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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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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소속 선수
종목 이름 역할 등번호
축구 안정환 감독 -
씨름 이만기 선수 49
농구 허재 선수 90
야구 양준혁 선수 10
육상 이봉주 선수 41
체조 여홍철 선수 7
레슬링 심권호 선수 55
사격 진종오 선수 5
격투기 김동현 부주장/선수(GK) 8
테니스 이형택 주장/선수 3
배구 김요한 선수 25
빙상 모태범 선수 89
수영 박태환 선수 11
야구 김병현 선수 18
유도 김재엽 선수 88
태권도 이대훈 선수 77
배드민턴 하태권 선수 2
배드민턴 이용대 선수 45
펜싱 최병철 선수 9
연예 김용만 선수 19
연예 김성주 중계/선수 28
연예 정형돈 해설/선수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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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만기
李萬基|Lee Man-Gi
파일:이만기교수.jpg
출생 1963년 9월 16일[음력] ([age(1963-09-16)]세)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합천 이씨 (陜川 李氏)[3]
학력 무학국민학교[4] (28회 / 졸업)
마산중학교 (28회 / 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 (56회 / 졸업)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경남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5])
중앙대학교 대학원 (체육학[6] / 박사[7])
가족 아버지 이규상(1920~2004)[8]
어머니 고점례[9]
형 이만오, 이기섭
배우자 한숙희[10][11]
장남 이민준(1992년생), 차남 이동훈(1994년생)
장인 한기학[12], 장모 최위득
반려견 나라[13]
신체 183cm | 100kg[14] | 혈액형 출처 요망 | 300mm[15]
종교 불교
아호 태산(太山, 泰山)· 장당(場棠, 場塘)· 장우(場牛, 長雨), 공바
현직 인제대학교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16]
지방시대위원회 위촉위원
병역 면제(체중과다)[17]
종목 씨름
SNS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2.2. 은퇴 이후
3. 정치 행보
3.1. 선거 이력3.2. 소속 정당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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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씨름 선수, 씨름 해설위원, 교수, 정치인. 현재는 대학교수이자 방송인으로 주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2.1. 선수 경력

초창기에는 한라급 체급으로 시작해 백두급 선수들을 제치던 선수였고 [18], 이후 백두급으로 체급을 올린 뒤 천하장사 총 10회를 기록하며 씨름계의 전설이 됐다. 백두장사 18회 [19], 한라장사 7회까지 포함하여 각종 공식대회에서 도합 47번의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통산 전적은 345전 293승 52패(승률 84.9%)로, 역대 모든 씨름 선수들을 통틀어 최고 승률의 기록을 보유했다.



1회 천하장사 대회 때 최욱진 장사[20]와 2:2 상황 접전까지 갔고 마지막판에서 호미걸이로 제압하며 초대 천하장사가 된다. [21]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단 한번도 개인전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첫 우승이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앞으로 어떤 엄청난 씨름 선수가 나오던 절대로 깰 수 없는 기록인 초대 천하장사의 타이틀을 가져갔다.

원래 중간급인 한라급 출신이라 화려한 기술 씨름을 구사한 데다가[22] 경기에서도 깨끗하고 매너있는 자세로 씨름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가 백두급으로 올라가면서 화려한 기술 씨름에 덩치와 힘이 붙으면서 사실상 압도적인 수준으로 장기 집권을 했다.

