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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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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소년기2.2. 청년기2.3. 세자로 책봉되다2.4. 조조를 잇다2.5. 위나라 건국2.6. 이릉대전
3. 재위시 정책
3.1. 국가 체제 정비3.2. 유교 진흥책3.3. 유민 정착 정책3.4. 구품관인법
4. 조비의 남정5. 너무 이른 죽음

1. 개요

조비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생애

2.1. 소년기

조비가 태어나기 전인 176년황룡초현(현재의 보저우시에 출현하자, 광록대부 교현이 태사령 단양에게 무슨 조짐인가 묻자 단양은 이 나라에서 천자가 나타날 것이며 50년이 지나기 전에 황룡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했고 내황(內黃) 은등은 말없이 듣고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

조비는 후한 영제 중평 4년(187년) 겨울에 태어났다. 푸른색 구름의 기운이 둥근 모양으로 (황제가 타는)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이것을 바라본 자들은 지극히 존귀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조비 본인이 저술한 <전론>에는 본인이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나이 여덟에 이미 붓을 잡으면 그대로 훌륭한 시가 되었고, 각종 경전과 주석, 제자백가 서적을 모조리 꿰뚫었으며 여섯 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여덟 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에게 사사하고 모든 검법을 숙달해, 궁마술과 검술에 정통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따라 여러번 종군했다고 서술했다.

이를 부정하는 삼덕들도 있지만, 조조가 자녀교육에 쏟은 관심 및 조비의 글솜씨 및 아버지를 따라 10대부터 계속 종군한 것을 볼 때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문무양면으로 좋은 교육을 받고 스스로도 공부를 열심히 했음은 능히 알 수 있다. 즉, 일부 팬덤에서 그의 여러 비루한 일화를 들어 막장 지도자라고 주장하나, 나쁜 인성과는 별개로 교육을 잘 받고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1]

2.2. 청년기

기록에 나타나는 첫 출전은 조조가 완의 장수를 정벌(197년)할 때 10살로 종군하여, 큰형 조앙과 사촌 조안민이 목슴을 잃는 와중에도 말을 타고 살아남았다고 한다.[2]

이후 조비는 죽음을 당한 조앙대신 아버지를 따라 계속 참전하였다.

200년에는 14세의 나이로 관도대전에 참전했다.

204년, 조조원소의 아들 원상을 칠 때 조비도 종군했다. 조조는 업을 점령한 다음 병사들에게 일체 약탈을 금지하고 원소의 가족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이는 비록 적이지만 젊었을 적 친구였던 원소에 대한 그 나름의 예우였다. 그런데 조비는 원희의 처인 견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때 조비의 나이 18세.

정사 삼국지》 <문소견황후전>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황후(견씨)가 두려워하여 머리를 시어머니(유부인) 무릎 위에 묻고 있었고 원소의 부인은 양 손을 스스로 포박하고 있었다. 문제(조비)가 이르기를 '유부인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명하셔서 신부께 머리를 들라고 하십시오.' 하니 시어머니가 이내 받들어서 황후에게 명하여 우러러보게 하니, 문제가 들여다보고 그 안색이 평범하지 않음을 보자 그녀를 칭찬하며 감탄했다. - 위략
삼국지연의에서 조비가 문소황후를 보쌈하는 장면은 《위략》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3]

206년 조조고간의 난을 진압하러 나간 사이에 조비는 업에서 사냥과 음주가무에 빠졌는데, 이를 본 최염은 아버지 위세가 강해지는 것만 믿고 사치향락에 빠졌던 원소의 자식들과 똑같다고 질책을 들었다. 그러자 조비는 바로 최염에게 사과를 하며 다시는 그럴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7년에는 백랑산 전투에 참가해서 오환족을 토벌하고 원상의 잔당을 멸망시켰다. 이때 조조에게 투항했던 장수가 조조군의 장수로 오환 정벌에 참전했다가 귀환하는 길에 죽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그냥 죽었다고 나오나[4], 바로 그 기사의 주에 배송지가 인용한 위략에는 조비의 조롱을 못이겨 자살했다고 나온다. 한 사건에 대해 두가지 서술에 있으므로 어떤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조비 사이코패스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의 팬덤에서는 조비의 자살방조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208년에는 적벽대전에 참가하나 위군은 참패했고, 아무 소득 없이 허창으로 돌아온다.

211년 (건안 16년) 한수마초의 난에 종군했고 조조군은 마초의 세력을 진압한다. 이후 이 공으로 오관중랑장이자 부승상이 되었다.

2.3. 세자로 책봉되다

211년,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손님 30여 명을 불러서 연회를 열었는데 조비는 주건평에게 자신의 수명과 빈객들의 수명을 묻는다. 주건평은 하후위, 융거, 조표죽을 때를 예견했다. 그러면서 조비에게는 "장군의 수명은 여든인데 마흔 살에 작은 재난이 있으니 조심하여 보호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알다시피 조비는 장수하지 못하고 딱 마흔에 죽었는데, 죽으면서 낮과 밤 따로 따로 이틀 쳐서 여든이란 거구나!라고 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여러 공을 세웠어도 조비는 후계 경쟁에서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고 이에 가후에게 대책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인덕과 관용을 발휘하고 숭상하며, 평범한 선비의 업을 행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하며, 아들의 도리를 그르치지 않으면 됩니다."
언뜻 별거 없는 것 같지만, 말 그대로 괜히 조급해하다 눈 밖에 나지 말고 가만히 바른 모습만 보이라는 것. 결국 216년에 조조가 위왕에 오른 뒤, 가후가 조조를 설득하여[5] 다음 해 세자의 자리가 확고해졌다.

