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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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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SUK K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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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본격적인 데뷔 이전 (~1989년)3. 성우 활동 (1990년)4. MBC 공채 시절 (1991년~1995년)5. 영화계 진출과 동시에 맞이한 최전성기 (1995년~1999년)6. 긴 공백기와 하락세, 이어지는 슬럼프 (2000년~2010년)7. 16년만에 드라마 복귀를 통한 화려한 부활 (2011년~2015년)8. 제2의 전성기 (2016년~2020년)9. 그 후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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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우 한석규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본격적인 데뷔 이전 (~1989년)

파일:한석규 동국대 졸업사진.jpg
동국대학교 졸업 사진
배우가 되기 전에 성악가가 되고 싶어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중창단 활동을 꾸준히 했으며 학창시절 음악 선생님의 칭찬과 권유를 받을 정도로 나름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보고 배우를 꿈꿨다.# 매달 3천원씩 붓던 적금을 부모님 몰래 깨고 연기 학원에 다녔고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는데 성공해 본격적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이때 동기들과 함께 군입대 전 추억을 만들고자 '덧마루'라는 남자 4중창당을 결성해서 1984년 제5회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하였고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를 불러 장려상 입상도 하였다.#. 장려상을 받고 얻은 상금은 바로 그날 동기들과 술을 먹는 데에 모두 썼다고.

이후 육군 병으로 입대하여 제27보병사단에서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했을 당시 강변가요제 입상경력 덕분에 분기에 한 번씩 문선대 단원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병 때 허리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고 의병 제대를 했다. 제대 후에도 허리는 좋아지지 않았고, 이때 몸을 많이 써야하는 배우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결국 배우의 꿈을 포기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는 단편 영화 '무지개를 찾아서'를 연출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지만 맞는 옷은 아니었고, 졸업 후에 국립극단 오디션을 응시했지만 이마저도 떨어졌다. 또한 이때 즈음 대학로 극단에 들어가 연극 무대에도 도전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결국 연기와 관련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평범한 일반 회사에 들어가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MBC 19기 공채 탤런트 오디션과 KBS 22기 성우 극회 오디션 모집서를 보고, 고민끝에 앞선 허리 문제때문에 탤런트 오디션이 아닌 성우 오디션에 응시한 것이 합격하면서 성우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한편 한석규 본인은 대학 졸업 후 성우 데뷔 전까지 1년 가까이를 방황했던 이때를 회상하며 이때 너무 외롭고 괴로워서 술을 전혀 못하지만 술을 마셨을 정도로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3. 성우 활동 (1990년)

파일:한석규성우데뷔.png
KBS 성우 최종합격 당시의 한석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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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서 성우로 전향했던 선배 성우 장세준이 한석규에게 한 말.
1990년 KBS 성우극회 제22기로 입사하여 1991년 MBC 제20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서 합격하기 전까지인 1년 6개월여간 성우로 활동하였다. 콧소리 섞인 미성에 정확한 발음,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특유의 발성이 그가 이 같은 성우 출신이라는 점도 있다. 동기로는 위 사진 속 김승준, 김일, 홍성헌, 문선희 등이 있다. 동료 성우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고 전해지며 성우로서의 실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실제로 라디오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성우 한석규를 기억하는 몇몇 오래된 성우팬들은 그를 ‘소년과 청년 역에 잘어울리는 높고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던 젊은 성우’로 회고하기도 한다.

동기인 김승준 성우가 전속 시절 일화를 말하길, 정형식 PD가 라디오 시트콤 '사랑으로 크는 나무'의 한 배역에 김승준을 넣을려고 했다가 동기인 한석규를 넣었는데, 굉장히 잘해서 김승준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김승준은 워낙 당시 마이크 울렁증 등으로 성우로서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기에 당시에도 배역을 잘 소화하지 못해, 이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던 와중에 한석규의 실력을 보고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걱정도 했었다고. 하지만 이후 한석규는 작품 중에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이 붙으면서 성우 일을 그만두고 김승준 성우가 배역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한다. 한석규의 부재 이후 '원래는 안 주려고 했지만 배역을 맡을 사람이 없어 주는 것이다'는 PD의 말을 보아 한석규의 배우 전업이 자신에겐 행운이였다고. # 그 외에도 선배 성우인 홍시호가 언급하길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고, 자신이 이 길을 계속 가도 될지' 등의 고민들을 자신한테 털어놓았다고 한다. 계속 노력하는 후배였다고.

