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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9:03:21

장국영

장궈룽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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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國榮|Leslie Ch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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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재완 (拒絕再玩) 사망 사건
장국영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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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홍콩 금상장 시상식
파일:Hong_Kong_Film_Award_Trophy.png
남우주연상
제9회
(1990년)
제10회
(1991년)
제11회
(1992년)
주윤발
(우견아랑)
장국영
(아비정전)
증지위
(쌍성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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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張國榮|Leslie Cheung
파일:1_HiOgregzxUHc9FuLFhFxAg.jpg
본명 Leslie Cheung Kwok-wing (레슬리 청 쿽윙)[1][2]
중국명 張國榮 (정궉윙, Zoeng1[3] gwok3 wing4)
출생 1956년 9월 12일
영국령 홍콩 구룡반도
사망 2003년 4월 1일 (향년 46세)
홍콩섬 중서구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4]
위패 홍콩 Sha tin 311, Pai tau street Po Fook Hill Cemetery
(보선사)[5]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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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국기.svg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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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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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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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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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6]
본적 광둥성
신체 175cm[7]|70kg|O형
직업 가수, 배우
데뷔 1977년 앨범 <I Like Dreamin'>
학력 리즈 대학교 (섬유학 / 중퇴)
가족 4남 6녀 중 막내[8][9]
종교 무종교
언어 광둥어, 영어, 표준 중국어[10]
별명 거거(哥哥)[11], 십자(十子)[12]
취미 요트, 배드민턴, 음악, 골동품, 독서[13]
대표 작품 영웅본색(英雄本色)
아비정전(阿飛正傳)
동사서독(東邪西毒)
패왕별희(霸王別姬)
해피 투게더(春光乍洩)
대표곡 당년정
분향미래일자
무심수면 (無心睡眠)
서명 파일:장국영 싸인.jpg

1. 개요2. 인기 및 위상3. 활동4. 전반적인 생애
4.1. 연예계 활동4.2. 커밍아웃
4.2.1. 반론
4.3. 사망
5. 여담6. 필모그래피
6.1. 드라마6.2. 영화
7. 음악 활동8. 수상 경력
8.1. 영화8.2. 음악
9. 디스코그래피10. 명대사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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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배우가수. 1977년 가수로 먼저 데뷔했으며 이후 배우로도 활동했다.

장국영의 한자 표기는 張國榮[14](간자체로는 张国荣). 영어식 표기는 Leslie Cheung(레슬리 청)이었다.[15] 레슬리라는 이름은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애슐리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레슬리 하워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성적인 이름이라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광동어식 예명을 살려서 Leslie Cheung Kwok-wing(레슬리 청궉윙)이라 하기도 한다. 홍콩 영화계를 빛낸 여러 스타들의 동판이 있는 홍콩 스타의 거리에는 한자와 영어 이름만 있어서, 그의 영어 이름과 한자를 모른다면 못 알아보기도 한다. 레슬리(Leslie) 이전에는 바비(Bobby)라는 예명을 썼다. 언론에서는 표준중국어의 표기법을 따라 장궈룽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장국영 내지는 레슬리 청이라고 부른다.[16][17]

2. 인기 및 위상

1980년대199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홍콩 영화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인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배우와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아시아에서 글로벌한 인기를 얻었던 스타였다. 1980년대 인기를 얻었던 소위 '무적 3인방'(장국영, 알란탐, 매염방) 중 1명이며 이들은 90년대에 등장한 홍콩 사대천왕(장학우, 유덕화, 곽부성, 여명)보다 선발주자로 분류된다.[18]

홍콩 영화가 인기가 많았던 한국에서도 장국영의 인지도와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주윤발과 함께 쌍두마차로,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영웅본색>, <천녀유혼>, <동사서독>, <아비정전>, <종횡사해>, <패왕별희>, <금지옥엽>, <해피투게더>, <이도공간> 등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은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많은 히트를 기록했고 비디오와 DVD로도 많이 팔렸다. 장국영은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총 6번 내한했는데, 내한할 때마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과 방송에 자주 얼굴을 비추며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해외스타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일례로 1990년대 투유 초콜릿 광고를 찍었고, 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투유 초콜릿광고는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투유 초콜릿광고는 외국인이 찍은 두번째 광고이고,[19] 비디오와 DVD로도 많이 팔렸다. 이 투유 초콜릿 광고가 너무 인기가 많아 한때 한국 광고에는 외국인 출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 6월 1일 금지령이 풀렸다.

그러던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자신이 묵고 있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 객실에서 투신하여 향년 46세로 생을 마감했다. 하필 만우절이라 안 믿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사실이라고 확정된 후 그의 죽음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과 충격을 일으켰다. 장국영이 투신자살한 뒤 6명의 팬이 함께 투신하는 베르테르 효과가 일어나고, 여러 뉴스에서 특보로 보도하는 등 그의 죽음이 준 충격은 한동안 이어졌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지 [age(2003-04-01)]년이 넘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05년에는 중국 영화 100주년 기념 가장 사랑받는 남자배우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매년 4월 1일 홍콩에서는 그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2023년 10월 8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장국영의 일생최애 : 20년이 지나도”라는 이름의 커뮤니티 비프(BIFF)가 열려 <백발마녀전>이 상영되었다.

3. 활동

파일:le12.jpg
홍콩 스타의 거리에 있는 장국영의 동판.
안타깝게도 장국영의 핸드프린팅란은 비어 있다.[20]

생전 중화권을 대표하는 미남 스타였다.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엄청난 동안이자 미중년이었으며, 실제로 설운도보다 나이가 2살 많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21] 손석희, 유동근, 톰 행크스와 동갑이고 성룡과도 겨우 2살 차이밖에 안 나고 장 클로드 반담보다도 4살이나 위다.

