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2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의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문서이다.2. 등장인물
이전작인 태조 왕건과 후속작인 무인시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작가가 연출을 했던 야인시대 등에 출연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여담으로. 본 문서 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2.1. 황실
2.1.1. 황제
- 태조(왕건): 이문수[1]
1화와 2화의 임종 장면에서만 특별 출연을 했으며, 왕건 본인은 편안히 갔지만 사후에 자신의 호족정책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발생해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에는 혜종이 죽기 직전이나 정종의 즉위 초와 죽기 전, 드라마 막판 광종 앞에서 잠깐씩 등장한 걸로 처리했다.
- 혜종(왕무): 노영국
태조 왕건에서의 쾌활하던 모습과는 달리 말년 병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전쟁터에서의 살육에 의한 PTSD에 미약한 세력으로 인한 암살 위협 때문에 왕규만 믿고 거의 광증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결국 재위 2년 만에 붕어하고 30화 하차하는 비운을 맞는다. 후사를 아들인 흥화군 대신 이복 동생인 왕요가 잇는다.
- 정종(왕요): 최재성[2]
광종과 함께 주연격인 인물. 1화에서부터 광종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는 씬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고 온화한 이미지로 일관하는 왕소와 달리 처음부터 호탕하고 야심을 숨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왕위에는 오르나 도움을 받은 덕에 실권은 왕식렴에게 모조리 뺏기고, 왕소가 제왕의 기운이 넘치고 황위에 오를 거라는 최지몽의 예언에 속병앓이를 하다가 술에 빠져버린다. 그나마 왕식렴과 의견이 일치한 서경 천도가 여러가지 사유로 인해 좌절되자 의욕을 모조리 잃었으며 엉터리 도사에게 사기까지 당해 병이 악화되어 요절하고 만다. 자신의 아들 경춘원군을 왕위에 앉히고 싶었고, 서경에서 왕식렴이 사망하고 서경이 불바다가 되어 자신의 친위세력이 없자 개경으로 돌아오는 왕소를 직접 맞으며 "너를 하늘이 점찍기라도 했단 말이냐, 맞다면 계시를 보이라"고 으름장을 놓다 진짜로 벼락에 맞아 기절한다. 이후 꿈에서 나온 왕건의 왕소에게 황위를 넘기라는 말까지 듣고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기 전 50화에서 왕소에게 황위를 넘겨준다.
- 광종(왕소): 김상중[3]
작품의 메인 주인공. 호탕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자잘한 실책을 많이 보여주는 형 정종(왕요)과 달리 인자하면서도 철두철미한 성품으로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호감을 샀다.왕식렴과는 이후 의견 악화로 결별하게 된다.[4] 하지만, 정종에 이어 51화부터 임금 자리에 오르자 뜬금없이 술판을 즐기거나 놀러 쏘다니는 등 암군같은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숙청을 위한 치밀한 사전 작업의 일환 중 하나로[5],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호족들의 세력을 꺾고 황권을 강화하는 각종 정책을 서슴없이 시행하여 호족들과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개혁 초반에는 그래도 인간성을 잃지는 않아 효은태자를 앞세운 반란 시도가 있었을 때조차 죄를 엄히 묻지 않고[6] 방면해주는 등 선을 꾸준히 지키려 노력했건만, 또다시 평주 세력이 반란이 일으켜 측근 중 상당수가 희생되고[7], 이에 꼭지가 돌아 효은태자를 비롯한 왕족과 호족들의 대다수를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어린 태자까지 의심하며 사약을 내리는 등 공포정치를 펼치게 된다.[8] 사정상 급전개가 된 마지막화 94화에서 균여 대사의 노력과 왕건 및 숙청으로 비명횡사당한 영혼들의 설득으로 결국 흑화상태에서 벗어난 채로 태자를 용서하고 선정을 베푼다는 암시만 주고 드라마는 끝난다.
2.1.2. 왕(황)후·황실 부인들
2.1.2.1. 태조(왕건) 관련
- 장화왕후 오씨: 반효정[9]
태조 왕건의 두 번째 부인이자 혜종(왕무)의 모친으로 친정인 나주 오씨가문이 미약한 탓에 권력욕이 엄청 강한 여장부로 묘사되었다. 병약하여 정무를 돌보지 못하는 아들 대신 왕규와 자주 만나면서 서경의 왕식렴과 신명순성왕후 소생인 왕요, 왕소 형제를 견제하다가 혜종 사후, 손자인 흥화군과 옥새를 들고 태후전에서 끝까지 저항했지만, 왕식렴과 왕요, 왕소 형제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채 흥화군과 강제로 헤어지면서 사가로 내쫓기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 신명순성왕후 유씨: 정영숙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이자 정종(왕요)과 광종(왕소), 낙랑공주의 모친으로 혜종 대에는 숨을 죽이면서 몰래 아들들을 돕는다. 정종이 즉위하자 태후전에 머물게 되지만, 곧 병환에 걸려 자리에 눕고 끝내 세상을 떠난다. 특히나 그 무렵 벌어지고 있던 서경 천도 및 정종과 왕소 형제의 갈등을 죽기 전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 신정왕후 황보씨: 안해숙[10]
황주 출신의 태조 왕건의 네 번째 부인으로, 광종 비인 대목왕후 황보씨[11], 왕욱의 어머니이다. 즉 주인공인 광종 입장에서는 작은 어머니 겸 장모님에 해당되는 셈. 주로 신명순성왕후나 동양원부인과 같이 나왔다. 주로 광종을 꾸짖을때 하는 대사는 "이보세요, 황제!"
- 동양원부인 유씨: 한복희
유금필의 딸로 태조 왕건의 아홉 번째 부인이며, 효은태자의 어머니. 주로 신명순성왕후와 신정왕후와 같이 등장하는 편이며, 정종(왕요)의 병이 극심하였을 때 치료를 위해 알고 있었던 도인을 추천했다가 그 도인이 공물을 명목으로 쌀 수 만섬과 비단 수 만필을 먹튀하고 잠적한 바람에 이후 대목왕후에게 질책당했다. 이후 효은태자가 평주의 박수경의 아들 삼형제와 어울리면서 왕권에 욕심이 들려고 할 때마다 늘 불려 경계를 하도록 하지만, 끝내 역모가 발각이 되자,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면서 광종에게 효은태자를 살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소광주원부인 왕씨: 서미애
왕규의 둘째 딸이자 왕건의 16번째 부인. 왕규 처형 직후 역적의 딸로 몰려 후광주원부인과 함께 교수형으로 죽임을 당한다.
2.1.2.2. 혜종(왕무) 관련
- 의화왕후 임씨: 김현주
혜종의 첫 번째 부인이며 흥화군과 경화궁부인의 모친이다. 혜종 붕어 후 아버지 임희가 왕규의 난에 휘말려 처형되자 역적의 딸로 몰렸으나 왕후임을 고려하여 죽이지는 않고 궁에서 출궁당했다.
- 후광주원부인 왕씨: 강경헌
왕규의 셋째 딸이자 혜종의 두 번째 부인. 왕규 처형 직후 역적의 딸로 몰려 소광주원부인과 함께 목에 매달아 죽였다.
- 청주원부인 김씨: 오지영
김긍률의 첫째 딸이자 혜종의 세 번째 부인. 위의 두 사람에 비하면 비중이 작게 나온다.
2.1.2.3. 정종(왕요) 관련
- 문성왕후 박씨: 김효주
박영규의 셋째 딸이자 정종의 두번째 부인. 경춘원군의 모친이며, 정종 사후에 잠시 밖에 머물다가 광종 즉위 이후, 경화군부인·흥화군 남매와 아들 경춘원군과 같이 궁으로 되돌아와 지낸다.