조비는 드디어 세자가 되자 매우 기뻐하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위왕의 뒤를 이을 세자로 낙점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옆에 있던 신비의 목을 끌어 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비가 집에 돌아가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딸 신헌영에게 이 일을 말해주니, 그녀가 평하길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진다는 게 고된 일인데도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오래갈지 걱정된다고 한탄했다고 하지만 조비의 치세는 사실 그렇게 길지도 않았고 '조위는 조비 때문에 망했다'고 할 정도로 조비가 위나라 사직을 망가트린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며, 당대 사람들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을 자제하고 무게감있고 점잖은 사람을 추앙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조비가 가벼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삼덕들이 있으나 유교적 입장에서는 자기 감정을 숨기는 것이 기품있다고 생각되던 시기의 생각일 뿐이다.[6]

조비가 조위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있다면 자신이 요절한 것 및, 똑같이 요절하는 조예를 후계자로 삼은 것인데 이것도 결과론일 뿐이다. 사실 조예도 태자로 선정될 때까지만 해도 멀정했으며, 재위 초반에는 정치를 잘했다. 후반에 들어서 암군이 되긴 하지만, 후한을 멸망을 길로 내몬 환제영제수준은 아니었다. 즉, 조예의 타락과는 별개로 조위의 국가시스템은 서진까지 그대로 이어져 건재했고, 조씨황실은 망했지만, 국가 시스템은 그대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대혼란으로 빠지지 않고 조위나 서진이 촉과 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2.4. 조조를 잇다

220년 1월, 아버지 조조가 죽자 곧바로 승상과 위왕에 올랐고, 가후를 태위, 화흠을 상국, 왕랑을 어사대부에 삼았다.

《위서》 <문제기>에 나오지 않고 《진서》 <선제기>(사마의전)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조비는 즉위하자마자 얼마전까지 촉-위 양측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양양, 번성을 식량난을 이유로 포기하고 그 성을 다 불질러 버렸으며 조인에 주둔할 것을 명하여 그대로 시행토록 했다. 이 명령의 시행 시점이 <선제기>에 따르면 '손권이 서쪽으로 군대를 움직일 때'이니 조비 즉위 직후 아직 손권이 서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의 일이었을 것이다. 《위서》 <조인전>에서도 조인이 완으로 옮기고 그 사이 손권의 장수 진소가 양양에 진수했다고 하니 양번이 이 당시 조씨 정권에서 버려졌다는 건 진서와 정사 삼국지 간 교차검증도 된다.

이때 사마의는 '손권은 우리 쪽에 붙으려하니 이 지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이곳은 요충지이니 버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조비는 아예 손권이 대놓고 여길 얻으려 할 것이고 그냥 못 지킬것이라 생각하였는지 듣지 않았다가 정작 손권이 침범하지 않자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이는 병법에 통달했다 자뻑하는 조비가 정작 아버지가 그토록 말년에 걱정했던 요충지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통 조비의 군재 수준이나 전략적인 시각이 실로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꼽힌다. 손권이 남형주를 먹고나선 그냥 거기에 만족하고 양양, 번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행동[7]을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촉 대신 오가 조씨 정권의 우환거리가 되었을 것이라 일반 사람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인데 이랬으니... 어쨌거나 이후 조비가 조인과 서황을 보내 진소를 몰아내서 양번이 다시 조씨 정권의 땅이 되는 걸로 이 헤프닝은 종료된다.[8]

어쨌거나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은 220년 3월에 황룡이 출현했다고 한다. 176년, 단양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내황 은등이 그로부터 44년 뒤에도 살아있어서 "50년이 못되어 황룡이 나온다더니 맞네."하고 인증했다.

220년 3월에 하후돈대장군에 봉했으나 하후돈은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하후돈이 죽을 때 조비는 예법을 어기면서까지 곡을 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엔 원소와 같은 군벌 조직이 도독/감군 관직체제를 사조직화한 경우도 있고 난세가 되니까 독군과 감군 모두 엉망진창이라고 해야 할 수준으로 남발됐다. 도독 관우가 도독 조루를 휘하에 두고 독했는 기록도 있을 정도니까. 조조군이라고 딱히 다르지도 않다. 조비는 이런 혼란을 정리하고 조씨 정권의 독군/감군 체제를 확립했다.

220년 6월, 열병하고 남방 정벌을 떠났으나, 실제적으로 개입은 하지 않았고 무력 시위 겸 헌제를 군사적으로 위협해 선양의 명분 다지기[9]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8월에 봉황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또 나왔기도 하고(…), 조비는 초현, 곡려 정도에서 노닐다가 손권이 헌상하고 7월경엔 상용에서 4천 호 부곡을 이끌고 투항한 맹달과 하후상, 서황을 상용으로 보내 유비의 양자 유봉을 공격하여 서성, 방릉, 상용을 다시 탈환하고 맹달을 서성태수로 임명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전과 없이 허창으로 돌아왔다.

맹달의 귀순 및 상용 탈환은 연의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일처럼 서술되지만 조씨 정권에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맹달의 귀순은 그동안 이탈자가 거의 없었던 유비세력에서 촉의 명사가 투항했다는 걸 보여주어 천명이 조씨에 있다는 프로파간다로 쓸 수 있었다. 또한 상용탈환은 아버지 조조가 탈취당한 땅을 후계자로서 되찾았다는 명분을 챙길 수 있었고, 이곳은 위촉오 세곳이 맞닿은 곳이라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즉, 이곳을 점할 수 있으면 촉오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위나라가 이곳을 틀어쥐면서 제갈량은 위나라를 치러 장강을 이용한 수운 보급이 수월한 남쪽이 아니라 진령산맥으로 가는 북쪽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최종적으로는 실패한다. 또한 40년후의 촉한멸망전에서도 위나라는 이곳을 요충지로 삼아 촉나라를 구원하러 오는 오나라의 원병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인 잇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 유비가 이끄는 한실 부흥 세력의 힘을 깎아 내리는 걸 헌제에게 대놓고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이후 이루어질 선양 작업에 매끄러운 기름칠을 해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2.5. 위나라 건국

조비의 여동생이 3명(조절, 조헌, 조화)이나 헌제의 아내였는데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할 때 사람을 보내 옥새를 내어달라고 강요하자, 조절은 몇 번이고 옥새를 내주지 않았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자에게 "하늘이 절대로 너희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라고 외치면서 옥새를 바닥에 내던지며 통곡했다.

