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초의 유학자에 대한 내용은 가규(후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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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 |||||||
오환 · 선비 ,가비능, · 부여 ·고구려 · 왜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賈逵
(174년 ~ 228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대신으로 자는 양도(梁道). 사례 하동군 양릉현[1] 출신이다.2. 생애
《위략》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구'(衢)였으나 '규'(逵)로 고쳤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군대를 편성하며 놀기를 좋아해 그의 조부 가습[2]은 가규를 보고 장수가 될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가규는 조부 가습으로부터 병법을 전수받은 뒤 관직에 나갔다.정사에는 곽원, 고간이 관서 지방을 공격하자, 이를 막다가 포로로 잡혔는데 곽원은 가규를 등용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강읍의 아전과 백성들이 반대하여 사면했다. 곽원이 패배하자, 포로에서 풀려났다.
천하의 관리들이 모두 그대와 같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소? - 조조
그 후에 장염 등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다. 조조가 가규를 매우 좋아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비중이 별로 없다. 전쟁보다는 행정 면에서 세운 공적이 많았기 때문일지도?211년, 조조가 마초를 치러 가다가 홍농을 지나면서, 가규에게 홍농태수를 맡겼다. 어느 날 가규는 둔전도위가 도망친 백성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둔전도위의 말투가 불손하여서 분노한 가규는 둔전도위에게 죄를 묻고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으나, 조조는 이를 좋게 여기고는 승상주부로 삼았다.
조조가 죽은 후 장례 의식을 주관했으며, 조창이 군사를 이끌고 찾아와 옥새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건 세자가 신경 쓸 일이지 당신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조비에게도 큰 신임을 받았다.
조비가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되자 가규는 예주자사가 되었다. 가규는 전쟁 준비에 힘쓰며 제방을 새로 쌓고 '소익양피'란 저수지를 만들며 200리의 운하를 뚫었다. 이 운하는 나중에 '가후거'가 되었다.
222년에 조휴, 장료, 장패와 함께 오나라를 쳐, 오나라 대장 여범의 군대가 폭풍우에 휩쓸린 틈을 타 공격하여 격파했다.
228년, 석정 전투에서 조휴의 부장으로 참전했는데 주방의 거짓 항복을 간파했다. 조휴가 패배하고 도망칠 때 가규의 부대는 짐짓 기세를 올려 오군의 추격을 막았다. 그러나 조휴가 가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라 버려진 무기를 주우라고 하자, 이에 대해 가규가 반박했다. 자세한 것은 석정 전투 항목 참고.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가규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조정에 상주하여 그를 모함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가규가 옳지만, 조휴가 종실로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가규는 마침 병이 위독해져 죽었다. 가규가 죽자 장남 가충이 뒤를 이었다.
시호는 숙후(肅侯)다.
3. 가족 관계
- 류씨: 가규의 아내. 유부(柳孚)의 누이.
- 가충: 가규의 장남
- 가혼: 가규의 차남. 자는 궁기(宮奇)로 가충의 동생이다. 태강 연간에 종정경이 되었고 진군장군, 성문교위, 시중을 지내며 영평후에 봉해졌다가 사망했다. 사망 후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 의동삼사에 추증되었는데, 재능은 평범했지만 성실하고 인정이 두터우면서 스스로 삼갈 줄 알았다.
