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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타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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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타통작전
大陸打通作戰
Continent Cross-Through Operation
Operation Ichi-go
파일:예상계 회전.png
▲ 전개도[1]
날짜
1944년 4월 19일 ~ 12월 31일
장소
허난, 후난, 광시
교전국

[[일본 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전력
병사 50만 명
차량 15,000대
야포 6,000문
전차 800대
말 10만 필
병사 100만 명
피해규모
10만 명 전사 65만 명 전사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1. 개요2. 작전의 배경과 일본군의 목표3. 중화민국의 대응4. 경과
4.1. 1단계 경한작전(京漢作戦)4.2. 2단계 상계작전(湘桂作戦)
5. 결과 및 비판
5.1. 중화민국, 미국5.2. 일본 제국
6. 나비 효과

[clearfix]

1. 개요

항전 이래 최대의 위기다.
- 장제스

1944년 중일전쟁 막바지 일본군이 최후의 공세를 가한 작전을 말한다. 이른바 중국 대륙을 때려() 뚫는() 작전. 일본은 50만 병력에 15,000대의 차량, 6,000대의 야포, 800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했으며 말이나 비행기도 다수 동원되었다.

일본에서는 1호 작전(一號作戰[2], Operation Ichi-Go)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예상계 회전(豫湘桂會戰, Battle of Henan-Hunan-Guangxi)[3]이라고 부른다. '대륙타통작전'은 전시 일본의 신문에서 사용한 명칭이다. 당시 실제 작전명을 기자들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임시로 붙인 명칭이 굳어진 것이다.

2. 작전의 배경과 일본군의 목표

1943년 12월 7일 대일본제국 육군 지나방면군은 '대륙철도 종관작전 지도대강'을 제정함으로 중국의 철도를 확보하여 수송망을 확보하고 중국군(국부군) 주력에 타격을 준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1944년 1월 24일 이 작전을 승인했다.

1944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불리함은 가시화되고 있었다. 남방에선 미군의 공격이 거셌고 중국전선도 일본군의 전략적 안목이 결여된 무모하고 비생산적인 공세로 인해 진전이 없었다. 이에 일본은 미군의 공세가 강화되기 전에 중국 전선을 정리함으로 숨통을 트고 영미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낸다는 외교적인 목적도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마련했다.
1. 중국의 남북을 관통하여 중국과 동남아를 육로로 연결하여 수송로를 마련한다.

2. 미중 연합공군의 비행장을 점령하여 미군의 폭격을 막는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미군에게 제해권을 잃으면서 상실한 해로를 대신할 병참선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중국 전선을 정리하고 더 나아가 인도를 점령함으로 미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할 가능성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이 작전을 위해 북지나방면군, 우한의 11군, 광저우의 23군을 비롯한 거대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1. 허난성의 중국군 1전구를 섬멸하고 우한까지 진격해 평한(베이핑(베이징)-한커우) 철도를 개통한다. 이로써 화북과 우한의 육로를 연결하고 제2군에게 육상 보급을 실시한다.

2. 우한에서 아오한 철도와 샹구이 철도를 따라 헝양, 구이린, 류저우, 난닝을 장악, 중불국경(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까지 돌파한다. 이로써 본토를 폭격할 B-29 폭격기지와 구이린, 류저우의 비행장을 점령하고 남방으로 육상교통로를 확보하며 남방의 중국군 주력을 격멸한다.

작전에서 지칭하는 철로들은 베이징에서 우한에 이르는 경한철로와 우한에서 광저우에 이르는 월한철로를 가리킨다. 이 두 철도노선은 전통적인 정치중심지(베이징)와 경제중심지들(장강 중부의 우한과 전통의 대외교역지인 광저우)을 연결하는 노선이며, 당시 중국내 국민총생산의 절반을 점유하는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헌데 중국군보다 우월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일본군은 경한철로와 월한철로의 기점과 종점은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 점들을 연결하는 철도변 지역은 전혀 장악하고 있지 못했다. 즉, 1944년 초까지만 해도 중국의 경제총생산액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진 지역을 중국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준비된 병력은 17개 보병사단, 1개 전차사단, 6개 독립여단 등 50만 대군과 800대의 전차, 1만 6천대의 차량, 10만 마리의 군마, 항공기 200대에 달했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맹점이 있었는데 중국 전선을 정리함으로 숨통을 튼다는 기본적인 방침과는 동떨어진 대륙 관통이 작전 내용이었던 것이다. 만약 일본군이 정말로 중국 전선을 정리하고 싶었다면 장제스가 앉아있는 충칭과 충칭이 넘어간다면 수도가 될 청두를 공략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고 화중의 공군기지들을 없앤다 쳐도 쓰촨, 윈난의 공군기지들이 건재하니 들이는 수고에 비해 결정적이지 못할 터였다. 이 때문에 지나방면군 참모부터 1호작전을 반대했고 11군도 차라리 충칭과 청두를 공격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표했다.