마찬가지로 성우 동기인 문선희의 경우, 현재의 성우 문선희를 만들어 준 고마운 은인이라고 한석규를 회상했다. 그 전까지는 연기가 잘 되지 않았으나, 연기를 도와줬다는 것이 그 이유. 무엇보다 한석규에게 연기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럴 경우 그때 대부분이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거나 잘난 체스러운 답변을 주었던 것과 달리 찬찬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던 한석규는 매우 친절하고 잘 가르쳐줬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특히나 자신의 부족한 실력에 대한 변명내지 자조적인 토로를 중간에 자르고 고압적으로 다른 방법을 강요했던 다른 성우들에 비해, 한석규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나서 이렇게 하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때문에 연습실이 빌 때마다 마치 공강시간을 활용하듯, 녹음과 녹음사이에 시간이 비면 과외식으로 1:1 조언을 받았다고. 게다가 하루는 영화 E.T.를 머리로써 뭔가를 해석하고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넋놓고 보라는 숙제를 내주었고, 이후 문선희는 영화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며 한석규를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문을 열어준 선생님'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 또한 연습을 하다가 잘 안풀려서 그에게 우울해하다 말하면 곧바로 제게 발라드를 불러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은 그 노래를 듣고 위안을 받았다고. 혼낸 당사자에게 위로받기 #

한편 한석규는 성우시절 평소에도 사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쓰는 단어 발음이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는 등의 굉장한 노력을 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배우 생활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한석규가 말하는 대사들을 유심히 들어보면 대부분 장단음을 구별해서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소한 부분까지도 신경써서 연기하는 덕분에 지금까지도 특유의 서울 사투리가 묻어나오며 늘어지는 말투임에도 딕션 문제는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그외에도 한석규가 배우로써 활동을 하기전 KBS 성우 극회 소속으로 활동을 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고 나서는 한동안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성우로 전향했다.'고 이야기가 돌았었다. 실제로 93년도 한석규가 아들과 딸의 석호 역으로 한창 인기를 끌었을 당시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원래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국립극단 오디션에 응시하기도 했지만 낙방하고나서 이듬해 성우 공채에 입사하게 됐다는 기자의 서술과 함께 "목소리가 유달리 매력적이라서가 아니라 얼굴에 그다지 재능이 없어서."라고 스스로 말한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해당 기사에서도 한석규가 '겸연쩍게 농담을 건넨 것'이라 나오긴 하지만, 이 이후에 '왜 성우가 되(고 싶)었나.' 등의 물음에 대해 딱히 한석규 본인이 직접 밝힌 것이 없기에 '외모때문에 성우로 전향했다.'는 이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졌었다.

그러던 2013년 힐링캠프 출연 당시 이와 관련해 언급하면서 선술된 이유들로 배우의 꿈을 포기했었다고 밝히면서 나중에야 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몸 상태가 꽤 회복되었고[2] 여전히 배우에 대한 갈망과 갈증 또한 있었던 상황에서 절친한 선배인 장세준 성우의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조언에 힘입어 본래 가지고 있던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성우 공채에 합격한 이듬해 1991년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다. 여담으로 장세준은 한석규와 정반대로 TBC 공채 배우 출신이었다가 KBS 공채 성우로 전향한 케이스이다.

4. MBC 공채 시절 (1991년~1995년)

MBC 공채 데뷔하기 전에도 베스트극장하고 전원일기에서 단역으로 잠깐 나온적 있지만, 공채합격 이후 본격적인 브라운관 데뷔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다. 물론 큰 비중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시즌 1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다. 그 후 여명의 눈동자에서 서북청년단 역으로 단역으로 잠깐 모습을 비추기도 했지만 뒷모습만 화면에 보이는 등, 한석규 역시 여타 무명 배우들과 다르지 않게 특별히 대중들의 시선에서 눈에 띄지는 않았다.
파일:아들과 딸 한석호.png파일:아들과딸 후남석호.jpg
상대배우로서 호흡을 맞춘 김희애와 함께(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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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93년에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조연 한석호 역을 맡았다. 이 역할은 원래 선배 배우인 문성근이 낙점되었으나 다른 드라마와의 중복 촬영 등의 이유 때문에 하차하였고 한석규가 그의 대체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아들과 딸의 장수봉 PD에 의하면 신인 탤런트중 한석규가 인사성이 밝아 스태프들에게도 열심히 인사하는데다 선하게 생겨 단역으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또한 원래는 극중 남주인공인 귀남의 친구로 잠깐 나오다 말며 여주인공인 후남의 인생에 스쳐가는 역으로 나올 예정이었지만, 시청자 반응이 좋았을 뿐더러 특유의 발성으로 인한 대사전달력이 좋아 감독의 마음에 들면서 점차 분량과 비중이 대폭 커졌다.# 게다가 작중 다른 이들에게는 좀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남에게는 부드럽고 세심하게 신경쓰면서 의지가 되는, 한마디로 요즘의 차도남+순정남 캐릭터라 당시 여성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한석규 역시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고 결국 후남과 결혼에 골인하는 모습까지 나왔다. 이 석호 역은 한석규를 대표하는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의 시초로써 그의 연기 인생에서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역할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아들과 딸 역시 최고 시청률 61.1%로 역대 최고 시청률 7위를 기록한 바 있는데, 한석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아들과 딸에서의 인기로 한순간에 스타덤에 올랐고, 곧바로 드라마 파일럿최수종, 이재룡과 함께 주역 3인방 중 한명인 박상현 역에 캐스팅되며 활약했다. 이 드라마 역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최고 스타로 군림한다. 이 아들과 딸-파일럿이라는 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결국 그해 MBC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파일럿의 대성공 이후 당시 MBC의 가족극이었던 한지붕 세가족의 출연진들이 교체되면서 이른바 4기로 분류되는 회차부터 음정희와 부부 역할로 새로 투입되었다. 이때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진우 역을 맡았다. 아들과 딸-파일럿 이전에 한지붕 세가족 3기에서도 출연했는데, 이때는 동네 방범대원이라는 일회성 단역으로 나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한 격세지감이다.
파일:서울의 달 김홍식.jpg
드라마 《서울의 달》 컨셉샷
다음 해인 1994년에는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주연 김홍식 역으로 캐스팅 되었다. 원래 홍식 역은 유인촌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이내 거절하고 나서 한석규에게 배역이 돌아왔다. 이때문에 당시 서울의 달의 작가였던 김운경이 한석규(와 최민식)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굉장히 실망하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힐링캠프에서 최민식이 밝힌 바에 따르면 무려 집필을 멈추고 잠적했을 정도. 이런 감성을 표현하기에는 둘 다 너무 어렸기에 반대했다고. 특히나 홍식은 악역이면서도 묘한 연민을 유발하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신인급의 배우가 제대로 연기해낼 수 있을지가 우려되었다고 한다. 물론 작가는 드라마의 3~4화 정도를 보고나니 '얘들은 천재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두 배우에게 따로 찾아가 캐스팅에 반대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서울의 달은 자체 최고 시청률 48.7%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끈다. 또한 바른 생활 사나이'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서울의 달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며 시골에서 상경한 사기꾼 제비족이라는 역할을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기도 했다. 서울의 달때를 기점으로 한석규는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놓았고,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해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그해 TV저널 올해의 시상식에서는 탤런트부문 우수상을 MBC 연기대상에선 최우수연기상을 각각 수상한다. 한편 한석규는 2017년도 인터뷰에서 여태까지 연기했던 캐릭터 중 제일은 단연코 홍식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본인에게도 꽤나 인상깊었던 역할이었는 듯하다.

