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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왕가위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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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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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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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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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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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럼록만
(콜드 워)
왕가위
(일대종사)
허안화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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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王家衛, 王家卫간체|Wong Kar-w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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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8년 7월 17일 ([age(1958-07-17)]세)
중국 상하이시
국적
[[틀:국기|]][[홍콩|]][[틀:국기|]]
수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2006년 수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코망되르[1] (2013년 수상)
직업 영화 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신체 183cm[2]
활동 기간 1982년 – 현재
학력 홍콩이공대학교 (학사 / 1976년-1980년)
하버드 대학교 (명예예술박사[3] / 2018년)
종교 불교
배우자 찬예청(陳以靳)

1. 개요2. 특징
2.1. 연출 특징2.2. 영향력 및 평가
3. 한국에서의 인기4. 비판5. 필모그래피6. 수상 경력7. 여담8.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90년대 아시아 영화의 아이콘인 감독이다.

1958년 7월 17일 상하이에서 태어나 5살 때 홍콩으로 이주해 자랐다. 이 때문에 인터뷰 등에서 광둥어보통화에 모두 능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학에서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의 영화는 비선형적인 내러티브, 분위기 있는 음악, 대담하고 채도가 높은 색채를 사용한 생생한 촬영이 특징이다. 홍콩 영화의 중추적인 인물인 왕가위는 현대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02년 Sight & Sound가 실시한 지난 25년간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설문조사에서 3위에 올랐다. 그의 영화는 국내외 베스트 오브 리스트에 자주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가위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은 그는 데뷔작인 범죄 드라마 열혈남아(1988)로 감독으로 전향했다. 열혈남아는 홍콩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왕가위는 범죄와 액션 영화가 주를 이루던 당시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좀 더 개인적인 영화 제작 스타일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 첫 번째 작품인 아비정전(1990)은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1991년 홍콩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의 다음 작품인 동사서독(1994)은 모호한 줄거리와 무협 장르에 대한 비정형적인 해석으로 인해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촬영과 후반작업에 지친 왕가위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작은 규모의 영화인 중경삼림(1994)를 연출했다. 보다 경쾌한 분위기를 표현한 이 영화로 왕가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95년 홍콩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왕가위는 1995년 범죄 스릴러 타락천사를 후속작으로 내놓았다. 처음에는 비평가들에게 미지근한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타락천사는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컬트 고전으로 여겨지며 특히 왕가위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드라마 해피 투게더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왕가위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2000년 드라마 화양연화는 화려한 영상미와 섬세한 스토리텔링으로 찬사를 받으며 왕가위의 트레이드마크인 영화 제작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확립했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2046(2004)과 일대종사(2013)가 있으며, 두 작품 모두 전 세계적으로 수상 및 노미네이트되었다.

2. 특징

2.1. 연출 특징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허무, 고독의 주제를 다룬 로맨스, 드라마 영화들을 주로 연출하였으며, 각본 역시 직접 집필하였다. 독특한 영상미로 90년대 중후반에 엄청난 붐을 일으켰으며, 90년대 문화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필름의 프레임에서 중간중간 프레임들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동일한 프레임을 채워 넣음으로써[4] 인물의 동작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이고, 인물/사물의 윤곽선과 빛은 잔상을 남기면서 흘러가는 스텝프린팅 기법으로 유명한 감독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왕가위 감독, 그리고 그와 같이 여러 차례 일한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처음 도입한 기법은 아니고, 이미 뮤직비디오와 CF에서 쓰이던 기법이었으나, 영화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시간이라는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영화를 "기억에 관한 예술"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왕가위 감독이다.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 타락천사 등 그의 여러 작품에서 이 스텝프린팅 기법을 통해 인상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어냈다.

나레이션과 독백이 영화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음악선곡에 탁월한 센스가 있단 점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감독들과 비슷하다. 실제로 왕가위 감독은 김용, 무라카미 하루키 등 문학 작가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대사들 역시 광장히 시적이다.

