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정현(1958년 10월)
1. 정계 입문 전
1958년 10월 13일[1],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동암리에서 아버지 이재주(李在注, 1931. 12. 26 ~ 2017. 3. 6)와 어머니 목천 장씨(木川 張氏) 장귀옥(張貴玉, 1940. 7. 4 ~ )[2]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이자 맏이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목사동면 동암리는 그나마도 13가구가 떨어져 사는 두메산골 마을이었다.[3] 이정현의 양친은 아들에게 특별히 간섭을 하지는 않았지만, 큰 목소리로 국어책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숙제로 시키고, 잡지와 신문을 정기 구독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곡성 목사동초등학교, 순천주암중학교,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16회)를 졸업하였다.국민학교 3학년 때 양회수 전 국회의원 등 정치인 합동유세 현장을 보고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곡성군 목사동면 주민들의 가장 큰 소원은,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라는 손편지를 써서 청와대 주소도 모른 채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귀하"라고만 써서 보냈는데, 대통령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받아보고 전남교육청을 통해서 목사동초등학교장에게 뭔가 다른 아이니 잘 키우라는 격려를 했으며 교장이 이정현의 집에 찾아와 이정현의 부친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부친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4]
고등학교 때 고향 곡성을 떠나 광주로 유학을 오면서 성적도 중하위에 머물렀고,[5] 목욕탕에 가는 것을 비롯해 아무도 없는 공중전화박스에서 수화기에 대고 혼자서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회고한다. 웅변학원을 다녔고, 전국 웅변대회에서 고교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 관련 기사를 꾸준히 봤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는데, 1차 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2차 신체검사에서는 시력이 나빠서 물먹었다.[6] 그 뒤 재수를 한 끝에 권노갑, 김동영, 최형우, 황명수 전 의원 등 네임드 정치인들을 여럿 배출한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에 78학번으로 진학했다. 1980년 6월 25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1군단 예하 제1포병여단 제355포병대대[7]에서 포병으로 복무했고, 1982년 11월 11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2. 정계 입문 후
동국대학교 4학년 때인 1985년, 광주시장과 전라북도 부지사를 역임했던 구용상이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담양군-곡성군-화순군에 출마하자 '정치를 똑바로 해주시라'는 6장짜리 손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초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구용상 의원이 생각지도 않게 이정현에게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라고 제의하여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처음에는 구용상 의원의 전화받는 비서, 부인[8] 수행비서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서울 비서관을 따로 두는 것이 상례인데, 이정현은 항상 구용상 의원을 따라다니면서 비서관 역할을 했고, 구 의원 집에서 잠을 자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때로는 구용상 의원에게 인간적으로 모욕적인 얘기를 들으면서까지 혼이 나서 화장실에서 하루에 3번 운 적도 있었다고 토로한다. 억울해서 화장실에서 울다가도 세수를 하고 기어코 돌아갔다고 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호남에서 평화민주당의 돌풍으로 구용상 의원이 낙선하자,[9] 이정현은 민주정의당 특채로 입사했다. 당직자 최말단인 간사병으로 당직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공채들 사이에서는 전라도 출신이라고 근본 없는 놈이라는 눈초리를 받으면서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애초부터 경상도가 기반인 정당에서 전라도 출신이었던 그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당 출입기자들에게조차 반말을 들으면서 심부름까지 했다고 한다. 출처(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의 회고)
당시 집안에 대해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해서 지하 셋방과 옥탑방을 전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후 정당에서도 위치가 승진하면서 살만해졌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아내의 몸이 상당히 상했다고 한다.[10]
이런 천대에 오기가 발동한 이정현은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은 물론 주말도 평일과 똑같이 일하는 습관을 무려 15년간 했다고 한다. 이정현은 매일 출근길에 신문과 라디오의 기사와 뉴스를 꼼꼼히 파악한 다음 그것을 정리해서 분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늘상 정치 사례들을 분석, 정리했고, 그런 사례들을 정리하고 분석한 경험을 토대로 현실 정치에 다시 적용해서 분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서청원 의원에게 매일 3장짜리 정세 분석 및 전략기획 보고서를 전달했고, 그 분석 자료 때문에 지도부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할 것이 보내달라고 해서 당의 고위직 사람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한 단계 한 단계씩 승진하면서 전략기획, 정세분석, 대변인실, 여의도연구소 기획팀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이후 광주 서구로 내려가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한 2004년, 당대표가 된 박근혜의 눈에 들었고, 친박 정치인이 된다.
그 시절 이정현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는 사진 중 하나. 왼쪽 구석에 깨알같이 등장한다. 이 사진이 찍힌 2007년 5월에서 1년이 지난 2008년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22번을 받았는데 딱 22번을 끝으로 비례대표 당선이 마감되어 막차로 초선 의원이 되었음을 고려하면 저렇게 찍힐 정도로 박근혜의 지근거리에 있었으니까 비례 22번이라도 받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11]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두 달밖에 안 된 허니문 선거라 이명박 대통령 및 친이가 친박을 공천학살하던 중에도 정말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다.[12] 박근혜 대표 왼쪽의 인물은 바로 임두성[13]이다.
2.1. 국회 입성기
당에서는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향인 호남에서는 5.18 유혈진압을 일으키고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킨 ‘민정당’ '민자당' 출신 배신자란 이유로 양 쪽에서 모두 푸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민주당 전갑길 후보에 밀려 깔끔하게 떨어졌다. 명함을 받자마자 면전에서 찢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이건 양반이었고 "어디라고 신한국당 놈이 명함 돌리고 다니느냐?", "눈구멍을 확 파버릴까보다." 같은 폭언들도 듣고 다녔다고 한다.[14]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하여 한나라당 소속으로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으로 한나라당의 인기가 바닥을 기는 상황이었는지라 1.05%(720표)라는 저조한 득표를 기록하며 열린우리당 정동채 후보에 밀려 혹독하게 패했다.[15] 다른 전라도 지역이나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나마 각각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계 후보들이 당선되는 경우도 있지만, 특히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신군부가 저지른 학살에 대한 반감과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이 호남을 고립시켰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에 대해 악감정이 상당히 심하며, 그래서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 국민의힘이 깃발을 꽂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2022년 8대 지선에서야 겨우 깃발을 꽂았을 정돈데, 이것도 광주전남 지역의 국민의힘 선거를 총지휘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정현 본인이었기에 그의 이름값 덕분인 것도 컸다.
