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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1:01:27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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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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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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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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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7ceed> 영어 명칭 Independence Club[1]
한자 명칭 獨立協會
창립일 1896년 7월 2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해산일 1899년 1월 18일[2]
전신 독립문 추진 위원회
소재지 한성부 성저십리 연희방 독립관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독립공원 독립관)
이념 자유주의 (대한제국)
급진주의 (개화당)[3]
입헌군주주의 (의회민주주의)
한국 국민주의 (자강교육운동)[4]
경제적 자유주의[5]
민중계몽운동
자유민권운동 (기본권 · 참정권)
자강개혁운동
공화주의(일부)
친일, 반청, 반러, 친미
창립자 서재필
중추원 의관
17석 / 50석 (34.0%) (해산 직전)
회보 대조선독립협회회보
파일:1829382_image2_1.jpg
독립협회의 집회장으로 사용되었던 '독립관(獨立館)' 건물[6]

1. 개요2. 역사
2.1. 설립2.2. 활동2.3. 위기2.4. 진정2.5. 우여곡절 끝에 중추원 설립, 그리고...2.6. 해산
3. 친일 성향4. 주요 인물5. 평가
5.1. 급진성5.2. 외세에 대한 이중적 태도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896년 7월 2일 설립된 조선대한제국 시대에 청나라의 압제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 정치 단체. 창립자는 서재필이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손병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었다. 청년 시절 이승만이 활동하였으며[7] 이완용 역시 핵심 창립자[8]로 초대 위원장 겸 2대 회장으로 활동했으나 러시아의 압력으로 좌천되면서 제명당했다. 독립협회가 존재하던 시기에 이완용은 친미 성향이 강했고, 독립협회가 친일, 친미, 반러 등등 다양한 성향이 있었다.

입헌군주제를 포함한 자유 민권 운동이라는 긍정적인 부분은 인정받으나, 중추원 설립 단계에서 보인 급진적인 태도가 해체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협회가 긍정적으로 다뤄졌고 광복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가 1990년대 이후 독립협회의 부정적인 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사 교과서 및 공무원 시험에서는 긍정적인 부분 위주로 다뤄지고 있다.

특정 인물들이 현대 정치에서도 말이 많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고, 한국사의 측면에서도 근대 정치 발전사라는 대의 명분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언급이 많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2. 역사

2.1. 설립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역적이 되어 해외로 도피했다가 미국에 귀화한 서재필[9]은 조선을 장악하고 을미개혁을 진행하고 있던 과거의 개화파 동료 박영효의 초청으로 11년 만인 1896년 1월 사면을 받고 귀국한다. 이후 을미개혁을 진행하는 중추원의 고문이 된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주장한다. 이후 박영효는 추방되고,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서 친일파가 제거되면서 서재필을 지원해줄 이들이 조정 내에서 사라지지만, 독립문 건립만 주장한 서재필은 버틸 수 있었다. 이때 생긴 단체가 독립협회의 전신인 '독립문 추진 위원회'이다.

독립문 추진 위원회는 중추원 관료였던 서재필을 비롯해서, 외교 관료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정동구락부가 주축이었고, 설립 과정에서 왕실의 자금까지 들어간 명실상부한 관변 단체였다. 그리고 1896년 4월 7일, 독립문을 만들기 위한 홍보 창구 겸 개화 정책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 바로 독립신문이다. 즉, 독립문을 만들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독립협회의 1대 책임자였던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홍보하는 한편으로, 개화를 좀 더 제대로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자고 주장하게 된다. 이 주장에 따라서 1896년(고종 33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조직된 것이 바로 독립협회이다.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임원진은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 이상재 등 8명, 간사원에는 송헌빈, 남궁억 등 10명 등으로 당시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망라되었다.

2.2. 활동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10]을 통해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함으로서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1897년에 청 사신을 환영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지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청 사신의 접대 장소였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11]을 건립했다. 그 후 그곳을 독립협회의 사무실 및 토론회관으로 사용했다.

1898년에는 고영근을 중심으로 서울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일반 시민들의 여론을 모으고 압력 단체로 삼았다.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며 약 4천 명의 회원수를 가진 단체가 되었다. 만민공동회에 관리들을 참여시켜 '관민공동회'를 열기도 하고, 여기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제출했다. 이후 중추원 관제가 받아들여지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니콜라이 2세가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절영도 조차권을 할양받고 한러 은행을 설치하는 한편 군사, 재정 고문을 파견하자 서재필을 비롯한 반러주의자들이 중심이었던 독립협회는 이에 격렬히 반발, 외부 대신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고 고종 35년 3월에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에 러시아는 놀라울 정도로 순순하게 모든 협의를 백지화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대항마로 러시아를 끌어들일 생각[12][13]이었던 고종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고종은 러시아 고문들을 해임하면서 관민공동회 전에 서재필도 해임해 버렸고 서재필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안경수가 회장직을 맡았고 이후 이완용이 제2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으나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면서 곧 그만두게 되었고 윤치호가 3대 회장, 이상재가 부회장이 되었는데 윤치호는 취임 직후에 중추원 설립을 청하는 600명의 연명 상소를 올리며 의회 설립 운동에 나섰다.
“(...전략...) 다시 생각해보면, 당요(唐堯)가 50년간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림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조정에 묻고 한편으로는 재야에 물었는데, 조정에 있는 사람이란 것은 곧 모든 관리와 12목(牧)이며 재야에 있는 사람이란 곧 모든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한 후에 등용하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한 후에야 배척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 번 등용하고 한 번 배척할 때에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반드시 따라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요즘 구라파(歐羅巴)의 여러 나라들에서 비록 전제 정치(專制政治)라고 하더라도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상, 하 의원(議院)을 둠으로써 국시(國是)를 자문하며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았습니다. 이는 조칙에서 한 번 상을 주고 한 번 벌을 주는 일을 함부로 시행하지 말고 다 공론에 부치라고 하신 뜻이 너그럽고 위대하니, 더없이 넓고 높은 성덕(聖德)이 옛날의 훌륭한 정사에 부합되며 만국에 통행하는 규례에 맞습니다. 비록 신들이 우매함으로도 더욱더 감격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어 성상의 위엄을 피하지 않고 감히 어리석은 충심을 진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준수하고 훌륭한 선비를 널리 구하고 여론을 겸손히 따르시어 크고 작은 정령(政令)에 대해 위로는 백료(百僚)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묻고 널리 받아들여 시행하신다면 만백성이 매우 다행일 것이며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고종 35년(1898년) 7월 9일. 윤치호의 상소

이에 고종은 "나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 미쳤냐?"란 반응을 보였다.
“아뢴 내용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일에 대해 지위를 벗어나 망령되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독립협회는 대신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한다. 이에 대해서 조선 왕조 500년에 처음가는 민중의 힘이라고 하면 굉장히 멋져 보이지만, 독립협회에 참석한 이들의 상당수는 전현직 관료들에 명망가들이다. 2대 회장 이완용은 현직 관료였고, 3대 회장이자 중추원관제를 주장한 윤치호는 갑신정변, 갑오개혁에 모두 이름을 올리다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온 인물이다. 부회장 이상재도 박정양과 함께 일본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된 온건 개화파 관료를 시작으로 갑오개혁 때는 교육 담당으로 신교육령도 이상재 이름으로 발표되었을 정도로 잘 나갔던 인물이다. 즉, 이 시기 독립협회의 주도 세력은 친미, 친일 성향의 전현직 관료들로 갑오개혁 시기까지 잘나가다가 아관파천으로 한풀 꺾인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삼국간섭에 참여했던 독일, 러시아, 프랑스는 비판하고, 일본과 미국은 쉴드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키웠던 이들이다. 서재필, 박영효 등도 이 성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이들이 하는 것은 민중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재야 정치권의 반발이고, 이들의 조정 대신 탄핵은 사실 기존의 상소와도 별 차이가 없었다.

의정부 참정 조병식[14], 내장원경 이용익[15] 등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고 조병식은 만민공동회에 편지를 보내서 해명까지 했음에도 끝내 여론에 밀려 면직당했다.

이후 김홍륙 독차 사건이 터지자 김홍륙 등 3인이 교형에 처해지고 길거리에 시신이 내걸려 군중들에게 도륙당하게 하였는데 독립협회는 자신들이 진행했던 갑오개혁으로 폐지한 연좌제를 다시 끌어온 것을 강력히 비판하며 심순택, 윤용선, 이재순, 심상훈, 민영기, 신기선, 이인우 이렇게 일곱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이 처벌 요구도 윤치호의 상소가 시작이다. 군중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자 고종은 결국 일곱 대신을 모두 파직했다. 의정부 의정, 참정, 궁내부, 법부, 군부, 탁지부의 대신들이 갈려나간,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일이었다.[16] 이 일로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였고 독립협회에 우호적이던 민영환도 군부 대신이 되었다. 박정양은 독립협회 대표들을 불러 회의를 했는데 조선 역사상 최초로 관민의 대표가 궐 안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이들은 논의 끝에 중추원 관제를 구성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협회는 중추원 의관의 절반인 25명을 선출할 막강한 권한을 얻었다.[17] 그런데 독립협회에게 의석이 주어졌으니 황국협회[18]에게도 의석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의가 제기되자 고종은 그 말이 맞다면서 17석을 독립협회에 8석은 황국협회에게 할당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독립협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이 얼만데 이 따위로 대우하기냐? 그럼 다 때려쳐라."라는 자세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고종은 25석을 전부 독립협회에게 할당해 줘야 했다. 다만 기존에는 25인은 모두 독립협회에서만 선발한다라는 게 조항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후에 다른 민회가 성장하면 그 곳에서도 독립협회에게만 준 지분의 일부를 줄 수 있게 변경했다.

크게 고무된 독립협회는 더욱 과감한 행보를 밟으니 만민공동회에 의정부 대신들을 비롯한 조정의 전현직 대신들을 초청했다. 대신들은 대수롭잖게 여기고 불참했는데 이에 만민공동회는 군중을 동원하여 시위를 계속하며 대신들을 압박했고 대신들은 고종에게 어찌하면 좋냐고 물었다. 이에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대신들에게 만민공동회에 참석할 것을 명했고 박정양, 이종건, 서정순, 심상훈, 민영기 등이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만민공동회장에 나타나면서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로 거듭났다. 관민공동회는 대신들에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전부 다 의견을 펼치면서 매우 열렬하게 진행되었고 헌의 6조가 정해졌다. 헌의 6조는 다음과 같다.

