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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1:16:23

둘리틀 특공대

둘리틀 폭격대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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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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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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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둘리틀 공습
Doolittle Raiders | Tokyo Raid
ドーリットル空襲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Rtk3uwa.jpg
파일:waEq1Lt.jpg요크타운급 항공모함 CV-8 호넷에서 발진하는 B-25 미첼 폭격기
날짜
1942년 4월 18일
장소
도쿄일본 제국 주요 지역
원인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 작전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중화민국|]]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제임스 둘리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
전력
80명[1]
B-25 미첼[2] 16기
항공모함 2척[3]
순양함 4척
구축함 8척
수량 미상의 Ki-61 히엔
수량 미상의 Ki-45 토류
수량 미상의 대공포대
결과
미국의 일본 제국 본토 타격 성공
영향
선전효과로 인한 미국 내에서의 사기 급증
일본 제국 지도부의 심리적 동요[4]
피해 규모
전사 3명
포로 8명[5]
B-25 16기 손실
사망 50여 명
부상 400여 명
포로 5명[6]
연안감시선 5척 격침
경항공모함 류호 손상
항공기 3기 손실[미국측주장]
1942년 미국의 뉴스 영화에 보도된 둘리틀 특공대
1. 개요2. 발단3. 전개4. 실행5. 결과6. 일본군의 보복7. 전후8. 여담9.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때인 1942년 4월 18일미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당시 항공 중령이 이끌었던 특공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실행되어 일본 제국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2. 발단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빠르게 무너졌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개전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 없이는 정치적 부담을 벗을 수 없기에 육해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복수심만은 아니었다. 전황이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면 뭔가 일본군한테 한 방을 먹여줄 필요가 있었다.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동원해서 마셜 제도와 길버트 섬에 공습을 가하는 작전을 펴기는 했으나, 군사적으로는 큰 성과가 없고 해군장병이 아닌 미 본토 국민에게는 주목할 만한 상징적인 가치도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눈팔고 있다가 뼈아픈 한방을 맞고서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미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판이었다. 미합중국 해군 태평양 함대에 사용 가능한 전함이 한 척도 없는 상황에서 몇 안되는 항공모함순양함 이하의 호위함과 같이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키기에는 당시 일본 해군이 너무 막강했으며, 그나마도 개전 초반 괌과 웨이크를 빼앗기는 바람에 작전을 엄호해 줄 비행장이나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못하며, 무작정 갖다 박으면 성공을 따지기 이전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식민지를 지키는 타국 해군 병력과 연합하여 자바 해전을 시도해 봤으나 그야말로 참패한 마당이었다. 그렇다고 오래 기다리기엔 정치적 압박은 물론, 일본 해군이 원하는 대로 미 해군의 물량이 갖춰지는 동안 태평양 섬들의 방어선이 강력해져 자칫 양면전쟁이 극단적 장기화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군 항공대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 항공모함을 가깝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격침당할 확률이 높지만, 육군 항공대의 쌍발 폭격기라면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 의견을 낸 사람은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잠수함 참모인 프랜시스 로우(Francis S. Low) 대령이었다.

문제는 육군의 폭격기들은 무거워서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8]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한번 이함하면 비행해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작전을 시작한 후에는 항공모함과 호위함대는 즉시 반전해서 위험지역을 탈출하고 폭격기만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폭격을 한 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 후 귀환하기로 결정되었다. 귀환 지역은 중화민국으로 선정되었고 사전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협상을 해서 귀환 루트를 확보해 두었다.

둘리틀이 처음 제안한 작전은 폭격 후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소련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착륙 후 몰고 온 폭격기 전량을 무기대여법으로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소련과 협상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에 승리하면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이오시프 스탈린반격계획이 실패하여 다시 전선이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일본 본토를 공격한 미군 폭격기를 넘겨받을 경우 자극받은 일본이 소련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9]