실력 외적으로도 군살이 없는 근육질 몸매를 가졌고 [23] 수려하면서도 순진한 외모를 지녀서 씨름계를 넘어 스포츠계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여배우들과 스캔들도 많이 났었고, 강한 힘의 심벌 때문인지 여성들 특히 아주머니들한테 인기가 매우 많았다. 나중에는 여성 속옷 광고에 나오기도 했다. 단, 이 여성 속옷 광고는 '이만기가 아내의 속옷 사이즈를 기억했다가 딱 맞는 속옷을 사준다'는 컨셉의 것으로 씨름선수의 힘과는 크게 상관 없는 애처가 설정을 내세웠다. 캐치프레이즈는 "아내에게는 저 이만기도 넘어갑니다."인데, 실제 부인과 출연했다. 어르신 세대의 천하장사에 대한 호감 이미지는 전부 다 이만기 한 명이 쌓아올린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역 선수 시절 당시 205cm의 거인 씨름선수 '인간 기중기' 이봉걸,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등과 3이(李)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봉걸과 이만기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비유되며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또 다른 라이벌인 이준희와의 결승 대결도 매번 치를 때마다 지금의 야구나 축구 더비 못지않은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1980년대 당시 이만기의 인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만기를 몰라야 서울대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즉 이만기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세상과 담 쌓고 공부해야 명문대 간다는 뜻이다. 비슷한 얘기로 사법시험 합격자가 조용필이 누구냐고 물어봤다거나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역대 최초로 만점을 받은 학생이 "H.O.T.가 뭐예요?"라고 물어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씨름의 최고 인기 시절에 워낙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에 이렇게 한 선수가 계속 독식을 하면 씨름판이 재미가 없어진다는 이유로 프로씨름을 주관하던 한국씨름연맹에서는 이만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판부터 이만기에게는 박한 판정을 주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심지어 이만기가 왼손잡이인 것이 강함의 이유라고 오른손으로 잡는 허리샅바를 먼저 잡고 왼손으로 잡는 다리샅바를 나중에 잡도록 프로대회 규정을 바꿨으며, 키가 작은 이만기를 견제하기 위해 원래 무릎을 꿇고 앉아서 샅바를 잡고 일어나서 시작하던 것을 일어난 상태에서 샅바를 잡고 시작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계속해서 이만기가 우승을 하자 결국 원래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만기가 판정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사례가 있는데 1985년 10월 4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8대 천하장사 씨름대회 중 라이벌 이준희와의 결승전 때의 일이다. 이만기가 첫 판을 이기고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두 번째 판이 열렸는데 이준희의 팔이 먼저 땅에 닿았음에도 심판은 이준희가 이겼다고 오심을 내리면서 1:1이 됐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데 이어 벌어진 셋째 판에서 이준희가 밀어치기로 이만기를 제압하며 2:1로 전세가 역전됐다. 그러자 격분한 이만기와 황경수 감독이 모래판을 뛰쳐나가 락커룸으로 향했다. 그러자 경기를 진행하는 연맹 측은 오히려 이만기를 향해 격분했고 이만기가 장외로 나간 시간이 기권 여부를 가리는 시간 기준인 4분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2분여쯤 흐르자 이만기가 기권을 했다고 판단하고 이준희의 천하장사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만기는 자신이 장외로 나가면 관중들이 웅성거릴 것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다시 나가서 겨뤄보겠다는 심산이었는데 막상 나가니 이미 판은 모두 끝나버렸고 이준희가 꽃가루 세례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필 이 장면은 전국으로 생중계 됐고[24] 이만기는 씨름연맹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25] 중앙 일간신문에 사과 광고까지 내라는 벌칙까지 받았다. 결국 이만기가 수천만원 상당의 금전적 손해를 보고서야 사태는 일단락됐는데 이후부터 이만기와 씨름연맹 간의 사이는 좋지 않게 흘러갔고 훗날 씨름계 주류와 이만기가 갈등하는 일까지 확산된다. 이 당시의 이야기는 예능인 무릎팍도사에서는 그냥 넘어갔지만 보통 언론 매체와 인터뷰 때는 꼭 이 흑역사가 들어간다. 특히 2011년 KBS를 통해 방영된 '천하장사 만만세' 2부에서는 이 경기 내용이 상세히 다뤄진다.

당초 본인은 천하장사 통산 10회 달성 뒤 씨름계의 정점을 찍고 최고의 자리에서 은퇴하려던 것이 목표였으나 그의 인생에 발목을 잡은 선수가 1989년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전직 씨름왕이자 현재 국민 MC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모래판의 악동" 강호동이었다. 다만 이 당시 이만기는 이미 은퇴를 준비하던 상태였고 인제대학교 교수로 임용이 된 상황이었던데다 후배 선수들인 황대웅, 김칠규 등도 이만기만큼이나 정상권에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더구나 당시 강호동의 체중은 130kg로[26] 이만기보다 더 무거웠고 나이 면에서도 20대 후반의 이만기보다 10대 후반의 강호동이 앞섰던 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은퇴 준비시기라고해도 아직까진 27세의 한창 나이였던 이만기가 그렇게 쉽게 당할수 있느냐는 의견도 많았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견이 도는 중인데 먼저 두 사람 다 역대 최고를 다투는 씨름 선수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서로 간의 장단점이 갈리는 터라 상성 상으론 강호동이 유리한 편이었다. 이만기의 장점이라면 장기 집권을 해온 천하장사로서의 경험과 최고 수준의 테크닉을 꼽을 수 있는 반면, 강호동은 체격이 워낙 좋은데다 유연함과 힘이 뛰어나고 나이도 젊었던 탓에 피지컬 쪽에 강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강호동은 이만기를 롤 모델로 삼고 중학교 시절부터 이만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자랐다고 했으니, 같은 프로로서 붙을 때도 분석이 잘 되어 있는 강호동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27]