이를 보고받은 고종은 헌의 6조를 수용했고, 11월 2일 중추원 관제가 발표된다.

이렇게 무난히 중추원이 설립되고 마는가 싶었지만...

2.3. 위기

조병식은 당시 의정부 찬정에 제수되어 있었는데 군부 대신 서리, 법부 협판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1898년 11월 4일을 기해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이상재를 내부 대신으로 정교[19]를 외부 대신으로 선출한 다음에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익명서를 하나 바친다.

사실 이 부분도 복잡하다. 왜냐하면 만민공동회에서 자주 나오던 구호가 윤치호나 박영효 대통령 논의었기 때문이다. 관민공동회 과정에서 특별히 조정과 황실에 대한 불온한 언사를 금한 것이나, 헌의 6조에서 황실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오히려 과격파들이 내부에서도 작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조병식을 포함한 친러파 고관들의 음모로 언급한 것은 대부분 당시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윤치호 일기나, 당시 간부였던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 실행이 되었을 때 권력을 잡았을 당사자들의 기록이다.

사실 말로만 전제 황권을 이야기할 뿐이지 어차피 갑오개혁 당시 조정에서 봤던 친일, 친미파가 태반이었던 독립협회가 아무리 봐도 친일파 끄나풀 같아서 불만이던 고종은 이 익명서를 명분으로 독립협회를 지울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살아남았던 이유가 민중의 힘이 아니라 한양 내 서양 외교관들의 눈치를 봐서였던 것처럼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공사관에 먼저 연락을 해서 협조 요청을 한 다음, 반대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모두 해산하게 된다. 대부분은 독립협회만 해산된 것처럼 언급되지만, 이른바 협회(協會)라고 이름한 것은 모두 혁파하라고 했기 때문에 황국협회도 같이 혁파된다.
“지난번에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관해 한계를 정하고 그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신칙한 것은 따뜻하고 정중히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혜를 발달시키고 개명한 데로 나아가도록 한 것이며 회의 순서를 정하고 규정을 따르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은 깨우쳐 인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패거리를 모아 더욱 위세를 부리고 명령을 거역함이 갈수록 방자해져서 심지어는 조정을 꾸짖고 대신을 쫓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다.대궐을 떠나지 않으면서 상소를 올렸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간절한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렸건만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성 안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니, 만약 신민(臣民)으로서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마지막에는 바로 폐단을 수습한다고 빙자하여 네거리에 목책을 치고 백성들을 지휘하여 움직여서 높은 벼슬아치를 위협하고는 결재할 것을 청하도록 다그쳤다. 그리하여 난리의 싹과 재앙의 기미가 당장 나타나게 되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게 되니 나도 모르게 한심하다. 이것을 심상히 처리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른바 협회(協會)라고 이름한 것은 모두 혁파하라.

내부(內部), 법부(法部), 경무청(警務廳),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일체 단속하고 신칙하도록 하되 각 회 중에서 가장 드러나게 남들을 부추겨 현혹시키고 사리에 어그러지게 흉악한 짓을 한 자에 대해서는 사실을 명백히 조사하고 엄격히 잡아다 그날로 조율(照律)하라. 해당 관원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만일 털끝만치라도 인정에 끌려서 용서해 주고 숨겨주는 폐단이 있으면 보고 되는 대로 범한 모든 죄를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 선비와 백성으로서 나이가 어리고 지각이 없는 무리들 중 덩달아 따라다닌 자들은 모두 죄를 따지지 말고 그대로 놔두고 각별히 신칙하고 풀어 주어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일전에 관민회(官民會)에서 여섯 가지 조항을 논하여 진술한 것은 아닌게 아니라 뽑아 쓸 만한 것이 있으며, 또한 조목별로 나눈 규정 중에도 있다. 대신은 이미 직책상 알지 못할 리가 없으나 잘못을 충고하는 의리로 볼 때 혼자서 보고하거나 여러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도 안 될 것이 없는데, 민회(民會)로부터 재촉을 받고 나서 손 가는 대로 옳다고 쓰고 갑자기 결재할 것을 청하였으니, 짐(朕)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 이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당시의 시임 대신을 모두 본관에서 파면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헌의 6조를 받도록 제안한 6명의 대신, 즉 의정부 참정 박정양, 법부 대신 서정순, 의정부 찬정 이종건, 농상공부 대신 김명규, 탁지부 대신 서리 협판 고영희, 의정부 참찬 권재형은 파면된다. 그리고 귀족원 경 김규홍이 의정부 찬정, 한성부 판윤 이채연이 귀족원 경, 태의원 경 이호익이 한성부 판윤, 경무사 신태휴가 농상공부 협판, 종2품 민상호가 외부 협판, 의관 김정근을 경무사에, 의정부 찬정 조병식을 임시 서리 내부 대신 사무에 임명했다. 이게 중추원관제가 발표된지 2일 후인 11월 4일의 일이다. 그리고 다시 조병세를 의정부 의정에, 의정부 찬정 조병식을 의정부 참정에, 외부 대신 박제순을 농상공부 대신에, 정2품 남정철·탁지부 대신 조병직을 의정부 찬정에, 홍릉 제조 민종묵을 외부 대신에, 정2품 민영기를 탁지부 대신에 임명했다. 여기에 조병식에게 법부 대신, 외부 대신 민종묵에게 내부 대신, 탁지부 대신 민영기에게 호위 총관의 서리를 더했다.

11월 6일 고종은 다시 해산 명령을 내린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든 회(會)라고 이름한 것은 일체 없애버렸는데, 요즘 이른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것은 무슨 명목이기에 어리석은 백성들을 부추겨 현혹시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속이는가? 하는 짓이 놀랍고 패역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칙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여전히 패거리를 모으는 자들은 법부(法部)에서 엄격히 잡아서 조율(照律)하라.
각 해당 부서를 놓고 말할 때 만약 남의 일을 보듯 하여 날뛰는 대로 내버려 두면 역시 신칙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각 방곡(坊曲)의 통수(統首)와 두민(頭民)을 엄하게 단속하여 일체 조사하고 살펴서 검속을 잘못해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내부(內部)로 하여금 한성부(漢城府)와 경무청(警務廳)에 거듭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전 의정부 참찬(前議政府參贊) 권재형(權在衡)과 전 탁지부 협판(前度支部協辦) 고영희(高永喜)는 대신(大臣)과는 차이가 있으니, 특별히 징계를 면제하고 전직(前職)에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조병식의 제안에 따라서 내부 대신 서리 민종묵과, 한성부 판윤 이호익, 경무사 김정근이 면직된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명령에 항거하는 것은 그 죄가 어떠합니까? 만일 좋은 말로 알아듣도록 잘 타일러주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사체를 생각할 때 너무도 놀랍습니다. 내부 대신서리(內部大臣署理) 민종묵(閔種默)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이호익(李鎬翼)은 모두 엄하게 견책하고, 경무사(警務使) 김정근(金禎根)은 우선 본관(本官)에서 면직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그리고 11월 7일 윤치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진다. 이것도 조병식의 작품으로 일부는 미리 잡아온 것이다.
법부대신임시서리(法部大臣臨時署理)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 윤치호(尹致昊), 의정부 총무국장(議政府總務局長) 이상재(李商在), 농상공부 광산국장(農商工部鑛山局長) 방한덕(方漢德),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건호(李建鎬),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 정교(鄭喬), 탁지부 재무관(度支部財務官) 염중모(廉仲模), 전 군수(前郡守) 김귀현(金龜鉉), 전 국장 남궁억(南宮檍), 전 의관(前議官) 윤하영, 내부 참서관(參書官) 한치유(韓致愈)는 심사할 일이 있어 잡아오려 하고, 더러는 이미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칙임관(勅任官)이거나 주임관(奏任官)이기에 형률(刑律) 명례(名例) 제28조에 의거하여 삼가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상재, 정교, 남궁억을 비롯한 13인을 체포했다. 윤치호를 비롯한 체포 대상 3명은 도주했다. 이 체포 대상을 보면 대부분이 전현직 관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독립협회 사무실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사무원이 체포당하고, 평의원 중 2명이 자기들도 체포하라고 나서서 체포되는 등 4명이 추가로 체포된다.

독립협회에 할당된 의관 25인을 선출하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은 독립협회의 지도부가 체포되었단 말을 듣고 분노하였고 특히 이에 강력히 반발한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이자[20] 급진파 이승만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대표자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며 한성부 종로와 남대문에 경무청과 평리원[21] 앞에서 철야 농성 시위를 전개하였고 날이 밝자 만민공동회를 열어 "충군애국이 죄가 되는가? 애국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체포하였는가?"라며 지도부의 석방을 촉구했으며 집결한 민중들과 함께 사건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22]

체포된 지도부가 고등 재판소로 옮겨지자 만민공동회도 그곳으로 옮겨졌다. 심지어 배치된 군인들이 즉석에서 해산, 지지를 표명하며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군중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조병식을 비롯하여 독립협회 수뇌부를 체포하게 만든 '5흉'에 대한 처형을 요구하는 한편 헌의 6조의 즉각적인 실행과 독립협회의 해산도 철회, 황국협회의 행동 세력이었던 보부상 혁파 등을 요구하며 약 50여 일간 경복궁 앞에서 상소운동 등 정치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고종은 11월 7일 불평하는 무리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는 한편,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불평을 품은 무리들이 암암리에 근거 없는 글을 내걸어 중심(衆心)을 현혹시킨 것은 심히 놀라운 일이다.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기어이 염탐해서 잡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0일, 법부 대신 한규설이 잡아들은 13명의 독립협회 인사[23]들을 잡법으로 처리해서 태형 40대로 처리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전현직 관료라는 것을 감안해서 모두 그대로 석방한다.
"현직이 없는 자와 시임(時任)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만큼 특별히 관전(寬典)을 베풀어 면속(免贖)하여 방송(放送)하라."