1944년 1월, 내각총리대신 겸 육군대신도조 히데키 역시 이 작전이 비현실적이고 거창하다고 평가하며 중국 서남부의 비행장을 점령, 파괴하는 것으로 작전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작전을 허가했으나 작전 입안자인 핫토리 다쿠시로 대좌는 이를 거부하고 막무가내로 기존 계획을 밀어붙였다.

결국 이 작전을 실행할 담당자인 지나방면군 원수 하타 슌로쿠 장군은 만주, 일본, 조선 전역에서 병력과 물자를 모으는 한편, 부상자 후송, 병참의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는 등 매우 치밀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3. 중화민국의 대응

일본군이 엄청난 숫자의 병력과 무기를 집결시키고 있다는 첩보는 당연히 중국군에도 전달되었다. 장제스는 일본의 공세 위험에 대해서 루스벨트에게 '중국이 일본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44년 2월 난웨에서 열린 4차 군사회의에선 일본의 선제공격이 예상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스틸웰 이하 미군 참모들은 일본군은 이미 약화되어 공세를 할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의 주장을 수용한 루스벨트는 장제스가 가진 유일한 전략예비대인 윈난 성의 Y군을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에 동원하기 위해 버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장제스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며 만약 Y군을 움직이고 싶거든 버마에 미군을 상륙시켜 카이로 회담의 합의를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스틸웰로부터 일본군의 위험성에 대한 과소평가된 보고를 받은 루스벨트는 장제스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만약 Y군을 보내지 않으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압박했고 장제스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Y군을 버마에 파병했다. 설상가상으로 셔놀트 장군이 지휘하던 미중연합공군도 버마로 이동하면서 중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공세를 맞이했음에도 최정예 병력을 다른 전선에 보내버리게 된 황당한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4. 경과

4.1. 1단계 경한작전(京漢作戦)

1944년 4월 14일 대륙타통작전의 첫번째 단계인 경한작전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군마 3만 3천 필, 700대의 전차와 6천 대의 차량을 갖춘 14만 8천 명의 일본군은 4월 17일 장딩원, 탕언보의 1전구를 공격했다. 중국군 1전구는 40개 사단, 3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모든 병사들이 일본군의 공세에 치열하게 맞서싸웠지만 일본군은 전차, 항공기, 대포 등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고 있었고 4월 17일 일본군 37사단이 황하를 도하하여 중국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여 3방면으로 진격했다.

4월 20일에 중국군 방어선이 붕괴되어 북부의 요충지인 정저우, 쉬창이 잇달아 함락되었다. 탕언보가 쉬창을 구원하기 위해 2개 군의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일본군은 5월 1일 쉬창을 점령한 다음에 1전구의 보급기지인 루스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뤄양까지 밀어붙였다.

이에 맞춰 남쪽에서도 공세가 시작, 5월 9일에 남북의 일본군이 만나면서 평한 철도는 일본군이 장악했다. 5월 18일 일본군은 세 방향으로 뤄양을 포위하여 총공세를 펼쳤고 5월 25일 1전구의 사령부가 위치한 뤄양도 일본군 12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1만 5천명 가량의 피해를 냈으며 중국군은 3만 2천명이 전사하고 8천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일본군은 주장했다. 그리고 허난 대기근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져 있던 허난성에선 중국군의 피해가 확실해지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중국군 패잔병들이 허난성 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4.2. 2단계 상계작전(湘桂作戦)

일본군의 두번째 목표는 9전구였다. 쉐웨 장군이 지휘하는 9전구에는 40만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창더 전투에서 입은 타격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11개 사단, 4개 여단 등 36만 대군과 100대의 전차, 9,400대 차량의 거대한 병력을 동원하는 상계작전을 준비했다.