서진의 권신이자 가황후(가남풍)의 아버지인 가충이 가규의 아들이었다. 이를 두고 가씨 세 명이 각각 세 왕조(후한, 조위, 서진)를 무너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가남풍 문서에 기술되어 있듯이, 이는 세 명이 같은 가문이란 이유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가규와 가충, 가남풍은 저마다 역할(?)이 달랐다. 가규는 조조와 조비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화흠과 비슷한 맥락에서 당대 지식인이자 관료층으로서 조씨 정권을 지지한 정도일 뿐 후한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가충은 사마씨 일족의 심복으로서 조위의 멸망에 깊이 관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황제 조모를 백주대낮에 시해하는 등 명분이라고는 없는 막가파였다. 그 딸인 가남풍은 팔왕의 난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인물됨으로 말하자면 양신이였던 가규를 무능한 양아치였던 아들이나 손녀하고 비교하는게 모욕에 가깝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3 |
100만인의 삼국지 |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
삼국지 14 |
여담으로 삼국지 시리즈의 사실무장 중 가나다순으로 정렬했을 때 가장 맨 처음에 있는 인물이다. 가나다순 정렬을 지원하지 않는 시리즈나 편집기에서는 아회남이 맨 위에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69/지력 82/정치력 83. 분전, 돌파, 제사, 조영, 파괴, 덫을 가지고 있다. 준수한 능력치이긴 한데 덫 빼고는 뭔가 강력한 병법만 피해간 병법 보유가 아쉽다. 야전은 그나마 덫으로 커버할 수 있지만 공성전에는 쓸만한 병법이 거의 없다. 그래도 좋은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62/지력 80/정치력 86/매력 78.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고 특기가 12개이며,(농업, 기술, 보수, 치안, 일제, 진정, 은밀, 저지, 지리, 항변, 반론, 명사) 능력치 총합은 381로 전체 3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61/지력 84/정치력 85/매력 75다. 능력치 총합은 383으로 삼국지 10 때보다 약간 상승했고 여전히 전체 32위에 해당한다. 병종적성은 창병과 노병과 병기가 A, 극병과 기병과 수군이 B이다. 특기는 축성이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주방의 항복이 거짓 항복임을 간파하고 주방의 말을 믿지 말라고 조휴에게 역설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61/지력 84/정치력 85이고 병종은 창병이며 병격봉인(오리지널에서는 맹사봉인)으로 안 그래도 지력이 84이라서 전군병격도 캔슬하게 만드는 무서운 창병이다. 아들인 가충 역시 비슷한 전법인 전법봉인이 전법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5, 문화 4, 교섭 5. 전수특기는 상업이며 전법은 도발. PK로 한다면 상업을 빼고 농업을 대신 추가해주자.
삼국지 14에서는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로 변경되었으며 능력치는 통솔력 76, 무력 61, 지력 84, 정치력 85, 매력 76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침착, 신중, 축성, 농정, 개수, PK에서는 개수 개성이 삭제되고 간파 개성이 추가되었다. 주의는 왕도, 정책은 성벽확장 Lv 4, 진형은 어린, 안행, 학익, 투석, 전법은 연노, 견제, 업화, 투석, 구축, 친애무장은 사마랑, 손자, 왕릉, 조조, 혐오무장은 조휴다.
4.2.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조창을 설득하는 장면 이후 석정 전투 때 조휴와 동행할 무렵에 투구를 쓴 모습으로 다시 출현한다.
4.3. 화봉요원
화봉요원에서 제일 파격적으로 변한 인물 중 하나다. 주인공인 사마의의 심복으로 등장하는데, 본 작품에서의 사마의는 조조에 대한 원한으로 그와 그의 나라를 무너트릴 생각을 품고 있는 역신이다. 그런 그가 복수를 위해 조조군에 심어둔 인물이 바로 가규.
작품 내에서는 파괴밖에 할 줄 모르는 해충이라고 불리며[3] 캐릭터 디자인도 꽤나 근골에 눈빛이 매서운데다가,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항상 표정의 변화가 없는 등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을 준다.
4.4.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는 밀러스 크로싱의 톰(가브리엘 번 분)으로 패러디 되어 나왔다. 평양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하며, 평양 전투 (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는 것으로 선행 등장.평양 전투 편에서는 가규의 상관인 왕읍이 곽원군의 침공에 분노하여 전면전을 치르려 하자 아군의 군세로는 무리라고 말했다가 분노한 왕읍에게 시작도 하기 전에 약한 소리냐며 멱살을 잡혔다. 그러나 멱살을 잡혔음에도 가규는 침착한 태도로 약한 건 약한 거니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말했고, 이에 왕읍이 뭔가 방법이 있는 거냐고 묻자 자신이 먼저 북쪽으로 올라가 시간을 끌 테니 그 동안 종요에게 보고를 올려서 평양에서 적을 상대하라고 제안했다.