이 시기 만민공동회는 11월 5일부터 열리고 있었다. 이에 조병세가 사의를 표했으나 계속 유지시키는 한편, 11월 12일 중추원 관제를 일부 수정해서 다시 발표한다.
칙령(勅令) 제37호, 〈중추원 관제 개정 건(中樞院官制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본년 칙령 제36호 가운데에 중추원 관제 중 제3조와 제4조는 아래와 같이 개정하고 제16조는 빼버리며 제17조는 제16조로 개정할 것이다. 제3조 : 의장(議長)은 대황제 폐하가 글로 칙수하고, 부의장(副議長)은 중추원(中樞院)의 공천을 거쳐 칙수하며, 의관(議官)은 정부에서 나라에 공로가 있는 자와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를 회의하여 주천(奏薦)할 것이다. 제4조 : 의장(議長)은 칙임관(勅任官) 1등이고 부의장(副議長)은 칙임관 2등이며 의관(議官)은 주임관(奏任官)인데 등급과 임기는 없앨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윤길병 등이 상소를 올려서,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다시 묵살한다. 그리고 11월 15일 김가진 등에 의한 상소가 다시 올라가지만 역시 의정부에서 처리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대답이 나온다.

그리고 같은 날 15일 언로를 다시 열라는 칙령이 내려간다.
의정부 의정서리 찬정(議政府議政署理贊政) 김규홍(金奎弘) 등이 아뢰기를,
"의관(議官) 김가진(金嘉鎭) 등이 올린 글에 대한 비답에서 올린 글은 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조칙(詔勅)을 내렸습니다. 신 등이 민인(民人)들이 전후에 올린 소본(疏本)을 취하여 보니, 진달한 5조(條) 중에서 민인들이 의견을 올린 6조는 전에 이미 의정부로 하여금 조처하라는 비지(批旨)를 받아 차례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여러 관리들을 선택하여 임명하는 문제는 원래 6조 중의 하나인데 해당 상소를 거듭 올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섭에 대한 글을 공포하는 문제는 외부(外部)의 존안(存案)을 소급해서 상고해 보아도 도무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5신(臣)을 심판하는 문제는 해당 상소 중에 매 사람의 이름 아래에 모두 죄목을 열거해 놓았는데 신 등은 사실 이런 범죄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민인들이 이미 직접 대면하여 재판할 것을 청한 만큼 모두 법부(法部)로 하여금 한 번 대질시켜 조사해서 죄가 있으면 죄를 주고 죄가 없으면 무죄로 판결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협회(協會)에 관한 한 가지 조항으로 말하면 혁파하라는 조칙이 있은 만큼 감히 토의할 수 없는 것인데 이미 아랫사람들의 입장에서 바꾸어 생각한다는 전하의 명령을 받았으니 천만 번 흠앙(欽仰)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외국에서는 혹 백성들의 강연이나 담화를 승인하여 지식을 발달시키는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만약 범위를 정하여 세상의 공론을 묻는다면 역시 개진하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신 등이 마음대로 하기 곤란하므로 폐하의 처결을 바랍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그리고 11월 16일 5흉으로 지목된 이들에 대한 심문이 이뤄진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이, ‘조병식(趙秉式), 민종묵(閔種默), 김정근(金禎根), 이기동(李基東), 유기환(兪箕煥) 등은 정부(政府)의 공문과 관련하여 앞으로 잡아다 신문해야 되겠으나 이들은 칙임관(勅任官)인 만큼 《형률명례(刑律名例)》 28조에 의거할 것입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하지만 고영근의 만민공동회를 다시 허락해달라는 상소에 대해서는
"범위를 정하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 아니고 회규를 정하려는 것이다. 어찌 규칙 없는 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외 진달한 것은 이미 전날의 비답에서 다 밝혔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영근은 11월 20일 다시 민중의 권리에 대한 상소를 올리지만 역시 이미 발언했다고 하면서 넘어간다. 고종은 만민공동회와 중추원을 최소한 통제가능한 범위에 두려고 하였다.

11월 21일 이미 해산된 상태였던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단이 만민공동회를 습격한다. 이 시기 만민공동회는 11월 5일부터 계속 열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한계년사에 의하면 길영수, 홍종우가 이끄는 황국협회 보부상 들이 만민공동회를 습격해 군중을 무차별 구타했다. 이때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이승만이 길영수를 찾아가 보부상들의 정치 폭력 행위를 항의하고 길영수가 비웃음으로 대응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만민공동회는 해체되었고 보부상들은 대궐에서 제공한 백반과 육탕을 먹으면서 회포를 풀었다.

11월 22일, 다시 황국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충돌한다. 이 사건으로 신기료장수이자 독립협회원이었던 김덕규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민공동회는 김덕규의 노제 형태가 된다. 분노한 한양의 백성들이 돌멩이와 몽둥이로 무장하고 길거리로 쏟아졌다. 보부상들은 돌팔매를 맞고 달아나야 했고 조병식, 민종묵, 홍종우, 길영수의 집은 성난 군중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거리를 장악한 군중은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었다. 고종은 이 사건에 대해서 윤치호 등의 수배를 해제하고, 조병식 등 5인에 더해서, 홍종우, 길영수, 박유진에 대해서도 독자적 행동으로 유배형에 처한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법부(法部)의 상주문과 관련하여 잡아올 데 대해서 비준하였다. 그런데 같은 때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처결하여 놓아 보냈으니 종2품 윤치호(尹致昊)를 잡아오는 것을 특별히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조병식(趙秉式), 민종묵(閔種默),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 김정근(金禎根)은 지난번 백성들의 상소와 관련하여 정부(政府)를 통하여 재판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해당 범인들의 범죄가 만일 중대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여정(輿情)이 이와 같이 비등하고 답답해하겠는가? 홍종우(洪鍾宇), 길영수(吉永洙), 박유진(朴有鎭)은 제 마음대로 소동을 피운 만큼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모두 법부로 하여금 법 조문을 적용하여 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2.4. 진정

11월 26일 다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고, 고종은 여기에 직접 나섰다. 고종은 만민공동회 대표 200명과 증인으로 각국 영사, 공사들 및 조정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고종은 만민공동회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 모두는 짐의 말을 들을 것이다. 전후하여 내린 조칙(詔勅)에 대해서 너희들은 대부분 따르지 않고 밤새도록 대궐문에서 부르짖었으며 네거리에 가설로 문을 설치하고 제 마음대로 도리에 어긋나게 사나운 짓을 하면서 사람들의 가산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500년간 전제 정치의 나라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겠는가?
너희들은 한 번 그 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라.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만큼 중형에 처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짐이 나라를 다스린 이래로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점차 소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오직 너희 만백성의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오늘 바로 크게 깨닫고 짐은 매우 부끄러워한다.
물론 정부(政府)의 모든 신하들이 짐의 뜻을 받들어 나가지 못함으로써 아래 실정이 위에 전달되지 못하게 하여 중간이 막힘으로 해서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 오직 너희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는 것이 어찌 너희들의 죄이겠는가? 짐이 오늘 직접 대궐문에 나와서 어린아이를 품에 안듯이 하고 간곡히 타일렀으니 글 한자, 눈물 한 방울은 하찮은 사람에게도 믿음을 주고 목석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리라.
오늘부터 시작하여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가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가며 의리로써 서로 지키고, 온 나라에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구하며 무식한 자의 의견에서도 좋은 생각을 가려서 받아들이고, 근거 없는 말을 너희들은 퍼뜨리지 말며 미덥지 않은 계책을 짐은 쓰지 않을 것이다.
새벽 이전까지의 일에 대해서는 죄가 있건 죄가 없건 간에 경중을 계산하지 않고 일체 용서해주며 미심스럽게 여기던 것을 환히 풀어주어 모두 다같이 새롭게 나갈 것이다.
아!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누구에게 의지하며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누구를 받들겠는가? 이제부터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분수를 침범하는 문제는 일체 철저히 없애도록 하라. 이와 같이 개유(開諭)한 후에 혹 혼미한 생각을 고집하며 뉘우치지 못하고 독립의 기초를 견고하지 못하게 만들며 전제 정치에 손상을 주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은 결코 너희들이 충애하는 본래의 뜻이 아니다. 나라의 법은 삼엄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공경스럽게 지켜 날로 개명(開明)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짐은 식언(食言)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삼가야 할 것이다. 민회(民會)의 사람들과 상인들은 모두 짐의 적자(赤子)이다. 지극한 뜻을 잘 받들어 자애롭고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가 각기 생업에 안착하라.”
이에 협회 측에서 독립협회를 복설할 것, 대신을 가려 임명할 것, 보부상을 영원히 혁파할 것, 법령을 규정대로 이행할 것, 조병식,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 민종묵, 홍종우, 길영수, 박유진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고종은 독립협회 복설과 보부상 혁파를 수용하는 대신에 협회에게 토론이나 잘하고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거는 한편 소위 5흉은 처벌할 것이로되 홍종우 등 삼인은 너그러이 용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국권을 훼손시키지 말것을 당부했다. 이에 대표들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고 물러났다.

뒤를 이어 보부상 대표 200명이 고종의 명을 받고 입궐하여 상리국과 임방을 복설해 줄 것, 만민회, 독립협회를 해체할 것, 조병식 등 8인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종은 상리국 복설을 거부하는 대신에 보부상들의 생업을 편히 해줄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고 독립협회는 전과 다르게 바뀔 것임과 조병식 등 8인은 재판을 통해 죄의 유무를 가릴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보부상들도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친 다음에 물러났다.
보부상(褓負商)들에게 하유(下諭)한 칙어(勅語)의 대략에,
"너희들은 모두 짐(朕)의 말을 들을 것이다. 아! 너희들은 무엇하러 왔는가? 백성들이 대궐문에서 떠들며 밤새도록 시끄럽게 한 것은 너희들이 보고 듣기에도 놀라운 일인데 조령(詔令)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소란을 피우며 여염을 선동을 하였으니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치상 중한 형벌에 넘겨 처단하여야 하겠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짐이 상한 것과 같이 여기고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같이 돌보아야 할 의리에 있어서 진실로 차마 법에 의해 처리할 수 없다. 이에 대궐 전각 아래에 불러다 직접 나와서 효유하는 바이다.
너희들이 산 넘고 강 건너 먼 길을 와가지고 허송세월하면서 떨며 굶주리는 것이 걱정된다. 너희들의 부모가 동구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처자가 문가에 서서 날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정을 왜 생각하지 않는가?
무릇 백성들에게 죄가 있고 없건 간에 오늘부터 시작하여 일체 다 용서할 것이니 각각 서로 이끌고 물러가서 각기 상업에 안착하여 더욱 충애하는 데 힘써라. 만일 이전의 습성을 다시 되풀이한다면 나라에는 떳떳한 법이 있는 만큼 너희들은 삼가야 할 것이다. 민회(民會)의 사람들과 상인들은 모두 짐의 백성들이다. 누구나 차별 없이 대우하는 뜻을 명심하고 상호 자애롭고 사이좋게 지내며 태평을 함께 누릴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기존 범죄자들을 감형하는 한편, 홍종우, 길영수, 박유진의 유배형을 취소한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오늘 이미 친림(親臨)하여 통유(洞諭)하니 상하가 서로 믿게 되었고 나라의 형편이 안정되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기뻐하는 만큼 뜻을 표시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고 중범은 각각 1등(一等)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 소동에 죽은 자는 묻어주고 상한 자는 치료해 주어라. 무릇 집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는 자리 잡고 살 곳을 정해주는 방도를 내부(內部)와 탁지부(度支部)로 하여금 주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오늘 친림하여 통유하니 참작하여 고려할 문제가 없지 않다. 홍종우(洪鍾宇), 길영수(吉永洙), 박유진(朴有鎭)에 대하여 유배보내는 명령을 특별히 환수하라."
하였다.