소련에 거절당한 후 차선책으로 중국에게 입질을 넣어봤는데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잘만 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도 중국이 처음에 거절하려고 한 이유 역시 잘못되면 불똥이 자기들한테 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 합의를 본 것이다. 결국 중화민국 저장성(장강 하류지역)을 향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된다. 본래 계획은 저장성에서 재보급 후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화민국의 수도 충칭까지 날아가서 귀환하는 것이었으나, 예상비행거리보다 훨씬 긴 거리를 비행하게 되며 작전계획이 빗나가면서 연료 부족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특공대 1번기의 승무원들
파일:B0DPsh9.jpg
<rowcolor=white>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 H. 둘리틀 소령(조종사), 리처드 E. 콜 중위(부조종사), 뒷줄 왼쪽부터 헨리 A. 포터 중위 (항법사),[10]
해당 지역이 아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적지 한복판인 데다 먼 바다 위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는 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엘리트급 조종사가 필요했고 작전을 지휘할 사람으로 항공기 레이스인 슈나이더컵 대회[11]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당시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육군 항공대 중령이 선발되었다.

3. 전개

호넷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갑판 위에 크고 이상한 비행기가 있었거든요. 색깔도 뭔가 다르고 해군 항공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색이 육군기의 위장색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육군의 B-25였던 거죠.
― 제임스 피치[12]
둘리틀 중령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폭격기와 육군 최고의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연일 맹훈련을 했다.

B-25는 본래 육상에서 운용하기 위해 개발된 육군의 폭격기였으므로 활주거리가 짧은 항공모함에서 이함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길면서도 간신히 항공모함에서 이함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해당 폭격기가 선정된 것이다. 기체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했기 때문에 무전기도 빼버리고 기관총도 기체 상부의 것과 기체 전면의 것만 남기고는 전부 빼버렸다. 대신 적기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무 같은 것으로 기총좌 자리에 가짜 기총을 달아 놨다. 또한 어차피 작전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비행기를 버려야 하므로 기체가 격추당하거나 포획당할 경우 당시로서는 고급 기술인 노든 폭격조준기가 일본에 노획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간이형 폭격조준기가 달렸다. 이러면 당연히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이번 작전은 일본 본토를 폭격한다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일종의 심리전이었기 때문에, 딱히 폭격 정밀도가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고 심리전이란 측면에서 정훈 목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폭격기 중 2대엔 공습 장면을 촬영할 카메라를 탑재했다.

이렇게 극한으로 무게를 줄이고, 그 기체들을 육상에서 항공모함 갑판과 같은 길이에 선을 그어 둔 활주로에서 이함을 맹연습한 육군 조종사들이 이착륙 실습을 전원 성공시킨 뒤, 특공대는 미 해군요크타운급 항공모함 USS 호넷 함에 도착했다. 그리고 B-25를 채우느라 해군 함재기를 전부 빼버려 자체 방호 능력이 없는 호넷의 엄호를 위해 모여든 함대에 마지막으로 동급함인 USS 엔터프라이즈 함이 합류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은 해군 소장 윌리엄 홀시 제독이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은 호넷 함의 엄호 외에도 일본 해군이 어선들을 징발, 선원들 외에 해군 하사관 1명과 무전기 1대를 배치해 연안 감시 임무를 맡긴 연안경비정들을 일본 본토에 경보하기 전에 요격하는 임무도 함대의 순양함, 구축함들과 함께 수행했다. 이들을 격침하는 과정에서 생존한 감시선 승조원 5명을 구조해 포로로 잡았다.