- 청주남원부인 김씨: 임서연[13]
김긍률의 둘째 딸이자 정종의 세번째 부인으로, 원래 왕규 파였던 김긍률이 왕규가 자신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최지몽의 점괴를 듣고 나서, 왕요에게 찾아가 '딸을 줄테니 나 좀 살려줘라.'식으로 부탁하면서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2.1.2.4. 광종(왕소) 관련
- 경화궁부인 임씨(광종 비): 장수혜(아역), 김민경(성인)[15]
광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혜종의 딸. 위의 청주남원부인의 일로 형 혜종의 허락을 받으러 온 왕요, 왕소 형제 앞에서 혜종이 자신이 죽은 이후, 자식들의 삶을 걱정해 부인 의화왕후와 상의 끝에 모친인 장화왕후의 반대에도 자신의 딸을 왕소에게 준다. 워낙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탓에 부모와 아우인 흥화군을 그리워하다가 혜종 사후, 출궁당한 모친과 아우를 그리워한 것을 안 광종의 부탁으로 노비와 식량을 보태어 보내줬는데, 이후 광종이 즉위하고 나서 성인이 된 후에야 아우인 흥화군과 다시 불러와 조용히 지냈지만[16], 극 후반에 흥화군이 역모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을 때,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2.1.3. 왕자·공주
- 흥화군: 서현석(아역), 김규민(성인)
혜종의 아들. 혜종 사후 모친인 의화왕후 임씨가 역적의 딸이라는 명분으로 같이 출궁당했다가 정종 사후 대목왕후에 의해 누이인 경화궁 부인과 같이 다시 입궁하였다. 그러나 평주 호족들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평주의 호족들이 효은태자와 더불어 흥화군과 경춘원군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말도 안되는 실토를 했고, 이미 측근의 죽음 탓에 흑화 상태였던 광종에 의해 경춘원군과 같이 교수형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17]
- 경춘원군: 강산, 김민우(아역), 성낙만(성인)
정종의 아들. 정종 사후 모친과 함께 밖에 머물다가 다시 들어와 사는데, 흥화군과 더불어 평주 호족들의 말도 안되는 실토를 들은 광종에 의해 흥화군과 같이 교수형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 태자 주
광종의 아들. 광종의 유일한 후계자[18]로 어렸을 때부터 광종과 대목왕후에 의해 외가인 황주에서 양육된다. 결말 즈음 벌어진 평주 세력의 역모에 연루되어 광종에게 사약을 받을 뻔했다. 다행히 광종은 균여 대사의 노력으로 흑화 상태에서 벗어낫고 이후 광종에 의해 태자 책봉식을 치르게 되는 장면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이다.
- 왕욱: 정국진[19]
본래 왕소가 서경 공역의 책임자로 부임할 무렵에 외가인 황주 황보 가(家)에 머물면서 한량처럼 사는 인물로 소개되면서 등장하지만, 왕소가 서경 공역장에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할 때에 그를 지지하면서 광종 즉위 이후에는 의형대령(지금의 법무부장관)으로서 당숙이자 병부령(지금의 국방부장관)인 왕육과 함께 광종 지지파로 활약한다. 극 막바지에 광종이 효은태자, 흥화군, 경춘원군 등을 숙청할 때 형을 집행하는 일을 감독하면서 황실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하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나름 인상적. 극 중에서는 대목왕후의 친오빠이고 황실 사람으로서의 모습보다 광종의 신하이자 의형대령으로서의 모습이 자주 묘사되며 동생인 대목왕후처럼 외가인 황주를 기반으로 하지만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갖는 외가를 비호하는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후반부에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광종이 낙형[20], 의형[21], 월형[22], 궁형[23] 같은 잔인한 형벌을 시행하라 명령하자 다른 신료들은 그 잔인함에 고개를 돌려버리지만 본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형벌들을 집행하며 형벌을 모두 끝낸 후에 광종에게 태연하게 "궁형까지 마쳤사옵니다."라고 하는 잔인한 모습도 보여준다.
작중에 등장하는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 중 가장 천수를 누렸다. 호족 숙청 작업에 휘말려 숙청당한 조카들, 이복동생들과 달리 이쪽은 광종 치하에서 벼슬도 했으며 군제 개혁, 노비안검법, 세공조사 같은 광종의 개혁정책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더불어 작중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광종과 사돈이 되었으며 사후 왕으로 추존되기까지 했다.
- 효은태자(왕원): 박진형[24]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유금필의 외손자. 방종하고 용렬한 주제에 쓸데없는 야심만 많았다가 반란 후에는 매사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우유부단하여 주변에 휘둘리는 성품으로 묘사된다.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한 호족들, 특히 박수경 일가의 평주 세력이 그를 왕으로 세울 목적으로 꾸준히 접근해왔다. 모친인 동양원부인은 태조 사후에도 이미 권력 기반이 굳건했기 때문에 효은에게 평주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는 경고를 몇 차례 했으나 효은은 모친의 경고를 한 귀로 흘리고 평주 사람들과 어울린다. 첫 번째 평주 세력이 관련된 반역 사건이 일어났지만, 조기에 발각되었고, 효은이 평주 세력과 어울린다는 사실이 밝혀져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유신성, 쌍기 등 광종의 친위 세력들이 강하게 처벌을 주장하나 광종이 같은 일가라는 이유로 용서해주자 감복하고 앞으로는 조용히 살겠다며 시골로 내려간다. 그러나 효은태자가 낙향한 곳이 다름 아닌 평주. 평주는 효은태자의 외가여서 평주로 내려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그 평주의 호족들이 광종의 최대 적수이자 광종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박수경 일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극 중에서도 유신성에게 조용히 살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러한 효은을 보며 도리어 의심살 짓을 한다면서 평주로 내려가는 효은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25]
그러나 박수경의 아들 삼 형제가 또다시 그를 억지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광종의 최측근인 유신성이 황제로 위장해 임금 대신 살해되자 이에 꼭지가 돌아버린 광종에 의해 거열형을 당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26] 박수경의 아들 삼 형제에 비하면, 좀 억울한 처형방식이었는데 주동자인 이 삼 형제조차도 그냥 참수형이라는 비교적 편안한 방식으로 죽인데 비해 거열형으로 고통스럽게 죽였다.
- 원녕태자/효성태자: 김광영[27](원녕태자)/최성민(효성태자)
효은태자, 왕욱, 광주원군과 함께 태조 왕건의 아들들로서 광종의 개혁에 지지하면서 효은태자가 연루되었던 평주 세력의 첫번째 역모 사건 당시 효은태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한 인물들이었다. 이 때문인지 해당 드라마 이후의 일이었지만, 경종 때에 호족 출신인 왕선이라는 인물의 '복수법'에 의해 희생되었다. 다만 태자 주가 사약을 받게 될 때는 다른 신료와 똑같이 통촉하라고 빌기까지 했다.
- 낙랑공주: 이칸희
신명순성왕후의 딸이자 정종과 광종의 동복 누이이며, 정승공인 경순왕 김부의 부인. 남편과 함께 경주에 있으면서 가끔씩 도성(개경)에 올라오기도 한다. 모친 사후, 장례식 때 이후로는 잠시 나오긴 한다.
- 광주원군
2.1.4. 내관·상궁
- 왕건 대전 내관 : 김창봉[28]
왕건 사후에 혜종, 정종 대까지 있었던 내관들의 우두머리로 최지몽과도 각별한 사이라 그에게 박술희의 삭탈관직 소식과 혜종의 죽음을 대전 별감 등을 통해 몰래 알리기도 하였다.
