맺어 황제군의 북부 이탈리아 안전 통과를 확보했고, 4월에는 사자공과 협상을 타결해 지긋지긋한 사자공과의 항쟁을 종결했다. 그리고 7월에 시칠리아 공격을 시작했고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1194년 11월 실리아의 수도 팔레르모에 무혈 입성해 항복 조건애 따라 굴리엘모 3세가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레체 백작령을 줄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냉철한 인물로 굴리엘모 3세를 비롯한 잠재적 반란 세력을 남겨두려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12월 25일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후 수백명의 시칠리아 귀족들을 처형했고, 굴리엘모 3세는 거세하고 맹인으로 만들어버린 후 유폐시켰으며, 탕크레드는 부관참시되었다. 즉위식 다음 날에는 외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태어났다.

독일과 네덜란드 내 가문 영토, 새로이 확보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전역,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 일부 영토까지 소유하게 된 하인리히 6세는 이 시점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가문의 직영지로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호엔슈타우펜 왕조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하인리히 6세의 다음 과제는 갓 태어난 아들 프리드리히의 차기 제위 계승권 확립이였다, 지금의 기세를 틈타 황제 자리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세습 지위로 확립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은 영원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작업으로 1115년 마틸데의 사망 이후 오랫 동안 제대로 된 주인이 없던 토스카나 후작 자리에 1195년 동생 필리프를 맞힌다.

하인리히 6세는 1196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전에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 국왕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반대를 표명하고 나섰다. 하인리히 6세는 교회 소유의 영지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196년 봄에 뷔르츠부르크에서 열린 귀족회의에 아돌프 대주교 일파가 불참하면서 귀족들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졌고, 6개월 후 에르푸르트에서 재차 열린 귀족회의에서도 반대 의견이 이어졌다. 하인리히 6세는 설득을 계속했다. 그해 말, 마침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귀족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공동국왕으로 인정받았다.

자신감을 되찾은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로 가는 도중 그동안 자신에게 반대해온 지역 귀족들을 처형했다. 1197년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했지만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강행했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9월 28일 메시나에서. 급성 말라리아에 걸려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야 할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고작해여 세살이었기에 숙부인 필리프가 1198년 뮐하우젠 귀족회의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벨프 가문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봉지중 하나였던 토스카나 후작령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은 피렌체, 아레초, 루카, 피사, 피스토이아, 포지본시, 프라토, 시에나, 볼테라 등 유력 도시들이 토스카나 연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토스카나 일대는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토스카나 후작령은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교황은 로마 내 교황령과 시칠리아 왕국의 양도를 요구하며 결정을 미뤘다. 결국 독일 남서부 슈바벤을 기반으로 한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독일 중부 작센을 중심지로 삼은 벨프 가문은 기나긴 전쟁에 뛰어들었다.

외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점잖아 많은 이의 호감을 샀던 필립 폰 슈바벤은 독일 내 귀족과 성직자들을 규합하고 교황을 설득하는 한편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보헤미아, 남동쪽의 동로마 제국 등 주변국과 동맹을 강화해 세력을 넓혀갔다.

2.3. 13세기

1205년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필리프의 편에 서게 되었고, 다시 한 번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왕위를 굳혔다.그러나 1208년 6월 21일 부르고뉴 백작을 지내던 형 오토 1세의 딸 베아트리스 2세가 밤베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필립 폰 슈바벤은 벨프 가문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결혼식 후 방에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때 비텔스바흐 백작 오토 8세가 칼을 들고 들어와 그를 난자해 살해했다. 임신 중이던 이레네 왕비는 무사히 도망쳤지만 충격과 후유증으로 인해 두 달 후 8월 27일 결국 사망했다.

이후 11월에 제후들은 사자공 하인리히의 아들인 오토를 독일왕으로 선출했으며 필리프의 어린 딸 베아트릭스과 약혼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하지만 1209년 9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을 받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로 교황청이 이전에 제국으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았던 토지들을 교회에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의 영토인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동의한 후 10월 4일, 로마에서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한다.

하지만 얼마 안가 오토 4세는 약속을 어기고, 1210년 토스카나 지방을 점령한 후 호엔슈타우펜의 소유였던 이탈리아 남부로 원정을 개시하면서 교황과 제후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내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 4세에게 파문을 선언, 제후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대립왕으로 선출하자 1212년 서둘러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지만 얼마안가 베아트릭스가 사망하면서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이후 9월이 되어 독일에 온 프리드리히 2세는 남부의 여러 공작령의 지를 받고 오토 4세와 그의 추종 세력들을 라인 강 하류 지방과 북동부로 몰아냈으며 이후 1214년 부빈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패배한 하자 오토 4세는 부르고뉴 왕위만 보전한 채로 1215년에 퇴위한다.

7월 25일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 왕으로의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함께 십자군 종군을 서약하였다. 1217년 5차 십자군이 출정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1세를 포함한 귀족들을 파견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1220년 프리드리히 2세는 보름스 화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로마로 와 11월 22일에 교황 호노리오 3세와의 협상을 통해 다음해에 십자군 원정에 직접 참전할 것을 요구받고 대관식을 받고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칙령으로 '이단을 처벌해서 화형을 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후 자신은 시칠리아에 머물고 장남인 하인리히를 독일왕으로 공인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성속 영주들에게 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를 1220년에 표고해 그들이 독일 지역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통행료를 부과하고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영주에서 법정을 열고 그곳에서 내려진 형을 집행하는 데 왕이나 황제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얻었습니다. 왕이나 황제에 의한 선고의 수락은 보장되었다: 교회 법정에 의한 유죄 판결은 자동적으로 왕실 또는 제국 법원에 의한 정죄와 처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교회 법정에 의한 파문 선고에 뒤이어 왕이나 황제로부터 불법 선고가 내려졌다. 영방국가 체제 발전의 길을 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로 귀환하기 전 장남인 하인리히 남겻는데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섭정으로 쾰른의 대주교 엥겔베르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를 대신 맡았다.

1222년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했으며 동시에 그의 딸이아그네스를 독일왕인 장남 하인리히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이 약혼은 프리트리히 2세가 돌연 취소시켰고, 1225년 11월 29일 뉘른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6세의 딸이자 7살 연상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마르가레테는 1227년 3월 28일 아헨에서 독일 왕비로 즉위했지만, 하인리히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1230년 레오폴트 6세가 사망한 후 지참금 지불이 늦어지는 것을 문제삼아 마르가레테와 이혼하고 아그네스와 재혼하려 했다. 하지만 성 갈리아 수도원장이며 하인리히 7세의 중요한 조언자였던 콘라트 폰 부스낭이 만류하자 포기했다.

1226년 잉겔베르트가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가 대신 섭정직을 맡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간의 대립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1228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공작이 교황 편에 섰다. 이에 분개한 하인리히 7세는 그해 12월 25일에 직접 바이에른 정부를 장악하고 루트비히를 강제로 복종시켰으며, 스트라스부르 주교와 갈등을 벌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자유시 우선 정책을 이어받아 자유시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공작들은 이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권익이 침해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1231년 5월 1일, 귀족들은 보름스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자유시 선호 정책에 반대하는 법령을 공포하도록 강요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제후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자신을 중재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협력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아들이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한 몇 가지 규제들을 해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인리히 7세의 조언자 중 한 명이었던 슈바벤 백작 에기노 5세를 파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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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년,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화해하고 자신에게 선고했던 파문을 취소하게 한 뒤 하인리히 7세에게 치비달레에서 교황에게 복종을 맹세하게 했다. 같은 해, 하인리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프랑스의 카페 왕조 사이의 동맹을 갱신했다. 1233년, 하인리히 7세는 비텔스바흐 가문과 전쟁을 벌여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의 아들인 팔츠 공작 오토 2세를 굴복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일이 독일 제후들의 불만을 살 것을 우려해 아들에게 모든 인질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1233년 또는 1234년, 하인리히 7세는 스테딩겐의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십자군을 선포한 브레멘 대주교를 비난하는 칙령을 반포해 교회와 갈등을 벌였다. 이 십자군을 인정했던 그레고리오 9세는 하인리히의 칙령을 전해듣자 격분하여 하인리히를 파문했다.

어떻게든 교회와 화해하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이 자꾸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자 1234년 7월 5일 아들의 행동을 불법화하고 자신이 독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고 선포했다. 하인리히 7세는 이에 대응해 그해 9월 스와비아 귀족들과 독일 주교들을 집결시켜 동맹을 맺고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고,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롬바르드 연맹은 하인리히 7세의 구원 요청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반란 진압을 위해 'Statutum in favorem principum'이라 불린 법령을 발표해야 했는데, 이법령은 독일 내의 세속 영주들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왕실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독일 지역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통행료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받기로 되어 있으며, 최종적으로 1232년 5월에 승인이 되었고, 추종 세력을 규합한 후 독일로 진군해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스와비아로 진격했다. 하인리히 7세는 스와비아에서 아버지와 대치했지만 대부분의 추종자들이 대세의 흐름을 읽고 프리드리히에게 항복하자 어쩔 수 없이 1235년 7월 2일 아버지에게 귀순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 7세를 독일왕에서 폐위하고 두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차남 콘라트 4세를 독일왕에 앉혔고, 하인리히 7세는 어느 시점에서 나병에 걸렸기에 이탈리아 어딘가에 죽을 때까지 유폐시켰다.

한편 교황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1235년에는 마인츠에서 치안 법령 (평화 헌법)을 공포했고 롬바르디아 동맹을 쳐부술 결의를 하였다. 1237년에 크레모나 군과 함께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밀라노 군을 격파한 프리드리히는 코뮌의 상징인 카로치오를 파괴하였다. 1240년 아들인 콘라트 4세가 독일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2세 본인은 이탈리아쪽만 전념하기로 했다. 1241년 8월에 그레고리오 9세가 사망하자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 2명을 포로로 잡아 새 교황을 뽑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241년 몽골군이 동유럽을 휩쓸고 헝가리까지 쳐들어오자 급히 기독교 제후들 및 사이가 좋지 않던 교회와 협력하여 십자군을 편성해 막을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1242년 오고타이의 죽음을 안 몽골군이 회군했기 때문에 한숨을 돌렸다.

1243년 2년간의 공백 끝에 새로 뽑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다시 황제와 항쟁을 할 조짐을 보이자 롬바르디아의 겔프당과 치열한 전쟁을 펼친 끝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켜버렸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리옹에서 공의회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파문했고, 주종관계를 말소한다고 선포하여 독일 제후들의 반란을 선동했고,튀링엔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를 대립 독일국왕으로 내세웟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계속된 파문과 복권에 질린 독일 제후들은 교황권의 신장도 바라지 않았고[2],프랑스 왕 루이 9세도 프리드리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생각 외로 황권에 위협은 되지 못했다. 1246년 대립왕인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면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홀란트의 백작 빌럼이 라인 강 일대의 영주들에 의해 대립왕으로 선출되면서 반란은 지속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의 포조니를 점령하고자 침공하나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키예프 대공 로스티슬라프 4세와 손을 잡고 대항해 6월 15일 라이타 강둑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헝가리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전투 중에 전사하면서 수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1248년엔 파르마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파르마에 있던 정부들을 비롯해 재산들을 잏었고, 1249년에 서자 엔초가 롬바르디아 동맹군에 패배해 볼로냐에 포로로 붙잡히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교황도 황제도 자금이 부족하고 북이탈리아의 제후들도 격파되기 시작하여 (1250년 마르케 전투) 결국 양측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중재로 다시 화해를 하였다. 이후 1250년에 대립왕 빌럼이 콘라트 4세에게 패배했느나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으며 12월 12일,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던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에 교황과 구엘프파는 크게 안도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기벨린파(황제파)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그의 아들인 콘라트 4세가 단독으로 독일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으로 시칠리아 왕국과 독일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교황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251년 빌럼에게 패배하자 콘라트는 독일에서는 안정된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유한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 1252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와 함께 아풀리아를 침입하여 통치 대리인으로 있던 이복동생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에서 영향력을 퍼뜨리는 걸 견제했고 국가를 엄격히 통제했다. 1253년 10월 콘라트의 군대는 반란 상태에 있었던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콘라트 4세는 교황의 지원자들을 진압할 수 없었고, 교황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아들 곱추공 에드먼드를 통치자로 지목했고, 1254년에 콘라트 4세를 파문했다. 콘라트 4세는 이에 대처하려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이탈리아 바질리카타의 라벨로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인 콘라딘이 나이가 어리면서 호엔슈타우펜이 독일왕 및 신성 로마 황제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독일 왕위는 곱추공 애드먼드가 그대로 차지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4세 때의 대립왕이었던 빌럼이 여전리 살아있었기에 사실상 제대로 된 왕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대공위시대로 접어들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또한 콘라딘이 죽었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당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하고 있던 콘라트 4세의 이복 동생인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국왕이 되면서 사실상 가문이 두동강이 나게 되었다.

1256년 빌렘 2세가 프리지아인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자,카스티야 왕국알폰소 10세가 피사 공화국의 사절의 제안으로 대립왕(Gegenkönig)이 되길 결심했고, 1257년에 전 유럽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인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어머니인 점을 들며 독일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이탈리아의 기벨린파(친 황제파) 도시들에 외교관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나중에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

이후 독일의 선제후들 중 4명의 지지와 프랑스 국왕인 루이 9세에게도 지지를 받아냈지만 정작 커다란 문제점에 봉착하고 말았다. 카스티야 귀족들은 신성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군대를 보내라는 왕의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소리아에서는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카스티야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까지 겸임한다면 너무 강해진다고 여겼기에 반대했다.

한편 1257년 애드먼드가 죽자 라인 지방의 영주들과 선제후들 중 세명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독일왕으로 선출했기에 리처드와 알폰소 10세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여야 했는데, 상술한대로 제약이 많은 알폰소 10세에 비해 리처드는 재빨리 아헨으로 이동해 1257년 5월 카롤루스 대제의 묘지를 참배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알폰소 10세는 십여 년간 리처드를 꺾고 교황의 마음을 돌리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지원하고자 막대한 돈을 지출했지만 두 명의 외국인 출신 대립왕들은 누구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교황은 이러한 사태를 즐겼고 두 명의 대립왕 중 누구에게도 황제 대관을 하지 않았다. 결국 장기간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했다.

1265~1266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끝장내려고 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알렉산데르 4세의 의도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해 만프레디를 전사시키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고, 이에 콘라딘은 외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지원을 받고 시칠리아를 회복하려 했으나 1268년 샤를에게 패배해 붙잡혀 미혼인 상태에서 처형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끊어졌고, 슈바벤 공작령 또한 여러 갈레로 분할된다.

이런 상황에서 강도 기사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라인강 일대에서 불법 통행세를 걷던 군소 영주들로 육상 운송의 효율성이 매우 떨어지던 중세 시대에 라인강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화물 운송로 중 하나였으며, 라인강에서 통행세를 걷으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오스트리아 공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합병시키는 등 신성 로마 뢍제 자리를 노렸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때문에 황제의 통제력이 사라지자 라인강 유역의 군소 영주들이 주요 길목마다 성, 탑을 세우고 불법 통행세를 걷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중세에는 육상 운송의 효율성이 매우 떨어졌고, 강을 틀어막고 있으면 배는 우회할 수도 없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기 때문에 상인들은 뻔히 알면서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큰 피해를 본 도시들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강도 귀족들의 성을 파괴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자 이러한 상황을 즐기던 교황들마저 이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최소한 독일왕을 선출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독일 내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큰 피해를 보고 있던 중립 제후들에게도 다시 황제 내지는 독일왕을 선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 황제들의 통치를 겪은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강력한 황제나 독일·로마왕을 원치 않았기에 그들은 공작 수준의 강력한 제후가 아닌 백작이되 영주들 중에서 가장 미미한 세력을 가진 자를 선출할 생각을 갖기했다.

1273년,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황제 선출을 위해 모인 제후들은 스스로 황제 후보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다른 유력 가문이 제위를 차지하는 것을 견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회의는 한동안 공전으로 흐르다가 힘의 균형을 위해 일부러 한미한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오타카르 2세는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독일왕 선출에 대해 어떠한 인물이든 간에 인정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나 묵살되었다.

그리고 이에 부합한 인물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백작이었던 루돌프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뒷배경 외에는 혈통으로 같은 스위스 지역에 자리 잡아 교황을 배출한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였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되면서 공중분해된 슈바벤 지역 중 아내의 호엔베르크 영지, 외삼촌의 퀴부르크 영지를 획득하고, 슈트라스부르크 주교령과 바젤 등의 영지를 구입하여 가문의 영지를 확대는 했지만 그래도 강력한 제후들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2세 폰 에프슈타인과 호엔촐레른 가문의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3세[3]의 지지를 받고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리처드와 알폰소 10세는 자동으로 폐위되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이 왕초로 주름잡고 있던 스위스에서도 루돌프의 독일왕 즉위 소식에 이미 루돌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전체에 굴복했던 스위스 사람들 중 바젤의 주교는 이 사실을 듣고는 그들의 선택이 훗날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독일왕에 선출된 루돌프는 교황으로 부터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밝혔으며, 바젤 주교의 우려대로 왕권 강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선거를 통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준 독일 선제후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정략결혼 정책을 도모했고, 두루두루 긴밀한 친족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독일 선제후 회의는 3인의 대주교와 4인의 세속 선제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에는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가, 후자에는 작센 공작, 라인 궁정백,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권 우호적인 정책을 통해 교권과의 해빙 국면에 접어들자마자, 루돌프 1세는 세속 선제후들과의 화친 정책에 주력했다.