정식적으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RTV(麗的電視, ATV의 전신)와 계약하지만, 방송국과 영 조합이 맞지 않았는지 그에게 약 6~7년 간 무명 기간이 존재한다. 전 매니저인 '진숙분'은 TV에서 우연히 장국영을 보고, "귀엽고 잘생긴 청년이 열심히 하는 게 맘에 들어" 그에게 협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소속을 TVB로 바꾸고, 화성레코드와 계약하여 1983년 <풍계속취>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본다. 물론 이 성공이 '우연히 좋은 매니저 만나서 된 것'은 아니고, 당시 화성레코드 소속이었던 매염방을 포함한 가수들이 비행기 타고 각 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스스로를 홍보한 결과이다.
파일:방화절대.jpg
2002년 매염방(梅艶芳)과 방화절대 콘서트 무대에서[22]

매염방과 진숙분이 회고하기를, 당시에는 "행사 뛰는 것=밤무대"였고, 소속사는 하루에도 스케쥴을 마구잡이로 돌렸다고 한다. 덕분에 비행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장국영은 국경을 넘나드는 그러한 스케쥴을 더욱더 힘들어했다고 한다. 매염방은 그런 그를 위해 비행기 의자 밑에서는 자신이 자고, 장국영은 의자 위에서 자는 배려를 했고, 장국영은 어둠과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매염방을 위해 방 두 개가 뚫린 방을 예약하곤 스탠드를 약하게 켜서 그녀를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힘든 일정을 열심히 소화한 결과가 누적되어 홍보도 되고 실력 또한 높이게 된 것이다.

<풍계속취>는 가수로서 장국영을 메인으로 올려놓을 만큼 히트한 곡이지만, 우리나라의 '10대 가요제'와 같은 홍콩의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11위를 하는 바람에 상을 타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후술.

그렇게 하여 칼을 갈고 나온 노래가 1984년 <MONICA>. 진숙분이 상을 못타 분해하던 장국영을 위해 일본의 가수 킷카와 코지 원곡의 판권을 사서 그에게 어울리는 홍보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초대박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음악들은 가요 시상식에서 반드시 수상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영웅본색》의 OST인 '당년정', '분향미래일자'가 특히 유명하다. 1987년에 나온 장국영의 앨범 《Summer Romance》는 단일 앨범 기준으로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 《천녀유혼》 삽입곡은 물론이거니와 <무심수면>이라는, 장국영 본인 입으로 '가장 히트한 곡'으로 언급한 곡도 포함되어 있다. 장국영 본인은 자신의 가장 궁극적 목표로 '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언급했고,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가수'라고 하였을 만큼 장국영에게 음악은 메인이요, 배우는 당시 홍콩 분위기 상 해야하는 덤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수 부문에서 후에 레전드를 찍는 장학우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부러워했고, 장학우 역시 장국영의 연기력을 부러워하여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장학우는 2002년 즈음부터 장국영 사망 직전까지, 우울증을 겪는 그를 위해 자주 그의 자택으로 가서 어울렸을 만큼 장국영에게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가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만, 중화권에서는 80~90년대의 가왕 3인방으로 알란 탐, 매염방, 그리고 장국영을 꼽을 정도로 장국영은 평소 목표였던 가수로서 레전드를 찍는 것에 성공했다.

1985년부터 가수로서 안정된 성공을 보장받기 시작하자, 장국영은 배우 쪽에도 신경쓰기 시작한다. 《(장국영의) 위니종정》은 장국영의 음악과 연기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히트한 작품이며, 제목에서 아예 (장국영의)라는 걸 붙여 온전히 그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홍보를 할 정도였다. 후에 장국영은 <위니종정>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동업자와 함께 개업하였는데, 이곳은 장국영의 물건들, 팬들의 방문 흔적들로 장식이 되어있었거니와, 종종 장국영이 와서 팬들과 간이 팬미팅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는 폐업하였다.

배우로서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연기력 자체도 이 즈음부터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두 작품을 장국영의 가수 성공 후 주욱 이어진 인기의 연장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이 두 작품은 장국영이 '얻어 걸린 것'이기 보다는, 오우삼 감독이 장국영의 잠재력을 보고 1983년에 이미 《영웅본색》에 캐스팅이 된 상황이었고, 《천녀유혼》으로 인한 폭발적 인기 역시 9개월 간을 밤샘 촬영하여 고생하였던 것에 대해 보상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장국영은 당시에는 없었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청년 이미지로 아시아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23] 우리나라에서도 장국영을 따라 5:5 가르마[24]를 유행처럼 하고 다녔고,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빨간 물감 흐트리면서 공중전화에서 피를 흘리며 '송-호-연'을 외치다가 부스 담당이 오면 얼른 튀어버리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이종원의 <리복> CF와 함께 당시 남학생들이 가장 많이 따라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확 뜬 이후 장국영은 본인이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어서 좋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데뷔작인 《홍루춘상춘》은 삼합회에 의해 강제로 찍었고, 그 뒤로 《갈채》, 《실업생》, 《연분》 등으로 이어지는 청춘물을 찍었지만 이는 본인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돈이 필요했기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서 찍은 영화라고 한다. '

다만 1980년 RTHK에서 방영했던 이벽화(릴리안 리)[25] 작가의 《아가적여인》과 홍콩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담가명 감독의 1982년 작 열화청춘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갖는다. 바로 《아가적여인》을 보고 담가명 감독, 그리고 왕가위 감독이 장국영에게 팍 꽂혔다고 밝혔기 때문. 장국영은 당시의 미남 기준으로는 좀 다른 방향으로 귀공자, 꽃미남 스타일에 연약한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열화청춘》은 제 2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장국영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해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품이다. 실제로도 장국영은 《열화청춘》을 실질적인 본인의 영화 데뷔작으로 언급한 바가 있다.