- 정종 내군 장군 : 정일모[31]
본래 왕요의 집사장이었다가 즉위 이후에 내군장군을 지냈다. 즉위 전에 왕규의 명을 사칭한 사신으로 박술희를 없애는 일에도 나섰다. 정종 사후, 부담 때문인지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퇴장.
- 광종 내군 장군 : 오현수
본래는 내군 장군 휘하의 부장이었다가 광종이 즉위하고 나서 내군 장군으로 승진되었다. 평주에서 일어난 반란 와중에 광종을 구하고 대신 죽는다.
- 장화왕후 제조 상궁: 박주아
혜종 사후, 흥화군과 장화왕후을 찾던 왕식렴 군의 앞을 가로막다가 좌장군의 칼에 죽게 된다.
2.2. 주요 신료&호족
대다수의 신료 및 장군들이 한다하는 호족들이기 때문에, 주요 특정 인물들의 세력을 중심으로 다루고, 그 외의 신료들도 이름 옆이나 설명에 주요 지역이나 극 중에 맡았던 직책들을 다룬다.2.2.1. 왕규(광주) 세력
- 왕규(좌승 → 시중): 김무생[32]
제국의 아침에서는 왕규를 혜종의 고명대신으로 설정하면서 조선의 정도전, 김종서와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역모를 꾀했다는 고려사의 주장과 달리 자신의 외손자가 황태자가 된다는 소식에도 이간질이라며 내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독선적인 행보와 더불어서 끝까지 강력한 숙청 정책을 바탕으로 왕식렴과 왕요/왕소 세력과 노골적으로 적대하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전적으로 혜종의 명령에 충실했던 박술희를 귀양을 보내고, 장화왕후 오씨와 적극 연대해 혜종의 죽음을 숨기고 왕요/왕소를 죽이려다가 역관광 당해 처형되지만, 백성들은 왕규를 동정한다. 왕규는 확실히 여러 면에서 용의 눈물 등의 정도전과 겹친다. 신권 정치를 주장하는 건 물론이고, ‘환단고기’[33]를 건네면서 “삼한이 통일됐으니 이제 보다 큰 국가의 목표가 필요해졌다”며 중국 대륙까지 진출을 주장하는 장면은 정말 환빠의 백미. 심지어 자료 영상으로 환타스틱한 영토 사진을 보여준다.
- 김견술(내군 장군 → 내군 장군&순군부령): 김주영
태조의 임종 당시(극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와 혜종의 재위 중에 내군 장군(오늘날의 대통령 경호실장)이었으며, 혜종이 서거할 무렵에는 순군부령(군 통수권자)까지 겸한 인물이다. 왕식렴에 의해 왕규의 난이 진압되자 왕식렴은 왕규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음을 참작하였는지 김견술을 특별히 살려주겠다고 하자 김견술은 왕규와 임회가 처형당한 후에 장례를 치르겠다고 왕식렴에게 청하여 허락받았고, 왕규의 장례를 치른 후 자결을 하자, 이에 백성들이 그를 의리 있는 사람이라 하여 장례를 치러준다. 이 때문에 박술희와 함께 시호를 받고 혜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 임희(내봉성령 → 병부령): 이한승[34]
진천의 호족. 의화왕후 임씨의 아버지로 혜종 때 대광에 내봉성령 벼슬을 맡아 사실상 왕규의 2인자 역할을 했으며 왕규가 박술희를 몰아낸 후, 병부령(오늘날의 국방부장관)에 임명되다가 왕규의 난이 진압되어 왕식렴에 의해 왕규와 같이 처형당한다.
- 명천공(원봉성 학사): 오승명[35]
신라 대의 충신인 박제상의 후손이며, 고기를 비롯해 고대의 기록들을 보관해 온 인물이다. 왕규에 의해 불러 조정에 들어왔지만, 왕식렴을 비롯한 다수의 신료들도 그의 존재를 잘 알기 때문에, 왕규의 난 이후에도 정종과 광종 대에도 원봉성 학사로서 생존한다. 광종 초에 나오는 걸 끝으로는 극에서 퇴장한다. 여담으로 나레이션에서는 이 인물과 관련해서 기록에는 자세하게 나오진 않으나 박씨 문중의 족보 등을 토대로 그가 '고려 초에 전법관서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예원군에 봉해졌다.'라고 나온다.
- 한현규(광평성 시랑): 남영진
왕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혜종 즉위 후 광평성 시랑에 임명 되었다. 서경 세력이 왕규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다른 왕규파 대신들과 구금되었다가 이후에 궐문에서 참살당한다. - 김염 : 허기호[36]
왕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한현규와 궐문에서 참살당한다.
2.2.2. 왕식렴(서경) 세력
- 왕식렴(서경 총관 → 집정): 김흥기[37]
태조 왕건의 사촌 동생이며, 주로 서경에 머물면서 그 곳의 유력 호족으로 있다가 태조 왕건이 임종에 가까울 무렵부터 개경에 머물렸다.[38]
극에 등장할 때부터 왕규를 탐탁지 않게 노렸으며, 자신의 장조카 대신 다른 조카들을 저울질하다가 왕요, 왕소 형제와 손을 잡고, 혜종 사후에 왕규 일파를 처단하고 스스로 집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한다.[39] 이후 서경 천도를 적극 지지하면서 동시에 왕소를 견제하는 태도를 취했으나, 서경 공역장에서의 역부들의 반란[40]으로 둘째 아들인 왕함순이 죽고, 뒤늦게나마 서경에 당도하긴 했지만, 그 때부터 심적 고통이 심해지다가 뒤이어 역부들에 의해 공역장이 전부 불에 타자 순시 중에 그 광경을 보고 낙마하여 숨을 거둔다. 죽기 전까지도 "서경"을 외칠 정도로 서경을 생각했었다.
- 왕함윤(서경 총관): 최성준
왕식렴의 장남으로 정종이 즉위한 이후에 집정이 된 아버지의 후임으로 서경 총관이 되었다. 숙부인 왕육과 마찬가지로 광종이 되는 왕소에게 호의적이다.
- 왕함순(서경 부총관): 정욱
왕식렴의 차남으로 서경 부총관을 맡았지만, 서경 공역장의 역부들의 반란 당시 반란군이 던진 도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 좌장군/우장군: 이동준(좌장군)/이원발(우장군)[41]
왕식렴의 왼팔과 오른팔이며, 극 중 이름 대신 그냥 '좌장', '우장'으로 불리어 왔다. 정종 즉위 후 왕식렴이 집정을 맡자 서경 총관직을 이어받은 장자 왕함윤을 보좌하였다. 왕식렴 사망 후 등장이 없다.