1273년 10월, 그는 장녀 마틸데를 라인 궁정백이자 오버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루트비히 2세와, 셋째 딸 게르투르트는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인 알브레히트 2세와 결혼시키면서 세속 선제후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는 것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왕권 강화 정책은 추후 완성될 세속 선제후들과의 인척 관계를 맺는 것 외에는 성공한 것이 거의 없었다. 1274년부터 도시에 대한 군주의 과세권을 거듭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는 바이에른과 구슈바벤과 프랑켄 세 지역에 대한 평화를 위한 법을 만들어 후에 독일 전체로 확대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루돌프는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 이전 신성 로마 황제 자리를 두고 대립각을 세운 정적 오타카르 2세와 해결을 봐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274년 11월, 루돌프 1세의 주최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프리드리히 2세 사망 이후 바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경계를 원상복구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 조치로 오타카르 2세는 케른텐, 크라인, 빈트 변경주, 프리울리를 모두 상실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더욱 압박하여 이듬해 오타카르 2세에게 제국추방령을 선언했고, 에 있던 그의 거처인 호프부르크를 포위했다. 그 사이에 보헤미아에서 팔켄슈타인의 자비시(Záviš z Falkenštejna 1250~1290)가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1276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권리까지 포기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바만 유지하며 아들 바츨라프와 루돌프 1세의 여섯째 딸 유타(Jutta von Habsburg 1271~1297)를 결혼시키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오타카르 2세는 자신의 야망을 꺽지 않았고, 이에 루돌프 1세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무력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오타카르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마이센 변경백국, 소폴란드 공국에서 용병을 빌려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루돌프 1세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와 동맹을 맺고 빈으로 진군했다. 1278년 8월 26일, 빈 북쪽 뒤른크루트(Dürnkrut)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오타카르 2세는 전사하면서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 궁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보헤미아와는 더이상 충돌을 원치않았기에 이전의 약조에 따라 1279년 2월, 넷째 딸 헤트비히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4세와 결혼시키는 등 이런 교묘한 정략결혼을 통해 그는 세속 선제후 4인과 모두 친인척의 관계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독일 선제후 회의와의 심각한 대립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1282년 12월 27일, 루돌프 1세는 알브레히트와 루돌프 두 아들들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크라인, 케른텐 등을 봉토로 하사해도 좋다는 독일 제국회의의 승인을 받았지만 그러나 두 아들에게 봉토에 대한 전권을 넘겨준다는 결정은 여러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1283년 6월 1일, 라인펠덴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협약에 따라 장남 알브레히트가 그 지역에 관한 단독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장자 상속권을 보장한 라인펠덴 협약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성장하는 데 확고한 토대가 되었다.

1283년 서부 변경지대에서 프랑스의 팽창주의 정책을 막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의 딸 이자벨과 재혼하고 이후 프랑슈콩테의 궁중백 오토 4세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루도프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무산되고 만다. 바로 교황령에 대한 프랑스의 압력에 영향을 받은 마르티노 4세가 이전 교황인 그레고리오와 니콜라오 3세가 약조한 황제 대관식을 죽을 때까지 미뤘다. 1287년 새 교황 호노리오 4세가 2월 2일에 대관식 날짜를 잡았지만 루돌프 1세가 도착하기 전 호노리오 4세가 사망하면서 대관식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이후 뷔르츠부르크에서 대관식에 대한 회의를 열지만 제국 사절단이 루돌프에게 로마에 경비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루돌프 1세의 황제 즉위는 무산되었다. 1289년 튀빙겐에 출물하는 강도기사를 진압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하나 험준한 산성에서 수성을 했기에 실패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왕권 강화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루돌프 1세의 세력 확대에 당황한 독일 제후들은 그가 독일왕 자리를 아들에게 넘기는 것을 끊임 없이 방해했고, 1291년 루돌프는 끝내 장남 알브레히트의 왕위 승계를 이루지 못한 채로 슈파이어에서 사망했다. 129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를 견제하기 위한 황제선거가 열렸고, 나사우 가문의 백작이었던 아돌프가 선출되었다.

같은해인 5월 5일에 즉위한 아돌프는 2년뒤인 1294년 6월 24일에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정식으로 독일왕이 되었다. 하지만 제위 초부터 선제후들의 무리한 요구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으로서 막대한 재정자원과 영토를 지니고 있었던 알브레히트의 반격과 도전에 직면했다. 이에 아돌프는 마이센을 점유하고 있던 베틴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로부터 튀링겐의 상속권을 사들였고 1294년, 프랑스 왕국에 대항해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어 현금 보조를 받아 그것을 상속권을 빼앗긴 알브레히트 2세의 두 아들인 프리드리히 투타와 디트리히를 물리치는데 사용하는등 점차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의 움직임을 즉각 경계하기 시작한 선제후들은 자신들과 협상중이었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1298년 6월 23일, 알브레히트의 대군이 마인츠에 주둔한 가운데 아돌프의 폐위가 선고되는 동시에 알브레히트를 독일왕으로 선출하였고 이에 아돌프는 같은해 7월 2일 보름스 근처 괼하임에서 알브레히트와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8월 24일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왕 대관식을 치른 알브레히트 1세는 제후들이 우려한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세습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도시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냈으며 영주들간의 이유없는 사전(私戰)을 막는 등 독일 왕국을 안정화시켰으며 1299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브란데부르크 변경백 오토 6세, 매부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와 동맹 협약을 채결해 입지를 다졌다.

3. 헝가리

3.1. 11세기

999년, 이슈트반 1세는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로마로 파견하면서 교황 실베스테르 2세에게 개종 의사를 밝혔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은 그를 헝가리의 국왕으로 인정했다.또한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 역시 로마에 머물고 있어 이슈트반의 헝가리 국왕 즉위를 인정했고, 1001년 1월 1일 이슈트반은 헝가리의 초대 사도왕으로 즉위했다.

초대 왕이 된 그는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1002년 또는 1003년에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이자 삼촌인 율라 3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둔 그는 율라의 가족들을 투옥하고 소금 광산을 몰수했으며,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 왕국에 병합하고 그곳에서도 기독교 개종 사업을 단행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개종을 거부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율라는 탈옥에 성공한 뒤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게 망명했다. 이후 1014년부터 1018년까지 폴란드와 헝가리의 전쟁이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한때 모라바 강까지 진출하여 헝가리를 압박했다. 그러다가 키예프 루스와의 전쟁이 터지자, 볼레스와프 1세는 이슈트반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헝가리에게 빼앗았던 모든 영토를 이슈트반에게 돌려주는 대신 일부 헝가리 병력을 지원받았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남부에 있던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인의 지도자인 케안(Keán)과 전쟁을 벌여 1003년경 케안을 주살한 뒤 케안의 옛 영지에 자신을 따르는 관료를 선임했다. 그는 1008년경에 남동부 트란스다뉴비아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전통 신앙을 고수하고 있던 흑마자르와도 전쟁을 벌여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그들의 영토에 페크스 주교구를 설립하고 1009년 8월 23일 교황 특사 아초에게 이곳을 맡겼다. 또한 이 시기에 컬로처 대교구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무력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그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누이를 "마트라의 숲에 있는 큰 땅"의 지배자인 쿠만 족장 어버 샤무엘과 결혼시켰다. 이를 통해 어버 샤무엘의 영역도 헝가리 왕국에 통합되었으며, 이슈트반은 그 대가로 어버 샤무엘에게 팔라토이스판(궁전 백작) 직책을 하사하고 중책을 맡겼다. 어버 일족은 이슈트반 왕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또한 1009년에 또다른 누이인 그리말다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의 결혼을 이끌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헝가리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갈등을 정리하고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02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2세가 이슈트반의 처남이자 베네치아 도제인 오토 오르세올로를 공격해 베네치아에서 축출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한편 1028년, 모로스 지역에서 강력한 부족 국가를 수립한 아즈토니와 이슈트반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슈트반은 아즈토니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도 7명의 아내를 둔 점을 들어 여전히 이교를 따른다고 비난하면서, 차나드에게 군대를 맡겨 아즈토니를 무찌르게 했다. 차나드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모로스로 진격해 아즈토니를 주살했고, 이슈트반으로부터 그곳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차나드 교구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이후 1029년 바이에른군이 콘라트 2세의 지시에 따라 피슈차 강과 라이타 강 사이의 헝가리 영토를 여러번 급습했다. 이슈트반은 이에 대응하여 바이에른 영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030년 6월, 콘라트 2세가 라바 강을 건너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청야전술을 사용해 적을 굶주리게 한 뒤 비엔나 근처에서 철수하던 독일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양자는 1031년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시기미상이나 같은 해인 1030년에 겔레르트가 차나드 교구의 첫 주교로 선임되면서 아즈토니를 장악하는데 성공해, 헝가리 왕국은 판노니아 대평원과 카르파티아 분지를 포괄하는 지역강국이 되었다. 그는 이 드넓은 영토를 여러 카운티로 나누고, 왕실 관리인 이슈판(ispan)을 지방관으로 세웠다. 카운티의 중심에는 성이 세워졌다. 또한 각지의 카운티에 교회를 세우고 가톨릭 개종 사업을 강력히 실시해 헝가리를 진정한 가톨릭 국가로 거듭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두 권의 법전 이라스미벳(írásművet)을 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전은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전을 차용했지만 헝가리 현지 사정을 고려해 조금씩 변형했다. 가령, 이 법전에서는 10개의 마을을 하나로 묶고 성당을 한 채 짓고 사제를 지원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주일 및 의무축일 미사 참례 준수를 의무화했으며, 모든 백성은 죽기 전에 사제를 불러서 종부성사를 받아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유족들은 사제가 지정한 기간 동안 금식해야 했다. 또한, 그는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해 현물거래가 일반적이던 헝가리 왕국이 화폐경제를 수용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유목 생활에 전념하던 헝가리인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고,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해 정착을 유도했다.

이슈트반은 아내 기젤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오토와 임레를 낳았다. 하지만 오토가 유아기 때 죽었기 때문에, 임레가 사실상 외아들이었다. 그는 베네치아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제라르에게 아들을 엄격히 교육시키게 해 차기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했다. 여기에 아들에게 헝가리 왕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열거한 훈계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훈계문에서, "헝가리 왕은 반드시 가톨릭 신자여야 하며, 귀족과 성직자들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백성을 온유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임레는 불행히도 1031년 9월 2일 헤기쾨츠첸티엠레(현재 루마니아 산팀레우)에서 사냥하던 중 멧돼지의 뿔에 찔려 죽었다. 그는 이 사고에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임레 사후 차기 후계자로는 이슈트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니트라 공작이었던 바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는 바줄이 경박하고 어리석으며 가톨릭 신앙도 두텁지 못하니 왕위를 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전임 베네치아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와 자신의 누이 그리말다의 아들로 어머니와 함께 망명 중이었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후 행적은 연대기마다 다른데 일타이크 연대기에 따르면, 이에 반감을 품은 바줄은 네 명의 귀족을 꼬드겨 왕을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이슈트반은 네 귀족들의 팔을 자르게 한 뒤 바줄의 두 눈을 멀게 했다. 여기에 바줄의 세 아들 레벤테, 언드라시, 벨러를 체포하려 했지만, 이들 모두 국외로 달아났다. 반면 바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들의 치하에서 쓰여진 후기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바줄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지만 그의 아내 기젤라를 포함한 바줄의 적들이 왕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바줄의 눈을 멀게 하고 귀구멍을 납으로 채워버렸다고 한다. 이후 1038년 8월 15일에 이슈트반이 사망했다.

생전에 남긴 유고에 따라 조카인 오르세올로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그는 선왕이 추진한 가톨릭 진흥 정책을 지속했고, 화폐를 대량 주조해 화폐경제를 촉진하게 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였다. 1039년과 1040년 겨울에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오스트리아 변경백이자 자신의 처남인 아달베르트의 영토를 파괴했다. 또한 독일왕 하인리히 3세에 대적하는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지원해 보헤미아군이 브루테크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불가리아인의 독립을 꾀한 페터르 데얀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렇듯 왕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외국인 왕을 받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페테르는 이를 경계해 각 주의 주요 성에 이탈리아와 독일 출신 병사를 배치하고 헝가리인 영주의 정치 참여를 일절 틀어막았다.

게다가 그는 이슈트반 1세 앞에서 기젤라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젤라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베스프렘의 별궁에 연금했다. 이에 분노한 기젤라는 유력한 헝가리 귀족인 어버 샤무엘과 손을 잡고 반란을 꾀했다. 1041년, 어버 샤무엘과 헝가리 귀족들은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독일 출신으로 왕 옆에서 난정을 일삼는 부도(Budo)를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페테르가 거부하자, 그들은 곧바로 부도를 죽이고 부도의 두 아들을 실명시켰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페테르는 1041년 9월 헝가리에서 도주했고, 영주들은 어버 샤무엘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왕위에 오른 어버 사무엘은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페테르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1042년 2월 15일 군대를 이끌고 트라이젠 강을 건너 신성 로마 제국의 산하의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군대를 3개로 나누었다. 그 자신이 이끄는 남쪽 군단은 툴른 시까지 진격하면서 각지를 약탈했고 다른 부대도 승리했지만, 북쪽으로 보낸 한 개 부대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아달베르트에게 패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이 헝가리로 철수하는 헝가리군을 향해 반격을 개시하자, 포로로 끌려가고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이 봉기했다. 헝가리군은 추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다수가 모르바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

1042년 가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헝가리로 쳐들어가 도나우 강 북쪽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점령지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기에 곧 철수했고, 샤무엘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1043년, 하인리히 3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라바 강까지 이르며 헝가리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사절을 다섯 번이나 보내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신성 로마 제국에 패하기만 하자, 그를 따라 페테르를 축출했던 귀족들이 그마저 제거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모조리 숙청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1044년 부활절에 공모자들을 회의에 소집한 뒤 단검을 품에 숨긴 시종들에게 그들 곁에 접근했댜가 모조리 찔러 죽이게 했다고 한다.

1044년,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와 함께 헝가리로 다시 진군했다. 어버 샤무엘은 군대를 끌어모아 멘포에서 적과 맞붙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에 부하들이 그를 배신하여 독일군에 가담해 버리면서 참패했고,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를 헝가리 왕위에 복위시키고 헝가리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복위한 페테르는 하인리히 3세의 지시에 따라 이슈트반 1세가 반포한 헝가리 법을 폐지하고 독일법을 따랐고, 1045년 오순절에 헝가리를 방문한 황제에게 금박을 입힌 창과 왕관을 바쳤다.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가 바친 창과 왕관을 로마로 가져와서 헝가리가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음을 널리 알렸다. 또한 페테르는 또다시 외국인들을 최상위 관직에 앉히고 헝가리 귀족들을 억압했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반감을 품고 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한편, 1046년 여름 바타에서 이교도 반란이 발발하여 코로스 일대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046년 9월, 반란군은 아바우이바르에서 헝가리에 비밀리에 잠입한 레벤테, 언드라시를 접견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배제하고 마자르 고유의 신앙으로 돌아간다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동의했다. 이후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페테르는 헝가리를 탈출해 아우크스부르크에 집결하고 있는 독일군과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국경 인근의 자몰리 마을에서 언드라시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포위되었다. 페테르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한 저택에서 사흘간 항전했지만 끝내 제압당했고, 그는 1046년 10월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슈트반 1세의 친족으로서 다시 아르파트 왕조를 복위시킨 언드라시 1세는 반란군과 맺었던 "기독교를 배제하고 마자르 고유의 신앙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무효화하고 기독교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1047년 귀족들을 규합하여 반란군을 진압한 뒤, 반군에 의해 살해된 사제들을 대체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사제들을 초빙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자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영토를 양도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평화 협상은 중단되었다.

하인리히 3세의 당시 관심사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였으나 언젠가 헝가리를 다시 속국으로 삼기 위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았다. 언드라시는 이에 대비하고자 1048년 초 폴란드에서 동생 벨러를 불러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국토의 3분의 1을 벨러에게 주고 자신의 허락 없이도 독자적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벨러가 뒤이어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050년, 하인리히 3세가 예상대로 헝가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했다. 하인리히 3세가 이끄는 본대는 바그 강을 건너 니트라 강을 거슬러 내려가서 슈타이어마르크를 거쳐 트란스다뉴비아로 진격했다. 레겐스부르크의 게브하르트 주교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는 도나우 강을 확보하고 보급품을 군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벨러는 이에 맞서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독일군은 가는 곳마다 황폐화되어 있어서 식량과 물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진군을 강행한 끝에 헝가리의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했다.

벨러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어 적의 진지를 급습해 화살을 날린 뒤 적이 반격하기 전에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탈진한 데다 세케슈페하르바르의 방비가 강했기 때문에 공성전을 벌여봐야 공략할 가능성이 희박했기에, 독일군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보급품을 운반하는 선박이 있는 베르테스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벨러는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사절 한 명을 독일인으로 가장하여 게브하르트 주교에게 보내 배를 거둬들여 본국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로 인해 베르테스에 도착했을 때 선박이 없자, 독일군은 완전히 낙심한 채 레겐스부르크로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군이 끈질기게 추격하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1051년 봄에 헝가리를 다시 침공했다. 독일군은 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조니를 포위하여 8주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이때 조문트라는 이름의 수비대 전사가 밤에 강을 헤엄쳐서 적 선박 근처에 숨은 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이로 인해 배에 물이 차서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는 교황 레오 3세의 중재에 따라 헝가리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는 상당한 돈과 영토를 요구했지만, 독일 내부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협상이 중단되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6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독일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맡은 푸아투의 아녜스는 국내 사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헝가리와 이 이상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기고 1058년 헝가리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양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언드라시 1세의 아들 셜러몬과 하인리히 3세의 딸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약혼했다.

