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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1:06:05

장국영 사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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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242b33><rowbgcolor=#242b33> 파일:장국영 서명 화이트.png||<color=#fff>장국영
張國榮|Leslie Ch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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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재완 (拒絕再玩) 사망 사건

1. 개요2. 상세3. 의문점

1. 개요

2003년 4월 1일 홍콩의 배우, 가수였던 장국영투신자살한 사건.

2. 상세

파일:leslie 2003.jpg
2003년 3월 9일,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자신이 머물던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의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1]

그런데 하필이면 이 날이 4월 1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죽음으로 언론이 장난치냐, 너무 심하지 않나?"고 생각해서 믿지 않았다가 이것이 사실인 걸 알게 되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2]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 6명의 팬이 그를 따라서 투신했고 그 중 1명이 경상을 입고 5명이 사망했으며 전 아시아권의 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파일:장국영 장례식.jpg
그의 장례식
파일:장국영 화장터.jpg
화장터로 들어가는 장국영의 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8일에 열린 발인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함께 《영웅본색》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주윤발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발인식에 참석했다. 장국영의 시신은 홍콩 케이프 콜린슨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의 위패는 보선사에 안치되었고 유골은 당학덕에게 인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 때문에 무산되었으며 6월 2일 일산의 여래사라는 절에서 한국의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 열렸다.

장국영의 기일인 4월 1일과 생일인 9월 12일에는 많은 팬들이 영상회나 파티를 열고 장국영을 기억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어 위키백과에 서술되어 있다. 발인식 날 추도사는 평소 그와 절친이던 서극 감독과 작곡가 황페이, 장학우가 맡았고 평소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양가휘와 양조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다가 끝내 혼절하기도 했다. 장국영의 관은 평소 그와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한 관금붕 감독, 패션디자이너 류희기, 양가휘, 장학우, 서극 감독 등 8명이 들었다.

3. 의문점

장국영의 죽음을 둘러싸고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삼합회에서 살해했다는 음모론부터 천안문 발언 등 중국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탓에 중국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 그의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唐鶴德)이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3] 실제로 캐나다 정부에서 홍콩 영화배우들을 삼합회와 연관이 있다며 이민을 거부했다는 루머가 돌 때도 장국영만은 유일하게 이민 허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삼합회가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4] 장국영이 삼합회에 치를 떤 이유는 그의 영화 데뷔작 《홍루춘상춘》이 중국 고전 《홍루몽》의 에로 버전이었는데 수준도 조악했지만 삼합회 관련 스탭들이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장국영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영화를 찍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5] 은퇴 번복 후 처음 출연한 《가유희사》는 필름 탈취를 겪기도 했고 생전 인터뷰에서 삼합회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국영이 감독 데뷔를 하려고 해도 삼합회와 연결되어 있는 대다수의 홍콩 영화 투자자들이 투자하지 않아 계속 제작이 미뤄지다가 막판에 겨우 중국의 사업가인 '석설'에게 투자를 받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의 죽음으로 그의 재산 460억을 물려받은 당학덕은 평소 삼합회의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실제로도 수상한 점이 상당히 많다. #

기사#

이와 같은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어떤 법의학자는 "누군가 장국영을 둔기로 살해한 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파일:le9.jpg
장국영을 상징하는 빨간 하이힐

하지만 장국영의 사망 직후 장국영의 조카 알리사가 '평소 장국영이 우울증을 앓아 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밝혔고 장국영이 사망한 당일 점심을 함께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막화병에게 "죽고 싶을 땐 수면제보다는 뛰어내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오전 중에 운전을 하다가 어디론가 확 부딪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살 이유가 우울증이었다고 하면 의외로 간단해지는데 자살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며 사람들 앞에서는 끝까지 평상시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정이나 다른 것을 자살에 대비해서 정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0] 그래서 자살 직전까지도 주위 사람이 평소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운 일로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주변에 자살의 위험 신호를 많이 보내지만 만성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다들 '원래 저런 사람인가 보다' 하는 면도 없지 않고 이렇게 일상 생활을 잘 영위하다 갑자기 죽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살의 징후가 나타나긴 하지만 주변에서 알아차릴 만큼이 못 되는 편이다. 한국에서도 모 대학 학생이 수업 중인 학교의 건물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해당 학생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 당일에도 학교에 수업을 받으러 왔다.