- 왕육(병부령): 민욱[42]
왕식렴의 동생. 서경에 있던 형 대신 개경에 있었으며, 태조 사후 이후에 개경에 머물던 형을 도와서 왕규 제거, 정종 옹립, 서경 천도 등을 진행했다. 정종 즉위 이후부터 병부령을 맡았으며, 왕식렴의 일파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광종(왕소)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왔으며, 대립하는 왕식렴과 광종을 중재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왕식렴 사후에 서경공역이 실패로 돌아가고 패서 호족들과 연합하여 광종을 차기 후계자로 추대하며, 개경으로 복귀 하게 된다. 이 덕분에 정종 승하 이후 광종 집권 때에도 병부령에 유임하면서 광종의 측근으로 군제 개혁[43]에 앞장서고, 이후의 노비안검법이나 과거제 시행 등도 강력히 지지한 덕에 왕식렴과 앙숙이었던 광종이 '형제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가?' 라면서 고마워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광종을 지지한 이유는 그가 강력한 황실주의자였기 때문이며 호족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광종의 측근들인 유신성, 이몽유, 장단설도 그를 존경하면서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 권직(시중): 김성옥[44]
본래 왕식렴을 도와 서경을 건설하던 인물였으며, 왕식렴이 집정으로서 정권을 장악할 때, 시중을 맡는 것으로 등장해 서경 천도 공사를 실질적으로 감독하는 것으로 나온다.[45] 문제는 서경을 건설할 당시도 그렇고, 천도 공역 과정에서 백성들은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다든가 한 두명이 물에 빠졌다고 다 같이 몰려가서 구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하는 등 인부들을 공역에 얼마든지 갈려 나가도 되는 재료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왕소가 이들을 몸소 구휼하고 같은 밥을 먹는 등 인정을 베풀자 쓸데없는 인정은 이들에게 딴마음을 품게 한다며 대립한다. 이 때문에 인부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잘못을 이들에게 딴마음을 품게 한 왕소에게 돌리는 등 극도로 찌질한 모습까지 보인다. 결국 마지막에 서경 공역장이 불타고 왕식렴이 심장마비로 죽은 후, 반란군들이 몰려오자 피하던 중에 인부들 중 하나가 던진 창에 등을 맞아 목숨을 잃는다.
2.2.3. 평주 세력
- 박수문(시중): 김영인[46]
평주의 대 호족. 극 초반(태조 왕건의 임종 시)에 시중으로 나왔으며, 혜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물러나 향리인 평주에 머무르면서 가끔씩 개경에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후, 조카(아래의 박수경의 아들 삼 형제)들의 반란으로 동생인 박수경이 자살한 이후에는 언급 없이 퇴장.
- 박수경(시중): 정상철
평주의 대 호족이자 박수문의 아우이다. 초반에는 평주에 있다가 왕식렴과 함께 개경에 내려온 이후에는 형처럼 평주에 머무르면서 가끔 개경에 내려오는 모습을 보인다.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많은 역할을 하면서 광종 즉위 이후에 시중에 올라 권세를 누리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좋았는지 광종이 설마 세력가들과 맞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고위직에 올랐으니 신중하고 여유롭게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들들에게도 주의를 주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광종의 노골적인 호족 견제책이 시행되자 아들들이 옳았다며 반란에 동참하는 모습도 보이나, 광종의 빠른 대책으로 반란들이 조기에 진압되자 결국 황제의 능력과 현실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길을 택한다.
광종의 호족 견제책 중 하나인 노비안검법이 시행되고 난 이후 시중직에서 내려오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아들 삼형제의 첫 번째 반란 모의 이후에는 일가와 함께 향리인 평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평주에서 다시 아들 삼형제의 반란으로 인해서 화가 잔뜩 난 광종에 의해 본인과 형은 나이가 많이 곧 풀려났지만 아들들이 참형을 받고 가문이 몰락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박승위(순군부령 → 내봉성령): 이용진[47]
박수경의 장남. 혜종 시기 부터 개경에 머물면서 주요 관직들을 차지하긴 했었다. 광종 즉위 후 박수경이 주의를 줄 정도로 오만한 행동들을 하였다. 하지만 성격이 다소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늘 반란을 앞두고 실행 직전에 그만두는 경우가 잦다. 이후 광종의 호족 견제책에 의해 직을 잃은 후 여러차례 반란을 모의하다가 실패하고, 최종적으로 동생들과 같이 참형을 받는다.
- 박승경(순군부령): 박유승[48]
박수경의 차남. 형과 동생과 행보를 같이 하였다. 유언으로 광종한테 이승에서 짓지 못한 매듭을 반드시 짓자고 남겼다.
- 박승례(순군부 사인): 신동일
박수경의 3남. 두 형들과 행보를 같이 하였다.
- 왕승 / 준홍(내봉성 사인): 유병한 / 안형식
광종 즉위 이후에 등장한 인물들로 언행 등을 봐도 알 수 있듯 평주 세력과 뜻을 같이 한 인물들이다. 광종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내보이다가 유신성 등의 측근들과 평농서사였던 권신의 참소로 인해 체포되어 국문을 받게 되는데, 하필 노비안검법으로 인해 광종의 인기가 엄청 높아진 상황이라 일부 백성들이 끌려가던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등 반감을 품었다. 한편 국문 중 행해진 고문에도 끝까지 평주 세력이 연관되어 있음을 불지 않았고 끝내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다.[49]
2.2.4. 황주 세력
- 황보씨: 박정웅
황주 황보씨를 대표하는 대 호족이자 신정왕후 황보씨의 부친이며, 대목왕후와 왕욱의 외조부이며, 광종에게는 처외가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극에서는 '황보제공'이란 이름 대신 '황보씨'로 불리운다. 혜종 재위기때 광평성 회의에서 신료들이 발언할 때 유천궁, 강기주와 더불어 무례하다며 호통을 쳐서 입을 막아버렸다.
- 황보광겸(내의성 대부): 박영태
신정왕후 황보씨의 사촌 형제로 황보위광과 황보숭의 형이다. 일찍부터 개경의 관료로 진출한 탓에 극 중반에야 등장한 동생들과는 달리 매사에 신중하면서, 다른 호족들과 동생들에 비해 눈치가 빠르고 처신 또한 잘했고 불만을 표시하는 동생들을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매형인 광종도 그 부분을 칭찬할 정도이다.[50] 그 덕분인지 극 후반에 평주의 박수경 일가와 청주의 김긍률, 승주의 박영규마저 박살나는 대숙청에도 황주는 별다른 피해 없이 넘어갔다. 물론 황후의 가문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 또한 이 사람이 선을 넘었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을 것이다.
- 황보위광(내봉성경): 신동훈[51]
황보광겸의 동생, 황보숭의 형. 동생 황보숭과는 정종 시기부터 황주의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광종 즉위 이후 황주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몇몇 정책에도 반발하다가 형인 황보광겸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매형인 광종도 이러한 행동이 걱정 되었는지 야밤에 따로 불러 이 부분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딴 마음은 품지않고 모나는 행동을 하지않아 대숙청 때 무사할 수 있었다.[52] - 황보숭(광평성 사인): 김기복[53]
황보광겸, 황보위광의 동생. 작은 형 황보위광과 같이 중반부부터 등장했으며, 둘째 형처럼 매사 불만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2.2.5. 신라계
- 김부(경순왕): 이도련[54]
신라의 그 경순왕으로 신라가 멸망한 다음이기에 본작에선 김부, 혹은 '정승공'으로 불린다. 드라마에서의 비중은 공기에 가까운 편인데, 유천궁이나 유긍달과 마찬가지로 혜종 때 개경에 왔으며, 이후 장모인 신명순성왕후의 장례에 참석하고 광종 대에도 잠깐 얼굴을 내밀긴 했을 뿐 비중은 거의 없다. 대화도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행사나 왕실 법도 같은 이야기를 주로 하는 편이다. 하지만 전 신라의 왕이었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굉장히 높은 인물로 대우받으며 등장 시에는 상당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 최지몽(사천공봉): 정동환
작 중에는 천문관으로서 사천대의 수장으로서 신료 무리 중 하나인 신라계 관료들의 수장 격의 인물로 나온다. 태조 왕건에서 풋풋한 청년 관료로 나왔던 것과 대조적으로 배우 정동환 특유의 능글맞은 이미지와 연기가 가미되어 노회한 중견 관료로 변모한 묘사가 볼 만하다. 신라계 관료들의 수장격이지만 계파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김긍률, 왕함민 등 일부 신료들의 살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광종 즉위 후 평주, 청주, 승주의 대호족들이 대거 숙청되자 이들의 빈자리를 자연스레 채우게 될 신라계 관료들이 제 세상을 만난 양 들떠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최지몽은 이러한 모습을 우려하며 이들에게 언행을 조심하라고 하였으며[55], 극 후반에 자신 또한 언젠가 숙청될 것을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꾀를 부려 술김에 황제에게 주정을 부렸다. 여기에 광종은 대노하며 그를 옥에 투옥하였고, 그동안 공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여 그를 귀양보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자신의 꾀가 먹히고 비록 귀양이지만 살얼음판 조정을 벗어나는 것에 안도하며 기분좋게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눈 내리는 귀양길을 걸아가며 퇴장한다. 마치 태조 왕건에서 최승우의 마지막 모습과도 비슷한 인상을 주는데, 위의 항목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잘 활용한 편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렇게 광종의 학살을 피한 후 경종 때 돌아왔고, 성종 때까지도 관직에 머물려 태조 왕건부터 성종까지 무려 6명의 황제를 모신 신하로 남았다.