언드라시 1세는 전쟁을 종결한 후 아들 셜러몬을 공동 왕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벨러가 반발했고, 헝가리 왕국은 또다시 내란의 조짐을 보였다. 얼마 후 둘째 아들 다비드가 태어났지만, 언드라시 1세는 기쁨을 채 누리기 전에 뇌졸중에 걸려서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죽으면 동생 벨러가 두 아들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왕실 고문들은 벨러를 죽이라고 권했지만, 언드라시는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기에 벨러에게 셜러몬을 위해 은퇴하기를 권하기로 했다.

1059년, 언드라시 1세는 벨러를 티서바르코니의 별궁으로 초대한 뒤 그에게 왕관과 검을 내밀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지시했다. 왕관은 왕국을, 검은 두카트를 상징했다. 벨러가 왕관을 선택한다면 왕의 추종자들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것이고, 그가 검을 가져가면 그는 자신이 맡은 영지에서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벨러가 한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벨러의 추종자인 미클로스가 "오래 살고 싶으면 검을 선택하십시오."라고 속삭였다. 벨러는 그 말에 따라 검을 선택했고, 언드라시는 동생을 돌려보냈다.

그 후 벨러는 형이 언젠가는 자신을 해칠 거라 여기고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의 지원을 받아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는 이에 맞서 아녜스 황후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보헤미아, 작센에서 파견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몬슨 인근에서 맞붙었고,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벨러가 승리했다. 언드라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사전에 탈출로를 차단한 벨러의 기병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후 바코니 숲의 지르크 저택에 갇혀 지내다 1060년 12월 6일 이전에 사망했다.

형을 타도하고 왕위에 오른 벨러 1세는 형의 아내와 자식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켜주겠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해 내란의 여지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1061년에 각 마을에서 대표 2명을 선출해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열리는 공개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그는 이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정통성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일부 대표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강요를 중단하고 마자르족 고유의 신앙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했다.

급기야 지난날 이교 회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던 바타 족장의 아들 야노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급습했고, 왕의 추종자들은 인근 요새로 도망쳤다. 벨러 1세는 일단 반란군에게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겠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사흘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이에 병력을 은밀히 끌어모은 뒤, 모든 게 자기 뜻 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던 반란군을 습격해 모조리 섬멸했다. 이후 헝가리에선 두 번 다시 이교도의 반란이 벌어지지 않았다.

1063년, 벨러 1세는 독일로 망명한 셜러몬에게 귀국을 권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셜러몬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헝가리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벨러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모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해 9월 11일, 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왕좌에 앉은 채 고심하던 중 왕좌가 돌연 부러지는 바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수하들은 급히 왕을 들것에 실어서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왕궁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은 키니저 강변에서 숨을 거두었다.

벨러 1세가 허망하게 사망한 후, 두 아들 게저와 언드라시는 폴란드로 도피했고, 셜러몬이 신성 로마 제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한 뒤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철수한 직후인 1063년 가을, 벨러 1세의 자식들이 폴란드군의 협조에 힘입어 헝가리를 공격했다. 여기에 벨러 1세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영주들이 가세했고, 민중들은 그가 독일의 꼭두각시 노릇할 거라 여기고 토벌군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적의 공세를 피해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과 가까운 모손 성으로 피신한 후 제국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는 듯 했으나, 죄르의 데죄 주교가 양측을 오가며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1064년 1월 20일, 분쟁 당사자들은 죄르에서 데죄 주교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벨러 1세의 세 아들 게저, 라슬로, 람페르트는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셜러몬과 게저는 부활절을 함께 축하했고, 1064년 4월 11일 게저가 셜러몬의 머리에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그러나 당시 설러몬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아나스타시야와 비드 주교, 에르네 주교 등이 섭정을 맡았다.

1067년,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울리히가 크로아티아 총독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영지인 크바르네르 만 일대를 공략했다. 즈보니미르의 아내 헬레나는 벨러 1세의 딸로 게저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셜러몬은 게저와 함께 즈보니미르를 도와서 이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영지를 되찾게 해주었다. 1068년 보헤미아-폴란드 전쟁 때 게저 형제와 함께 폴란드 편에 섰고, 보헤미아 공국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1068년, 오술이 지휘하는 페체네그 군대가 에르데이로 침입해 도보카(오늘날 루마니아의 더바카), 사요사르바르(오늘날 이리오아라)를 비롯한 여러 요새를 파괴하고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여기에 에르데이 서쪽에 있는 니르세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페체네그인들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본토로 귀환했지만, 셜로몬, 게저, 라슬로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도보카 인근 케를레시 언덕에서 매복 공격해 이들을 섬멸했다.

1071년, 페체네그인들이 발코 주 일대를 약탈했다. 셜러몬은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인들을 부추겼다고 여기고, 이에 보복하고자 게저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북방 요새인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 공격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난도르페헤르바르 성주 니케타시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셜러몬이 아니라 게저에게 항복하겠다고 밝혔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게다가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양측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고, 동로마 황제가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낼 때 셜러몬이 아닌 게저에게만 보낸 일로 인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1072년, 셜러몬은 게저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재개했다. 헝가리군은 니시까지 침투해 많은 제물을 확보하고 귀환했다. 그러나 이무렵 그와 게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73년 두 진영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주교들의 중재로 에스테르곰 성에서 협의 끝에 1073년 11월 11일부터 1074년 4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상대방을 꺾기 위해 동맹국을 찾았다. 셜러몬은 신성 로마 제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했고, 게저는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 공국, 폴란드 왕국으로 잇따라 사절을 보내 병력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증원군을 확보한 쪽은 셜러몬이었다. 1074년 2월 26일, 셜러몬은 독일 제후들이 보내준 병력과 함께 케메즈넬에서 게저를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게저가 바츠로 도주하자, 그는 즉시 추격했다. 그러나 게저의 남동생 라슬로와 게저의 처남인 올뮈츠 공작 오토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074년 3월 14일, 모교로드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적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한 그는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모손 성으로 달아났고, 게저와 라슬로는 헝가리의 요충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헝가리의 수도인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했다.

그 후 셜러몬은 독일과 인접한 서부 일대를 다스리면서 헝가리 왕을 자처했고, 게저 1세는 헝가리의 나머지 영토를 다스렸다. 1074년 여름, 하인리히 4세가 "저를 도와주신다면 왕국 전체를 제국의 봉토로 기증하겠습니다."라는 셜러몬의 제안을 받아들여 헝가리로 진격했다. 셜러몬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니트러에서 게저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바츠로 이동하는 동안 청야 전술로 인해 보급난에 시달리다가 퇴각했다.

게저 1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셜러몬과 화해하고 왕국을 양분하라는 답신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했다. 1075년, 그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에게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황제는 금과 에나멜로 된 왕관을 보냈는데, 이 왕관에는 "헝가리의 충실한 왕 게저"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는 훗날 성 이슈트반 왕관으로 불리는 이 왕관을 쓰고 비로소 대관식을 치렀다. 미하일 7세가 그에게 왕관을 보내준 것은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집어삼키고 있고 경제는 파탄 지경에 처한 상황에서 발칸 반도 전선이라도 평온을 유지하려면 헝가리와 친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도 했고, 게저가 동로마 제국 사령관 테오도로스 쉬나데노스의 딸 쉬나데네와 결혼했던 점도 고려되었다.

1076년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에서, 게저는 헝가리 교회의 최고 고위 성직자들을 모아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헝가리 영토의 2/3을 셜러몬에게 넘기고 나머지 1/3만 다스릴 의향이 있다고 밝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을 개시하기 전인 1077년 4월 25일에 사망했다. 게저 1세는 생전에 칼만과 알모스를 낳았지만, 그가 사망할 무렵엔 두 왕자 모두 너무 어렸기에 동생 라슬로 1세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077년 형 게저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라슬로 1세는 먼저 헝가리의 법률을 종합한 '라슬로 1세 법전(I. László I. törvénykönyve)'을 편찬했다. 그는 이 법전 서문에 "헝가리의 영주들은 도둑을 살려주거나 숨기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라고 기술했으며, 법규 중 절반 이상을 재산 보호에 할애했다. 모든 절도범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암탉의 가치보다 많은 것을 훔친 자는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실명형에 처해지며, 범인이 교회에 숨을 경우 처벌을 면하는 대신 10세가 넘는 자녀들이 노예로 팔렸다. 또한 손이나 코를 자르고 혀를 찢는 등 신체 절단형도 흔히 시행되었다.

만약 판사가 범인을 도망치게 한다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로 팔렸다. 반면 무고한 사람을 교수형에 처했을 경우 피해자의 피값만 내면 됐다. 또한 그는 왕가의 소금 독점을 정당화했으며, 귀족(nobilis)이라는 용어를 법전에 처음 드러내면서 이들에게 반역죄 등 중대한 범죄를 제외한 법적 책임에 대해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1세의 법전에 근거하여 특권적인 지위를 향유했다. 한편, 라슬로 1세 법전은 소와 말의 수출과 유통을 제한했으며, 살인자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중 2/3을 피해자의 유족에게, 1/3을 살인자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주게 했다.

1079년 겨울, 라슬로 1세는 셜러몬의 군대를 격파하고 몬손 성을 공략했다. 셜러몬은 하인리히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던 하인리히 4세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을 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입지가 갈수록 위태로워진 셜러몬은 1081년 봄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주고 재산을 보전해주는 대가로 왕위에서 물러나 라슬로 1세의 신하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1082년경 추종자들을 은밀히 끌어모아서 라슬로 1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비셰그라드 성에 연금되었다.

1083년 8월 20일,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라슬로 1세는 이 날을 기리기 위해 셜러몬을 특별 사면하기로 했다. 하지만 셜러몬은 아직 헝가리 왕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레겐스부르크에 있던 하인리히 4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와의 갈등 때문에 도와줄 여력이 없었고 아내 유디트 마저 외면해버리자, 그는 다시 페체네그와 연합하기로 했다. 그는 페체네그 지도자 쿠테스크(Kutesk)에게 복위시켜준다면 트란스다뉴비아를 페체네그에게 넘겨주고 쿠테스크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1085년 셜러몬은 페체네그와 함께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라슬로 1세가 반격을 개시해 문카치에서 페체네그인을 격파했다. 셜러몬은 이후에도 페체네그인과 함께 했고, 1087년 페체네그 지도자 첼구(Celgu)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 테마를 습격했다가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으로 패한 뒤 어느 산채에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087년, 하인리히 4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슈파이어에서 제국의회를 열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콘스탄츠의 베르놀트에 따르면, 라슬로 1세는 그들에게 사절을 보내 2만 마리의 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를 축출한 뒤 새 교황으로 내세운 클레멘스 3세를 인정하지 않고 빅토르 3세를 교황으로 추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셜러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에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여기고 반 황제 동맹과 거리를 두었다.

1091년, 라슬로 1세는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데메트리우스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누이인 헬레나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왕위 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해 사바 강 북쪽에 위치한 슬라보니아를 점령하고 크로아트의 왕을 칭했다. 이때 많은 크로아티아인 귀족들이 그를 받들었지만, 일부 귀족들은 페타르 스나치치를 크로아트 왕으로 세워 그와 대립했다. 라슬로 1세는 게저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모스 왕자에게 크로아트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크로아트 왕국에 대한 라슬로의 개입을 비판했지만 그 이상의 조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 후 라슬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침공하여 모르바 강과 드리나 강 사이의 지역을 공략했다. 하지만 얼마 후 쿠만인들이 카폴크(Kapolcs)의 지도하에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도나우 강과 티서 강 사이의 일대를 파괴했다. 라슬로 1세는 급히 본국으로 돌아간 뒤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려던 쿠만인들을 테메슈 강 인근에서 습격해 격파했다. 이후 생포된 쿠만인에게 기독교 개종을 제안했고, 쿠만인 대부분이 이를 받아들였다. 라슬로 1세는 이들을 야시사그에 정착시켰다.

본토에 살고 있던 쿠만인은 원정갔던 동료들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라슬로에게 당장 포로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라슬로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쿠만과 헝가리 사이의 국경 지대로 진군했다. 양측은 세베린 인근에서 격돌했고, 라슬로 1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승리했다. 라슬로는 쿠만 족장 아코스(Ákos)를 처단했다. 그러나 그가 쿠만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1092년 헝가리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성 블라시엔의 베르놀트에 따르면, 1092년 12월 하인리히 4세와 라슬로 1세가 회담을 가지려 했으나 바이에른 공작 벨프의 훼방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르바노 2세는 헝가리인들이 "구원의 목자들을 떠났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라슬로가 이 무렵에 편을 바꾸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받들기로 했음을 암시했다. 베네딕토회 소모지바르 수도원의 문서에 따르면, 라슬로는 수도원장에게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교회의 세속 권력에 대한 독립을 추구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에 반대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1092년, 라슬로 1세는 서볼치에서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해 공의회를 개최한 뒤 새 법전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주로 교회 문제를 다뤘다. 사제의 결혼은 초혼까지는 인정하지만 재혼 이상은 금지되었고, 교회의 재산이 보호되었으며, 파괴된 교회의 재건을 국고로 지원했다. 또한 헝가리로 재정착하여 세례를 받은 '이스마일인'이 무슬림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인 아내나 하인을 두는 것은 금지되었다. 또한 교회 공휴일 준수, 금식 기간 준수, 교회 옆 매장, 간음자의 처벌 등을 규정했으며, 국외에서 헝가리로 이주한 자들을 교회 근처에 정착해 주교들의 감독을 받게 했다. 여기에 십일조 징수가 규제되었으며, 왕실의 사법부는 강간, 여성의 부도덕, 주술 행위 등을 헝가리 대주교의 입회하에 처벌했다.

1093년, 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사생아인 즈비그뉴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즈비그뉴 편에 서서 폴란드로 진군하여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를 포로로 잡았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1세는 즈비그뉴를 정식 아들로 인정했다. 일루미나티드 연대기에 따르면, 1095년 부활절에 프랑스와 카스티야, 잉글랜드에서 온 사절들이 그를 찾아와서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으로 진군해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지며, 실제로 예루살렘에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던 벨러 3세의 치세 때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라슬로의 누이 에우페미아는 1073년 이전에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둘째 아들인 올뮈츠 공작 오타 1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 스바토플루크 2세, 오타 2세를 낳았다. 그런데 1087년,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후 새 왕이 된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뮈츠 공국을 볼레슬라프에게 넘기고 에우페미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추방했다. 그녀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다. 1095년, 라슬로 1세는 누이와 두 조카를 돕기 위해 보헤미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에 중병에 걸렸고, 1095년 7월 29일 헝가리-보헤이마 국경 근처 마을인 니트러에서 사망했다.

라슬로 1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형 게저 1세의 두 아들 칼만과 알모스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해야 했다. 그는 알모스를 새 왕으로 지명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숙청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폴란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로부터 병력을 빌려 헝가리로 진격했다. 알모스는 형과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형에게 왕관을 바쳤다. 1096년 초, 칼만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허락을 받아 성직자 서약에서 해방된 뒤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별다른 저항없이 왕위를 넘긴 동생에게 보답하고자 할아버지 벨러 1세가 과거에 통치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영지인 두카투스를 자율적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대관식 직후, 그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 왕국을 통과하면서 야기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헝가리인들은 그동안 서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 음식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숫자가 수 만명에 달한 데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월터가 지휘하는 첫번째 십자군은 1096년 5월 초 헝가리 국경에 도착했다. 칼만은 이들에게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월터의 십자군은 별다른 충돌없이 헝가리를 통과했다. 다만 헝가리-동로마 국경 인근의 셈린 마을에서 '나쁜 의도를 가진' 헝가리인이 16명의 십자군들을 공격해 갑옷과 무기, 돈을 탈취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1096년 5월 말 또는 6월 초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2만 명이 도착했을 때 사달이 났다. 이들은 헝가리를 통과하면서 제물을 약탈하다가 셈린 마을에서 폭동을 일으켜 4,000명에 달하는 헝가리인을 학살한 뒤 헝가리군의 보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동로마 제국군을 죽이고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했다. 이후 3번째 십자군 부대가 니트러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약탈하다 현지인들에게 쫓겨났다.

4번째 십자군 부대는 6월 중순에 모손에 도착했다. 칼만은 다른 부대가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했는데, 이들이 식량과 포도주를 얻기 위해 인근 정착촌을 자주 기습하여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데다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죽이기까지 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부관을 십자군에 보내 식량을 공급하며 동로마 제국으로 보내줄 테니 무장을 해제하라고 권했다. 십자군이 이를 믿고 무기를 반납하자, 헝가리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동로마 제국으로 이송하는 척했다가 7월 초 펀논헐머 인근에서 전원 학살했다.