1990년 은퇴 선언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에는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보다 작가주의 색이 짙은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물론 왕가위 감독과 '천카이거' 감독이 만들어 준 길이긴 하나, 장국영 본인도 섬세한 연기력을 통해 《아비정전》에서는 왕가위의 스타일을 안정감있게 이끌어 주었고 《패왕별희》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받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파일:days_of_being_handsome.gif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표현받는 《아비정전》[26]

실제로 왕가위 감독은 항상 시나리오를 쓸 때 장국영을 주연으로 생각하고 집필한다고 밝혔는데 장국영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해피 투게더》 역시 사실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의 시점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려 하였는데, 장국영이 홍콩 콘서트 때문에 본인 분량을 먼저 찍고 가버려 보충이 안되는 상황이었으며 분량의 모자람은 왕가위 특유의 질질 끌기 때문이었고, 결국 주연이 뒤바뀌어 버린다. 장국영은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다시 가서 약 열흘간 늘어진 자신의 분량을 연기한다.

여튼 이 애증의 관계에서 장국영 본인이 언급하기로, 《아비정전》 때 유덕화와의 추격씬을 위해 필리핀까지 날아가서 촬영을 하였는데, 갑자기 왕가위 감독이 촬영 직전 "연기할 때 지붕 조심하라고, 몇 군데 구멍이 있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땅에서 20m 위면 낮은 것도 아닌데 말을 미리 했어야지 참 황당했다고 한다. 또한 《동사서독》을 촬영할 땐 중국의 사막으로 가서 찍었는데, 투명한 어린 전갈이 장국영의 목 뒤에 붙어있었으며 검은 전갈이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피 투게더》 촬영 당시엔, 남미의 위생이 그리 나쁜지 몰라서 예방접종도 안하고 그냥 갔는데, 도착 3일째부터 설사가 시작되고, 약먹을 때만 괜찮아지고 하면서 증세가 반복되기에 근 3주간을 죽과 계란 흰자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피 투게더》를 보면 굉장히 말라보이는 장국영을 볼 수가 있다. 장국영은 웃으면서 왕가위 감독과 1번만 더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는 왕가위 감독과 일하지 않겠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이 농담 역시 괜히 기레기들에게 떡밥만 제공한 꼴이 되어버렸다.

천카이거 감독은 장국영 사망 뉴스를 접하고,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패왕별희의) 데이 아닌가." 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국영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제작한 작품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작품이 《무극》에서 사정봉 역할이 아닐까 팬들은 추측하고 있다. 물론 장국영이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매란방》도 마찬가지. 한 번 했던 캐릭터는 웬만해서 다시 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장국영이기에 아마도 안 받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장국영이 지인들이 제안하는 시나리오를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했기에 오랫동안 제작자 '황백명'의 작품[27]에 불려다녔고, 결국 장국영이 '하세편'은 찍기 너무 힘들다라는 말 한마디로 더 이상 하세편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죽기 직전 그의 말기 3작품인 《색정남녀》, 《창왕》, 《이도공간》과 관련된 '이동승' 감독 혹은 제작의 작품을 거절하지 않고 찍은 것도 있다.

《색정남녀》는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 후보였는데,( 동시에 장국영은 베를린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사실 영화 자체는 완벽하지도 않고 영화가 거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거칠고 서툰 느낌나는 연출이 오히려 이 영화의 메인 줄거리인 '3급 영화 찍기'와 많이 어울렸으며,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적당한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꽤나 괜찮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당시 장국영 말고는 다들 신인이었고 심지어 촬영감독으로 나오는 분은 진짜 촬영감독이었다고. 지금은 중화권 대스타가 된 서기와 개성있는 연기자로 큰 막문위는 이 작품이 첫 주연급 출연작이었고[28] 한마디로 배우 쪽에서는 장국영이 모든 걸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며 그는 감독 연습에 의의를 두어 촬영장에서도 연출부에서 할 법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인연으로 1996~1997년 콘서트에서는 서기와 막문위가 특별 게스트로 나와 섹시하면서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파일:패왕별희칸2.jpg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직후

영화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칸의 상징인 선착장에서 천카이거 감독과 장국영이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분이 장국영이 홍콩에서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모르고, 이런 훌륭한 배우를 어디서 발굴했는지 질문을 하는데, 아마도 이때 장국영은 헐리웃에 진출하더라도[29]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구나. 차라리 현재처럼 홍콩의 넘버원으로 남는게 낫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힌 바있다.[30]

참고로 《패왕별희》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연출진들, 스탭부터 경극 관련 장국영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뒤로 북경에만 가면 패왕별희 스탭진들이 장국영의 초대로 모여 즐겁게 즐기다 갔다고 한다. 아니,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찍었으니 막내 스탭진들까지 챙기기는 힘들었을 텐데 장국영은 그런 막내진들까지 이름을 외우고 연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스타 임에도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탭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그러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나중에 장국영의 자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바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또한 기자협회에서 만약 장국영이 예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망했을 거라고 농반진반 언급할 정도로 극중 장국영은 빼어난 자태를 보였다. 실제로 장국영은 칸 황금종려상을 받고 자신의 메이크업과 북경어 지도 전담이자 중국의 경극단에서 1급 경극원으로 생활하던 '송소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덕분에 예쁘게 나와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장국영은 이상하게 상복이 정말 없었다. <천녀유혼>이 히트한 후 1988년 콘서트에서 장국영이 "혼자 상을 못받았다"며 약간 투정부릴 정도였다. 사실 장국영은 웬만한 메인 시상식에서는 한 번씩 상을 탔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장국영은 80년대에 이미 가수 커리어가 정점을 찍었으나 가수로서의 최고 명예인 금침상도 1999~2000년이 돼서야 받았다. (오죽하면 인터뷰에서 "당신의 금침상은 10년 전에 받았어야 했던 것 아닌가요?"라며 기자가 질문을 했을까.) 2002년, <명보>사[31]에서 신설한 <연예동력대장> 시상식에서 《이도공간》으로 장국영이 첫 수상자가 되자, 장국영은 굉장히 기뻐하면서도 "나랑 친해서 준 거 아니냐?"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4. 전반적인 생애