이렇듯 이만기와 강호동의 매치업은 강호동이 우위를 가져가는 모양새였지만, 반대로 이만기는 강호동이 죽을 못 쑤고 밀리던 이봉걸을 상대로 상성을 발휘했다. 이렇듯 각자 간의 상성이 있으니 상대 전적만으로 따지기엔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편. 확실한 것은 강호동과 이만기 둘 다 역대 최고를 다툴 만한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였다는 것 뿐이다. 이후 이만기는 복수전에서 제대로 강호동을 이기고 1991년 3월 14일 은퇴를 하였다. 1990년 천하장사 4강전에서는 "깝치지 마라, 이 새끼야."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했다.[28]

2.2. 은퇴 이후

현역 선수 당시부터 워낙에 방송 출연이 잦았고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나오는 구수한 예능감이 좋은 편이라 은퇴 직후부터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다.

은퇴 직후부터 KBS 전속 씨름 해설위원이 되었으며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운동생리학 전공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은퇴 즈음부터 인제대학교에서 사회체육학과(現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직을 맡으면서 후진 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민속씨름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임에도 씨름계 주류와는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만기는 2006년 대한씨름연맹에[29] 바른 소리를 하다가 영구제명을 당했는데[30] 덕분에 씨름연맹은 개막장 소리를 들었고, 반대로 이만기는 더욱 존경받게 되었다. 이후 씨름 관련 행정조직이 대한씨름협회로 통합된 후 2012년 제40대 대한씨름협회 회장에 출마를 했지만 무산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연이은 국회의원 선거 패배와 씨름협회 회장 출마 무산 이후 KBS 씨름 해설위원은 그만 두게 됐고[31] 인제대학교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로 강의하고 방송 활동도 병행한다.

파일:attachment/lmkzz.jpg
2008년 2월, 무릎팍도사에서 나온 그의 종아리.[32] 1박 2일에서 은지원이 닭다리형 과자와 비슷하다고 했을 정도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807051540000201000002010700c72-001.jpg
국민 약골 이윤석과의 비교.

무릎팍도사에 나온 이후 뛰어난 말솜씨와 여전히 수려하고 듬직한 외모 덕에 방송 출연이 줄을 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 이후로 사실상 끊어진 민속씨름의 명맥 유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씨름 홍보 차원에서 방송 출연을 많이 하고 있으며 예능 출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릎팍에 나온 뒤 스펀지의 고정 패널이 되어 출연 중이었었는데, 주로 이휘재의 깐죽에 당하는 역할로 쏠쏠한 재미를 주고 있었다.

2010년 1박 2일에서 강호동이 제시한 도전장으로 거의 20년 만에 강호동과의 리매치를 자신이 다니고 있는 인제대학교씨름판에서 벌였다.[33] 결과는 2:1 이만기 승이며, 1박 2일 2010년 11월 14일 방영분에서 방송되었다. 그리고 강호동의 약속으로 유명한 씨름부 회식장면[34]을 온 국민이 안방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때는 강호동이 건재하였고 1기 멤버들로 구성된 전성기 시절이어서 대부분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

그러더니 자기야 백년손님에 출연을 했을 때 장모님과의 티격태격거림과 함께 짜증을 잘 내서 앵그리 만기로 불렀다.

겉보기와는 달리 겁이 많다. 몸보신에 좋은 소머리를 보고 놀란다거나[35], 을 보고 화뜰짝 놀란다거나 흔한 케이블 카를 타고도 떨어진다면서 호들갑 떤다거나 장모와 함께 놀이공원에서 놀때 바이킹이나 자이로드롭, 롤러코스터 같은 무서운 것도 못타고 500원짜리 장난감 차 타고 싱글벙글 했다. 예체능에서는 물까지도 무서워했다. 원래 운동 하나를 잘하면 다른 것에 서툴 수 있다.

2012년에는 채널A불멸의 국가대표에도 출연, 종합격투기 선수 김동현을 씨름 대결에서 휙 집어 던지며 아직 천하장사는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늘날의 사실상 강호동이 있기에 큰 영향을 준 인물임은 틀림없다. 앞서 서술한 1박 2일 명사특집에서 강호동은 출연분 내내 이만기를 깍듯이 모셨고 어릴적 목표이자 큰 꿈이었던 이만기와 중학교 시절 얼마 동안 집에서 동거하며 합숙 훈련도 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하며 고향 선배를 동경했다. 비록 세간에서는 이만기를 물리친 악동 이미지가 강했지만, 늘 존경해왔고 선망해 온 선배 선수에게 일종의 잡질을 행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더욱 더 열심히하여 인정 받고 싶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둘 다 은퇴한지 20여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좋은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며 씨름 관련 행사가 있으면 이만기가 섭외 요청도 해오기 전에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나서서 행동하는 편이다. 여러모로 인생관과 승부욕, 나아가 예능에서의 이미지 형성 및 관리에도 나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아예 반말이 컨셉인 아는 형님에서마저도 강호동이 유독 이만기에게만큼은 깍듯이 교수님 하면서 존댓말을 쓰다가 걸렸을 정도이다.