이렇게 인기를 얻다보니 MBC 공채 출신으로써 시청률을 위한 도중 합류나 마구잡이, 일명 겹치기 출연을 당해야 했다. 물론 지금에야 이런 스타들이 방송국에 갑질을 당할 일은 거의 없지만, 이 때는 공채 시스템이었고 스타여도 방송국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신세였다. 한석규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당했다. 실제로 서울의 달 촬영 도중에 마지막 승부 후속드라마로 편성된 박형준, 이시은의 미니시리즈 '도전'의 시청률이 영 나오지 않자 오연수와 함께 시청률 상승 카드로 중간에 투입되었으며 모래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에도 같은 이유로 출연했다. 심지어 당시 한석규는 한지붕 세가족에서 비중은 적지만 그래도 고정 출연자로서 계속 출연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서울의 달이 종영하고 나서도 해방 50주년 특집극 '전쟁과 사랑'의 주연급에 발탁한 것도 모자라 미니 시리즈 '호텔'과 주말극 '사랑과 결혼'에 잇따라 투입소식이 들렸다. 그 중에서도 '호텔'과 '사랑과 결혼'의 경우 각각 3월 중순, 4월 초부터 방영이 예정인지라 이것이 확정된다면 한동안 토요일에서 화요일까지 나흘 연속으로 그의 모습이 송출되어야 했다. 특히나 호텔과 사랑과 결혼의 배역은 서로 비슷한 이미지이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서 제작진에게 여러차례 거절의 의사를 밝혔으나 모두 씹혔다. 이때도 역시나 한석규는 영화 닥터 봉 촬영을 하면서 매우 바빴음에도 방송국에서는 이를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충무로 스타가 되기전 드라마판에서 한 작품이라도 더 뽕뽑아야겠지라는 마인드로 출연을 강제시했는데, 오죽하면 당시 기사에서도 해당 세태에 대해 비판했을 정도.# 그나마 사랑과 결혼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파일:호텔 임형빈.jpg
드라마 《호텔》 中
앞선 이유로 1995년엔 호텔을 둘러싼 형제 간의 갈등을 그린 MBC 미니시리즈 호텔에서 임형빈 역으로 출연하였다. 호텔은 전작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유사품내지 작품성보다 시청률만 의식한 2류극이라는 같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30% 이상이라는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인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 호텔을 끝으로 한석규는 영화계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2011년 뿌리깊은 나무로 16년만에 드라마 복귀하기 전까지 한동안 드라마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닥터 봉호텔과 함께 찍으면서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었고,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앞선 겹치기 출연이 본인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꽤나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촬영하던 이 시기에는 일주일에 무려 사흘은 밤샘 촬영을 하였다고 한다.#

5. 영화계 진출과 동시에 맞이한 최전성기 (1995년~1999년)

파일:닥터봉 봉준수.jpg
파일:닥터봉 봉준수2.jpg
영화 《닥터 봉》 中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서도 한석규한테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10여개의 시나리오가 한석규한테 전달되었다.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물인 닥터 봉을 영화 데뷔작으로 선택한 한석규는 봉준수 역을 맡으며 홀아비 연기를 적절 소화해낸 것은 물론 서울 관객 기준 약 40만명을 동원, 1995년 한국영화 관객수 1위를 기록할정도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였다. 한석규는 이 영화로 그 해 춘사영화상 신인남우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데뷔작 한편으로 90년대 중, 후반 흥행보증수표 한석규의 역사가 시작된게 이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 후에 뛰어난 진가를 발휘하였다.[3]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미디로 선택한 까닭은 너무 심각한 주제보다 본인에게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닥터봉'과 함께 출연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 진희경이 출연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다. 데뷔작 '닥터봉'의 대성공으로 한석규는 단숨에 충무로 최고의 흥행 배우로 떠오르면서 무려 40여 개의 시나리오가 그에게 몰린다.