4.1. 연예계 활동

파일:장국영어린시절.jpg
장국영의 어린 시절, 큰누나 장녹평(張綠萍)과 함께.[32]

'홍콩직물왕' 이라 불리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앨프리드 히치콕도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차도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리즈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33] 중퇴하고 1976년부터 연예계의 문을 두드렸다. 정식 데뷔는 1977년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였다. <American Pie>로 무려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홍콩 RTV와 계약한 후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나 대중들에게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덕분에 1977, 1978, 1979년 한국 포함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인지도 향상을 꾀했다. 그가 치고 딱히 올라온 계기는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느낀 매니저 진숙분과 의기투합한 이후이며, RTV에서 TVB로 이적하여 연기와 가수 활동 모두 주류로 올라섰다.

실제로 이때 즈음에 장국영은 정말 생각치도 않은 굴욕을 당한 바가 있다. 아직 장국영은 그냥 뜨지 못한 그저그런 무명 연예인이었고, 장국영과 비슷한 또래였고 인기도 훨씬 많았던 '진백강'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노래와 춤을 하였다. 문제는 한창 신이 난 장국영이 자신의 모자를 관객석으로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대다수가 싫어하더라도 수많은 관객들 중 한명쯤은 기념으로 가질만 한데 정작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명도 그 모자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바로 무대 위로 모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때, 장국영은 다짐을 굳건히 하면서 꼭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83년, 홍콩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장국영 본인은 스탭진이 알려준 대로 그냥 앞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앞자리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지 못했던 장국영은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굴욕들을 발판삼아 그 다음 해부터 장국영은 <MONICA>로 기어이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맞게 된다. 또한 《백발마녀전》의 주제가 <홍안백발>과 《야반가성》의 주제가 <야반가성>등을 작곡하고 히트시켜 대만 금마장과 홍콩 금상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후에도 될 수 있으면 본인이 직접 대부분을 작곡하려고 한단다. 그렇게 장국영은 가수로 먼저 성공한 탓에 중화권에서는 장국영을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워낙 가수로서도 레전드고 배우로는 두 말 하면 입아플 정도.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서 성공하지 않고 본인이 홍콩 영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데 기여가 있어서이다. 실제로 다른 스타들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실적에서는 밀릴지 모르나 중화권, 그리고 범아시아적으로 장국영 본인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 영화를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한 공신이기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한편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전 매니저 진숙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매스컴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한 쪽만 적으로 만들어도 위험할 판에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때마침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콩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렇게 자기 편도 딱히 없고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장국영은[34]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쥴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35], 《동사서독》,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36],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특히 가수로 복귀한 후 발매한 《총애 장국영》 앨범은 한국에서도 50만장 이상 팔렸던 히트작이었다. 그래서 장국영은 콘서트 투어를 하거나 크게는 아니더라도 미니 콘서트처럼 한국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당시에는 비싼 표를 사서 콘서트를 관람한다는 것에 낯선 한국인들이라 매니저 진숙분은 수익성이 없다며 2000년 열정 투어에서 빼버린다. 냉정할세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 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37]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1993년 진백강이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및 알콜 중독으로 고생할 때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38]

장국영과 진백강은 서로 다양한 작품에서 같이 캐스팅되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친해졌는데, 문제는 장국영이 뭔 팩폭 할지 항상 두려운 토크쇼(...). 진백강과 장국영이 같이 토크쇼에 나갔을 때, 진백강이 자신의 피부는 타고났기에 관리하지 않고 화장품도 거의 안쓴다고 언급한다. 그러자 장국영이 아니라고, 진백강을 가까이서 보면 화장도 잘하고 매일 피부를 위해 케어를 받는다고 하자 진백강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났다고 한다. 장국영도 별거 아닌데 화를 내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라고 하면서 서로 절교(...)했다고 한다. 심지어 진백강 주연, 장국영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던 《성탄쾌락》 때는 진백강이 여러가지 조건을 내달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절대 두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잡지 말 것", "같이 찍는 것은 근거리든 원거리든 무조건 안 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튼 《성탄쾌락》은 당해 가장 관객이 많이 든 히트작인데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투유' 광고에 출연한 적 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투유 노래는 한국 한정 싱글이었지만 보통화광둥어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됐다.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합동 공연을 했고(풀버전 영상),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자니 윤 쇼에도 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1979년 6월 2일에 개최된 <서울 송 페스티벌>

4.2.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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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오른쪽)과 그의 오랜 친구이자 매니저 당학덕(왼쪽).[39]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힌 적은 없지만, 인터뷰 중 연예인의 양성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 만일 남녀 모두 ok라면, 기회는 두 배가 되는데 뭐가 안 좋다는 것인가"라고 한 발언과 2000년 《타임》지에 본인이 "나는 '양성적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등의 발언들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커밍아웃했다.