2017년 9월 7일 자기야 백년손님 방영분에서 라보 트럭의 후미를 들어옮기는 괴력을 보여줬다.# 후방에 진출하는 차량을 위해 잘못 주차된 트럭을 약간 옮겨줘서 힘을 보여주는 연출된 상황이긴 하지만, 1톤이 안되는 경차 라보 트럭[36]이라도 혼자서 트럭 후미를 반복해 들어옮긴건 연출일수가 없으니 역시 전직 천하장사 다운 괴력은 여전했다.

이후엔 자기야 백년손님을 끝으로 잠시 방송을 안 할줄 알았지만 2018년 12월 4일부터 TV조선 예능 아내의 맛에 아내인 한숙희, 둘째 아들과 함께 다시 출연중이다.

그런데 아내의 맛에 나와서 많은 악플이 달리고 있다. 경상도 남자가 갖고 있을 것 같은 편견과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 실제로 아내가 보살이라는 댓글이 가장 많이 보이고 있으며 본인도 이를 의식했는지 평소 부인이 갖고 싶어하는 200만원 호가의 건조기를 사주었다.

2019년 6월 13일에 첫 방송을 한 JTBC 뭉쳐야 찬다의 '어쩌다FC'에 씨름 레전드로 출연했다.

2019년 7월 16일에 첫 방송을 한 부산경남대표방송 KNN의 예능 '섬마을할매'라는 TV 프로그램에 단독으로 나오고 있는데 현재 시즌 2로 출연중이다.

2019년 8월 12일 냉장고를 부탁해이봉원과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리고 뭉쳐야 찬다에서 끊임없이 공격수를 시켜달라고 안정환한테 조르고 냉장고가 고장나기 직전이라는 이야기에 뭉쳐야 찬다에서 1골을 넣으면 새 냉장고를 사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또한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전형적인 토속 입맛이라서 유럽 여행을 갔을 땐 양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37] 콜라와 가끔 먹은 한식으로 연명하다가 8kg이 빠졌다고 하며 여담으로 이때 이만기의 차남 이동훈이 스튜디오에 녹화 구경하러 왔다가 MC들의 제의로 합석하게 되었는데, 젊은 시절의 이만기와 덩치와 외모가 굉장히 흡사하여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이만기의 선거 유세 때 이동훈도 함께 유세활동을 했는데 할머니 팬들이 이만기인줄 알고 동훈에게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2019년 중후반 갑작스럽게 인터넷SNS에서 씨름이 주목을 받게 되는 가운데 대한 씨름협회와 KBS에서 추진한 #1 #2 스포츠 예능으로 2019년 11월 30일부터 태백에서 금강까지 - 씨름의 희열 프로그램에서 공식 해설위원 및 멘토로 활약 중이다.

2020년 MBN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이스트롯에 출연, 4라운드까지 진출했다. 종영 후 보이스트롯 참가자들이 출연하는 파생 프로그램 '트롯파이터'에 고정으로 출연한다. KBS에서 진행하는 재난 탈출 생존왕에서 MC를 맡기도 했다.

2021년 청춘꼰대에 고정으로 출연 중이며, KBS2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스페셜MC로 출연한다. 후배 출연자인 영암군 씨름단 감독 김기태를 위해 출연한 듯. 씨름 경기 해설 역할도 겸하고 있다.

2022년 iHQ 자급자족 원정대에 출연 중, MBN에서 방영되는 레전드가 현역으로 돌아가 현역선수가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인 국대는 국대다에서 31년만에 씨름 꿈나무의 후원을 위해 현역 선수 복귀를 했다. 상대는 허선행이었다. 힘든 전성기 때 몸 만들기를 견디고 다시 모래판에서 대결을 진행하였다. 36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펼치며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다. 1승을 따는데 그쳤지만 "왜 레전드가 레전드라 불리는지 알겠다, 역시 이만기, 끝없는 노력과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등 시청자들은 이만기한테 박수를 보내고 있다.

2022년 7월 19일부터 9월 13일까지(매주 화요일) tvN 스토리에서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인 씨름의 여왕과 같은 해 10월 18일부터 12월 27일까지 씨름의 제왕에서 감독 겸 해설위원으로 출연했다.

