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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

두기봉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홍콩 금상장 시상식
파일:Hong_Kong_Film_Award_Trophy.png
감독상
제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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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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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
(미션)
이안
(와호장룡)
제22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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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24회
(2005년)
유위강
(무간도)
두기봉
(P.T.U.)
이동승
(몽콕흑야)
제24회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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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제26회
(2007년)
이동승
(몽콕흑야)
두기봉
(흑사회)
담가명
(아버지와 아들)

역대 대만 금마장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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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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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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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안화
(천언만어)
두기봉
(미션)
관금붕
(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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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제41회
(2004년)
제42회
(2005년)
유위강
(무간도)
두기봉
(대사건)
주성치
(쿵푸허슬)
제48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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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허안화
(심플 라이프)
두기봉
(탈명금: 사라진 천만 달러의 행방)
차이밍량
(떠돌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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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琪峰
두기봉 | Johnnie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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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1700> 출생일 1955년 4월 22일 ([age(1955-04-22)]세)
출신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구룡반도 삼서이보구
국적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
[[틀:국기|]][[홍콩|]][[틀:국기|]]
학력 중학교 중퇴
신체 178cm

1. 개요2. 감독으로서의 성향3. 작품들
3.1. 영화3.2. 드라마

[clearfix]

1. 개요

홍콩영화감독.[1]
80~90년대 한국에서 서극, 오우삼, 임영동 등의 홍콩 장르 감독에 대한 영화팬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는 다른 걸작의 속편을 만드는 상업 영화 감독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홍콩 영화인들이 홍콩의 중국 반환 전후로 너도나도 해외로 진출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홍콩 영화계를 지키며 영화를 만들더니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들어설 즈음에는 문득 거장이 되고 말았다.[2]

작품의 수준은 그저 그런데 경쟁자가 없어져서 상대적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도 아니고, 갑자기 스타일을 바꾸며 환골탈태한 것도 아니고, 데뷔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통하여 갈고 닦더니 어느 순간 대가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에서 '노력형 대가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지금은 소위 홍콩 느와르라고 불리는 홍콩식 범죄 장르영화를 만들면서도 이례적으로 칸, 베니스, 베를린을 비롯한 세계적인 국제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꾸준히 초청받고 있으며, 세계 유수의 평론가들에게도 '거장'으로 칭송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2. 감독으로서의 성향

1980년에 〈벽수한산탈명금〉으로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48편의 극장용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1986년에 두 번째 장편 〈개심귀당귀〉를 내놓을 때까지의 공백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신작을 내놓고 있다.[3] 생존한 감독 중 이 정도로 작품 활동이 빠르고 꾸준한 사람은 미이케 다카시, 홍상수,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도인 듯.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속도가 빠른 것으로도 유명한데, 가령 대표작 중 하나인 1999년작 〈미션〉은 촬영 기간이 19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 스타일이 카메라를 막 들이대서 빠르게 찍고 편집실에서 이리저리 붙여보는 방식이 아니라 매 쇼트의 구도와 순서를 엄격하게 정하는 식임을 생각하면 경이로울 정도다. 다만 촬영에 앞서 준비를 철저히 하는 모양.

그런데 두기봉 감독은 배우들에게 대본을 안 준다. 촬영 당일 아침에 그 날 찍을 분량 대본만 줄 뿐, 전체 영화의 흐름 같은 건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다만 프랑스와 합작한 최근작 〈피의 복수〉의 경우 프랑스의 국민 가수이자 배우인 조니 할리데이가 주연을 맡았는데 할리데이에게만은 전체 대본을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도 할리데이를 제외한 다른 중화권 배우들에게는 대본을 주지 않았다.
이런 식의 작업은 한국의 홍상수 감독도 곧잘 하는 일이지만 일상의 우연을 열어놓고 받아들이는 작품이 아니라 엄정하게 계산된 장르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왕가위 감독과 똑같은 성향이지만, 왕가위 감독은 배우들과의 사전 협의는 커녕 배우들의 의견은 배제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 때 까지 수십번 넘는 동작을 반복하게 하여 배우들을 지치게 하지만 두기봉 감독은 배우들의 창의성을 존중하여 서로 협의하면서 컷을 맞춰나가는 점이 차이를 보인다. 때문에 왕가위 감독과 계속 작업하는 배우가 극 소수이거나 싫어하는 배우가 많은 반면, 두기봉 감독이 엄격하고 무서운 성격을 보여도 가장 좋아하고 계속 작업하는 배우가 많은건 당연지사.[4]