5월 27일 11군을 중심으로 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불리한 제공권에도 불구하고 창사 주위의 중국군을 먼저 격파하는 새로운 전술을 활용하여 중국군의 방어전략을 무력화했고 창사를 포위했다. 쉐웨는 창사 사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1만명의 병사만 놔두고 창사를 포기했다. 일본군 3개 사단은 창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6월 18일, 이틀만에 점령했다.

다음 목표는 헝양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6월 24일 2개 사단을 동원해 헝양을 공격했다. 헝양에는 팡셴줴 휘하의 10군 소속 4개 사단 2만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정예부대였다. 6월 26일 5만명의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으나 정예부대였던 중국군 10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7월 11일의 2차 공세도 중국군이 승리했다. 일본군은 헝양에 미군이 주둔한 것이 아닌가 잠시 의심할 정도로 10군의 전투력은 우수했다.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은 즉각 3개 사단과 야전중포병여단을 헝양으로 급파하여 10만 명의 병력으로 더욱 거센 공세를 감행했다. 장제스도 이에 대응하여 2개 군을 보냈으나 쓸만한 예비대인 Y군은 버마에 묶여 있었고 장제스가 보낸 병사들은 무기와 훈련 상태가 형편없는 잡졸들이었다. 장제스의 지원군은 간단히 패배했고 8월 4일의 3차 공세에서 헝양은 함락되었으나 일본군의 공세를 이후 3개월이나 지연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2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살상했다. 중국군이 더욱 적은 숫자로 더 많은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는 이때가 유일했다. 중국군 2만 명과 일본군 10만명이 붙어서 일본군 피해가 더 큰 전투였다.

헝양 전투로 1호작전은 3개월 간 지연되었으나 그 3개월 동안 스틸웰의 처리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틸웰은 마침내 해고되었지만 일본군에 맞설 준비는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군 6개 사단, 1개 독립기갑여단, 제2비행집단으로 구성된 16만 대군이 구이린, 류저우의 공군 기지들을 노리고 있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중국군을 오합지졸로 얕보고 있었으나 구이린에 투입되는 일본군은 헝양에서 중국군의 놀라운 분투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으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는 11군이 전멸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후속 부대에게 공을 넘기는 각오로 싸우라고 훈시할 정도였다.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는 중국군은 장파쿠이의 4전구 휘하 20만 명이었으나 이들은 2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던 장제스의 호언장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오로지 광시 출신인 바이충시와 리쭝런의 병사들만이 일본군에 맞서 항전했다. 구이린 전투에서 중국군 6천명이 전사하고 1만 3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11월 24일에 난닝이 함락되었고 12월 10일 불중 국경이 일본군에게 장악되면서 일본군은 목표로 하던 것을 모두 성취하였다. 이후 1945년까지 철도를 따라 중국군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1호 작전의 피해는 절망적이었다. 중국군은 전사자와 부상자, 포로를 합쳐 50만 대군을 잃었으며 4개 전구가 괴멸적 피해를 입었고 장강의 3전구는 아예 일본군에게 포위당했다. 일본군 역시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9명의 장군이 전사했으나 공산당을 막던 부대들까지 죄다 투입했던 중국의 당시 피해는 너무도 심각했다.

일본군은 1944년 말에는 충칭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미국 참모장인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은 두차례나 수도를 쿤밍이나 청두로 옮길 것을 청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다행히 일본군은 장제스가 충칭을 잃는다고 항복할 인물이 아니며 병참의 문제와 중국 해안선을 통한 미군의 강습을 우려하여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서 충칭은 무사할 수 있었지만, 중국은 5개 성, 6천만명이 거주하는 땅을 빼앗겼으며 동부 해안 함락 이후 중국의 경제력을 지탱하던 곡창지대를 모두 상실했다.

이로 인해 중국군은 이른바 '지식청년군'이라 하여 엘리트 학생들까지 모병해야 했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향후 중국의 인재 육성에 중요한 중등교육과정 이상의 학생들의 징집을 면제했는데, 인적 피해가 워낙 심각해서 어쩔 수 없이 자원 입대의 형태로 모병을 하게 된 것이다. 본래 10만명의 인원을 예상했는데 14만명의 학생들이 모병에 응해서 목표를 초과달성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은 훈련을 받고 부대를 편성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서 별다른 활약이나 피해는 없었다.