당시 이정현이 출마 원서를 냈을 때도 당에서는 이정현이 나가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이 무렵 박근혜가 당대표 시절이었는데, 박근혜는 이정현에게 2차례 전화를 걸어서 낙선을 위로하며 밥을 사겠다고 했고[16], 총선이 끝나고 1달 뒤 여의도에서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던 무렵인지라 당 내에서는 어차피 후보를 내더라도 되기도 어려운 호남은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고 될 만한 곳(수도권, 영남)에 당의 지원과 유세를 총집중시키자는 얘기가 나돌던 때였다. 이정현은 박근혜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작심하고 "대표님, 당의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 주십시오. 명색이 거대 보수정당이라는 곳에서 국토의 한 부분을 통째로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라면서 열변을 토했는데, 박근혜가 "어쩜 그리 말씀을 잘 하세요?"라고 하면서 그를 마음에 들어했고, 곧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에 합류, 대변인과 특보를 지냈다. 소위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가 패하고 난 뒤 많은 이들이 박근혜의 곁을 떠났지만, 이정현은 계파를 바꾸지 않았다. 당시 이명박 후보 측으로부터 선대위 고위직을, 김문수[17] 당시 경기도지사 측으로부터 경기도 정무부지사직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모두 고사했다.
당시 경기도 정무부지사는 후단협 활동 덕에 철새 이미지가 박혀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원유철이었는데, 18대 총선을 앞두고 원 지역구인 평택시 갑에 출마하면서 사직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경기부지사 자리는 공석이었다.[18] 심지어 이를 보다 못한 박근혜가 "경기도 정무부지사 쯤은 한 번 해 보시는 게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하자, "자꾸 그런 말씀하시면 정치를 그만두겠습니다."면서 단호한 반응을 보여서 박근혜도 더 이상 말을 안 꺼냈다고 한다. 하긴 아웃사이더같은 자신에게 손을 뻗어 준 단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근혜였으니 충성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18대 총선 당시 비례대표로 국회에 처음 입성했다. 당시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 논란이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 후보 22번으로 공천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가 평의원이던 시절 비공식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박근혜의 입', '박근혜의 복심', '박근혜의 그림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친박 타이틀을 유지한 채 박근혜의 측근으로 지내는 중이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유세하는 모습. 사진 속에서 이정현이 입은 복장은 폐백 옷이라고 한다.[19] |
19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광주 서구 을 선거구에 재출마했다. 비록 또다시 통합진보당 오병윤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39.7%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일명 '총선 스타'로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비슷한 맥락으로 민주통합당(現 더불어민주당) 신분으로 새누리당의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대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낙선한 김부겸과 함께 지역주의 타파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20] 이후 청와대의 정무수석으로 근무했으나 2013년 초에 윤창중 대변인이 해외순방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허태열 비서실장, 이남기 홍보수석이 모두 사직하자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1년 뒤 2014년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물러났다.
2.1.1.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21]
존경하는 순천시민 여러분, 그리고 곡성군민 여러분. 저 이정현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이번 보궐선거 1년 10개월 정도 임기에 기왕 버린 거 없다 셈 치고 저 이정현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정말 저 미치도록 일하고 싶습니다! 고향을 위해서 저 미치도록 정말 일하고 싶습니다! 부려먹다가, 정말 죽도록 부려먹다가 못하면 그 때 쓰레기통에 다시 넣으시더라도 이번 한 번만큼은 제 손 한 번 잡아 주십시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후보자 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후보자 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
선거가 진행되는 중에는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을 고려하여 중앙당 차원의 지원사격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자전거로 시내를 누비는 소탈한 콘셉트으로 바꿨다. 위에 있는 서구 을(광주) 선거유세 당시와의 차이점에 주목.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순천시·곡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서갑원[23]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민주당계 정당의 철옹성과도 같았던 호남에서 지역주의 장벽을 무너뜨린 주역으로 올라섰으며, 고향인 곡성군에서는 70%의 몰표를 얻고[24] 순천시에서도 선전하면서 본인으로선 4번의 선거 끝에 당선되었고,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광주·전남 지역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계열 소속의 첫 국회의원이 되었다.[25]
출마 당시 야인도 아니고 홍보수석이라는 대통령 최측근 자리를 맡고 있었는데도 스스로 사표를 쓰고 선거에 출마했다.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이정현의 사표를 보자마자 "왜 탄탄대로를 버리고 스스로 사지로 뛰어드는가? 나 같은 늙은이가 천년만년 비서실장 할 것 같은가? 다음 비서실장은 자네가 될 텐데 왜 고생을 사서 하는가? 다시 생각해보게."라고 사표 수리를 반려했으나 자신이 바꾸지 않으면 아무도 못 바꾼다는 이정현의 고집에 결국 수리해줬다고 한다.
이 와중에 언론에서는 '박빙의 승부', '지역주의를 타파할 것인가?'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서갑원 개인 차원의 역량 논란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으로 인해 지역의 민심은 애초부터 이정현에게 기울고 있던 참이었다. 지역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채 '전남에서 새누리당이 당선'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한 나머지 전국 언론과 지역 여론에 괴리감이 생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정작 지역 주민은 예상보다 적은 표차에 더 놀랐을 정도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보궐선거와 순천시/정치 항목 참조.
과연 이정현 의원의 당선이 정당 지역주의 타파인가 하는 점에 대해선 논란이 조금 있다. 이정현은 정당 대결이 아닌 지역인재론+고향인물로 경쟁하여 당선된 것이기에 이것을 지역주의 타파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당장 소개에 적혀 있지만 한 선거구인 곡성군 목사동면이 고향이고, 여기는 순천시 주암면이 코앞인 곳이다. 이와 함께 선거구 당시 지역선거 유세 사진을 보면 다른 선거와는 달리 새누리당이란 당명은 구석에 작게 써놓고 빨간 배경에 이정현이라고 큼직하게 새겨놓기도 했었다. 바로 2014년 재보궐선거 당시 사진처럼 자신의 홍보 조끼의 구성을 보면 빨간색 조끼에 하얀색으로 이름 이정현만 큼직하게 붙이고 선거유세를 했다. 이를 고려하면 2014년 당시 선거구도는 곡성군 목사동면 출신의 이정현 개인 VS 새정치민주연합 구도였기 때문에 이것을 지역주의 타파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 존재한다. 즉, 이정현의 손을 들어준 것이지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지역의 정치색이 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이정현 의원이 순천과 곡성에서 선거유세를 할 당시 새누리당 중앙당과 당시 김무성 신임 당대표의 지원을 거듭 거절했다(이는 20대 총선 때의 김부겸도 마찬가지[26]). 당연한 말이지만 이정현 개인으로 지지세를 잘 잡았다가 전남 동부권에서 반 새누리당 분위기가 가장 결집된 곳에서 새누리당이 더 커다랗게 강조되면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형국이 될 수 있었기에, 당시 새누리당을 숨기고 이정현 개인을 내세운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선거 후 정계분석에서 평가한 반응이 꽤 많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정당색 지역주의가 쉽게 타파되기는 어려운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여러 번의 도전으로 이러한 결과를 냈다는 것은 어쨌든 지역주의를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보는 견해가 중론이다. 한국정치에서 지역주의란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에 대한 몰표행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지역구의 읍면동이나 시군구에서의 소지역주의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소지역주의는 광역단체장 선거나(안희정이 논산시 출신이라 논산에서 몰표가 나온다거나) 영호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도 일상으로 일어난다. 가령 서천군과 보령시가 한 지역구라면 후보자의 출신지에 따라 표가 왕창 쏠린다거나 이정현이 새누리 당색을 빼고 임했다 하더라도 새누리당 후보인 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고, 지역주의 투표가 이루어졌다면 인물과 상관없이 정당투표로 어김없이 패배했을 것이다. 지역주의 투표라는 게 인물이 아니라 정당만 보고 찍는 투표행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타파란 해당 지역의 배타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 아닌 상대 정당의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당 지지율보다 높은 득표를 보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당이 아닌 인물을 보고 뽑았다고 지역주의 타파가 아니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지역주의 타파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애당초 완전한 무연고에 반지지정당이 뽑히는 것은 특히 지역색이 강하고 각 당 텃밭의 성지로 볼 수 있는 전라도와 TK에서는 사실 0%에 가깝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민주당 출신으로 대구에 계속 도전한 김부겸 의원도 TK가 고향이니까 지지율이 높을 가능성을 받는 거지 다른 지역 출신이라면 장담을 하기 어렵다. 물론 지역주의가 더욱 해소된다면 고향 관계 없이 반 지지정당도 인물론으로 뽑힐 기반이 생기겠지만, 첫 술에는 배부를 수 없다. 조금씩 나아질 수밖에 없다는 걸 고려하면 이러한 도전이 점점 지역을 불문하고 열매를 맺을수록 우리나라 정치에 분명 더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한계점으로 이정현 의원에게는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고,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기도 했다.