더불어 한 번에 여러 작품을 만드는 다작 일도 곧잘 한다. 배우 및 스탭들의 일정에 따라 촬영 계획을 잡은 다음 촬영이 없는 빈 시간에 다른 영화를 찍는다. 특히 하비 무비(hobby movie)라고 하여 '그냥 내가 정말 만들고 싶기 때문에 만드는, 취미로 만드는 영화'가 따로 있는데 이 경우 몇 년에 걸쳐 시간이 날 때마다 띄엄띄엄 촬영을 해서 영화를 완성하기도 한다. 〈PTU〉가 대표적인 예.(촬영 3년 걸렸다) 직업도 영화 만들기고 취미도 영화 만들기인, 영화에 미친 감독이라 할 만하다.

감독으로서의 자의식도 대단하다. 홍콩의 TV 방송국 TVB에서 일하던 시절 TVB 연기자 훈련반에 들어갔는데[5] 그가 TVB 연기자 훈련반에 들어간 이유는 연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촬영 현장에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또 TV 드라마 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것도 TV 드라마 감독은 기교를 배운 다음 시키는대로 찍기만 하면 되는데 영화감독은 전체 기획을 총괄하면서 폭 넓은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감독이라면 촬영 현장의 지휘뿐만 아니라 작품의 기획, 각본, 제작 등의 단계를 모두 관리하며 자신의 개성을 불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두기봉은 데뷔 이후 두 번 영화 작업을 멈춘 적이 있다. TVB의 스타 배우 유송인(劉松仁)의 눈에 띄어 25세의 젊은 나이에 운 좋게 데뷔작 〈벽수한산탈명금〉으로 입봉한 후 영화 연출과 TV 드라마 연출은 다르며 자신은 아직 영화를 만들 실력은 못 된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TVB로 돌아갔고[6], 또 1992년 홍콩 최고의 흥행작인 '심사관'의 감독은 자신이고, 제작과정에서 주연 배우인 주성치와 트러블도 심했는데도 영화가 크게 성공하자 전부 자기 덕분에 흥행에 성공한 거라고 언급하는 주성치와 실제로 그 공이 배우에게 돌아가는 모습[7], 1993년 '동방삼협' 시리즈를 연출하면서 여배우들과 겪은 일들을 계기로 홍콩영화계가 천문학적인 몸값을 지닌 배우들에게 끌려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스타들에게 끌려가면서 영화를 만들 것인가, 스타가 없는 대신 나만의 스타일을 지닌 영화를 추구할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3년 동안 연출에서 손을 놓았다.[8] 결국 고민 끝에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는 직접 영화제작사를 세워버렸다. 그 정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엔터 산업 내에서 살아남는 데에도 신경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종종 스타를 중심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도 연출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자신의 제작사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제6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피의 복수〉가 흥행에 실패하자 바로 데이트용 영화 〈단신남녀〉를 만들었다. 자기가 운영하는 제작사가 있어야 감독으로서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느와르 액션영화 <익사일>은 제63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영화를 만들 때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면 양조위, 양가휘, 장만옥, 매염방, 주성치, 유덕화, 고천락, 정수문 같은 스타들이 출연하는 영화도 있지만 개성있는 배우들을 주로 출연시키는 편이다. 황추생[9], 임달화[10], 임설, 장가휘, 장요양, 유청운, 오진우[11], 소미기 등... 그 중에서도 임달화와는 8편[12]의 영화를 같이 찍으며 페르소나로 활용하였다.[13]

자신의 영화사 밀키웨이 이미지를 같이 창설한 위가휘와 공동감독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 외에 정조강 촬영감독, 데이비드 M. 리처드슨 편집감독, 자비에 자모스 음악감독과 많이 일하는 편이다.

보통화 발음 두치펑과 영어식 이름 조니 토로도 알려졌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이름이 조니 토로 굳은 모양이다.

