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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03:27:49

서극

서극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홍콩 금상장 시상식
파일:Hong_Kong_Film_Award_Trophy.png
감독상
제10회
(1991년)
제11회
(1992년)
제12회
(1993년)
왕가위
(아비정전)
서극
(황비홍)
장지량
(케이지맨)
제29회
(2010년)
제30회
(2011년)
제31회
(2012년)
진덕삼
(8인: 최후의 결사단)
서극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허안화
(심플 라이프)
제34회
(2015년)
제35회
(2016년)
제36회
(2017년)
허안화
(황금시대)
서극
(타이거 마운틴)
비키 웡
(트리비사)
}}} ||

파일:external/cinsinemasi.files.wordpress.com/hark4.jpg
徐克[1]
Tsui Hark
서극
<colbgcolor=#cc1700> 출생일 1950년 2월 15일 ([age(1950-02-15)]세)
본명 한자: 徐文光
한국한자음: 서문광
표준중국어: 쉬원광
광동어: 처이만궝
베트남어: 투반꽝 (Từ Văn Quang)
출생지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공
(現 베트남 호찌민 시)
국적
[[틀:국기|]][[홍콩|]][[틀:국기|]]
학력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가족 독신 (이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2.3. 1980년대 중, 후반2.4. 1990년대2.5. 2000년대2.6. 2010년대2.7. 2020년대
3. 영화인으로서의 서극4. 중국 영화계 진출5. 사생활6. 여담7. 필모그래피
7.1. 연출작7.2. 출연작

[clearfix]

1. 개요

홍콩 영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감독이자 제작자. 홍콩 영화 뉴웨이브 선두주자로 곧잘 소개된다. 한때 홍콩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80, 90년대에는 그야말로 홍콩 영화계에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었다. 《영웅본색》, 《동방불패》, 《황비홍》등 홍콩 영화의 전설적인 시리즈는 모두 서극의 손에서 탄생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홍콩 영화의 최고의 전성기의 한 축인 인물이다. 한 때 전영공작실(영문으로 필름 워크샵[Film Workshop])이라는 제작사를 직접 운영하면서 수많은 홍콩 장르영화를 제작 및 연출하여 '아시아의 스필버그'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후로도 2004년에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홍콩 감독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5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공의 화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서문광(徐文光). 형제가 16명이나 될 정도로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공연 예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10세에 이미 8mm 카메라로 실험 영화를 만들어서 학교에서 상연했다고 한다. 또한 만화에도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베트남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1963년 일가족 모두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으로 옮겨 졸업한다.

졸업 후 미국 영화계에서 일하면서 재미 화교 언론에서도 일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아시아계 차별에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1977년 홍콩으로 돌아온다.[2]

2.2.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1977년 홍콩으로 돌아와 TVB에 입사, 프로듀서를 맡는다. 이때 제작한 드라마가 일반드라마인 <가변>이다. CTV로 영입되어 무협극 <금도정협>을 제작한다. 이 드라마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 서극은 유명한 제작자인 오사원에게 영입되어 첫번째 영화인 <접변>을 감독한다. 접변의 주연은 유조명으로 이후 천녀유혼의 나무귀신으로 출연했다.

1981년 코미디극 <귀마지다성>을 감독하여 금마상[3]을 수상한다. 1983년 원표, 임청하, 홍금보 등을 기용하여 <촉산>을 감독하였는데, 이 당시 미국 유학파 영화 인력을 대거 영입하여 홍콩영화의 기술 수준을 한단계 높였고,[4]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5] 서극의 홍콩 영화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높아진다.

1984년 본인의 프로덕션인 전영공작실을 설립한다.

이 당시 서극은 감독, 제작뿐만 아니라 종종 배우로도 출연하곤 했다. 오우삼이 감독한 <양척노호>라는 코미디물에서 주연을 맡았고, 이때 감독이었던 오우삼과 알게 되어 둘은 의기투합하여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여는 작품을 개척한다. 이후에 <최가박당> 1편과 2편에 연달아 출연한다.

2.3. 1980년대 중, 후반

한국에서는 영웅본색 시리즈에 가려 이 시기의 서극의 다른 작품들은 상대적으고 잘 알려지지 않은데, 무협이 아닌 서극의 정극이나 코미디극 연출 솜씨를 볼 수 있다.