고종은 대충 이 정도에서 대결 구도를 정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민공동회와 반대파 모두 그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고, 조정은 조정대로 혼란하였다.[24] 11월 28일에는 조병식 등 5인을 용서하고 보부상들 상리국 만들어주자는 상소가 올라오고, 12월 6일에는 보부상 혁파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병식 등 8인도 체포되지 않자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렸는데 이때 만민공동회는 서울 변두리 지역의 빈민 1200명을 고용해 목봉을 휴대하게 하는 등 매우 과격해진 상태였다.#
고영근이 상소를 올린다.
“신 등이 올해 10월 26일에 대가(大駕)가 대궐문에 직접 나온 것을 우러러보았는데 칙령 말씀의 간절함이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간곡히 타일러주는 정도일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 등은 감격의 눈물을 견디지 못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면서 폐하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티끌만한 성과도 내기 어려우니 더욱더 황송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건대 전날에 칙령을 내린 다섯 개 조항과 신 등이 헌의(獻議)한 여섯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기어이 실시하겠다는 유음(兪音)을 삼가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이 어제 관보를 읽는 가운데 심상훈(沈相薰)과 민영기(閔泳綺)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과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직책에 임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곧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하고 있으며 지난번에 신 등이 상소를 올려 규탄한 데 대하여 폐하가 세상의 공론을 따라서 이미 물리친 자들입니다. 그런데 며칠 되지도 않아 또 의정부(議政府)에 물어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는데 급히 골라 뽑아서 다시 높은 관리로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김명규(金明圭)로 말하면 지난번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벼슬에 임명되었던 날에 이미 폐지한 보부상(褓負商)을 제 마음대로 인가하여 규정을 문란시켰으며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지어 대궐문 가까이에서 회민(會民)의 백성들을 구타하여 상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울분을 격동시킨 결과 오늘에 와서도 수도 안의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김명규가 미연에 화근을 방지하지 못한 죄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상께서 골라 다시 교육의 임무를 맡겼으니 폐하가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판별하지 못하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뒤섞어 등용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모두 내쫓음으로써 조정의 기율을 엄숙히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신 등이 생각건대 5흉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전날에 연명으로 올린 글에서 모두 이야기한 만큼 거듭 폐하의 귀를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이미 나타나는 대로 재판한다는 칙유를 내린 지도 시일이 많이 지나갔는데 신 등은 아직 한 사람이라도 잡아왔다든가 염탐하여 찾고 있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법을 맡은 신하가 자유로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간사한 무리가 임금의 귀와 눈을 가려 중간에서 엄호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폐하가 이 무리들에게 의거하고 비호하며 꺼리는 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신 등이 의혹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것입니다.
심지어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과 같은 자들은 애초에 재판한 일도 없이 급히 유배의 명을 내렸지만 오늘까지 많은 시일이 흘렀으나 압송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법이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에 당요(唐堯)가 4흉(凶)에게 죄를 준 것을 온 천하가 모두 승복하였던 것이니, 신 등의 오늘의 말은 바로 천하의 공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법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조사하고 잡아다 징계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확립하도록 하고 민심을 승복하게 하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보부상을 없애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명령을 내린 것이 있고 또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칙유한 만큼 마땅히 서둘러 빨리 물러가 흩어져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 저 한산하게 지내는 무뢰한들이 몇백 몇천 명씩 무리를 지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수도 안에 따로 소굴을 만들고 저마다 뜬소문을 내서 인심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를 금지하지 않으면 황명(皇命)은 시행될 길이 없으며 백성들의 의심은 풀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경찰을 맡은 신하에게 그들을 쫓아버리고 흩어지도록 하며 다시는 종전의 버릇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직업에 안착되도록 하고 폐단을 제거해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신 등이 다시 생각건대 당일에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는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갈 것이라는 칙어를 만백성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참가하여 들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大韓)’이란 나라가 생긴 이래로 처음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
3신(臣) 물리치는 것과 5흉을 징계하는 것과 보부상을 없애는 것은 바로 오늘 폐하께서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일해 나가는 첫 번째 일입니다. 바로 이것은 만백성을 기쁘게 하고 여러 나라에 믿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유의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에 고종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기다리라고 화를 냈다.
“지난번에 직접 유시한 이래로 짐(朕)은 한창 생각을 가다듬어 새로운 정사를 해나가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째서 직업에 안착하지 않고 또다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인가? 3신의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할 것이 없이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5신을 재판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청의 소관이고 상인들을 단속하는 문제는 해부(該部)가 원래 있다. 지금 이미 없애버린 만민회(萬民會)를 설치하자는 것은 다시 시끄럽게 구는 것이니, 이것은 명령에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특별히 참작하여 주겠으나 만약 또 고집부리면 나라의 법이 지극히 엄하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12월 8일, 고영근이 상소를 또 올린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진실로 정승을 임명함에 있어서 적임자를 얻지 못하고 법률이 실시되지 못하며 백성들이 상호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폐하에게 충성의 마음을 담아 감히 진달하였더니 어제 삼가 폐하의 비답을 받아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직접 유시한 이래로 짐은 정신을 가다듬어 새로운 정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은 충분히 나라의 부흥을 오늘에 기대할 수 있게 하였으니, 신 등은 삼가 손을 모아 경축하는 심정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친히 유시한 지 열흘이 되었는데 신 등은 아직 하나의 정령이라도 실시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위로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너희들은 어째서 직업에 안착되지 못하고 또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가?’고 하였으므로, 신은 더구나 극도의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옷과 음식이 먹고 입는 데에 적합하고 부부간에 부르고 따르는 즐거움을 가지는 것은 진실로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며 신 등이 바로 생업에 안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굶주리고 풍찬 노숙(風餐露宿)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며 신 등도 즐겨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대한의 치하(治下)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안착하고 있는데 신 등만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일삼을 것이겠습니까? 위에서는 조정의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을 꾀를 쓰고 있고 아래에서는 민간의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신 등이 장차 어디에서 생업에 안착하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세 신하의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할 것이 없이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폐하가 일단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탓하지 말라고 한 것은 즉 세 신하가 전날에 잘못한 죄를 폐하는 이미 환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을 용서해주는 대성인의 덕으로 앞으로의 성과를 기다리려고 하지만, 폐하가 백성들에게 믿음과 의리를 보이자고 몸소 유시를 내렸는데 어째서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세 명의 신하를 꼭 등용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 신하가 하루를 정부에 있으면 만백성들은 하루의 해를 당하게 되며, 한 시각을 정부에 있으면 만백성들은 한 시각의 해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다섯 명의 신하를 재판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청의 소관이다.’ 하였습니다. 아! 저 5흉들은 단지 폐하의 영토 안에 형적을 숨기고 있을 것이니 반드시 남쪽으로 달아나고 북쪽을 넘어서 오랑캐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단속하여 시간을 정해놓고 염탐하여 잡는다면 법망이 넓다고 해도 새어나갈 염려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도록 이에 대하여 들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바로 일부러 놓아준 폐단인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어째서 경찰을 맡은 신하에게 죄를 주지 않고 법을 맡은 관청에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삼가 폐하의 비답을 읽어보면, ‘상인을 단속하는 문제는 해부(該部)가 원래 있다.’ 하였는데, 보부상(褓負商)과 상민(商民)은 그 구별이 아주 현저합니다. 상민이라는 것은 곧 폐하의 네 부류의 백성 중의 하나이고 보부상이란 곧 오늘의 반란의 무리들입니다. 신 등이 전날에 진달한 것은 곧 보부상이지 상민이 아닌 것은 명백합니다. 저 보부상들은 이미 없어진 후에 이름을 고쳐가지고 패거리를 불러 모아 기어이 만백성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만큼 어찌 다만 해부에만 내맡기고 금지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등한히 볼 것 같으면 본래 간악하고 흉한 패거리들인지라 저것들은 제 마음대로 패악한 짓을 자행하여 어떤 형태의 재앙이 아침과 저녁 사이에 닥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 등이 다시 모이지 않을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위에 진달한 것은 곧 오늘 백성들과 나라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며 또한 신 등의 절박한 사정이기에 신 등은 일단 물러갔다가 다시 모여서 여러 날째 돌아갈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명령에 항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다시 한 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은 폐하는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겨 전날에 신 등이 올린 세 가지 조항을 굽어 따라서 빨리 실시하소서."