2010년대에도 거의 매년 감독 또는 프로듀서로 작품을 내어 놓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홍콩 영화가 잘 개봉되지 않아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최근작은 홍콩의 여러 감독들 (홍금보, 서극, 원화평)등과 합작해 만든 <칠중주: 홍콩 이야기 (Septet: The Story of Hong Kong, 七人樂隊, 2020)> 원제: 칠인악대로 2022년에 개봉했다.

제73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홍콩 정권의 영화 검열과 탄압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남겨 화제가 되고 있다.

3. 작품들

3.1. 영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igHeat.jpg
* 대행동 (The Big Heat, 城市特警, 1988) 본 제목은 성시특경(城市特警). 한국 개봉제목은 대행동. 자세한 건 항목을 참고할 것.
파일:external/extmovie.maxmovie.com/bda3eb9c817363b3c325590f21127001.jpg
* 천장지구 (A Moment Of Romance, 天若有情, 1990) 원제목은 천약유정(天若有情)인데 한국에선 이 제목으로 개봉했다. 영웅본색 시리즈의 영향이 강해지자, 홍콩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진다. 그 영향이 강한 영화. 제작만 했으며 감독은 진목승[14] 1997년에 aTV에서 40부작 시리즈로 제작되어진 동명의 드라마는 이 작품과는 별개의 작품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sino_Raiders_2.jpg
* 지존무상 2 - 영패천하 (Casino Raiders 2,至尊無上II之永霸天下, 1991) 한국 개봉명은 지존무상 2 - 영패천하. 유덕화, 왕걸 주연의 영화로, 왕정, 향화승이 감독을 맡았던 지존무상(1989)과는 일부 소재와 설정이 유사하나, 전작과 무관한 속편이다.[1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Mission_1999.jpg
* 미션 (The Mission. 鎗火, 1999) 황추생, 임달화, 오진우 주연의 느와르 영화. 제 37회 금마장 감독상[16], 제 19회 홍콩 영화 금상장영화제(2000년)에서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두기봉을 단숨에 홍콩의 차세대 대표 감독 반열에 오르게 만든 작품.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흑사회 보스의 보디가드로 임시 고용된 다섯 남자들의 이야기. 84분의 짧은 작품이지만, 담백하고 건조한 느낌의 시나리오와 쇼핑몰 총격전을 필두로 하는 참신한 화면 구성이 일품인 영화이다. 키보드로만 이어진 단조로우면서도 묘한 테마곡이 작품 내내 흐른다. 참고로 보스의 숙부 역할로 나오는 배우는 왕천림으로 과거의 다작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으며, 그의 아들이 다름 아닌 왕정 감독이다. 왕천림은 이후에도 영화 <흑사회>에서 원로 역할로 나온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영향을 받은 영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unning_Out_of_Time_DVD.jpg
* 암전 (Running out of time, 暗戰) 시리즈 (1999, 2001)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영화 시리즈는 두기봉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주연은 유청운, 범인 역에는 유덕화(1편), 정이건(2편). 유덕화는 이 영화 출연으로 제 19회 홍콩 금상장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 니딩 유 (Needing You..., 孤男寡女, 2000) 유덕화, 정수문 주연의 멜로영화. 위가휘와 공동 감독을 했다. 2000년 홍콩 박스오피스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밀키웨이 이미지'의 재정상태 개선에 상당한 도움을 줬다.
파일:external/cfs10.blog.daum.net/47a6c9be7d76e&filename=96811135174189-0.jpg
* 흑사회 시리즈 (Election, 黑社會, 2005, 2006) 임달화, 양가휘, 고천락 주연의 범죄 영화. 잔혹하기 그지없는 중국 흑사회를 다룬 영화. 홍콩 삼합회의 보스 선출을 둘러싼 폭력배들의 권력투쟁을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홍콩-중국 관계를 은유적으로 비판해낸 두기봉 최고의 수작이면서 홍콩 갱스터 영화의 걸작으로 칭해진다. 1편은 제58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다. 혹자는 영웅본색(홍콩 반환 전)과 무간도(반환 직후)를 이어 현재 홍콩을 그리고 있는 새로운 홍콩느와르의 계보라 평하기도 했다. 제25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양가휘)을 수상하고, 제42회 대만 금마장 시상식에서 각본상, 음향상을 수상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뽑은 21세기 영화
파일:external/lovecinema.co.kr/750975741_20ef8fa0_%25C0%25CD%25BB%25E7%25C0%25CF%2B%2528Exiled%252C%2B2006%2529.jpg
* 익사일 (Exiled, 放逐, 2006) 아시아의 알 파치노라 불린 황추생이 나온 액션영화. 제63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김혜리가 '좋은 폼, 탁월한 폼, 환상적인 폼' 으로 8점을 주고, 이동진이 '100점짜리 액션 시퀀스들이 있다.'고 8점을 주고 호평을 할 정도로 슬로우모션이 나오는 꿈결같은 총격전이 엄청 정교하고 화려하다. 결말부의 주인공 일행 4명이 레드불 캔을 찬 순간 동안의 무차별 슬로우모션 총격전 (수십명의 인원이 피아식별도 어렵게 총을 쏴댄다. 몸에서 나오는 빨간연기()가 나오는게...)가 인상적이다. 미션의 속편으로 기획했다가 그냥 별개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그래도 미션과의 연관성이 꽤 있는 편이다.

