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Nikolaus Harnoncourt | ||||
본명 | 요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Johann Nikolaus Harnoncourt | |||
출생 | 1929년 12월 6일 |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 ||||
사망 | 2016년 3월 5일 (향년 86세) | |||
오스트리아 장크트게오르겐임아터가우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지휘자, 첼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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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시대연주를 시작한 사람 중 하나다.2. 생애
1929년 12월 6일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 시민권자로 태어났으며 출생 직후 오스트리아 그라츠로 가서 거기서 자랐다. 베를린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국적은 오스트리아이다. 부친이 벨기에쪽 혈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르농쿠르라는 프랑스계 성을 가지게 되었다. 양친이 모두 귀족 혈통인데, 부친은 벨기에 남부 아르농쿠르 마을의 백작 가문 출신이고 모친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귀촌상혼 방계 혈통이다. 레오폴트 2세의 13남 요한 대공[1]이 귀천상혼하여 낳은 외아들 메란 백작 요한 슈테판이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외할아버지이다. 즉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레오폴트 2세의 외고손자가 된다.[2] 초등교육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받고 음악은 오늘날 대학격에 해당되는 빈(Wien) 국립 아카데미로 가서 공부했으며 전공은 첼로다.합스부르크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이런 화려한 집안 배경은 아르농쿠르가 보수적인 빈에서 성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르농쿠르가 집안 배경만으로 출세한 지휘자라는 것은 아니다. [3]
그는 빈 국립음악대학에서 기악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첼리스트로 활동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치에게 재산 및 성채가 압류 당했지만 워낙에 금수저라 큰 생계 문제는 없었다. 종전 후 1952년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끌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첼로 단원으로 발탁되었고[4] 여기서 1969년까지 활동했다.
2.1. 원전 연주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원전연주 실습을 통해 고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첼로와의 경쟁에서 도태된 고악기 비올라 다 감바를 발견해서 구입한 후 독학으로 연주하기 시작했고, 1953년에는 부인인 알리스 아르농쿠르와 함께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을 창단했다. 이 악단과 아르농쿠르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명해 졌는데 1966년 영국 런던의 헨델의 메시아 연주회는 역사적인 연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원전 연주도 단순한 이벤트용이 아니라 충분한 연주효과와 음악성을 갖출 수 있다는 인식이 확립되었다.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잘츠부르크 음악원에서 음악학 연구원으로 초빙 받아 원전 악기와 원전 음악에 대해 강의하면서 시대연주 보급에 압장섰는데,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발언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 원전 악기와 원전 악보에 의한 연주만을 진정한 연주라고 주장했으며 연주자(특히 지휘자)가 임의로 해석을 추가한 당시의 연주는 제대로 된 연주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그의 주장들을 보면 충분한 근거 없이 단편적인 생각과 추측에 의존하고 있는데, 학자로서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태도이다. 이처럼 시대연주 이외의 연주를 모두 부정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나중에 지휘자로 성공한 후에는 현대 오케스트라도 적극적으로 지휘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원전악기 분야의 거장이자 일급 하프시코드 연주자였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의 합작으로 당시 199곡이었던 바흐의 칸타타 전곡 녹음을 완료했는데[5] 이는 음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극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들을 발굴하여 이들을 부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71년에 빈의 '테아터 안테르 빈'에서 연주한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즈의 귀환'은 센세이션이었는데, 몬테베르디의 걸작 오페라들이 오늘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2.2. 연주 철학의 변화
고음악과 고악기에 집착하며, 현대 악기 연주를 줄기차게 비판해오던 아르농쿠르는 1980년대부터 음악 성향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르농쿠르는 지휘자로 점점 명성이 쌓이자 원전 악기를 사용한 관현악단 대신 현대 오케스트라를 자주 지휘하게 된다. 80년대에 빈 필, 로열 콘체르트헤보우 등 현대 악기로 연주하는 명문 악단의 콘서트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베를린 필과 빈 필을 비롯하여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이러한 연주 성향의 변화에 대해 탁월한 지휘능력을 바탕으로 레퍼토리를 확대하고 있다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유명해지고 돈벌이가 되기 시작하자 자신의 연주철학을 버리고 잘 팔리고 듣기 좋은 음향만 추구한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다. 다만 완성도 측면에서만 보면 1980년대 이후의 그의 연주는 이전의 연주 대비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는 1980년 이후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상을 수상하고 각종 음악단체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그의 역량이 현대 오케스트라에서도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르농쿠르는 음악가의 해석을 가장 우선시하는 음악가로, 1950년대에도 음악가의 해석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고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작곡가의 생각을 표현해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지만, 일단은 음악가의 해석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현대악기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을 하였다. 따라서 현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는 특히 모차르트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잘 연주되지 않던 모차르트의 초기 오페라나 관현악곡에 대한 연주 및 레코딩을 활발히 하였다. 이 때 녹음된 레퍼토리는 모차르트 곡들과 특이하게 바흐의 곡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는데, 총 3번 녹음된 그의 마태 수난곡을 들어보면 1970년대와 1990년대의 시대악기 연주에는 엄청난 해석과 연주기법의 차이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80년대, 90년대, 2010년대 들어 녹음한 3개의 다른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에서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만년에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에서 새로 녹음한 음반들, 마태수난곡, 요한 수난곡,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 베토벤 장엄미사, 교향곡 4번과 5번은 아르농쿠르 해석의 정수로 꼽힌다. 다만 만년의 음반들의 해석에 대해 과거 원전연주의 고증적 태도를 버리고 기존 현대 오케스트라의 전통적 스타일의 해석과 타협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서는 RCA에서 다양한 레파토리의 곡들을 녹음했는데, 이 레파토리에는 현대 작곡가인 버르토크 벨러와 조지 거슈윈도 포함되어 있다. 