이에 고종의 대답은 역시 짜증이 섞여 있다.
"진달한 데 대해서는 이미 전에 비답을 하였고 바야흐로 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또다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은 사체인가? 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이후 고종은 그냥 중추원을 빨리 만드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중추원 설립에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같은 날,
칙령(勅令) 제38호,〈중추원 관리의 봉급에 관한 건〔中樞院官吏俸給所關件〕〉, 칙령 제39호, 〈주임관과 판임관 시험 및 임명 규칙〔奏判任官試驗及任命規則〕〉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이즈음 최익현을 필두로 유림들이 독립협회를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전 헌납(獻納) 황보연(黃輔淵), 참서관(前參書官) 안태원(安泰遠)의 상소가 12월 9일, 의관(議官) 이남규(李南珪)의 상소, 3품 이복헌의 상소, 그리고 유림 끝판왕 찬정 최익현의 상소가 12월 10일에 올라온다.
"일곱째,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이로부터 정사에 관한 권한과 권세가 모두 백성들에게 옮겨가 앞으로 조정에서는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도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한 바,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금지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1898년 12월 10일 최익현의 상소.
“신이 듣건대, 예로부터 나라에 화를 끼친 간악하고 흉악한 자치고 애당초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 주변의 흉악한 무리를 말끔히 없앤다는 핑계를 대거나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한다고 빙자하기도 하면서 패거리들을 날로 번성하게 하고 임금의 형세는 날로 고립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하루 사이에 나라의 권세를 썩은 나무를 꺾는 것보다 쉽게 가로채어 제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데 누구도 감히 시비하지 못했으니, 전날의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들은 충성과 애국이라는 두 마디 말에 목적을 걸어두고 있으며 논하는 내용도 전혀 채용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속내와 말이 달라 나라에 화를 끼치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적신(賊臣) 안경수(安駉壽)와 서재필(徐載弼)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도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저 두 흉적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이야기를 해서 그간의 죄상을 밝히고자 하니, 폐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삼가 생각건대, 이 무리들은 패거리를 결성하여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며 거리낌이 없었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을 능사로 삼고 감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여 온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첫 번째 부도(不道)한 죄입니다.
...(중략)...지난번에 저들이 대궐문을 떠나지 않고 상소를 올렸을 때 성상께서는 동궁의 몸이 편치 않은 것을 매우 염려하여 여러 번 간절하게 신칙하여 우선 물러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더욱더 제멋대로 고함을 치고 밤낮으로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면서 임금의 근심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다섯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대소 신료들을 출척(黜陟)하는 것은 으레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하며 누구나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권세를 부려서 순종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거슬리면 곧바로 소란을 일으켜 제 마음대로 대신을 잡아들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축출하고 있습니다. 그 계책은 옛 신하들을 제거하고 저들이 좋아하는 자를 등용하려는 데에 있으니, 이것이 저들이 저지른 여섯 번째 부도한 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여론을 따르소서. 이른바 만민공동회를 맨 먼저 발기한 사람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이에 아부하면서 맞장구를 친 사람들은 일체 법사(法司)에 속히 회부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조율(照律)하여 감단(勘斷)함으로써 간흉의 싹을 근절하소서.”
- 1898년 12월 10일 이복헌 등의 상소.
“백성들이 협회를 설립하고 사안을 거론하는 일은 애초에 벌써 세력을 믿고 임금을 강요하는 혐의가 있는 것인데, 관직에 있는 사람이 어찌 말할 기회가 없을까 근심이 되어 도리어 백성들에게 달라붙는 것입니까?
옛날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전하였는데, 오늘날 벼슬하는 사람들은 장차 백성들의 힘을 끼고 임금에게 강요하자는 것입니까? 세상이 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민회(民會)로 말하면 앞서 이미 7명의 신하를 쫓아냈으며 뒤에 또 5명의 신하를 쫓아냈습니다. 이 열두 신하들의 현우(賢愚)와 사정(邪正)에 대해서는 신이 아는 바 없지만, 그들의 다섯 통의 상소문에서 조목을 들어 아뢴 것에 대해 한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이르기를, ‘민의(民議)가 들끓고 공론(公論)이 행해진다면, 규정 이외의 근신(近臣)이 나아갈 수 없을 것이고, 사인(私人)의 벼슬 청탁이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며, 공공연히 뇌물이 오갈 수 없을 것이고, 외국의 권력을 빙자하는 일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관리들과 백성들은 한 패거리가 되었으며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조종하는 권한이 아래에 있고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저 무리들이 떠받드는 자를 대신의 반열에 둔다면 근신이 위에 나아가지 않고 반드시 아래와 통할 것이며, 사인(私人)들이 위에 청탁하지 않고 반드시 아래에 모여들 것입니다. 뇌물은 관청에 들어가지 않고 반드시 개인집으로 들어갈 것이며, 대외적인 권한이 나라에는 없고 반드시 강한 신하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문제는 모두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또 들으니, 상민(商民)의 패거리들이 수천,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고는 하는 행동이 매우 해괴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이상한 소문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신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마땅히 농상공부(農商工部)에 명하여 타일러서 물러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1898년 12월 10일 이남규의 상소.
이후에도 11일 이문화의 상소, 12일 독립협회를 없애라는 김석제의 상소가 이어진다.

하지만 고종은 12월 15일 독립협회장 윤치호를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면서 중추원 개설을 계속 이어갔다.
종2품 윤치호(尹致昊)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영준(金永準)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고영근은 다시 상소를 올린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전후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 대체로 십수 차례 되는데 연이어 너그러운 비답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칙유를 받은 것이 수천 마디의 많은 양에 이릅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성인께서 간하는 말을 흐르는 물과도 같이 거침없이 따르는 덕은 옛날의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형세가 점점 더 위급해지고 백성들이 점점 더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의 성의가 천박하여 성상께 도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폐하가 신 등의 말을 결국 문구(文具)로 간주해서 그런 것입니까? 신 등은 한 번 비답을 받을 때마다 모두들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제부터 펴질 것이며 백성들의 생업이 이제부터 안착될 것이라고 하면서 밤낮으로 우러러 기대하였으나 아직 실시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일전에 번거롭게 구는 일이라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연명으로 된 상소를 올려 삼가 폐하의 비답을 받아 읽게 되었는데, 이르기를 ‘바야흐로 의정부(議政府)에서 실시하고 있다.’고 하였기에, 신 등은 거기에서 확실히 금일 아니면 명일에는 실시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근심은 아침저녁으로 급하여 결코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가 꺼리는 것이 있어서 실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구애되는 것이 없으면서 진실로 실시하려고 한다면 탁지부(度支部), 군부(軍部), 학부(學部)의 세 개 부(部)에 적임자를 얻어서 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재정이 늘 풍족하고 군사들이 잘 단련되며 교육에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아! 저 민영기(閔泳綺), 심상훈(沈相薰), 김명규(金明圭) 세 신하는 폐하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승복하지 않고 규탄하였으며 폐하가 환히 살피고 쫓아버렸는데 어찌 다시 이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은 영원히 깨끗한 조정의 반열에 나란히 세울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결단성 있게 단안을 내려 빨리 이 무리들을 쫓아버리고 다시 슬기 있고 착한 사람을 선발하여야 모든 정령이 비로소 실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5흉(凶)들이 지은 죄는 일찍이 재판하여 법조문대로 처결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2흉(凶)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편파적으로 입어 앞질러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것 역시 신 등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인데 더구나 3흉(凶)들을 아직도 징계하여 처결하지 않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법을 맡은 관청을 엄격히 신칙하여 기한을 명확히 정하고 잡아다가 재판에 넘김으로써 나라의 법을 밝히소서.
보부상(褓負商)의 폐단에 대해서는 신 등이 이미 전에 올린 글에서 상세히 진달한 바 있습니다만, 아직도 이들은 뭉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민간에서는 이들 때문에 소란이 나고 도로는 이로 말미암아 막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것이 점점 늘어나고 퍼지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당해 관청의 신하에게 명하여 엄격히 단속하여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 등은 모두 폐하의 백성으로서 오직 한마음으로 정사를 새롭게 해나가는 이 때에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례가 실시되도록 하여 독립의 기초가 날로 확고해지고 문명한 정치가 날로 발전해나가도록 하려는 것이 지극한 소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세세히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비답을 내렸는데도 이와 같이 시끄럽게 구는가? 사체(事體)를 헤아려 볼 때 매우 무엄하다.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하였다.
그리고 12월 16일 다시 관직 제수가 이어지는데, 만민공동회에서 자르라고 한 인물들과 만민공동회 관련 인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심상훈(沈相薰),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용구(尹用求)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박정양(朴定陽), 법부 협판(法部協辦) 윤웅렬(尹雄烈)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부장(副將) 민병석(閔丙奭)을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윤용식(尹容植)을 궁내부 특진관에, 특진관 김석근(金晳根)을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2.5. 우여곡절 끝에 중추원 설립, 그리고...

12월 21일, 중추원을 구성하면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윤치호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된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윤치호(尹致昊)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이채연(李采淵)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종2품 이근호(李根澔)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고종은 12월 22일부터 정동을 포함한 한양 주요 부서에 군대를 배치하여 방어를 시작한다.