4. 실행

- Are you nervous? / 떨리나?
- No- Yes, sir. Yes. / 아니 - 네 그렇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잡고 기도를 한다.]
- When did you find religion? / 언제부터 종교를 가졌나?
- When you assigned me to this mission, sir. / 이번 작전에 차출되었을 때부터입니다.
[둘리틀이 잠시 생각하고 부조종사의 어깨를 잡으며]
- I want you to do me a favor. / 부탁 하나만 좀 들어주게.
- What's that, Colonel? / 무엇입니까?
- Pray for both of us. / 내 기도도 해주게.
― 영화 《진주만》에서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이 특공대의 편제를 구축했는데 편제는 다음과 같다.(2/46/32)특공대 명단, 둘리틀이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보고서[13]
폭격기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폭격수 항공기관사 비고
1호 중령 제임스 둘리틀 중위 리처드 E. 콜 중위 헨리 E.
포터
중사 프레드 A.
브레머
중사 폴 J. 레너드†† 전대장
2호 중위 트래비스
후버
중위 윌리엄
피처
중위
윌트너
중위 리차드
밀러
††
하사 더글라스 래드니 1 편대장
3호 중위 로버트 M.
그레이††
중위 제이콥
맨츠††
중위 카를레스
오츠크
병장 에덴
존스
상병 릴런드
팩터†
4호 중위 에버렛 W. 홀스트롬 중위 루시안 N.
영블러드††
중위 해리 C.
맥콜
하사 로버트 J.
스티븐스
상병 바트 M.
조던
5호 대위 데이비드 M. 존스 중위 로드니 R.
와일더
중위 유진 F.
맥그릴††
중위 덴버 V. 트루러브†† 하사 조셉 W.
맨스크
2 편대장
6호 중위 딘 E. 홀마크●☠ 중위 로버트 J. 미더●☠ 중위 체이스 J.
닐센●
중사 윌리엄 J. 디터 중사 도널드 E. 피츠모리스 격추
7호 중위 테드 W.
로슨
중위
데븐포트
중위 찰리
맥클루
중위 로버트
클레버††
상사 데이비드
대처
8호 대위 에드워드 J.
요크■
중위 로버트
에멘스■
중위 놀란
헤른던■
중사 시어도어
라반■
병장 데이비드
폴■
3 편대장
소련에 불시착
9호 중위 해롤드 F.
왓슨
중위 제임스
파커
중위 토머스
그리핀
병장 웨인
비센
병장 엘드레드 폰
스콧
10호 중위 리처드 O.
조이스
중위 J. 로이덴
스톡
중위 호라스 크치 병장 조지
라킨††
하사 에드윈
호튼
11호 대위 C. 로스
그리닝
중위 케네스
리디††
중위 프랭크
케플러
중사 윌리엄
버치
병장 멜빈
가드너††
4 편대장
12호 중위 윌리엄 M.
바우어
중위 사드
발렌튼
중위 윌리엄
파운드
하사 왈도
비처
중사 오메르
듀켓††
13호 중위 에드거 E.
맥엘로이
중위 리처드 A. 노블로치 중위 클레이튼
캠밸
병장 로버트
부르지오스
병장 아담
윌리엄스
14호 소령 존 A. 힐거 중위
심스
중위 제임스
마시아
중사 에드윈
베인††
중사 제이콥
아이어만
부 전대장
15호 중위 도널드 G.
스미스††
중위 그리피스
윌리엄스
중위 하워드
시슬러
중위 토머스
화이트
병장 에드워드
세일러
16호 중위 윌리엄 G.
패로우
●☠
중위 로버트
하이트●
중위 조지
바●
상병 제이콥
데샤저●
병장 해럴드 A. 스패츠●☠ 격추
●: 일본군에 포로로 잡힘
■: 소련에 착륙
†: 이 전투로 전사
††: 이 전투에서는 생존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전에 사망
☠: 처형

참고로 이 작전에 참가한 장교들 중에서 제임스 둘리틀을 포함한 여러 명이 장성급 장교까지 도달했다.
파일:do305.jpg
<rowcolor=white> 1942년 4월 18일 새벽, 둘리틀 특공대 작전 중 경순양함 내쉬빌의 포격에 격침당하는 일본군 위장감시선 니토마루-23
4월 18일 아침 7시 38분, 작전 수행을 위해 항해하던 미 함대는 경비정 니토마루-23을 발견한다. 발견되자마자 경순양함 USS 내쉬빌 함이 함포로 쉽게 격침시켰지만, 이미 니토마루가 긴급 무전을 날린 뒤였다.