결국 220년 10월 28일 헌제는 조비에게 선양을 하였고 황제가 된 조비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다. 연호를 황초로 삼고, 헌제를 산양공으로 삼았으며 하지만 어느정도 예우를 갖춰줘서 헌제에게는 자신에게 올리는 상서에서 신(臣)이라고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 때 유비진영에 있던 맹달이 관우의 죽음을 둘러싼 책임공방 끝에 위나라로 귀순하는데, 조비는 이를 크게 환영한다. 아직도 400년 한나라 사직에 대한 향수가 있는 위나라 신민들에게 있어 방계지만 한 황실의 동씨인 유씨 세력의 일원이 자발적으로 유비를 떠나 위나라에 귀순했다는 것은 조비에게 있어서 크나큰 프로파간다의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만 보면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유비 진영에서 관우는 유비를 제외하고 한나라 조정의 정식 관직과 작위를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로 애당초 관우와 연계하려 했던 경기위황의 난, 후음의 난, 관우의 진격 이후 그 짧은 시간에 너도나도 관우의 인수를 받은 허도 인근의 봉기들이 단순히 불과 1년 사이에 아무런 사전 계획없이 순식간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차라리 관우가 그전부터 사전공작을 해야 가능했을 일이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10] 관우가 벌인 정치공작이나 한실부흥 세력이 그의 강성한 세력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건대 관우가 언제든지 한실과 연계하여 천하에 영향을 끼치기 충분한 인물이었다고 보면, 이미 한중에서 유비에게 한방 크게 얻어맞은 조조의 입장에서는 아예 관우의 예봉을 어떻게든 꺾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만큼 유비-관우를 비롯한 한실부흥 세력들은 조조가 죽기 직전까지도 위협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조가 한창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서 원기옥(?)을 끌어 모으던 219년 10월은 조조가 죽기 불과 3개월 전이다. 조조라고 자기 몸 상태를 모르지는 않았을 테지만[11][12] 관우가 비록 서황에게 가로막혀 번성을 얻는 데는 실패하긴 했으나 이미 면수를 장악한 상태였기에 이를 경계로 양양을 조조로부터 빼앗아 조조군에 맞서는 기점으로 삼아 정면 대치와 긴장 구도를 유지할 가능성은 농후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게 성공한 상태에서 관우가 경계로 삼은 면수를 넘을 방법도 없이 조조가 죽었다고 생각해본다면, 조조 입장에서는 죽기 직전에 유비와 그의 오른팔인 관우에게 연속으로 패배한 채 땅과 기세를 한실부흥 세력에게 빼앗기고 후계자에게 인수인계나 하는 꼴이 된다. 이런 결과는 이제 막 태동하려는 조조 정권 입장에선 최악의 사태가 될 수도 있었기에 조조는 죽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이 고비만은 반드시 넘겨야 했던 것이다.

맹달은 연의에서는 잠시 스처가는 객장 정도로 나오지만, 원래 상용에서 다름 세력이 있는 군벌이었고, 당대에는 악의의 재림이라고 들을만큼 명성이 있었다. 유장에 속해 있었지만 독립군벌로 볼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런 맹달이 유비를 떠나 조비에게 자진해서 왔으니 맹달은 자기 수레에 태울만큼 맹달을 파격적으로 대우한다. 또한 맹달 자신도 서황과 함께 출진하여 유비가 소속되어 있던 상용을 위나라에 안기는 역할을 한다. 조비는 이곳에 신성군을 설치하며 이곳은 삼국이 모두 접한 요충지이기 때문에 맹달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만큼 큰 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조위내에서 맹달의 옹호자였던 조비, 하후상, 환계가 225-226년 모두 사망하고 맹달을 처음부터 반대하던 사마의가 군권을 잡자 촉으로 다시 귀순하려다가 사마의에게 잡혀 처단된다.

어쨌거나 조비는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고 조씨 황실의 선조를 유우(有虞, 제순)씨로 높여 조위 황실의 통치의 정당성을 높이고 선대 왕조를 우대했으며 선양을 받을 때 공경과 열후, 제장과 흉노의 선우, 네 오랑캐 사신 같은 사방의 이민족 사절들을 들이는 등 수만 인을 배석시키고 유교 경전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을 널리 알려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매끄러운 개국 퍼포먼스를 보였다. 여기에 오행설 및 도참설을 써가면서 한위선양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다. 대표적인 예로 급사중 박사 소림, 동파가 이렇게 말했다.
올해(220) 10월에 (북두성이 가리키는) 월건이 곧 전욱이 천명을 받은 분양에 해당하므로 바야흐로 위로써 시월에 선양을 받는다면 이는 시조가 천명을 받을 때의 징조와 합치됩니다. 위나라의 씨족은 전욱으로부터 나왔으며 순과 조상을 같이하는 것이 춘추세가에 나타납니다. 순이 토덕으로 요의 화덕을 이었는데 지금 위 역시 토덕으로 한의 화덕을 이으니 오행의 운행은 요순이 주고 받는 때의 차례와 부합됩니다.

(중략)

지금 한의 기운이 이미 끝났고 요상한 이변이 나타나 마지막임을 나타내는 것은 명백하니 폐하가 천명을 받으심은 상서가 거듭 충분히 반복해서 주도하게 아뢰었고, 말로 설명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신할 정도로 명백한 표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이미 조서가 발포되었는데 새수를 두르지 않고 위로는 천명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바람을 어기십니다. 신은 삼가 옛 전적을 살피고 도위를 참고하니 위나라의 행운 및 천도가 소재한 바가 즉위할 징험이 이재 금년 이 달에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촉한이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댔지만 비시는 위나라를 치지 못한채 황제에 즉위하면 대의명분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으며 유파도 그같은 일은 천하에 대해 기량이 좁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느긋하게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렇게 조비의 위나라 건국 그리고 황제 등극과 달리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의 세력이 한풀 꺾인 상황이 오자 유비가 황제에 올라 한실을 잇는다는 명분을 잠시 유보해야 한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고 결국 유비의 제위 등극에는 잡음이 낀 모습이 보인다. 결국 촉한은 유씨 정통성 외에도 도참설에도 기대야 했고 오의 경우는 그런 것도 없었기에 도참설로 떡칠을 해서 간신히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비는 마지막까지 한나라의 천자가 가진 권위를 잘 써먹고 관우의 죽음으로 한실부흥을 외치는 강성한 유비의 세력을 한풀 꺾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오른 조조의 역성혁명 작업을 충실히 마무리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조비는 후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헌제의 딸과 결혼하는 행위로써 요순선양을 헌제와 자신에게 투영시켜서 재현시키고, 이렇게 만든 혈통론을 위나라가 건국되고 망할 때까지 (물론 조예 때 한 번 삐끗하긴 하지만) 유지를 시켰다. 조비가 여러모로 정통성 유지를 위해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다곤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조비가 한나라 황제를 협천자 한 위왕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였으며 방계 유씨 황통만을 내세운 유비나 아예 그것도 없어서 도참에 의존한 손권과는 다른 조건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 수도를 허창[13]에서 낙양으로 옮겨서 새롭게 궁을 지었다.

