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치(國恥)
국치(國恥)란 '국가의 치욕'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좁게는 흔히 나라를 빼앗기는 등의 치욕을 떠올릴 수 있고, 넓게 보면 국가의 위신을 총체적으로 흔들어놓은 모든 사건사고로 확장할 수 있다. 소소하게는 국가가 저지르는 실책 등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단위에서 자행한 나라 망신 역시 국치에 들어간다.
1.1. 사례
이 문단은
* 예시는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그 이전[1]의 사건만을 기록한다. (즉 2차 세계대전 종결 - 일본의 항복 까지만 예시로 허락한다)[2]
* 군사/외교 분야에 관한 사건만을 예시로 등재 가능하다.
* 나무위키에 개별 페이지가 작성된 사건만 등재 가능하다.
* 예시에 등재되는 사건에 해당되는 국가 혹은 그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가 현존해야 한다.[3]
* 위의 조건을 모두 만족 하는 경우에 한해, 이하의 조건들 중 하나 이상 만족하면 등재 가능하다.
*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타국에 항복을 선언한 경우
* 국가가 타국에 의해 큰 피해를 받았지만 반격이나 방어가 별다른 효과가 없었던 경우.
* 사건의 결과 큰 국력 손실이 발생하여 그 이후 국가의 존폐에 큰 영향을 준 경우
* 군사/외교 분야에 관한 사건만을 예시로 등재 가능하다.
* 나무위키에 개별 페이지가 작성된 사건만 등재 가능하다.
* 예시에 등재되는 사건에 해당되는 국가 혹은 그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가 현존해야 한다.[3]
* 위의 조건을 모두 만족 하는 경우에 한해, 이하의 조건들 중 하나 이상 만족하면 등재 가능하다.
*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타국에 항복을 선언한 경우
* 국가가 타국에 의해 큰 피해를 받았지만 반격이나 방어가 별다른 효과가 없었던 경우.
* 사건의 결과 큰 국력 손실이 발생하여 그 이후 국가의 존폐에 큰 영향을 준 경우
1.1.1. 아시아
1.1.2. 유럽
1.1.3. 아프리카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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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치(鞠治)
조선시대 형사소송에서 역모 및 강상죄 등 국가적 대역죄인을 심문, 재판하기 위해 특별설치된 재판부를 '국청(鞠廳)'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의 심문을 '국치'라고 부른다. 옥송 문서 참고.[1] 以前. 이상과 이하처럼 기준점을 포함하여 그 앞.[2]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유엔 창립 등으로 국제사회 질서가 재정립되었기 때문이다.[3] 후자의 예시로 조선은 더이상 현존하지 않는 국가이지만 그 정통성을 계승한 대한민국과 북한이 현존하므로 조선의 예시는 두 국가의 예시에 해당한다.[4] 이 전투에서 패하여 한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5] 멸망 직전까지 연맹체였기 때문에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6] 이 전투에서 백제의 주력군이 붕괴되었다. 물론 의자왕이 아직 잡히지 않았고, 백제의 지방군 역시 건재했기에, 의자왕이 지방군을 결집하여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었으나, 예식진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결국 멸망했다.[7]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며 백제의 멸망을 확정지은 전투[8] 이 전투의 패배로 고구려는 수도가 함락당하고, 국왕이 옥저까지 몽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밀우와 유유가 결사대를 이끌고 저항한 덕분에 수도를 탈환하고 기사회생하는데 성공했다.[9] 고구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왕이 전사한 전투이다. 국왕의 전사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인 평양성의 함락까지 있었기에 타격이 컸는데, 후임 국왕이 어떻게든 수습하긴 했다.[10] 이 전투의 패배로 고구려는 멸망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방군까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기에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졌다.[11] 안 그래도 서라벌 일대만 유지하며 간신히 연명하던 신라는 이때 수도 서라벌이 견훤에 의해 함락당하고, 국왕마저 살해당하며 치명타를 입었다. 견훤이 신라를 당장 멸망시킬 생각은 없어서 국가의 수명이 잠깐 연장되긴 했지만, 이때 입은 피해를 끝내 회복하지 못해서 국왕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고려에 바치면서 멸망했다.[12] 창업군주 견훤이 왕건과 함께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고, 박영규 등 일부 호족들마저 사전에 신검을 배신하고 고려에 붙기로 약속한 상태라서, 시작도 하기 전에 결과가 정해진 거나 다름 없었다. 결국 이변 없이 고려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후백제는 멸망했고,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킨 인물이 되었다.[13] 여몽전쟁 끝에 원나라에 항복하며 시작되어, 공민왕의 개혁과 조선의 건국으로 끝난다. 원나라의 일본원정 등 여러 방면에서 수탈이 진행됐지만, 당대 몽골 제국의 위상을 고려하면 고려의 항복은 타 국가에 비하면 치욕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항복 이후에도 칭기즈 칸 직계 귀족들과 혼인하는 등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대우받았다.[14] 병자호란에서 패전하여 청나라와 맺은 굴욕적인 항복 협상. 