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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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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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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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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

1. 개요2. 역사
2.1. 남양제갈씨세보
3. 인물
3.1. 실존 인물
3.1.1. 역사적 인물3.1.2. 근현대 인물
3.2. 가상 인물
4. 기타

1. 개요

한나라 태산군 승(丞) 제갈규를 시조로 삼는 성씨의 하나. 중국대한민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현대 중국어로는 주거(Zhūgé) 라고 읽는다.

통계청 성씨별 인구 순위 조사 결과 2000년에는 4,444명이 거주하였다. 15년 뒤인 2015년에는 5,655명이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본관은 남양 단본이다. 칠원 씨와 남양 씨가 남양 제갈씨에서 분화된 성씨이며 이들은 동성이본이씨(同姓異本異氏)가 된다.[1]

인구 대비 비율이 매우 크게 늘었는데 이는 제씨, 갈씨가 성씨 변경을 법원에 신청하면 제갈씨로 복원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제씨의 경우 어감에 거부감이 없는지 인구수가 크게 줄지 않은 반면에 갈씨는(2000년 3,100명 -> 2015년 2,086명)인구가 크게 줄었다. 아무래도 다른 복성들에 비해 제갈씨는 매우 익숙해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없던 자부심도 느끼게 만들 정도의 인지도가 있는 성씨라는 점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중국 공안부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는 제갈씨가 4.9만 명 존재하며 절강성에 31.06%가 거주하고 있다. 한족만 사용하는 성씨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제갈씨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기도 가평군, 전라남도 곡성군 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중 달성군과 곡성군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가 건립되어 있으며, 대구광역시 영모재의 무후사는 1947년, 곡성군의 무후사는 1903년에 각각 세워졌다. 두 군데 모두 지역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드물게 일본에도 이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훈독은 모로쿠즈(もろくず)이며, 음독은 쇼카츠(しょかつ).[2] 일본 전국에서 70명밖에 없는 매우 희귀한 성씨이다.[3] 베트남에서도 이 성씨가 있으며 Gia Cát라고 한다.

2. 역사

한국의 제갈씨는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를 시조로 삼는다. 제갈규의 5세손인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자 위(魏)나라에 불만을 품고 미추 이사금 치세의 신라로 망명하여 지리산에 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로 후손들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등의 변천사를 겪다가 21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공식적으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정사 삼국지 오서 제갈근전에 단 배송지의 주석에 따르면 제갈근의 선조 갈씨는 낭야 현 사람이지만 집을 양도로 옮겼고, 양도에는 전부터 갈씨 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여러 현에서 옮겨 온 갈씨를 제갈이라고 불러서 갈씨에서 제갈씨가 되었다고 한다.[4] 그러니까 원래는 갈씨였는데 제갈씨로 바뀐 것이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 있다. 제갈충은 제갈경의 아들이며 또한 제갈경은 제갈첨의 차남이라고 한다.[5]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은 유선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유래에 한치의 틀림도 없다면 한국 제갈씨는 제갈량은 물론이고 유비의 후손이기도 한 셈.+장비의 후손[6] 물론 여기에도 이설은 있어, 제갈충은 제갈첨의 차남인 제갈경의 아들이 아니라 제갈첨과 함께 촉한 멸망시에 면죽관에서 전사한 장남 제갈상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아예 단지 제갈규의 5대손이라고만 전하기도 하여, 자세한 내막은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제갈규의 5세손일 뿐이라는 단서만을 따르자면 한국의 제갈씨는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의 4세손일 수도 있고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양자였던 제갈교의 손자 제갈현이 제갈각의 삼족이 멸족된 뒤 다시 제갈근의 후사를 잇게 되었으므로 오나라 제갈씨의 적자인 제갈현을 제외한 그의 동렬 형제의 후손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내용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한국 제갈씨 유래의 공식적인 내용은 아무튼 제갈규의 5세손인 제갈충이 신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이래 그 후손이 중국으로 한번 귀환하였다가 제갈규의 20대손에 해당하는 제갈공순이 9세기 초 다시 신라로 귀화함으로써 한국 제갈씨의 중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는 것.[7]

물론 당연하겠지만 모든 제갈씨가 망명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중국에는 제갈량, 제갈근의 후손들이 건재하며 팔괘촌을 비롯한 제갈씨의 집성촌들도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제갈씨는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같은 가문이지만, 중국의 제갈씨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의 후손의 비율이 제갈규의 후손보다 더 높은 편이라고 한다. 제갈정의 아들 제갈회는 총명하다고 알려져서 동진에서 원제 사마예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등용되었다고 하니 나름 잘 살긴 했던 것 같다.[8] 한국의 제갈씨는 오직 귀화한 제갈규의 5대손 일족 뿐이지만 중국에는 제갈규의 후손 중에서도 제갈량, 제갈근, 제갈균 등 오남매 모두를 비롯해서 그들과 비교적 멀지 않은 촌수일 제갈탄, 제갈서, 제갈직낭야군 출신의 동향 친족들은 물론이고 당대의 모든 제갈씨들이 번성하고 그 후손을 남겨 대를 이어왔기 때문에, 한국의 제갈씨가 제갈량의 후손임이 틀림없다는 단서 하에서 오히려 한국에 제갈량의 고유한 피와 유전자가 더욱 독보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역설적인 그림이 되는 셈이다.