3.2. 드라마



[1] 주윤발임달화하고 동갑이다[2] 비슷한 인물로 유위강 감독이 있다. 무간도 트릴로지로 한때 느와르 거장 소리를 들었으나 후기작들은 두기봉 감독에 비하면 한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는다.[3] 1994년과 2010년에 신작이 없는데, 대신 1993년과 2009년에 각각 다섯 작품에 감독 및 제작자로 참여했다.[4] 유명한 홍콩 배우들중에서도 왕가위 감독과 협업하지 않은 배우가 의외로 많다.[5] 당시 제 4기 졸업생(1975년 졸업)으로 유명한 동기생은 반가덕(潘嘉德)[19], 뇌수청(賴水清)[20], 유사유(劉仕裕)[21], 그리고 여배우 황행수(黃杏秀) 등이 있다. 한 기수 위의 선배로는 주윤발, 임영동, 오맹달 등이 있다.[6] 돌아갔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지 않은게 <벽수한산탈명금>을 만들 당시에도 그는 여전히 1986년까지 TVB 소속인 상태에서 TVB의 흑역사 윤류전(輪流傳)[22], 천왕지왕, 사조영웅전, 녹정기, 의천도룡기 등의 연출을 맡았었기 때문이다.[7] 제작과정에서도 언론들이 주성치만 강조해서 상대역인 매염방이 서운해했었다고 밝혔다. 또한 주성치가 1993년 제12회 금상장 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연예계에서 '남우주연상은 주성치가 확실히 받을것이다'식의 기사가 보도되었을때 두기봉은 '후보에 올랐다고 바로 상을 받는다는 법은 없다'며 디스했다. 그리고 실제로 주성치는 상을 받지 못했다.[8]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직접 발언한 내용이다. 그런데 필모그래피를 보면 1993년과 1995년에 작품이 있기 때문에 1년만 손을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아마 당사자는 이 시기를 93~95년에 걸친 기간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차이일 것이다.[9] 무간도 시리즈의 황국장 역할.[10] 첩혈가두에서 킬러 역할로 처음 알려졌으나 그 후 한동안 그저그런 영화에 출연하다가 두기봉 영화에 출연하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우리에게는 도둑들의 첸 역할로 익숙하다.[11] 무간도 2의 예영효 역할.[12] 피의 복수, 스패로우, 트라이앵글, 흑사회1, 2 익사일, 대사건, PTU[13] 이와 반대로 양조위와는 ‘암화’ 이후로는 같이 작업을 하지 않고, 주성치와는 ‘심사관’ 이후로는 함께 작업을 하지 않는 중이다. 주윤발과는 초창기에 주로 작업했다.[14] 홍콩 방송국 출신의 영화감독. 크레딧에 안 올랐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연출했다는 얘기가 있다. 2020년 8월 23일 말기 비인암으로 타계.[15] 엔딩이 비극적이다.[16] 이때 경쟁작이 <와호장룡>과 <화양연화>였다.[17] 4개는 비디오용, 1개는 공식 속편이다.[18] ViuTV 방영 대기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