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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03:29:18

후루키 카츠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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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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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마사미츠 마츠오카 코스케 야마시타 리츠오(1) 코타니 타다카츠 노무라 오사무
<rowcolor=#20272c,#d3dade>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아라카와 타카시(5) 노구치 요시오 타케우치 히로아키 나가사키 케이이치 야마시타 다이스케
<rowcolor=#20272c,#d3dade>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네모토 타카시 타무라 마사오 사이토 아키오 카도타 후미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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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92년
<rowcolor=#20272c,#d3dade>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타카모토 쇼이치(1) 스기나가 마사노부(1) 히로세 신타로(1) 미기타 카즈히코 오오하타 토오루
<rowcolor=#20272c,#d3dade>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쵸시 토시오(1) 송광훈 나카야마 히로아키 토모리 유이(1) 모리타 코키(1)
<rowcolor=#20272c,#d3dade>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타니시게 모토노부 사사키 카즈히로 미즈오 요시타카 사이토 타카시 코히야마 마사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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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2011년
<rowcolor=#20272c,#d3dade>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카와하라 류이치(2) 키다 쇼이치 호소미 카즈시(2) 카와무라 타케오(2) 타니구치 쿠니유키
<rowcolor=#20272c,#d3dade>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후루키 카츠아키(1) 타나카 카즈노리 우치카와 세이이치 하타 유지(1) 무라타 슈이치(2)
도이 류타로(2)
<rowcolor=#20272c,#d3dade>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요시카와 테루아키(2)
모리 다이스케(2)
나스노 타쿠미(2)
소메다 켄사쿠(2)
야마구치 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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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 아츠시(1)(3)
타카사키 켄타로(2)(4)
타나카 켄지로(1)(3)
코바야시 후토시(1)(4)
<rowcolor=#20272c,#d3dade>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마쓰모토 게이지로 쓰쓰고 요시토모 스다 코타 키타가타 유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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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
<rowcolor=#20272c,#d3dade>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시라사키 히로유키(1) 카키타 유타(1) 야마사키 야스아키(1) 이마나가 쇼타 하마구치 하루히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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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카츠키 가미차타니 다이가(1) 모리 케이토 이리에 타이세이 코조노 켄타
<rowcolor=#20272c,#d3dade> 2022년 2023년 2024년
마츠오 시온 와타라이 류키 타케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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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3) 고교생 드래프트, (4)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5) 지명 후 미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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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후루키 카츠아키(古木克明)
생년월일 1980년 11월 10일
국적 일본
출신지 미에현 마츠사카시
출신학교 토요타오오타니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 3루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999~2007)
오릭스 버팔로즈 (2008~2009)

1. 개요2. 프로 입단 전3. 선수생활4. 격투기 선수로 데뷔5. 다시 야구로6. 은퇴 이후7. 플레이 스타일
7.1. 극악의 수비
8. 에피소드9. 기타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 야구선수, 前 종합 격투기 선수, 일반사단법인 스포츠 F프로젝트의 대표 이사.

2. 프로 입단 전

토요타오오타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제79회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1회전의 나가사키의 난잔 고등학교 경기에서 2홈런을 터뜨리며 연장 12회 끝에 6대 4로 고시엔 첫 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2회전 야마나시의 고후 공업고등학교 경기에서 2루타로 출루한 직후 은닉구에 아웃당하기도 하고 팀도 2-4로 졌다. 고치상업고등학교의 후지카와 큐지와 함께 2학년에서는 그 둘만 고등학교 일본 대표로 선출.

3학년 때 제80회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베스트 4에 진출하기도 했다. 1회전에서 무라타 슈이치, 오노 류지, 타나카 켄스케를 거느린 히가시후쿠오카 고등학교와 맞붙어 6-4로 승리. 2차전에서는 우에모토 타츠유키, 시마무라 잇키가 있는 야마구치의 우베 상업고등학교와의 연장 15회 경기에서 3대 2로 끝내기 승리. 3차전에서는 전년도 우승 학교인 치벤가쿠인 와카야마 고등학교와의 7-6에서 9회 초에 역전 승리. 준준결승에서는 와다 츠요시를 보유한 시마네의 하마다 고등학교와의 연장 10회의 승부 끝에 4대 3에서 끝내기 승리. 준결승에서는 요시미 타이치가 있는 교토의 세이쇼 고등학교와 맞붙지만 자신은 4삼진으로 부진했고 팀도 1대 6으로 패퇴, 결승전 진출은 아쉽게 실패하기도 했다.[1]

199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가 요코하마 고교의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1차 중복지명에서 놓치자 후루키를 1차 지명해 입단. 지명 당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지망생이었던 후루키에게 당시 요코하마의 감독이었던 곤도 히로시가 직접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다. 등번호는 3번을 받았다.[2]

3. 선수생활

3.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1999년부터 2001년까지 1군 출전은 몇 경기 되지 않았지만[3] 2군에선 1999년에 프레시 올스타 게임에 출전해 MVP를 획득했고 2000년에는 타율 .305, 10홈런, 2001년에는 타율 .272, 12홈런의 유망주로서 좋은 장타력을 발휘했다.