끝으로, 지역 주민의 인터뷰 등을 볼 때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버려라'라는 선거전략도 유권자의 감수성을 잘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유세 과정에서 이정현은 예산 폭탄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정권 실세'라는 타이틀로 자신을 강력한 실권자로 포장하기 보다는 '머슴', '촌놈'과 같이 약자로 포지셔닝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정현의 애향심과 결합하여 유권자에게 먹힌 것.
여담이지만,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고 국회의원이 된 이정현은 2014년 8월 11일 당시 선거 이전에 당 대표였던 김무성이 "당선되면 업어드린다"라고 말해서 당 최고회의에서 약속대로 업혀드렸다. 그런데 표정이 가관이다. 그 후에 익살스러운 표정은 이정현을 까고 박근혜의 연인 등 좋은 패러디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2.2. 3선 성공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통해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된 것을 계기로 본인은 다음 총선에서도 출마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성실한 지역관리와 2014년을 기점으로 호남에 퍼져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나름 건재한 지지율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여론조사에서 3명의 예비후보들과 1:1로 맞붙었을 때, 오차범위 이상으로 앞설 정도로 꽤나 강세를 보이는 중. 새정치민주연합의 후신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노관규 전 순천시장이 공천되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큰 변수가 생겼는데 순천시-곡성군 선거구의 개편여부다. 자세한 내용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선거구 획정에서 전라남도 문서와 순천시/정치 참조. 헌법재판소 판결로 인해 선거구 분할 기준선이 바뀌어서 순천시-곡성군 선거구가 인구를 초과하여 선거구 변동 대상지역이 되었다. 순천시를 따로 독립하고 곡성군을 다른 지역과 묶는 방안과 자치시/군의 경계를 만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예외로 하여 순천-곡성을 묶은 채 갑과 을로 2명을 선출하는 방안이 거론되는 중이다. 후자의 경우 순천시 신도심에 속하는 왕조1동/2동+덕연동+해룡면(금당지구+신대지구)을 강력한 진출기반으로 삼은 야권 후보와 구도심-농어촌-곡성군에서 유력한 이정현이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부를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이정현의 선거구 여부가 다소 묘연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관측에서는 순천시의 선거구가 1개로 된다 하더라도 이정현 의원이 순천시에 출마해서 승산이 있도록 공을 들이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곡성군 목사동면이 도농통합 이전에는 승주군 생활권이었다는 점도 작용하고, 순천지역 농어촌과 구도심 지역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20대 총선 순천, 곡성 지역 여론조사 결과는 이정현 후보가 상대적으로 앞서는 상황이다. 관련기사
20대 총선의 선거구 분구로 곡성군은 광양시, 구례군과 묶이게 되었다. 외지인구 유입이 많은 광양시는 새누리당 지지율도 상대적으로 높고 순천과 곡성의 영향을 받은 구례군에서도 이정현의 지지율이 꽤 높은 편이라서 유리할 수 있다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곡성 쪽 몰표는 기대하기 어려운 대신 순천에서도 지지율 관리를 꽤 한 만큼 순천시로 나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 때문에 각종 여론조사에서 1:1 구도는 물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후보와 3자 구도에서도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의 경선이 끝나고 후보가 확정된 시점에서는 여론조사에서 3자 대결에도 불구하고 1위 노관규에게 8% 뒤지는 표차를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다만 19대 총선에서만 봐도 노관규 후보가 초반 여론조사는 박빙 내지 우세로 출발했던 것과 달리 실제 결과는 통합진보당 김선동의 압승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뚜껑을 열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순천시의 복잡한 최근 정세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결국 2016년 4월 13일에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순천시 선거구에 당선되며,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보수정당 소속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호남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대 총선에서 텃밭이 제대로 털린 새누리당에게는 전주시 을 선거구에서 당선된 정운천과 함께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던 건 지난 재선거 당선 이래로 매주 지역구를 방문해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는 물론 설명회를 열고는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접수, 직접 수첩에 받아적어서 이를 해결해줬을 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마을회관에서 파전과 막걸리 파티를 하고 심지어는 마을회관에서 숙박까지 하는 등, 주민밀착 스킨쉽과 예산증액 공약[27]이라고 한다. 한 여름에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혼자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선거 후에도 새누리당의 당권을 두고 여러가지 의미로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호남의 유일한 새누리당 재선 의원이란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로서[28] 지독한 친박-비박 계파 갈등이 일어난 새누리당 내에서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 예상대로 탈당한 유승민 및 당내외의 비박계 인사에 대해 매우 강경한 발언들을 내며 존재감을 확장하고 있다.
2.2.1. 새누리당 대표 선출
2016년 7월 새누리당의 당대표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 9일 전당대회에서 당초 주호영 비박단일후보와 접전을 벌일 것이다는 예상과 달리, 꽤 큰 표차로 승리하며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의 당 대표 선출은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최초의 말단 당직자(평당원) 출신+최초의 호남 출신 보수당 대표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29] 그 이전에 비영남 출신 보수 정당 대표로는 충청+황해도출신인 이회창이 있었지만 호남 출신 보수당 대표로는 이정현이 처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광을 가져다 준 대표 시절부터 그의 정치 인생은 어둡게 변하기 시작했다.