공연을 할 때 빨간 하이힐을 신고 나온 적이 있다. 본인은 데이비드 보위의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보위는 훗날 자신의 양성애가 사실 컨셉이었고 흑역사라고까지 밝혔다. 하지만 장국영은 의상 디자이너가 컨셉을 잡아주자 "이런 걸 해봐도 괜찮을 듯?"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4.2.1. 반론

장국영은 생전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 확연하게 동성애자다, 양성애자다라고 확정지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국영이 남녀를 떠나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다는 점을 세간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했으며 그로 인해 판매부수를 늘린 찌라시 언론사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매염방이 장국영 사후 <명보>와 가졌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황색언론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의 성 지향성은 단순 가십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사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장국영이 청소년 때 끈질기게 꼬셔서 사귄 사람도 여성이었고, 배우로 성공 후 같은 영화에 출연한 홍콩 여자 배우와도 사귀었는데 장국영은 그녀에게 결혼 프러포즈까지 했지만 거절당하여 결국 헤어졌다. 모든 장국영의 가족과 지인들도 대부분 장국영이 남자와 여자 모두 좋아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데이비드 보위의 퍼포먼스를 따라한 것도 그냥 겉모습만 따라한 것일 수도 있기에 모호하다. 게다가 보위는 실제 양성애를 컨셉으로 잡은 적은 있으나 젊은 시절 한때 일이고 행적을 보면 이성애자에 가까웠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심지어 "양성애는 음악 활동을 위한 컨셉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비드 보위 특유의 인터섹슈얼한 이미지는 일본의 사와다 켄지도 시도한 적이 있었고, 홍콩에서는 나문이 일본 활동을 마치고 난 1970년대 후반부터 인터섹슈얼한 이미지를 시도해왔다. 나문을 기점으로 인터섹슈얼한 이미지 혹은 요염한 이미지를 시도한 가수들이 늘어났으며 나문, 장국영, 진백강, 매염방 등이 이런 부류의 가수들 중에서 대표주자로 거론되었다. 인터섹슈얼한 이미지는 가수 활동 콘셉트 중에 하나일뿐, 이것을 이유로 가수의 사생활을 추정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다.

또한 장국영은 당학덕을 연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고 항상 부정했으며 동성연애는 모두 당학덕이 언급한 것들이다. 당학덕은 1983년 1월 초부터 연인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추도사에서 밝혔으나 장국영은 당시 꾸준히 여자친구가 있었으며, 모순균 이외에도 프로포즈를 한 여성도 더 있었다.

실제로 연예계 데뷔 후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모순균은 장국영에게 사랑의 열병과 함께 아픔을 준 여인이다. RTHK에서 1977년 방영한 《애정고사지: 19세》에 서로의 파트너로 연기를 펼쳤고 장국영이 모순균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장국영 20세, 모순균 17세 때의 일인데, 장국영은 어떻게든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드라마 고위간부 찬스를 써서 그녀의 연락처와 취향 등을 알아내고는 프로포즈 성공을 위해 열심히 물밑 작업을 한다. 모순균의 가족들에게도 온갖 정성을 보였고 특히 남동생이나 아버님을 집중 공략하여 프로포즈 성공률을 높이려 하였다. 하지만 친해진 지 몇개월 되지 않아 바로 프로포즈 모드로 들어갔고, 모순균이 "우린 아직 어리다"는 말로 프로포즈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땐 정말 죽고 싶었다고.

2001년, 모순균의 토크쇼에 출연해 만일 당신이 내 프로포즈를 허락했다면 지금쯤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참고로 장국영뿐만 아니라 모순균도 또한 2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으로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홍콩 언론지였던 '명보'에서 1980년, 장국영과 '설이'의 스캔들을 직접 취재한 적이 있다. 솔직한 장국영은 당연히 쿨하게 인정했다.

그 후, RTV에서 대놓고 커플로 밀고 나가서 화제성을 잡으려고 했던 모델 출신 배우 '예시배'와 약 2년 간 사귄 적도 있다. 예시배와는 《요철신탐》, 《첨첨입사미》, 《대대호》에서 호흡을 맞추었으며, 그 드라마들이 끝나서 애정이 식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헤어진 후엔 예시배가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하여 대만으로 갔다. 그런데 그 후 장국영이 《영웅본색》 시상식 참가 때문에 대만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였을 때, 어떤 기자가 "예시배와 헤어진 후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있냐?"고 물었고, 장국영은 연락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내심 본인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다는 식의 말을 해줬으면 하였으나 위의 단호한 인터뷰 때문에 그가 본인에게 미련이 없다고 느끼자 예시배는 자살시도를 하였다. 다행히도 실패.

장국영이 은퇴하고 캐나다로 간 것도 좋아하던 이성이 미국 유학을 결정하자 그녀와 결혼까지 하기 위해 미국으로 따라갔던 게 큰 이유다. 이 부분은 고별콘서트 당시 한국 기자와 인터뷰하며 드러난 사실이다.[40] 아마 진숙분이 그가 연예계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한 것도 그 여성과 장국영이 잘못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당학덕 말대로 진짜 둘이 연인 관계였다고 하면 그것은 꾸준히 장국영의 여자친구였던 사람들을 물먹이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당학덕과 장국영이 연인 사이라는 증거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2000년 열정 투어를 위해 외국으로 나가기 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당학덕도 같이 가는 거냐?"라고 물었을 때, 장국영은 여러번 그와의 관계를 부정했음에도 또 이런 질문이 나오자 "나는 당선생 말고도 친한 친구가 많다."며 크게 화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4.3. 사망

파일:장국영 장례식.jpg
장국영의 장례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장국영 사망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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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6. 필모그래피

6.1. 드라마

진하게 표시된 작품은 국내 VHS 출시 작품.