2002년에는 등번호 3번에서 이시이 히로오로부터 물려받은 33번으로 변경. 2군에서 팀 내 최고 타율 .285, 13홈런을 쳐내며 시즌 후반에 유망주 적극 기용이라는 방침으로 1군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9월 7일에 카와지리 테츠로에게 데뷔 첫 홈런을 친 걸 시작으로 그 후 1개월 반동안 쿠와타 마스미, 야마모토 마사, 이와세 히토키, 카와하라 준이치 등 에이스급 투수에게 차례로 홈런을 터뜨리며 최종적으로 9홈런을 기록, 타율도 .320에 22타점을 기록했다.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시즌 도중 경질된 뒤에는 쿠로에 유키노부 감독대행에 의해 9월 후반부터 13경기에서 4번으로 기용됐다. 시즌 종료 후에 열린 제15회 IBAF 대륙간컵 일본 대표로 선출되며 4홈런으로 홈런왕베스트 나인이 되었다.

그렇게 젊은 좌타 거포가 탄생했다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2003년에 6번타자, 3루수로서 개막전부터 선발로 기용되었다. 당시 베이스타즈에는 또 다른 타자 유망주로 당해 대졸 신인 무라타 슈이치와 후루키보다 2년 후에 들어온 고졸 신인 우치카와 세이치가 있었는데, 후루키를 밀어주기 위해 무라타는 2루수로, 우치카와 세이치유격수로 출전[4]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즌 최종 기록은 충격적이었다.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득점권 타율
2003 요코하마 125 389 73 12 0 22 46 37 2[5] 25[6] 131 .208 .285 .430 .716 .121

규정타석에는 미달이었지만 홈런은 22개로 당시 유망주로서 우수했다. 그러나 문제는 타율이 .208로 상당히 낮았고, 여기에 더해 131 피삼진을 기록했다는 것. 이는 당시 삼진왕인 타이론 우즈의 132삼진에 이은 기록이었으며 또한 좌투수에 약한 모습을 보였고 득점권 타율은 .121에 타점은 홈런 22개를 쳤음에도 고작 37개에 불과해[7] 말 그대로 찬스가 아닌 상황에만 홈런 치는 타자로 다른 공갈포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8] 여기에 더해 3루 18실책[9], 외야 2실책[10] 으로 도합 20실책이라는, 수비에서도 큰 문제점을 드러냈다. 올스타전 이후부터는 무라타 슈이치가 3루에 들어가게 되며 외야수로만 출전하고도 저런 성적을 냈다. 자세한 건 이쪽으로. 당연히 카와사키 축제에도 관련 스레가 나왔을 정도로 여러 팀 팬들에게 하나의 네타거리가 되었다.

2004년부터 수비 불안의 완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붙박이 외야수가 되었다. 그러나 다무라 히토시, 사에키 타카히로, 킨죠 타츠히코가 나란히 3할에 도달하고 외야의 주전들이 고정되어 주로 대타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타율은 .290, 출루율 .365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점은 27타점으로 홈런이 11개였던 걸 감안하면 여전히 찬스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2005년, 신임 감독 우시지마 카즈히코가 수비력을 중시했던 방침에 따라 안정된 수비력을 갖는 고이케 마사아키와의 주전 경쟁에서 패했고 그만큼 출장 기회가 감소했다. 시즌이 종료된 뒤 타구단으로의 트레이드를 신청했지만, 구단의 설득과 팬들의 성원으로 인해 트레이드 지원을 철회했다.

2006년에는 다무라의 부상과 고이케의 타격 부진으로 3년 만에 100경기를 출장하며 많은 기회를 얻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고이케의 회복과 요시무라 유키의 등장 이후 다시 백업으로 돌아가게 됐다. 외야 수비에서도 타구 판단 미숙으로 평범한 뜬공을 3루타로 만드는 등 외야수로는 리그 최다인 8실책을 했다. 시즌 종료 후, 오른쪽 팔꿈치뼈 제거 수술을 했다.