1984년 내놓은 <상해지야>는 종진도, 엽천문, 장애가가 주연했다. 이 영화는 전영공작실 설립 후 최초의 작품으로, 국민당 지배시기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시대애정물이다. 이 영화는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전영공작실은 첫 작품부터 명작을 터트려서 탄탄대로를 달린다.

같은 해, 서극은 <최가박당 3>를 감독했다.[6] 최가박당 시리즈가 원래 프랜차이즈 흥행작이긴 했지만, 이 영화도 1편과 2편 못지않게 대박을 쳤다. 다만 장애가와 맥가의 연기는 1,2편의 클리셰를 반복한다고 혹평을 받기도 했다.

1985년에는 다시 허관걸과 함께 출연한 코미디극 <타공황제>를 감독-제작했다. 이어 양자경이 주연한 예스마담에 우정출연을 해서 중요 배역 못지 않은 대단한 코믹 연기를 보여주었다.

1986년 임청하, 종초홍, 엽천문을 기용해 만든 경극영화 <도마단> 이 있다. 이 영화는 임청하가 여장 남자(말하자면 패왕별희의 장국영 역)로 나오는 영화인데, 여러모로 패왕별희를 연상시키는 작품이지만[7], 한국에서는 묻혀버렸다.

1986년 본인이 제작을 맡고 오우삼이 감독한 영웅본색이 개봉한다.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의 정점에 닿은 작품이며 한국에서도 오우삼-서극의 이름이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홍콩영화가 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987년, 장국영,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을 제작[8]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동시에 서극은 오우삼과 다시 협업하여 영웅본색 2를 만들었으며 전작처럼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다.

1988년에는 느와르 대행동, 로보캅에서 영향을 받은 <철갑무적 마리아>를 제작해서 대박을 냈다. <철갑무적 마리아>에서는 아예 서극 본인이 폭력 조직원 출신인 위스키 역으로 직접 출연까지 했다.

1989년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을 제작하여 엄청난 흥행을 했으나, 첩혈쌍웅 제작 당시 오우삼이 서극의 연출 간섭에 분노하여 둘의 사이가 원수가 된다. 그리하여 함께 만들기로 한 <영웅본색 3> 프로젝트에서 오우삼은 손을 뗐고, 결국 서극은 제작과 감독을 겸임하여 영웅본색 3[9]를 직접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한다.

2.4. 1990년대

1980년대에 홍콩영화계의 황제로 등극한 서극은 1990년대에도 히트작을 내놓는다. 90년대 들어서 홍콩 배우들의 다작으로 그나물에 그밥이라는 불평을 들으며 홍콩 영화는 침체기에 있었지만, 서극은 이연걸이라는 대륙 출신 액션스타를 발굴하여 이 당시에도 대성공을 거둔다. 다만, 이 당시 서극이 결별한 오우삼의 활동을 방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우삼은 홍콩영화계에서의 서극의 여러 방해를 견디지 못하여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결국 홍콩에서보다 더 큰 명성을 얻는다.

1990년에는 천녀유혼의 정소동이 감독하고 대륙의 명감독인 장예모와 그 연인인 공리를 배우로 캐스팅한 <진용>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타임슬립물인데, 홍콩-대륙 합작 영화로 주목을 끌었다. 대륙의 인력에 홍콩의 특수효과가 결합한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다.

한편, 서극은 같은 해에 홍콩 무협 영화의 전설 호금전 감독과 협업하여 허관걸, 장학우 주연의 <소오강호>를 제작하여 흥행에 성공하였다. 특히, 이 영화는 서극 특유의 퓨전 무협과 호금전의 정통 무협 스타일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소오강호> 제작 당시 서극이 제작자 위치에서 작품 방향을 두고, 호금전 감독을 계속 구박한 끝에 호금전이 "너랑 도저히 못 해먹겠다."고 때려 치웠다는 비화가 있다. 호금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준비해놓는 타입인데 서극은 촬영 도중에 시나리오를 수십 번이나 바꾸는 스타일이어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서극은 와이어 액션와 특수효과가 진뜩 들어간 넣은 퓨전 무협을 원했고, 호금전은 정통 무협을 추구해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90년대 서극이 감독 또는 제작한 작품은 사극 또는 무협물이 많은데, 주요 작품으로는 이연걸이 주연한 황비홍 시리즈와 임청하에게 제 2의 전성기를 열리게 해준 동방불패 등이 있다. 이외에도 서극은 <청사> <신용문객잔>[10], <서극의 칼>[11], <양축>(사극 멜로) 등의 사극/무협물을 만들었다. 또한, 서극은 무협물이 아닌 정극과 코미디도 계속 내놓았다. 장국영을 기용한 요리영화 금옥만당, 코미디물 <대삼원> (1996), <양축>의 주인공인 오기륭과 양채니를 기용한 코미디물 <화월가기> (1995) 등이 그것이다. 다만 당시 홍콩 영화계가 쇠락기였던데다가 한국에서도 홍콩 영화의 인기가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황비홍과 동방불패, 신 용문객잔을 제외하면 서극이 제작한 작품들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