조비는 조강지처 견씨를 내팽겨쳤는데, 결국 곽여왕의 모함에 221년 6월 28일에 사약을 내려 자살하도록 했다.

221년 6월 29일, 일식이 나타나자 담당 관리가 태위(가후)를 면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했다. 조비는 재해나 이변이 출현하는 것은 자신의 허물이지 신하의 허물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물리쳤다.

2.6. 이릉대전

221년 11월, 손권을 오왕으로 봉했다. 오주전 주석에 의하면 손권이 신하들과 의논하니, 차라리 상장군(上將軍) 구주백(九州伯)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칭하고, 위나라에서 주는 왕위를 받지 말라고 했다. 이에 손권이 대답했다. "구주백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다. 예전에 유방도 한때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그것은 다 시세에 따른 것이오. 왜 받지 말라는 것이오?" 하고는 왕위를 받았다. 하지만 역시 오주전에 의하면 222년 3월 당초, 손권은 겉으로는 위나라를 의탁하고 섬겼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손권이 조비가 주는 작위를 받은 것은 진실된 항복이 아니라 촉나라를 상대하면서 위나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비는 이릉대전의 승패를 예측하기도 했다. 《연의》에도 나온 것으로 유명한 일화로 222년 윤달 5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樹冊)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유비가 깨질 것을 예측하고 실제로 7일 만에 유비를 깨뜨렸다는 손권의 소식이 오기도 했다.

이때 낙오되었던 촉나라 관원들이 대거 위나라로 귀순해왔다. 이들 중 가낭 유명한 이가 황권이다. 원래 유비는 군사를 나누어 장강의 북안과 남안에서 각각 진격하면서 양동작전으로 동진하면서 오나라를 치려고 했는데, 이들은 별동대로 장강 이북에 있다가 남쪽에 있던 유비의 본진이 박살나자 고립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촉으로 돌아가려면 장강을 타고 가든지 아니면 육로로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장강은 이미 오나라 수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육로로 가려면 상용군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조위에 항복한다. 조비는 자신이 황제에 오른 후, 촉나라 인사들이 대거 귀순해오자 이들을 매우 우대했다.

222년 9월 3일에는 외척을 배제하겠다는 조칙을 내린다.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 - 문제기
이에 대해서 외척의 발호를 억제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세설신어》 관련 떡밥을 생각하면 좀 이상한 추측이 들게 된다. 6일 후 곽여왕을 기어이 황후로 삼으니 그녀가 문덕황후 곽씨다.

3. 재위시 정책

3.1. 국가 체제 정비

선양을 통해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는 재위 기간 내내 제도의 확립과 민심의 안정 그리고 유학의 부흥에 힘쓰는 등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끄는 통일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제도적인 면에선 행정 구역을 재확립하고 인사 제도를 정비해 구품관인법을 실행한다. 한편으론 관료간의 상사 탄핵에 제약을 가했는데, 이는 고위 관료와의 타협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어떤 측면에서 관료기구 내의 질서를 확립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조비는 주로 조조가 했던 정책을 유지했는데 이는 공도 될 수 있고 조조의 강압적인 정책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과도 될 수 있다. 그는 구휼책이나 사면령을 종종 내려 민심의 이반을 제지하고자 했다. 심지어 연•예주 일부 지역 한정으로 세금 면제책도 시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사병의 유해를 되찾아 제사를 지내게 한다든가, 사사로운 복수를 금지시키고 무고를 엄하게 다스리며 서역의 도시 국가들의 왕이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품을 바치니, 무기교위를 설치하고 서역과의 무역을 재개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3.2. 유교 진흥책


유가 부흥책도 역시 사회의 안정과 전통적인 향촌 질서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책으로 보인다. 유학의 부흥을 위하여 즉위 직후(221년 2월) 노군에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 일백호에 그를 관리하게 하는 한편 제사 규칙을 정하고, 더 나아가 장례 제도를 개선시킨다. 그리고 저술 사업을 시행해 모든 유학자들에게 경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유학 경전을 편찬, 천여편에 달하는 '황람'을 출간한다. 뭔가 괴리감이 들겠지만 치세 내내 유가적 덕목의 권장에 힘써 왔다. 한나라 말엽의 당시 비관적, 회의주의적 경향의 사고가 지식인계 전반에 만연했다는 점에서 조비의 유가진흥에 기울인 노력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3.3. 유민 정착 정책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후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며 도적이 되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버려진 토지들은 황폐화되어 황무지가 되었으며, 당시 경제의 근본은 농업이었기 때문에 국가 경제에 크나큰 지장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조는 이렇게 유랑민 혹은 도적이 된 주민들을 강제로 정주시키는 둔전제를 폈다. 또한 모병한 병사들에게 토지를 주고, 과부를 찾아내 가정을 이루게 하여 둔전에 정착시키는 정책도 병행되었다. 이는 조조가 연주를 다스릴 때부터 조지(枣祗)의 건의로 시작되었으며,[14] 이는 조비시대도 몇몇 가혹한 조치는 조금 순화되어 계속되었다. 조위-서진은 이런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어떤 삼덕들은 조조-조비가 백성의 아내를 빼앗아 병사에게 아내를 주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조조, 조비 때는 병사들을 결혼시켜 둔전에 주둔시켰지만, 이런 국가주도의 결혼은 원칙상 과부에 한했다. 애당초 충효를 중시하는 유교국가인 후한에서는 아무리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멀쩡한 가정을 파괴한다는 것은 펴기 힘든 정책이다.[15] 하지만 일부 관리들은 실적주의에 빠졌는지 백성들의 아내를 빼앗아 병사에게 준듯 하다. 조비는 갑자기 이런 결혼이 늘어난 것을 괴이쩍게 여겼는데, 남편이 살아있는 아내를 데려와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조비는 이런 짓을 매우 좋지 않게 보았을 것이며, 이를 조비가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왜곡이다.
처음에 두기가 하동군[16]에 재임할 때 과부 목록을 작성했다. 과부들은 이후 스스로 짝을 찾았지만 있지만 관아는 여전히 작성된 문서에 근거하여 (병사와) 재혼시켰으므로, 그런 과부들은 곡을 했다. 두기는 이를 작성할 때 실제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만 선택했기 때문에 그가 보고한 과부들의 수는 적었으나, 나중에 부임한 조엄은 훨씬 많은 과부의 숫자를 보고했다. 문제(조비)가 조엄에게 “예전에 보고한 과부의 수는 적었는데, 지금은 왜이리 많은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엄은 "이 사람들은 남편이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제와 좌우의 사람들은 낮빛이 바뀌었다.
初畿在郡,被書錄寡婦。是時他郡或有已自相配嫁,依書皆錄奪,啼哭道路。畿但取寡者,故所送少;及趙儼代畿而所送多。文帝問畿:「前君所送何少,今何多也?」畿對曰:「臣前所錄皆亡者妻,今儼送生人婦也。」帝及左右顧而失色
(삼국지 위지 두기전에서 배송지가 인용한 <위략>의 내용)