이걸 포착한 미국 함대는 결국 아침 08시 20분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310km 더 먼 35°N 154°E 지점에서 10시간이나 일찍 출격시키게 되었다. 일본까지 1,200km가 남은 상황이었다.
파일:yLoNNaN.jpg
<rowcolor=white> 호넷의 비행갑판을 뒤덮은 폭격기들[14]
여기에다 항모에서 이함하는 것은 단발기를 모는 해군 조종사들한테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모의훈련 이외에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적이 없는 특공대원들은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이함을 시도해야 했다. 이에 둘리틀 중령은 겁 먹은 대원들의 사기 증진을 위해 "우린 내일 쪽발이들의 본토를 직접 공격한 최초의 군인이 될 것이다. 빠질 애들은 지금 빠져라."라며 대원들을 격려해 주며, 풍랑도 몰아치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악천후까지 겹쳐 작전에 차질이 생기자 둘리틀 본인이 1호기에 탑승해 이함을 성공시키는 패기를 보여준다.[15] 이후 2호기 3호기까지 이함에 성공하면서 둘리틀 특공대는 호넷 승조원들의 응원 속에 도쿄로 날아가게 된다.
파일:IJdGUZA.jpg
<rowcolor=white> 작전 중 폭격기에서 촬영된 사진
한편 일본 해군은 니토마루로부터 받은 무전을 통해 미 항모의 존재를 확인하고 요격을 준비한다. 다만 함재기에 의한 공습일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공습은 항모가 좀 더 접근한 다음날 아침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해 즉각 요격기를 발진시키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B-25는 이미 출발했고, 이함을 끝내자 미 함대는 바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작전의 실체를 알았더라면 호위 전투기도 없고 빈약한 무장을 지녔던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본토 상공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요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20시간쯤 빨리 B-25 편대가 일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그 시점에 일본 육군 비행장에서도 요격을 위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고, B-25 역시 공습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폭격기의 고도가 묘하게 높은 데다 아무리 봐도 항모의 함재기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부대는 아군 육군의 쌍발 폭격기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발견했으면서도 보고를 하지 않았고, 어떤 부대는 "국적 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란 보고를 올렸지만, 일본군 사령부는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16]며 미군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장장 15분간 전화 통화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해군 항공대가 운용하는 1식 육공 G4M으로 오인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어찌됐든 상식적으로 육상에서 발진하는 미 육군 폭격기가 일본 본토에 나타날 리는 없었기에, 이런 대응 자체가 무작정 안일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진주만 공습에서도 최초 발견된 일본기들을 미군 장교가 아군기로 판단해 보고했단 걸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추가로 원래 계획상으로는 야간 폭격이었으나,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덕분에 백주대낮에 폭격이 이뤄졌으므로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게다가 그때가 하필이면 방공훈련이 끝난 직후였다. 하늘에 떠 있는 뭔가 이상한 폭격기를 일본 비행기인 줄 알았던(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일본인들은 폭격이 시작되고 나서야 그게 미군기라는 걸 알고 크게 당황했고, 일본 육군이 허겁지겁 Ki-45 토류와 당시 실험기이던 Ki-61 히엔 전투기를 출격시켜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특공대 전원은 중국과 소련으로 진로를 잡은 뒤였다.

심지어, 미국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요격하러 온 일본 육군기를 폭격기의 방어기총으로 3대나 격추했다고 한다. 다만 이건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에 따르면 폭탄이 실제로 떨어진 지역 부근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도쿄 시민들은 공습 훈련을 실전 수준으로 최대한 끌어올리는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치 못한 JOAK(일본 제1라디오) 방송은 첫 번째 폭격과 동시에 갑자기 방송을 중단했고, 학교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과 붐비는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미항공기의 원형 적ㆍ백ㆍ청 표식을 욱일기로 착각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17]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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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둘리툴 특공대의 공습으로 파괴된 공장 잔해
이 공습은 겉으로는 일본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본토가 적의 공격에서 안전하다고 수 세기 동안 믿어온 나라로서는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18]
― 일본 제국 패망사 p.497
물론 대규모 공습이 아니라 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했을 뿐이라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 동, 개장중이던 해군 경항모 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크진 않았다.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에 달랑 쌍발 폭격기 16대에 탑재된 500파운드 폭탄 64발로, 간이조준기만을 이용한 고공수평폭격으로 이룬 전과임을 생각하면 매우 준수한 결과이며, 류호의 취역 지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이 항모와 항공대 전력을 제때 보충하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일본놈들 땅에 폭탄을 떨궈서 한 방 먹여준다'는 본래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으며, 그 결과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19]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서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한창 승승장구하면서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 호주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백주대낮에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고 그게 황궁 근처라 천황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이라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있게 남방작전을 밀어붙이려 했던 일본 육군이나,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으니 미군은 앞으로 2년 동안 못 나올 거라고 천황에게 호언장담했다가 4개월 만에 본토 폭격을 맞은 일본 해군의 체면이 모두 크게 손상되었고, 여유 있게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요새화를 준비하던 계획이 다 틀어지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미 항모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미드웨이 해전의 작전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상세는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고.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를 계기로 방공도시계획을 진행시키고 대폭격기 요격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원래 점감요격이나 결전 때 미 해군을 상대할 귀중한 항공전력이 둘로 분산되어 버려 미드웨이에서 절반이 깨지고, 웨이크, 펠렐루, 오키나와에서도 차례차례 깨지며 일본군 항공전력의 숙련도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당연히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작전을 성공한 미국인들의 사기는 바로 치솟았고, 이를 선전전에 적극 이용하며 미국 정부도 정치적 부담을 덜었다. 공습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글쎄요... 군사기밀이니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고요, 뭐 샹그릴라에서 날아올랐다고 해두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샹그릴라는 히말라야산맥에 있다는 티베트 불교 전설 속의 이상향이다. 즉 호넷 등의 함선이 참가했다는 기밀을 지키기 위해 대충 가상의 이름으로 둘러댄 것. 그런데 기자들은 이게 정말 함선 이름인줄 알고 <비행기가 USS 샹그릴라 함에서 날아 올랐다>는 기사를 냈다. 그리고 나중에 미 해군은 정말로 USS 샹그릴라 함취역시킨다.