2022년 7월 23일부터 동네 한 바퀴 시즌2[38]의 MC로 발탁되어 출연 중이다. 중장년층에게 인지도가 높으면서 체력이 좋아 매 회 촬영마다 수 km를 거뜬히 걸어다닐 수 있는 만큼 탁월한 캐스팅이라고 평가받는다.

3. 정치 행보

* 20대엔 천하장사
* 30대엔 대학교수
* 40대엔 국회의원
이만기가 본인의 아내에게 설명했던 미래 인생설계 내용.

국민의힘 계열의 정당에서 활동했으며 친박보다는 비박 라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에서 체육위원장을 맡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경력은 있지만[39] 당시에는 이 당의 핵심인 노무현이나 김경수 등이 경상남도 출신이라서 이만기 본인을 포함한 현지 주민들에게 지대하게 호감을 얻었기에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만기는 순수 운동선수 출신자로서 정계에 진출한 것이라서 정치적 감각이나 각종 시사 이슈에 대단히 무지한 사람이니 집권여당이라는 이유로 당적을 옮겼던 것도 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한나라당국회의원 공천 신청을 했지만,[40] 현역 국회의원 김호일에 밀려 떨어졌다. 당시 김호일 의원이 "한자로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른다"고 비방하였고, 빡친 이만기 측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이후 고소를 취하했다.# 근데 김호일은 배우자가 총선 시절에 저지른 선거법위반으로 인해, 2년 만에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후계자 김정부도 부인 때문에 당선무효형을 받는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며 국민통합21 창당 발기인으로 합류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발기인으로 합류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산시 갑 지역의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해서 지역사회에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김정부 후보에게 2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2년 뒤 김정부는 부인의 비리로 결국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2006년에 재보궐선거를 치렀고, 창원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과 경상남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이주영[41]이 당선되고 이후 2020년까지 이어지다 21대 총선에는 최형두 후보가 당선되었다.

탄핵 역풍 바람으로 초반에 앞서가다가 막판에 역전당하면서[42] 낙선했다. 덤으로 이 때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고, 재산의 절반을 날려먹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정치적 행보는 크게 보이지 않다가 2014년 6.4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43] 소속으로 김해시장 예비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당내 경선에서 김정권에게 패했다.[44]

이후 2015년 9월에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김태호 의원을 대신해 새누리당 김해 을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한다. 1월 11일에 먼저 출마선언한 황전원 예비후보가 사퇴하면서 김해 을의 유일한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되었다.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후보와의 양자대결이 점쳐지고 있다. 김해을은 기본적으로 새누리당 우세지역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이 위치한 선거구[45] 이다보니 노무현의 최측근이던 김경수 후보에게 어드밴티지가 있어 접전이 예상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우세한 정당에서 출마한다는 점에서 철새라는 비판이 있다. 이는 연예인, 선수 출신 정치인의 한계이기도 한데 정치적으로는 본인이 내세울 이력이 없으니 인지도를 담보로 우세한 정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선거전 여론조사에서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하다못해, 2016년 4월 4일 여론조사에서 김경수 후보에게 거의 더블 스코어 차이로 밀리는 것으로 나왔다. 당에서는 불안한지 김무성을 김해에 직접 보내서 선거운동을 해주도록 하였다.

파일:김무성 이만기.png
김무성은 지원 유세에서 이런 말도 했다. 그외로 "운동권 정당(민주당)이 나라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는 발언을 했었는데 역효과만 내고 지지율에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당에다 걸어놓은 초상화 중에서 김영삼, 이명박이 운동권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같이 걸어놓은 박정희는 김영삼, 이명박에겐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이명박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에 반대했다 투옥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친이는 정치 인생 내내 친박이랑 싸웠기 때문이다. 17대 대선을 앞둔 당내 경선에서도, 박근혜 후보와 대립하며 엄청난 네거티브 대전을 펼쳤다.


4월 7일 후보자 토론회에서 김경수 후보의 국보법 위반 경력을 공격하다가[46] 김 후보에게 "왼손잡이냐 오른손잡이냐"라는 질문을 해 냉소를 사기도 했다. 물론 이 문제는 '좌파냐 우파냐' 묻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경수 당시 후보는 공장에서 왼손 검지가 찍히는 사고가 나서 면제 처분을 받았는데[47] 이걸 문제 삼으려고 자신이 체중 과다로 면제 사유를 밝힌 이후에 저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김경수는 황당해하며 이런 질문까지 받아야 하냐고 할 정도였다. 운동권 출신이라 하도 많이 구속이 되어서 손가락이 멀쩡했더라도 병역 논란이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결과는 김경수 62.4% 이만기 34.4%로 참패했다. 참고로, 김경수는 더불어민주당 당선자 중에서 득표율이 제일 높았고, 20대 총선 영남지역에서 새누리당이 민주당에 진 선거구 중 최다 표차 패배지역이 되었다.