3.4. 구품관인법

구품관인법 혹은 구품중정제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실시된 공식 관리 임용 제도로, 서기 220년 위문제 조비가 상서령 진군의 제안을 받아 정식으로 시행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주와 현에 중정관이라는 관리를 두는 것인데, 이들은 지방 인사를 평가하고 “품”과 “장”을 작성하며 이를 관리 선발의 기초로 조정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 중 '품'은 학자의 도덕적 능력과 집안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등급으로 9등급으로 나뉘지만, 실제로는 2등급만 있으며, (상품 2~3등급 , 하품 4~9등급) 누구도 1등급을 받지 못했다. "장"은 인재의 재능과 인품에 중정관이 간략히 평한 것이다.

일부 삼덕들이 조비가 실행한 이 제도가 유명무실한 것, 혹은 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침소봉대하고 있지만, 이 제도는 중정관이 인재를 평가하고 이를 서면화한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관리임용에 공정함과 합리성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중정관의 평가에 주관이 들어가는 단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전에는 그런 주관적인 평가 자체도 없을 만큼 관리임용제도가 집안 빽과 연줄로 이뤄지는 주먹구구식이었다. 또한 이 제도로 말미암아 조위정권은 한나라 고조 이래 내려오던 여러 문벌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새로운 지방인재들을 인재들을 대거 수혈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래 서술하는 여러 단점들은 일단 조비시대에는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충성심이 아니라 능력만을 고려한 선발은 조위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지만, 이것이 획기적인 제도였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 제도는 위진남북조 내내 실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수나라 시대에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이를 개혁하여 아예 과거제도가 실시되게 된다.

구품중정제가 시행 초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제도였고, 후대 사마씨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심사관들을 친사마씨로 개편하여 사마씨의 탈법적 집권에 이용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서진 정권은 집권 후에 해당 제도를 개편하게 된다. 위나라 구품관인법의 본래의 의도는 순수 관료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문벌을 떠나 개인의 재능과 인덕에 따라 적당한 지위에 적당한 인재를 발탁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 이래 사회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귀족주의는 갑자기 이 제도를 귀족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구품관인법은 그 실시 처음부터 사뭇 귀족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듯하다. 세력가의 자제가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 귀족주의의 시작이고, 그러한 사실이 쌓여서 귀족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구품관인법의 운영이 귀족적이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그것은 한나라 이래의 다른 선거법, 즉 수재, 효렴, 현량, 태학시경(太學詩經) 등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수재, 효렴의 급제자는 한대처럼 낭에 임명되었고 각 주마다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주군에서 천거된 수재, 효렴은 중앙에서 시험을 본 뒤 성적에 따라 제(第)가 덧붙여졌는데, 제는 중정이 내리는 향품에 대응되었다. 그리고 수재의 성적은 3등으로 나누어졌던 듯하며, 가령 이것을 갑을병으로 이름 붙이면, 갑은 향품 2품에 상당한다.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보통 병에 급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효렴은 수재보다 조금 자격이 낮다고 알려져 있다. 수재는 주에서 천거되고 효렴은 군에서 천거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앙에서의 시험도 수재에게는 책(策)을 묻고 효렴에게는 경서의 뜻을 묻는다. 경서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보통 수준의 재능만 있어도 독서량을 늘려 달성할 수 있지만, 문학적인 대책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성적에 따른 향품은 수재와 별로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곧 효렴의 기가관을 보면, 역시 갑을병 3등이 있고, 그대로 수재의 그것과 대응했던 듯하다.

일반적인 선거였던 수재, 효렴 같은 과목과 달리 제과(制科)에 해당하는 방식으로서 때에 따라서 인재를 구한다는 취지였던 선거 방식은 이미 한대부터 존재하였고, 위, 진도 이것을 계승하였다. 위, 진에는 현량과가 많았는데, 이밖에도 방정(方正),직언(直言) 등의 과목도 있었다. 현량과도 역시 갑을병 3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음으로 태학에서 학생에게 경서를 시험하는 제도가 있었다. 태학에서 학생에게 경서의 뜻을 시험하는 경우도 최하의 급제는 향품 4품자에 상당하였고, 다른 공거(貢擧)의 사례와 대비해서 생각하면 병이었을 것이다. 종합하면, 수재, 효렴, 현량, 시경은 모두 갑, 을, 병 3등으로 나누고, 병은 다시 상하로 나뉘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향품의 2품,3품,4품에 대응되어 있었다.

