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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11-02 15:47:43

이순신/일대기


1. 태어나기 이전2. 임진왜란 전야까지3. 임진년의 맹활약4. 계사년 이후5. 어이없는 파직6. 명량 해전
6.1. 명량 해전 당시 전과6.2. 철쇄설
7. 전설이 되다8. 사후 조선에서의 평가

1. 태어나기 이전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1]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2]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3] 이식 같은 유명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였다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애초에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4]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된 이들을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 부르며 그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 중에서도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여겨졌고 재상에 왕실과 인척까지 맺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위작인 '칭기즈 칸 어록'[5]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2. 임진왜란 전야까지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다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출신으로 보성군수까지 지냈던 온양 방진(方辰)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였고[6][7][8],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9]

28세 때에는 무과 별시에 응시했다가 승마 중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버드나무 가지로 다리를 동여매고[10]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무과에 급제하여[11], 동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서른여섯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이 전까지 종8품 이하였던 이순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기지로 파악된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오동나무 사건[12]과 이 사건 이후 부임해 온 전라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 감영의 도사(都事)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실제 근무 평점을 조목조목 들먹이고 타 진포와 비교하는 식으로 정면 논파해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는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어쨌든 서익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었고, 이순신은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절도사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 김우서의 모함으로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서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 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13]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패배한 자와는 다르다고 구분짓고 장형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14] 아래는 선조가 이일의 장계를 받고 나서 "녹둔도에서의 전투 결과는 일반적인 패배랑은 조금 다르지 않음?"이라며 두둔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15]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16]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 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기사
사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이순신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17]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 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18].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19]과 5개 전문 수군기지[20] 소속 병력을 지휘 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 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 임진년의 맹활약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5월4일 최초의 출격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켰다. 이것이 옥포해전이다. 옥포만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에서의 승전이었다[21] 옥포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 즉 수색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22].부상만 당한 병사들은 멀쩡한 병사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전멸시키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시키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깊은 전투였다. 이 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후퇴로 인한 유인후 함대 반전 및 포위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 참고해석이 심히 필요합니다..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 때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 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 등 주요 곡창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지대가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참고.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 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보급 차단은 보기에는 적 전투 병력 섬멸보단 그 비중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백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23]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 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24]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병장기도 없는데 군량 집어 던지면서 싸울 것도 아니고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기본 전략 자체를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 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이유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 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4. 계사년 이후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술로 전술 방향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 충청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작전사령관이나 해군 작전사령관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번 왜선 30여척을 분멸하나, 담종인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 금토패문과 평화 협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달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이 개놈이 나중에 조선 수군 장병들을 상대로 저지를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참 탁월하다고 하겠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대상이 이순신이니...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생산량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5. 어이없는 파직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1596)과 정유(1597)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정유년이 시작되고나서, 이순신에게는 특이한 일 두가지가 일어나게 된다.

첫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서,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결과와 이원익의 추가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려서 상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다. 조정에서의 인식은 분명히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로 보고를 올려서 이순신이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단독으로 거짓보고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근데 정작 부산왜영 방화사건의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을때 고문을 받으러 서울까지 끌려간건 이순신밖에 없다. 만약 정말 부산 왜영 방화사건을 조사하고자 했다면 이순신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부하이자 왜영방화사건의 관계자인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고문을 받았어야 하는데 정작 고문 받은건 이순신 뿐인 것이다.안위랑 김난서는 어쩌고?