거쉰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경우는 기존의 미국적인 색채를 강조한 해석과 달리 보편성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호불호가 엇갈린다. 아르농쿠르의 낭만주의 이후 음악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포기와 베스>를 녹음하기 이전에 베르디의 <아이다>, 레퀴엠 등을 녹음했을 때에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2010년을 전후하여 자신의 지휘 인생을 결산하는 의미인지, DHM에서 주요 종교음악을 녹음하였다. 또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을 재녹음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슈베르트 교향곡 전곡 음반이 베를린 필 자체 레이블에서 발매되었고, 2015년 하반기부터 빈에서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실황으로 녹음 중이었으나 2015년 12월 6일 건강문제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결국 4, 5번 교향곡만 출반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이 호전되었는지 일부 공연은 본인이 지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고 2016년 3월 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서쪽에 있는 상트제오르겐 임 아테르가우에서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3. 연주 성향 및 평가
20세기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원전연주의 1세대 주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아르농쿠르의 원전연주는 후배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나 존 엘리엇 가디너처럼 철두철미하게 당대의 음향을 재현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대적인 연주와 당대 연주 사이에 일종의 절충을 택하고 있다. 전술했다시피 젊은 시절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성향을 보여서 철저한 고음악의 재현을 주장했지만, 일단 지휘자로 성공한 이후에는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보다는 많이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이유로 아르농쿠르는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엇갈리는 지휘자가 됐다.단적인 예로 그의 대표적인 레코딩인 베토벤 교향곡집(1991년 출반)에서 그는 고악기로는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현대악기를 사용하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면서 트럼펫과 팀파니만 원전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했다. 자신이 평소 강조하던 연주 철학을 스스로 어겼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현대 악기로 고악기의 소리를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서 연주했다고 항변했는데, 같은 시기에 브뤼헨, 가디너, 노링턴, 호그우드 등 여러 지휘자들이 100% 시대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의 항변은 많이 궁색하다.
호그우드, 가디너, 브뤼헨 등은 해석이 현대악기로 연주한 것과 대동소이하여 시대악기로 연주하는 의미가 없다는 비판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아르농쿠르를 '사이비 원전 연주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는 옹호론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논란과 비판의 시발점이 된 것은 다름아닌 아르농쿠르 자신의 주장이다. 원리주의자 코스프레를 하며 원전연주만이 진실이라고 현대적인 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절충주의까지 모조리 사이비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젊은 날의 아르농쿠르 자신이었다. 아르농쿠르는 베토벤이 지휘했던 36명(교향곡 2번의 경우)의 오케스트라 인원까지 정확하게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작곡자 당대의 악기와 당대의 연주법으로 음악을 재현하는 것은 분명히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르농쿠르는 "나는 항상 정격음악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정격 음악은 매우 위험한 단어이다. 나는 박물관 음악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원전 악기와 당대의 음악철학을 존중하되 거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대의 시대정신에 맞도록 재창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일단 음악성 측면에서 아르농쿠르가 당대의 연주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이다. 앞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그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경우에도 이듬해 그라모폰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레코딩'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으며, 21세기 이후에는 베토벤 당대의 음악 전통과 현대의 음악 성향을 잘 조화시킨 일종의 '레퍼런스 연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한마디로 아르농쿠르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원전주의자였지만 경험을 쌓은 이후에는 원전 연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음악적 성취를 이룩한 지휘자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지휘자였다.
4. 기타
의외지만 배우 경력이 있는데 스트로브-위예의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에 안할트-쾨텐 후작 레오폴트(Leopold, Prince of Anhalt-Köthen)로 출연했다.[1] 나폴레옹 전쟁 시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 바그람 전투에 지각하여 형 카를 대공을 분노시킨 인물이었다.[2] 요한 대공은 평민인 안나 플로흘(Anna Plochl 1804~1885)이라는 우체국장의 딸과 귀천상혼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그 아들인 요한 슈테판은 합스부르크의 대공이 되지 못하고 귀족인 메란 백작 작위만 물려받았다. 요한 대공과 안나 플로흘의 이야기는 오스트리아에서 2009년 상영한 90분짜리 단편 드라마 '사랑하는 요한, 사랑하는 안나'(Geliebter Johann Geliebte Anna)에서 나온다.[3] 모친의 집안이 오스트리아 황실 가문인 것으로 알려진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도 집안 배경의 후광과 수려한 외모 덕분에 빈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사랑을 누렸다. 크라우스는 당시 재정난을 겪고 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기까지 했다. 대공황의 위기가 지나가자 빈 필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했지만, 크라우스는 이에 반발했고, 빈 필 단원들은 상임지휘자직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빈 필의 상임지휘자직 폐지는 임시적인 조치였지만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지면서 상임지휘자직의 공석이 장기화되었고, 전통으로 고착되었다. 사실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불분명하고 허위 사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정확히는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그리스계 부호와 빈 황실 오페라단 발레리나의 사생아인데, 생부의 조카, 즉 고종사촌누나가 마이얼링에서 루돌프 황태자와 동반자살한 마리 베체라다(...) 여하튼 진위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가 그런 인기를 얻었던 것을 보면 진짜 황실 가문 출신인 아르농쿠르가 집안의 후광을 받은 것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또 젊은 시절 상당히 미남이었다는 점에서도 클레멘스 크라우스와 유사성이 있다.[4] 카라얀은 아르농쿠르의 연주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어 뽑았다고 말한 바 있다.[5] 이후 새로운 칸타타 악보들이 발견돼서 현재의 칸타타 수는 이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