그 다음해인 1996년,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CG 및 특수효과, OST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한국 최고의 판타지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출연하여 전국 관객 기준 약 185만을 동원하며 확실한 관객 동원력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다. 물론 캐릭터의 화제성은 신현준이 맡은 캐릭터 황장군에게 모두 빼앗긴게 아쉽다면 아쉽지만.[4] 재미있는 점은 원래 한석규가 처음 제안받았던 역이 바로 황장군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감독에게 졸라 수현 역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의 침대의 대성공은 한석규가 영화계에 빠르게 적응해나가며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큰 발판이 되었다. 실제로 이 영화 이후 굉장히 많은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고 전해지며 이때를 기점으로 기본출연료에다가 입장 관람객+@ 지급도 출연 조건에 추가하는 방식을 취하며 몸값도 상당히 올랐다. 한편 이 시기즈음 이현세 원작의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에서 주인공 '오혜성'의 목소리 역할은 원래 한석규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은행나무 침대의 촬영 일정과 겹쳐 이병헌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성우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겨우 끊어냈는데 또다시 성우를 한다는 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또한 이때 드라마계에서도 MBC 동기간을 비롯한 여러 드라마에서도 캐스팅 제의가 왔었지만 영화에 주력하기 위해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영화 《초록 물고기》 속 최고의 명장면, '공중전화 부스 씬'
1997년에는 '한석규의 전성기 중에서도 최고의 해'라고 불리울 정도로 무려 출연한 세 작품이 모두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한국 최고의 갱스터 느와르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자 이창동 감독의 전설적인 데뷔작 초록물고기, 조폭연기가 인상적이며 여러 유행어를 만들기도 한 조폭 코미디물에 가히 원조격 넘버 3,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최고의 멜로 영화이자, 멜로 영화 역사에 교본이 되면서 신세대형 멜로 스타일로 엄청난 열풍을 이끌면서 한국 멜로 영화 부흥기의 서막을 연 접속이 각각 (서울 기준) 관객수 약 20만명, 30만명, 80만명을 기록하며 연달아 히트하였다. 특히나 접속의 경우 OST 마저 70만 장이 팔려나갈 정도로 웬만한 대중가요 못지 않은 성적을 찍으며 작품 외적으로도 굉장한 인기를 보였다.

또한 느와르(초록물고기), 블랙코미디(넘버 3), 멜로(접속)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면서, 역대급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과 동시에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 특히나 초록물고기로는 그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했으며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남자 배우 최초로 한국 3대 영화상(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한 번에 달성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서울의 달 이후 슬럼프를 겪고 있던 학교 선배 최민식초록물고기에서 같이 출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송강호넘버 3에 출연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다.
파일:8크 유정원 오토바이.gif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中
1998년에는 본인이 직접 꼽은 자신의 출연작 중 최고의 작품이자 많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한국 최고의 멜로영화로 손 꼽히는 역대급 대걸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했다. 사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때는 접속에 이어 또다시 멜로 영화를 찍는다는 생각에 한 달여간 망설였다고 한다. 초록물고기에 이어 넘버 3에 출연했을 때 또 깡패이야기를 하냐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였는데, 그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르듯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도 다른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나름대로 장르의 변화나 연기 변신에 대한 압박감을 상당히 받았다고. 결국 8월의 크리스마스만의 여백과 여운, 아쉬움, 추억과 같은 느낌을 전해보자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심했다.#