(방송 영상: TV조선 네이버 뉴스)
대표 선출 후 9월 6일 경기도 파주시의 대한민국 육군 제1포병여단 산하 포병대대를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1포병여단은 이정현 본인이 대한민국 육군 병으로 3년간 복무했던 부대다.
그러나 이 방문은 '민폐'였는데#, 사병들부터 시작해서 간부들까지 높으신 분 온다고 온갖 준비를 다해야 하므로, 그에 따르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정현 본인이 장병들을 "다 내 아들뻘이야"라며 격려했다. 특히 육군 현역병으로 만기전역한 이정현이 이걸 모를 리가 없다.
당장 위 이미지에서 이정현이 한 말도 "니들 나 오는거때문에 고생했을텐데 왜 말을 안하니?"라고 무시하는 말투다. 참고로 같은 현역 병사이자 육군 상병으로 만기전역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군부대에 자주 가는 것은 장병들에게 민폐"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30] 다만, 당 대표까지 올라간 정치인으로서 안보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이미지와 사병들을 챙겨줘야 한다는 모습을 언론과 대중에 보여줘야 하기에 알면서도 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대표활동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여파로 친박의 당내 퇴진론이 당내외에서 비상하고 당이 분당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오자 여러 번 대표직 사퇴 의사를 말하다가 12월 15일 친박 의원인 조원진 최고의원이 지도부 동반 사퇴 의사를 외부에 표명한 후 결국 16일, 당 대표직을 최고위원들과 함께 사퇴했다.
2.3.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31][32][33]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인 국정농단과 정경유착 비리사건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JTBC에 의해 까발려진 것. 민심은 완전히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정현은 친박의 수장답게 박근혜 대통령을 계속 두둔해왔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에 야당이 주장했던 2선 후퇴 및 거국중립내각에 관하여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였다면 최소한 탄핵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34] 하지만 그는 골수 친박의 의견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어찌 보면 박근혜 탄핵의 숨은 조력자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결국 탄핵이 가결될 경우 손에 장을 지진다는 배수진을 치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되었다. 당연히 여론은 '빨리 장을 지져라'는 반응을 보내고 있다. 탄핵 소추 투표 결과를 보면 총 300명 의원 중 234명이 찬성했는데, 야당 의원 전부가 탄핵에 찬성했다 가정해도, 새누리당 의원수 중 과반이 탄핵에 찬성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즉, 친박계 일부도 이미 등을 돌렸단 이야기. 친박의 수장인 이정현의 정치인생도 앞날도 이제 깜깜해졌다. 결국 비박계가 주도하는 비상시국회의에서 최순실 8적 중 1명으로 지목되어 탈당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만, 결국은 비박들이 먼저 뛰쳐 나갔다.
이정현은 당대표를 내려오고 인명진 목사를 비대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 체제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명진 목사는 "인적청산이 필요하다. 1월 6일까지 친박 핵심의원은 자진 탈당하라."고 요구하였다. 특별히 거론한 의원이 많지는 않지만, 저 핵심 멤버에 이정현 전 대표가 들어가는 것은 자명하다.
2017년 1월 2일에 새누리당을 탈당하였다. 자신의 탈당으로 친박 탈당 요구를 멈춰줬으면 하다고 했는데 여러 행보들로 이정현이 친박의 대명사가 되긴 했으나 이정현은 친박에서 비주류로 이정현이 책임을 떠안고 탈당한 것 아니냔 의견이 있다. 서청원[35]이나 최경환 같은 '박핵관(박근혜 측 핵심 관계자)'은 탈당을 거부했다. 실질적으로 탈당한 친박 의원은 이정현 외에 친박 핵심도 아닌 정갑윤만이 유일했다. 그나마 정갑윤도 4월 8일에 다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다른 핵심 친박과는 달리 탈당을 수락한 것은 이정현이 새누리당에서 무소속이 되더라도 가장 경쟁력 있는 의원이란 점이 작용한 듯 하다. 지역구인 순천시에서 새누리당 간판은 없는 것이 더 당선 가능성이 높기 때문.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보다 더 비토 가능성이 높은 친박이란 간판을 가지게 됐는데, 과연 또 당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최악의 사건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여당 대표로서 오직 박근혜 바라기 모습만 보였기에 재기 못할 가능성도 있다. 이정현이 호남에서 당선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유세할 때 새누리당의 색깔을 최대한 지웠기 때문이다.[36]
2.4. 새누리당 탈당 후
탈당 이후에는 갑자기 활동이 뜸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소속 정치인으로서 이미지 관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전까지는 박근혜의 최측근으로서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탈당하자마자 언론 노출이 갑자기 뜸해진 부분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 골수 친박들이 늘상 참여하는 탄핵 반대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고, 탄핵 인용 후에도 부친상을 이유로 친박들이 포진하고 있는 사저에도 찾아가지 않으면서 박사모 등 박근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정현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추락하고 있으며, 심지어 좌파 진영에서 심어놓은 프락치가 아니었냐는 음모론까지 돌고 있다. 다만, 이정현의 행보를 자세히 보면 말이 안 된다.친박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당 대표라는 중책을 맡았을 때도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 김태흠 등의 친박 실세들에게 근본없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였으며[37]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된 모양새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친박 중진들에게는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출당 이후의 이정현은 정치적 유기견으로 평을 받기도 한다. 지역구 내 여론은 부정적인데다 친박으로 찍히기까지 했기 때문에 현 상태로는 정치적 재기가 매우 어렵다. 20대 국회의원직의 임기를 끝까지 채울 수 있을지조차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친박 핵심 인사 중 한 명으로 이미 낙인찍혔지, 지역구가 그나마 지지층을 유지하고 있는 TK라면 모를까, 지역구조차도 구 민정당계 및 친박에게 가장 강력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호남이다. 탈당한 지금도 이미 이정현을 받아 줄 정당이 있을 리 만무하며, 자유한국당에 계속 잔류했다 쳐도 지역 주민들에게 현 상황을 초월하는 비토를 받았을 것이므로, 어떤 길로 갔어도 향후 이정현의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지역구인 순천시는 19대 대선에서 시군구 단위 기준으로 문재인의 득표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게 나온 반면 홍준표의 지지율이 고작 2.5%에 머물면서 이정현이 순천시에 발을 붙일 수 있는 마지막 조건마저 사라졌음을 증명했다.
더군다나, 친박 이미지 탓에 여론이 급격히 나빠져서 지역구 사무실 간판도 내렸으며[38],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며 예전처럼 예산을 따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지지율도 바닥을 쳤다. 더군다나 2017년 3월 6일에 부친상을 당했고, 장례를 마무리 짓자 마자 주군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 당하면서 겹악재가 터졌다.