이후 먼저 북쪽으로 올라간 가규는 평양보다 더 깊숙히 들어가서 강현과 피씨현[4]에 진을 치고 곽원군과 대치했고 절묘한 지역 선정[5] 덕에 곽원군의 발목을 잡지만, 가규 본인이 말했듯 애초에 군세 차이가 너무 명확했기에 곽원, 고간이 힘으로 그냥 밀어붙이자 결국 곽원군에게 항복하게 됐다. 항복한 이후 머리 좀 쓰는 녀석인 것 같다며 곽원에게 항복을 종용받지만, 가규는 자신은 엄연한 국가공무원이니 도적단과는 손을 잡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곽원이 가규를 죽이려 하지만, 축오가 가규를 죽이면 그 부하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테니 잠깐 유배를 보내 놓으라고 제의하여 죽지는 않고, 호관으로 압송되게 된다.[6] 가규가 시간을 끈 덕분에 곽원의 진군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으니 제법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압송된 이후 어찌저찌 구제받는데 성공했는지 이릉 전투 편에서 오랜만에 재출연했다. 조조 사후 청주병이 멋대로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걸 졸병이 막으려 하자 그냥 보내 주라고 하기도 했으며, 옥새를 찾는 조창에게 이미 나라에 왕세자가 있는데 옥새는 왜 찾냐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석정 전투 편부터 가규에게 콧수염이 생겼다.
석정 전투 편에서는 여남에서 전력을 키우고 있다고 언급되며, 유수구, 환, 강릉 등 어디로도 병력을 움직일 수 있어 오군 입장에서 특히 신경쓰이는 존재라고 언급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가규는 조휴가 환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오군이 거기 집결할 것을 예측해 환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조휴의 대패 소식을 도중에 전해듣고 행군 속도를 배로 높여서 빠르게 협석으로 향하기로 정했다. 휘하 병사가 그런 식으로 움직이면 오의 밥이 될 뿐이라고 반대하자 오는 공격이 아닌 방어가 목적이기에 지원군을 보면 분명 포위를 풀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 말대로 협석에 가규의 위군이 도착하자 오군은 바로 포위를 풀고 물러났으며, 무사히 조휴를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가규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던 조휴는 수치심이 극에 달해 가규에게 자신이 버리고 온 무기들을 주워오라는 쪼잔한 명령을 내렸고, 이에 가규는 자신은 나랏일을 하기 위해 예주자사가 된 거지 무기 줍는 일을 하기 위해 된 게 아니라고 거부했다.
석정 전투 종료 후 진창 전투 편에서 조휴가 사망한 뒤 가규 또한 원래 몸이 좋지 않았다고 언급되며 사망처리 됐다. 더불어 조휴와 가규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뜸으로서 위의 대오 전략에 막대한 차질이 발생했다고 묘사된다.
[1] 現 산서성 린펀시의 일부[2] 아버지의 이름은 알 수 없다.[3] 심지어 사마의는 가규의 아버지 앞에서도 서슴없이 그를 이렇게 부른다.[4] 한자로 皮氏라고 쓰는 엄연한 한자어. 다만 작가도 발음이 뭔가 웃긴 건 인지했는지 지역을 설명하는 컷에서는 PC현이라고 말장난을 해놓았다.[5] 강현과 피씨현은 딱 평양으로 가는 길목 양 옆의 언덕들에 위치해서 사이를 지나가는 군세를 요격하기 딱 좋은 지형인 것으로 묘사됐다.[6] 이 때 가규의 모자가 땅에 떨어지는 컷이 나오는데, 모자는 이 때 정말로 잃어버린 건지 가규는 재등장 이후 다시는 모자를 쓰고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