이 작전에 참가한 B-25 16대는 당연하게도 모두 손실되었지만, 특공대원 80명 중 69명이 생환했다. 둘리틀 중령은 중령 계급조차 불과 3개월 전인 42년 1월에 달았음에도 이 작전이 성공한 다음날 곧바로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준장으로 진급되었고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소령에서 소장까지 1942년 단 한 해만에 도달하는, 다시 없을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896년생인 둘리틀 중령은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엄청나게 장수했다. 둘리틀의 최종계급은 끝까지 다 올라갔다. 물론 제대는 중장으로 했고[20] 대장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둘리틀을 불러다가 예비역 진급심사를 시켜서 진급한 것이다. 휘하 장교들도 꽤 순조롭게 진급했는데, 데이비드 M.존스 대위소장까지, 같은 폭격기에 같이 탑승한 직속부하이자 이 작전에 투입된 군인 중 최후의 생존자인 리차드 E. 콜 중위중령까지, 테드 W. 라우슨 중위소령까지, 윌리엄 M 바우어 중위대령까지 각각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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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중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 중인 14번기 승무원들
공습에 참가한 80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포로가 된 8명은 당초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라 하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천황과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국 포로에 대한 보복행위를 우려하는 뜻을 내비치며 최종적으로는 3명만이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종신형을 받고 베이징 포로 수용소에 수감, 그 중 1명이 사망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송환된 건 4명이었다. 또한 처형당한 3명의 시신은 화장 후 적십자를 거쳐 미국에 인도됐다.

한편 폭격 후 엔진 이상으로 소련으로 날아간 1기는 승무원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기체는 소련이 압류하여 항공기 개발에 이용했다. 나머지 모든 둘리틀 특공대 기체는 중국에 추락하였고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리 무모한 작전이라도 적지 한복판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 탈출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0%에 육박하기 때문에 중국 측의 반대를 어르고 달래서 폭격기들이 중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후에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우려대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열심히 했다. 보복으로 중국의 비행장을 공격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26]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기 착륙을 중국 측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폭격계획이 무산되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에게서 나온다.[27]
또 다른 상징적인 조치로, 프랭크 녹스 당시 해군장관의 요청으로 폭탄 중 초탄에는 1908년 대백색함대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훈장을 매달아 같이 떨어트렸다. 이 훈장을 매다는 작업은 둘리틀 본인이 직접 행했다.해당 영상 영화 진주만에서도 폭격 직전 폭탄창의 문이 열리면서 신관 앞부분에 묶어놓은 훈장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으로 이 일화를 재현했다.