한석규는 허진호 감독과 유영길 촬영감독과의 많은 의논끝에 밝게 가자는 결론을 내리며 '죽음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남자, 열심히 건강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삶과 사랑의 소중함을 역설'을 이야기하며 이 적정선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실제로 극중 의도적으로 많이 웃는 모습을 보였고, 이 덕에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라 할 수 있지만, 감독의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와 배우들의 연기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또한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및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을 받는 등 그 해 주요 작품상을 쓸어담았으며 시한부 사진사 정원 역을 맡은 한석규의 연기력도 자연스럽게 잔잔한 일상을 표현하는 연기력에 많은 관객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큰 호평을 받았다. 관객수도 무려 45만명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한편 한석규는 영화의 제목과 동명인 주제곡도 직접 불렀는데, 잔잔하고 큰 울림이 있는 주제곡으로 OST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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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쉬리》 中
다음 해인 1999년에는 영화 쉬리에서 유중원 역을 맡으 은행나무 침대 이후로 3년만에 강제규 감독과 재회하였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원과 총 31억원의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4년만에 완성된 이 작품은 한국 영화 최초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겨냥하였고,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하드액션 등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리고 1998년 재난영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무려 695만 관객을 동원, 11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 1999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의 신기록 뿐만아니라 전체 한국 영화 통틀어 흥행 1순위를 달성했다. 2009년 쉬리 개봉 10주년을 기념한 씨네 21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조차도 150~200만 전국 관객을 예상했는데, 서울 관객만으로도 240만이 넘을 정도로 전설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오죽하면 그때 흥행정도는 지금의 천만 영화는 가볍게 웃도는 관객 수라고 얘기나올 정도다. 게다가 이 쉬리때 한석규는 기본 출연료 2억 5천만원+관객당 500원으로 계약, 즉 대한민국 배우로서는 최초로 러닝 개런티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렇게 영화가 대흥행하자 러닝 개런티만으로 무려 12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쉬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대작영화의 본격적인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세계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 진출의 가능성을 제시 해주었고, 그리고 한석규는 이 영화 쉬리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최초의 한국배우가 된 것과 동시에 최초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였다. 여담으로 이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1993년에 개봉한 서편제가 유일했으나 이 영화 쉬리가 등장한 이후 서울에서 245만 관객을 기록하면서 이제는 서울에서 100만이 아닌 전국 695만 관객 동원을 성취한 쉬리로 인해 한국영화 흥행순위 판도는 큰 변화의 조짐을 예고하였고, 이 영화 덕분에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어마어마하게 기여를 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쉬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크게 일으키게 된 최초의 한국영화인 것과 동시에 한국영화계에 최초로 1990년대 한국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압도적인 흥행 열풍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 한국 영화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결정적인 방향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야말로 20세기 한국영화의 대표작이자, 쉬리가 한국 영화 역사에 큰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이 영화를 본 관객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라는 식의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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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텔 미 썸딩》 中
게다가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심은하와 함께 미스터리 고어 스릴러물이자, 한국 스릴러물에 최고의 수작으로 손 꼽히는 영화 텔 미 썸딩조형사 역을 맡았는데 이마저 전국 관객 기준으로 20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성공시켰다. 내용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렸지만 1990년대 한국영화가 한참 도약하던 시기와 당시 한국영화 중 스릴러라는 장르가 상당히 귀한시절을 감안하여서 당시 한국 스릴러물에 있어서 그동안 볼수없었던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면서 도시적이고 섬세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한국영화 가운데 중 미술도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고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장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6. 긴 공백기와 하락세, 이어지는 슬럼프 (2000년~2010년)

텔 미 썸딩》 이후 2003년 1월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 2개월이라는 공백기를 가졌다. 물론 3년 2개월 동안 한석규도 마냥 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주관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인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며 좋은 작품을 고르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또한 이 1회 막동이 공모전에서 당선된 각본을 원작으로 하며 신약 개발과 관련된 SF물인 《제노사이드》는 물론, 역시나 막동이 공모전에서 가작으로 뽑힌 미스터리 멜로물 《11월의 비》,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정치 스릴러 《광우》에 캐스팅되어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노사이드》와 《11월의 비》는 시나리오 수정이 되지 않아서, 《광우》는 제작사에 문제가 있어서, 영화가 무산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3년 2개월 간의 공백 끝에 2003년 1월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했다. 이 작품까지 안하면 충무로를 떠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 며칠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흥행불패의 아이콘이 긴 공백기를 끊고 출연한 작품이였기에 개봉 전부터 굉장한 주목을 받았지만, 한석규는 배우 데뷔 이래 최초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된다. 69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었으나 흥행 기록은 전국 100만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사실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서 차후 어느 정도 재평가되긴 했지만, 긴 공백기를 깨고 개봉한 영화가 이리 흥행 실패를 하니 이전까지 이어오던 한석규의 커리어에 치명타를 남기며 '흥행불패신화의 배우를 내리막길을 걷게 만들었다.'는 불명예스러운 작품으로 칭해지는, 여러 모로 비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제는 한석규가 아니어도 다른 배우들이 흥행에 대박을 치는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한석규 역시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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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소금인형》의 스틸샷
그 해 《이중간첩》의 흥행실패를 만행하고자 신인 감독이었던 이순안이 연출 및 각본을 맡고 그의 형이 설립한 제작사가 제작참여한 스릴러 영화 《소금인형》의 출연을 확정지었다. 맡은 역할은 아내가 살해당한 뒤 쫓기는 신세가 된, 승률 90% 이상의 이혼전문 변호사다. 하지만 감독과 스태프의 갈등으로 인해 촬영 지연이 빈번하게 발생되었고 해를 넘겨 2004년이 되어도 내외부 적으로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고작 20프로 정도 밖에 진행이 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영화 관계자들은 계약 만료 기간인 2004년 3월까지 끝내 갈등을 풀지를 못했고 결국 투자사였던 CJ가 직접 개입해 제작을 중단시켰다. 이전에도 제작 중단이 되었던 영화들이 있었으나 《소금인형》은 영화계의 큰 손인 CJ가 직접적으로 개입해 제작을 중단한 영화였기에 당시 세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영화계 한편에서는 한석규가 이번 《소금인형》의 제작 중단으로 충격을 받고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심지어 한석규 본인 스스로가 이민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언급한 기사가 있긴하지만, 이는 정확히 확인된 바 없다.# 영화가 제 때 제작이 되었더라면 2004년 6월 개봉 예정이었다.