한편, 90년대 초반에 할리우드로 떠난 오우삼하드 타겟브로큰 애로우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는 홍콩 영화계를 주목하게 되었고, 홍콩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서극도 할리우드에 영입된다. 그리하여 1997년 장 끌로드 반담데니스 로드맨이 주연한 <더블 팀>을 만들지만 혹평을 받았다. 또한 반담을 재기용하고, 당시 와이프였던 시남생이 제작한 <넉 오프>도 흥행에 참패했다. 이는 당연한 것이 서극은 홍콩 시절부터 무협에는 소질을 보였지만 액션이나 느와르는 잘 안맞는데 (이 장르는 오히려 오우삼의 전공이다) 서극에게 액션물을 떠넘겼으니 망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두 편의 실패로 서극은 할리우드를 손절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오히려 중국 영화계로 눈을 돌린다. 한편 서극에 앞서 할리우드로 진출했던 오우삼도 윈드토커페이첵의 실패로 2000년대 중반 홍콩으로 돌아온다.

2.5. 2000년대

홍콩에 돌아와 내놓은 첫번째 작품은 <순류역류>(2000)가 있다. 전직 바텐더인 사설 경호원(사정봉 역)과 전직 킬러였던 남자(오백 역)가 친해지다가 전직 킬러의 동료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 이야기는 빈약하나 액션은 꽤 화려한데, 후반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액션씬은 그 중 백미로 도둑들의 후반부 아파트 액션도 이 장면을 참조한 듯 하다. 여담으로 성룡뉴 폴리스 스토리에서 오백이 사정봉의 아버지 역으로 잠깐 나온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자신이 1983년에 만들었던 촉산을 리메이크한 <촉산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전작이 훨 나았다는게 중평.

2001년에는 실사 애니 합성 코미디 영화인 <노부자2001>를 만들어서 대박을 쳤다. 2002년에는 공포물 <천년강시왕>을 제작했다.

2.6. 2010년대

한국에서는 2010년대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서극이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실제로는 홍콩을 밀어내고 중화권 영화의 중심지가 된 중국 영화 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중국 영화사였던 화이브라더스와 손을 잡고 무협물을 주로 감독했다.

2010년 유덕화리빙빙을 기용하여 <적인걸:측천무후의 비밀>을 내놓았다. 이어 2011년 이연걸을 기용해 <용문비갑>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서극-이연걸 콤비의 명플레이를 보여준 영화였고,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이어 적인걸 시리즈의 속편(실제로는 프리퀄)인 <적인걸 2>를 내놓았고, 이 영화도 대흥행했다.

2014년에는 배달의 기수류의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는 <지취위호산>(한국 개봉명 타이거 마운틴)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국공내전시기 인민해방군의 전신이었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을 다루는 영화였고 , 당시에는 중국 역대 흥행 10위에 올랐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영화의 성격상 한국에서는 흥행하지 못했다.[12]

2017년에는 크리스 우를 기용하여 <서유복요편>을 감독했다. 이것은 2013년작 주성치서유항마편의 속편이다. 이것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2018년에 만든 적인걸 시리즈인 <적인걸 3: 사대천왕>도 제작했다. 다만 당시 대박을 터트린 코미디물 서홍시수부를 만나 예상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다.

2019년에는 <등반자>(한국 개봉명 에베레스트)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우징, 정백연, 호가, 장쯔이, 장역이라는 초호화캐스팅[13]으로 기용해 만든 영화였고, 어느정도 흥행했으나, 당시에도 흥행 대작들(중국기장, 나와 나의 조국)을 만나 예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2.7. 2020년대

2020년에는 홍콩으로 돌아와 오우삼, 홍금보, 원화평, 두기봉 등과 합작하여 홍콩 역사에 관한 옴니버스 영화인 <칠인악대>를 제작했고, 이 영화는 2022년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칠중주: 홍콩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023년 5월에 개봉했다.