그리고 12월 23일, 중추원의 첫 안건이 통과된다. 하지만 첫 회의가 마지막 회의가 되고 말았다. 우선 독립협회 계열 의관들이 당시 권한에도 없는 대신 11명에 대한 추천과 임명을 통한 투표를 제의했고, 그게 바로 1회 의제로 통과되고 말았다. 이건 분명한 월권 행위였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미국인으로 이미 고종의 눈밖에 나서 추방된 서재필과, 역시 반란 혐의로 추방되어 당시에 1급 반역자 취급을 받던 박영효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재필과 박영효를 추천하는 것에 있어서는 독립협회 계열 내부에서도 반발이 존재했으나 결국 강행되었다(...). 그리고 대신 총수인 11명에 맞춰서 최소 8표에서 최대 18표를 얻은 대신들이 선발되었다. 여기서는 최익현을 포함한 보수파 3인을 제외하면 모두 독립협회가 지지한 인물들이었고 이중에는 문제의 박영효와 서재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서정순(徐正淳)이 아뢰기를,
"방금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대리하는 의관(議官) 윤시병(尹始炳)의 통첩을 보니, 재주와 기량 면에서 의정부 각 대신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 11인(人)을 투표로 선발하겠다는 내용이었으며, 또한 본부(本府)에서 안건을 갖추어 상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중추원 관제를 삼가 조사해 보니, 제1조 제5항에, ‘중추원의 임시 건의 사항’이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건의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정령과 법률상 이로운가 해로운가, 적합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논의하는 것뿐이고, 인재를 추천하고 관리로 임명하는 것은 해원(該院)의 부의장(副議長)을 제외한 다른 관직에 대해서는 원래 해원에서 논의하여 추천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당 통첩은 즉시 반환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이른바 투표로 선발된 명단 가운데 망명한 죄인들이 버젓이 섞여 천거되었으니,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날 그 문제를 제기하고 좋다고 한 의관 최정덕(崔廷德)과 의정부에 통첩한 의관 윤시병은 모두 본관에서 면직시키며, 가부를 결정하는 마당에서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한 여러 의관들에 대해서는 현고(現告)를 받고 일체 본관에서 면직시킬 것입니다. 그날 의장을 대리한 의관 이시우(李時宇)는 투표로 선발된 명단이 드러난 것을 보고서도 즉시 금지시키지 않았으니, 책벌로 1개월의 감봉(減俸)을 시행할 것입니다.
의장(議長) 이종건(李鍾健)으로 말하면, 투표하고 선거하는 데는 비록 참가하지 않았지만 법을 위반하여 안건을 제기하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했으니, 또한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견책(譴責)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박내동(朴來東)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모두 일개 서생으로서 본래 경력도 없이 외람되게 중추원 의관의 직임을 맡게 되었으니,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지 않아 자신을 돌이켜볼 때 부끄럽고도 두렵습니다.
일전에 의논하는 모임에 참가하였을 때 동료인 최정덕(崔廷德)이 안건을 제기하기를, ‘현재 의정부(議政府)의 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문제는 없으니, 오늘 우리들은 각각 무기명 투표로써 인재를 추천하되 각기 11인씩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의원들이 모두 좋다고 하여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11인 중에는 박영효(朴泳孝)와 서재필(徐載弼)이 끼어 있습니다. 이는 최정덕 등의 간사한 계책으로서 겉으로는 인재를 추천한다는 핑계를 대고 속으로는 이 두 사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의장(議長)과 신 등 두 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최정덕, 어용선(魚瑢善), 신해영(申海永), 변하진(卞河璡) 등은 한 목소리로 좋다고 하여 서로 버티다가 결정을 짓지 못한 채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 때문에 의장은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날 것을 청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회의를 열었는데, 의관 이교석(李敎奭)이 의장을 대리하였습니다. 최정덕 등이 전의 의견을 극력 주장하자 이교석 역시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도피하였습니다.
이때 최정덕 등은 그 패거리의 의관 윤시병(尹始炳)을 추대하여 의장일을 대리하게 하고서는, 한 마디를 외치면 열 마디로 화답하여 그 계책을 실현하였으며, 끝내는 의정부에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가슴이 섬뜩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설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본원(本院)의 장정(章程)에는 원래 인재를 추천하는 권한이 없고, 또한 의정부를 조직한 전례가 없으니, 이른바 인재를 추천한다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원래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저들이 처음 안건을 제의할 당시에 일찌감치 그 간사한 계책을 저지하지 못하여 함정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신들이 똑똑하지 못한 잘못이며 죽어도 죄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런데 최정덕은 유독 무슨 마음으로 두 사람을 극력 추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하가 비록 작은 잘못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탕척(蕩滌)하여 징계를 사면하기 전에는 추천하여 등용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나라의 법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박영효의 일로 말한다면, 을미년(1895년) 5월에 반역 음모를 한 죄상에 대해 조칙(詔勅)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해외로 도망가고 법망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아직도 처벌이 지연되고 있으니, 이에 대해 귀신도 사람도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정덕 등은 도리어 그와 내통하면서 투표할 것을 궁리해 간사한 행위를 도왔으니,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저 을미년(1895년)의 조칙을 폐하께서 아직 철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알고 있는 바이니, 저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왕권을 함부로 빼앗아 제멋대로 농간을 부리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에 황제의 조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저들의 논의가 도리어 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심보를 캐볼 때 어찌 저들의 안중에 임금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재필에 대해서 논한다면, 외국 국적을 취득하여 외국의 신하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대한(大韓)의 신민(臣民)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심산입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동조자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최정덕 등이 박영효, 서재필의 동조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먼저 신들의 똑똑하지 못한 죄를 다스린 뒤에 결단성 있게 단안을 내려 최정덕 등이 역적을 비호한 죄를 속히 다스림으로써 나라의 화란의 싹을 막고 먼 훗날을 위한 생각을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 논의를 주도한 사람들은 의정부의 규탄에서 이미 탄핵하고 면직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이 일로 만민공동회를 군대가 포위하게 되면서, 만민공동회는 종로로 밀려났고 결국 철야 농성을 중단하고 해산된다. 군대의 포위로 이미 참석 인원이 급감하기 시작한 뒤였다.

그리고 12월 24일, 고영근이 또다시 상소를 올린다.
종2품 고영근(高永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일전에 세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었는데 폐하의 비답을 삼가 받고 보니 명령 내용이 하도 엄하여 더없이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다시 폐하에게 상소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니, 폐하는 유의하여 밝게 살펴주기 바랍니다.
보부상(褓負商)을 혁파하라는 조칙은 분명 거듭 있었던 것인데, 아! 저 흉악하고도 미련한 무리들은 즉시 흩어지지 않고 또다시 어제 패거리를 불러 모아 기어이 만민(萬民)을 죽이려고 소매 속에 방망이를 감추어 가지고 몰래 살피는 과정에 만민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전 군수(前郡守) 신(臣) 원직(元稷), 전 군수 신 이재화(李在華), 전 의관(議官) 신 공석조(孔錫祚), 전 주부(主簿) 신 나규섭(羅圭燮) 등 4인은 곧 현장에서 발각되었기에 경관(警官)이 만민이 많이 모인 가운데서 그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원직은 공술에서 없애버린 보부상들을 다시 이름 지어 ‘상무협회(商務協會)’라고 하고 길영수(吉永洙)와 박유진(朴有鎭)이 이미 처분을 받들었으며 그 비용은 나라에서 준 것과 탁지부(度支部)에서 낸 것인데 돈의 액수는 19만 냥으로서 대궐에서 길영수에게 내려보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공술에서는 흉악한 짓을 자행할 차례를 말하였는데 먼저 신하 고영근과 종2품 윤치호(尹致昊)를 제거하며 다음은 지난번에 체포된 의정부(議政府)의 총무 국장 신 이상재(李商在) 등 17명이며 그 나머지는 보잘것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재화의 공술에서는 백민회(白民會)를 설치하여 만민회(萬民會)를 반대한다고 하였으며 전 문안(文案) 신 권동수(權東壽)와 군부 대신서리(軍部大臣署理) 신 민병석(閔丙奭)이 함께 들어가 입시(入侍)하였는데 지출해준 돈이 2,000원이 된다고 하였으며 그 떼어주는 일을 맡아서 처리한 것은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였다고 하였습니다.
공석조, 나규섭 등의 공술도 일체 말한 내용이 같았습니다. 아! 저 무리들이 상무회(商務會)라고 말하는 것과 백민회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난동을 부린 백성들이 하는 짓입니다.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엉키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모해한 계책에 대해서는 해와 같이 밝게 비치는 폐하의 성스러운 덕으로는 신 등의 쓸데없는 진달을 기다리지 않고도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궐에서 내려보냈다거나, 떼어주었다거나 하는 말에 대해서 신 등은 매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며 저 무리들이 허물을 위에 돌리는 것을 통탄스러워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꼽아보아도 어찌 저 무리들과 같은 흉악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백성들을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고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지극히 어질고 훌륭한 덕을 지닌 폐하가 보잘것없는 무리들에게 이러한 모함을 당하였으니, 신 등은 폐하의 백성으로서 저 무리들에 대해 매우 속상하며 이를 갈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원직, 이재화 등을 법을 맡은 관청에 넘겨 조종하는 우두머리를 조사하며 협박에 따른 난동의 무리들을 적발하여 모두 법조문에 비추어 징계하소서.
민영기로 말하면 본래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무리들의 영수로서 기꺼이 난동을 부린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더없이 중요한 공적인 돈을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제멋대로 농간을 부려 거액의 돈을 지출함으로써 민심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나라의 창고가 바닥나는 것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해당한 법조문을 적용함으로써 백성들과 나라를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그리고 대체로 신 등이 전날에 연명으로 올린 글에서 제기한 민영기(閔泳綺), 심상훈(沈相薰), 김명규(金明圭) 세 신하를 아직도 내쫓지 않은 것과 조병식(趙秉式), 민종묵(閔種默), 김정근(金禎根) 3흉을 아직도 징계하여 처결하지 않은 것,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 2흉을 앞질러 귀양 보낸 것, 보부상(褓負商)들을 아직도 금지시키지 못한 것이 진실로 신 등이 여러 차례 폐하를 시끄럽게 굴면서도 그만둘 줄을 모르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능히 신의(信義)를 보인다고 한 칙서의 내용을 생각하여 빨리 처분을 내림으로써 나라의 법을 펴며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신 등이 다시 생각건대 속 좁은 간사한 패거리들은 임금께 대한 신 등의 바른 말과 정직한 충고를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 가지로 날조를 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는 소문이 낭자하며 풍설이 떠들썩합니다. 이에 대해 신 등은 더 없는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 등의 딴 마음이 없는 확고한 한 가지 신념에 대해서는 하늘이 환히 보고 있으며 또한 신명(神明)에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세세히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조칙으로 유시하였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2.6. 해산