1096년 7월 중순, 플론헤임의 에미코 백작이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로 진입하려 했다. 칼만은 이들의 입국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에미코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선을 뚫고 모손을 포위 공격했다. 십자군이 투석기를 활용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8월 15일 성벽이 두 지점에서 허물어지면서 십자군이 요새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공황 상태에 빠졌고, 모손 수비대가 그 틈에 출격하여 십자군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대다수 십자군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에미코는 소수의 추종자만 거느린 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아났다.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에미코의 패배는 수많은 유대인을 말살한 순레자들에게 신이 가한 징벌이라고 여겼다.

1096년 9월, 교황청이 조직한 최초의 십자군 부대가 헝가리 국경에 도착했다. 이들의 지휘관인 하(下) 로트링겐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칼만에게 기사를 보내 십자군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칼만은 고심 끝에 8일만에 인질을 내준다면 헝가리를 통과하게 해주겠다고 답했다. 십자군은 도나우 강 우안을 따라 평화롭게 행군했고, 칼만과 그의 군대는 왼쪽 둑을 따라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고드프루아의 군대가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인 사바 강을 건넌 후에야 인질들을 풀어줬다.

이리하여 십자군 문제를 해결한 뒤, 칼만은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 착수했다. 1097년, 그는 지난날 선대 왕 라슬로 1세 대에 헝가리 왕국에 일부 병합되었지만 여전히 헝가리에 복종하지 않는 크로아트 왕국을 침공했다. 페타르 스나치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인은 카펠라 산맥에서 항전했지만 그보즈드 산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나치치는 전사했다. 헝가리군은 아드리아 해에 도달하여 중요한 항구 거점인 비오그라드나모루를 점령했다.

헝가리군의 위협을 받은 트로기르, 스플리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베네치아 도제 비탈 2세 미키엘이 이끄는 해군이 함대를 이끌고 달마티아에 접근하자, 함대가 따로 없었던 칼만은 도제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협상 결과, 베네치아는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을 헝가리가 가지는 대신 달마티아는 베네치아가 갖기로 했다.

칼만이 크로아트 왕국을 병합하고 왕을 자처하던 사이, 알모스는 그가 부재한 틈을 타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본국으로 귀환한 뒤 1098년 동생이 다스리고 있던 두카투스를 향해 진격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벌어지는 듯햇지만, 양군 지휘관들이 동족끼리 싸우기를 원하지 않아 두 사람에게 화해할 것을 강권하면서, "그렇게 싸움이 좋다면 결투를 해라. 우리는 이기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화해하기로 했다.

1099년,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폴크 2세가 아들 야로슬라프를 헝가리로 보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공작 토벌에 힘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칼만은 군대를 이끌고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반란 지도자인 볼로다르 로스티슬라비치의 성인 페레미쉴을 포위했다. 이에 볼로다르의 동맹인 다비트 이고레비치는 쿠만인들을 설득해 헝가리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헝가리군은 쿠만인의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참패했고, 칼만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칼만은 보헤미아 공작 브레슬라프 2세의 맹공을 받고 있는 모라바 변경백이자 아르파드 왕조의 친척인 스바토플루크와 오토 2세를 돕기 위해 달려가서 두 사람을 구원했다.

3.2. 12세기

1100년, 칼만은 전임자들의 칙령을 재검토해 라슬로 1세의 법전을 현실에 맞게 개정한 새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스트릭스(strix: 아기의 배를 갈라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알려진 전설의 새)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새를 잡으려 했다가 애꿎은 짐승을 잡을 수 있다"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헝가리 노예와 말의 수출을 금지했고, 경제 활동의 다양한 측면에 규제를 가했다.

1102년, 그는 알바 마리티마에서 크로아트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크로아트 왕국의 모든 영토를 헝가리 왕국에 병합했다. 1104년 또는 1105년,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보에몽 1세의 디라히온 침공에 대처하던 중, 보에몽이 칼만과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하고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안니스 2세와 칼만의 사촌인 피로슈커의 결혼을 주선했다. 마침 칼만 역시 세력 확장에 공을 들이는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과 공연히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서 남부 전선을 안정시킨 뒤, 칼만은 1105년 달마티아를 침공하여 트로기르를 포위 공격했다. 트로기르 시는 몇 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칼만에게 복종했다. 뒤이어 포위된 스플리트 시 역시 곧 항복했으며, 다른 달마티아 도시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1105년, 칼만은 4살된 아들 이슈트반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동생 알모스가 헝가리를 떠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의 반란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상황이라 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알모스는 1106년 폴란드의 군주 볼레스와프 3세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응해 헝가리로 쳐들어가 아바우이바르(Abaújvár)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칼만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폴란드군과 대치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군이 생각보다 강력한 걸 확인하고 전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칼만과 볼레스와프 3세는 서로 만나서 담화를 나눈 끝에 영원한 우정을 맺고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의했고, 알모스는 어쩔 수 없이 칼만에게 복종했다.

1106년 10월, 칼만은 교황 파스칼 2세가 소집한 과스탈라 공의회에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헝가리 왕이 자신의 영토에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특권을 사임했음을 알렸다. 교황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칼만의 달마티아 정복을 승인했다. 이후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뉴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볼레스와프 3세를 지원하여 즈비그뉴를 폴란드에서 축출하는 데 일조했다. 1107년 10월에는 보에몽과 싸우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며, 1108년 보에몽이 알렉시오스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안티오키아의 통치권을 황제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의 데볼 조약을 체결했을 때 증인으로 참석했다.

1107년 또는 1108년, 알모스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칼만은 동생이 부재한 틈을 타 두카투스를 몰수했다. 이리하여 헝가리 전역이 칼만의 통치하에 돌아갔다. 성지에서 귀환한 알모스는 도모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칼만은 수도원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한 고발자로부터 알모스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고변을 받자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헝가리의 주교들과 여러 고위 인사들이 알모스를 변호했고, 칼만은 알모스와 손을 맞잡고 화해했다. 그러나 형이 언젠가 자신을 제거할 거라 확신한 알모스는 하인리히 5세를 찾아가 파사우에서 접견한 후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5세는 그의 요청을 수락해 1108년 9월 헝가리를 침공해 포조니를 포위했다. 이에 칼만과 동맹을 맺은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가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하인리히 5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하기로 했다. 다만 칼만에게 알모스를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신성 로마 제국을 적대하고 싶지 않았던 칼만은 알모스가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칼만은 달마티아를 순방하며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의 특권을 인정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113년, 그동안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섰던 동생 즈비그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가 형제를 해친 것을 속죄하고자 헝가리의 소모기바르 수도원을 순례했다. 칼만은 소모기바르에서 폴란드 군주를 정성껏 영접했다. 얼마 후, 그는 알모스가 또다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여긴 칼만은 알모스와 알모스의 어린 아들 벨러를 실명시키고 그의 추종자들을 신체 절단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일루미네이티드 연대기의 한 사본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벨러를 거세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집행인이 차마 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없어서 개를 거세한 뒤 그 고환을 왕에게 가져왔다고 한다.

그 후 칼만은 뇌염으로 추정되는 질환에 시달리다가 1116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헝가리인은 이에 대해 형제와 조카를 잔혹하게 해친 일로 신의 징벌을 받았다고 여겼다고 한다.이후 장남 이슈트반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국제 정세는 그에게 불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후원해준 알모스를 잔혹하게 숙청한 칼만에게 불만을 품었고, 교황청과의 주교 선임 분쟁에서 헝가리가 교황 편에 선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보헤미아 공작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헝가리와 대결했고, 칼만에게 달마티아를 빼앗긴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헝가리를 적대했다.

그는 사방이 적국인 상황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와 헝가리-모라비아 국경 지대의 오슬라바 강에서 만나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서로간의 입장차가 커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16년 5월 13일 양측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격돌했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코즈마 프라가이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수많은 헝가리인의 시신이 레흐 강을 따라 흘러내려갔다고 한다. 그에게는 다행히 보헤미아 공국에서 공작의 자리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덕분에 보헤미아군이 헝가리 국내로 몰려오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내전을 피해 헝가리로 이주해온 보헤미아인들을 받아들였다.

1116년 5월, 베네치아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로가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후원에 힘입어 달마티아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에 착수했다. 1116년 6월 29일, 베네치아군은 자라 인근에서 클레딘이 이끄는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 등 주요 도시를 확보했다. 이리하여 달마티아 전체가 베네치아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헝가리군은 순순히 달마티아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클레딘은 군대를 수습한 뒤 수 년간 베네치아를 향한 공세를 펼쳤다. 1118년, 오르델라포 팔리에로는 자다르 인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비오그라드, 스플리트, 토르기르 등을 탈환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제 도메니코 미켈레가 반격에 착수해 헝가리군을 또다시 몰아내고 달마티아 전역을 확보했다.

1119년, 전쟁에 지친 양국은 5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1124년, 이슈트반 2세는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달마티아를 공격해 스플리트와 트로기르 등 달마티아 중부 지역을 탈환했다. 그러나 1125년 봄 베네치아 함대가 돌아와서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 이때 비오그라드와 모루 시민들이 베네치아군에 저항했다가 철저하게 학살당하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슈트반 2세는 이후로 달마티아를 탈환하지 못했다.

한편, 이슈트반 2세는 분열된 키예프 루스를 통합하려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를 막기 위해 블라디미르에게 추방당한 볼히니아 공작 야로슬라프를 지원했다. 헝가리군은 키예프로 진군해 포위전을 벌였지만, 도중에 야로슬라프가 사망해버렸다. 이슈트반 2세는 그래도 포위 공격을 계속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이 통치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와야 했다.

집권 이래로 실패를 연이어 겪은 그에게 반감을 품은 지방관들은 칼만에게 실명당한 뒤 유폐생활을 하던 알모스를 지원했고, 교회를 강하게 통제하려는 아버지의 종교 정책을 받든 그에게 불만을 품은 교회 세력 역시 알모스를 후원했다. 이에 알모스는 1125년 또는 1126년에 반란을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당하자 아들 벨러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속한 페치바러드(Pécsvárad)로 도피했다.

1126년 가을, 이슈트반 2세는 보헤미아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작에 오른 소베슬라프 1세와 만나 화해하기로 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오스트리아 공작과도 화해했다. 반면 정적인 알모스를 받아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슈트반 2세는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에게 알모스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요안니스 2세는 오히려 알모스를 성대히 환대했다. 요안니스 2세의 황후이자 라슬로 1세의 딸이었던 헝가리의 이리니는 양국의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126년, 이슈트반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서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한 뒤 소피아를 거쳐 플로브디프까지 진격했다. 이에 요안니스 2세는 군대를 보내 헝가리 국경 안까지 반격을 가했다. 이후의 진행과정은 기록이 부실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헝가리가 먼저 공격하고 동로마 제국이 반격하는 패턴이 수년간 반복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던 1127년 9월 1일 알모스 왕자가 사망했지만, 양국의 적대 행위는 종식되지 않았다. 그러던 1128년, 이슈트반 2세는 하람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에게 참패하여 10,000 명에서 15,000명에 달하는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인만이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은 도나우 강과 사바 강 사이에 위치한 곡창지대인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철저히 약탈한 후 귀환했다.

1128년 말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시작한 세르비아 공작 우로슈 1세와 동맹을 맺고 1129년 공세를 개시해 브라니체보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다시 쳐들어와서 헝가리군을 격멸하고 헝가리의 도시인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결국 이슈트반 2세는 1129년 말 평화 조약을 맺고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신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았다.

1128년, 보리스 칼라마노스와 이반 백작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해 위상이 떨어진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남은 추종자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이에 가담한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지가 날로 약화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던 그는 1128년 또는 1129년에 알모스의 아들인 벨러와 화해하고 그를 토리나에 정착시킨 뒤 왕족에 적합한 대우를 받게 했다. 이에 벨러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접으면서, 헝가리의 혼란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는 일련의 실패에 고통스러워한 끝에 건강을 해쳤고, 오랜 투병 끝에 1131년 3월 1일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후계자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헝가리 국왕은 2달이 지나도록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1131년 4월 28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펠리키안의 주도로 지난날 칼만에 의해 아버지 알모스와 함께 실명되었던 벨러가 벨러 2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집권한 후, 헝가리 정계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과거에 그를 추종했던 이들은 지위를 얻었지만, 칼만과 이슈트반 2세를 지지했던 이스판들을 비롯한 지방관들은 권력에서 쫓겨났다. 특히 그를 실명시키는 데 관여한 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엘레니 왕비가 모든 재판과 집행을 주관했고 68명에 달하는 귀족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편, 칼만의 사생아 보리스는 이슈트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해외에 망명했다. 그러다가 실명한 벨러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왕위를 빼앗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폴란드로 가서 볼레슬라프 3세의 지원을 받았다. 벨러는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변경백과 군사 동맹을 맺고,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리스는 칼만의 아들이 아니니 다들 사칭범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1322년 7월 22일, 사요 강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보리스와 볼레슬라프 3세의 폴란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보리스는 폴란드로 달아났고, 벨러 2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헝가리 왕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벨러는 여세를 몰아 폴란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보헤미아의 소조슬라프 1세,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와 손을 잡고 폴란드 공격을 획책했다. 여기에 1136년 중앙 달마티아를 헝가리의 지배에 복속시켰고, 1137년경 네레트바 강의 지류인 라마 강 계곡을 공략하고 자신의 칭호에 '라마의 왕'을 추가했다. 또한 1139년 키예프 대공 야로폴크 2세가 브세볼로드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지원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관계를 개전하기 위해 1139년 6월에 자신의 딸 소피아와 새로운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약혼을 주선했지만 무산되었다.

벨러 2세는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와 맞서고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해, 이에 대한 보답으로 헝가리의 교회들을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용인받았다. 그는 국내 교회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교회에 많은 기부금을 냈다. 1137년 화재로 소실된 펀논헐머의 수도원은 그의 지원에 힘입어 재건되었다. 하지만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실명형으로 발생한 장애로 인해 국왕으로서 통치하기 힘들어 했고, 엘레니 왕비가 왕을 대리해 통치를 행사했다.

1141년 2월 벨러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게저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11살 소년이었기에 어머니 엘레니와 외삼촌인 벨로스가 국가를 통치했다. 벨로스는 15년간 왕국의 최고위직인 반(Ban)을 맡아 국정을 주도했다. 자신을 칼만의 아들이라 칭하며 벨러 2세 치세 때 폴란드의 힘을 빌려 헝가리 왕위를 찾으려 했다가 패배한 뒤 조용히 지냈던 보리스는 칼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음모를 꾸몄다. 1145년, 그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로부터 헝가리 왕으로 옹립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공국은 헝가리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1140년 보헤미아 통치자 소조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블라디슬라프 2세가 소조슬라프 1세의 아들을 몰아내고 공작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게저의 친척이었던 즈노이모의 콘라트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가 반란군을 지원했다고 여기고 이를 보복하고자 보리스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독일왕 콘라트 3세를 찾아가서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세워준다면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겠다고 제의했다. 당시 콘라트 3세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를 벨러 2세의 딸이자 게저의 누이인 소피아와 약혼시켰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피아를 아드몽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보냈다. 헝가리 궁정은 자국의 공주를 그런 식으로 대우한 것에 분노했다. 콘라트 3세 역시 헝가리가 자신을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참에 순종적인 사람을 헝가리 국왕으로 앉히기로 하고 보리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1146년, 보리스는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을 이끌고 헝가리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공략했다. 게저는 즉시 친정에 나서 보리스를 격파하고 포조니를 탈환했다. 여기에 콘라트 3세의 정적인 바이에른 공작 벨프 6세와 접촉해 그에게 재정을 지원하여 콘라트 3세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부추겼다. 1146년 9월 11일, 게저는 벨루스와 함께 라지타 인근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야소미르고트를 격파했다. 콘라트 3세는 보복을 원했지만, 때마침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일단 십자군에 가담하기로 했다.

1147년,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십자군을 자처하며 동방으로 진군했다. 보리스는 콘라트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헝가리 측의 반발로 십자군이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한 콘라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헝가리를 행진하자, 게저는 그를 매우 따뜻하게 환영하며 갓 태어난 아들 이슈트반에게 행할 세례식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보리스는 프랑스군에 몰래 들어가 있었다. 게저는 이 사실을 파악하고 루이 7세에게 보리스를 넘기라고 요청했다. 루이 7세는 게저 2세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보리스가 헝가리인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해 헝가리를 지나는 동안 별다른 말썽이 일어나지 않게 했다.

한편, 프셰미실의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의 지원을 받으며 이웃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고 1141년 할리치나 공국을 세웠다. 키예프 루스 대공 프세볼로트 2세는 그를 조기에 꺾어놓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여기고 다른 루스 공작 및 폴란드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고 할리치나를 공략하기로 했다.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벨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할리치나로 가서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볼로디미르코는 키예프 루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복종했다.

1146년 가을, 그는 키예프 루스의 새 대공 이자슬라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전 대공 므스티슬라프 1세의 딸 에우프로시네와 결혼했다. 1147년 여름, 이자슬라프 2세는 자신의 측근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허가 없이 키예프 대주교로 선출했다. 이에 분개한 동로마 제국은 할리치나의 볼로디미르코를 후원해 키예프에 반기를 들게 했다. 볼로디미르코는 수즈달 공작 유리 돌고루키와 동맹을 맺고 이자슬라프 2세와 대적했다. 1149년 8월 23일, 이자슬라프 2세는 수즈달과 할리치나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키예프를 탈출했고, 유리 돌고루키가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이자슬라프 2세의 구원 요청을 받은 게저 2세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얼마 후 동로마 제국과 세르비아 공국의 전쟁이 벌어지자 이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키예프에 파견했던 병력을 철수시켰다.