6.2. 영화

<rowcolor=#ffffff> 연도 작품 배역
1977 홍루춘상춘[48]
1978 구교구골 (狗咬狗骨)[49]
1980 갈채 (喝采)[50]지코
1981 실업생 (失業生)
1982 양과여소용녀(楊過與小龍女) 양과
충격21 (衝激21)
열화청춘 (烈火青春)[51]루이스
영몽가락 (檸檬可樂)[52]잭슨
1983 고수 (鼓手)[53]
첫사랑 (第一次)
1984 연분 (緣扮)
성탄쾌락 (聖誕快樂)
삼문치 (三文治)[54]
1985 위니종정 (為你鍾情) 푸수이
H2O 용봉지다성 (龍鳳智多星)
구애반투성 (求愛反斗星)[55] 빌리•레슬리
1986 영웅본색 (英雄本色)송자걸
우연 (遇緣) 루이
1987 영웅본색 2 (英雄本色2) 송자걸
천녀유혼(倩女幽魂) 영채신
1988 연지구 (胭脂扣)[56]진진방
살지연 (殺之戀)척지광
1989 최가박당 (新最佳拍檔)
1990 천녀유혼 2 인간도(倩女幽魂II人間道) 영채신
아비정전 (阿飛正傳)[57]아비 (욱자)
1991 종횡사해 (縱橫四海)[58] 제임스
호문야연 (豪門夜宴)[59]
1992 가유희사 (家有喜事)[60] 상소
시티보이즈 (藍江傳之反飛組風雲)아비
1993 동성서취(東成西就) 황약사
백발마녀전 1, 2 (白髮魔女傳)[61] 탁일항
패왕별희 (霸王別姬)[62] 정접의
화전희사 (花田囍事) 데이비드 카퍼필
1994 동사서독 (東邪西毒) 구양봉
금지옥엽 (金枝玉葉)
금수전정 (錦繡前程) 임초영
대부지가 (大富之家) 로버트
기득향초성숙시 2 - 초련정인(記得香蕉成熟時II初戀情人[63]
1995 금옥만당 (金玉滿堂) 조항생
야반가성 (夜半歌聲) 송단평
1996 금지옥엽 2 (金枝玉葉 2)
대삼원 (大三元)종국강
신 상해탄 (新上海灘)[64]허문강
색정남녀 (色情男女)
풍월 (風月) 우충량
1997 가유희사(97家有囍事)[65]
해피 투게더 하보영
1998 친니친니 (安娜瑪德蓮娜)[66] 편집장
구성보희 (九星報喜) 마인장
홍색연인 (紅色戀人)[67]
1999 유성어 (流星語)[68] 이조영
성월동화 (星月童話) 타츠야 / 가보
2000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69] 여아휘 / 본인
오키나와 랑데뷰(戀戰沖繩)[70]지미
스피드 4초(倉王)팽혁행
2002 이도공간(異度空間)[71]
2008 동사서독 리덕스 (東邪西毒 Redux)[72]구양봉

7. 음악 활동

8. 수상 경력

8.1. 영화

<rowcolor=#fff>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77년 제 2회 아시아 송 콘테스트 2위 American pie
1982년 제 30회 영화평론활동부문 남우조연상 실업생
1988~89 제이드 솔리드 골드 시상식 인기 남자배우 -
1991년 제 10회 홍콩금상장영화제 남우주연상 아비정전
1992년 제 30회 대만금마장영화제 주제가상 백발마녀전
1993년 중국영화 표연예술학회 특별공헌상 패왕별희
1994년 일본 영화 평론가협회 외국영화 남우주연상 패왕별희
1995년 홍콩영화 비평가협회 최고배우상 동사서독
1995년 제 14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 주제가상 금지옥엽
1999년 중문 금곡 반장 음악회 1위 -
1999년 제이드 솔리드 골드 시상식 인기 남자배우 -
2002년 연예동력대장 남우주연상 이도공간
2003년 20세기 중국 10대 문화우상 선정 -
2005년 중국영화 100주년 기념 가장 사랑받은 남자배우 1위 -
2005년 중국영화 100인의 뛰어난 배우 링크 [73]

8.2. 음악

9. 디스코그래피

※ 북경어 앨범은 (북경어), 광동어 앨범은 (광동어), 영어 앨범은 (영어) 표시를 하며 정선집(베스트 앨범)은 제외하였음.

10. 명대사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영웅은 살아있다.
영웅본색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아비정전[80]
사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을 한 평생 내 옆에 둔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꽃을 좋아한다고 설마 당신을 꺾어 나에게 향기를 맡게 하겠는가? 내가 바람을 좋아한다고 설마 당신이 부른 바람을 멈추게 할 것인가?
종횡사해
1분 1초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
패왕별희
새벽이여, 오지 말기를...
천녀유혼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동사서독> 中
우리 다시 시작하자.
해피 투게더[81]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고 당신 자신만을 사랑해요. 그렇게 자신의 모습이 싫다면 차라리 죽어버려요.
<야반가성> 中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그동안 어디 있었지?
<성월동화> 中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넌 죽어서도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행복해질 권리가 있을까?
이도공간[82]