두번째는 가토의 도해. 정유년(1597년)에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월 1일.[25]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서 이순신에게 출격명령을 내렸는데, 문제는 이순신은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다.[26]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리자 이미 가토는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고, 이순신은 출진을 하려고 해도 이미 가토가 도착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출진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이를 가지고 이순신의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 일단 이순신은 공무차 다른 곳에 있다가 보고를 받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만약 나간다고 할지라도 이순신의 함대가 가토를 잡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배가 판옥선보다 더 빨라서 잡으래도 도저히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부산과 한산도 사이에는 적들이 잔뜩 진을 치고 버티던 상태였기 때문에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가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무엇보다도 일본의 함대는 순풍이 불때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그 때가 되면 오히려 조선함대는 역풍을 맞게 되서 간다고 해도 적 함대의 역습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게된다.[27]

하지만 이순신을 처벌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있던 선조에 의해서, 이순신이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하였고 원균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후인 3월 4일 감옥에 투옥된 이순신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한차례의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이때 압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당시 실록에 나온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등의 이러한 언행 때문에 고신이 가벼웠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그 전까진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던 이순신이 이 때의 후유증으로 이후 잔병치레가 잦아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백의종군 이전에도 이순신은 며칠동안 앓았다는 기록도 있고, 거기에다 이순신은 당시 적잖은 나이였으며 게다가 엄청난 주당. 설상가상으로 몇 년 동안이나 미칠듯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다. 심한 고신을 받지 않았더라도 저 지경이면 누구든 몸 망가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건강 악화와 고신은 큰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 때 치명적일 만큼의 고신을 받았으면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에 그 명량 해전을 치를 수 있었겠느냐?는 말도 있다.[28] 고신과정이 잘 드러나있는 남이의 옥사를 살펴보면, 사극판타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무작위로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곤장 20대~40대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때문에 심한 고신이라고 해도 당장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29]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순신이 받은 고신으로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정탁이원익의 필사적인 만류로 고신은 한차례에 그쳤고, 4월 1일 28일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떠나 그곳에서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당시 이순신이 어느정도로 어떻게 고문받았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순신은 한차례 형신을 받았다고 정탁의 신구차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이다. 물론 고통스러웠겠지만 강한 고신은 결코 아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나온 날 술을 마시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말을 타고 떠난다. 혼자서 말을 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심한 고신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지금에서 보면 아무 죄없는 수군 최고 사령관을 억지로 잡아가서 고문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긴 하지만.

난중일기에 이순신 본인이 쓴 기록에 의해도 출옥한 4월 1일에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나서 다음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거리로도 90km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몸이 상할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면 이틀뒤에 이 거리를 말 타고 달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부수적 이야기가 되지만, 위에서도 서술된 "1583년 10월, 병마절도사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이 부분이 완전히 재현되었다. 이용을 이원익으로 바꾸고, 발포만호 시절을 부산왜영방화사건으로 치고, 자기 종사관 부분을 정탁과 만류하고, 사실상 변호하는 모양새로 치면 이순신은 정말로 데자뷰적 군경력을 지내게 된 셈이다.

6. 명량 해전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이런 망할 놈 '소멸'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실상은 원균의 용렬한 지휘에 기강이 해이해진 조선 수군이 왜군의 기습을 받자 전부 육지나 바다로 도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선군은 장비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크게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할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사들의 질이 낮아 사기를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이런 대규모 도주가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장비 활용에 대한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다. 임진왜란 5년간 이순신이 지휘해서 벌인 해전만도 20회가 넘는데 운용교리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것도 마찬가지. 5년간 전쟁을 했던 군사들이면 이미 베테랑이다.[30] 이런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해보자. 차라리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떼를 이겼다는 속담이 더 잘 들어맞는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라는것은 중요한 거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척[31]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32]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0척을 수습해 진도로 퇴각했다.[33] 이 전함들은 이후 명량 해전에 투입되는 전설의 12척 중 10척이었다. 또 이후에 비정상적인 조선 수군의 전투력 회복을 근거로 이 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패전 책임은 분명했다. 그 후 원균의 생사는 불명. 왜군에게 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지만 전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 처참한 패전으로 조선은 되찾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상실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여담으로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34]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통제사였다.