다만, 홍준표 후보가 대권 후보라는 명목으로 바른정당 탈당파와 정갑윤 의원 등 쫓겨난 친박을 불러오는 와중에도 합류를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보는 듯. 이미 박근혜가 파면당해 구속당한 데다 이정현 자체도 박핵관으로 찍혔고 자유한국당 자체가 이미 친박당으로 찍힌 마당이다. 이정현이 복당을 하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인 게 매우 뻔한지라 복당을 거부하고 그나마 정치 명줄이 아직 붙어있는 임기 내라도 조용히 지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무소속으로 지내면서 친박 이미지를 세탁하고, 순천시민들 사이에서 평가가 나쁘지만 민주당 내에서 조직력은 강해서 경선을 통과하고 컷오프 당하더라도 탈당 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표를 분산시킬 수 있는 서갑원이나 노관규가 21대 총선에서 또 후보로 나오면 인물론으로 충분히 재선할 수 있다는 계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친박이미지가 강하게 찍혀버린 탓에 이정현의 순천시 내부의 이미지가 개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와봐야 1자리수 득표율이나 올리고 낙선할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당적이 없어진 후부터는 자유한국당의 표결 불참여부와 관계없이 국회 본회의에서 조용히 자기 소신껏 투표하고 있다. 덕분에 기권·반대표로 눈에 띌 때가 많다. 이후 KTX 직선화와 세종역 신설을 요구하는 의원모임에 동참했다. 지역구인 순천의 순천역은 KTX를 포함한 전라선 모든 열차가 필수적으로 정차하기에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홍보수석비서관이었던 시절 KBS에 세월호 관련 보도를 바꿔달라고 압력을 넣었던 혐의로 검찰에 기소당하여 1년 구형을 받았다. 그리고 2018년 12월 14일 1심 판결에서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 받았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7고단8762). 대법에서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되면 이미 식물인간 상태의 정치인생은 확인사살이 되어 완전히 끝장났으며 이후 2019년 10월 28일 2심 판결에서는 1심보다 감형된 1,0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같은 법원 2019노50). 다만 방송법으로 기소된 만큼 2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어도 의원직은 상실되지 않는다. 벌금형의 경우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에서 100만원 이상을 받아야 상실 사유가 되기 때문. 이 의원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2020년 1월 16일 상고를 기각하여 2심 판결을 확정했다(2019도16319).
최근 전임자였던 김선동 전 의원과 지역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됐다. 적어도 자신의 지역구를 위해서 최소한의 일을 한다는 자세를 보이는 듯 하다.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소속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40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을 영입하여 내년초 신당 창당에 앞선다고 한다. 출마 선언, 신당창당. 순천에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대신 수도권 출마를 선언했다.
원래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다고 밝혔으나, # 출마 의사를 번복한 후 같은 지역구에 도전장을 낸 미래통합당 황교안 당시 대표 지지를 선언했다. # 그 후 영등포구 을 지역에 출마신청을 했지만, 이미 친박 이미지로 평판이 추락한데다 미래통합당에서 박용찬 후보를 냈기 때문에 보수 단일화를 하지 않는 이상 수도권에서의 당선은 쉽지 않아 보였으며, 예상대로 21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4선 도전에 실패했다.[39]
과거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본인을 썩은 국 안의 건더기로 표현할 정도로 정치 세력의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언급했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투표로 심판을 받되 새로운 인물들을 뒤에서 지원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 실제로도 이정현의 지역구였던 순천에 21대 총선 미래통합당 후보로 천하람이 출마했었는데 30대의 젊은 청년 후보였다. 이정현이 천하람에게 순천 지역구를 추천했다고 한다. 물론 21대 총선에서 패배함으로서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정치참여보다는 인터뷰에서 말한대로 세대교체를 위해 뒤에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치활동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40] 이후 유튜브 채널 일요서울에서 '이정현의 정문일침'이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물밑 조력자 역할로 나선다고 한다. 최 전 원장의 호남 지역 영향력 확보를 위해 조력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지역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전라남도지사에 출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결국 실제로 출마를 하게 되었다.[41]
2.5. 국민의힘 복당 및 8회 지선 전남지사 출마
2022년 2월 9일 대선을 한 달 앞두고 국민의힘에 복당하였다. 2월 28일 20대 대선 방송연설을 하였다.2022년 3월 28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중 전라남도지사 출마를 공식화하였다. # 예비후보 자격으로 4월 4일 전남CBS라디오 '시사의 창' 인터뷰에서 그간 전남은 27년여 동안 한쪽에서 이렇다 할 경쟁 없이 9대째 도정을 맡았다면서 자신이 변화의 주역이 돼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직후 목포MBC 등 다양한 언론의 지방선거 전라남도지사 후보자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너무나 정치적인 우리 전남을, 삶의 전남으로 한 번 바꿔보고 싶었고, 전남을 구석구석 대 개조를 해 보고 싶었다. 또 전남도민들께 선택의 기회를 꼭 드려보고자 출마를 결심했으며,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현대적인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27년 동안 민주당이 해 왔던 방식하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남을 확 바꿔보고 싶다. 전남이 농도(農道)인 터라, 식량 안보를 전남에서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농기계 공장 하나 제대로 있는 곳이 없고 농축수산물을 가공하는 산업단지 하나 제대로 없다. 농약 공장도 하나도 없고, 씨앗 공장이나 연구소 한 군데라도 제대로 안돼 있는 곳이 전남이다. 그리고 자동차나 반도체, 배터리 공장이나 조선소가 전남에 어디 제대로 있나.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런 정도면 낙후도 아니고 소외를 넘어서 소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자리를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고 도에 다양한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많은 구상을 가지고 있다. 제가 전라남도지사가 된다면 여당 도지사로서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 그리고 각 부처 장관들을 언제든지 만나서 전남의 현안들을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고 전남을 지역구로 둔 민주당(야당) 국회의원과 국민의힘(여당) 국회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인 협치로 제대로 일을 해 볼 수 있다. 여당 도지사 후보가 아닌 사람들은 청와대, 정부, 여당에 끈(인맥)이 없어서 일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제가 도지사가 되게 해 주신다면 인맥과 경륜으로 전남에 많은 발전을 이루어 내겠다. 제가 도지사가 되면 희망의 태양이 전남 동쪽에서도 뜨지만 서쪽에서도 뜰 것이다. 저는 전남 22개 시군을 지난 27일 동안 섬을 빼 놓고는 모두 돌아봤다. 22개 시군의 읍면동 99%를 내 차, 내 발로 돌아다니면서 현안을 살펴봐야만 도지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다. 전남 22개 시군을 1개 시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동쪽과 서쪽 가릴 것 없이 장점과 잠재력을 반드시 키워내겠다. 동쪽에서 살릴 건 살리고 서쪽에서 살릴 건 살리도록 하는 안목과 능력, 배분,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이 저 이정현이다. 저 이정현을 한 번만 도와달라. 제 손 한 번만 잡아달라. 여기까지 저는 죽느냐 사느냐로 호남사람이 보수정당 안에서 컸다. 그리고 많은 경륜을 쌓았다. 제가 완전히 뒤집어서 전남을 대변화 시킬 자신이 있다. 6월 2일 아침 신문이 어떻게 배달될 지 한 번 상상해 보라. 모든 신문이 전남에 이정현이 당선 된다고 한다면 1면 톱은 "전남 이정현 도지사 최초 당선!"으로 나갈거다. 또 전남 유권자들이 선거 혁명을 했다고 할 것이다. 도민들께서는 선거를 혁명으로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저 한 번만 도와달라. 진짜 미쳐버리도록 일하겠다.