1149년, 세르비아 공국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로 출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세르비아 반란 소식을 듣자 원정을 중단하고 세르비아로 진격했다. 게저는 동로마 제국에 맞서는 세르비아인에게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러나 그해 9월에 타라 강에서 동로마 제국군에게 패배했고, 스테판 우로슈 2세는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149년 가을, 게저는 할리치나의 볼로디미르코를 상대로 진군해 사노크를 함락시켯다. 이에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 사령관들에게 뇌물을 줬고, 게저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따라 11월 이전에 할리치나 일대에서 철수했다.

게저 2세가 할리치나에 출전한 동안, 마누일은 헝가리에 대한 보복 작전을 개시하여 사바 강과 도나우 강 사이의 땅을 황폐화시켰으며, 보리스도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 침입해 테메슈 강 계곡을 황폐화시켰다. 할리흐에서 돌아온 게저 2세는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치 않아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150년 말 또는 1151년 초에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 무렵, 이자슬라프 2세는 1150년 유목민들을 고용해 키예프를 탈환하고 대공에 복위했지만, 유리 돌고루키는 할리치나의 지원으로 그해 여름에 다시 키예프를 공략했다.

1151년 초,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한 게저 2세는 1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자슬라프 2세에게 보냈다. 이자슬라프 2세는 이들과 함께 키예프로 진군했고, 유리 돌고루키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항복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이 돌아가자마자 수즈달과 할리치나가 재차 도전해오자, 이자슬라프 2세는 아들 므스티슬라프를 게저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헝가리군이 키예프에 도착했을 때, 이자슬라프 2세는 이미 유리를 격파했다. 이에 그들은 곧 전쟁이 끝날 거라고 방심하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블라디미르코는 이 때를 틈타 어느 날 새벽에 숙면을 취하고 있던 헝가리 진영을 습격해 학살을 자행했다.

게저 2세는 패전 소식에 몹시 분노했다. 1152년, 그는 72개 주 및 왕실에서 소집한 대병력을 이끌고 할리흐를 향해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이자슬라프 2세와 연합한 뒤 산 강 인근에서 블라디미르코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블라디미르코가 달아난 프셰미실 요새를 포위했다. 블라디미르코는 사절을 보내 게저의 아버지 벨러 2세를 위해 폴란드에 맞서 싸웠던 일을 거론하면서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음이 약해진 게저 2세는 블라디미르코가 이자슬라프 2세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반환하고 키예프 대공과 동맹을 맺게 하는 선에서 종결시켰다. 이리하여 키에프 문제를 매듭지은 뒤, 게저 2세는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로 하고 1152년 당시 5살이던 큰 아들 이슈트반을 공동 통치자로 삼고 동생인 라슬로 2세와 이슈트반 4세에게 공작 직위를 수여했다.

이 무렵 독일왕으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더 커지기 전에 손을 봐야겠다고 여겼다. 1152년 6월,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의회에서 제후들에게 헝가리와의 전쟁을 단행하려 하니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자기 일도 바쁜데 굳이 헝가리와의 전쟁에 참여할 이유는 없다고 보고 거부했고,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 침공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153년 봄, 게저 2세는 도나우 강 하류의 동로마 제국 속주인 파리스트리온을 침공해 지난날 마누일 1세가 자국을 황폐화시킨 것에 보복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눈치챈 마누일 1세가 도나우 강으로 진군하자, 게저 2세는 사절을 보내 사느디차에서 새로운 평화 협약을 맺고 헝가리 전쟁 포로들을 돌려받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게저는 광대한 헝가리 평원에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모든지 다 한 군주였는데 기독교 군주이기는 하나 무슬림까지 받아들였다. 1150년부터 1153년까지 헝가리를 여행했던 그라나다 출신 무슬림 여행자 아부 하미드 알 가르나티에 따르면, 게저 2세는 유라시아 스탭 지역에 거주하던 무슬림 병사들을 고용해 잘 대접했는데, 심지어 그들이 첩을 들이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또한 독일 기사들을 초빙해 헝가리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특히 작센인들이 이 시기에 헝가리로 이주하여 게저 2세에 의해 에르데이 남부에 정착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게저 2세가 무슬림 장병들을 고용하고 첩을 맞이하는 것을 허용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헝가리 교회의 "신앙과 규율"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게저 2세는 교황 사절단의 입국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헝가리와 교황청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1154년 10월, 새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는 게저 2세가 달마티아를 통치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선언했지만 무시당했다. 이 무렵,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게저 2세에게 자신이 마누일 1세로부터 황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난도르페헤르바르, 니시, 브라니체보를 넘기겠다고 제의했다. 게저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154년 말 동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어 브라니체보를 포위했다.

얼마 후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되어있던 안드로니코스가 체포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게저 2세는 헝가리로 귀환했다. 동로마 장군 바실리오스 틴트루체스(Basil Tzintziluces)가 헝가리군을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섬멸되었다. 1155년 초, 남이탈리아 원정을 막 단행한 마누일 1세는 헝가리와 쓸데없이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보고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제안했고, 게저 2세 역시 받아들였다. 그 후 동로마군은 게저와 동맹을 맺었던 데사를 세르비아에서 몰아내고 스테판 우로슈 2세를 헝가리와 동맹을 맺지 않는 조건하에 세르비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1156년 7월, 마누일 1세가 보낸 사절단이 뉘른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1세와 접촉하여 헝가리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지만, 그해 9월 16일에 제국에 속한 제후들은 황제가 치르는 모든 전쟁에 군대를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규정한 헌장을 발표하는 등 전쟁을 준비했다. 1157년 여름, 프라하의 대주교이자 프리드리히 1세의 측근인 다니엘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싶었던 게저 2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북이탈리아로 침공한다면 보조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게저 2세에 의해 공작에 선임된 동생 이슈트반은 그동안 헝가리를 이끌었던 벨로스와 다른 지방관들과 함께 게저 2세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게저 2세는 음모를 알게 되자 즉시 대응에 나서 이슈트반의 반역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벨로스가 1157년 3월 이후에 발행된 헝가리 왕실 헌장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슈트반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 1158년 1월, 게저 2세는 레겐스부르크에 사절을 보내 이슈트반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중재를 해주겠다는 약속만 할 뿐 돌려보내지 않고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쟁을 위해 북이탈리아로 떠났다. 게저 2세는 일단 프리드리히 1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사전에 맺은 약속에 따라 5~600명의 궁수대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냈다.

얼마 후, 이슈트반은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마누일 1세의 조카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고, 1160년경 헝가리에서 게저 2세의 숙청을 피해 달아난 형제 라슬로와 합세했다. 1158년 9월,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일시적으로 굴복시켰지만, 곧 밀라노와 크레모나에서 반란에 직면했다. 게저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좀더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1159년 9월 1일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사망한 뒤, 차기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3세가 취임했다. 그러나 일부 추기경들은 옥타비아누스 추기경을 대립교황 빅토르 3세로 내세웠고, 프리드리히 1세는 빅토르 3세를 지지했다. 게저 2세는 1160년 2월 빅토르 3세를 선출한 파비아에 사절을 보내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에스테르곰의 대주교 루카스는 알렉산드레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게저 2세에게 알렉산데르 3세를 인정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을 포함한 대다수 유럽 군주들이 알렉산데르 3세 지지를 표명하자 루카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61년 초, 게저 2세의 사절단은 로마에 방문해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후 1161년 여름 교황청의 동의 없이 고위 성직자들을 폐위시키거나 이송하지 않는 대가로 달마티아 지배를 인정받는 내용의 협약을 교황청과 맺었다.

1162년 5월 31일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이슈트반 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는 자국으로 망명한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새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곧 자신이 마누일 1세의 조카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한 것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상대적으로 인기가 많은 형제 라슬로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데다 황제로부터 뇌물을 듬뿍 받자 라슬로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라슬로는 순식간에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공략한 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에게 대관식을 주관하라고 요구했다. 루카스가 이를 거부하며 저주를 퍼붓자, 라슬로는 루카스를 감옥에 가두고 1162년 7월 중순 컬로처 대주교 미코의 주관하에 라슬로 2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편 이슈트반 3세는 지지자들과 함께 포조니로 도주했다.

라슬로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일찍이 게저 2세가 교황청과 맺었던 "교황청의 동의 없이 고위 성직자들을 폐위시키거나 이송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고 루카스를 석방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저주를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라슬로 2세가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 라슬로 2세는 이에 격분해 루카스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공교롭게도 1163년 1월 14일에 돌연 사망했다. 이후 라슬로의 추종자들은 그의 형제 이슈트반을 이슈트반 4세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4세는 동로마 제국에 편향적인 정책을 추진했기에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슈트반 3세는 이 때를 틈타 이스판들을 회유해 자신에게 가담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을 모집했다. 1163년 6월 19일, 이슈트반 3세는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숙부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로써 왕위에 복귀한 이슈트반 3세는 감옥에서 풀려난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의 조언에 따라 이슈트반 4세를 석방했다. 이슈트반 4세는 처음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 마누일 1세는 그를 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헝가리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블라디슬라프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결국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또한 동생인 벨러를 동로마 제국의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아울러 볼모로 온 벨러를 융숭하게 대접해 이름을 알렉시오스로 개명하게 한 후 자신의 딸인 마리아 콤니니와 약혼시킨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오스트리아-할리치나의 지원군을 받고 이슈트반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면서,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설득하라고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달마티아 해안지대를 침공해 자다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 일대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1165년 봄에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이슈트반 4세를 포위했다. 마누일 1세는 협약을 위반한 이슈트반 3세를 응징하려 했지만, 때마침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대신, 이전에 이슈트반 3세를 지지했던 군주들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이슈트반 4세를 지모니 요새에 몰아넣고 포위 공격했고, 이슈트반 4세는 1165년 4월 11일 농성 도중 독살당했다.

이리하여 내전을 종식했지만, 곧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의 반란을 진압한 마누일 1세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했다. 마누일 황제가 친히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은 지모니를 순조롭게 탈환했고, 또다른 분견대는 보스니아와 달마티아로 쳐들어가 공략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도 동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일전에 잃어버렸던 자다르를 탈환했다.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시르미움과 달마티아를 완전히 포기하는 조건하에 마누일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한편 좀처럼 아들이 없던 마누일은 예비 사위인 벨러를 데스포티스 칭호를 하사해 후계자로 삼아 역으로 헝가리 왕국을 동로마 제국령으로 합병시키려고 했다.

1166년 봄, 이슈트반 3세가 시르미움을 재차 침공해 현지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지모니를 제외한 모든 시르미움 일대를 탈환했다. 마누일 1세는 즉각 3개의 분견대를 급파했다. 알렉시오스 악수흐는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러 3세를 대동한 채 다뉴브 강으로 진격했고, 레온 바타체스와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2개의 분견대들은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이슈트반 3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중재 하에 마누일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1166년 연말에 하인리히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1167년, 이슈트반 3세는 달마티아를 침공해 동로마 총독 니키포로스 찰루페스를 사로잡고 그 일대를 장악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시르미움에 군대를 파견하고 함대를 지모니에 집결시켰다. 헝가리군은 이에 맞서 독일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해 동로마군의 침략을 근절하려 했다. 그러나 1167년 7월 8일에 벌어진 시르미온 전투에서, 바치 이스판 데네시가 이끄는 헝가리 주력군 15,000명이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궤멸되었다. 결국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동로마 제국이 달마티아, 시르미온, 크로아티아를 가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비탈레 2세 미키엘와도 평화 협약을 맺고 1167년 12월 17일에 도제의 아들 니콜라오에게 조카딸 마리아를 아내로 주었다.

1169년 마침내 아들을 보게 된 마누일은 헝가리를 동로마 제국에 합병시키려는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아울러 벨러의 데스포티스 칭호는 그대로 둔 체로 마리아 콤니니와의 약혼 또한 백지화시킨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에게 더 이상 도전하지 않으면서도 독일인들에게 세제 해택을 부여해 헝가리로 이주하게 하는 등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려 노력하다가 1172년 3월 4일에 사망했다. 이슈트반 3세에게는 남겨진 후계자가 없어기에, 동생 벨러가 유력한 후계자였다. 헝가리 귀족들은 마누일 1세에게 벨러 왕자를 귀국시켜달라고 청했다. 마누일은 제국을 다시는 적대하지 않고 봉신의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뒤 벨러를 돌려보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가 제국의 앞잡이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대관식 주관을 거부하자,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가 부재한 경우에는 컬로처 대주교가 그를 대신해 왕좌에 오를 왕자에게 기름 부을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벨러는 1173년 1월 1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벨러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1173년 왕위에 오른 벨러 3세는 어머니 에우프로시네와 남동생 게저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보고를 접했다. 벨러는 어머니를 예루살렘으로 추방했고, 게저를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게저는 1174년 또는 1175년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가 게저를 인도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벨러는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2세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177년, 소베슬라프 2세는 게저를 체포한 뒤 헝가리에 보냈고, 벨러는 동생을 다시 한 번 지하감옥에 수감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와 협력해 자신의 봉신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피해를 입힌 소베슬라프 2세에게 분노해 그를 폐위시키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또다른 구성원인 베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벨러가 오스트리아를 위협하자, 레오폴트는 보헤미아로 진격하던 군대를 돌려야 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벨러는 동로마 제국에 협조했다. 1176년 마누일 1세가 룸 술탄국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을 때, 그는 보조군을 파견했다. 그러면서도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서유럽에 학생들을 유학보내서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의 치세 동안 많은 이들이 외국 대학에서 공부해 학자로 거듭났는데, 그 중에는 훗날 헝가리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를 집필한 아노니무스도 있었다. 또한 벨러는 프랑스 왕국 출신 수도자들을 초빙하여 헝가리 수도원에 배속시켰고, 기존의 수도원들과 새로 설립된 수도원들에게 폭넓을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던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11살의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가 등극했다. 모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지만,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마리아 콤니니 부부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등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제국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한편, 지난날 마누일 1세에 맞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흑해의 해안지대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수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해듣고 오래도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어린 황제를 위해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봉기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제국이 안드로니코스의 봉기로 인해 혼란스러워지자, 벨러는 마누일 1세와 맺었던 맹약을 깨뜨리고 공세를 개시해 1181년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탈환하고 자라 시를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보호시로 삼았다. 1182년 5월,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수도원에 보내진 마리아 황후가 벨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벨러는 이에 따라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공격해 그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반역죄로 고발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한 뒤 디오메데스 수도원 근처에 있는 좁은 지하감옥에 수감시켰다. 이후 1182년 말 마리아를 처형하고 시신을 바다에 내던졌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이 생길 것을 우려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재한 모든 마리아의 상을 훼손하거나 파괴했다.

1183년 초, 벨러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는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니시와 세르디카를 공략하고 세르디카에서 릴라의 성 이반의 유품이 담긴 관을 탈취했다. 1183년 10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이에 반발한 이들이 제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185년에는 시칠리아 왕국이 쳐들어왔다. 벨러 3세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이어가 동로마 제국의 북방 영역을 약탈했다.

1185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되고 이사키오스 2세가 등극한 후 시칠리아 왕국을 격파하자, 벨러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이사키오스는 왕이 되기 전인 1185년 1월에 벨러의 딸 머르기트와 결혼한 바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사위에게 딸의 지참금 형식으로 니시와 바랑크 일대를 돌려줬다. 이때 릴라의 성 이반 유품도 세르디카로 반환되었다.

1184년 아내 아그네스가 사망한 뒤 독신으로 지내던 벨러는 1186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레테와 재혼했다. 1187년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자라를 탈환하고자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좀처럼 성벽을 뚫지 못하다가 헝가리군이 인근에 이르자 철수했다. 1188년 말 할리치나 공작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보야르들의 반란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볼히니아 공작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할리치나를 차지했지만, 벨러가 할리치나로 쳐들어오자 볼히니아로 도피했다. 벨러는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를 할리흐 공작으로 되돌려놨지만 그를 계속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인 언드라시를 할리치나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

1189년 여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던 중 헝가리를 통과했다. 벨러는 십자군을 환대했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그때까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게저 왕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고, 아내 마르그레테도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다. 이에 벨러는 십자군에 따라간다는 조건하에 게저를 석방시켰고, 게저는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 동방으로 향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와 이사키오스 2세간의 갈등이 불거지자, 벨러는 두 군주를 중재해 평화 협약을 맺게 했다.

1189년 또는 1190년, 헝가리에 억류되어 있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탈출하여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2세의 지원에 힘입어 할리치나를 탈환하고 공국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벨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1193년 초 세르비아 공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자 출진했지만, 세르비아를 제국의 영역으로 여겼던 이사키오스 2세가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자 도로 거두었다. 한편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라를 탈환하고자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격퇴되었다. 그리고 이기간에 지중해 방면으로 아크레로 향하다가 시칠리아 왕국령인 메디나에 장기간 주둔중이었던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연합군에 식량을 지원해 줬다.

1194년, 장남 임레를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1194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참패한 이사키오스 2세가 보복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지원을 요청하자, 벨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전국에 군대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1195년 4월 원정을 준비하던 이사키오스 2세가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폐위되면서, 불가리아를 향한 협공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겠다고 서약하고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으나, 1196년 4월 23일에 병사했다.