이 당시 수재, 효렴을 천거하는 것은 주군의 장관인 자사와 태수의 책임이지만, 실제로는 중정이 고문을 맡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험을 실시하는 것은 상서였다. 때로는 천자 스스로 책문을 행하는 일도 있었다. 수재, 효렴 및 현량 등의 제과에서도 규칙상으로는 그 성적에 의해 향품 2품 내지 4품을 줄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2품,3품이 주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거의 대부분이 4품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불리한 것은 당시 점차 귀족주의가 만연하여 개인의 재능에 따라 상품을 얻은 자에 대해서는 이부가 관위를 주는 데 인색하였던 듯하다. 이런 현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부와 상서의 차이가 이미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다. 사도는 단순히 자격을 심사하여 관리의 자격을 줄 뿐이지만, 실제로 임명하는 것은 이부의 일이다. 사도부는 이부의 인사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관리의 자격을 줌으로써 일이 끝난다. 결국 인사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부 쪽이 강했던 것이다. 이부에 의한 인사권의 장악이나, 사도와 중정의 유명무실화는 이미 위, 진의 교체기에 그 단서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세력 있는 집안의 자제로 이미 높은 향품을 얻은 자나 혹은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가 다시 시험을 받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수재, 효렴이나 현량의 천거는 배경이 없는 빈천한 자제만이 응시하게 되고, 세가의 자제는 가령 천거되어도 사퇴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점점 수재, 효렴의 지위는 하락하게 되고, 시험을 보는 것도 형식적으로 시행될 뿐이며, 대체로 채점은 병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되자 차라리 시험을 폐지해 버리려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한편, 위나라가 성립하여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중앙 집권 정부를 수립하자 그것에 반비례해서 지방 세력이 약해졌다. 또 중앙은 의식적으로 지방을 억눌러서 중앙에서 통치하기 쉽게 군을 잘게 나누었다. 그리고 한번 중앙 정부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세력가는 그대로 눌러앉아 자손에게 그 지위를 전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것은 중앙에서도 지방 피라미드를 디딤돌로 이용하여, 그 위에 전국적인 귀족 피라미드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하여는 구품관인법이 처음부터 귀족적으로 운영된 것도 큰 원인을 이루고 있지만, 위나라 말기에 중정제도가 개정되어 군중정 위에 주중정이 다시 두어진 것이 점점 이 경향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위나라가 구품관인법을 시행하기 위해 지방에 설치한 중정은 처음에는 군중정뿐이었다. 하지만,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건의로 위나라 말기에 주중정이 설치되었다. 아마 종실은 중정이 될 수 없는 것을 이용하여 사마의의 심복을 지방의 주대중정으로 많이 임명하여 자기 세력의 온존을 꾀하고, 또 지방 호족과 미리 연락망을 몰래 마련해 두려고 꾀하였는지도 모른다. 주대중정이 두어지게 되면, 이것은 군중정과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한대까지 지방 자치의 단위는 군이고, 주는 단순히 이것을 감독하는 구분에 불과하며 결코 군 위에 두어진 행정 구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진 이후도 군은 행정 단위였어도 자치단체적인 색채가 강하다. 주도 마찬가지로 행정 단위이기는 해도 중앙에서 파견한 기관이라는 색채가 농후하다. 따라서 새로 설치된 주대중정이 군의 여론을 종합하기보다는 중앙의 방침을 하달하고 군중정을 감독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도 자연스런 추세이다. 주중정이 설치되자 향품의 결정권이 점차 중앙으로 집중되고 동시에 귀족화되었다.

주대중정이 신설되어 군중정의 신분에 간섭하게 되면 여기에 사도-주대중정-군대중정-군소중정이라는 통속 관계가 생기고, 이른바 일종의 관료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통 속에 편입되어 약간이나마 상하의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함으로써 점차 그 독립성이 상실되어 갔다. 그리고 위로부터 억압된 울분은 때때로 아래로 내려가 배출구를 찾으려 하는 일도 있다. 따라서 임명된 중정이 지방의 관리 후보자에게 내리는 향품 또한 매우 자의적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중정이 내리는 향품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일정한 방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귀족주의였다. 중정의 원래 임무는 아래의 여론을 듣고 이것을 위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앙의 사도가 주중정의 신분을 결정하고, 주중정이 읍중정의 신분을 결정하게 되자, 위에서 아래로의 통로가 크게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중정이 내리는 향품도, 아래의 여론을 위해 전달하기보다는 위의 의향에 영합해서 아래의 여론을 날조하는 결과에 빠졌다.

중정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진짜로 완벽한 중립을 지키는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각 중정들끼리 담합해서 자신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품의 상신서를 올리거나 서로를 중정으로 추천함으로써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 수 있다. 사마의 일당이 바로 이런 식으로 조위의 기반을 허물었던 것이다.

구품관인법은 각 지역의 여론인 향론이 강력하면 그나마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대혼란 속에서 향론은 각 지역이 황폐화되고 지역민들이 유랑하면서 붕괴된 지 오래였다.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향론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구품관인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향론이라 해도 사실상 중앙정부의 중정이 생각한 향론이 되어버리므로 중앙정부에서 생각한 인물이 추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래부터가 중정 자체가 지방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중앙정계의 의견으로 교체하여 호족들의 중앙정치 참여를 걸러 중앙 입맛에 맞는 사람만 선발하는 수단이자 중앙정치 내부의 균형을 유지할 수단이었는데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즉, 형식적으로만 지역민심을 감안하는 제도가 되었다.

거기에 뒤에서 말하겠지만 동진 이후 귀족사회가 완성되자 중정들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부의 판단이 절대시되자 그야말로 지방 민심이 무시되는 빈도나 사태가 잦아지게 된다.

위진교체기 당시 그다지 큰 동요 없이 그대로 지위를 인정받았던 귀족 사회는 서진대에 들어가면서 점점 더 귀족적인 색채를 더해갔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에게 탄압받던 청담풍이 다시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한 기세로 귀족 사회를 풍미했다. 게다가 이 청담은 구품관인법과 결합했다. 청담은 귀족의 특권이고. 구품관인법도 호족보다 귀족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 담론 문화인 청담 담론에 뛰어난 자가 향품에서 윗품을 얻어 그대로 높은 관품에서 기가하게 된다. 이러한 풍조를 비난하는 관점으로 볼 때 바로 헛된 명성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었다.