낙선 이후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등의 교과서 국정화 반대 사진과 함께 빨갱이는 즉시 사살하라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리트윗해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김해시 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을 지냈으나 당무감사에서 서청원, 유기준, 박민식, 류여해 등과 함께 물갈이 당했다. 백년손님 PD 인터뷰에 따르면 더 이상 선출직 공직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20대 총선에 출마할 때도 가족들과 주변에서 엄청나게 출마를 반대했다고 하는데 본인도 낙선할 것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의 상대였던 김경수 의원이 2018년 4월에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경상남도지사로 출마하면서 의원직을 내려놓게 되어 자리가 비게 되었고, 출마도 가능한 상황이지만 여전히 계속 백년손님 등 방송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정치에 미련을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인다.[48] 다만 완전히 정치에 미련을 못 버린지 인력거 체험으로 청와대 앞을 지날때 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49]

다음 총선에 출마하려면 90일 전인 2020년 1월 16일[50]까지 방송에서 다 물러나야 한다.[51] 그리고 결국 하차하지 않으면서 다음 총선 불출마가 확정되었다.

2021년 이후로는 김해시장에 재도전하거나 대학교수 경력을 살려 경남교육감에 도전할 수 있다는 지역언론의 보도가 있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52] 2022년부터는 KBS 동네 한 바퀴에 고정 출연하며 방송인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치 활동은 사실상 접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3.1.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마산 갑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4,771 (27.02%) 낙선 (2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김해 을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38,973 (34.40%)
역대 선거 벽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이만기1.jpg
파일:이만기2.jpg
17대 총선 (경남 마산시 갑) 20대 총선 (경남 김해시 을) }}}}}}}}}

3.2.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2000 - 2002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2 탈당[53]

[[국민통합21|
파일:국민통합21 흰색 로고타입.svg
]]
2002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2 - 2003 탈당[54]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6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6 탈당[55]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6 - 2012 복당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20 당명 변경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합당[56]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2020 - 현재 당명 변경