1196년 죽음을 눈앞에 둔 벨러 3세는 장남 임레를 헝가리 왕으로 삼고, 차남 언드라시에게 많은 영지와 재산을 물려주며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군 원정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십자군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생전에 맡긴 군대를 돌려 형에게 도전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내전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197년 언드라시가 슬라보니아의 마치키에서 임레를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임레는 동생을 달마티아-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삼는 것으로 문제를 매듭지었다.

1198년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서약을 준수하고 형제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교황의 충고를 무시하고 형을 아예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끌어모았다. 임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선제 공격했고, 1199년 소모니의 라드 전투에서 언드라시를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영지에서 쫓겨난 뒤 오스트리아 공국의 레오폴트 6세에게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황이 개입해서 두 형제에게 화해하라고 촉구했다.

3.3. 13세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개입으로 1200년 양자는 타협했다. 그들은 성지로 함께 진군하기로 했고, 그들이 없을 때 오스트리아 공작이 헝가리를 다스리며, 언드라시는 공국을 되돌려받기로 했다. 또한 두 사람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상대방의 영토를 물려받기로 했다.

1201년, 임레는 세르비아에서 스테판 네마니치와 부칸 사이의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세르비아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칸과 연합하여 공세를 개시해 1202년 네마니치를 불가리아로 몰아내고 부칸을 세르비아 대공으로 세웠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그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도제 엔리코 단돌로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십자군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바람에 배 항해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다가, 이참에 이들을 이용해서 일전에 헝가리에게 빼앗긴 뒤 번번이 탈환에 실패했던 자다르 탈환에 써먹기로 했다. 십자군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1202년 여름 베네치아 함대와 함께 자다르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저하게 약탈했다.[4] 이 소식에 분노한 임레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저들을 파문시켜달라고 요청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이에 따라 베네치아와 십자군을 파문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다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공작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인노첸시오 3세는 부칸을 세르비아 공작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칼로얀에게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칼로얀은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추대할 수 있는 추기경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헝가리가 불가리아의 주교국 5곳을 점거했다며, 분쟁을 중재해주고 양국의 경계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203년 이전, 언드라시는 이스트라와 크라이나 변경백인 베르톨트 4세와 작센의 베틴 가문 출신인 아그네스의 딸인 메리니아의 게르트루드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든든한 외가를 등에 업은 언드라시는 많은 독일인 용병대를 모집한 뒤 형에게 다시 도전했다. 1203년 10월 임레와 언드라시는 바라주딘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임레는 동생을 해치는 대신 감옥에 가두었고, 게르트루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1204년 초, 교황은 레오 브란칼로니 추기경을 불가리아로 파견해 칼로얀을 불가리아 차르로 추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란칼로니는 헝가리-불가리아 국경의 케베에서 헝가리군에게 붙들렸다. 헝가리 왕 임레는 칼로얀을 헝가리로 소환하여 분쟁을 중재할 것을 촉구했지만, 교황이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풀어줬다. 11월 초 불가리아에 도착한 브란칼로니는 바실리오스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선임했고, 다음날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임레는 1198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폰소 2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1200년 외아들 라슬로 3세를 낳았다. 1204년 8월 26일에 4살된 아들을 공동 왕으로 세우고, 형제 언드라시를 석방시킨 뒤 그에게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해 그의 맹세를 받아냈다. 1204년 11월 30일 임레가 사망한 뒤, 라슬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언드라시는 1205년 초 라슬로 3세와 모후 콘스탄사를 유폐시키고 콘스탄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콘스탄사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한 뒤 추종자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에게 피신했다. 언드라시 2세는 즉각 헝가리 왕으로 등극한 뒤 레오폴트 6세에게 콘스탄사와 라슬로 3세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레오폴트 6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양자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1205년 5월 7일 라슬로 3세가 돌연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언드라시 2세는 조카를 몰아내고 고대하던 왕위에 오른 뒤 헝가리의 성, 장원 및 주들을 독일인 추종자들에게 기증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반포했다. 그 전까지는 국유지만이 기증되었지만, 이제는 나눠줄 영지가 없자 아예 사유지까지 분배하고, 세습이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언드라시의 외가 진척들을 위시한 독일인들의 위세가 강력해져, 기존의 헝가리 귀족들의 입지를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했다.

1205년 또는 1206년, 언드라시 2세는 지난날 공작으로 지냈다가 쫓겨났던 할리치나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어린 공작 다닐 로마노비치를 위협하는 체르니코프 공작 브레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와 그의 동맹자들을 물리치겠다는 명분으로 개입했고, 스뱌토슬라비치는 헝가리의 공세에 밀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공국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언드라시가 헝가리로 돌아온 후, 브세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의 먼 사촌인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를 점령하고 다니엘 로마노비치 일가를 추방했다. 다니엘 일가는 폴란드 고공 레셰크 1세에게 도주했고,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헝가리나 폴란드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레셰크 1세와 언드라시 2세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의 형제인 로만 이고레비치가 헝가리로 찾아와서 자신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만은 곧 언드라시가 보내준 헝가리군에 힘입어 블라디미르를 추방했다.

1207년, 언드라시 2세는 달마티아의 두 도시 스플리트와 오미시를 자유시로 인정하고 스플리트 대주교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헌장을 반포했다. 이후 로만 이고레비치와 보야르들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그는 헝가리 귀족 베네덱에게 군대를 맡겨 할리치나로 파견했다. 베네덱은 1208년 또는 1209년에 로만 이고레비치를 사로잡았고, 언드라시 2세로부터 할리치나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갈리시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베네덱은 보야르들을 심하게 고문하고 음탕한 행위를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보야르들은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에게 베네덱을 타도해주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므스티슬라프는 이 제안에 혹해 베네덱을 공격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208년, 게르트루트의 두 형제인 밤베르크 주교 에크베르트와 이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2세가 독일왕 슈바벤의 필리프 암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자 헝가리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에크베르트에게 세페세그 일대의 대규모 영지를 부여했으며, 게르트루트의 막내 동생 베르톨트를 1206년부터 컬로처 대주교로 세웠다. 헝가리 영주들은 독일인들을 우대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여러차례 문제제기했지만, 그는 오직 처가 친척들만을 믿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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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년 헝가리 왕국의 영역

1209년, 헝가리의 봉신인 시드가라의 도말트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자다르를 탈환했다. 그러나 1210년 베네치아 해군이 반격을 가해 자다르를 탈취했다. 한편, 로만 이고레비치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1209년 또는 1210년 초에 동맹을 맺고 베네덱을 협공해 승리를 거두고 할리치나에서 헝가리인을 몰아냈다. 1211년과 1214년 사이, 불가리아 제2제국의 보야르들이 보릴을 상대로 비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릴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는 페체네그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해 비딘을 공략하고 보릴에게 넘겼다. 그 대가로, 지난날 불가리아가 임레 왕으로부터 빼앗았던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돌려받았다.

1210년 또는 1211년,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폭정을 자행했다. 이에 보야르들이 언드라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에 망명해 있는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폴란드 고공 레셰크 1세와 손을 잡고 군대를 할리치나로 보내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다니엘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1212년 다니엘의 어머니 안나가 폴란드, 헝가리, 리투아니아와의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챙기는 것에 반감을 품고 그녀를 추방했다. 안나는 언드라시에게 피신한 뒤 자신이 할리치나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213년 여름, 언드라시는 안나를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떠났고, 게르트루트 왕비가 자신 대신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원정은 성공했고, 안나는 복위 후 자신을 반대했던 보야르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런데 독일인을 일방적으로 후대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헝가리 영주들은 왕이 떠난 사이에 독일인 왕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213년 9월 23일, 언드라시 2세가 할리치나에 출진한 동안 국정을 도맡고 있던 게르트루트는 헝가리 영주들의 습격을 받고 사지가 절단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그녀의 형제 베르톨트와 레오폴트 역시 심한 폭행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빠져나와 독일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귀국 후 이 소식을 전해듣고 페터르 이슈트반을 체포해 기둥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워낙 많아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왕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외에는 사건의 전말을 더 이상 캐지 않았다.

게르트루트가 처참하게 살해된 후 독일인의 헝가리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영지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고, 1211년 쿠만인으로부터 에르데이 방어를 위해 튜튼 기사단을 불러들인 이래 이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마련해야 했던 언드라시 2세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다. 1214년, 그는 헝가리 왕국 역사상 최초로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관을 설치했다. 최초의 재무관 데네시(Ampod fia Dénes ?~1236)는 화폐로 징수하는 형태의 특별세를 부과하고, 조폐업과 소금 무역, 관세 전반을 국가가 독점하자고 건의해 관철시켰으며, 전국에 환전상들을 보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화폐로 교환하면서 수수료를 챙기게 했다. 백성들은 품질이 떨어지고 가치가 별로 없는 헝가리 금속 화폐를 쓰는 것을 꺼렸고, 화폐 사용을 강요하는 정부에 불만을 품었다. 반면 귀족들은 왕의 묵인 아래 소농들이 소유하는 사유지를 화폐로 매입하여 대지주가 되었고, 거래를 거부하는 농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헝가리 귀족들의 위세는 날로 커켰고, 왕권은 점차 위축되었다.

한편, 할리치나에서는 안나의 숙청에 분노한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안나를 처단하고 블라디슬라프 코르밀리치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다니엘은 보야르들을 피해 폴란드로 망명했고, 폴란드 고공 례셰크 1세가 다니엘의 복위를 위해 할리치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언드라시 2세는 아예 자기 아들 칼만을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1214년 가을 레셰크 1세와 협상한 끝에 레셰크 1세의 딸 살로메아와 칼만을 결혼시키고 서부 갈리시아의 두 도시인 프셰미실과 루바초프를 폴란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할리치나의 공작에 칼만을 선출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1214년 말 블라디슬라프 코르밀리치를 축출하고 칼만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옹립했다.

1215년, 언드라시 2세는 쿠르트네 백작 피에르의 딸 욜란다와 결혼했다. 1216년,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가 사망했다. 앙리는 후사를 두지 못했기에, 여러 사람이 새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언드라시 2세의 장인인 피에르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언드라시 2세였다.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그동안 미뤄뒀던 십자군 원정을 시급히 추진해야 했다. 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에게 국가 통치를 위임하기로 한 뒤 십자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라틴 귀족들은 피에르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래도 십자군을 감행해 교황에게 점수를 따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한 언드라시 2세는 스플리트에서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자다르 점유를 공인하는 대가로 선박들을 빌렸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소유의 공유지들을 모조리 팔고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1217년 스플리트에서 출항한 언드라시 2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와 메란의 오토 1세와 함께 성지로 향했다. 그들은 그해 10월 아크레에 도착했고, 예루살렘 왕 장 1세성전 기사단, 구호기사단 등 현지 십자군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1217년 11월 초, 십자군은 언드라시 2세를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요르단 강 원정을 개시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 1세가 이끄는 무슬림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에 알 아딜 1세는 각지의 요새에 수비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십자군은 요새 몇 곳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성 병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언드라시 2세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아크레로 돌아간 후 군사 활동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행했을 때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물병, 성 스테파노와 마르가레테의 머리카락, 사도 토마스바르톨로메오의 오른손,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 일부를 포함한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했다.

1218년 초,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메렌쿠르의 라울이 지금 돌아가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선 트리폴리를 방문해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4세와 뤼지냥의 멜리센데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공국으로 가서 아들 언드라시와 아르메니아 공작 레오 1세의 딸 이사벨라를 약혼시켰다. 이후 육상으로 행진하여 룸 술탄국을 통과한 뒤 니케아에 도착했다. 니케아에 한동한 체류하고 있을 때, 장남 벨러를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결혼시켰다.

1218년 말 언드라시의 행렬이 불가리아에 이르렀을 때, 마침 보릴을 몰아내고 새 차르에 즉위한 이반 아센 2세는 보릴을 일전에 후원한 그의 앞을 군대로 가로막고, 언드라시 2세의 딸 마리아를 자신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헝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언드라시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1221년 지참금 형식으로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불가리아에 돌려줬다. 이후 헝가리에 도착한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던 야노시 대주교를 추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야노시를 복귀시켰다.

1219년, 언드라시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십자군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소모한 터라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할리치나 공작으로 세워뒀던 칼만은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에게 사로잡혔다. 도저히 군대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던 그는 므스티슬라프와 협상한 끝에 다시는 할리치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조건하에 아들을 돌려받았다. 그 후 그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 인사들을 대거 고용해 왕실 수입을 관리하게 했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언드라시 2세와 욜란다 왕비에게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고용하는 짓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언드라시 2세는 성직자들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교회 법정의 독점적인 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특권을 확인하는 등 교황청을 달래려 노력했다.

1222년, 언드라시 2세는 일련의 국정 실패로 불만이 가득한 헝가리 영주들을 달래고자 금인칙서를 반포했다. 여기에는 영주들이 누릴 특권들이 광범위하게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조항에는 군주가 이 헌장의 조항들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주교들과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하층 계급을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면서 헝가리 또한 봉건제 사회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그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일전에 십자군을 나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둔 적 없고 오히려 불이익만 받았기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언드라시 2세는 장남 벨러를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에 임명했다. 그런데 언드라시 2세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보는 귀족들이 벨러 주변에 포진하는 바람에, 두 부자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벨러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아내로 삼았던 마리아 라스카리스와 이혼했다. 그러다가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재결합하라고 권하자, 벨러는 1223년 가을에 마리아를 다시 거둬들였다. 언드라시 2세가 이에 분노를 터트리자, 벨러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1224년, 언드라시 2세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아들과 화해했고 다시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통치를 맡겼다.

1224년, 에르데이 방위를 맡던 튜튼 기사단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진 끝에 아예 헝가리로부터 독립해 오직 교황만 따르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들었다. 언드라시 2세는 이에 분노해 무력을 동원하여 기사단을 헝가리에서 추방했다.[5] 이로 인해 헝가리와 교황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226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를 트란실바니아 공작으로 전출하고 둘째 아들 칼만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1227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에 대한 원정을 또다시 감행했다. 초기에는 할리치나의 여러 요새를 성공적으로 공략했지만, 크레메네츠와 즈베니고로드에서 므스티슬라프에게 패배했다. 결국 아들 언드라시를 할리치나 공작으로 인정하겠다는 므스티슬라프의 약속에 만족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228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에게 귀족들의 영지 소유를 조정할 권한을 부여했다. 벨러는 어머니 게르트루트 살해 사건에 가담한 혐의 가 있던 시몬 카치치스와 반크 바르칼란의 영지를 몰수했으며, 아버지가 귀족들에게 퍼주었던 토지 보조금을 대거 회수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벨러의 활동을 지지했지만,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종종 벨러의 정책 수행을 저지했다.

1229년 봄, 동생 언드라시가 할리치나 공국에서 쫓겨났다. 이에 벨러는 동생을 복위시키기로 마음먹고, 1229년 또는 1230년 쿠만족과 함께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할리치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비대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전염병 마저 창궐하자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동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아센 2세라틴 제국을 심하게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언드라시 2세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종용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십자군 원정을 치른 후 귀환하다가 이반 아센 2세에게 억류되어 딸 마리아를 아센에게 시집보내고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넘겨줘야 했던 것에 불만이 가득했던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명분삼아 불가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벨러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1231년 말 또는 123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했다. 뒤이어 스레데츠를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벨러는 1233년 왈라키아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불가리아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여러 요새를 세웠다.

한편,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베르트는 유대인무슬림이 아직도 궁정 관리로 일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부려먹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역시 이에 호응하여 대주교에게 왕을 계속 압박하라고 권장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언드라시 2세는 1231년 무슬림이 왕실 관리로 일하는 것을 금지하며, 군주가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에스테르곰 주교가 파문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로베르트 대주교는 여전히 유대인과 무슬림이 궁전에서 계속 일하고 있고 급기야 교회 재산을 압류하려 한다면서, 1232년 2월 25일에 헝가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언드라시 2세는 교회 재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주교는 곧 성무금지령을 철회했다.

1233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로 다시 출진해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내세운 다니엘 로마노비치로의 공세에 맞서는 아들 언드라시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교황 특사와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33년 8월 20일 베레그 숲에서 왕실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탈한 교회 수입에 대한 보상으로 10,000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선언했다. 1233년 후반에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 1234년 초 에스테 후작 알도브란디노 1세의 딸 베아트리스 데스테와 결혼했다.

1234년 가을, 다닐로 로마노비치가 이끄는 루스군이 할리치나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고, 언드라시 2세의 아들 언드라시는 피살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으나, 1235년 여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스티리아가 연합하여 헝가리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계획을 바꿔 빈으로 쳐들어가 포위 공격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손해를 배상하겠다고 약속했고,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1235년 9월 21일 언드라시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벨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얼마 후 언드라시 2세가 말년에 왕비로 맞아들인 베아트리체 데스테 왕비가 임신 소식을 공개하자, 벨러 4세는 늙은 아버지가 임신시켰을 리 없다며, 그녀가 아버지의 치세 때 재무관으로서 권세를 누린 데네시와 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데네시를 실명형에 처하고 베아트리체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베아트리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사절단의 도움으로 남장한 채 탈출한 뒤 튀링겐에서 아들 이슈트반을 낳은 뒤 이 아이가 아르파드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러 4세를 비롯한 언드라시 2세의 다른 자식들은 이슈트반을 왕실의 일원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족으로서 지원금을 받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벨러 4세는 언드라시 2세 치세 때 발표된 금인 칙서를 통해 특권을 공인받은 귀족들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여기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1237년, 1196년 이후에 제정된 모든 왕실 토지 보조금 헌장을 개정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고, 언드라시 2세가 귀족들에게 지급한 보조금을 전부 회수하려 했다. 이에 귀족들이 대거 반발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결국 1239년, 벨러 4세는 귀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보조금 회수를 잠정 중단했다.