다행히 배설이 미리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제수되자마자 배설을 추궁해 배설이 숨겨놓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내 함대를 인수하러 출발한다. 이 때 곧바로 남해안으로 가지 않고 초계->하동->구례->곡성->순천->보성 순으로 전라도 일대를 훑으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거나 소개를 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35]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36] 그 와중 배설은 재탈영을 해서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 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보통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쳐 축차전술을 펼친 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다르다. 당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대장선이 패배하는 대로 도망가기 위해 뒤에서 미적거리다, 거제 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을 구원하러 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배들도 뒤늦게 전투에 동참하였다. 즉, 믿기지 않게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단 한 척으로 전투의 중반부까지 왜군의 전선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그에 실린 화포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정 무기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훨씬 열세였던 왜군의 해전 무기체계(조총과 일본활, 칼)와 명량 주변의 지형 및 해류, 마지막으로 이들 요소를 더 굳건하게 만든 이순신의 전투 의지였다.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공깽한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 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과 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 혹시 진짜로 무슨 능력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칠천량 패전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37]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 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 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38]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서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6.1. 명량 해전 당시 전과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우선 왜군 함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한편 31척을 격침하였다는 기록에 대해, 확실하게 격파된 배의 숫자만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100여 척을 격파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이 낮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선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 모두 31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후방에 있었을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주살한 일이 100여 척 격파의 근거로 들어지기도 하지만,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선봉에 선 장수이고, 애초에 일본 수군이 함대를 펼칠 때 지휘관이 후방에 위치한다는 것은 일반론에서 의거한 것으로, 검증된 사항이 아니다. 특히 세키부네로 구성된 함대 중 31척을 격파했다는 내용은 당시 일본 수군 전체의 1/4이 수장되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당연히 절대 적은 전과가 아니라는 것.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명량 해전 참고. 일단 100척 격파의 근거는 '구루치마 미치후사 주살'이 아니라, <고산공실록>에서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바다에 빠졌으나, 다카도라 부하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벗어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군감이 선봉에 선 함대도 있는가? 군감은 정치장교가 아니다. 또한 133척이라는 것도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내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라는 난중일기의 구절로 보아 이순신이 일단 적 함대와 접선하자마자 직접 교전에 들어간 것만 센 것일 확률이 높으며, 난중일기에는 명량해협에 접근한 왜선 숫자를 제대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온다'고만 했을 뿐, 선조실록에서도 130척은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온 것을 센 숫자라고 나와있지 전체 척수는 나와있지 않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왜선 전체의 숫자를 정확히 가늠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교차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 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 수군을 토대로 60x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 수군이 과연 수부같은 비전투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 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 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 이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대로 옮겨 썼을 뿐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 해전 참전 전체 왜군 선박수가 133척이라고 분명히 단정지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의 숫자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당시 왜군의 규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39]

6.2. 철쇄설

역사스페셜에서는 명량의 좁은 해역과 급한 조류를 이용, 명량쪽에 배의 이동을 묶어두는 함정을 설치해 적의 연쇄충돌과 행동불능 상태를 이용한 뒤에 포격으로 쓸었다고도 하는 거 같지만, 그건 이 믿기지 않는 전적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이끌려 오히려 단견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우선 당시 왜군의 대선단을 빈약한 쇠사슬 같은 것으로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목선이라고 해도 화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탑승자들의 수를 더하면 수백톤에 달하는 무게인데다, 이정도의 무게를 가진 움직이는 물체를 저지할 쇠사슬을 만드는건 현대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40] 그리고 그런 데에 쓸 쇠사슬이 있었다면 차라리 화살이나 포환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는 게 정설. 이 철쇄설이 기록된 "호남절의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철쇄설을 믿으려면 김억추가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해버렸다(...)는 기록도 믿어야한다. 더구나 이 책이 나온 건 1907년. 그런데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인데, 이를 통해 이전부터 철쇄설이 해당 지방에 돌았던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일본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정한역일한사적에도 일본군의 명량 패전원인은 이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된 이유로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일부 시중 책이나 인터넷 문서 중에 '철쇄를 만들 철이 있었으면 그 철로 대포를 만들었겠지! 기록에도 이순신이 철이 부족해 아우성이시잖아!'하는 글이나 주장이 있으면 살포시 씹어버리자.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쇠붙이는 동철, 즉 구리다.@

