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 북송 시절 쓰여진 서적. 원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한다. 원 제목의 '선화'(宣和)는 북송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던 휘종의 마지막 연호이다.[1] 선화 연간에 휘종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라는 뜻이다.
고려 시대 생활 풍속을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여 오늘날 고려사 연구자들이 필히 참고하는 주요 서적 중 하나이다.
2. 역사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1달여간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귀국 후 보충하여 1124년 송휘종에게 제출한 보고서이다.선화 5년인 1123년은 고려 제16대 예종이 붕어하고 제17대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인데 북송은 예종을 조문하고,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이 사신단은 벽란도를 통해 고려의 도성 개경의 사신 숙소인 순천관에 1개월 가량 머물렀다.
이때 보고 들은 것들 중에서 중국과 다른 특이한 풍속을 기록해서 300여 조가 되었고,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사건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했다.
3. 아쉬운 점
'도경'이라는 말 답게 원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헌데 이 책 간행 2년 만에 한족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자 북송의 멸망을 불러온 정강의 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림을 날려먹었다. 만약 그림이 남아 있었다면 고려의 사찰 및 궁궐같은 고려 건축과 회화는 물론 고려시대 복식사와 생활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래에도 언급하지만, 《고려도경》 자체는 그 한계 때문에 정확도도 의심받는 책이라서, 시간이 없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타국인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사신의 생각을 서술한 글보다는, 눈으로 본 경험이라 할 그림이 더 중요한데, 그 그림이 날아갔다.서긍은 이 책의 원본을 2부 만들어 1부는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 1부는 본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황실에 바친 1부는 송 사회에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정강의 변으로 날려먹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한부도 1127년 봄 동네 사람에게 빌려줬다 미처 반납하기도 전에 마찬가지로 정강의 변 와중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뜬금없이 1137년 강서성 남창현 홍주에서 그림이 분실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때 다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지만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기억이 잘 안나서인지[2] 결국 안했다고 한다.
이후 서긍이 사망하고 14년이 지난 1167년 서긍의 조카 서천이 그림이 없는 버전으로 재간행한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서긍은 본업이 화가였지만 조카인 서천은 그림 일과는 연이 없었다. 이 간행본을 흔히 '징강본'이라 이르는데, 고려도경 판본 중에선 가장 권위있는 판본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책조차 서천의 발문을 보면 1137년 발견 당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을 서긍의 기억으로 복구했고, 서천이 간행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첨삭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원본과는 내용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아쉬운 부분이다. 때문인지 그 외 판본들과 내용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4. 구성
1, 2권은 건국 과정과 고려 왕 계보 등에 대해 서술하고, 3권부터 7권까지는 고려의 영역과 형세, 개경의 성곽 그리고 궁전과 관복 등을, 8권에서는 당시 고려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9권부터 15권까지는 의례 용품과 의장 호위대의 복장·칼 등의 무기·다양한 깃발 그리고 수레 등을, 16권은 고려의 관부에 관한 내용을, 17권부터 18권까지는 도교와 불교 등의 종교에 관한 사항을, 19권부터 23권까지는 사회계층과 생활풍속 등을 서술하였다. 24권부터 32권까지는 사절단에 대한 여러 가지 예우와 의례 절차 그리고 숙소에 마련되어 있는 그릇 등의 비품을, 33권부터 39권까지는 고려의 각종 배와 바닷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40권에는 중국과 같은 고려의 문물을 기록하였다.《계림지》(鷄林志) 등을 참고하여 건국부터 풍속 등까지 내용을 소개하고, 작업 과정 등을 설명했는데, 아무래도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경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에, 송나라인 기준으로 서술해 송휘종에게 올린 목적성이 있는 글이기 때문에 기록을 해석할 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고 교차검증도 필요한 부분이 많다.[3] 조선에 온 외국인들이 남긴 수기를 봐도 같은 내용을 보고도 다르게 서술하는 경우가 있듯, 서긍이 당대 고려 생활상을 기록한 것은 가치가 있으나, 서긍이 고려에 오래 산 것도 아니고 다 둘러본 것도 아니라[4] 주관성을 배제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고려도경에서 고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구절들이 있다.
-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라 정말로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져내려온 같은 나라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고려의 역사와 관직에 대한 설명이 고구려의 것과 혼재되어 오류가 많다. 현대에는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해 부르지만, 사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태조 왕건은 그 국호를 그대로 가져다 고려를 건국한 것. 그러니 정보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고대와 중세에는 착각할 만도 하다. 그리고 통일신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여 백제와 신라는 고려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이런 혼동은 중국이나 일본의 여러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전근대에는 외국인이 고려가 고씨에서 왕씨로 바뀌었다는 정도만 알아도 한국사를 비교적 많이 아는 것이었다. 나중에 몽골 관리인 사천택이 '너희 나라에서는 재상을 막리지라 부른다지?' 라고 물어봐서 고려 사신 이장용(李藏用)이 뻘쭘해한 일화도 있다.