이 무렵, 몽골 제국군키예프 루스를 침공해 막대한 인명을 살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에 몽골 제국군에게 쫓기던 쿠만인 40,000명이 헝가리 왕국의 동쪽 국경에 접근해 자신들을 받아들여준다면 헝가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벨러 4세는 이들과 손잡고 몽골 제국군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기로 하고, 쿠만족 지도자 쾨텐에게 추종자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쾨텐은 흔쾌히 수락하고 티서강변의 평원 지대에 정착했다. 쿠만인들은 그곳의 현지 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벌였고, 때때로 강도, 강간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벨러 4세는 몽골군의 임박한 침략을 막으려면 쿠만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눈감아줬고, 헝가리인들은 자연히 쿠만인들을 감싸돌고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했다.

1240년 말, 바투 칸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 동쪽 국경에 도달했다. 벨러 4세는 전국에 소집령을 내리고, 독일 기사들을 대거 고용했다. 그런데 쿠만족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과 독일 기사들이 쾨텐을 습격해 살해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쿠만족은 헝가리 남부로 이동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병력과 함께 오다가 소규모 몽골 제국군을 격퇴한 뒤 으로 돌아가 버렸다.

1241년 봄,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벨러 4세는 가급적 많은 병력을 끌어모은 후 적과 교전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허락 없이 몽골군과 독자적으로 싸웠고, 일부는 아예 영지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그는 이대로 지체하면 군대가 와해될 거라 여기고 모히 평원으로 진군해 마차를 이용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1241년 4월 10~11일, 몽골군 35,000~10만 명과 헝가리군 25,000~80,000명은 모히 전투에서 격돌했다. 초기에는 바투 칸의 무리한 사요 강 도하로 인해 몽골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헝가리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수부타이가 다른 길을 통해 강을 건넌 후 역습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이 왕의 통제에 불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벨러 4세는 동생 칼만과 함께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지만, 뒤에 남겨진 헝가리군은 궤멸되었다.

벨러 4세는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포조니로 이동했다가 몽골 제국군이 추격해오자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도와주긴 커녕 감옥에 가둔 뒤 오스트리아 국경 인근의 포조니, 쇼프론, 바스 주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 겨우 풀려난 후 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이후 교황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몽골 추격대가 접근해오자, 가족들을 클리자 성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 추격대 지휘관 카단 칸은 곧 트로기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했지만, 1242년 봄 수부타이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접수받자 곧바로 돌아갔다.

몽골 제국군이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헝가리에서 즉시 철수한 뒤, 벨러 4세는 수도로 귀환한 후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를 제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부더천도한 그는 이전에 왕실 보조금을 강제로 회수하려 했다가 대귀족들의 반발을 사는 바람에 국론이 분열된 탓에 몽골 제국군의 침략에 합심하여 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후로는 귀족들과 가능한 한 합의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로 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정당한 재산을 갖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몽골 제국군이 또다시 쳐들어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상 헝가리 일대에 최신식 석조 성을 지으면서, 각지의 영주와 지주들에게 자신처럼 성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마리아 왕비 역시 1250년경 비셰그라드 성을 짓는 등 모범을 보였다. 이에 귀족들이 왕실을 본받아 성채를 대거 건설하하면서, 총 100여 개의 성채가 새로 건조되었다. 헝가리는 이를 통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지만, 그 과정에서 지방 영주들의 군사력이 강해져서 왕권이 장기적으로 저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또한 벨러 4세는 고품질의 금화를 주조하고 무역을 활성화해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으며, 소금 생산을 독점하고 관세를 착실히 거둬들임으로써 국고를 채우고자 했다. 이렇게 확보한 국고를 토대로 병력을 늘리고 장비를 개선했으며, 몽골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각 도시에 일정한 수의 중무장 기사를 배치하게 했다. 이 기사들은 대부분 독일 출신으로, 국가로부터 급료를 지급받는 대가로 방위를 수행했다. 한편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초토화하며 학살을 자행한 데다 뒤이은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벨러 4세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1247년 구호 기사단과 계약을 맺고 쇠레네세그(Szörénység)[6], 쿠노르자그(Kunország)[7], 바르카사그(Barcaság)[8]를 영지로 주되 그곳에 성을 세우고 자신이 부르는 즉시 소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구호 기사단이 통제에 잘 따르지 않자, 벨러 4세는 1260년 이전에 그들을 추방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벨러 4세가 약속한 대로 포조니를 접수하고자 1242년 봄에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헝가리군이 이를 격퇴하고 이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1246년 초,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을 무찌른 뒤 헝가리를 재차 공격했다. 이에 벨러 4세는 키예프 대공 로스티슬라프 4세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1246년 6월 15일 라이타 강둑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헝가리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전투 중에 전사했다. 이로 인해 수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내에서 공작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1251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의 아들인 모라비아 변경백 오타카르가 차지했다. 1253년,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을 침공해 모라비아를 약탈했다. 이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중재로 평화 협약을 맺고, 제머링 계곡 남쪽 영토가 헝가리에 양도되었다. 그는 이 지역을 아들 이슈트반에게 맡겼지만, 1258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슈트반을 축출한 뒤 오타카르에게 합류했다. 오타카르는 나중에 오타카르 2세로서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260년 초 평화 협약이 만료되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헝가리는 쿠만, 키예프 루스, 폴란드 왕국,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지원을 받았다. 양군은 7월 12~13일에 모라비아에서 맞붙었고 헝가리군이 패배했다. 결국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영토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다.

1261년, 벨러 4세는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를 맡겨 불가리아 제2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불가리아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도나우 강 하류의 룸과 비딘을 공략했다. 당시 내전이 한창이던 불가리아로서는 이에 대항할 수 없었고, 콘스탄틴 아센 1세는 헝가리가 그 지역을 가지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 무렵 벨러 4세가 어린 아들 벨러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임명하고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슈트반 왕자는 아버지가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막내 동생 벨러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이리하여 양측간에 관계가 악화되었고, 1261년 가을에 양측 군대간에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여러 대주교들이 중재하자, 양자는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분할하기로 했다. 강 서쪽의 땅은 벨러 4세가 직접 통치하기로 했고, 동부 영토는 이슈트반이 다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양자의 갈등은 깊어졌다. 급기야 1264년 이슈트반이 도나우 강 동쪽에 있는 모후 마리아와 누이 언너의 영지를 몰수하자, 언너는 아버지를 부추겨 그해 여름에 이슈트반을 공격하게 했다. 언너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샤로슈퍼터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이슈트반의 아내 에르제베트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왕실군은 여세를 몰아 이슈트반 왕자를 몰아쳐서 그가 에르데이의 동쪽 끝에 있는 페케테할롬(Feketehalom)[9]까지 도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서 병력을 추스린 뒤 반격을 가했고, 1265년 3월 이사제그 전투에서 벨러 4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1266년 3월 23일 토끼 섬[10]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양자는 다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양분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슈트반 왕자가 세금 징수권과 평민 통제 등 국왕의 권리 상당수를 공유하는 것 역시 허용되었다.

이 무렵, 헝가리의 봉신이었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불가리아로 귀순했다. 1265년, 불가리아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아들과 화해한 벨러 4세는 자신의 영지인 에르데이에 피해를 입힌 불가리아에 역공을 가하기로 하고, 이슈트반에게 군대를 맡겼다.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까지 진격하여 그 주변을 파괴하였고, 플레벤을 함락한 뒤 돌아갔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7년, 에스테르곰에 귀족들을 소집한 뒤 언드라시 2세가 반포했던 금인칙서에 명시된 그들의 특권을 재확인했다. 얼마 후,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가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의 내전으로 헝가리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헝가리에 속한 미흐바를 침공했다. 이에 벨러 로스티슬라비치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격해 세르비아군을 격파하고 스테판 우로시 1세를 사로잡았다. 벨러 4세는 자기 손녀 카테리나와 결혼한 스테판 드라구틴이 세르비아에서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국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 아래 그를 풀어줬다.

1269년 여름, 벨러 4세의 총애를 받던 막내아들 벨러가 사망했고, 1270년 1월 18일에 막내딸 머르기트도 사망했다. 이에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곧 중병에 걸렸다. 자기가 죽고 나면 이슈트반 왕자가 가족들을 해칠 것을 우려한 그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아내 마리아와 딸 언너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1270년 5월, 벨러 4세가 사망하고 장남 이슈트반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동안 이슈트반 5세와 심한 갈등을 벌였던 언너는 아버지가 죽고 이슈트반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버지의 심복들과 함께 보헤미아로 도주했다. 이때 그들은 헝가리 서쪽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를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넘겨줬다. 이슈트반 5세는 중신들이 떠난 자리에 심복들을 앉힌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70년 8월 말에 크라쿠프 공작 볼레스와프와 동맹을 맺었고, 포조니 인근의 도나우 강 유역의 한 섬에서 오타카르 2세를 만나 땅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오직 휴전 협정만 맺어졌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70년 12월 21일, 이슈트반 5세는 습격대를 오스트리아에 파견해 약탈을 자행하게 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1271년 4월 도나우 강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데베니, 포조니, 너지솜버트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5월 15일 모숀머저로바르 전투에서 이슈트반 5세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병력을 수습한 이슈트반 5세가 반격을 가했고, 5월 21일 라이카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이후 그는 소수의 추종자만을 이끌고 달아나는 오타카르 2세를 맹추격해 까지 이르렀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슈트반 5세는 오타카르 2세의 적들을 돕지 않기로 했고, 오타카르 2세는 언너와 추종자들이 넘겨줬던 요새들을 헝가리에 돌려주기로 했다.

1272년 늦봄, 이슈트반 5세는 자신과 결혼동맹을 맺은 나폴리 왕국카를로 2세를 만나기 위해 달마티아로 떠났다. 그런데 그해 6월 말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영주 요아킴 펙타르(Joakim Pektar ?~1277)가 태자 라슬로를 납치하여 코프리브니차 성에 연금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코프리브니차 성으로 달려갔지만, 도중에 중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도나우 강변의 체펠 섬으로 간 뒤 1272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이슈트반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에르제베트 왕비는 라슬로를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데려온 요아킴과 서둘러 협상한 뒤, 함께 대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5세의 측근들은 엘리자베트 왕비가 어린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요아킴과 짜고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했다. 이슈트반 5세의 재무관 에기디우스 모노즐로는 여러 인사를 포섭한 뒤, 우선 라슬로를 빼돌린 후 왕비의 숙소를 공격했다. 하지만 요아킴의 지지자들이 이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모노즐로는 포조니로 후퇴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후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투항했다. 오타카르 2세는 모노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막대한 선물을 제공했다.

1272년 9월 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 피포가 주관하는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10살 소년 라슬로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지만, 실제로는 헝가리 귀족들이 왕국을 통치했다. 그해 11월, 귀족들이 퀼락 섬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을 때 유력 귀족 중 하나인 쾨세그 공작 헨리크가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와 이슈트반 5세의 누이 언너의 아들인 벨러를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벨러가 이에 격하게 항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헨리크가 검을 뽑아 벨러를 찔러 죽였다. 당시 퀼락 섬의 수녀원에 지내던 이슈트반 5세의 누이 머르기트와 다른 수녀들이 유해를 수습한 뒤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었다. 이후 마초 공국은 헨리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최고 권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쾨세그 공작 헨리크와 요아킴 펙타르가 한 무리를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카사크 공작 마테가 이끌었다. 양측은 서부 헝가리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헝가리 정부는 수 년간 두 권력집단간의 경쟁과 대립으로 점철되었고, 라슬로 4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사표현조차 하지 못했다. 이중에서 그나마 라슬로를 지원하는 귀족인 페터르 카사크마저 정쟁에서 밀려 낙향해야 했고, 그의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1273년 4월, 오스트리아 공국과 모라비아의 군대가 지난날 이슈트반 5세가 자국을 침공하여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죄르솜버트헤이를 공략하고 헝가리 서부 일대를 약탈했다. 요아킴이 두 달 후에 두 요새를 탈환했지만, 얼마 후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죄르와 쇼프론을 포함한 많은 요새를 공략했다.

1274년, 헨리크 쾨세그는 라슬로 4세를 납치해 자기들 입맛대로 부려먹으려 했다. 카사크 가문이 왕을 구출하자, 쾨세그 가문은 라슬로 4세의 남동생 언드라시를 왕으로 추대했다. 1274년 9월 26일과 29일 사이에 페제르의 폴가르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터르 카사크가 헨리크와 요아킴의 군대를 격파했다. 헨리크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언드라시를 계속 왕으로 내세웠다. 1274년 말, 합스부르크 가문독일왕 루돌프 1세는 보헤이마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헝가리와 동맹을 맺었다.

1276년 루돌프 1세와 오타카르 2세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헝가리 정부는 그해 가을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쇼프론은 곧 라슬로 4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오타카르 2세 역시 헝가리 서부의 모든 도시를 포기할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1277년 에르데이에 거주하는 작센인이 반란을 일으켜 줄러페헤르바르를 파괴하고 에르데이의 주교좌도 파괴했다. 귀족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고, 그저 권력을 놓고 분쟁을 벌이기만 했다.

1276년 정식으로 나폴리의 엘리사베타와 결혼한 라슬로 5세는 이듬해인 1277년 5월 라코스 인근 들판에서 소집된 회의에 출석했다. 컬로처의 이슈트반 대주교, 바츠의 풀룹 주교, 바러드의 라도메르 주교, 자그레브의 티모트 주교 등 회의를 주도한 주교들은 왕이 법적 연령이 되었으니 모든 국정을 스스로 이끌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라슬로 4세는 이에 호응하면서, 국가의 불명예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라슬로 4세는 친정할 수 있게 되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귀족들은 여전히 강대한 권세를 누리며 국정에 간섭했고, 왕에게는 독자적으로 정책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허수아비 왕으로 살다가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외가인 쿠만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자기 편으로 삼고, 왕실의 통제에 따르지 않은 영주들은 하나둘씩 물리쳤다. 우선 세페세그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여기에 지난날 자신을 납치한 뒤 허수아비 군주로 부려먹었던 요아킴이 헝가리 남부에서 이슈트반 바보니치와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하는 행운이 겹쳤다. 그는 여세를 몰아 1277년 가을에 트란스다뉴비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쾨세그 가문을 공격했지만, 그들의 군세가 강력해서 쉽사리 꺾지 못했다. 1278년 초 반란군 지휘관 니콜라스 제레기의 요새인 아도리안을 공략한 그는 그해 초여름에 티서강변의 7개 주를 다스리는 영주들을 소집하여 2명의 반항적인 지역 귀족들을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입지를 어느정도 다진 뒤, 그는 독일왕 루돌프 1세와 힘을 합쳐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를 정벌하러 출진했다. 1278년 8월 26일, 양군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오타카르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돌프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라슬로 4세에게 "당신 덕분에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신성 로마 제국의 품에 무사히 돌아왔다."며 감사를 표했다. 이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등에 업게 된 그를 두려워한 쾨세그 가문은 그동안 왕으로 받들던 언드라시를 베네치아로 보내고 1279년 초 라슬로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그는 모든 영주, 귀족, 주교들이 참석한 회의를 소집하여 파편화된 왕실 영지를 회수하고 헝가리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지원 정책을 검토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상당량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1279년 9월 22일,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사절단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교황은 헝가리 왕국이 내전에 시달리느라 교회 조직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 우려를 표하며, 왕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모의 피포 주교를 헝가리의 교황 사절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피포는 교회 문제 외에도 세속 문제 전반에 간섭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제 막 통합 작업을 벌이던 라슬로 4세 입장에서는 왕권이 교권에 저해될 우려가 있었기에, 사절단이 도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예정대로 도착했고, 피포는 왕에게 교황권의 수위를 인정하고 모든 주와 왕에 관한 법령을 포함하는 상세한 제안서를 왕실 회의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중에는 쿠만인들에 관한 법령도 있었다. 당시 쿠만인들은 집단촌에 모여살면서 고유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피포는 쿠만인들이 기독교를 아직도 수용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라슬로 4세에게 쿠만인들이 이교 관습을 버리고 진정한 기독교도가 되도록 권고하라고 촉구했다. 교황 사절의 압박에 굴복한 그는 모든 쿠만인들이 천막을 떠나 "땅에 붙어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며 기독교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고 규정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쿠만인들은 법을 따르지 않았고, 라슬로 4세는 쿠만인들의 지지 덕분에 여기까지 온 만큼 그들을 차마 어찌하지 못했다.

라슬로 4세가 좀처럼 쿠만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자, 필리프는 1279년 10월 헝가리 전역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왕을 파문했다. 라슬로 4세는 교황청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쿠만인들은 자신들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교황 사절에게 짜증이 난 나머지 1280년 1월 초에 피포를 체포했다. 그 직후,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인 핀타 어버가 라슬로 4세를 사로잡아 보르사 가문의 지도자인 롤랑에게 넘겼다. 2달 후 교황 사절과 국왕 모두 석방되었고, 라슬로 4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쿠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재정하기로 서약했다.