사실 철쇄는 수로 차단용이 아니라 항만 방어용으로 널리 쓰이던 것이다. 당장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모두 항만 입구에 철쇄가 설치돼 있었고, 이중 전라좌수영 철쇄는 설치 포인트가 현재도 사적지로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용도로 널리 쓰여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도 투르크 함대를 막기 위해 철쇄를 설치하자 메메드 2세가 함대를 통째로 육로 운송하는 것으로 대응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보통 부표와 부표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적에게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안 걸린다. 애초에 접근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이다. 이런 항만방어용 철쇄가 우수영에도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우수영은 명량해협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우수영 수비용 철쇄가 울돌목 차단용 철쇄로 오인된 것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해석과 연계해서 명량 해전 자체의 결전장이 해협 한가운데가 아니라 우수영 앞바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이 견해는 이민웅 교수(해군사관학교 교수로 현역 해군 중령)의 저서 임진왜란 해전사(2004)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다. 사실은 애초에 관심 가진 학자도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이 지지를 못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울돌목이 지닌 최소한의 지형상의 유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그나마 소수로 길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우수영 앞바다는 그런 이점도 없는 허허벌판이라서 이런 곳에서 싸웠다가는 수적열세로 인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7. 전설이 되다

비록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일본군이 동원한 함대는 300척이 넘었기에 얼마 못 가 이순신은 함대를 물려 전라도 서해안을 일부 내준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이순신은 서해안에서 일본군을 전부 몰아내고 제해권을 되찾았으며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통제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얼마 못 가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그 뒤 명나라의 수군 제독인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무능하고 탐욕스런 인물이었으나 이순신은 처음에는 명 수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하여 그에게서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 한편, 이후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이 때문었는지, 진린은 이순신에 대하여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경칭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는 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는 실로 대단한 일인데, 중국어에서 야(예)는 '아버지' 등의 뜻이 있고, 노야(라오예)는 '나리, 마님'이란 뜻이 있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으로 대국에서 지원을 온 천병의 수장이 소국의 수군 장수를 나리라고 높여 불렀단 뜻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4성 장군인 미군 해군참모총장이 2성 장군인 대한민국 1함대 제독을 오히려 상관처럼 예우하며 말을 할 때 'Sir'를 붙였다는 얘기다. 게다가 진린은 1543년생으로 1545년생인 충무공보다 나이가 많다는걸 감안하면 상당한 표현이다.

소설가 김경진은 이 부분에 대하여 진린 혹은 다른 명나라 장수에 의하여 이순신의 전공이 명 신종 만력제에게 상주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나, 명 신종실록 및 명대의 역대 상주문 중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문이 있다. 참고로 이순신이 명 신종실록에 보이는 것은 단 한 차례, 동정군이 명나라에 복귀한 1599년 전사한 이순신에 대해 포상을 명하는 만력제의 조칙에서일 뿐이다. 이 때 전해진 물품이 아직도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신종 만력제가 이 당시를 전후해서 30년 동안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신하들도 만나지 않는 엽기적인 태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후에 정조실록에서 보면 확실히 명나라 직책으로도 수군 도독으로 된걸 보면 올라가긴 한 거 같은데 이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명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명 황실에서 한 고문 방법이 동시기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생각한다면, 당대 양 국가 모두 껄끄럽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란 생각도 가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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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후 왜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한다.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왜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00척이 격침되고 50척만이 도주했다.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항복, <백사집>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에 무능한데다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그의 죽음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노야(老爺)[41]가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라며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대부분의 명군과는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가 옮겨지는 데에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는 대목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지경. 한국 역사를 통틀어 이 정도로 민초들의 경애를 받은 위인은 없었을 것이다.