6. 일본군의 보복

일본군은 둘리틀 특공대를 도와준 중국에 화풀이를 했다. 중국 저장성장쑤성 일대에 18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비행장을 확보하겠다는 명목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비행장을 공격하고 성 근처 마을에 학살을 저질렀고 그 결과 약 25만명의 중국인이 무참히 죽어나갔다.

7. 전후

제임스 둘리틀은 대장까지 진급하고 제대한 이후 1993년 9월 27일에 만 96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2019년 4월 9일(현지 시간), 마지막 생존자였던 리처드 콜은 중령으로 제대한 후 향년 103세로 세상을 떠나며 둘리틀 특공대 비행사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7년 메모리얼 데이CSI 뉴욕맥 테일러 역으로 유명한 배우 게리 시나이즈와 리처드 콜이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리처드 콜은 작전 당시 둘리틀이 직접 탑승한 1번기의 부조종사였으며 작전 이후에는 중국-버마 전선에서 복무했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었다.

8. 여담

둘리틀 장군은 전후 B-36 폭격기를 옹호하면서 해군을 디스하는 바람에 해군에게 심어주었던 좋은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다.

2016년, 미 공군은 B-2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텔스 전략폭격기 B-21에 Raider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둘리틀 특공대에서 따온 명명이라고 밝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둘리틀 특공대가 도쿄를 공습했을 당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몽양 여운형 또한, 이 공습을 도쿄에서 목격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기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던 그는 둘리틀 공습을 계기로 일제가 연합군에게 패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퍼뜨리다 유언비어죄로 일본 측에게 체포되어 감옥서 보내야 했지만, 어쨌든 둘리틀 공습은 목격한 여운형에게 일제 패망을 확신하고 이를 미리 대비하게 되는 계기가 됐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해방 후 국내 정치에 뛰어들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을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 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 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여운형이 친구 오건영에게 전한 말, 사상휘보 속간 26호, 1943년