-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5] 선박이 단순하고 조잡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항해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시 북송에서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당대 기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아마 서긍이 고려에 있는 동안 그런 배를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 고려군이 활을 쏠때 시위를 끝까지 당기지 않고 놓기 때문에 화살이 멀리 나가기는 하나 위력이 없다(發射不候引滿, 舉身送之, 雖矢去甚遠而無力)라고 기록했는데, 고려의 활은 송나라 활보다 전장에서 훨씬 위력을 발휘한 실제 역사를 보면, 서긍이 본 고려군의 활쏘기는 송나라에 전력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헛쏜 것이거나 군사들이 여가시간에 내기 활쏘기를 한 것을 정식 훈련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과 다른 고려의 풍속을 세세하게 기록하여 남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려의 세시풍속이나, 목욕을 좋아했던 고려인의 성향, 남녀가 혼욕을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등의 풍속 기록이 남은 것은 다 이 책 덕분이다.[6] 실제 고려도경에선 사실 여부를 떠나 서긍 관점에서 본 고려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두루 기술되고 있다.[7]
- 민서편에서 땅 대비 인구가 매우 많은데, 선비를 귀히 여기므로 고려인들은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고려인들은 색과 재물을 좋아해, 남녀의 혼인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한다고 기록했다.[8]
- 민가에서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무리를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9]를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무리에 따라 불사에서 공부하며, 군졸과 어린아이들도 향선생[10]에게서 글을 배운다고 할 정도로 학구욕이 넘치는 풍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인들이 부처를 좋아해 팔관회 행사가 극히 성대하고 사치스럽다고 표현했다. 또 보제사에서 불법 관련 글을 보니 종지를 깊이 터득하고 있다며, 중국에서 유학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 영어편에서 태형 등의 형법을 거론하면서, 고려인 성격이 (부처를 좋아해서인지) 인자한 면이 있어 (살생을 싫어해) 죽을 죄를 지어도 참형 대신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하고,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사면해주기도 한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때도 해를 넘기는 재판 지연이 제법 있었던 모양으로, 정 안되면 돈을 내고 풀려났다고 한다.[11]
- 거마편에서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나[12],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송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다르다고 기록했다.
- 민거편에서 개경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여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구멍 같고 기와를 올린 집은 열에 한두곳 정도라고 표현했다. 와탑편에서 고려 돗자리의 편안함은 오랑캐 풍속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고 밝혔지만 이것은 왕과 귀족들이나 쓰는 것이고,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이며, 땅을 파서 온돌[火坑]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데[13], 고려는 겨울이 매우 추운데다 솜옷 같은 것이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서긍은 광화문에서 부 및 관에 이르는 길에 장랑을 만들어 하층민 주거지를 가린 것 같다고 추정했다. 한편, 흥왕사나 보제사의 규모를 보고 놀라거나 선의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사치스럽다는 둥 궁궐 단청의 화려함이 꿩이 나는 것과 같다는 둥 한거 보면 뭔가 문벌귀족 사회였던 고려의 심한 빈부격차를 꼬집는 듯하기도 하다.[14]
- 서긍은 당시 개경의 경제상이 송나라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묘사했다. 백성들은 약품을 구입할 때를 제외하면 주로 물물교환을 하며, 무역편에선 대체로 물건 파는 가게 대신 공터에 장이 서는 허시(虛市)가 열려 거기서 남녀노소 교역을 했다고 썼다. 다만 외국 사신들이 올땐 보여주기용인지 큰 시장을 벌여 비단과 금은물품 등 많은 물건을 나열했다고 한다. 또 화폐제도가 없어[15] 저포나 은병만으로 값을 계산한다고 서술하였다. 송 조정에서 화폐를 준 적도 있지만, 백성들은 이전 풍속이 더 익숙해 편하다고 여겨 화폐는 창고에 넣어뒀다고 한다.
- 종예편에서 농업을 말하며, 고려는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농토가 산간에 많이 있는데, 이를 일구기가 매우 힘들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고려시대까지 관개시설 기술의 미비로 경작지는 주로 산지에 조성했다가 여말선초 중국으로부터 선진 강남농법이 도입되며 평야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추정하는 학계의 연구와 일치한다.[16] 그 외 쟁기나 농기구는 중국과 대체로 비슷하며, 쌀알이 크고 맛이 달았다고 한다.