2021년 개봉예정인 장진호 전투를 다룬 중국영화 <장진호>를 천카이거와 함께 공동감독했다. 영화 금강천은 수입사가 상영을 보류했지만 이 영화는 수입된 바 없다.

3. 영화인으로서의 서극

서극은 감독-제작자(프로듀서)로서 1980년대 후반의 홍콩영화 중흥기를 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홍콩의 영화감독들은 대감독 휘하에서 조감독(조수)로 도제생활을 하면서 감독술을 배운 사람이 많았는데, 서극은 이와는 달리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로, 1960-70년대의 홍콩영화의 때깔을 일신했다. 이 때문에 홍콩영화는 아시아 트렌드를 선도하는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도 관심이 많았다. <천녀유혼>은 자체로도 명작이지만 홍콩영화의 특수효과의 신지평을 열었고, 《촉산》이나 제작한 《철갑무적 마리아》[14] 같은 작품에서 SFX 특수효과를 넣으려는 시도를 했다. 무협, 정극, 사극, 코미디, 멜로 모든 장르를 손댔으며, 1997년에는 애니메이션판 천녀유혼 등의 애니메이션이나 애니메이션 실사 합성 영화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무협물에는 두말할 것 없는 본좌급으로 80년대 초반 당시 초호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은 《촉산》, 1990년에 개봉한 《소오강호》와 그 후속작이자 임청하의 중성적인 면을 발굴한 《동방불패 시리즈》, 이연걸을 스타로 만들어 준 《황비홍 시리즈》까지 서극은 메가톤급 히트를 기록한 무협물을 많이 만들어 냈고 이들 영화는 현재까지도 중국 영화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만 오우삼과는 달리 현대 액션물은 별로 소질이 없는 듯. 할리우드에서 만든 두편은 거의 망작급이다.

제작자로도 역대급 히트작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바로 정소동 감독이 연출한 《천녀유혼》과 《황비홍 시리즈》. 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영웅본색》과 《영웅본색 2》. 호금전 감독이 연출한 《소오강호》등이 있다.

제작자로서 영화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나서 영웅본색 1~2을 함께 했던 오우삼은 물론이요 정소동, 이혜민 등 많은 감독들의 영화에 제작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배우들의 재발견에도 뛰어난 역랑을 발휘했는데 <도마단>과 <동방불패> 등으로 임청하의 중성적 매력을 한껏 끌어내기도 했으며 <소림사> 시리즈 이후 주춤했던 이연걸을 <황비홍> 시리즈로 부활시키고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 역으로 중견 배우 허관걸을 캐스팅하여 마치 소설의 영호충이 페이지를 찢고 튀어나온 듯한 일체감을 보여주었다.[15]

연기자 경력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는 연기자로도 곧잘 나왔다. 그런데 대감독이라 불릴만한 사람이 어째 나오는 영화들마다 항상 촐랑거리거나 뺀질거리는, 가볍고 유쾌한 역들을 많았다. 그가 직접 출연했던 영화들은《최가박당》, 《쌍룡회》, 《영웅본색》 등이 있다.. 영웅본색 1편에서는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등장해서 오디션에 지각한 주보의와 장국영 커플과 깨알 같은 웃음을 주기도 했었다. 아예 《촉산》에서는 죽은 척하다가 정말 죽는 적병사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고 《예스마담》 1편(원제목 황가사저) 등에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카메오성 출연뿐만 아니라 <철갑무적 마리아>나 <타공황제>같은 영화에서는 비중있는 주연급으로 나온다.

4. 중국 영화계 진출

2010년대 들어 중국 <지취위호산>, <등반자>, <장진호>등 중국 공산당의 입맛에 맞거나 중화 국수주의에 발맞춘 졸작을 제작하고 있다는 한국 팬들의 비판도 적지 않다.

이런 비판적인 팬들은 서극의 작품성이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떨어졌다는 주장을 하지만 홍콩에서나 할리우드에서나 서극의 작품은 복불복이었으며, 딱히 중국에서 제작한 작품들의 작품성이 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홍콩 시절이나 중국 시절이나 망하는 작품은 처절하게 망하는 게 서극 작품의 특징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적인걸 시리즈나 용문비갑은 그래도 수작이고 흥행에도 대단히 성공했다.