11. 관련 문서



[1] 이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레드미션에 따르면 장발종(張發宗)의 영어 발음이 fat chung cheung이고 이것이 '發腫脹(종창이 나다)'라는 말과 발음이 유사하여 성인이 된 후 개명했다고 한다. 반면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장국영의 초중동창은 그가 중학생일 때 이미 장국영으로 개명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여권상의 이름은 또 따로 있다는 말도 있으나 장발종에서 장국영으로 개명한 것은 거의 확실한 듯하다. 영어 이름은 원래는 밤비라고 불렸으나 본인이 레슬리로 바꿨다.[2] 미국과 캐나다 등지의 현지 중국계들이 중국명을 미들네임으로 자주 쓴다는 점을 감안할 때 캐나다로 귀화하고 나서는 “레슬리 쿽윙 청(Leslie Kwokwing Cheung)”이 여권상 본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3] oe는 프랑스어의 œ 발음.[4] 공식적인 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예약한 호텔 24층 객실에서 투신했다.[5] 장국영의 유골은 연인이었던 당학덕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6] 1990년 밴쿠버이민 간 후 귀화했다.[7] 자신의 신체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곳으로 다리를 꼽았다. 이유는 짧아서. 이 때문인지 가 조금만 컸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자서전에 저술한 바 있다.[8] 죽은 아홉째 생일이 같아 가족들은 죽은 아홉째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한다.[9] 셋째 형, 넷째 누나, 그리고 아홉째 형은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을 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7남매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2017년 11월 25일 큰누나 장녹평이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향년 79세)[10] 패왕별희를 촬영할 때 배웠고 이후 표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삼은 중국 본토와 대만예능에 출연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다만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의 촬영 분량은 개봉 전에 대륙인 성우가 따로 더빙했다.[11] 중국어로 '오빠'라는 의미이며 번역상 '형'으로도 해석된다.[12] 광동어로 삽자이. 열 번째 아이라는 의미.[13] 특히 영문소설을 좋아했다고 한다.[14] Zoeng1 gwok3 wing4, 쩡궉윙[15] 많은 홍콩인들은 영문으로 이름을 쓸 때 자신의 영어 이름과 함께 만 뒤에 붙이고 중국식 이름을 생략하기도 한다. 캐리 람, 도널드 창, 크리스 탕, 알란 탐, 글로리아 입, 조슈아 웡 등등 이런 케이스는 수두룩하다.[16] 사실 장궈룽이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은데, 장국영은 홍콩인, 그것도 반환 한참 이전의 영국령 홍콩 출생이기 때문에 표준중국어를 배울 일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가 표준중국어를 제대로 할 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에 첸 카이가 감독의 <패왕별희>를 찍을 때다. 영화의 소재 중 하나가 경극인데 이게 베이징에서 발달했기에 당연히 보통화로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준중국어가 서투르다고 판단했는지 패왕별희의 장국영 등장분은 전부 대륙인 성우의 후시녹음을 거쳤는데, 목소리가 비슷한 데다가 성우가 최대한 장국영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연기하려고 노력해서 그런지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론이 표준중국어 표기법만 주구장창 쓰는 이유는 광동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이 없어서 그렇다.[17] 다만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홍콩인들의 이름이 언론에 여러 번 거론되면서 캐리 람, 조슈아 웡, 아그네스 초우 등 영어 이름으로 표기하는 추세가 많아지고 있다.[18] 물론 홍콩 4대 천왕이 등장한 이후에도 장국영이 가지고 있던 인기가 워낙 건재했기 때문에 인지도가 큰 타격을 입진 않았다.[19] 최초는 1989년 소피 마르소의 LG화학 드봉 화장품 광고이다.#[20] 이는 장국영이 사망한 다음 해인 2004년 초부터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21] 무한도전 태리비안의 해적 편에서 OX퀴즈로 해당 문제가 출제된 바 있었다. 총 7명이 풀었는데, 단 두 명(정형돈, 노홍철)만이 정답을 맞췄을 정도였고, 자막으로도 정말 경악스러운 동안이셨던 그 분이라고 표시하기도 했다.[22] 우울증의 악화로 몸이 지친 상태라 끝내 앵콜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평소 장국영의 쇼맨십을 생각하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행동. 장국영은 우울증, 매염방은 자궁경부암의 병세가 깊어져 불과 1년뒤인 2003년 같은해 세상을 떠났다. 콘서트 당시에 매염방은 몰래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23] 당시까지만 해도 남자 연예인은 남성적인 매력을 뿝어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장국영과 비슷한 느낌의 배우는 아예 없었다고 봐도 된다. 장국영이 양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산 것도 그가 가녀린 미청년 이미지의 원조급 배우였기 때문이다.[24] 이건 응답하라 1994삼천포를 생각해보자.[25] 본명은 이백(李白). 패왕별희의 원작 소설가다.[26] 한국 배급사의 잘못된 홍보한 탓에 영웅본색이나 천장지구 같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이 극장에서 단체로 환불을 해달라는 등 크고 작은 난동이 있었다는 풍문이 있었다.[27] 대부분 명절 특수를 노린 '하세편'이다. 물론 《천녀유혼》이나 《야반가성》 같은 작품도 있다.[28] 영화 첫 출연작은 타락천사[29] 실제로 헐리웃 시나리오가 2편 들어왔었다고 한다.[30] 장국영의 절친이자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윤발은 90년대 말 할리우드에 진출해 활동했지만, 2010년 다시 홍콩으로 컴백했다.[31] 1959년 무협소설가이자 언론인인 김용이 창간한 굉장히 유서깊은 언론사로 파파라치 짓 따위는 하지 않아 연예계에서도 제대로 인정받는 몇 안되는 언론사다.[32] 큰누나 장녹평의 결혼식 당시의 모습이며, 생전 장녹평은 이 사진을 굉장히 아꼈다고 한다.[33] 술을 마시다가 반신마비가 되어버렸다고 한다.[34] 언론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가족과 친구 등을 건드리는 짓에 대해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35] 장국영의 가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이다.[36] 영화 《풍월》의 주제가. 원곡도 있으나 요새는 검색창에 검색하면 장국영의 노래라고 나온다.[37] 진백강 역시 장국영 못지않게 여리여리한 미남이었으며 데뷔도 먼저 했다. 이후 장국영의 인기가 넘사벽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저 낮다. 