그가 목포MBC 뉴스에서 했던 인터뷰의 자세한 내용은 영상 링크 참조.#
당에서도 4월 12일, 이정현 전 대표를 단수공천하면서 전라남도지사 선거 후보로 확정지었다. #
결과적으로 이정현 전 대표는 18.81%를 득표하며 현직 도지사인 더불어민주당 김영록 후보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1995년 지방선거 부활 이후 두 번째로[42] 보수정당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 비용 전액 보전 하한선인 15% 이상 훨씬 넘은 득표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거두었다는 평이다.[43]
특히 본인이 지역구 의원을 지냈던 순천시에서는 30%대 득표율[44], 본인의 고향인 곡성군에서는 40%대 득표율을 올리는 등[45] 역대 전남지사 선거에 나섰던 보수정당 후보로서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선거비 완전 보전선(15%)을 훌쩍 넘겨 비용 부담도 던 만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도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때마침 순천시장으로 당선된 무소속 노관규 당선인이 인수위원회에 이정현 전 대표의 측근 인사를 넣으면서 순천에서의 운신폭이 이전보다 더 넓어질 전망이다.
순천에서는 국민의힘 당협위원장으로 천하람이 있는 상황이었는데[46], 두 사람은 의외로 친분이 깊다. 천하람 변호사가 순천으로 기반을 옮길 때 가장 많은 지원을 해준 사람도 이정현이고 천하람이 21대 총선에서 순천에 출마할 때 응원 영상을 보내준 사람도 이정현이며 두 사람은 펜앤드마이크에 동반 출연한 적도 있다.
그리고 전남지사 출마 당시 지지율 30%를 넘기면 제21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 밝힌 만큼 차기 총선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4선 중진의 반열에 오르는 만큼 차기 대선에도 국민의힘 경선에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2.6. 전남지사 낙선 이후
2022년 9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전략기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전남지사 선거 이후 지역 및 서울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전남의 인구 소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국가 개조 차원에서 풀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으므로 당장 정계 복귀보다는 지방소멸 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2023년 7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후신인 지방시대위원회의 부위원장(차관급)으로 임명되었다.
2.7. 22대 총선
2023년 12월 지역구를 순천에서 광양으로 옮겨 22대 총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선거구 변동을 예상하고 '광양이 포함된 선거구에 나간다'고 표현하였다. # 광양은 곡성, 구례와 하나의 선거구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자신의 고향 곡성군이 포함된 지역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2024년 2월 순천시·광양시·곡성군·구례군 을에 공천을 받았다. # 결과는 2위로 낙선. 물론 그렇긴 해도 이정현 본인이 전라도에서 인지도와 위상이 높은 보수 정치인이라는 타이틀답게 23.7%, 35,283표를 얻으면서 나름 선전했다.[47] 이 35,283표는 국민의힘 호남 후보자 최다 득표수이자 유일하게 30,000표대를 초과한 기록이다.
2.8. 22대 총선 이후
22대 총선이 끝난 후 장제원, 김한길, 정진석 등과 함께 대통령비서실장 후보군으로 물망에 올랐다. # 이뿐만 아니라 호남 출신 인사라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동의와 협치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무총리 후보군으로도 하마평이 오르내리고 있다.실제로 지명이 이루어진다면 문재인 정부 당시 호남 의석을 가지고 있는 국민의당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당시 전라남도지사였던 이낙연과 전북특별자치도 출신의 정세균을 지명해서 동의를 이끌어낸 전략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무총리는 극단적인 여소야대 지형 및 윤석열 정부 원년 장관급 인사의 순차 개각으로 인해 당분간 유임되었고,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과 동향인 정진석 前 국회부의장이 임명되었다.[48]
202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 곡성군수 후보로도 거론[49]되고 있는데, 3선 국회의원에 집권 여당대표까지 한 중진 전직 국회의원이 느닷없이 웬 갑자기 곡성군수냐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이미 노승환이라는 선례도 있고[50] 이정현 본인의 개인기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고향이기도 하니만큼 더더욱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출마할 때마다 항상 곡성에서 최소 30%는 챙겨갔다 보니 더더욱 후보군이 없는 국민의힘에게는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이다.[51]
게다가 아직까지 전라남도에서 보수정당 후보로 광역자치단체장 및 기초자치단체장이 당선된 사례가 전무하다 보니 이정현 본인이 만일 국민의힘으로 곡성군수에 출마해 당선된다면 총선 참패 이후 무기력해지고 기가 죽은 여당 입장에서는 국정 동력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52]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고맙지만 출마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2024년 11월부터는 윤석열 정부의 중폭이상 개각 가능성과 함께 기존에 언급되었던 대통령비서실장 및 행정안전부장관 입각 가능성이 재언급되고 있다.# 또한 국무총리 인준에는 더불어민주당의 국회 인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인준 과정이 유리하다는 것 때문에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로 지명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53]
[1] 음력 9월 1일[2] 장갑수(張甲洙)의 딸이다.[3] 곡성군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곡성은 옆의 구례군과 함께 전남에서도 가장 오지로 손꼽히는 곳이다.[4] 이때 부친은 교장이 직접 집에 찾아온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처음에는 "설마 정현이 이 녀석이 혹시 사고라도 친 건가?" 하고 걱정부터 앞섰다고 한다. 다행히 교장도 좋게 봐 주면서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5] 이정현 시대의 광주는 고등학교 비평준화 시대였다. 곡성과 순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광주까지 왔지만, 도시 학생들과 경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6] 만약 육사 진학에 성공했다면 육사 37기, 즉 박지만, 김영식, 박찬주, 엄기학, 이재수, 전인범 등과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7] 후술할 부대방문 시 언론에 명칭이 공개되었음.[8] 구 의원의 처는 2022년 기준 91세로 아직 생존해 있는데 이정현이 보낸 편지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9] 이후 구용상 의원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낙선한 뒤 관선 전라남도지사를 지내고 1995년 말엽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10] 2011년 유방암 판정 이후 3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이정현이 "내가 아내를 많이 고생시켜서 그랬다"고 수도 없이 자책했다고 한다.