8. 사후 조선에서의 평가

본인이 살아 돌아와 들어도 민망하겠다 싶을 정도로 칭송에 칭송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혀 아깝거나 부풀려졌다고 할 수 없는, 실로 하늘이 내린 영웅이다. 이순신은 사후에 이미 조선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왕이나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인물들에게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고 있었다. 사실 이순신 이전까지, 군사 문제에 대한 비교 기준은 중국이였다. '손빈, 한신의 계책', '송나라 악비'와 같이 중국 장수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비교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이후에는 조선의 군사 문제에 대한 비교 기준은 이순신이 되었다. 실록에서 대놓고 신하들이 군사를 논할 때 "순신의 계책에 의하면..."이라고 운운할 정도. 중국 역사에 능통한 조선의 사대부가 보기에도 이순신 만한 인물이 중국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도 있었으며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중략)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후략)
ㅡ 《조선왕조실록》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

상께서 말씀하셨다."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ㅡ 《승정원일기》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이원익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후략)
이항복,《충민사기》

수군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ㅡ 《달천몽유록》, 1600년경 쓰여진 소설.[42]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ㅡ 류성룡,《징비록》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43]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분뿐이다.
ㅡ 김육,『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거인(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 서평(李西平: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휴,《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44]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효종,《조선왕조실록》효종 11년/1659년 윤 3월 30일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숙종 《현충사 제문》

이순신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징징거리지 말고 이순신처럼 해봐라
ㅡ 영조,《조선왕조실록》영조 20년/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근데 이건 박문수가 무능한 게 아니라 이순신이라서 가능한 것 같은데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제가 이순신이 아닌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박문수,《조선왕조실록》영조 26년/1750년 7월 3일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승사록》[45]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정조,《홍재전서[46]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정약용,《경세유표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위치 때문에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가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을 선조가 붙인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

일각에서는 이순신을 두고 '군사독재정권이 띄운 조작된 영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47] 이는 정말 근거 없는 소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군사독재정권이 파시즘적 대중동원을 위해서 이순신의 이미지를 이용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으며, 그 당시, 정확히는 유신정권의 성립 이후 하성군 선조의 말도 안되는 대우에도 국가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점을 부각시켜 독재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던 역사학계의 흑역사이다.

다시 돌아와서 물론 후세의 독재정권이 그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와는 별개로 이순신의 역사적 공적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이순신은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영웅으로써 그 이미지가 독재정권에 의해 이용된 것이므로, '조작된 영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시대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도 있다. [48] 순조 시대까지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독재정권으로 '영웅성'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독재정권이 이순신의 '영웅성'을 이용한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에 이순신 같은 명장이 조선왕조 장수들의 모범이 되다 보니 정말 사정이 어려워도 "'이순신은 했는데 넌 왜 못해?!"'라고 갈굼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중 한 예가 바로 박문수(...). 박문수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시절 중국 선박들이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숱하게 행하자 이를 단속하기 위해 함선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예산 지원을 조정에 건의했었다. 하지만 영조로부터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대를 만들었는데? 네가 알아서 해봐"라며 묵살당했다.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조상을 둔 죄(?)로 소질 적성 무시한 채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호랑이에게서 강아지가 나올리가 없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이순신 이후 300여 년간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무려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 배출했다.[49] 그래도 무반 명문가로서 조선 왕조 내내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당장 이순신의 아들, 조카 다 하나같이 이순신의 밑에서 종군했고, 조카 이완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자 이훈과 이신도 각각 이괄의 난, 정묘호란때 용전분투하다 전사했다. 말 그대로 온 집안이 국가유공자인 셈.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전사)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가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윤휴가 등장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서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9대손 이용희는 병인양요에 참전했다. 또한 그 유명한 삼도수군통제사에도 역대 208명의 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는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으로 많다. 덕수 이씨와 앞의 두 성씨의 인구수 차이를 고려하면 놀라운 저력.