한편 한석규는 이 2003년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한 해라고 표현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원래 리듬으로 돌아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이중간첩 촬영 중에 같은 부위를 다치면서 원래 앓고 있던 허리 부상으로 인한 허리디스크가 재발하며 수술을 받을 정도로 건강에 무리가 따르는 동시에 "모든 게 다 가짜같고, 애초에 연기라는 것 자체가 가짜인데 내가 왜 연기를 하나."라는 질문에 봉착했는데 스스로 답을 못 내리는 등, 배우로서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물론 연기는 결국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것이고, 당시에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건강이 안좋아지며 한창 예민했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이러한 슬럼프는 등산을 통해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2004년에는 스릴러 영화 《주홍글씨》에 출연했다. 이전 제작 중단된 《소금인형》에 출연했던 이은주와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 《주홍글씨》의 경우 첫 주에 흥행 1위를 기록하였지만 초반의 흥행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 하락세가 대폭 심해졌고, 영화 역시 흥미진진한 초반과는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뚝뚝 끊기면서 작품성이나 흥행이나 용두사미적인 작품으로 끝났다. 관객수는 약 143만명으로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긴 수준인지라 그의 이름값을 이어줄만한 흥행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예전에 흥행의 제왕이었던 한석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대중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흥행 실패에 더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주홍글씨》 개봉시기에 평론가 하재봉은 "이제 한석규의 시대는 갔다. 그는 한물 간 배우가 되었다."라고 대놓고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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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때 그 사람들》 中
2005년에는 정치 블랙 코미디 작품인 《그때 그 사람들》에서 주과장 역을 맡았는데, 작품 자체는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은 인정받는데 성공했지만, 1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면서 한석규의 두번째 영화 실패작으로 남게 된다.

3년의 공백의 무색하도록 2005년에는 또 다른 작품에 출연했는데 초심을 찾기 위한 것인지 안전해보여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 봉 이후 10년만에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출연했다. 하지만 배급사에서도 버린 카드라고 생각했던지 제대로 홍보도 안 되었고[5] 개봉 얼마 후에 케이블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전국 합해 50만 명도 기록 못한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복귀 이후 세 작품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한석규라는 이름에 기대를 많이 했는지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도전했는지 2006년에는 세 작품에 연달아 출연했다. 영화를 한 지 처음으로 동시출연을 감행이며 그것도 단독주연이 아닌 공동주연으로의 출연이었다. 가장 먼저 개봉한 영화 음란서생은 한석규 본인에게 있어서는 은행나무 침대 이후 두번째 사극 작품이기도 하며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였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총 관객수 257만명을 동원했으며, 관객들로부터 작품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도 침체기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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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구타 유발자들》 中
바로 다음 작품인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전국 관객 합쳐 2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하여 역대 한석규 출연작들 중 최저의 흥행스코어를 기록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구타유발자들은 상영한지 10여년이 넘어서야 지구를 지켜라!와 같이 대중들에게 숨겨진 명작, 또는 저주받은 걸작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여기서 문재 역을 통해 선보인 한석규의 악역 연기는 역대급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편 영화를 실제 보면 알겠지만 포스터에 한석규가 나올 뿐, 비중을 제외하고 화면에 노출된 분량만 놓고보면 실제 한석규는 특별출연에 가까운 느낌이다. 이는 원래 제안받은 역할은 이문식이 맡았던 봉연 역할이었지만 시나리오를 곰곰히 검토한 한석규는 문재 역할이 자신에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고 역으로 제안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석규 외의 다른 출연배우들의 이름값이 조연에 불과했던 이문식이나 당시에는 올드보이의 감옥사장 정도로나 기억되던 오달수나 신인이었던 차예련, 김시후 등이었기 때문에 크레딧이나 포스터에 얼굴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전체의 흐름을 보면 초반과 막판을 제외하고는 한석규는 얼굴조차 안 비친다. 그런 영향이 흥행에 영향을 준 것도 적지 않다.

그 해 가을 개봉한 8년만의 멜로작품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역시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는 평과 지나치게 밋밋했다는 평 두 가지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에 세 작품이나 출연하며 다작을 했던 한석규는 2007년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20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컴백했다. 당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안권태 감독이 촬영 중반 곽경택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대본이 수정되었고, 비중 문제로 안 좋은 말이 나왔던 작품으로 촬영 자체가 험난한 작품이었다. 더구나 같이 개봉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이라 3: 황제의 무덤으로 상당히 불리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 선전,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고, 손익분기점도 간신히 넘기고 그나마 중박은 쳤다.