- 어편에서 고려인들은 해산물을 주로 먹는다고 하면서, 종류는 미꾸라지, 전복, 조개, 진주조개, 왕새우, 무명조개, 대게, 굴, 거북손 등이 있고 해조류인 다시마도 귀천없이 좋아한다고 적어놨다. 맛은 있지만 오래 먹으면 비려 질린다고 불평했다. 도재편에선 고려의 정치는 매우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해 왕족이나 귀족급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거나 혹은 안 먹는다고 적어놨다. 허나 그래서 도축 기술은 서툴다고 까기도 했다.[17]
- 기명(생활용기) 다조편에선 고려인들이 차도 잘 마시지만, 고려차는 쓰고 떫어 중국산 차를 수입해 많이 먹는다고 했다. 다구도 잘 만들지만 자기가 보기엔 중국산 모방한 것 같다고. 또 차를 마신 후 약이라고 하면서 탕을 내놓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면 기뻐하고, 혹시라도 다 마시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해 원망하며 가버리기 때문에 억지로 그것을 다 마셨다고 적어놨다.
- 정료편에서 고려인들은 밤까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 잔치를 파하면 보통 한밤중인데, 집엔 불을 밝혀 돌아갔다고 한다. 와준편에선 서민 집에서 마시는 술은 맛이 싱겁고 빛깔은 진한데 그럼에도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맛있게 마신다고 했는데, 이걸 보면 서긍의 입맛이 유독 까다로워 불평불만이 많은건지 아님 진짜 맛이 없었던건지 오락가락한다.
- 시수편에선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무료급식을 행했다고 써놨는데, 큰 항아리에 흰 쌀죽을 담아두고 대접과 국자 등을 놓아두면 왕래하던 사람들이 귀천 없이 잘 먹고 갔다고 한다.
- 한탁편에서 고려인들이 중국 사람들 때가 많다고 비웃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족이 쓴 기록에 고려인들이 한족을 멸시했다는 사실이 실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신단이 단순히 비하 드립을 당한 것이 아닌 실제로 더러웠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도경》이 쓰여진 건 북송 시기인데 황하 이북의 물 부족 현상은 아무리 늦어도 서력 기원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즉, 사신단 일행 본인들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본인들의 위생 상태가 고려인들에 비해 불량했음을 인정했기에 남긴 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18] 여하튼 고려인들이 예전부터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더니[19] 여전히 그러하다며, 냇가 혼욕 문화도 이때 설명한다.
-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지, 배마다 10여 인이 밤에는 갑판을 울리고 삿대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는데, 시끄럽기만 할 뿐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다고 깠다.
당대 고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국왕 인종을 비롯해 이자겸[20], 윤언식, 김부식[21], 김인규, 이지미 등을 설명했다. 북송 기준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서긍 눈에는 인재들도 제법 보인 모양. 여담으로 지나가면서 이름과 직책을 언급만 하는 수준으로 척준경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약이(洪若伊)ㆍ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승중(朴昇中),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약온(金若溫),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홍재(崔洪宰),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준경(拓俊京)ㆍ이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물>(人物)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물>(人物)
5. 여담
2015학년도 역사교사 임용고시 단답형 1번 문제로 출제되었다.고려도경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에 적혀있지 않거나 분량이 적은 분야의 내용들도 있다보니, 고려의 미술사나 도자기 등 미세적인 분야의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서판교에 위치한# 아시아퓨전식당 고려도경은, '고려의 맛있는 음식에는 십여가지가 있는데 그중 면을 먹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라는 문헌 본문 내용을 인용하여 브랜딩 한 음식점이라고 한다.
6. 외부 링크
7. 같이 보기
- 《해동제국기》: 일본에는 《고려도경》 비슷한 포지션의 책이다.