2.2. 영향력 및 평가

아시아는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최고 감독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아 왔다. 미국에서 나왔던 '중경삼림' 렌탈 비디오와 DVD를 보면 앞부분에 쿠엔틴 타란티노가 나와서 영화평을 한다. 타란티노 본인이 워낙 영화광인 이유도 있지만 타란티노를 통해 북미에서 배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6년에는 중화권 인물 최초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으며, 2012년 '일대종사' 북미 개봉 때는 마틴 스코세이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홍보대사 노릇을 해주기도 했다. 2002년 영국 영화 협회(BFI)에서 선정한 지난 25년 동안 가장 위대한 감독 3위로 선정되기도 했다.#[5]

그의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퇴색하거나 낡은 느낌을 주지 않고 젊은층에게 꾸준히 어필하는 특징을 가졌다. 지금도 왕가위 감독이 영화 무대인사나 좌담회를 하면 젊은 영화팬들이 많이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동아시아권의 젊은층에서 그의 꾸준한 인기는 놀라울 정도다. 그의 영화적 문법과 스타일이 명확하게 정립된 중경삼림의 경우, 90년대 중화권은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하여, 중경삼림의 아류작들이 한국 문화계에서도 엄청나게 쏟아졌다. 당시 트랜디함을 표방하던 광고, 드라마, 영화들 중에 크든 작든 왕가위 특유의 카메라 워크, 편집, 조명 등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기이할 정도의 갑작스런 신드롬이 생기기도 했는데, <중경삼림>이 개봉했던 1994년에서 무려 24년이 지난 2018년 부터 일본에서 크게 흥행한 것. 물론 90년대 일본에서도 왕가위 감독 작품은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현재가 반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넷플릭스 시장을 크게 성공 시키는데 공로를 세운 영화로 설명된다. 일본에서 아시아 국가 문화 컨텐츠로 따지면 역대 최고 흥행. 어린 일본 여성 중에 중경삼림을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설명이 나오는데, 2부의 시작을 알리는 배경 음악 캘리포니아 드림이 나오면서 양조위가 걸어오는 장면을 수백번 돌려 보기도 하고 그냥 계속 눈물이 나온다는 감상평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지만 현재 상황에 대한 절망과 80년대~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한탄의 감성을 이 영화에 모두 쏟아 내고 있다고 한다.

90년대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낸 동아시아의 영화감독 중 왕가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20세기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이며, 영화 예술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영상과 연출력을 끌어냈다는 평.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인물의 주관적인 기억으로 서사를 끌어가는 방식은 획기적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잘 구사되기 힘든 방식이기도 하다. (잘못 구사하면 엉망진창 되기 십상)

3. 한국에서의 인기

1995년을 전후로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과 '타락천사'가 보여준 감각적인 영상과 센티멘탈리즘에 크게 경도되었고, 한동안 왕가위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흉내표절내는 모방작들이 범람했다. 대표적으로 최진실, 장동건 등 탑스타 배우가 출연한 97년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은 노골적인 왕가위 감독스타일의 표절작. 당시에 유명 영화잡지에서도 대놓고 깠다(...)[6] 흑역사 더 창피한 점은 왕가위 감독도 이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 인터뷰에서 자기 영화와 비슷한 한국 영화를 본 적 있다고 했으니... 국제망신.

참고로 중경삼림이 개봉한 1995년 한국 영화 흥행작은 '닥터봉', '돈을 갖고 튀어라'등의 코메디 물이었고, 이런 가벼운 상업성 영화가 아니면 굳이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돈주고 보는 것을 아까워 할만큼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이 별로 좋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에 영상미와 감성을 세련되게 연출한 왕가위 영화의 등장은 당시 X세대에게 컬쳐 쇼크에 가까웠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 CF들마저 왕가위 감독의 스타일을 참고했다. 한 예로 김선아가 나와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는 광고 멘트로 유명한 화장품 CF는 '타락천사'의 한 장면을 따라한 것. 그 당시 온갖 영상물들이 왕가위 특유의 핸드헬드와 스텝 프린팅 촬영 기법을 따라하며 도배되었다. TV문학관같은 단막극 드라마까지 그랬으니 말 다 했다. 하도 왕가위 모방이 만연해서 당시 한국 대중문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될 정도였다. 뉴스 라이브러리

지금은 폐간된 키노스크린 등 영화잡지에선 수시로 왕가위 감독 특집찬양 기사를 실었으며,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왕가위 감독의 열혈팬이자 영업왕(..)으로 불릴정도로 왕가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정성일은 왕가위 DVD의 코멘터리를 담당했고 국내에서 왕가위 감독과 함께 GV 대담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 속 OST 인기도 굉장해서, '중경삼림'에 삽입된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히트치자 이 곡을 부른 마마스 앤 파파스는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렇듯 왕가위 감독이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고, 마니아층도 두텁게 형성된 감독이다.