후손들도 이런 내력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는지,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혼란스러워 했던 당시 실각하여 운현궁에 짜져 있던 대원군에게 이순신의 8대 후손인 이문영이 배알했다. 흥선대원군이 일본을 물리칠 방안을 물어보자 이문영은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자신도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도 어찌 잘났겠는가하고 대답했다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을 이끈 구로다 기요타카가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실없는 대답 같지만, 사실은 흥선 대원군이 먼저 놀리기 위해 꺼낸 질문에 이문영이 맞받아친 농담에 가깝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도 이순신의 후손 중 12명이 독립운동을 하였고, 10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3년 1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민화도 이순신의 후손이다. # 이민화는 김좌진의 부관으로 김좌진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성립 이후 손이 귀해지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직계는 사실상 단절되었고 종친회 내부의 알력다툼속에 충무공 유물이 암시장에 나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

외국 사이트에도 소개되어 있다. # 영어를 할 수 있다면 읽어보자. 이에 따르면 이순신은 어깨에 박힌 총알을 입으로 빨아내 뱉는 것만으로 일본군 함선 2척을 폭파시켰고 12척의 우주선(?)을 운용했다고 한다.

역사를 다루는 외국 유투버에 이순신의 일대기를 알기쉽게 시리즈별로 연재했다. # 외국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찬사는 덤.