5. 결과 및 비판

5.1. 중화민국, 미국

중국군은 65만[4] 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생기고 경제력의 중심지인 화중, 화남의 곡창지대를 모조리 상실했으며 충칭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게다가 연합국 내부에서 입지가 매우 좁아졌으며 대만을 공략한다는 미국의 보조 작전들이 모두 취소되고 필리핀으로 미군의 공세가 벌어짐으로써 장제스의 장기적 항전 전략은 큰 타격을 입고 만다.

반면에 일본군은 화북에서 팔로군을 상대하던 병력의 대부분을 투입하는 바람에 이 작전 이후부터 공산당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1년만인 1945년엔 120만을 넘어가며 중국내 일본군 전체보다 많아진다. 국민당에겐 한 마디로 최악의 결과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 실제로 이 작전의 결과가 훗날 국공내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다.

이때 당한 피해를 회복하지 못해 장제스가 후일 오키나와 전투 전 미국과의 협상중 루스벨트가 오키나와를 중국이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루스벨트는 오키나와 전투에 국민당군이 참전해 미군의 피해를 나눠받는 조건이면 오키나와를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장제스는 그러기엔 이미 국민당군의 피해가 너무 크고 일본군과 공산당에 수적으로도 밀리는데 병력을 오키나와로 따로 뺄 수도 없어서 손을 놓아버린 것. 이때의 결정으로 오키나와는 중국 본토와의 연결이 단절되어버리고, 후일 센카쿠 열도 분쟁의 시발점까지 제공하고 만다.

5.2. 일본 제국

일본은 일단 목표한 바를 성취해 내긴 하였으나, 1호작전 자체가 전략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는 소모전에 불과했다. 중국군에 큰 타격을 주긴 했지만, 일본의 생산력은 이미 거대한 양면 소모전쟁을 수행하기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 와중에 후술하듯 철도망도 부실한 동남아 오지까지 열차로 보급선을 재개한다는 것이 황당하기 그지 없는 발상이고, 폭격 저지 역시 윈난의 공군 기지와 마리아나 제도의 함락으로 광시의 공군 기지를 점령한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일본군 피해 역시 전사자만 10만 명에 달했음으로 그 대가가 결코 싸지 않은 작전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화북에서 잔인한 토벌 작전으로 후방의 농촌과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던 팔로군과 국민당 유격대들을 토벌하면서 화북의 치안을 가까스로 회복한 상태였는데, 치안 유지에 필요한 병력을 죄다 대륙타통작전에 때려넣으면서 결국 화북을 무주공산으로 만들었고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된다.

결과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 이 작전이 실패한 진정한 이유는 일본군이 수립한 전략 목표가 철도만으로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연결한다는 망상[5]인데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었던 경한-월한선의 확보도 너무 늦게 실행되어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 측 비평가들은 경한-월한선의 확보는 1940년까지 달성했어야 할 전략안인데, 이를 일본은 기점과 종점에만 집착하고 연결선 주변 지역의 방대한 경제력에는 신경을 쓰지 않다가 국력이 고갈된 전쟁 말기인 1944년에야 주목하고 뒤늦게 실행했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까고 있다. 이 시기에는 차라리 내륙에서 총퇴각 후 연안 항구를 철저히 장악하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장기적 구상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 전선의 정리인데, 이 작전은 중국 전선의 정리와는 영 거리가 먼 작전이었다는 것이고 일본군 내부에서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이 많았던 작전이었다.

한편 작전의 두번째 목표인 미중연합군의 비행장을 점령하여 미군의 폭격을 저지하는 것 또한 애초에 달성이 불가능했다.

이치고 작전의 2단계가 한창 진행 중인 1944년 6월 무렵에 미군은 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마리아나 제도를 확보한다. 기존의 중국대륙의 기지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는 영국령 인도에서 중국 서남부로 이어지는 버마 루트에 보급을 의지해야했고 일본군의 점령지 상공을 뚫고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일본을 폭격해야했다. 따라서 폭격은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미군이 사이판 섬을 확보하고 비행장을 건설함에 따라, 일본 본토를 훨씬 효과적으로 폭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6] 이치고 작전이 아직 마무리되지도 않은 시점인 1944년 가을 무렵에는 대부분의 B-29 폭격기가 사이판 섬으로 전환배치됨으로써 미국의 전략폭격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7] 총 전사 및 실종자가 100,000명이나 된다.