다만 예술적인 성취에 비해 대중적인 흥행감독은 아니다. 왕가위 감독 영화들은 아주 망했다가 아니면 그냥 그랬다 흥행 정도를 거둔게 전부다. 중경삼림은 한국에서는 서울 18만 관객을 기록했다.(타락천사 16만명, 동사서독 14만명) 90년대 당시 서울 흥행집계만 추산되었다고 해도 당시 서울 20만 이상은 봐야 흥행했다던 시절이다. 하지만 극장보다는 비디오로 꾸준히 인기와 마니아를 모았다.

2010년대 이후로 사실상 작품을 찍지 않고 있어서 메이저 극장가에서 보기 힘들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꾸준한 마니아층 확보로 전작들이 독립영화관 등에서 꾸준히 재상영되는 감독이다.

4. 비판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곤 했다고 한다. 세세하게 계획을 짜기 보다는 대충 기획만 한 뒤 촬영을 하면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스타일이었는데, 무엇보다 스케줄 문제로 배우들이 애를 많이 먹었다고.[7] 게다가 당시 홍콩영화의 촬영 기간은 고작 1~3개월 이내였던터라 더더욱 이러한 면이 두드러진다. 특히, <해피 투게더> 촬영시 그 문제가 심해서 장국영은 콘서트 준비를 위해 촬영 중간에 홍콩으로 돌아갔으며 동사서독의 촬영이 길어지면서 당대 최고 배우였던 왕조현이 하차하기도 했다.[8]

게다가 기간만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촬영구상 자체가 즉흥적이고 대본이 없는지라 영감이 떠오른 곳에서 바로 각본을 짜고 스탭들을 불러모아 촬영을 시작하는 식이라 양조위 같은 경우는 해피 투게더 촬영 당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할때까지도 이 영화가 뭔 내용인지도 모른 채 불려왔다고 한다. 또한 배우와 사전 협의 없이 자신의 고집으로 같은 동작을 수십번에서 수백번을 촬영하기로 악명이 높다. 예를 들어 동사서독 촬영당시 양가휘는 무려 한 컷당 70여 회나 같은 장면을 촬영하여 출연진들 중에서 고생을 심하게 했다. 또한 배우와 협의점을 찾는게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 중시해서 그와 두번 이상 작업한 배우가 극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왕가위는 직접 영화사를 차려 제작비와 제작기간 문제를 없애 의도한 대로 영화를 만들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후기로 갈수록 과작 감독이 돼가는 경향이 있다.

세계적인 영화감독들이 그렇듯이 자국 현지에서의 평이 박했다. 왕가위의 발견은 사실 서양권과 한국, 일본 같은 동북 아시아의 시네필들이었다.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개봉 당시에, 홍콩영화는 액션영화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의 외면 속에서도 평론가들과 시네필들은 극찬했다.

도회적 감성이 다소 유치하다는 의견이 있으나 칸을 열광시킨 <화양연화>부터 그러한 비판은 깨끗이 사라지고, <일대종사>에서는 홍콩의 역사적 정체성을 무술인을 통해 탐구하는 깊이까지 확보했다.

영화 외적인 문제지만, 구작 복원을 할때 색감이나 화면비를 뜯어고치는 경향이 심해 원성이 높은 감독에 속한다. 게다가 그 뜯어고치는 방향이 디지털 수정주의로 대표되는, 원본을 왜곡하는 쪽에 가까워 욕을 들어먹기도 한다.[9] 타락천사 복원판은 아예 화면비까지 바꿔버렸을 정도. 가뜩이나 시각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부류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이런 논란이 격렬한 편에 속한다.