[1] 추가로 "아이 나이가 50이 지나면 북방에서 대장이 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2] 이와 함께 이순신이 중인출신임에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낭설도 같이 퍼졌는데 이순신의 본가인 덕수 이씨는 엄연한 양반가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역시 양반이 맞다.[3] 율곡 이이와의 일화 한 가지. 이이가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중 "우리 친척 중에 이순신이라고 똘똘한 아이가 있다면서? 얼굴 한번 보세."라고 말을 전했는데, 이순신은 "율곡 선생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될 것 같다."라면서 "인사권을 가지신 동안에는 만나뵙지 않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4]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5] 사실 위작이라기 보다는 칭기즈 칸이 이랬으니 절망하지 말아라라는 의도로 만들어졌는데 어쩌다 보니 실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되었다. 처음 이걸 지은 사람도 나중에 이게 돌고 돌아서 누가 실제 어록이라며 소개해주는 바람에 황당해했다고 한다.[6] 방진이 사망한 다음 온양의 집과 재산은 전부 이순신이 상속받는다. 현재 충남 아산의 현충사 이순신 고택이 방진의 집이다.[7] 민선6기 보성군수가 보성과 이순신이 연관이 많다면서 이순신을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근데 정작 조선시대에는 상피제라고 해서 고을 지방관을 반드시 그 고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으로 임명하도록 했기 때문에 방진이 보성 사람일 리가 없다(...).[8]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예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방진에게 이순신을 소개시켜줬다.[9] 성웅의 부인답게 방씨부인도 굉장히 당차고 슬기로운 성격이였다. 가장 잘 알려진 얘기로 부인이 어릴적 밤중에 도둑이 집에 들자 명궁인 아버지 방진이 활로 응사했다. 허나 도적들은 이미 내통자가 있어 화살을 미리 치운 후 였다. 거기다가 밤중이라 시야가 좁아져 속수무책이던 상황. 그때 아직 어린 방씨가 화살은 아직 많이 있다며 한 무더기의 화살을 가져왔고 그 얘기를 듣자 도적들은 지레 놀라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화살이 아니라 여인들이 베를 짤때 쓰는 대나무였다.[10] 버드나무의 껍질이나 잎은 해열, 진통에 효능이 있다. 버드나무에서 나오는 성분으로 만들어낸 약품이 바로 그 유명한 아스피린이니 뜬금없는 응급처치는 아니였던 셈[11] 병과에서 4등을 했다. 한편 이 4년간의 공백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박중훈이 이순신 역할을 맡은 천군이다.[12] 발포진의 관사에 수령이 오래 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 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다고 제지한 일.[13]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가 불법점거하여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추후 통일이 되면 영토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곳.[14] 백의종군 자체는 보직해임 정도의 형벌로 장군을 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니다.[15] 토벌군은 전사자 없이 여진족 전투원 380명을 죽이고 여진 가옥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16] 만포진의 병마첨절제사는 특별히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선조는 이순신을 당상관급 장수로 임명할 생각을 굳힌 듯.[17] 선조 22년(1589) 1월 21일(기사) 1번째기사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을 보면 이산해, 정언신이 이순신을 불차채용 대상으로 천거했다.[18] 이후의 승진 속도도 비슷하다. 조광조는 그 뒤 6개월만에 동지성균관사였던 종2품이 되었고 종2품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품제와 같았다. 그 후 4개월 뒤 정2품인 사헌부 대사헌이 되는데 이순신 역시 1년 뒤인 1592년 한산도 해전을 계기로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다[19] 순천도호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20] 사도진-첨사, 여도진-만호, 녹도진-만호, 방답진-첨사, 발포진-만호[21] 육-수군을 통틀은 최초의 승전은, 임진강변에서 부원수 신각의 군대가 군을 무찌른 전투가 있다. 단, 전투 직후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확인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신각은 이기고도 적전도주 죄목으로 참형당한다.[22] 사실 왜군에 의해 부상당한 병사는 1명 뿐이었고 나머지 2명은 수급을 탐낸 원균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전공을 가로채려다 좌수영 측에 부상자를 발생시킨 것.[23] 사실 이 때문에 조선은 하다못해 세금과 진상품도 조운선을 통해 수로로 조달했다. 단 수레가 안쓰인 것은 아니다. 실록 기록을 보면 수운에서 받은 물자를 수레로 옮기기도 하고 함경도 등지에서 자주 쓰였다.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 하기도 함참조[2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기타지마 만지 저/경인문화사/2008 ,『이순신과 히데요시』 가다노 쓰기오 저/우석출판사/1999[25] 사람들에게는 요시라가 1월 11일에 가토의 도해 정보를 처음 말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가토의 도해 정보는 1월 1일에 처음 입수 되었고 1월 11일에는 요시라가 왜 움직이지 않냐고 채근하는 내용이다.[26] 보통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파발이 가는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27] 이순신의 함대가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출정했으므로 죄를 물을 수 없단 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이순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부풀려진 주장일 뿐이다. 실제로 이순신 함대가 출정한건 사실이나 이미 조정에서 이순신에 대한 파직이 모조리 결정된 이후 나간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28] 이순신이 백의종군 시작 후 불과 6개월 뒤에 명량 해전이 일어났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명량 해전 초반에는 완전히 통제사 무쌍 급으로 이순신의 배 혼자서 다 싸웠다.