4. 기타



[음력] 7월 29일.[2] 성장한 곳은 창원시 마산합포구.[3] 목사공파 34세손 ○기(○基), ○균(○均) 항렬.
(족보(1)족보(2))
[4] 現 무학초등학교[5] 석사 학위 논문: 씨름선수들의 기술사용 실태에 관한 연구 (1989)[6] 운동생리학 전공[7] 박사 학위 논문: 트레드밀 運動負荷를 통한 運動選手들의 총 항산화 能力과 항산화효소 活性 變化에 관한 硏究 (2001)[8] 李煥世, 1920.1.25. ~ 2004.5.12.(족보)[9] 제주 고씨다.[10] 본관은 청주(淸州), 1966년생 경상북도 포항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11] 동네 한 바퀴 경상북도 포항시 편에서 본인의 처가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12] 생전에 건축업을 했다고 한다.[13] 종은 말티즈.[14] 뭉쳐야 찬다에서 공개[15] 동네 한 바퀴에서 공개[16] 1989년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91년부터 인제대학교 사회체육학과(스포츠헬스케어학과의 구 명칭) 강사로 재직하다가 박사 학위를 받은 2001년에 전임교원으로 임용되어 조교수로 시작해서 현재는 정교수다.[17] 당시만 해도 100kg이 넘어가면 체중과다로 면제가 됐다. 씨름선수들이 흔히 면제받는 원인으로 강호동도 이걸로 면제되었다. 물론 지금은 체중이 아무리 많이 나가도 체중 자체로는 면제받지 못한다.[18] 이 당시 한라급은 체중 85~95kg, 백두급은 95kg 이상 무제한이었지만, 대체로 가장 무거운 선수는 120~130kg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그 전성기 그의 신체조건은 180cm, 105kg였다. 사실 천하장사=백두장사의 공식이 보통 성립될 정도로 백두급이 천하장사를 하는 씨름판에서 한라급인 선수가 백두급 선수들을 상대로 이기고 천하장사로 등극했다는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의 업적이다. 게다가 그 때는 기술보다 힘과 체중에 많은 비중을 두는 씨름이 대세였기 때문에 이만기의 전설이 더더욱 빛난다.[19] 최다 기록이었으나 이후 이태현과 타이를 이뤘는데 이태현이 은퇴 이후 복귀해서 2회 백두장사를 더 기록하여 20회로 기록이 깨졌다.[20] 당시 105kg의 거구 선수로, 심지어 최욱진 장사는 이틀 전에 다른 경기에서 이만기 선수를 이긴 상황이었다.[21] 이 때도 그렇고 커리어 내내도 그랬지만 이만기의 주특기는 그 탈인간급의 힘에서 나오는 들배지기였고, 호미걸이라는 기술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판 전까지 한 번도 시합에서 써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22] 1만가지 기술을 가졌다 하여 이름이 '만기'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별명 유래가 1만가지의 수를 쓴다는 뜻의 '만수(萬手)' 별명을 가진 유재학 감독인데 1만가지의 기술을 뜻하는 만기의 한자 표기는 萬技로 이만기 본명의 한자 표기인 萬基와는 마지막 글자가 다르다.[23] 심지어 백두급 선수 시절에 복근까지 있었다. 당시 백두급은 무제한급이었는데 그런 선수에게 복근이 있다는건 그만큼 타 백두급 선수보다 몸무게가 덜 나간다는 소리이다. 그 체격으로 본인보다 체중이 더 많이 나가는 선수들을 모래판에 메다 꽂고 다녔다. 그때 당시 이만기와 겨뤘던 최욱진, 홍현욱 등 백두급 선수들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모두들 스모 선수들처럼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고 힘은 정말 엄청났으나 대부분이 복근이나 근육질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24] 1980년대 중반까지는 프로씨름의 인기가 프로야구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났다. 무려 메인뉴스 시작마저도 지연시킬 정도로 당시 씨름의 대중적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고 금메달까지 획득한 역도선수 이민우가 씨름선수로 전향했을 정도였다.[25] 당시 천하장사 1품(준우승) 상금이 1000만원이었는데 그걸 벌금 목적으로 몰수해버렸고 괘씸죄의 죄목으로 1000만원의 벌금을 추가 부과했다. 결론적으로 2000만원의 손해를 본 셈인데 이 당시 강남구 일대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2000만원 수준이었다고 한다.[26] 강호동 본인이 1박2일 백령도편에서 '현역보다 20kg 이상 체중이 빠졌다'라는 발언을 했었고 현재 체중은 약 110kg 남짓임을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엔 130kg을 상회하는 체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27] 여담으로, 강호동은 황경수 감독의 스카웃을 받고 마산중으로 전학 와 씨름을 배웠는데 이 당시 이만기도 황경수 감독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강호동은 이만기 집에서 하숙하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이만기와 강호동은 사형과 사제 같은 관계였다 할 수 있다.[28] 방송에서는 깝죽거리지 마라로 약간 순화(?)되어 알려져 있다. 이때 강호동 본인이 얘기했지만 2초 동안 당황해서 벙쪘다고 한다. 하지만 강호동의 당황은 잠시뿐이었고 곧바로 심판한테 상대 선수한테 이 새끼 저 새끼 욕을 박아도 되는 거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29] 현재의 대한씨름협회와는 다른 조직이다.[30] 정확히는 영구제명 확정이 아니다. 당시 김재기 회장은 계속 1999년부터 언론을 통해 씨름계에 대해 비판을 계속하자 영구제명을 확정했다고 한다. 이만기 본인의 말에 의하면 영구제명을 위한 심의가 열렸다는 통보를 받은 뒤, 절차상 소명의 기회를 주게 되어 있는데 아무 연락이 없어서 찾아갔더니 씨름연맹 조직 자체가 공중분해 되어서 이후 절차를 진행할 사람들조차 없었다고 한다.[31] 해설위원직은 이만기 이후 1990년대 씨름계의 황제로 자리매김한 이태현이 물려받게 됐다.[32] 사진 가운데에 가장 튼실한 종아리의 인물이 이만기. 만만치 않은 왼쪽 종아리의 인물은 강호동, 오른쪽 구석의 평범한 종아리의 주인은 우승민.[33] 이때 나머지 1박 2일 팀원들은 초등학생들과 대결을 펼쳤고 유일하게 김종민만 이기고 나머지는 전부 패배했다.[34] 정확히 삼겹살 160인분 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밥이나 찌개 등의 다른 음식값을 더 얹으면 그날 아침에 나영석PD가 80명 스태프 + 출연진에게 지불한 값(여기는 두 식당에 나눠서 24만원씩 48만원)을 가뿐히 넘겼다고. 