홍콩 영화는 90년대 초반 망했고, 이들 중 일부는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푸대접을 받았는데 발전이 지체되었던 중국 영화계는 이들을 적극 영입해서 후한 대접을 해줬다. 8,90년대 홍콩 영화의 정점을 이뤘던 영화인들 상당수가 중국 영화계에서 활약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실제로 이들은 홍콩에서 일본, 대만, 한국만을 바라보고 영화 제작을 했을 때보다 13억 인구의 중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면서 더 흥행하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있다. 그리고 서극은 홍콩에서 활동했을 때부터 반서방(특히 반미)적인 시각을 가졌다. 이는 황비홍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다.[16]

이런 행보를 두고 반중적인 영화팬들은 서극이 친중으로 전향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서극은 원래부터 반중적인 입장을 가진 바 없으며, 황비홍[17] 에서 보듯이 원래부터 반서방적인 시각을 상당히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이후 중국 영화계에서 활약하면서 중국 국수주의에 발맞춘 작품을 만들고 있다.

5. 사생활

홍콩의 영화제작자였던 시남생과 1996년 결혼했으나 2014년 이혼했다. 자식은 없다.

6. 여담

7. 필모그래피

7.1. 연출작

7.2. 출연작


[1] 표준 중국어로는 "쉬커"로, 광동어로는 '처이학'으로 발음한다.[2] 1970년대 미국에서 아시아계 차별은 굉장히 심했으며 과거에 있던 흑인 차별보다 더 심했을 정도 였다고 한다.[3] 한국에서는 이 金马奖(금마장)을 금마장"상"이라고 번역하는데,"奖"이 상이라는 뜻이므로 금마상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다.[4] 무려 <스타워즈> 촬영에 참여한 스태프들이라고 한다.[5] 하지만 제작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실제 수익은 적자였다.[6] 007시리즈의 악당들이 출연을 한다[7] 이 영화를 보면 패왕별희의 일제시기의 확장판 같다.[8] 감독은 무술 감독으로 유명한 정소동이 맡았다.[9] 베트남 전쟁이 배경[10] 감독은 이혜민 감독이고, 서극은 프로듀서를 담당했다.[11] <서극의 칼>은 장철의 영화 독비도(한국 개봉명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를 서극식으로 리메이크했다고 보면 되는 영화이다. 그 당시에 이렇게 짧고 흔한 1단어 제목 영화가 다 그랬던 것처럼 서극 이름 붙여서 장사하려고 '서극의 칼'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12] 원작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영되던 혁명 경극으로 강한 이념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인민해방군 장병들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념성이 별로 없다. 이들의 적도 국민당군이 아니라 마적단이다. 이들의 소속을 모르고 보면 그냥 7인의 사무라이와 비슷한 플롯이다. 여담으로 양가휘가 이 영화에서 악역으로 출연하는데 특수분장으로 배우 얼굴을 알 수 없게 한지라 대다수 관객들이 처음부터 그가 나오는걸 알지 못했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에 역할과 배우이름이 나오면서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양가휘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13] 위의 캐스팅이 중국 영화계에서 주연급이다.[14] 로보캅 인기에 편승해서 제작된 작품이라는 것이 중론인데 여기에 자쿠가 나온다. #[15] 이후 허관걸이 은퇴를 선언하자 서극은 이연걸을 <동방불패>의 영호충 역에 캐스팅해서 동방불패 신드롬을 완성시켰다.[16] 서극은 유학 직후 1970년대 잠시 미국의 중국계 언론사에서 일했는데, 몇년 일하지 않고 홍콩으로 되돌아온 것을 봐서는 서극이 미국생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80-90년대와는 달리 당시는 홍콩의 생활수준이 미국보다 여러가지로 열악했는데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17] 중국인 노농자들을 높은 임금을 미끼로 속여 데려가던 미국 인신매매업자가 등장한다.[18] 몇 안되는 서극의 무협 및 액션장르가 아닌 감독작으로 대만의 거장 엄호 감독과 함께 연출을 맡았고, 양가휘가 엄호 감독과 함께 각본을 썼고 주연을 맡았다. 자신이 진행하는 홍콩의 게임 프로그램 시청률이 떨어지게 되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중국을 방문하여 게임왕을 찾는다는 이야기인데, 서극의 연출작 중에 상당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19] 한국에서는 '화소도2'로 개봉되었다[20] 두기봉, 임영동과 같이 연출.[21] 7명의 홍콩 거장의 단편 영화를 모은 옴니버스 영화인데 여기에서 7번째 영화인 '심오한 대화'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