- 최행귀(원봉성 학사 → 광평성 시랑): 임병기
신라삼최의 일원이었고, 고려 태조 때부터 혜종 때까지 벼슬을 한 최언위의 차남.[56] 오월에서 유학하다가 후진에서 유학 중이었던 형 최광윤이 거란의 침공 징후를 알리는 서신을 보낼 때쯤 귀국하여 중원의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첫 등장하였다. 이후 관직에 있으면서 자연스레 신라계 파벌에 합류하게 된다. 광종이 호족들의 세력을 밀어내기 시작할 때, 광평성 시랑(현재의 차관급)에 임명되어 중용되었다. 마지막 회차 때 광종이 탄문 대사를 송별하는 술자리를 열 때 함께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말 실수를 하였다가 광종에게 즉결 사형 처분을 받아 바로 죽으면서 퇴장하게 된다.[57]
- 최승로(원봉성 학사): 이지형
정종 즉위 이후부터 등장한 신라계 학사로서 광종 즉위 이후에는 최행귀와 사관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광종이 측근들과 쌍기와 같은 귀화인들의 과한 대우와 그들의 활약에 나름 염세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레이션에 각 임금들의 평가(혜종, 정종, 광종)을 다룰 때, 그가 이 드라마 이후 성종에게 올렸던 '오조치적평'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사실 특별하게 맡은 역할 없이 후대의 행적으로 인해 나온 듯하다.
2.2.6. 광종의 측근
- 유신성(내의성 사인 → 내봉성령): 박진성
충주 출신으로 신명순성왕후 집안의 일족이며 광종의 최측근이다. 아래에 서술되는 장단설과 이몽유와는 달리 왕소가 서경 공역의 책임자로 시간을 보내던 시절 충주의 대부이자 왕소의 외조부인 유긍달의 추천으로 들어왔는데, 만날 때부터 광종을 놀랄만하게 한 직언[60]으로 그를 깨우쳤으며, 광종(왕소)는 그를 의형제로 지낼 정도로 다른 측근들 못지않게 각별히 대하였다. 광종 즉위 이후에 그의 개혁 행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내봉성령(지금의 행정안전부장관)에 이르렀으나, 극 후반 광종의 북방 순행길에 동행하다가 평주에서 그 지역 대 호족인 박수경의 아들 삼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위기에 빠진 광종 대신 용포를 입고 불타는 건물에 갇혀 사망한다. 광종이 총애하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사망 소식을 듣자 광종은 흑화하여 숙청극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인물 문서에도 나오지만, 그는 서필과 함께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장단설[61](내봉성 사인 → 군부경): 송금식
왕소의 집사로 본래는 발해 사람으로서 거란에 있다가 쫓겨나 유량하던 중 왕소의 휘하에 든 인물이다. 왕소의 측근들 중에 워낙 지략과 책략에 유능한 탓에 혜종 대에는 잠시 왕요 휘하에 있었으며, 정종 대에는 그의 능력을 두려워한 왕식렴에 의해 잠시 절영도의 목마장으로 좌천되기도 해 잠시 극에서 이탈하긴 했다.
광종 즉위 이후에 다시 중앙에 들어와 내봉성 사인에 임명되어 유신성, 이몽유, 왕육, 왕욱 등과 더불어 광종의 개혁 행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노비안건법 이후에 폐지된 순군부 대신 새로이 변한 군부의 수장에 오른다.
유신성과 이몽유에 비해 관련 문서가 자세히 나오지 않아 일부에서는 가상 인물설까지 나오긴 하지만 분명한 실존인물이다. 본래는 '장단열'이 맞으며, 생몰년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현재 보물로 지정된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와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의 비문을 작성한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관련 지식백과 다만, 광종의 책사 역할을 하는 것은 극중 창작으로 보인다.
- 이몽유(병부경): 이재연[62]
왕소의 집사로 초창기부터 장단설과 함께 왕소를 따랐다. 광종 즉위 이후에는 병부경으로서 병부령인 왕육과 함께 군제 개혁을 비롯한 광종의 개혁 행보에 참여하였다. 후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된 인물이다.
- 쌍기(후주 사신 → 원봉성 학사): 이효정
3기 핵심인물로 오프닝에서 무려 세번째로 등장한다.[63] 광종의 개혁 중 중요한 부분인 노비안검법, 과거 제도의 시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다.
2.2.7. 그 외 신료들
- 박술희(병부령): 조경환
극 중 백전노장에 병부령을 맡았으며, 태조 왕건의 유훈을 맡을 정도로 태조 왕건과 혜종의 신임은 물론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태후와 시중 왕규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끝내 직을 잃고 강화에 유배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왕규를 사칭한 정종(왕요)과 왕식렴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 염상(순군부령 → 내의령): 백인철[64]
박술희와 마찬가지로 백전노장이면서 순군부령을 맡아왔으며, 박술희와 같이 다니면서 우직한 그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혜종 즉위 이후에 내의령으로 그 직을 옮기긴 했지만, 관복 대신 군복을[65] 입은 채 직무를 수행했다. 혜종 사후에 중립을 지키긴 했지만, 과거 박술희 휘하의 부장들과 연합해 왕식렴과 왕요·왕소 세력을 왕규 세력들을 제압했다. 정종이 즉위한 후에도 직을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이후에 왕식렴의 권유로 그 직을 거두고 향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했다.
- 서필(의형대령 → 내의령): 이대로
제1차 여요전쟁 때의 명신인 서희의 아버지. 극 초반부터 의형대령을 맡으면서 유난히 '법'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왕규나 왕식렴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직언으로서 그들의 전횡에 맞서 주변 신료들조차 두려울 정도로 자타가 인정한 강직한 신료였다.[66] 광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직책이 내의령으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언을 아끼지 않는 신하였으며, 사료에 기록된 술잔의 일화[67] 등을 포함해 많이도 직언을 해 어떨 때에는 광종도 성질을 내면서 쫓아내거나 참형을 하라고 했음에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여하튼 이러한 강직한 성품으로 광종이 대숙청을 할 무렵에도 충언을 하다가 병사를 했는데, 광기에 물들어가던 광종도 그의 죽음에는 애석해하며 친히 조문을 했으며, 장례비용까지 전액 지원해주었다.[68]
- 서희: 한범희
서필의 아들로 극 후반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온 것으로 등장해, 서필이 임종할 즈음에 유언을 쓰고 광종에게 부고 사실을 알리기도 한다. 다만, 이후 드라마에 비하면, 해당 드라마에서는 비중이 엑스트라급으로, 극의 흐름상 필요해서 나온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이름이 있는 인물이라 등장한다는 느낌이 강한 편이다.