그리고 12월 25일,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모두 해산시킨다.
“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백성들은 짐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단문(端聞)에서 대궐 문에 직접 유시(諭示)한 지 며칠 안 되었기에, 짐은 너희들이 다시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 너희들의 죄는 너희들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다.
관소를 이탈하여 모임을 개최하는 데 대해서 이미 금령이 있었는데도 도처에서 모여들며 전혀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이 첫 번째 죄이고, 독립협회(獨立協會)에 대해서는 이미 승인하였는데 ‘만민공동(萬民共同)’이라는 명목을 마음대로 내건 것이 두 번째 죄이고, 신칙하기도 하고 비지를 내리기도 하여 물러가도록 타일렀는데 줄곧 명령에 항거하면서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 세 번째 죄이고, 쥐를 잡으려다 그릇을 깰까 염려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경계하던 것인데 대신(大臣)을 능욕하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는 것이 네 번째 죄이고,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외국 공관에 투서를 하여 스스로의 죄를 숨기려고 한 것이 다섯 번째 죄이고, 백성과 관리는 체모(體貌)가 원래 다른데 관리를 위협하여 억지로 모임에 나오도록 한 것이 여섯 번째 죄이고, 부(府)와 부(部)의 행정은 어떤 경우에도 비워서는 안 되는데 관청에 난입하여 사무를 보지 말라고 외친 것이 일곱 번째 죄이고, 재판 사건은 힘 겨루는 일이 아닌데 소송할 것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무리를 지어 사단을 일으킨 것이 여덟 번째 죄이고, 군병을 파견하여 문을 막으라는 명령이 원래 있었는데 분풀이로 돌을 던져 중상을 입힌 것이 아홉 번째 죄이고, 여러 차례 명소(命召)했으므로 즉시 와서 대령했어야 하는데 요사스러운 말로 선동하며 줄곧 명을 거역한 것이 열 번째 죄이고, 도망간 역적은 용서할 수 없으며 사람마다 누구나 죽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꺼내어 임용할 것을 기도한 것이 열한 번째 죄이다. 기타 자질구레한 범죄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아! 너희들은 스스로 위에 열거한 죄상에 입각할 때 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너희들 역시 스스로 모면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고 하늘이 매우 진노하고 있는 만큼 엄격한 징벌을 가할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의 본뜻을 세세히 따져 볼 때 어찌 진실로 죄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그런 것이겠는가? 처음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착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결국에는 도리에 어긋나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에서 피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의구심이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짐은 너희들의 부모로서 단지 너희들이 처음에 착했던 것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그동안 저지른 모든 죄를 일체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니, 너희들은 더 머뭇거리지 말고 서로 이끌고 물러갈 것이다. 아! 너희들 중 짐의 이 말을 듣고 눈물 흘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본연의 양심이 반드시 왕성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니, 각각 이전의 잘못을 씻어버리고 모두 함께 새롭게 나아갈 것이다. 짐은 더 말하지 않겠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이 민회(民會)의 일로 방금 칙유(勅諭)를 내렸다. 만일 우둔한 무리들이 오만무례하게 두려워할 줄 모른 채 다시 지난날의 버릇을 답습하여 열 명, 다섯 명씩 거리에 모여 모임을 열려고 하는 자들이 있으면, 파수 순검(把守巡檢)과 순찰 병정(巡察兵丁)으로 하여금 철저히 규찰하여 즉시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또한 거리와 마을에서 일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로서 방청(傍聽)한다는 핑계로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자들도 역시 금단(禁斷)하며, 불량하고 잡된 무리들 중 보부상(褓負商)에 가탁하는 행동거지가 수상한 자들도 일체 엄격히 단속하라고 내부(內部)와 군부(軍部)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황국협회, 또는 상무협회 또한 해산된다.

12월 28일 만민공동회를 포함한 집회와 관련한 마지막 발표가 나온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믿음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 덕의 근간이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나라에 믿음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에 짐(朕)이 흉금을 터놓고 백성들에게 효유했건만 아직도 의구심이 채 풀리지 않았을까 저어하여 또다시 이렇게 널리 알리는 바이다.
무릇 백성들은 한두 명씩 고립되어 있을 때면 누구나 다 분수를 지키고 마음을 안정되게 지니지만, 수백, 수천 명씩 무리를 이루게 되면 그 속에서 자연히 들뜬 기운이 생겨나, 처음에는 감히 말하지 못할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된다. 전날의 이른바 민회(民會)라는 것 역시 그러했으니, 처음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다가 결국에는 발언과 행동에서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게 되었다.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잡힐까봐 두려워하여 도피만 일삼은 채 임금의 위엄은 수효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두루 미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진실로 모여 있던 날에 용서를 해주려고 하다가 해산된 뒤라 하여 약속을 어기게 된다면, 어찌 나라에서 백성들을 대하는 도리라고 하겠는가?
오늘부터 의구심을 말끔히 풀고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착하라. 만일 다시 뜬소문을 퍼뜨리면서 혼미하여 되돌아갈 줄 모르고 열 명, 다섯 명씩 떼를 지어 이전의 버릇을 되풀이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로 스스로 죄를 초래하는 것이다.
국법은 지극히 엄하여 더는 용서하기 어려우니, 내부(內部)로 하여금 경무청(警務廳)과 한성부(漢城府)에 신칙하여 백성들에게 분명히 효유함으로써 모두 다 잘 알아듣도록 하라."
하였다.

3. 친일 성향

독립협회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친일적인 논조를 게제하였다.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4.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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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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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rowcolor=#87ceed> 초대
안경수
제2대
이완용*
제3대
서재필
제4대
윤치호
간부
위원장 이완용* 고문 서재필
위원
김가진 남궁억 박정양 송헌빈
안창호 오세창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 1898년 7월 17일 제명되었다.
}}}}}}}}} ||


독립협회에 참여한 인물들 중 이상재, 이승만, 주시경, 안창호, 신채호 등은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안경수는 고종에 의해 참살 당했으며 김가진은 한일합방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서재필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완용과 김종한, 민상호[25], 이근호, 권재형[26], 윤치호[27]는 식민지 체제에 협조한다.

5. 평가

5.1. 급진성

구한말 최초로 민권 운동을 하였으며 개혁적인 활동을 한 단체였으나 너무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인 개혁을 바라고 있었다. 전제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지 못했고, 왕이 직접 추방하거나 퇴출을 명한 자들을 영입 명부에다 실어놓음으로써 고종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전제군주가 무력 행사에 들어갈 경우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서양의 앞선 체제를 받아들였지만 현실적인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집권자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점이 이들의 한계였다. 초기에는 조선도 개혁을 해야 외세에 대항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고종과 이해가 일치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고종을 상대로 이를 드러낸 시점에서 이들의 해산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급진개화파들이 모델로 했던 일본천황은 약 1천년 간 허수아비였지만 5백년 간 만인지상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제군주제의 왕에게 명분으로 요구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사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메이지 유신도 유교성리학을 위시한 군주에 대한 충(忠)사상으로 시작해 결과적으로 전제군주제나 다름없었던 프로이센을 모델로 하여 천황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독립협회의 활동이야말로 일본의 근대화 방향과 반대로 간 쪽이며, 당대의 현실을 무시했던 몽상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과 모순되게 일부 국민의 참여를 배제하거나 반대파들을 멸시하는 등 자신들이 다른 국민들보다 우월하다는 듯한 선민사상과 편협성을 보이기도 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실패를 고위층 기득권양반, 그리고 민중의 무지함에 있다고 보았다.[28]
독립협회 회원들은 여전히 동요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일반 대중의 가공할 만한 무관심이다. 대중은 이 투쟁을 독립협회 회원들과 정부의 사적 분쟁으로 간주한다. 몇 백 년 동안 노예 상태에서 억압받아온 이 아이들은 헌의육조가 국가와 국민 모두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국민한테 희망을 갖다니, 우리가 더 바보였다. 왕이나 국민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노예상태 뿐이다!
윤치호 일기, 1899년 6일 (음력 23일) 일요일

5.2. 외세에 대한 이중적 태도

교과서나 대중 서적에서 묘사하는 대외적인 뉘앙스와 달리 실제 독립협회는 러시아에 대한 배제에만 집중했고, 일본이나 다른 영미권 열강들에게는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 정확히는 독립협회가 '이권 수호'라고 막은 대상은 주된 대상은 러시아였고, 러시아 이외에도 프랑스와 독일이 포함된다. 당시 프랑스도 영국과의 극동지대 이권 등으로 인해 일본을 견제하려던 조선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차관 제공, 고문단 및 기술자 파견, 은행 설립 추진[29] 등을 했던 나라였다.

반면 영국이나 미국, 일본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거나 오히려 호의적이었다. 특히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가져간 것은 당시에도 정치적 목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이 쏟아졌는데, 이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철도 부설권 양도의 결과는 이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신속하게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재배치되는 결과와, 작게는 한반도 내의 반일의병들을 신속히 괴멸시키는 일을 불러왔다.

독립협회 인사들은 각지에서 일어난 반외세, 반일 의병에도 부정적이었다. 고종 33년(1896년) 6호자 독립신문에서는 일본이 청나라와 싸워 이긴 덕분에 조선은 독립할 수 있었으니,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논설이 실렸다. 또한 고종 34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35년 별호에서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논설까지 실렸다. 이밖에도 독립신문은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도적(비도)이라고 모욕하는가 하면,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며 훌륭한 애국자라고 찬양했다.[30]

또한 독립협회는 독자적인 군사력 강화에 부정적이었다. 이들이 바란 군사력은 동학이나 도적 같은 애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고종이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해 근대적인 해군을 창설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독립협회의 신문인 독립신문은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면서 극렬히 반대했다.[31][32]

결과적으로 독립협회는 근대화를 덧씌운 일본의 제국주의에 너무 순진하게 대응하였다. 긍정적으로 표현해서 순진하게 대응했다는거지 비판적으로 말하면 국제 정세에 문외한인 어리석은 대응이자 위정척사 세력보다도 조선의 존속에 도움되지 않는 대응이었다. 선동된 일부를 제외하면 친일파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협회 해산 이후 일부는 독립운동에 가담했지만, 이후 구축된 식민지 체제에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이 많다.

독립신문은 고종의 4300원을[33] 제외하면, 이후 독립협회 활동에서는 일본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의병을 찾아서>의 저자가 밝혀낸 자료에 의하면, 일본 외무성과 일본 공사 등 일본의 정부 기관으로부터 흘러나온 약 1천만원의 자금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으로 들어갔다.

6. 여담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체하고 황권을 토대로 근대화 개혁을 주도하였다.

독립협회와 같이 움직였고, 만민공동회를 지원한 단체가 있다. 바로 황국중앙총상회. 이들은 서울 시전상인 모임으로, 상권수호운동단체이다. 이들이 일본 등의 지원을 받은 독립협회와 같이 움직인 것을 이해하기 힘들거나, 단순한 개화지지세력으로만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공통의 적인 황국협회를 가져다 대면 그 상황을 간단하게 이해 할 수 있다. 혜상공국에서 시작한 국가의 보부상단 관리 시도는 서울 시전상인들에게는 상권침해라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였고[34], 갑신정변 시기 혜상공국을 혁파해버린 급진개화파 계통은 시전상인들과 연결고리가 생긴다. 이후 상리국이 설립되었다가 다시 혁파되고, 황국협회가 세워지면서 그 내부에 상무소가 설립된다.