강호동의 대한항공 스카이패스 신용카드 당월 실적 가지고 다음 달에 해외여행 한 번 다녀올 수 있겠다고 이승기가 너스레를 떨었을 정도다.[35] 소머리국밥도 못 먹는다. 허나 이건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다. 실제로 먹을 줄 아는 보양식도 백숙밖에 없다고 뭉찬에서 밝혔다. 헌데 모르고 먹으면 맛있게 먹을수는 있는지 자기야 백년손님에서 장모가 준 수육을 맛있게 먹었다. 물론 그 정체가 우설이라길래 기겁해했다.[36] 심지어 라보트럭은 엔진부가 전방이 아니라 중앙에 탑재되어있다.[37]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서 밝힌 바로는, 1988년에 한국 홍보차 프랑스를 간 적이 있는데 음식이 맞지 않아 며칠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숙소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한식당을 발견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가게 이름이 오아시스라 진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한다.[38] 원래 야인시대의 중년 김두한으로 유명한 배우 김영철로 시작했기에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였지만 김영철 본인 체력과 드라마 녹화와의 스케줄이 겹쳐 결국 하차하면서 동네 한 바퀴로 바뀌었다.[39] 열린우리당은 중도진보 중심의 포괄정당이었다.[40] 사실은 원래 이만기를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을 했었는데 이걸 본 김호일이 화가 나서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하순봉 前 의원을 두들겨 팼고 쫄은 하 위원장은 이만기 공천 취소, 김호일 공천 확정으로 만드는 병크를 저질렀다.기사 참조.[41] 현재는 국회의원 사무실을 리모델링해서 본업인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다.[42] 정동영 노인 비하 발언이 결정타라는 이야기가 있다.[43] 당시 경남지역에선 고향 출신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시절에 열린우리당 소속이었다가 임기 종료 및 당 해체시점에 접어들어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변경한 사례가 적지않게 있었다. 대표적으로 엄용수 의원과 강길부 의원 등이 있다.[44] 본선거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 김맹곤 당시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였다.[45] 선거구 개편으로 봉하마을 소재지는 김해갑으로 옮겨졌으나 그전 선거까지는 김해을에 위치해왔음#.[46] 김경수 후보는 민주화 운동으로 국보법 위반 관련 구속이 되었다.[47] 정확한 면제 사유는 '근위지절강직'. 근위지절 부위는 손가락에서 첫 마디와 중간 마디 사이의 관절을 말한다.[48] 공직선거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90일 전부터 방송출연이 금지되며 뉴스 인터뷰나 선거 토론회 등 선거와 관련 있는 방송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49] 같이 있던 장모는 “청와대에는 눈길도 돌리지 마라.”라고 정색해 본인은 미련이라도 주변에서는 완강히 반대할 것 같다.[50] 사족으로 이때는 뭉쳐야 찬다 해외촬영차 사이판에 가 있었다. 15일부터 3박 5일 일정이었다.[51] 말이 저때지 녹화방송이므로 12월 말에는 하차해야 한다.[52] 그러나 국민의힘이 아무리 친노진영의 거점인 김해라지만 영남지역에서 망신수준의 표차이가 난 이만기를 다시 공천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보인다.[53] 국민통합21 창당을 위한 탈당.[54] 당내 노선 갈등으로 인한 탈당.[55] 한나라당 복당을 위한 탈당.[56]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57] 공교롭게도 이계진과 이만기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란히 출마해서 희비가 엇갈렸다.[58] 당시에는 워낙 생계가 어려운 집이 많아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리기도 하고 신경이 나가기도 하는 등 이런 중상들 탓에도 많이 면제되었다. 그때 당시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이재명경기도지사처럼 영구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으며, 부상 이름과 부위도 참 기상천외하다고 한다. 당장 김경수만 봐도 근위지절강직이라는 대단히 길고 신기한 이름이다.[59] 뭉찬에서 이광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젊은 세대들은 아무래도 구세대 스포츠 레전드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당시 이봉주심권호를 헷갈렸고, 이만기를 씨름이 아니라 예능 보고 알았다고 한다.[60] 새누리당이 총선 후보 인적 사항 공개할 때 나온 전과 사항이다.[61] 자라, 염소, 붕어, 뱀 등이 있다.[62] 뭉쳐야 찬다에 함께 출연했던 허재는 이 소식을 듣고, '동양인도 저런 몸을 타고 날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다. 참고로 허재는 현역시절 보양식으로 칠점사로 고아낸 뱀탕을 즐겨 먹었다고 하는데 이 얘기를 듣자 당연히 질색했다.[63] 그런데 우설은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초특수 부위이며, 그 맛과 영양은 가히 최상이라서 엄청 비싸고 귀한 재료이다.[64] 소고기도 메추리알이랑 섞여 있어서 못먹는다고 한다. 의외로 새 부화를 봐서 계란이나 메추리를 못먹거나 닭집 자식들이 닭을 못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65] MTB, 배드민턴은 물론이고 사이클조깅을 자주 하며, 축구도 방송을 통해 했다. 덕분에 환갑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탄탄한 근육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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