문제는 "왜 우울증이 생겼는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국영은 영화 감독[11]이 되는 것을 오랫동안 꿈꿨다. 그러나 그가 강경한 반삼합회 인사인 까닭에 그에게 투자하겠다는 홍콩의 영화제작사가 없어서[12]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나, 중국의 사업가인 '석설'이 그에게 접근하여 ''영화 제작비를 팍팍 지원해 줄 것이고, 당신의 오랜 숙원도 달성하게 해줄 것이니 영화 제작을 해라.''라고 이야기하자 드디어 꿈꿔왔던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은 알려졌다시피 본인에게 잘해주는 사람이거나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한없이 사랑을 주는 타입인데 석설도 장국영에게 (적어도 그의 눈에 보이기에는) 무한한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알게 된 지 2년이나 지났음에도 별 독촉 없이 기다려 주고 장국영의 오랜 팬을 자처했으며 본인 일에 관해서는 바쁜 와중에도 항상 큰 금액을 쏟아부으며 식사도 하고 장소물색도 같이 하는 그런 사람을 장국영이 싫어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석설이란 인간이 웬만한 사기꾼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스케일 큰 사기꾼이었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을 것이다.

2002년 2월 중순 홍콩중문대학에서 이벽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강의에 특별 초대되어 《아가적여인》, 《연지구》, 《패왕별희》의 이야기들을 진짜 교수처럼 술술 이야기하던 모습, 3월 초순에 곧 이루어질 자신의 감독 입봉에 대해 들떠서 이야기하고 자신감을 내보였던 인터뷰, 3월 중후반 《이도공간》에 관한 무대인사와 인터뷰에 관한 스케쥴 조정 등에서 보여주었던 장국영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이 즈음 장국영은 홍콩에서 제작을 돕겠다는 제작사를 만나지만 이미 대부분 크랭크인 준비가 끝난 시점이고 너무 막판이라 석설의 투자를 믿고 거부하였으며 석설은 차기작까지 지원을 약속했으니 얼마나 장국영 입장에서 든든해 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다양한 문제로[13] 계속 영화 제작이 미뤄지다가 어찌저찌 봉합이 되어 4월 초부터 크랭크인이 가능했던 부분이었고 이번만큼은 확실하다 싶어 모든 배우들과 스탭진들이 스탠바이 상태였는데 바로 그때 석설이 구속되는 바람에 영화 제작이 아예 물거품이 됐다. 석설의 구속은 2002년 3월 30일에 걸려 들어가서 세간에서 <3.30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어쩜 타이밍이 이리 완벽한지. 여튼 이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투자를 중단하여 영화 제작이 사실상 취소되었다. 그 자존심 강하고 자존감이 높던 장국영은 홍콩 제작사를 다시 찾아갔지만 이미 그 제작사는 다른 영화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받기까지 했다. 결국 이에 크게 실망한 장국영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 제작 무산 하나를 이유를 대기엔 더욱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실제로 영화 제작이 좌절되자 《아가적여인》, 《연지구》를 같이 작업했고 《패왕별희》 제작 당시 다른 이들이 존 론[14]을 외칠 때 실제로도 장국영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패왕별희》를 집필하였기 때문에 장국영을 강력히 원했고 결국 성사시킨 이벽화 작가는 장국영이 감독의 꿈이 크다는 걸 알고 시카고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아가적여인》 리메이크의 감독으로 활동하길 바랐다. 그걸 도와주기 위해 본 시나리오를 1년여간 수정하여 2003년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서극 감독은 몇 번 다른 시나리오 등을 수집하여 보내다가 장국영이 1년 이상 전부터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장국영을 위해 직접 감독 시나리오를 호텔로 가져가서는 부인이자 영화 제작자 시남생, 콜롬비아 영화사 아시아 배급 담당자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었다. 결국 본인이 선택한 시나리오가 물거품 되었다는 상처가 있긴 하지만 그의 감독 활동이 완전히 막혔던 건 아니었다. 실질적 무명 생활을 8년이나 겪고 온갖 굴욕에도 당당하게 활동하던 장국영과도 캐릭터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제작 무산의 가장 큰 이유였던 석설의 구속과[15] 그와 관련된 약 20여명의 구속 및 처벌로 인해 장국영 영화에 투자하고자 했던 약 300억 원의 자금이 실제로는 비리, 사기 사건의 비자금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나름의 선을 지키며 도덕적으로 살아왔던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책임감으로 다가와 우울증이 생겼다고 보는 게 맞을 수 있다.