그러나 진백강은 10년 전인 1993년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38] 이 장면에서 흐르는 피아노 곡은 '추'의 멜로디이다.[39] 당시 장국영은 사진이 찍히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후에 사진이 이쁘게 찍혔다며 기자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남겼다.[40] 금옥만당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서극 감독과 협업하면 유독 장국영의 실제 생활을 극 속에 녹이곤 한다.[41] 대신 양조위의 부인인 유가령과는 성격이 정말 비슷했다고 한다.[42] 영국 식민지 시절 중국 출신 홍콩 상류층들은 영미권 교과서와 영어로만 수업을 하는 학교에 진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개 영국이나 미국, 캐나다의 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교사들도 거의 백인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지 20년이 넘은 현재도 별로 다르지 않다. 사족으로 영국인들은 자녀들을 대부분 영국 본토의 기숙학교에 보내 교육시켰으며 대학까지 영국에서 졸업시키는 게 대부분이었다.[43] 사실 이는 언어적 이유가 컸다. 홍콩에서도 본토 태생 하층민들은 보통화를 쓰기 때문에 장국영도 보통화를 어느 정도 알아듣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보통화로 연기를 할 정도로 유창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사실 장국영 최고의 인생작 중 하나인 패왕별희 극 중 청뎨이(장국영)의 목소리는 장국영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대륙 출신 성우의 더빙을 거친거다. 그런데 장국영 본인 목소리와의 싱크로율이 엄청나서 성우 더빙을 쓴 티가 거의 나질 않는다.[44] 광미보(鄺美寶) 분.[45] 현재의 aTV. 방송국의 명칭은 1982년에 바뀌긴 했지만 아래 요철신탐은 방송국명이 바뀌기 전의 작품이다.[46] 2006년에 리메이크하려다가 취소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작품.[47] 소생(蘇生) 감독, 이혜민(李惠民) 연출. 《무협풍운》이란 부제로 출시되었다.[48] 삼합회의 협박에 어쩔수 없이 찍은 영화다. 분명히 잔잔한 멜로영화라고 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노출을 요구하고 억지로 베드신을 시킨 영화로 악명이 높다. 중화권 장국영 팬들에게 '아무리 장국영이 나와도 절대로 봐서는 안되는 영화'로 평가받는 중.[49] 카메오[50] 본격적으로 영화 시작[51]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작품[52] 《레몬콜라》[53] 《드러머》[54] 《샌드위치》[55] 《구애대작전》[56] 한국에서 VHS 출시 때 한자 변환을 잘못해서인지, 《인지구》로 나왔다. 그러나, 홍콩영화를 무수히 소개하던 월간지 로드쇼조차도 1989년 소개 당시 인지구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1998년 KBS 추석특선영화 방영시 에는 제목 그대로 《연지구》로 방영했다. 인지구란게 광둥어발음이 연지구가 인지구발음.[57] 장국영의 가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58] 장국영이 가수 은퇴 발표 직전 주윤발, 종초홍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출연한 작품. 영화 자체는 은퇴 후 개봉되었다.[59] 1959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홍콩 수재민을 돕기 위해서 제작되었다.[60] 장국영이 은퇴 번복 후 출연한 영화로 촬영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61] 2편에서는 후반 10분에 출연[62] 영화사상 최초로 중국 본토에서 제작된 영화에(홍콩 영화와는 다르다) 홍콩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63] 특별출연[64] TVB 드라마 《상해탄》의 리메이크작[65] 카메오[66] 특별출연[67] 당해 중국 대륙에서 흥행 5위권에 든 흥행작이지만 한국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순위권에는 《타이타닉》도 있었는데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어용색이 강한 영화여서 장국영의 팬들로 하여금 씁쓸하게 만들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장국영은 홍콩출신 연예인들중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천안문 사태중국공산당에 대놓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연예인이었기 때문이다.[68] 1홍콩달러만 받고 촬영한 작품.[69] 《해피투게더》 메이킹 필름. 캐릭터 설정이 뒤바뀌게 되었으나 원래 배역은 여아휘가 맞다. 후에 하보영으로 배역이 오면서 본편에서는 하보영 역[70] '성월동화2'의 부제목이다.[71] 장국영의 유작. 개봉 1년 후 장국영은 고층 건물에서 추락사하여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이 영화가 장국영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괴담이 돈 적도 있으나 당연하지만 사실이 아니다.[72] 왕가위 감독이 언급하기를, 자신의 영화에서 장국영의 마지막이 '해피투게더'에서 보영이 아휘가 떠난 걸 마음 아파하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마구 울부짖는 모습이라는 게 너무 맘에 걸렸다고 한다. 결국 1편 때 찍은 필름 보완 등의 2차 가공을 통하여 동사서독 리덕스를 제작하였다.[73] 홍콩 배우들 중에서는 성룡, 주윤발, 유덕화, 장만옥, 주성치, 양가휘, 매염방, 양조위와 함께 선정되었다. 참고로 임청하,장애가는 대만배우이고, 이연걸장쯔이는 대륙출신의 중국배우이다.[74] 은퇴로 인해 상을 받지 않았다.[75] 상은 받지 않았다.[76] 상은 받지 않았다.[77] 십대중문금곡 25주년을 기념하여 홍콩 가요계를 빛낸 가수들에게 수여했다.[78] 장국영의 대표곡인 <A Thousand Dreams of You>가 수록되어 있는 앨범. 원래 이 곡은 1936년 미국의 재즈 가수인 팻츠 월러가 발표한 곡이었으나 이 앨범을 통해 장국영이 리메이크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79] 황요명과 공동 작업한 앨범이다.[80] 장국영을 상징하는 명대사 중 하나로, 훗날 그의 죽음과 맞물려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원래 장뤽 고다르의 1964년 작품 〈국외자들〉(Bande à part)에 나오는 대사다.[81] 위의 아비정전 속 대사만큼이나 유명한 장국영의 명대사. 함께 출연했던 양조위는 장국영이 죽은 뒤 실수로 장국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장국영의 음성사서함에 이 말을 남겼다고 한다.[82] 짐이 빌딩에서 투신자살하기 전 남기는 대사. <이도공간>은 장국영의 유작으로, 이듬해 장국영이 영화에서처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이 장면이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장국영의 우울증이 악화된 원인으로 <이도공간> 촬영 당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의사 짐 역에 너무 몰입했다는 점을 얘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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