상무사의 개설은 황국협회에 소속된 보부상들의 숙원이었고, 황국중앙총상회는 황국협회가 싫어서라도 독립협회의 편을 들게 되었다. 물론 이런 복잡한 이야기와 사익이 잔뜩 섞인 이야기는 모양새가 별로기 때문에, 황국중앙총상회 관련 내용은 대외 세력에 대한 상권 수호 노력으로만 언급되고, 독립협회와의 관련성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왜 독립협회의 활동이 수도에만 집중되어서 나타나고[35], 황국협회는 전국적으로 이야기가 나오는지 해석해주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서적은 정교의 대한계년사인데, 역으로 정교가 워낙에 독립협회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어서 그대로 믿어주기가 힘들다는게 문제이다. 독립협회의 과격화라거나, 보부상단의 뒤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36] 같은 부분은 언급이 상당히 부족하다. 사실 독립협회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편하게 생각해버리면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고, 반대로 정부 측 사이드에 괜찮은 사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비판하기 힘들기는 하다.

이승만은 이 시기에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제법 유명해졌는데[37] 익명서 사건으로 투옥된 17명을 석방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장안의 일약 스타로 데뷔하게 된다.[38] 그는 후에 이 사건을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대승리라고 여겼는지 자기 일생을 통해서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한 사건이었다고 회상(回想)하였다.[39] 그러나 성취감에 취해 기세를 몰아 다른 것도 더 얻어낼 심산으로 시위를 멈추지 않고 지속하니 정부 입장에서 이승만은 아주 골치거리였고 주요 위험분자로 찍힐 수 밖에 없었다.[40] 결국 박영효를 위시하여 고종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우려고 한다는 음모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한 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승만은 1912년 집필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자신이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이승만은 출옥한 1904년을 기점으로 대일관이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며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보이지 않는 음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특히 일본인들은 맹렬한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던 개화당을 이용해서 추밀원 안의 독립협회 출신 의원들과 손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인들은 우리 독립의 참다운 협력자인 듯이 가장하고 러시아, 중국 그리고 서양의 제국주의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다수의 망명객들은 일본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돈을 물쓰듯 써가면서 추밀원 의원들을 대접했다. 이승만은 너무나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과 그 돈의 출처를 충분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망명객들과 동아인(東亞人)의 단결을 촉구하는 대동아합병(大東亞合倂)의 구상에 관하여 비밀리에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 계획은 훨씬 뒤에 부르짖게 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계획의 전주곡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망명객들은 차차 러일전쟁 계획을 밝히기 시작하더니 다음에는 미일전쟁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말하였다. 일본은 서양의 열강이 극동을 침범하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국과 우리도 이 성스러운 일에 합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ㅡ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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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관련된 다른 틀 (사회민주주의 · 신자유주의 · 자유지상주의 · 진보주의)
※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단체; 각각 자유지상주의, 진보주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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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한자어 '협회(協會)'는 보통 'Association'의 한국어 번역으로 쓰이지만, 본래 '협회'의 뜻은 어떠한 사람 또는 대상을 '돕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당시 독립협회의 목적은 당시 조선의 군주와 정부의 독립 의지를 뒷받침하고 독립 사업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기 때문에 '협회'라는 이름을 썼고, 이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모임'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Association과는 의미상 큰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독립협회의 영어 이름은 Independence Association이 아닌 Independence Club이 되었다.[2] 1898년 12월 25일부터 고종에 의해 만민공동회가 해산되고 독립협회가 불법화되면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1899년 1월 18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3] 독립협회는 개화당의 실질적인 후신으로 볼 수 있는데, 4.1. 급진성 항목 참조. 실제로도 급진적 자유주의 개혁을 추구했다.[4] 독립협회는 근대적 자주독립의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방향에서 국민주의적 자강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국민주의 자강교육이라고 한다. 우리역사넷[5] 황국협회와 달리 대상과 지주 중심의 경제를 추구하였으며, 외국 상업의 진출에도 긍정적이었다[6] 본래 명칭은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였다.[7] 다만 이승만은 투옥되었다가 러일전쟁 중 석방되어 반일로 전향하였고, 1912년 집필한 자서전에서 독립협회 활동에 대해 후회하는 말을 남겼다.[8] 독립신문에서 활동하며 글도 많이 썼고, 독립협회 회비도 독보적으로 많이 냈다고 알려져 있다.[9] 해당 시점 기준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귀화해서, 조선 내에서도 미국인인 필립 제이슨으로 활동했다. 독립협회나 독립신문에서 본인은 서재필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다. 필립 제이슨의 한자식 표기로는 피제손이다. 묄렌도르프가 목인덕이었던 것처럼, 필립 제이슨은 피제손이라고 했다.[10]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11] 이 건물은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제가 철거했으나 1996년 서울시가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있다. 현재는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로 사용된다.[12] 단적으로 대한 제국의 국고는 사실상 일본 제일 은행 조선 지점이 담당하고 있었고, 일본 제일 은행은 이 돈을 조선으로 건너오던 일본인들에게 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은 화폐 정리 사업에 필요한 귀금속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한러 은행을 설치하면서 이를 국책 은행으로 삼으려고 시도했다. 이러면 기존의 돈을 맡고 있던 제일 은행은 큰 손해를 보게 된다.[13] 사실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당시 조선을 둘러싼 해외 열강들 중에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던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러시아가 유일했다. 영국과 미국은 오히려 일본한테 조선을 빨리 장악하고 자기들 대신에 러시아를 견제해 주기를 바랬고, 그 외에 다른 서양 국가들은 조선의 독립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며,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에서의 모든 영향력을 잃어버렸던 상태였기 때문.[14] 조병식이 흉년 때문에 방곡령을 내려서 양곡의 대일 수출을 금지했을 때, 일본이 이 일에 대해 소송을 건 일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학을 탄압하여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라고 불리기도 하며 실제 행적만 봐도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이다. 조병갑과 똑같다 조병갑과 결국에는 독립협회로부터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 제대로 한 일이 없다고 탄핵당했다.[15] 광산 개발로 해독을 끼친 혐의, 인삼 행정을 잘못한 혐의, 화폐를 잘못 주조한 혐의를 받고 탄핵당했다.[16] 상식적으로 현 대한민국 체제에서도 시위로 장관을 한둘도 아니고(사실 단순 시위로는 장관 하나 교체한 것도 어렵긴 하다.) 일곱 명이나 교체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17] 총 50석에, 왕이 나머지 25명을 지목.[18] 보부상들이 모여서 설립한 단체. 사실상 고종의 어용 단체였다. 황국협회와 반대로 시전 상인들이 결성한 황국 중앙 총상회는 독립협회의 입장을 지지했다.[19] 대한계년사를 쓴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0] 獨立新聞, 1898-03-12, "삼월 십일 오후 두시에 죵로에셔 만민 공동회가" / 獨立新聞, 1898-05-05, "광무 이년 사월 삼십일 만민 공동회 총대위원 최정식 정항모 이승만 제씨가"[21] 현 고등법원[22]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64-66; 서정주, 《미당 서정주 전집 19 : 김좌진 장군전, 우남 이승만전》, 2017, 은행나무, p. 338[23] 이상재·방한덕·유맹·정항모·현제창·홍정후·이건호·변하진·조한우·염중모·한치유·남궁억·정교·김두현·김귀현·유학주·윤하영[24] 조병세, 박정양, 민영환, 박제순, 이용익, 박기양, 한규설 등 만민공동회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대신들이 모두 사직을 청하고 일부는 만류되고 일부는 사직했다가 다시 임명되는 것이 10월부터 12월 초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진다.[25] 통신기관의 정비와 우정산업의 확장에 기여하나,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26] 권중현으로 개명하기 전 이름이다.[27] 윤웅렬의 남작 작위를 승계받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를 박탈당했다.[28] 그러나 사실은 윤치호가 말한 왕, 양반, 민중의 무지는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왕에 해당하는 덴노의 경우 고메이 덴노는 확실하게 양이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들인 메이지 덴노도 아버지만은 아니라도 서양 문물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고 단지 본인이 직접적인 정무를 보는 것을 별로 하지 않아 메이지 유신 세력이 그의 방해를 받지 않고 메이지 유신을 추진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양반에 해당할만한 사무라이 계층도 분열되어 흑선내항부터 대정봉환까지 13년간 정치적 다툼이 심했고 그 이후에도 서남전쟁의 종결까지 10년 가까이 두 차례나 내전을 치르며 진통이 심했다. 당연하지만 민중들도 마찬가지라 민중들의 경우 예시를 들자면 1000여년동안 육식금지령으로 고기를 못 접하다 보니 신정부에서 고기를 먹으라고 했을 때 거부감이 심각했고 나중에서야 고기를 먹게 되지만 이번엔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으며 가라유키상이나 마비키 같은 악습은 메이지 시대에도 근절되지 못했다.[29] 이 역시 영일 측의 압박과 독립협회의 여론 몰이로 무산[30] 출처: 어메이징 한국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34~235쪽[31] 출처: 어메이징 한국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35쪽[32] 현재 대한민국이 자주 국방과 안보를 위해 쓰이는 노력과 수많은 논의들을 생각하면 이들의 행동이 조선의 독립적 성장에 얼마나 위험한 행보였는지 알 수 있다.[33] (생계비1300 + 신문사창간비3000원)[34] 이건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모두 폐지된 이후 상무사가 복립된 이후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부는 상무사가 소속 보부상들에게 '빙표(憑標)'를 판매할 수 있게 했고, 그 수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걷었다. 빙표를 가진 보부상은 일정지역의 독점적 판매권이나 상인들에 대한 조세대행업무를 했다. 뭐 이렇게 보면 엄청난 조직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실제로 돌아다닌 보부상들 위에 있는 상무사의 주요 직함들을 중앙 관료체제의 인물들이 겸직했다. 예를 들어서 상무사의 13도 분사장은 관찰사가 겸직하고, 군단위는 군수, 목사, 부윤 등이 겸직했다. 중앙정부에서 보부상들을 향리처럼 사용해서 상권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35] 황국중앙총상회는 말 그대로 서울 시내의 시전상인들만의 모임이다. 다른 지역 시전상인들도 보부상이 싫은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경강상인들과 금난전권도 대상을 피해갔던 육의전을 포함한 시전상인들의 이해관계는 다른 지역 상인들과 전통적으로 충돌했다.[36] 황국협회에 정부 관료들이 있으니까 라고 보기에는, 독립협회에도 정부 전현직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37]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62-74[38] 獨立新聞, 1899-01-13, "경청 소문" / 每日新聞, 1899-01-24, "법부에서 고등 재판소에 훈령하기를"[39]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64-66.[40]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심지어 같은 개화세력이 보기에도 너무 급진적인, 앞뒤가리지 않고 일을 벌여놓고 사태 수습도 못하는 이승만을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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