2007년은 전년의 수술의 영향으로 2군 캠프에서 시작했다. 개막 2차전에서 카도쿠라 켄에게 팀 1호가 된 결승 홈런을 날리는 등 전반전에는 활약을 보였으나 여름에 다시 2군으로 떨어지는 등 시즌 전반적으로는 큰 활약을 못 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오오니시 히로아키와의 트레이드로 오릭스 버팔로즈로 이적했다.

3.2.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오릭스에 입단하며 등번호를 46번으로 바꾼 후루키는 2008년에 2군에서 개막을 맞았지만 4월에 1군으로 승격하면서 쏠쏠한 타격을 보였다. 그러나 5월 월간 타율이 1할대 타율로 단숨에 부진하면서 6월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 2군에선 팀 2위의 7홈런, 타율 .279의 성적을 남겼지만 더이상 1군 승격으로 승격하지 않고 시즌을 마쳤다. 출전 기회는 2002년 이후 제일 적었고 1군에서 홈런 없이 끝나는 건 7년 만이었다.

2009년 2군에서 타율이 3할을 넘는 등 우수한 타격을 보이며 5월에 1군으로 승격됐다. 對 우완 선발 및 좌타 대타 요원으로 기용되었지만 뚜렷한 결과 없이 1개월 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 2군에선 타율은 .310으로 좋은 성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삼진왕(74개)이 되고, 더이상 1군으로 승격하지 않은 채 시즌을 마쳤다. 그 후 10월 3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 뒤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2번을 참가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가진 구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공격과 수비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레전드로 이름을 남긴 후루키는 그렇게 현역에서 은퇴했다.

4. 격투기 선수로 데뷔

공갈포계의 전설답게 "야구에 미련은 없다", "세계를 대표하는 격투가를 목표로 하고 싶다"고 말하며 2009년 12월 8일, 격투기의 새 단체 "스매시"의 일원으로 입단을 발표, 격투가로서의 데뷔를 알리게 된다.

며칠 뒤 12월 20일에 열린 프로야구 55년회가 기획한 자선 경기에 참가, 9회 대타로 나서면서 좌익수 플라이로 끝났다. 시합 후, 후루키에게는 마지막 시합이라고 양팀의 선수들이 그에게 행가레를 선사했다. 또한, 격투가 변신에 대해서는 2009년 12월 30일에 방송된 T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 장절 인생 다큐멘트 우리는 프로야구 선수였다(壮絶人生ドキュメント 俺たちはプロ野球選手だった) 』에서도 소개됐다.

2010년 6월 26일에 니시쵸후 아레나에서 열린 아마추어 DEEP의 제1회 대회에서 종합 격투기 선수로서 쵸난 료와 2분 2라운드 시범경기를 펼쳤다.

2010년 12월 31일 종합 격투기 대회 중 큰 대회에 속하는 다이너마이트[11][12]에서 앤디 올로건과 5분 3라운드의 경기로 데뷔전을 펼쳤지만 0-3의 판정패로 깔끔히 패배했다.

2011년 4월 22일 DEEP 53 IMPACT에서 에비 요시타카[13]와의 5분 2라운드 경기에서 2-0 판정승. 격투기 전향 후의 첫 승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경기 이후 후루키는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는 말을 남기며 격투기에서도 은퇴를 했다.

5. 다시 야구로

격투기 훈련을 하면서도 늘 야구 생각을 하며 역시 야구밖에 없다고 느끼게 됐는지 처음이자 마지막 격투기 승리 이후 은퇴를 한 뒤 사회인야구팀인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이란 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또한 2012년에는 오쿠보 히로모토가 있는 『 데이브 베이스볼 아카데미 』의 비상근 강사로 취임하면서 훈련도 병행하며 야구계 복귀를 준비했다. 그러나 2012년 11월에 열린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후루키에게 관심을 가진 구단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후루키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인 사노 시게키의 소개로 BC리그에 소속된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의 사장인 탄보 사토루를 만났고, BC리그와 미국의 독립야구 리그인 퍼시픽 어소시에이션의 합의의 일환으로 퍼시픽 어소시에이션에 소속된 하와이 스타즈에 입단, 시즌 54경기 .307의 타율과 2홈런 39타점 8도루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6. 은퇴 이후

그러나 그가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로에서 불러주는 팀이 없자 시즌 종료 후 미련없이 현역을 은퇴하게 됐다. 이후 미야기로 이주하고 2014년에는 프로선수로서 최초가 되는 은퇴 이후 지원 활동에 따른 일반사단법인 스포츠 F프로젝트를 설립했다. 또한 2014년 4월부터 사업 구상 대학원의 대학원생으로 프로선수의 은퇴 이후 커리어의 연구를 하면서 MPD(사업 구상 석사)를 취득, 수료하며 또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7. 플레이 스타일