석설의 구속 후 그 사기꾼의 행보가 그날 이후부터 줄줄 나오기 시작한 것이 장국영에게는 큰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그 사기꾼을 2년 이상 믿었고 인간적으로 좋아했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도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슬픈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직 투자 무산이 되기 전 본인의 지인들에게 석설을 소개시켜준 적이 있다. 그런데 장국영이 영화 이야기를 하면 석설이 호언장담하며 자신이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하는 부분이 지인들에게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고 한다. 제작 및 투자자의 입장에서야 이미 석설이 관금붕 감독, 장예모 감독과 같이 일한 적이 있으니 지인들도 자금적인 부분이나 비리사건까지는 몰랐겠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두고자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인데 실제로도 일부는 이를 장국영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고 사이가 틀어질 각오를 하면서까지 그를 말린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석설을 믿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드디어 제대로 된 감독을 하게 되어 항상 기분이 업되어 있던 장국영에게 뭐라해도 말을 듣지 않다보니 "정확하게 알아보라고" 말하기도 힘들어졌으며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후에 막화병의 인터뷰에서 장국영이 "악마에 홀렸다"라고 본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는데 이 악마가 무엇이었는지는 이 사건과 유서 전문 비공개로 인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황상 석설로 추측된다. 장국영에게만은 한없이 잔인했던 홍콩 언론이 이 좋은 먹잇감을 놓칠 리도 없거니와 워낙 큰 비리 사건이었는지라 장국영이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비토와 도덕적 책임론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주요 캐스팅(영정[16], 호군[17], 심전하[18])을 해 놓고 스탭들도 《패왕별희》 스탭진 뿐만 아니라 각 국에서 유명한 정예 군단으로 정해 놓고 촬영하려고 하였으나 영화의 크랭크인이 자꾸 밀리면서 그들이 다른 작품을 못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스케쥴적인 부분 역시 장국영이 괴로워했던 부분일 것이다. 본인 때문에 적어도 50여명의 스탭진, 캐스팅된 배우들에게 민폐를 끼친 부분이니 말이다. 가수의 입장에서는 유니버셜에서 계약한 대로 1장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내야 했던 것도 스트레스의 요인이었다. 실제로 '황요명'과의 공동 작업이라 어떻게든 둘의 스케쥴이 맞을 때 녹음했어야 하지만 장국영의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녹음이 자꾸 미뤄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작 가장 중요했던 남자 주인공은 아직 시나리오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의한 배우들로부터 죄다 거절을 당했는데 이 남주인공 역할의 물망에 오른 배우들 중에는 의외로 한국 배우 송승헌도 있었다. 송승헌은 직접 캐스팅 제의를 하기 위해 장국영 본인이 2002년경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했으나[19] 결국 송승헌 측에서 스케줄과 불투명한 시나리오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송승헌은 <일단 뛰어>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장국영이 직접 송승헌을 보기 위해 <일단 뛰어> 촬영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완벽주의자였던 장국영은 이것저것 문제들은 자꾸 늘어나고, 그 일들을 수습도 못하고 계속 혼자 삭히면서 고민하였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선택을 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고, 중국으로 반환되어 브랜드 가치가 완전히 떨어진 홍콩 영화판에 배우로 돌아온다고 한들 예전만큼의 화제성을 보여줄지도 의문이려니와 전성기처럼 주연만 고집하기에는 나이가 50에 가까워져 가니 배우로 오래 살고 싶으면 조연급 배역을 맡아야 하는데[20] 이를 본인이 감당하고 팬들이 받아주기에는 만무한 상태이기도 했다. 덧붙여서 장국영은 대부분의 친목 활동을 본인이 주도하였고 그의 완벽함도 《패왕별희》처럼 좋은 시너지로 나올 수도 있으나 잘 되지 않는 일이 있어 얼른 포기하는 게 나은 문제에도 끝까지 자기가 해결하기 위해 집착을 보여 왔던 것도 이러한 성격 때문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이 부분은 송소천과 막화병의 인터뷰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2022년 10월 29일자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서도 이 사건 관련 음모론을 다루었고 가장 대표적으로 도는 '건물 중간에 튀어나온 곳이 있어서 1층까지 떨어지는게 불가능하다'를 포함한 의문점들을 모두 검증하여 자살이 맞음을 알렸다.