이후 조선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점점 소극적·폐쇄적인 국가로 변해간다.[15]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16] 중전이 궁 안에서 일본군과 낭인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건[17] 현직 국왕이 궁을 버리고 외국 공사관으로 도피한 사건[18]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에 양도한 조약. 식민지배의 실질적 신호탄을 쏘아올렸다고 평가받는다.[19] 한일합방.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일제강점기를 연 조약. 한국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국치'라 하면 이 경술국치를 일컬으며, 병합일인 1910년 8월 29일은 이른바 '국치일'이라고 부른다.[20] 낙양이 이민족에게 함락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혔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지배 시대가 열렸다.[21] 수도 카이펑이 함락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혔으며, 화북이 이민족 국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22] 이 전투의 패배로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여 사상 최초로 중국 전체가 이민족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40] 다만 이때 남송군을 지휘한 육수부와 장세걸은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포로로 잡혀있던 문천상 역시 쿠빌라이 칸의 회유를 거부하고, 송의 충신으로서 최후를 맞이하여 유종의 미는 거두었다.[23] 농민 반란군에 의해 원나라는 중원에서 축출되어 영토가 몽골 고원 일대로 축소되었다. 다만 이후에도 국가 자체는 존속했다.[24]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힌 사태[25] 농민 반란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황제가 자결하면서 명은 멸망했다. 그러나 정작 반란군의 수장인 이자성은 얼마 안 가서 청군과 명의 신하였던 오삼계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패망했고, 명의 잔존 세력은 청의 지배하에도 장기간 저항을 지속했다.[26] 이 전투의 패배로 마지막 명나라 부흥 세력이자 대만의 독립 정권인 동녕 왕국은 멸망했다.[27] 특정 민족만의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였지만, 동서 분열 이전의 로마 및 서로마는 이탈리아, 동로마는 그리스의 비중이 크며, 지금도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그리스는 동로마를 자국의 전성기로 여긴다.[28] 사상 최초로 로마 황제[41]가 외국 군대에게 포로로 잡힌 초유의 사태[29] 800년만에 로마가 이민족에게 약탈당한 충격적인 사건[30] 이 사건을 기점으로 서로마는 멸망하고 이탈리아 전체가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31]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전통적으로 동로마의 영토이자 기독교 문화권이었던 레반트가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갔고, 이후에도 안티오키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수복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레반트 뿐만이 아니라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까지 영구히 상실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두 차례에 걸쳐 포위당하는 결과를 야기했다.[32] 에데사 전투 이후 최초로 로마 황제[42]가 외국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고, 소아시아를 상실한 전투이다. 이 전투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이 있기 이전까지 동로마는 암흑기에 빠졌고, 소아시아 중에서도 내륙 지방은 콤니노스 시대에도 끝내 되찾지 못했다.[33]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이때 치명타를 입은 동로마는 다시는 강국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34] 이로써 2,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는 400여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만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최후까지 결사항전하다 전사하여 유종의 미를 남기긴 했다.[35]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인데, 오늘날 그리스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국치로 간주되고 있다.[36] 프랑스 전역의 승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열차를 가져와 폭파시킨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37] 나치 독일의 패전과는 별개로 현대 독일은 나치즘이라는 사상과 이 사상의 형성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여러 부산물 자체를 치욕스러운 역사로 간주한다.[38]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전으로 프로이센 왕국 이하 북독일 연방과 맺은 조약. 프로이센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로 독일 제국을 선포한 반면, 프랑스는 강력한 경쟁자의 부상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39] 존재 자체가 국치로 간주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