귀족의 취미인 청담도 원래는 개인의 재능을 가장 중시해야 하지만. 그것이 귀족적인 취미라는 사실부터 곧바로 귀족제도로 이행할 수 있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족의 취미는 대개의 경우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를 거쳐 세련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데 서진 무제 중기부터 관리 등용의 선거를 장악한 산도는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손꼽힐 정도로 청담에 뛰어났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명족 출신이 아니고 귀족적 취미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평한 인사를 시행했다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무제에 이어 어리석은 혜제가 즉위하고 같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면서 명족 출신인 왕융이나 비슷하게 청담에 열중했던 왕연이 선거를 맡자 귀족주의가 대두하였다.

처음부터 귀족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구품관인법은 점차 귀족적으로 운영되었다. 향품은 문벌에 따라 결정되었다. 문벌은 원래 세월을 두고 쌓여서 생기는 것이므로 고위의 귀족은 그 문벌이 더욱 높아져서 문벌 집안 가운데 다시 여러 등급의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지체를 문지라 하고. 문지의 높고 낮음을 유품이라 한다. 이것과 청담사상이 결합하여 위진시기의 귀족주의는 성행하게 된다.

구품관인법에서 중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름위의 인사가 있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위나라 시대에는 종실이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서진에 들어가면 방침이 바뀐다. 위나라가 근친의 종실을 학대했기 때문에 고립무원에 빠져 일찍 멸망했다고 생각한 서진의 천자는 종실을 우대하여 먼저 그들에게 영토를 주고 봉건 군주로 삼은 뒤에 다시 병력을 갖게 하고 관료를 지배시키며, 게다가 관료의 지위까지 갖게 하였다. 이러한 종실의 관료생활은 일반 귀족과는 별개로 취급하여 아마 중정의 관할 범위 밖에 두어졌고, 종정경(宗正卿)이 관장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중정의 권한으로부터 절반 가량 이탈한 것에 종실이 아닌 봉건 제후가 있다. 위대에는 종실인 근친자만 왕에 봉해지고 식읍을 받았으며, 이밖에는 명목적인 산후(散侯)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진 혁명의 직전에 혁명에 의한 동요를 막기 위해 사마씨의 의도로 대대적인 봉건제가 채택되었다. 이것이 역사상 5등작의 설치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과 산후 사이에 5등의 개국작(開國爵)을 설치하여 사마씨의 동료를 봉건 제후로 세운 것이었다. 5등이란 개국공이나 개국후, 개국백, 개국자, 개국남을 말하며, 각각 봉읍을 받고 관품이 정해져 있다.

다음으로, 중정의 직무 범위에서 실질적으로는 일탈하면서도 또한 중정이 향품을 내려야 하는 것은 1품관인 삼공의 자제이다. 삼공의 자제는 대개 통념상 5품관 기가로 정해져있었는데, 삼공의 자제는 대개 통념상 5품관 기가로 정해져있었던 것은 앞서 말하였다. 이들은 주로 청담을 이용하여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방법으로 향품을 받았다. 당시에는 보통 20세가 되면 관직에 나아갔기 때문에 그때까지 사교계의 꽃이 되어 있어야 했다.

이밖에 20세 이전의 청소년에 대하여 장래의 전망을 꿰뚫어 보고 향품을 주어야 한다고 하면 중정의 직분 또한 어려운 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싫으면, 중정은 점쟁이가 될 요량으로 그럴싸한 구실을 달아 장래를 예언하는 향품을 내려야 한다. 한번 높은 향품을 내리면 자기의 인륜에 대한 현명함이 손상되지 않도록 상대를 출세시키지 않으면 곤란한 지경에 처한다. 동시에 낮은 향품을 받은 사람이 출세를 해서도 곤란하다.

구품관인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조위와 서진의 멸망과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라는 최악의 결과를 내었으며 천하를 도탄에 빠뜨리고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조예 사후 조방 대에 들어서야 하후현, 하안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 내각이 개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미 이 시기에 들어와선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도 마련하자는 주장마저 사마의에게 거부당할 정도로 문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었으며, 조상 내각은 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난항을 겪다가 사마씨의 정변(고평릉 사변)으로 역관광을 타면서 위나라 자체가 멸망한다.

당연히 구품중정제로 세력을 키워 찬탈에 성공한 사마씨의 진 왕조는 바보들이 아니었기에 자신들처럼 구품중정제로 정권을 찬탈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게 구품관인법을 나름대로 손질했고, 이후 등장하는 찬탈자들은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찬탈해야 했으니 그 결과가 바로 진-유송 교체기부터 나타난 전 왕조의 왕족들을 모두 몰살시키는 현상이다. 남북조시대라는 혼란 속에서도 구품관인법은 유지된 건 이유가 있었다. 구품관인법은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시행되면서 개편되고 조정되며, 수문제가 마련한 관료제의의 골자와 근간은 이렇게 남북조 정권들이 개선하고 고민하여 완비한 구품관인법에 기초하게 된다.

4. 조비의 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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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무 이른 죽음