5. 필모그래피


왕가위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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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000><width=200><bgcolor=#a83c3e> 파일:As Tears Go By Logo 6.png ||<width=200><bgcolor=#2b7e8f> 파일:Days of Being Wild Logo 2.png ||<width=200><bgcolor=#f4de43> 파일:중경삼림 로고2.jpg ||
열혈남아
(1988)
아비정전
(1990)
중경삼림
(1994)
파일:Ashes of Time Logo.png
파일:Fallen Angels Logo 2.png
파일:Happy Together Logo 2.png
동사서독
(1994)
타락천사
(1995)
해피 투게더
(1997)
파일:In the Mood for Love Logo 3.png 파일:2046 Logo.png 파일:My Blueberry Nights Logo 3.png
화양연화
(2000)
2046
(2004)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2007)
파일:The Grandmaster Logo.png
일대종사
(2013)

상세정보 링크 열기
연도 제목 역할 비고
제작 연출 각본 기획 원안
1988년 열혈남아 O O [10]
1990년 아비정전 O O
1994년 중경삼림 O O
동사서독 O O
1995년 타락천사 O O
1997년 해피 투게더 O O O
2000년 화양연화 O O O
2004년 2046 O O O
에로스 O O [11]
2007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O O O
2008년 동사서독 리덕스 O O
2013년 일대종사 O O O
2023년 블러섬 O

6. 수상 경력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91년 제 28회 금마장 감독상 아비정전
제 10회 홍콩금상장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1994년 제 5회 스톡홀름영화제 FIPRESCI 심사위원 중경삼림
1995년 제 14회 홍콩금상장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1997년 제 50회 칸 영화제 감독상 해피 투게더
2000년 제13회 유럽 영화상 유럽영화아카데미 비유럽영화상 화양연화
2008년 제 19회 스톡홀름영화제 비전상
2013년 제 50회 금마장 관객상 일대종사
2014년 제 8회 아시안 필름 어워드 최우수작품상
최우수감독상
제 33회 홍콩금상장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제 23회 중국금계백화영화제 작품상
제 45회 인도국제영화제 공로상
2006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7. 여담

"90년대 홍콩, 실연당한 경찰 223은 우연히 금발의 여성 킬러를 만나 따뜻한 하룻밤을 보낸다. 역시 마찬가지로 실연을 겪은 경찰 663은 어떤 몽중인의 침입으로 인해 일상이 점차 변화된다. 2036년 충칭, 소년 샤오첸과 메이는 유전자에 의해 짝이 정해지는 것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운명을 찾기로 결심한다."

* 개봉한 지 20년이 지난 그의 작품들이 리마스터로 재개봉하자 단숨에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는 등 건재함을 과시했다. 현재에도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입증한 셈.

8. 외부 링크



[1] 1등급에 해당한다.[2] 프로필상 키이고, 187~8cm 새뮤얼 L. 잭슨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키는 187~8cm으로 보인다.# 존 파워스가 쓴 인터뷰집에는 180cm로 소개되어 있다.[3] 아시아 감독 가운데 최초로 수여받았다.#[4] 쉽게 말해 초당 프레임을 손실시키는 방식[5] 1위 마틴 스코세이지, 2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6] 당시의 핸드헬드만 차용했을 뿐, 영화의 수준은 왕가위의 표절 정도가 아니라, 그냥 아류작이라고 봐야 한다.[7] 무엇보다도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홍콩의 스탠리 큐브릭이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고.[8] 왕조현의 하차는 스케줄 문제에다 유부남과의 스캔들까지 터졌기 때문이다.[9] 사실 이건 왕가위 본인 뿐만이 아니라 복원을 담당하는 복원업체에도 책임이 있기도 하다. 컬러 그레이딩 참조.[10] 대만에서 수입하면서 붙여진 제목으로, 한국은 1989년에 대만판을 수입하면서 제목도 대만판 제목으로 수입하였다. 원래 제목은 몽콕 카르멘(旺角卡問;한국어로 읽으면 왕각가문이다. 한국에서는 卡이 '잡(지킬 잡)'으로 많이 읽혀서 그런지 몽콕잡문이라고 적힌 곳이 많다. 卡은 이 음역자로 쓰일 때는 '가(음역자 가)'로 읽는 것이 맞으며, '卡問(간체자로 卡门)'이라는 단어는 카르멘(Carmen)을 음차한 단어기에 영화의 제목은 '몽콕 카르멘 혹은 몽콕가문'으로 읽어야 한다.)[11] 옴니버스 단편-그녀의 손길[12] 2046이라고 한다.[13] 하나의 스토리를 조각내어 각 타이틀마다 여러 명감독들이 각자 감독해서 완성한 옴니버스 필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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