2009년에는 영화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에서 한동수 역을 맡았다. 캐스팅 제의를 받은 처음에는 해당 역을 하기에 부담스러워 여러차례 고사를 했으나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계속 감독이 부탁하자 이정도로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출연을 감행했다고 한다. 특히나 감독이 자필로 쓴 편지의 내용을 읽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원작소설도 3권씩이나 되고,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로 나왔어야 할 분량을 2시간짜리로 압축했기에 내용전달에 충분치 못했으며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매우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고 역시나 흥행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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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층의 악당》 中
2010년, 코미디 영화인 《이층의 악당》을 통해 다시 흥행에 도전했다. 이번작을 통해 상대인 김혜수와는 닥터봉이후 15년만에 재회였으며 전작인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손재곤 감독과의 작품이다. 촬영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며 호평을 들었고 또 주요 영화평론가들 역시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기대도 컸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코미디 영화임에도 연평도 포격전으로 인해 나라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던 데에 개봉시기를 잡은 것이 흥행 실패의 주원인이었다. 또한 닥터봉'을 기억하는 지금의 영화관객들이 많지 않은데, '닥터봉'의 커플이었다고 병맛 홍보로 밀어부친 것도 이에 한몫했다. 특히나 후자의 경우 닥터봉이 흥행했던 시장은 한국영화의 파이가 2010년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시점이었으니 흥행했다 한들 널리 알려졌다고 보긴 어려웠을뿐더러 2010년대 주요 영화관람 연령층이 2,30대인데 닥터봉 개봉당시엔 어린아이었으니 영화 자체를 알리 어렵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코미디 영화의 수작으로 재평가 받고 있으며, 씨네21 선정 2010년대 영화 中 기자들이 놓치기 싫었던 영화 5선에 선정되는 등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편 한석규는 자신의 출연작을 즐기며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유일하게 요즘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이층의 악당을 꼽기도 했다.#

7. 16년만에 드라마 복귀를 통한 화려한 부활 (2011년~2015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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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배우 한석규, 추억을 선물하다 - 인간을 연기하는 배우 中
이층의 악당마저 실패하자 한석규는 영화 판에서 눈을 돌려,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세종 이도 역을 맡으며 16년 만에 드라마 판에 복귀하게 되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석규는 기존에 마냥 완벽하고 결점이 없는 성군이자 성인으로만 그려졌던 세종을 인간 이도로 재해석하며,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명대사로 대표되는 찰진 욕쟁이에 은근한 장난끼도 내포된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면서도 군주로서 진지하고 강직하지만 그 압박감을 견뎌야만 했던 불완전한 내면을 가진 여러모로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들 또한 섬세하면서도 적확히 표현해 낸 한석규표 세종 이도 연기는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평가받는다.

단순 감정 연기뿐만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한 연구와 설정에 대한 호평도 자자한데, 대표적으로 시신으로 돌아온 광평을 본 이도가 '차마 믿지 못하겠다'며 광평의 팔을 계속 머리 위로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장면은 원래 대본대로라면 그냥 광평의 시신을 태운 가마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었지만, 한석규의 요청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원숭이들이 동료의 죽음을 그렇게 확인한다는 것에서 따왔다고.# 또한 이만원씬으로 유명한, 젊은 이도(송중기)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대본에 아예 그 자체가 없었지만, 한석규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젊은 날의 자신을 향해 자기모멸의 극단적 행위였던 침을 뱉는 이도의 과격한 동작까지도 애드리브였다고. 여담이지만 해당 씬의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한석규는 송중기에게 귓속말로 “침 뱉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고 귀띔을 했다고 한다. 리허설까지만 해도 해당 애드리브에 대한 확신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이 외에도 한석규의 연구를 통해 반영된 장면이 매회 한두 신은 꼭 있었다고 장태유 PD가 증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현재까지도 미디어 속 세종을 생각하면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 이도를 떠올리는 이들이 대다수이며 그 해 SBS 연기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는 한석규의 연기 인생 첫 대상이며 어느 누구의 이견이 없는 대상 수상이었기에 본인에게도 상당히 의미깊은 수상으로 남을 듯하다. 실제로 한석규는 여태까지 연기했던 캐릭터 중에서 좋았던 캐릭터로 서울의 달의 홍식 다음으로 이도를 꼽았다.#

드라마 역시 대성공을 하여 전국 최고 시청률 25%를 넘으며 여러 매체에서 패러디되는 등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드라마의 메인 롤을 맡고 열연을 펼친 한석규 역시 다시금 재조명 받으며 명실상부한 배우의 입지를 드러냈다. 또한 이 뿌리깊은 나무를 기점으로 다소 침체됐던 그의 연기 인생은 또다른 터닝포인트이자 화려한 부활을 맞게 되었다. 모처럼 여러 광고 계약에 성공하기도 했으며 많은 시나리오를 받으며 다시 영화에서 명예 회복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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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 中
2013년, 정진수 역을 맡으며 류승완 감독과 하정우, 전지현과 함께한 영화 베를린이 개봉 3일 만에 100만, 개봉 14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 450만 명을 넘기면서 710만 명을 동원하는데 성공, 영화 쪽에서도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여담이지만 베를린은 현재까지도 한석규의 출연작 중에서 최다 관객수의 영화로 남아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한석규는 크레딧 둘째 줄에 이름을 올렸는데, 데뷔작 닥터봉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크레딧 첫째 줄을 놓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한석규가 극의 메인 롤이 아니어도 극이 돌아가게 하는 배우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한석규 스스로도 주연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뒤이어 개봉한 파파로티이제훈의 군입대 및 7번방의 선물의 흥행 호조 등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주연배우로서 성실하게 홍보한 덕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성공하였다.