[11] 다만 여당이던 한나라당은 비례대표 의원들이 이런저런 이유(각료 임명 및 지방선거 출마 등)로 사퇴하는 일이 많음을 생각하면 설사 22번보다 조금 앞순위에서 끊겨서 당장은 낙선하더라도 머지않아 의원직 승계를 받아 조금 늦어지더라도 어쨌든 국회의원이 되긴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18대 국회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들 중 임기를 다 못 채운 사람들은 4명이나 된다.[12] 정작 박근혜는 이때의 친박 공천학살에 항의하며 친박연대를 조직해 TK표를 뺏고 낙천당한 친박들을 제18대 국회에 친박연대 의원으로 보내는 데 영향력을 행사한다.[13] 당시 한센병 환자 지원 재단인 한빛복지협회장이자 육영재단 폭력사건에 한센병 환자 조폭을 동원한 인물이다. 박근혜의 심복으로, 전과 12범이라는 추악한 과거가 드러나며 의원직을 상실당했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 항목 참조.[14] 반대로 보수의 성지 대구광역시나 경상북도, 경상남도에서도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이런 폭언이나 멸시를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디라고 신민당 놈이 명함 돌리고 다니느냐? 썩 사라지지 못할까?" 그래도 지금은 지역 감정이 많이 옅어진 편이라 이런 문제는 많이 줄어든 편이다. 하지만 이정현에게는 이때의 일들이 길이 상처로 남았는지 30년 가까이 지난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전라남도지사 후보로 연설할 때 "이번 선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신기하고 이상한 선거였다. 명함 찢는 사람도 없었고 '눈구멍을 파버린다'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라면서 그 시절의 아픔을 꺼내기도 했다. 이정현이 보수당 소속으로 전라남도지사에 출마할 때 민주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에 출마한 서재헌 후보도 비슷하게, "욕 듣거나 그런 건 없었다. 다만 '자네는 전라도에서 출마해야 되는 거 아니냐?'라든지 '안타깝다. 왜 스스로 험한 길을 선택하는 거냐?'라고 동정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호남에 가야 하는가? 여기가 내 고향인데?"라며 동정과 안타까움의 소리를 들었다고 밝혔다.[15] 헌데, 왜인지 언론에서는 0.65%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투표하지 않은 전체 유권자들까지 합친 수치라서 그런 거고, 실제 투표를 한 유권자들로만 한정하면 1.05%가 맞다.[16] 비슷하게 친박계가 된 윤상현은 2002년 재보궐선거 공천에서 탈락하자 박근혜와의 식사자리를 가졌고, 이후 친박계가 되었다.[17] 김문수는 당시만 해도 친이이자 비박이었다. 김문수가 본격적으로 강성 친박으로 전향한 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부터다.[18] 결국 이정현을 대신하여 새로 부지사가 된 사람은 YTN 보도국장 출신의 표철수. 이후 표철수는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남양주시 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야당 추천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었다.[19] 대장금이 초특급 인기를 끌어 대장금의 남주 의상을 입고 유세를 하면서 일단 관심을 많이 끌어보려 했다. 그래서 대장금 의상 담당자를 찾아가서 의상을 빌리고 싶다고 부탁했으나 담당자가 소품 대여는 곤란하고 거절, 대신 비슷한 폐백 옷을 입고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해서 다시 한복집을 찾아가 자신이 연극에서 신랑 역을 맡았다고 핑계를 대면서 의상 대여를 부탁했고 허락을 받아 이 옷으로 유세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저것이 폐백 옷이라면 고증오류인 게, 폐백 때는 신하가 입던 복장을 입는데, 사진과 같은 용무늬 흉배와 익선관은 신하가 아닌 왕의 복식이다.[20] 이 둘은 20대 총선에서 각각 대구, 순천에서 당선되었다.[21] 당명과 기호 없이 이름만 있는 저 조끼는 훗날 8회 지선과 22대 총선에서도 다시 입었다. 당의 기호가 2번으로 바뀌고 국민의힘으로 당명이 바뀌었어도 당 색깔은 새누리당 시절 그대로 빨간색이라 새로 맞출 필요가 없었기 때문.[22] 비를 맞아가며 자전거를 타고 유세하고 있는 사진이다.[23] 순천시 출신으로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 수석부대표와 대통령 비서관를 지내어 소위 친노 실세로 불려지던 인물이었다. 순천시 지역구(곡성군과 합구되기 전)로 재선 국회의원을 먼저 지냈으나, 노관규 순천시장에 대해 2010년 지방선거의 예비경선 때부터 갈등을 심하게 일으켰고 노관규 당시 시장이 추진하는 사업의 예산 확보에 좋게 표현하면 미온적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훼방을 자주 놓았다. 자기 지역구 예산을 스스로 삭감한 것은 덤이다. 그러다가 박연차 게이트로 뇌물수수 혐의가 드러나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쓰여진 대로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탈환(?)을 노렸으나, 이전까지의 모습을 지켜 본 순천 시민들의 싸늘한 분위기에 이정현에게 패하고 말았다. 지역에서의 여론도 좋지 않고 유리한 여건임에도 낙선하여 앞으로 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24] 특히 고향인 목사동면에서는 83%라는 득표율을 얻었다.[25] 호남 지역 전체에서는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 강현욱이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당선된 이후 18년 만이었다. 그나마 강현욱 의원도 1997년 외환 위기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지역구 민심이 보수정당에 대해 더 험악해지면서 결국 15대 국회의원 임기 후반에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옮겨야만 했다.[26] 이정현의 승리가 이정현 개인 VS 새정치민주연합의 싸움에서의 승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부겸 역시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서 이긴 게 아니라 김부겸 개인 VS 새누리당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정현의 상대 후보 서갑원이 워낙 지역 내 평판이 안 좋았듯 당시 김부겸의 상대 후보 역시 평판이 안 좋았다. 그 상대 후보란 다름 아닌 과거 경기지사 시절 소방서 긴급 전화에 대고 관등성명 요구했다가 관등성명 안 한다고 소방관을 좌천시키려 해서 전국적 망신을 샀고, 또 LG디스플레이 공장을 파주로 끌어들여서 대구·경북 유권자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새누리당 당적을 달고 텃밭으로 나와서도 낙선하는 굴욕을 겪었다. 물론 그 사람과는 별개로 지역구에서 3선을 한 현직 의원이 임기 중에 집을 팔고 빤스런을 한 점도 주민들의 反 새누리당 정서를 키웠다.[27] 실제로 지역에 대한 정부의 예산이 상당히 증액되었다. 김광진조차도 스스로 이기기 어렵다고 인정했을 정도.[28] 친박계가 치명타를 입은 선거였지만,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온 이정현은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사실상 당시 총선에서 친박계의 유일한 승리자.