고교 통산 52홈런을 기록한 천성의 장타력을 지녔지만 통산 타율은 .250 미만으로 역시 완벽하게 공갈포 스타일. 그래도 발은 빠른 선수라서 그런지 타수에 비해 병살타 비율은 낮다. 삼진이 많은 것도 병살타가 적은 데엔 도움이 된다

수비력은 2003년 3루수로서 리그 최다인 18실책, 2006년 외야수로서 리그 최다인 8실책을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삼진이 많고 수비에 어려움이 있었던 원인은 후루키의 안구 건조증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 야구계에 복귀할 때 한 안구 검사로 한쪽 눈의 눈물량이 제로라고 하는 극도의 안구건조인 것을 알 수 있어, 실제로 타격을 할 때나 수비를 하고 있을 때 눈이 침침하거나 거리감을 파악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말했다.[14] 다행히 이 안구 건조증은 치료됐다.

7.1. 극악의 수비

2003년 7월 5일 對 히로시마전에서 3루수 땅볼을 처리하려던 후루키가 마치 핸드볼의 다이빙 슛을 하듯이 어이가 장기출타한 악송구를 던지게 됐는데 이 때 아나운서의 『 후루키 앗-토!(古木あーっと) 』가 가히 압권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이 실책으로 홈까지 노린 1루 주자가 홈에서 완벽히 아웃되는 일이 일어나고 저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던 해설진들이 한심해하는 목소리도 여럿 나오기도 했다.


2005년 5월 쿄세라돔에서 후루키가 좌익수를 보다가 에러 아닌 에러를 저지르며 좌익수 플라이를 1타점 적시 3루타로 둔갑시키는 마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후루키가 안구 건조증의 영향으로 자주 외야 플라이를 놓쳤지만 그때마다 바람 핑계를 대곤 했는데 해당 경기가 바람이 없는 돔구장에서 진행됐던 것을 감안하면 그만큼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에피소드



9. 기타



[1] 1997년 요코하마고등학교는 봄-여름 고시엔 우승 및 가을 국민체육대회 우승을 차지했다.[2] 1993년 마지막으로 타카기 유타카가 FA로 팀을 나간 이후 5년 만이었다.[3] 2000년에는 아예 1군 진입을 못했다.[4] 당 시즌 요코하마 내야에는 이시이 타쿠로라는 베테랑 야수가 있었고, 후루키 뿐 아니라 무라타나 우치카와 덕분에 죽도록 고생했다고 한다. 원 포지션은 유격수로, 개막전부터 1번 타자 유격수를 맡았으며, 당 시즌 우치카와 세이치가 건강 문제로 2군을 자주 들락날락한 나머지 결국 시즌 종료까지 유격수를 맡았다.[5] 이것과 별개로 도루자 4개를 기록했다.[6] 몸에 맞는 공 13개, 고의사구 1개 별도.[7] 솔로포 14개, 투런 8개. 쓰리런 이상은 하나도 없었다. 나머지 7타점은 적시타나 희생타 등으로 소소하게 벌어들인 타점.[8] 같은 시즌 타격왕을 기록했던 이마오카 마코토는 12홈런에 72타점을 기록했다. 홈런은 후루키의 절반 조금 넘는 수준인데 타점은 거의 두 배에 달했다. 2시즌 후인 2005년 이마오카는 .279에 29홈런 147타점으로 후루키의 안티테제급 성적을 기록했다.[9] 3루수로 86경기 출전에 수비율 0.908. 참고로 저정도면 주전으로 쓰기 상당히 어려운 수준이다.[10] 외야수로 총 24경기 출전에 수비율 0.929.[11] 격투기 커리어 하나 없는 무명 파이터인 그를 주최측이 대회에 투입시킨 이유는 시청률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전직 야구선수였다는 이점으로 화제성을 불러모아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12] 일본의 야구 선수가 격투기에 도전한 경우는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치바 롯데 마린즈의 4번타자 출신인 타치카와 타카시는 2007년 K-1에 데뷔해 2승 3패의 전적을 남기기도 했다.[13]메이지대학 럭비부 선수.[14] 당시 의사가 "이런 눈으로 야구를 잘도 하시네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15]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어린이날이 5월 5일이다. 5월 4일은 국민의 휴일이다.[16] 해당 영상의 1분 48초부터.[17] 당시 요시미는 롯데로 이적한 상태였다. 요시미는 이후 한신에 입단하여 2014년까지 뛰고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