- 왕함민(수춘부 → 내봉성령 → 내의성 대부 → 시중): 원석연
광종 즉위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특정 세력에 속하지 않는 고위 신료이자 종실 중 한 명이었고, 태조 사후에서 혜종 즉위 당시 수춘부를 맡았으며, 정종 즉위 이후 내봉성령에 오르게 된다. 왕식렴 사후 최지몽에게 향후 거취에 관련하여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 광종 즉위 후 박승위에게 내봉성령 직을 인계하고 대신 원로 고문격인 내의성 대부로 임명되었다가 호족 세력 숙청을 위해 아무런 배경이 없었던 것을 이용한 광종에 의해 노비안검법 발표 시점에 박수경 대신 시중 자리에 임명된다. 극 중 다른 시중들에 비하면 권한이 적은 모습을 보이는 등 바지사장 포지션이 되어버렸다.[69] 매우 특이하게 명목적 권력욕이 매우 강한 인물로 다른 인물들은 벼슬+실질적 권한에 모두 욕심을 내거나, 아예 권력에 욕심을 안 부리는데 비해 그냥 높은 벼슬만 주면 감사히 받아들이는 특이성으로 그걸 꿰뚫어본 왕식렴과 광종이 필요하면 벼슬을 대폭 높여주곤 하였다.
- 권신(광평성 사인 → 편농서사): 권혁호[70]
비중은 그저 그런 신료 중 한명으로 비중있게 나왔던 것은 박수경 아들들의 1차 반역 모의 때 친왕파와 협력하여 반역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김악(원봉성 학사): 남일우
- 왕융(예빈성령): 정운용
- 신강(원봉성 학사): 박태민[71]
본래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갑자기 배역이 증발이 되었던 인물로[72] 기록에 따르면, 광종 초에 위의 식회와 함께 각 고의의 세공의 액수를 정하였다고 한다.
- 순질(광평성 시랑): 최헌철
시중을 맡았던 박수경이 잠시 입궐을 하지 않았을 때, 임시로 시중 대행을 보면서 난처해진 모습을 보였다.
2.2.8. 주요 호족들
- 김긍률(청주의 호족, 순군부령 → 내의성 대부): 변희봉
청주 출신의 대호족으로 호칭은 '대부'로 많이 불린다. 극 초반부에는 혜종의 장인으로 왕규, 임희와 함께 왕규 파벌에 속하면서 순군부령을 지냈지만, 경박하고 너무 나서는 탓에 왕규의 눈초리를 받던 중에 최지몽을 만나 그의 조언을 듣고, 다른 딸을 왕요(정종)에게 주면서 자연스레 그의 세력으로 넘어가게 된다.
정종 즉위 이후부터 광종 대까지는 박영규와 함께 다니면서 원로로서 내의성의 대부로 있었다가, 광종의 호족 견제의 여파로 관직에 물러나 그저 숨 죽은듯이 조용히 지내는 와중에 평주 호족들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숙청, 국문 과정에서 연로한 것을 감안하여 고문은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외손자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후 박영규와 같이 유배 도중에 광종이 보낸 독주를 마시고 사사된다. 번외로 김긍률과 박영규의 당여들이 있었는데 그 중 여인들은 노비로 삼게 되었고 나머지는 참형에 처했다.
- 박영규(승주의 호족): 김상순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서 태조 왕건과 정종의 장인이며, 승주를 비롯한 옛 후백제 세력을 대표하는 대호족이다. 초반부터 사위인 왕요와 왕소 형제를 부족하게나마 지원을 해 주다가 혜종 즉위 이후에는 왕식렴과 박수경을 비롯한 북방의 호족들과 연합하여 왕규 파벌을 견제하고 끝내 제거했다. 정종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김긍률과 같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평주 호족들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그 역시 숙청, 국문 과정에서 연로한 것을 감안하여 고문은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외손자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후 김긍률과 같이 유배를 가던 도중에 광종이 보낸 독주를 마시고 사사된다.
- 유천궁: 김수일
태조 왕건의 첫 번째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의 부친. 즉, 왕건의 큰 장인이 된다. 딸과 사위보다 오래 살면서 왕규의 독선적인 행보에 다른 호족들과 제동을 걸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인 인물들 중에 하나이다. 광평성 회의에서 신료들이 발언할때 무례하다며 입을 막아버렸다.정종 즉위 중반까지는 모습을 보이다가 광종 때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유긍달: 허현호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부친으로 왕요(정종)·왕소(광종) 형제와 낙랑공주의 외조부가 된다. 초반 대법회를 핑계로 딸의 밀지를 받고 나서 장단설과 함께 북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찰 등으로 전하는 것이 전부이며, 위의 유천궁처럼 광종 때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 강기주 : 박경득[73]
태조 왕건의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의 부친인데, 이 부인의 아들이 요절해서 왕소(광종)이 부인의 양자가 되면서 황주와 마찬가지로 왕소(광종)를 지원하는 인물이다.
2.3. 승려
- 탄문: 정욱
균여의 스승이자 왕소의 정신적 스승. 황제가 되기 전이나 된 후에도 계속해서 왕소에게 학문적, 정신적인 도움을 준다. 하지만, 광종이 차츰 정치판에 찌들고 계속되는 호족들의 반란으로 흑화하면서 결국에는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자 한탄하며 속세를 떠나 은거한다.
- 균여: 정승호
탄문의 제자이자 광종에겐 친구와도 같은 승려. 8화에서 혜종의 쾌유를 비는 법회에서 호탕하게 등장해 법문이라 쓰고 팩폭을 외치면서 등장하였고, 이후에는 탄문과 함께 광종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교적 속세에 관심이 적고 학문과 불경에만 몰두하는 탄문과 달리 정치나 속세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 후반부에 탄문이 속세를 떠날 때도 끝까지 남아 왕궁 앞에서 광종을 비판하는 패기를 보이다 꼭지가 돈 광종에게 처형당할 뻔한다.[74] 그러나 꿈에 등장한 왕건과 자신이 처형했던 사람들의 영혼을 목도하고 정신을 차린 광종의 용서를 받는다.
2.4. 그 외의 인물
- 초선: 임채원[75]
가공 인물로 개경에서 거대 상단을 이끌고 있는 여행수. 상인답게 해외 사정에 밝으며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광종이 본격적으로 호족들의 숙청과 개혁을 시작하기 전 일반인으로 위장하고 세간의 민심을 살필 때 만나 인연을 맺는다. 광종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되지만, 동시에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광종이 균여에게 기청제를 부탁하는 자리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그가 황제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광종의 주선으로 쌍기와 맺어지게 된다.[76]
- 초선 집사장: 이일웅
초선을 모시는 집사장으로 절영도의 목마장에 있던 장단설과 이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 한다.
- 부역군 반란대장: 강신조
서경 공역장에서 권직의 혹독함에 고생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자로 왕소를 흠모해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건들지 않았다. 일개 역부 출신이지만 나름 군사적 재능이 있었는지[77] 반란군을 잘 이끌어 관군들을 농락하고 결국 서경 공역장을 불바다로 만들어 반란을 성공시킨다. 이후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반역죄를 추궁받지 않고 백성으로 돌아가 살다가[78] 왕소가 광종으로 즉위하자 호위장수 중 하나로 등장한다. 박수경의 세 아들들이 광종을 시해하려 거사를 일으켰을 때 왕의 갑옷을 입고 이들을 교란시켜 거사를 좌절시켰다.
- 소무개 : 맹봉학[79]
고려 국경지대 근처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동 여진족의 족장으로 선대 족장 부터 왕식렴과 인연이 있었으며, 그의 부탁을 받아 국경 밖으로 도망치는 역부들을 잡아 송환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무역을 하기 위해 왕식렴에게 부탁을 하였고, 왕식렴 사후 광종(왕소), 왕육과 함께 개경을 방문하였다.