226년 여름 5월 16일, 조비는 병세가[17] 위중하자 조예를 황태자로 삼았고 유조는 진군, 중군 대장군 조진, 정동 대장군 조휴, 무군 대장군 사마의에게 내려져 조예의 정사를 보좌하도록 한다. 낙양 가복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39세였다. 위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면서 겨우 6년의 재위기간으로 죽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삼국지》에 기록된 주건평과의 일화 이외에도, 야사집인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조조가 자신을 세자로 세웠을 때 급하다 생각하여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高元呂)라는 사람이 있어 불러서 물어보자, 고원려는 "그 고귀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수명을 묻자 "그의 수명은 마흔살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조비가 마흔에 돌연 죽은 것이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도 사람들의 떡밥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1] 일부 삼덕들은 마치 인성-능력-리더쉽이 하나인 것처럼 주장하나, 인성이 나쁘더라도 능력이 출중하며 리더로서 자질이 훌륭한 사람은 현대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2] 말이 종군이지 그냥 어린아이가 아빠 따라왔다가 저승 문턱 밟은 아찔한 상황이 된다. 이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갓난아이일때 큰형 노부야스가 사사되는 차원에서 자결한 점과도 흡사하다.[3] 《후한서》 〈공융열전〉에서는 "조조가 업성을 도륙할 때 원씨의 부녀자들이 겁탈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조의 아들 조비는 사사로이 원희의 처 견씨를 맞아들였다"고 되어 있다.[18] 이 기록이 조조열전이나 삼국지 문제기가 아닌 공융열전에 나온 이유는 공융이 이를 가지고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달기를 주공단에게 주었다는 식으로 말해서, 조조가 그 출전을 묻자, 본인(공융) 생각이라고 빼면서 조조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공융의 이런 조롱을 마음에 묵혀 두었다가 그를 역적으로 처단하게 된다.[4] 정사 삼국지에는 오환정벌에서 유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 (從征烏丸於柳城,未至,薨)고만 기록되어 있고, 정후에 추증되었다(謚曰定候)고 나온다. 훙(薨)은 고관의 자연스러운 죽음에 주로 쓰는 말이므로, 자살로 보기는 무리가 있고 유성은 현재의 요녕성 차오양시에 위치한 지명이며, 당시 만리장성 밖으로 원정나간 한족들은 여러 풍토병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곽가도 유성에서 풍토병으로 죽었다), 만약 장수도 여기서 사망했다면, 굳이 조조를 따라가 전공을 세운 상태에서 자살했다보다는 풍토병에 걸려 사망한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5] 조조가 후계 문제로 가후랑 이야기를 나누려 불렀는데,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하니 원본초유경승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둘 다 첫째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가 망한 인물들로, 이에 조조는 그 뜻을 알아채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6] 조광조와 남곤, 정구와 정인홍의 얘기가 그렇다지만 조광조와 남곤의 얘기는 야사로 그때나 지금이나 민중의 시각이 그렇다는 것이다.[7] 원래 촉의 남형주 지역 침공을 계획했던 여몽의 계획안대로면 손권은 남형주는 물론이고 양번, 영안까지 차지해야 했다. 여몽의 생각대로라면 이때는 오나라에게 거의 천우신조의 기회였던 셈. 그러나 손권은 한동안은 양번이 버려졌음에도 침범하지 않다가 진소를 보내 찔러보는 액션을 좀 하고 그쳐버렸다. 심지어 이 얘기는 오서 오주전에는 나오지도 않고 진소라는 인물도 조인전에만 나와 손권이 어지간히도(...) 양번에 관심을 안 두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애당초 손권이 여몽의 말을 듣는 척만하여 촉의 남형주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 이상의 확장을 할 의사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일 손권이 뒤늦게야 양번에 대군을 보내 이 지역을 공략하려 두 어번 시도했으나 너무나도 간단히 실패했던 것을 볼 때, 이 부분에선 양번이 관우와 아버지 조조가 맞붙은 격전지이자 요충지임에도 무책임하게 버린 조비나 여몽이 그렇게 양번을 얻으라 말했었고 실제 양번이 버려졌던 좋은 기회임에도 그냥 놔두다가 나중에 가서야 양번을 치는 손권이나 둘 다 덤 앤 더머(...) 수준의 행각을 보였기에 관우vs조조 같은 양국의 운명을 다투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8] 조인전과 문제기를 조합하면 이는 조인이 대장군이 되는 221년 4월 전의 일이다. 이릉대전이 일어나서 양번을 못 먹은 게 아니라 이릉대전 전에 기회가 있었는데도 안 먹은 것이니 다시 말하지만 당시 손권 역시 양번에 어지간히(...) 관심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9] 6월 ~ 10월 동안 군대를 운용했는데, 10월 4일 헌제가 한고제 유방의 릉에 제사 지내고 선양을 거론했다.[10] 위풍의 난은 사료가 많지 않아 관우와 연계가 있던 난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란이 일어난 곳이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이라는 점, 이 반란에 참여해 해를 입은 자들 가운데 한나라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무렵에 있던 일련의 사태에 편승한 반조조 반란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11] 물론 인과 관계가 바뀌어서 이런 반조조 세력들이 벌인 일련의 행동들이 조조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했기에 그 반작용으로 관우가 죽자마자 갑자기 그동안 쌓인 피로가 확 몰려서 훅 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관우를 상대할 때 조조를 보면 천도를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거나, 유비를 막는 서방 병력을 제외하고 회남 전선을 비우고 서주 전선에까지 병력을 끌어다 쓰고 심지어 바로 해당 년도에 회남을 공격했던 손권까지 동원하면서 관우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는 조급함을 보였다 볼 여지가 다분한 행동들을 이어갔다. 조조가 스스로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느낀 증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12] 이런 조조의 반대 사례로는 5차 북벌 당시 오장원의 제갈량을 들 수 있을 텐데 사마의와 대치하면서 여기저기 찔러보고 점령지를 서서히 넓히며 100일 동안이나 틀어 박힌 사마의에게 활발히 싸움을 걸면서 장기전으로 관중에 눌러 앉아 둔전으로 병사들이 향후에 먹을 곡식을 열심히 축적하고 있었다. 보면 확실히 219년 당시 조조의 다급함과는 반대의 여유까지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런 정황상 제갈량은 자신이 그렇게 금방 건강에 문제가 생기리라 예상은 못하고 있다가 정말로 순식간에 그동안의 과로로 인한 몸의 이상이 한꺼번에 몰려 옴으로 인해 훅 간(?)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13] 자신이 직접 '허도'에서 '허창'으로 개명했다.[14] 조지는 연의에 등장하지 않는데다가, 조조 거병 초기에 요절했기 때문에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팬덤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둔전제의 성과만 본다면 순욱 못지 않은 업적을 조조에게 안겼다.[15] 이런 짓은 동탁이 했으며, 동탁은 백성을 죽이고 그 아내를 부하들에게 첩으로 주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동탁은 그 폭정으로 만고의 역적으로 기록되고 있다.[16] 현재의 린펀시 근처이다. 당시에는 수도권인 사례지역에 속했다.[17] 한질이라고 하며 이는 오한이 드는 병이다. 아마 현재의 독감으로 추측되는데 지금도 독감은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병으로 분류되는 병이며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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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원문에는 "初, 曹操攻屠鄴城, 袁氏婦子多見侵略, 而操子丕私納袁熙妻甄氏."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