쿠만인들은 상황이 갈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교황 사절의 요구에 복종하는 대신 헝가리를 떠나기로 했다. 라슬로 4세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살란케멘[11]까지 따라갔지만, 쿠만인이 국경을 넘어 가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헝가리에 남기로 한 쿠만인 역시 기독교 강요에 불만이 가득했다. 1282년 여름, 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라슬로 4세는 호드메죄바샤르헤이 인근 호드 호수에서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쿠만인들에게 가하는 징벌을 최소화함으로써 그들을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애썼다.

1285년 1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2달간 도나우 강 동쪽 일대를 파괴했지만, 현지 민병대와 귀족 사병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이때 많은 귀족들은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자신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라슬로 4세가 몽골인을 선동해 헝가리를 침공하게 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라슬로 4세는 1285년 9월 세페세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몽골군 포로를 대거 고용했다.

이렇듯 기독교 강요 정책에 대한 쿠만인의 반발과 귀족들의 거센 저항, 교황의 압력에 직면한 그는 심각한 심적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 마지막 몇년 동안 기행을 벌였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점점 덜 수행했고, 쿠만인의 의상과 머리를 본뜨고 천막에서 사는 등 쿠만족의 삶의 방식을 선호했다. 또한 수많은 쿠만 여인들을 첩으로 들이고 나폴리 출신 왕비 엘리사베타를 학대하게 했다. 1286년 엘리사베타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헝가리를 탈출하려 하자, 그는 군대를 보내 그녀를 체포한 뒤 머르기트 섬에 3년간 유폐했다. 그러다가 1289년에 풀어주고 궁정에 머물게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장 좋아하는 첩 아이두아(Aydua)와 함께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가 헝가리를 침공해 서쪽 변경지대의 30개 요새를 공략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헝가리 국왕이 완전히 이교도가 되어버렸다고 여기고 헝가리를 향한 십자군을 선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던 1290년 7월 10일, 라슬로 4세는 쾨뢰셰그 성에서 아르부즈, 토르텔, 케멘스라는 이름의 세 명의 쿠만인에게 암살당했다.

라슬로 4세가 암살당한 뒤, 언드라시 2세와 베아트리체의 유복자 이슈트반의 손자 언드라시 3세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영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동안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자가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언드라시 3세가 평화를 회복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자 충성을 맹세했다.

언드라시 3세는 집권 후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을 최고위직에 앉혔다. 왕국의 북동부를 지배하던 어버 어머데는 궁정백으로 선임되었고, 트란스다뉴비아 서쪽 지역의 지배자인 이반 쾨세그는 재무관이 되었으며, 롤랑 보르사는 에르데이에서 군림했다. 또한 그는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왕실의 허가없이 세워진 성들을 파괴하고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원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그를 몰아내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일왕 루돌프 1세는 1241년 벨러 4세가 몽골 제국군의 공세를 피해 달아났을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을 들며, 봉신인 라슬로 4세가 자식 없이 사망했으니 주군으로서 봉신의 영지를 거둬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공작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맡기려 했다. 여기에 라슬로 4세의 형제 언드라시(1278년 사망)를 사칭하는 자가 폴란드 왕국에서 지지자를 규합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로 쳐들어왔다가 패퇴한 뒤 폴란드에서 피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위세를 갖춘 처가를 구하는 것뿐이라고 여긴 언드라시 3세는 1290년 쿠야비아 공작 지에모미수(Ziemomysł inowrocławski 1245~1287)의 딸 페넨나와 결혼했다. 그리고 1291년 초 티서강 동쪽에 있는 비하르(Bihar), 쾨레슈비데크(Körösvidék), 서볼치(Szabolcs), 서트마르(Szatmár), 솔노크(Szolnok) 등 5개 주 귀족들의 총회를 너지바러드에서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라슬로 4세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현재 언드라시 3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슈트반 발로센젠을 역적으로 간주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소집된 또다른 회의에서 지역 귀족들과 작센인, 루마니아인 등 소수민족들에게 왕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으며, 어버 어머데를 궁정백에서 해임하고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반 쾨세그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1291년 4월,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왕비이자 라슬로 4세의 누이인 마리어가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그녀를 합법적인 군주로 받들었다. 하지만 언드라시 3세는 일단 그녀 문제는 내버려두기로 하고,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왕을 칭하는 알브레히트 1세부터 손보기로 했다. 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알브레히트 1세가 라슬로 4세 치세 말기에 점거했던 프레스부르크쇼프론을 포함한 여러 요새를 탈환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1세는 아버지 루돌프 1세가 사망한 뒤 나사우 가문아돌프독일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터라 그와 대적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양자는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알브레히트 1세가 쾨세그 가문에게서 탈취한 요새들을 파괴하고 철수하며, 양자는 서로를 적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292년 봄, 쾨세그 가문은 자기들 소유의 요새들을 파괴하게 한 그에게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리어의 아들인 카로이 마르텔을 왕으로 옹립했다. 언드라시 3세는 즉각 반란 토벌에 나서 7월에 진압을 성공했지만, 그해 8월에 슬라보니아로 가던 중 쾨세그 가문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습격당해 체포되었다. 언드라시는 4개월간 억류되었다가 지지자들이 그들의 친척을 쾨세그에 인절로 보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1293년 어머니 토마시나를 헝가리로 모셔온 뒤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베네치아 귀족의 여식이었던 그녀가 이 지역을 담당하자,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해당 지역들은 언드라시 3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언드라시 3세는 뒤이어 헝가리 북부 지역을 방문해 토지 보조금을 개정했으며, 부다로 돌아온 후 어버 어머데를 다시 궁정백에 선임했다.

1294년 5월, 롤랑 보르사가 너지바러드 주교 베네딕토를 사로잡고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언드라시 3세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한 뒤 공세를 개시해 아도르한에 있는 보르사의 요새를 포위했다.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공략에 성공한 그는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로 라슬로 3세 칸을 선임했지만, 자신에게 복종을 맹세한 보르사의 영토를 보전해주었다. 1295년 초, 크로아티아의 귀족 파울 슈비치가 또다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카로이 마르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카로이는 그해 8월에 사망해버리면서 반란은 흐지부지되었다.

1295년 아내 페넨나가 사망하자, 1296년 초 빈에 방문하여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그해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쾨세그 가문을 상대로 알브레히트 1세와 협공했지만, 여러 요새에서 농성하는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1296년 메테 3세 크사크를 궁정백으로 선임했지만, 1297년 말에 메테 3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언드라시 옹립에 기여하고 반란군을 상대로 파문을 선포하는 등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루도메르 대주교가 이 시기에 사망했다. 이렇듯 국내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알브레히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를 거머쥐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도왔다. 1298년 7월 2일, 그와 알브레히트 1세는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를 격파했다.

1298년 여름, 언드라시는 고위 성직자, 귀족, 작센인, 세케이인, 쿠만인을 소집하여 회의를 연 뒤, 자신의 허가 없이 건설된 요새를 파괴하고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재차 명령했다. 또한 삼촌인 알베르티노 모로시니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좀처럼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슈비치 가문, 쾨세그 가문, 차크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이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에게 당시 12살인 손자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로 보내서 왕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4. 폴란드

정치적 격변과 내전의 빈도가 심했다. 미에슈코 1세 사후 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즉위한다. 볼레스와프 1세의 치세 동안 폴란드는 국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심지어 1018년에는 볼레스와프 1세의 사위 스바트폴크(Svatpolk)가 장인의 지원을 등에 업고 키예프 대공국의 지위 계승전에 뛰어들어 키예프를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생전 동안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사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제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대파를 지지하였다. 이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004년부터 1008년까지 산발적으로 지속전 이 전쟁은 부지신(Budziszyn) 회담으로 종결되었다.1024년 볼레스와프 1세와 대립각을 세우던 하인리히 2세가 붕어하자, 교황의 동의를 얻어 그니에즈노에서 대관식을 치러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1세는 대관식 1년 뒤인 1025년 사망하였다.

볼레스와프 1세의 대관식으로 폴란드 영지는 공식적으로 왕국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 사망 이후 그의 차남인 미에슈코 2세가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장남 베즈프림과 그의 동생 오토 볼레스와비치도 왕권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폴란드 왕국은 내분에 빠졌다. 베스프림은 미에슈코 2세의 반대파들을 규합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대공국같은 외세의 지원도 받으며 왕과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미에슈코 2세는 1031년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가 동시에 공격하자 보헤미아 공국프라하로 망명하여 왕위는 베스프림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베스프림은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가 되고만다. 폴란드 왕국이 통치하고 있던 모라비아가 보헤미아로 넘어갔고, 슬로바키아헝가리 왕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베스프림은 집권 수 개월 만에 그의 추종세력에게 살해당했다.

베스프림이 죽자 프라하로 망명했던 미에슈코 2세가 다시 복권되었다. 그러나 그의 복권 시기 폴란드의 국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그는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군신관계를 받아들여야 했고다시 대신 공작으로 불려야 했으며, 또한 영토 일부를 동생 오토와 사촌 디트리크(Dytryk)에게 분할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이후 오토가 살해당하고 미에슈코 2세도 1034년 사망했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미에슈코 2세의 아들 카지미에시 1세가 축출되기에 이른다. 카지미에시 1세는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대공국의 지원을 받아 마조프셰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던 미에츠와프를 굴복시켰다. 그의 시기 때 주요 사건으로는 폴란드의 수도가 그니에즈노에서 크라쿠프로 천도해 바르샤바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카지미에시 1세가 1058년 사망하자, 그의 장남 볼레스와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때 폴란드는 더욱 발전하였으며 각종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주교구를 건설하여 보헤미아의 침입 때 파괴된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또한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에서 권력 갈등이 심화되자 그는 교황의 편을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서 탈피해 다시 폴란드를 공작령에서 왕국으로 독립시켜, 1076년 수월하게 대관식을 올릴 수 있었다. 볼레스와프 2세는 보헤미아와 협상하여 기존에 바치던 조공을 폐지했으며, 헝가리 왕국과 키예프 대공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여 자신의 지지 인물을 왕좌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볼레스와프 2세를 두려워한 폴란드의 귀족들은 그를 축출하였다. 볼레스와프는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하여 1079년 사망하였다.

폴란드 왕위는 볼레스와프의 동생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국의 실세는 시에치에흐(Sieciech, P) 총독에게 있었다. 그는 폴란드 전 국토에 토지를 가지고 있는 대지주 귀족이었는데, 권력을 앞세워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총독의 탄압에 반감을 품은 폴란드 내 반대파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의 장남 즈비그니에프(Zbigniew)를 중심으로 뭉쳤고 1093년부터 시에치에흐 총독과 반대파들은 10여 년 동안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폴란드 국토를 분할하는 방법을 일단락되었다. 장남 즈비그니에프는 대폴란드를, 차남 볼레스와프 크시보우스티(Bolesław Krzywousty, 볼레스와프 3세)는 남부 소폴란드와 실롱스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 형제는 서로 반대되는 정책을 펼쳤는데, 형 즈비그니에프는 주변 국가들과 화친을 맺고 평화를 유지하려 했지만 동생 볼레스와프 크쉬보우스티는 호전적이어서 기사들을 이끌고 북부지방에서 정복활동을 벌였다. 기사들은 호전적인 볼레스와프를 지지했고 즈비그니에프는 결국 동생에게 굴복하여 독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구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 내정에 개입하였다. 반독일적인 볼레스와프를 몰아내고, 볼레스와프를 대신하여 형 즈비그니에프를 왕위에 앉치기 위해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군은 볼레스와프의 폴란드군에게 패했고 볼레스와프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으며, 이에 따라 보헤미아가 실롱스크 지방을 포기하게 만드는 성과도 있었다. 독일로 추방된 즈비그니에프는 이후 볼레스와프의 허락으로 폴란드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나 이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형벌을 받고 곧이어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 통치 시대 때 폴란드의 내정은 안정되었고 정복 활동을 벌여 북쪽 지방의 영토를 상당부분 획득하였다. 나드비슬라인스키에 포모제, 오드라 강 유역 등이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1122년에는 슈체친까지 폴란드령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사망 전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기 형과의 왕위 쟁탈전으로 겪은 비극적 경험을 자식들에게 대몰림하지 않기 위해 자식들에게 동등하게 영토를 분할해주었다. 폴란드를 4개의 공국으로 분할시켜 각각 아들들에 물려주는 대신 고공위를 만들어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에게 물려주면서 사실상 국가원수로서 외교, 군사, 교회, 사법, 행정, 입법 등을 관할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의 바람과는 달리 자식들은 권력 투쟁을 벌였다. 분할된 국토는 각각의 공국으로 변질되었고 폴란드는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약 200년 동안 끊임없는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른바 분할 공국 시대가 열렸다.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Wławysław II Wygnaniec)는 혈연 상 처남 뻘이 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지원을 믿고 폴란드 통일을 시도하였다. 1146년 동생 볼레스와프 켄지에자비(Bolesław Kędzierzawy, 볼레스와프 4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독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를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폴란드를 침공했고 폴란드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절반 정도는 성공하였다.

11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요청에 따라 1157년 폴란드 원정을 감행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군이 포즈난까지 들어오자 볼레스와프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조공을 바치는 것과 황제에게 알현하겠다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군을 돌려보냈다.

볼레스와프 4세 사망 이후 피아스트 왕조의 권리는 볼레스와프 4세의 동생이자 대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미에슈코 3세에게 돌아갔다. 미에슈코 3세는 중앙 집권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파들은 미에슈코 3세를 포모제 지방으로 추방하고 카지미에시 스프라비에들리비(Kazimierz Sprawiedliwy, 카지미에시 2세)를 대공의 자리에 앉혔다. 카지미에시 2세는 1180년 우엥치차 회의에서 폴란드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부흥시키고, 연장자 우선 제도를 폐지시켰다. 이러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내정을 채 안정시키기 전에 그는 1194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 레첵 1세는 크라쿠프 주교들의 지지를 받으며 권좌에 올랐다. 그는 연장자 원칙을 무시했고, 이에 따라 미에슈코의 군대는 대폴란드로 밀려났다. 이후 미에슈코는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잃었던 크라쿠프를 재점령하지만, 곧이어 사망했다. 미에슈코의 사망 이후 폴란드는 다시 세 개의 공국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카지미에시 2세는 정복 활동을 벌여 브제비치를 점령하였다. 할리치 공국(Галицьке князівство)의 공작 야로슬라프 오시미오미실(Jarosław Ośmiomysł)이 사망한 후에는 자신의 조카 로만 므시치스와보비치(Roman Mścisławowicz)가 집권하도록 돕기까지 했다.

그의 정복 활동은 이웃 국가 헝가리 왕국의 왕 언드라시 2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의 대립관계는 양국의 지배 가문 사이의 혼인 동맹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다만 언드라시 2세에게 추방당한 튜튼 기사단이 마조프셰(마조비아) 공 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와 계약을 맺고, 계약에 따라 프루시족[12]을 막기 위해 폴란드 영내로 들어오게 만든다.

그러나 기사단은 자신들이 프루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1230년 자신들을 후임하는 교황으로부터 프루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받았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협정을 맺어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통해 소유권을 확약받고 독일 기사단국을 건국한다. 기사단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그 사이에 폴란드 왕가와도 교류하였다.

13세기 중반 실롱스크 공 헨리크 1세가 크라쿠프를 차지하여 폴란드 대공이 되면서 끝이 났고, 1238년 그의 아들 헨리크 2세가 실롱스크 공작위와 폴란드 대공위를 이어받은 후 점차 폴란드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 하나 몽골의 침입을 받아 헨리크 2세가 전사하고, 폴란드의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1290년대 다시 폴란드 절반을 장악한 대폴란드 공 프셰미스우 2세가 통합에 가까이 갔으나 왕으로 대관한 직후 1296년 암살당하면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후에도 번번하게 일어나는 몽골-타타르군의 침입에 폴란드 농총 주민들이 피신하여 농촌은 공동화되고, 토지 소유 형태도 변하여 대농장이 출현했다. 이따라 봉건제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함께 폴란드의 통합은 1세기 가까이 지연되고 만다.
[1] 처음에는 황실 묘지가 아닌 인근 예배당에 석관을 보관했다가, 1111년 파문이 해제된 후에야 비로소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2]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황제권과 제후(영주)권, 교황권의 균형 위에 서 있는 나라였고 제후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의 봉권적 권력을 억압하는 황제에 맞서기 위해 교황과 협력하였으나, 그렇다고 제후들이 덮어놓고 교황 편을 든 것은 아니다. 제후들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 역시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파문이 지나치게 남발된 것 자체가 교황과 교회가 지나치게 세속 군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 요소가 되었다. 그렇게 하고도 황제를 제압하지 못하고 번번히 교황이 역으로 털린 상황이었기에, 당시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등 돌리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3] 나중에 독일을 통일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 조상이다. 호엔촐레른 가문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5대조이다.[4] 참고로 이때 자다르의 시민들은 성벽 위에 십자가기를 올리고 공격하지 말라고 했으나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 측의 채무를 우선시하고 그대로 공격했다.[5] 여기서 쫓겨난 튜튼 기사단이 간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 지역이다.[6] 바나트(Banat) 동부 산악 지대로 중심지는 커란셰베시. 카란세베스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졌다.[7] 쿠만족이 살던 곳으로 오늘날의 몰다비아 일대.[8] 에르데이 지역 남부 브란 일대.[9] 현재 루마니아 코들레아(Codlea).[10] 현재 부더페슈트의 머르기트 섬.[11] 현재 세르비아 시르미아주 스타리 슬랑카멘.[12] 과거 프로이센에서 살던 발트계 민족이다. 프로이센이란 지명은 여기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