2.5. 회상으로 등장한 인물
- 양만춘 : 신희문
- 당태종 : 김홍수
- 대야발 : 전해룡
[1] 작중에서는 혜종 역의 노영국의 아버지로 나오지만, 노영국이 동안인 탓에 1살이 적은데도(노영국은 1948년생. 이문수는 1949년생) 아버지 역으로 나왔다.회상에서 나오는 젊었을 적 모습은 최수종. 물론, 최수종이 직접 이 드라마에 나오는 건 아니고, 태조 왕건에서 촬영한 부분을 다시 틀어 준 것이다. 최수종이 왕건의 죽음을 연기한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혜종 역도 노영국이 아니라 태조 왕건에서의 담당 배우였던 안정훈이 그대로 맡는다고 소개하는 등 정확도가 영 떨어지는 기사다.[2] 여담으로 정종 역에는 이경영, 이성재 등이 거론됐다.[3] 이 배역에는 당초 최민식, 장동건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모두 개인적인 이유들로 고사했다.[4] 태자 시절에는 세종이 될 것 같았는데 임금이 되니 태종이 되더라는 평가도 있었는데, 왕이 되기 전에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다가 왕이 되니 강단있고 때에 따라서는 폭군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는 한국 사극 중에서는 달리 찾기 힘들다.[5] 예를 들어 자신은 격구나 하고 놀겠다며 격구를 잘 하는 병사들로 호위부대를 꾸리는데 이건 말 그대로 친위군을 강화한 것이었으며, 공신들을 대접하겠다며 공신각을 새로 지어 놓고는 공신이 너무 많아 누구를 더 잘 챙겨야 할지 모르겠으니 등급을 좀 나누고 싶다는 뜻을 비쳤는데 이건 서열 정리를 하겠다는 것이다.[6] 평주 일가와 효은태자는 물론 직접적으로 붙잡혔던 준홍과 왕승조차 방면해주었다. 다만 준홍과 왕승은 이미 방면 전에 당한 고문의 여파로 사망한 후였다.[7] 특히 측근 중 가장 아끼던 유신성이 희생되었다, 유신성의 희생에 광종 본인 역시 매우 상심한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것이 직접적인 폭주의 기폭제가 되어버린다.[8] 참고로 1기 오프닝에서 광종이 미묘하게 썩소를 짓는데 앞으로의 광종의 행보를 암시하는 듯 하다.[9] 재미있게도 스토리상으로 이 뒤를 잇는 천추태후에서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나온다.[10] 태조 왕건에서 경애왕비 역, 무인시대에서 윤 상궁 역을 맡았다. 같은 작가의 드라마인 무풍지대에서 이정재의 처 역을 맡았다.[11] 태조 왕건의 딸이지만, 광종과 근친혼을 하면서 외가의 성인 황보씨라고 불리운다. 이는 고려조 내내 계속된다.[12] 전작 태조 왕건 캐스팅 물망에 한때 거론되었으나 SBS 주말드라마 그래도 사랑해에 출연하게 되면서 무산됐다.[13] 본명인 도지원으로 출연.[14] 실제 역사에서도 광종의 노비안검법에 대해 간언을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직접적으로 충돌했다는 기록은 일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은 편이지만, 적어도 남아 있는 기록 중에서는 없다. 덧붙여, 똑같이 개혁 군주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의 경우 몇 건에 불과하지만 공민왕과 충돌했다는 기록이 있다.[15] 2010년 위암으로 요절했다. 다모에 김민준의 호위모사로 출연한 적이 있다.[16] 다만, 그래도 궁궐에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대목왕후가 늘 걱정하기도 하였다.[17] 이를 말리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미 측근의 죽음에 꼭지가 제대로 돌아버린 광종이 그냥 숙청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집행했던 인물이 바로 광종의 동생인 대종 왕욱이었는데, 그로서도 차마 못할 짓인 걸 알았는지 살려달라는 흥화군과 경춘원군에게서 고개를 돌리다시피 하며 "황실에 태어난 게 잘못이다... 잘 가라..." 라는 식의 말을 남긴다.[18] 실제 역사에서는 경종 이외에도 효화태자라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러나 따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으로 추측된다.[19] 당시에는 정태수라는 이름으로 출연하였으며,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는 왕식렴 역을, 같은 작가의 야인시대에서는 이만섭으로 출연하였다.[20] 인두로 지지는 형벌[21] 코를 베는 형벌.[22]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형벌.[23] 낭심이나 성기를 자르는 형벌[24] 전작 태조 왕건에서 금산사 승려 등 여러 단역으로 출연[25] 그러나 유신성이 평주로 내려가는 효은을 말리지는 않았는데, 애초에 효은이 처음으로 연루된 반역 사건 때 효은의 처벌을 주장하던 쪽이었기 때문이다.[26] 실제 역사에서는 그냥 사사되었다. 한편 그 당시 아이까지 있었는데, 기록에는 그 아이는 광종의 배려(?)로 죄를 면하였고, 이 때문에 효은태자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27] 전작 태조 왕건에서 왕신 역[28] 단역 전문 배우로, 태조 왕건에서 엄청 많은 역할을 맡았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초기에는 서남해지역의 호족 중 한 사람으로, 중반에는 왕창근과 최응을 따라 상주로 간 의원, 후반에는 고창 전투의 삼태사(三太師) 중 하나인 김행 역을 맡았다.[29] 태조 왕건에서 전이갑 역을 맡았다.[30] 태조 왕건에서 종훈 역을 맡았다.[31]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의 최측근인 내금위장 정만쇠로, 야인시대에는 홍만길의 중년 시절을 맡았다.[32] 역사상으로 먼 훗날, 왕씨의 사직을 끝내는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왕씨의 사직을 끝내는 이성계 역을 맡아서 열연한 바 있다.[33] 드라마에선 '고기'라고 말한다.[34] 전작 태조 왕건에서 고창의 호족(삼태사) 중 한 사람인 김선평 역으로 출연.[35] 야인시대에서 최동열의 아버지인 최상우 역을 맡았다.[36] 야인시대에서 인촌 김성수 역을 맡았다.[37] 재미있게도 한참 전 대하드라마인 용의 눈물에서는 위의 왕규 역을 맡은 김무생을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는 정도전 역할을 맡았다.[38] 물론 장화왕후 오씨나 왕규는 그가 개경에 머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늘 내쫓으려 하지만, 왕식렴이 여러 이유들을 들먹거리면서 무산되기도 하였다.[39] 이 과정을 보면 나름 치밀한데, 왕요 형제와 손을 잡을 때 일이 성공하면 자신도 한 몫 챙기겠다고 슬쩍 언급했고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고 감격한 왕요가 아버지처럼 모시겠다고 말해 버린 걸 이용해 먹는다. 왕요의 등극 직전에 저 일들을 이야기하며 "집정"이라는 벼슬을 만들어 앉겠다고 통보하다시피 하며, 그 몫이라는 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왕소는 이렇게 되면 형님(왕요)이 혜종 형님하고 다른 게 뭐냐며 경악한다.[40] 해당 반란은 드라마 상 가상 설정으로 실제로 역부들의 반란이 일어난 적은 없었으며, 『고려사』 기록에는 정종이 죽고 나서, 서경 천도 공역이 중지가 되자, 동원된 일꾼들이 환호했다는 기록이 있다.[41]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환선길의 동생인 환향식 역을, 후속작인 무인시대에서 이고의 측근이었던 김교위 역을 맡았다.[42]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충주 호족 유긍달 역으로 출연하였다.[43] 철저히 대 호족들과 그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던 중앙군을 중소 호족과 평민 위주의 구성으로 개편하여 호족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중앙군을 국왕의 직속 군대가 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실제로도 국왕 직속의 친위군 양성은 왕권 강화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에서도 정조가 왕권을 강화시키고, 군부에서의 노론 영향력 배제를 위해 장용영이라는 국왕 직속 친위군을 육성한 바 있다.