2023년 1월 18일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장국영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홍콩 황색언론과 파파라치들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파일:le8.jpg
사망 10주기(2013년) 홍콩 타임스퀘어에 전시된 장국영의 모습.


[1] 일각에선 장국영이 '感情所困 無心戀愛世(감정에서 곤혹을 느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라는 유서를 남겼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고 장국영의 유서는 공개된 바가 없다.[2] 실제로 사망 소식을 접했던 주윤발"만우절 장난치곤 좀 그렇다"고 웃어넘겼다가 진실임을 알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3] 생전의 장국영은 당학덕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어려울 때 늘 도움을 준 전우라고만 말하며 자신의 애인이라는 설을 꾸준하게 부인하였다.[4] 삼합회와의 연계를 의심하여 홍콩 배우들의 이민이 캐나다에서 거부되었다는 것은 이후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5] 홍콩 영화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히트한 홍콩 영화의 아류작이 수없이 나온 배경에는 이러한 삼합회의 압박이 있었다.[6] 물론 투신자살 사례 영상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이들도 꽤나 있긴 하다. 전체 사례 중에서 그런 경우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7]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땅을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실행하기 불가능하다고 한다.[8] 다만, 체내 출혈의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9]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는 의견도 있지만, 호텔 엘리베이터의 CCTV에는 그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10]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살 염려가 없어서가 아니고 우울증을 이겨내고 살아 나갈 거라고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려고 했다는 증거가 된다.[11] 장국영은 홍콩 정부의 지원으로 매염방과 함께 출연한 '연비연멸'이라는 금연 홍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12] 홍콩의 영화제작사들의 상당수가 삼합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까닭에 그들이 장국영의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것은 곧 파산과 신변이상까지 감수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제작에 투자하겠다는 영화제작사가 없었다.[13] 시나리오의 수준 낮음과 영화 배경으로 하려고 했던 청도가 너무 많이 변했다는 부분[14] 마지막 황제, M. 버터플라이 등의 출연작이 있다. 프랑스 영화 '연인'에서 양가휘가 맡은 배역에 가장 먼저 거론되기도 했다.[15] 이 사건으로 석설은 2008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16] 장국영과는 《신 상해탄》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었으며 "장국영 감독의 영화라면 무급으로라도 무조건 출연하겠다."라고 인터뷰했다.[17] 《람우》에서 인연을 맺은 관금붕 감독이 직접 장국영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람우》는 공교롭게도 '석설'이 제작지원한 영화다. 2006년 드라마 주원장의 주원장 역.[18] '뚱땡이 언니'라는 애칭을 가졌던 '홍콩의 국민 코미디언이자 MC' 겸 가수. 한국에서는 금상장영화제 사회를 본 것으로 유명하다. 2008년 간암으로 별세했고 그녀의 위패는 장국영과 나란히 놓였다.[19] 이 때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서 처음으로 입국한 게 파파라치에 의해 포착되었으며(이전까지는 김포공항으로 항상 입국했다) 장국영 생전 마지막 방한이기도 했다.[20] 실제로 홍콩 영화 전성기에 활동한 배우들 중 반 이상은 현재 활동을 중단하거나 은퇴했고 나머지도 주연급으로 활동하는 배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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