[1] 1119년 ~ 1125년 사용. 선화 다음 연호가 '정강의 변'으로 유명한 정강(靖康)이다.[2] 자기가 그렸더라도 10년만에 발견한 책이라면 기억이 잘 안나는게 어찌보면 당연하다.[3] 심지어 고려도경 내에서도 서로 말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4] 공식 일정 외 숙소 밖 외유는 5~6차례가 전부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긍은 군읍편에서 지방도시 중 서경을 가장 번성하다고 썼는데, 당연히 가봤을리는 없으니 들은 기록일 것이다.[5] 정작 개경 중심부는 바닷가랑 멀긴 하다.[6] 참고로 조선 시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이 일본의 혼욕(혼탕) 풍속을 글로 전하면서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은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야만국'이라고 경멸하는 풍조가 생겼고 일부는 지금까지 그런 인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고려도경》에 따르면 이미 고려도 혼욕하던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시대에 따라 풍습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7] 고려도경에서 서긍은 기본적으로 고려를 오랑캐라고 낮잡아 보는 시선이 있지만, 한편으론 기자조선에서 고려가 이어졌다고 생각해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다른 오랑캐들과 달리, 종묘사직을 모시고 식사시 그릇을 쓰고 한자도 해서, 예서 다 잘 쓴다는 둥 오랑캐 중에선 그래도 낫다 식으로 나름의 친근감도 표시했는데, 이는 당시 요가 지고 금이 떠오르면서 고려와 가까워져야 될 필요성이 생긴 송의 외교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8] 고려의 개방적인 성 문화를 문란하다고 유교선비 입장에서 디스한 흔적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려 사람 몇명이나 만나봤다고 이런 경솔한 소릴 하나 싶은 고려도경의 신뢰도 문제로 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론 다른 편에서 부자집에서 3~4명씩 첩을 들였다가도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이혼한다고 비난했으니, 실제 비판받을 만한 사례도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고려는 박유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지만, 일부에선 사실상의 일부다처제 사례도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9]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10] 지역 출신의 학덕이 있는 인물.[11] 후술된 한국고전종합DB와 국사편찬위원회 두 버전의 해석이 좀 다른데 한쪽은 보석금 개념에 가깝게 해석했고, 한쪽은 그냥 돈 내면 처벌이 면제되는 면죄부 개념으로 해석했다.[12] 실제 고려 시대 교통로는 해상로 위주로 발달했다.[13] 수혈주거나 청동기 시대 이후 움집 형식을 뜻한다고 많이들 추정하나, 초가 지붕을 엮었다는 점과 서까래가 언급되는 점, 발굴된 삼국시대 토기 유물에서부터 이미 수혈주거 형식을 벗어난 서민주택 형식이 보이는 점 등을 보아 수혈주거 형태가 아니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림이 날라간게 아쉬운 부분. 교차검증되는 사료도 없는 마당에 현대 들어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개성 일대 고고학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겠지만, 알다시피 통일되기 전엔 북한 학자들에게나 맡겨둬야 될 판.[14] 실제 이후 개경은 상층민들이 몰리면서 하층민의 달동네민가를 헐거나 내쫓고 그 자리에 귀족들의 주택이나 사찰을 꾸미는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여몽전쟁이 한번 휩쓸고 간 충선왕 시기엔 왕이 직접 명령해서 아예 개경을 죄다 기와집으로만 도배했다고 한다.#[15] 다만 이는 북송 시대 들어서야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는 것처럼, 당시 송나라가 주변국 대비 경제적으로 너무 번영했던 상대적 차이도 있다. 애초에 당시 북송은 전세계 1위 경제대국이었고[22], 심지어 후대 포함 중국왕조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1위였다고 보는 학자가 많이 존재한다.[16] 다만 고려의 농업 생산력이 부족했다고 보긴 어려운게, 고려도경에서도 고려 인구가 매우 많다고 기록했는데 애초에 농업 생산량이 받쳐주지 못하면 인구가 많을수가 없다. 사실 논농사 자체는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 하천, 계곡 수리 시설 축조와 관리 능력 등이 발달된 삼국시대 중후반기부턴 널리 시행되었다.[17] 돼지 네 발을 묶어 산채로 불에 집어 던져 죽이는데, 안 죽으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후 배를 갈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돼지가 발광하며 고통받는 과정을 고스란히 봤을테니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해서 잘 안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육식금지 혹은 비권장은 불교 주류 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풍경이긴 하다. 당장 일본만 해도 육식금지령이 무려 1200여년간 이어졌을 정도였고, 부탄같은 곳은 오늘날에도 수입산 정도만 허용하는 식으로 육식과 살생을 비권장하고 있다.[18] 다만 세계로 확대해보면 중국인은 그나마 깨끗한 축에 들었던지 명 말에 활동한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책에서 중국인을 가리켜 목욕을 자주 한다고 서술하였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이때와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다.[19] 실제 『위서(魏書)』에도 "귀천(貴賤)의 구분 없이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 『魏書』 卷100, 列傳 第88, 高句麗)."고 표기되어있다.[20] 서긍도 이자겸이 권신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아는 현신이라고 평하면서도, 이득을 즐겨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으며, 사방에서 궤유(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라 주변인들이 까더라고 적어놨다. 고려도경이 작성되고 얼마 안가 이자겸이 이자겸의 난으로 인종에게 숙청된걸 생각하면 평이 묘하다.[21] 평하길, 고려에서 김씨는 박씨와 함께 큰 씨족으로 이전부터 명성이 있어, 김부식 역시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 알아 학사들에게 존경받는다고 썼다. 그래서인지 이후 김부식이 북송 멸망 직전 고려 사신으로 갔을 때, 일부 사람들이 고려도경을 봤는지 그를 알아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