[29] 다만 역모 사건과 관련되었거나 기사환국에서 오두인, 박태보 등을 문초할 때처럼 왕권과 관련된 죄목이 명백할 경우엔 죽을 수 있을만큼 강한 고신이 가해질 수도 있으나, 전후사정을 봤을 때, 이순신에게 강한 고문이 가해졌다기 보담은 남이의 옥사에서처럼 사실관계를 우선 밝히는 양상의 고신이 가해졌을 것이다. 또는 이순신에 대한 분위기가 선조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했을 가능성도 있다.[30] 더군다나 전사자가 많아서 베테랑이 적었다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그 많은 해전을 치뤘음에도 전사자 숫자는 적었다.[31] 주력 전선 판옥선과 소수의 거북선, 후선과 협선 및 척후선 포함[32] 조선 수군의 주임무는 일본의 해적을 감시하고 임진왜란의 경우와 같이 일본의 정규군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해상전력 대부분을 충청, 전라, 경상의 세도에 집중시켜 놓았다. 다른 지역 해상전력의 경우 수군절도사 직위를 해당 지역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할 정도로 유명무실했다.[33] 배설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배설 문서 참조.[34] 배설은 도망갔고, 김억추는 명량 해전 이후 육진으로 전근 가버렸다. 그 이후 임명된 수사들(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은 전부터 이순신 휘하에 있던 부장들이라 지휘체계에 큰 혼선이 오지는 않았다.[35] 원문은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36] 근데 선조가 참으로 멍청한 소리를 한것이 수군을 폐하면 일본 수군이 서해를 장악하고 그러면 수도인 한성으로 오는 길이 제대로 열리게 된다. 또 이전처럼 평안도로 가서 중국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육지에서 고립되다가 그대로 자멸해 버리는 결과만 낳게 될 뿐이다.[37] 일본에선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 지휘관인 진주목사 김시민을 모티브로 한 '모쿠소(목사)'라는 괴물을 만들기도 했다.[38] 소설가 김경진은 자신의 소설 임진왜란에서 직산 전투는 단순한 양군 충돌에 불과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 직산 전투는 도합 1만에 달하는 양군 병력이 6차례에 걸쳐 충돌한 상당히 큰 전투로 일본군은 선빵을 날린데다 지원군으로 기병대까지 투입하고도 명군을 이기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직산 전투로 인한 일본 측의 사상자는 전무했고 일본군의 전력도 거의 온전이 보전한 채로 전투가 끝났기 때문에 사실상 직산 전투의 의의라고 해봐야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 막은 것에 불과하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일본군을 밀어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39]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 척이든 300여 척이든 500여 척이든 새까맣게 쳐들어오는 상황이고, 그런 규모의 적함을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3척에 불과했다. 이렇게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적함이 몇 척이나 되는지 일일이 세고 있을 여유가 없지 않은가.[40] 다만 쇠사슬이 아닌 현수교 지탱등에 쓰이는 강철 케이블이라면 가능한데, 손가락 두께의 특수강 수천가닥을 꼬아서 만드는 이 케이블 기술은 1900년대 초에나 등장했다(...). 진짜 쇠사슬로 왜군 함선을 막았다면 통제사또께서 어디서 외계인 고문을 하신 걸지도... 비슷한 예로 중국 삼국시대 말 가 망할 때 장강을 타고 상류에서 내려오는 서진 군대를 양자강에 쇠사슬을 쳐서 막아보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는 기름 먹인 뗏목을 잔뜩 떠내려보낸 뒤, 거기에 불을 붙여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고 한다. 물론 쇠사슬이 저 정도 불에 녹아버릴 리는 없지만,(철쇄 중간의 부표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고작 뗏목의 질량낙하에 뚫렸다고 한다면 철쇄의 효력은 그저 안습일 따름(...).[41] 앞서 말했듯이 진린이 이순신을 부를때 쓰는 존칭이었다.[42]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43] 장순과 허원은 모두 당나라 안사의 난 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함께 수양성을 지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안록산이 이끄는 반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모두 충절을 지켰던 인물로 칭송받았으며 도교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44] 윤휴 이복 형의 장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백호전서를 읽어보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이순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45] 계미사행의 수행원으로 승사록은 사행을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이다.[46]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이순신 팬질(…)의 양대 산맥. 홍재전서나 실록 곳곳에서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침이 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47] 특히 2005년도 영화 '천군'에서는 북한 장교로 분한 김승우가 극중 대사로 "그건 남조선에서 만들어진 영웅 아닌가."라고 대사를 친다... 그런데 북한의 해군 최고위 무공훈장 이름이 이순신훈장인데?![48] 이게 한두번이 아니다. 임란 직후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 돈을 모아서 공적비를 세운 것부터 시작해 통영 백성들이 돈을 모아 사당을 세우기도 했고, 아예 통영 쪽으로 임관한 현감이 자비를 털어 공적비를 세운 것까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사당과 공적비는 10개 이상이며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있다.[49] 반대로 율곡 이이의 계열인 문성공파는 문과에만 줄줄이 급제 했다. 이는 덕수 이씨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성공파 중심의 문골세력과 충무공파 중심의 무골세력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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