또한 이 시점에 일본군은 석유를 어마어마하게 소모하여, 석유 비축량[8]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44년 12월경의 일본 제국 석유 비축량은 고작 1,135,000배럴으로 당시 1,140,000배럴 가량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보다 적었다.[9]

6. 나비 효과

이 작전이 전황을 타개하지는 못했지만, 태평양 전쟁의 미군 작전계획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 미군의 반격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를 위시한 육군 중심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 진격과 어니스트 킹 제독[10]이 주장한 해군 중심의 태평양해역군의 중부 태평양 돌파라는 두 갈래 노선으로 진행되었다. 이 중에서 중부 태평양 돌파안의 후반 계획은 대만을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중국 대륙에 상륙하여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섬멸한 후, 만주조선을 해방시켜 부산항에서 일본에 상륙한다는 순차적인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던 중국 동남부 해안지대와 중국군의 협조가 필수였으나, 대륙타통작전에 의해 중국 해안지대를 사실상 완전히 잃어버린 것[11]과 이 와중에 중국군이 보여준 추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타이완 침공안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퍼졌다. 이로 인해 더글러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하는 필리핀 탈환 후 일본 본토 침공론이 득세하게 되었고, 역으로 어니스트 킹 제독을 중심으로 한 미 해군은 전쟁 주도권 다툼에서 위축될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다 중국 내륙에서 작전하던 미 육군 항공대의 경우 이런저런 이유로 작전 효율이 떨어지던 와중[12]에, 이 작전의 여파로 인해 작전 기지에 가해지는 일본군의 위협이 더 커져버리자 중국 이외에 다른 작전 기지, 특히 그 즈음 막 시작한 B-29를 이용한 일본 본토 폭격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기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괌, 사이판을 손에 넣게 되었지만 일본 본토와의 거리가 있는 만큼 작전기의 손실을 여전히 상당 부분 감내해야 했기 때문에 안정된 기지에 대한 요구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줄어들지 않았다.

위의 두 가지 요인이 겹치자 중부 태평양 돌파를 실제 실행하고 총괄하던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그 휘하에 있던 제독들은 어니스트 킹 제독에게 반기를 들어 타이완 침공을 백지화[13]하는 대신 미 육군 항공대의 요구에 부합되면서 미 해군이 주도적으로 전황을 이끌 수 있는 전장으로 이오지마오키나와를 선택하였다.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는 이 작전이 없었다면 그 이름이 역사에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일본 본토 공습이 더 빨라진 셈.


[1] 지도 곳곳의 흰 별이 그려진 파란 원들은 미군의 비행기지들이다.[2] 이치고 사쿠센이라고 발음한다.[3] 허난(예), 후난(상), 광시(계) 지역에서 벌어진 회전(會戰).[4] 라나 미터의 잊힌 동맹(혹은 연합국) 출처.[5] 망상인 이유가 당시 동남아시아의 철도망은 중국 철도의 표준궤간과는 다른 협궤 궤간인데다 대부분은 단선 철로여서 수송량 자체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의 표준협궤인 케이프궤간(1,067mm)도 아닌 미터궤간(1,000mm)이라서 더욱 호환이 힘들었다.[6] 버마루트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에서 인도로 물자를 보내고 도로조차 제대로 없는 험악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했기 때문에 공급할 수 있는 물자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버마전선의 영국군과 스틸웰 휘하의 중국군과 나눠서 써야했다. 반면 사이판은 미국에서 직접 한번에 해상으로 대량의 보급이 가능했다.[7] 전후 일본군 장성들이 사이판 전투에서의 패배가 곧 전쟁의 패배로 이어졌다고 증언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나왔다.[8] 생산량 자체는 여전히 남방에서 들어오는 것을 받아먹고는 있었지만 들어오는 족족 다 썼다.[9] 참고로 당시 미국의 석유 비축량은 무려 14억 배럴이었다. 또한, 현대 대한민국은 석유를 최대 1.5억 배럴까지 비축가능하고, 평시 비축유는 1억 배럴 선에서 유지된다.[10] 미 해군의 해군작전부장(해군참모총장)이자 함대총사령관으로서 미해군의 1인자였다.[11] 물론 일본군이 해안지대를 모두 먹은 건 아니지만, 대규모 병력을 수용할 만한 기반시설을 가진 곳은 죄다 넘어가 버렸다.[12] 앞서 언급했듯 인도의 후방기지로부터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보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보급 상황이 좋지 않았다.[13] 어니스트 킹 제독은 마지막까지도 대만 침공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으나, 일선의 병력들을 움직이는 휘하 제독들이 단체로 대만 침공의 부적합함을 주장하자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