[44] 용의 눈물에서 최영 장군 역,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는 강장자 역을 맡았다.[45] 총 책임자는 왕소였지만, 이는 그를 견제하던 왕식렴에 의해 명목상 혹은 책임을 덮어씌울 희생양으로 보내진 것에 불과했다.[46] 다음 해 야인시대 심영으로 고초를 겪는 그 분과는 동명이인인 원로 배우로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이총언 역을 맡았다. 이 분은 무려 무풍지대에서 김두한 역을 맡으신 분이다.[47] 용의 눈물에서 이숭인 역을 맡았으며,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 암살 시도한 자객 등 여러 단역을 출연한 바 있다.[48]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진호 등 여러 단역을 출연한 바 있다.[49] 다른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주리틀기, 인두 지지기는 물론 의형(코 베기)에 월형(발뒤꿈치 베기), 궁형(거세)까지 당했다. 사실상 살아있는게 용한 수준. 그나마 광종이 이 당시까진 인간성이 남은 상태여서 이들을 옥에서 풀어주고 식솔들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다만 사망한 후였기에 주검이 되어 감옥에서 나갔다.[50] 광종의 장모인 신정왕후의 사촌동생이라 해놓고 언제부턴가 대목왕후의 사촌오빠로 바뀌어 나왔다. 이는 황보제공도 마찬가지.[51] 전작 태조 왕건에서 배현경으로, 후속작 무인시대에서 문장필 역으로 출연.[52] 공교롭게도 배우 신동훈은 용의 눈물에선 강력한 외척으로 태종의 숙청 대상 1호에 올랐던 민무구 역할을 맡은 바 있다.[53] 전작 태조 왕건에서 김락으로 무인시대에서는 백임지 역으로 출연했다.[54] 전작 태조 왕건에서의 배우(신귀식)보다 젊은 몇 안되는 배우이다. 사실 전작의 신귀식이 실존인물에 비해 지나치게 나이가 많긴 했다.[55] 실제로 광종은 평주, 청주, 승주의 호족들이 숙청된 후, 이들의 빈자리를 자연스레 채우게 될 신라계 관료들이 과거를 주관하고 신진관료의 교육까지 담당하는 상황에 대해 당파를 형성한다고 하여 경계하였다.[56] 부친 최언위는 전작 태조 왕건에서는 언급만 되었을 뿐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57] 정확히 상황을 설명하자면, 탄문 대사를 송별하는 술자리에서 최지몽의 발언으로 광종이 분노하게 되고, 그를 옥사에 보내게 된 상황에서 최행귀가 광종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거기에서 "신라계 학사들과 쌍기 공이 함께 학문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발언을 한다. 그런데 광종은 이 무렵 평주의 박수문과 박수경 일가를 비롯해 청주의 김긍률, 승주의 박영규 등 주요 대호족들을 대거 숙청한 후부터 이들의 빈자리를 자연스레 채우게 될 신라계 관료들이 과거를 주관하고 거기에서 합격한 사람을 교육하는 상황에 대해 이들이 당파를 형성한다고 생각하여 상당히 경계를 하였다. 신라계 관료 우두머리 격이었던 최지몽도 이런 광종의 심성을 꿰뚫어보고 신라계 관료들에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고 하였는데, 최행귀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무심결에 '신라계, 신라 출신 학자'라는 말을 내뱉었고, 이에 광종은 가뜩이나 최지몽의 발언으로 분노하게 된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여 최행귀를 즉각적으로 죽이게 된다.[58] 야인시대에서 최영규 역을 맡았다.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는 염흔 역을 맡았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신립, 왕과 나에서는 박원종 역을 맡았다.[59] 전작 태조 왕건에서 윤신달 역으로 출연, 야인시대에서 의사 역을 맡았다.[60] 차려놓았던 주안상을 엎으면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직언이다. 대목왕후(당시는 부인)는 물론 같이 온 균여조차 놀란 가운데, 왕소는 그의 말을 새겨들으면서 이후, 고통받았던 인부들을 치료하고 구휼하는 삶으로 전환했다.[61] 후술하는데로 역사상 본래 이름은 장단열인데 장단설로 나온다. 說은 사람 이름으로 읽을때는 열로 읽어야 하는데 제작진이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중항열과 같은 경우.[62] 태조 왕건에서 이총언의 아들 이영 역과 최승우의 집사 역을 맡았다.[63] 광종, 황후 다음으로 나오니 신료들중에서는 가장 먼저 나온다.[64]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환선길 역을 맡았다.[65] 물론 갑옷은 아니다. 물론, 과거 혜종의 회상들 중에 박술희와 함께 갑옷을 입고 혜종과 함께 전장을 나선 적은 있었다.[66]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신명순성왕후의 별세로 인한 장례 중 문상을 하고 나오던 중, 문상을 하던 왕식렴 앞에서 "태후 폐하께서는 어느 늙은이로 인해 고통받는 서경 백성들이 안타깝다고 하시면서 운명하셨다."는 직언을 날려 왕식렴 뒤에 있던 김긍률과 박영규까지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였다.[67] 재위 초반 속내를 감추던 광종이 대신이나 호족들에게 금으로 된 술잔을 하사할 때 서필만은 이를 거절하였다.[68] 실제로 사후에는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는 영광도 누렸다.[69] 왕규, 박수경을 제외한 다른 시중들도 힘은 없었지만, 왕함민만큼 약하진 않았다. 박수문은 극 시작 이전부터 시중이었고 곧 왕건이 사망하여 비중이 적었을 뿐이었다. 권직은 왕식렴이 시중 위에 집정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권한은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그는 시중직에 있는 동안 주로 서경 공역을 진두 지휘를 하는 역할이었다.[70] 전작 태조 왕건에서 전의갑 역으로 출연, 후속작인 무인시대에서는 김보당 역으로 나온다.[71] 본명 박승규,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원극유 역을 맡았다.[72] 용의 눈물에서 정종 역을 맡았던 태민영씨가 연기한 역할이었는데, 태민영씨가 안타깝게도 간암 악화로 별세하면서 배역 자체가 드라마내에서 일찍 증발했었다.[73]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관료 연식 역을 맡있다.[74] 사실, 광종이 이성을 잃었다기보다는 균여만큼은 처형하기를 망설이면서도 황실의 위엄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황실의 위엄을 세우겠다고 호족과 황족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런 가운데서 천도제를 지내 그들의 명복을 빈 것은 광종의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물론 그의 위엄까지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75] 당시에는 본명인 임경옥으로 나왔다.[76] 설정상 어린 시절 혼약을 맺었다가 각자의 사정으로 잊혀졌던 사이였다고 한다.[77] 당시 고려 백성 대부분은 과거 군인이었다는 설정이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후삼국시대였으니 당연한 것. 때문에 반란도 일개 농민군 vs 관군이 아닌, 예비역 vs 현역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78] 사실 일반적인 민란은 그 원인이 참작할 만한 경우엔 민심 수습을 위해 주동자만 처형하고 불문에 부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 경우는 민란이 제압되지 않고 스스로 흩어졌기 때문에 주동자를 공식적으로 잡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79] 야인시대에서 김원봉, 법무장관 역으로 출연하였다.[80] 태조 왕건에서 양길의 사자, 입전, 박영규의 집사 역을 맡은 배우.[81] 태조 왕건에서 양길의 동생 명길을 맡았다.[82] 나중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안홍국을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