또 고려 현종(顯宗)때 제갈홍(泓)과 제갈형(瀅) 두 형제가 군(君)에 해당하는 고위의 벼슬을 각각 받자, 자신만의 성씨를 가질만한 신분이 되었으므로 제씨와 갈씨로 분성하여 각각의 시조가 되는 일도 있었는데, 대한제국 광무 기해년(1899)에 중추원과 장례원에 상청하여 복성을 허락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로써 일부 제씨와 갈씨가 다시 제갈씨로 복성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한국에는 현재 제갈씨, 제씨, 갈씨가 모두 존재한다.

제씨갈씨는 제갈씨에서 갈라진 역사를 인정받아 개인이 원하면 법원 판결을 통해 제갈씨로 복구할 수 있다.[9] 실제 사례로 갈정웅 대림I&S 부회장이 2002년 제갈씨로 복원한 사례가 있다.

또한 2005년생 이후로는 아버지가 제씨 혹은 갈씨여도 자녀는 제갈씨로 등록해도 가능하다. 다만 제씨 아버지를 둔 제갈씨는 별로 없으나 갈씨 아버지를 둔 제갈씨는 좀 있는 모양.

2.1. 남양제갈씨세보

다음은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기록된 인물들이다.

1세 - 한나라 태산군 승
2세 - 촉한 승상 무향후
3세 - 촉한 군사장군 서향후
4세 - 서진 강주자사
5세 충[10] - 신라로 동도
6세 경 - 신라 기림왕조 아보
7세 면구 - 신라 흘해왕조 천문록위
9세 걸 - 입중국, 요동후
13세 덕 - 운수공, 당태종의 스승
18세 현 - 당나라 한림학사
20세 석 - 당나라 서하태수
21세 공순 - 당나라 덕종조 간의대부, 신라로 동도
22세 시 - 신라조 호부시랑
29세 여문 - 고려 태조조 비서승
30세 명 - 고려 태조조 상장군 벽상공신
38세 춘 - 고려 인종조 신도태수
38세 위 - 고려 명종조 찬례교위
41세 문유 - 고려 고종조 구산부원군
42세 현 - 고려 충숙왕조 사마, 화산부원군
43세 인규 - 고려 충정왕조 어사
44세 성룡 - 고려 우림대장, 조선 태조 증 복국숭록대부
45세 원 - 조선 태조조 성주군, 세종조 대구부원군
48세 공뇌 - 조선 중종조 금위대장(금위공파)-지계
49세 호 - 조선 선조조 의병장, 증병조판서(충의공파)-종계
51세 천일 - 조선 성균관 진사(진사공파)-지계
52세 자경 - 효종조 병조판서.

3. 인물

3.1. 실존 인물

3.1.1. 역사적 인물[11]

3.1.2. 근현대 인물

3.2. 가상 인물

성씨가 특이한 데다 제갈량의 후손이라는 점 덕분에 멋있어 보이는지 여기저기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제갈량의 지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머리가 좋게 그려지는 경우도 많다.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제갈세가가 딱 이런 케이스. 제갈량의 후예를 표방하며 진법에 능하다는 설정이 붙는다.

4. 기타

발음은 동일하지만 한자가 다른 제갈(諸渴)씨[13]도 존재한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5명이 존재하는 극히 희귀한 성씨. 하지만 이 성씨는 제갈(諸葛)의 전산 오류(출신신고 시 한자를 잘 모르는 부모님이나 동사무소 직원의 기재 오류, 전산입력 시의 오류 등)일 가능성이 높다.

[1] 중국에서는 제씨·갈씨·제갈씨의 연원이 모두 다르다.[2] 드물게 쇼카(しょか)라 읽는 경우도 있다.[3] 모로쿠즈 노아가 이 성씨를 사용하는 유일한 일본 유명인이다.[4] 세설신어보에서는 갈씨들이 낭야군의 제현(지금의 산동성 청도)에 모여살았던 적이 있는데, 제현에 거주하는 갈씨라는 의미에서 제갈이라고 불러서 성이 바뀌었다고 적혀있다.[5] 다만 제갈경이 유선의 딸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없다.[6] 유선의 정실부인이 장비의 딸이다.[7] 제갈규의 4대손 제갈경은 제갈첨과 제갈상의 사후, 그리고 촉한이 멸망한 이후 진晉나라에서 벼슬을 하기는 하였지만 망국의 설움 때문이었는지 결국 그 아들 제갈충이 신라로 망명하였고 진의 멸망 이후 중국으로 돌아갔던 제갈충의 후손이 환관들이 황제들을 줄줄이 살해하는 당나라 말 혼란기에 다시 신라로 건너온 이래 한반도에 완전히 정착하였다고 한다.[8] 또한, 제갈회에게는 제갈문표라는 딸이 있었는데 유량의 아들 유빈과 결혼했다고 하는 걸 보면 다른 명가들과 사돈관계를 맺기도 한 것 같다. 유량이 황가의 외척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인간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시아버지가 인간성이 바닥이라서 고생은 좀 했겠지만.[9] 다만 한번 제갈씨로 복구하면 다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10][11] 이들 중 절대다수가 중국의 삼국시대 및 그 직전, 직후 시대에 포진해 있다.[12]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한국인이다.[13] 이 항목의 제갈 씨는 '칡 갈(葛)'을 쓰지만 이 제갈 씨는 '목마를 갈(渴)'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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