9. 매체에서의 등장



[1] 장교 48명, 부사관 32명[2] 1기 당 장교 3명(조종사 겸 기장, 부조종사, 항법사), 부사관 2명(폭격수, 항공기관사)[3] 엔터프라이즈, 호넷[4] 당시 일반적인 일본 제국 시민들은 둘리틀 특공대는 물론 이후 미군의 산발적인 소규모 폭격에도 엄청나게 동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중 4명은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6] 미 해군이 전진하던 중 마주치는 대로 격침시키던 일본 해군의 연안감시선에서 생존해 구조, 포로가 된 인원들이다.[미국측주장] 항공기 3기 격추는 미국 측의 주장이며, 교차 검증되지는 않은 정보이다.[8] 일반적인 함재기가 항공모함에서 뜨고 내리는 건 기본적으로 발함-착함이라고 하나, 이 경우는 예외적으로 이함-착함이라 한다. 왜인지 하면, B-25 자체부터가 일반적인 함재기가 아닌 육상기지용 중형폭격기이다. 함재폭격용으로는 주로 급강하폭격기 위주였다.[9] 한창 전쟁 중인 유럽 전선과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극동 지역은 단순히 전역이 확장되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거리였다. 또한 양면전쟁의 위험성도 안고 있기에 당연히 거절. 잘못하면 소련은 좌독일 우일본의 샌드위치가 되어 양쪽에서 두들겨맞을 수도 있다. 실제로 1941년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소련군은 일본군이 쳐들어 올 걸 걱정하여 극동 지역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의 차출을 꺼렸으며, 차출 이후에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최소 3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그대로 배치했다. 물론 그 일본군의 전투력은 할힌골 전투에서 드러났듯이 기계화 부대와 대규모 포병 전력을 운영하던 소련군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었지만 말이다.[10] 이 중 항공기관사 폴 J. 레너드 중사만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11]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슈나이더컵 대회를 모델로 한 작품인 붉은 돼지의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의 모델이 바로 슈나이더컵에 출전하던 시절의 둘리틀 중령이다.[12] 히스토리 채널, <배틀 360>, 출격! USS 엔터프라이즈[13] 이 당시 공군이 창설되기 이전이라 육군참모총장 휘하가 맞음. 링크에는 이런 상황을 몰라서 수신처에 공군참모총장이라는 오류를 범했음.[14] 일반적인 함재 전투기나 함재 폭격기라면 날개를 접어서 격납고에 넣을 수 있지만, 육상기지용 폭격기인 B-25는 덩치도 덩치거니와 날개 접기 같은 건 될 리가 없으니 비행갑판에 계류한 것이다.[15] 바다에 빠지기 직전까지 가긴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프로펠러 때문에 항모 승조원 중 한 명의 팔이 절단되는 사고까지 터졌다.[16]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쌍발기의 주인이 미 육군이었고, 이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시켰다는 점.[17] 일본 제국 패망사 p.495[18]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서도 끝에 위치한 열도로, 대륙과 멀기 때문에 외침을 받은 적이 거의 없고, 13세기 세계를 떨게한 몽골제국의 병력은 일본 원정을 내려오다 풍랑에 개박살이 나버려 카미카제(신풍)의 어원이 될 정도. 그만큼 외세로부터 본토가 직접 타격을 받는 현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던 일본에게 종심폭격은 상당한 쇼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19] 그런데 사실 일본군은 4년 전에 중국군에게 방공망이 뚫린 적이 있는 데다가(이들은 일본 본토에까지 들어간 후 삐라를 살포한 뒤 귀환했다.) 그때 방공망이 뚫려놓고도 대비도 안 했기에 이 정도로 뚫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20] 미군 역사상 현역 복귀한 예비역중 최고 계급 사례로 남아있다. 한편, 현재 영관급 장교로 복무중인 윌리엄 스웬슨(1978년~)이 이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상태이다. 윌리엄 스웬슨은 대위로 제대한 후 3년 동안 예비역으로 있다가 다시 현역 복귀했다.[21] 3호기 항공 기관사 릴런드 팩터 상병[22] 6호기 폭격수 윌리엄 J. 디터 중사, 6호기 항공 기관사 도널드 E. 피츠모리스 중사[23] 수용소라고는 하지만 굴라크처럼 혹사당하거나 가혹한 조건에서 복역한 것이 아니고, 먹을 것과 마실 것, 잘 곳 전부 내어주는 평범한 집합소 정도였다. 애시당초 동맹국의 파일럿을 굴라크로 끌고갔다간 그날 당장 랜드리스 물자가 끊길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럴 이유도, 필요성도 없으니 더더욱.[24] 물론 최초 계획은 상술했듯이 소련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항공기도 렌드리스 명목으로 넘겨줄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 조치에 미국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25] 나고야 폭격기 조종사 딘 E. 홀 마크 중위, 도쿄 폭격기 조종사 윌리엄 G 패로우 중위, 윌리엄 G 패로우 중위의 부하이자 해당 폭격기의 폭격수 해롤드 스피츠 병장.[26] 2020년에 개봉한 영화 미드웨이 엔딩에서 언급되는 20만 중국인 학살의 배경이 바로 이것인데,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중국의 자본을 받아 난징대학살의 원인으로 왜곡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7] 물론 중국이 반대했다면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을 설득했을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지만 사실 소련은 일본의 내부 사정을 꽤 잘 알고 있었으며 폭격기 조종사들을 받아들인 뒤 잡아떼도 일본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외교관계자는 물론 군부마저도 소련과의 전쟁극도로 꺼리고 있었다.[28] 심슨가족의 한 에피소드의 제목이 이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한 "Thirty Minutes over Tokyo"다. 시즌 10의 23화. 심슨가족이 졸지에 일본 도쿄로 여행을 가서 바보스러운 짓들을 해대는 에피소드인데, 그 백미는 호머 심슨이 아키히토 덴노를 집어던지는 부분. 당연히도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방영되지 못했다.[29] 이때 작중에 등장한 장면은 둘리틀에게 라이터를 선물받았던 중국인이 그것 때문에 일본군에게 추궁당하며 학살 위기에 처하는 장면이다.[30] 놀랍게도 해당 캐릭터는 당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주설산'이라는 실존인물로 마을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갑자기 백인들이 떨어지자 주민들이 급하게 데리고 와서 통역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주설산은 특공대원들이 충칭(장제스 정부의 소재지)까지 탈출하는데 큰 도움을 줬고, 영화와는 달리 일본군의 보복도 피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1992년 자신이 구해줬던 둘리틀 특공대원들을 다시 만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