[29] 더 놀라운 것은, 호남 지역기반인 민주당계 정당의 2016년 8월 기준 당대표들은 둘 다 영남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국민의당에서 호남 성골인 천정배와 함께 공동대표를 달고 있었던 부산 출신 안철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구 태생인 추미애가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에 선출된 것 또한 이에 지지 않을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30] 왜 노무현 대통령이 상병 만기전역이냐 궁금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을 했던 시절이라 파병을 가는 병사들에게 병장 진급을 해줬기 때문에 쉽게 병장으로 진급이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31] 국회에서 박근혜에 대한 탄핵이 가결되던 그날, 그 투표가 있기 전 국회 건물 앞에서 환경운동연합 등의 시민단체들이 계획하여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라는 의미로, '촛불을 기억하세요' 혹은 '탄핵에 찬성하세요' 등의 글귀를 적은 종이를 감아놓은 장미, 소위 '탄핵 장미'를 준비하여 국회에 출석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준 일이 있었다. 위 사진은 그때의 사진으로, 박근혜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놓인 상황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표정으로 국회로 향하며 장미를 거부하는 이정현 의원의 쓸쓸한 눈빛과 장미의 조화가 돋보이는 포토제닉급 사진이다.[32] 당시 많은 국회의원들은 시민단체의 장미 행사보다 훨씬 전 국회에 미리 가있었기 때문에 장미를 직접 받은 의원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언론에서도 천정배, 정동영, 노회찬, 심상정 의원 등이 받은 것을 조금 보도한 정도였다. 허나 이정현 의원의 저 묘한 표정과 당시 여당 대표란 상징성 때문인지 결국 탄핵 장미 관련해서는 이정현만이 여러 신문에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낭만적인 상황은 아니라, 실제로는 시민들이 계속 장미를 들고 다가와서 가져가라고 하는데 이정현 의원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수많은 장미들을 매몰차게 밀쳐 떨어뜨리던 상황이었다. 사실 다수의 새누리당 의원들도 거부하기는 했으나 이정현 정도로 밀친 경우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 못본척 하고 가거나 웃으며 사양 혹은 유승민이나 이혜훈 의원 같은 비박계에서는 꽃을 받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정현 의원의 태도는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표결이 끝난 이후엔 국회의 주차장으로 보좌관들과 황급히 뛰어가는 이정현 의원의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33] 정치적 야인 시절 진행한 이정현의 정문일침에서 저 사진을 오프닝으로 썼다.[34] 하지만 박근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무시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설령 이정현이 직언을 했다라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35] 서청원은 이후 계속 자유한국당에 남아 있다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인 이듬해 6월 20일에 결국 자유한국당을 탈당했다.[36] 이번 정국에서 가장 존재감을 어필한 2명의 의원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김진태.[37] 실제로 당 대표 시절에 당내 3선 이상 의원들과의 간담회를 마련했으나, 안상수 의원 단 1명만 참석하는 굴욕을 당했다. 비박은 물론 같은 친박마저 이정현을 무시했던 셈. 안상수는 비박계지만 당 내에선 중도로 통한다고 한다.[38] NC백화점 순천점 인근의 공장건물에 사무실이 있었다.[39] 다행히도 당선된 김민석의 득표율이 50%를 살짝 넘어 팀킬 책임은 지지 않을 수 있었다.[40] 그리고 이러한 전망대로 복당하였다.[41] 봉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정현이 아무리 순천 재선 국회의원 출신이더라도 전남지사 당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젊은 후보들처럼 선거 이력이라도 쌓아야 하는 시절도 이미 지난 지 오래다. 그러나 이정현 정도면 당선은 안 되어도 일정 수준의 표는 얻어줄 수 있는 인물이어서 잘하면 선거 비용 보전도 노려볼만 하고, 이렇게 쌓은 지지도를 국민의힘의 호남 지지도로 연결시켜줄 수 있다면 이정현은 자신이 얻는 것은 거의 없어도 당에게 헌신하고 떠나는 셈. 지역 주민들 입장에서도 듣도보도 못한 후보가 오는 것 보다는 당연히 네임드 정치인이 오는 것이 전국적 관심을 끄는 데에 더 좋다. 실제로 '이정현'이라는 이름이 선거판에 등장한 것 하나만으로 그가 선거비용 보전 하한선인 15%를 넘길지, 최종 득표율이 몇 %일지 타지에서도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꽤 생겼다. 민주당 입장에서도 아무리 당선이 유력하더라도 상대가 새누리당 대표 출신에다 호남에 새누리 깃발을 2번이나 꽂은 거물이라 방심할 수가 없으니 결국 지역에 좋은 흐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42] 그 전까지 득표율 15%를 넘긴 케이스는 1회 지선에서의 민주자유당 전석홍 후보(26.49%)가 유일했다.[43] 같은 선거에서 역대 최연소 대구광역시장으로 출마하였으나 홍준표라는 전국적 거물에게 밀려 민주당 후보들 중 유일하게 10%대 득표율로 처참하게 깨진 민주당 서재헌 후보의 17.97%보다도 더 높은 수치다. 또한 호남지역에 출마한 광역단체장 후보 전원(이정현, 주기환, 조배숙)이 선거비용 전액 보전을 받게 되었는데 이 셋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44] 그중 본인이 중학교를 다닌 주암면에선 단 36표 차이로 45.99%를 기록했다[45] 게다가 자기의 고향인 목사동면과 그 옆동네인 삼기면에서는 이겼다. 다시 말해 김영록 지사는 민주당 텃밭에서 전 행정동 올킬에 실패했다는 뜻이다.[46] 대구광역시 출신이지만 가족과 친척까지 모두 순천으로 이사했다.[47] 이정현은 전주시 을의 정운천과 함께 호남에서 20% 이상 득표율을 넘긴 단 둘뿐인 후보자다. 나머지는 대부분이 선거비 전액보전 하한선(15%)은커녕 반액보전(10%)도 못 받을 정도로 유의미한 득표조차 하지 못했다.[48] 정확히는 윤석열 본인은 서울특별시 출생이지만, 그의 집안이 각각 충청남도 공주시와 논산시 출신이다.[49]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상철 前 군수가 선거법 위반으로 2024년 5월 30일 부로 군수직을 상실했다.[50] 마포구에서 5선에 국회부의장까지 한 중진 의원임에도 고향 마포구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재선 마포구청장을 지냈다.[51] 당장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천된 신동근 前 의원 역시 인천광역시 서구 을에서 2번이나 국회의원을 역임했지만, 최근 강화군수 출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랑 똑같다고도 할 수 있다. 참고로 강화군도 유천호 前 군수가 임기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2024년 하반기에 재보궐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다만 신동근 본인은 강화군과는 연고도 정치적 기반도 없지만, 처음으로 정치를 시작한 곳이 서구·강화군 을로써 오랫동안 강화군에서 나름대로 터를 잡아왔으므로 강화군과 아주 연관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52] 민주당계 정당의 텃밭 중 상텃밭인 전라남도에서 깃발을 꽂는다면 그 자체로 민주당 입장에서는 심장부를 뺏기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53] 이 전 의원 이외에는 국무총리 후보로 주호영 국회부의장, 권영세 의원(전 통일부장관), 이철우 경상북도지사 등이 유력하게 언급되고 있다. 홍준표 대구광역시장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회동을 하면서 그에게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본인이 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