2012년 11월 영화 파파로티 촬영 이후 휴식을 취하던 한석규는 황우석 교수 사건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제보자에 출연을 제의받았으나 검토 후 거절하였다. 그리고 2013년 11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집필했던 김영현 작가의 제의를 받아 드라마 파천황에서 정도전 역을 제의 받았다. 2014년 4월 경에 방영 예정이었으나 KBS 드라마 정도전과 시기가 비슷하고, 정도전의 경우 먼저 방영한 데다가 오랜만에 정통 사극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반면, 파천황은 퓨전 사극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MBC가 편성을 보류했다. 이후 파천황은 SBS로 이동하여 육룡이 나르샤로 방영되었다.

그 이후 2013년 12월, 영화 상의원 출연을 확정지었다. # 동시에 비밀의 문에도 캐스팅되자 너무 사극만 고집한다는 비판도 조금씩 나왔다.# 이 때문인지 두 작품은 시청률과 관객수에서 모두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의원비밀의 문 모두에서 한석규는 그야말로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이며 연기에 대한 호평은 자자하다. 특히나 영조를 연기하고 싶어서 출연한 비밀의 문의 경우 앞선 뿌리깊은 나무에서의 세종과는 비슷한 비주얼이지만 전혀 다른 군상을 가진 영조를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며 명불허전을 입증해내었다.###

8. 제2의 전성기 (2016년~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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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中
2016년에는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타이틀롤인 김사부 역을 맡았다. 이로써 1995년 호텔 이후 21년만에 현대극 작품을 하게 되었는데, 한석규 본인은 기획 의도와 함께 작품 제의를 받을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제목, 그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제목이 낯설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기에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한석규는 의사로서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환자를 최우선으로 두며 실력적으로도 완벽하지만, 안에선 상처를 품고 있다가 결국 과 함께 한층 성장하는 김사부의 입체적인 면모를 소화해내며 호평받았다. 특히나 김사부 역시 작중 깊은 울림과 위로를 안겨주는 명대사 제조기이자 사이다를 선사하는 캐릭터로써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20(+1)화까지 방영된 드라마는 첫방부터 막방까지 전체 월화드라마 중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최고 시청률 27.6%를 기록하며 2016년 SBS 드라마 시청률 1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로 5년만에 다시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하며 박신양과 함께 유이한 SBS 연기대상 2회 수상자가 되었다.[6] 한편 이 날 수상 소감으로 상당히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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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2월에는 김훈 중위의 의문사 문제를 다룬 영화 '아버지의 전쟁'에 출연이 확정났다.# 그러나 이듬해 2월 크랭크인 후 영화 촬영이 30%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갑작스레 그 해 4월에 기한없는 촬영 중단 소식이 들려왔다. 제작사에서 제작비 지급을 중단하여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이는 유족의 제작 동의를 얻지 못해서라고 한다.# 때문에 유족의 동의를 받기 위해 제작사 및 감독 교체와 시나리오 수정 후 촬영을 재개하고자 했지만, 끝내 엎어졌다.

2017년, 영화 프리즌에서 교도소의 권력 실세이자 왕으로 군림하는 수감자 정익호 역을 맡으며 상의원 이후 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였다. 개봉 전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인지라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샀지만, 정작 총 관객수 293만명을 기록하며 흥행 자체에도 성공했다. 연기 면에서도, 한석규의 악역 연기 중 최고봉이라 꼽는 구타유발자들의 문재와는 다른 결의 엄청난 악역 포스를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만만치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내가 입기에 쉽지 않은 옷이구나 싶었다고. 또한 그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속 무리에서 쫓겨나 공격당해 치명상을 당했음에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수컷 하이에나를 떠올리며 익호라는 인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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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상》 中
2019년에는 영화 우상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유력 도지사 후보이지만,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위기에 몰리자 정치적 야욕을 위해 폭주하는 정치인 구명회 역을 맡았다. 시민들 앞에서는 온화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비겁하게 변하는 야누스적인 연기를 보였다. 영화의 작품성은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모두 호평을 내렸다. 특히나 영화 전체적으로 대사가 전혀 안 들린다는 불만이 상당히 많이 제기되었지만, 출연진 중 거의 유일하게 대사를 어느정도 알아듣겠다는 의견이 상당하는 등, 성우 출신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7월에는 OCN 드라마 WATCHER(왓쳐)에서 도치광 역을 맡으며 낭만닥터 김사부 이후 3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했다. 감찰반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한 수사물이자 심리 스릴러 드라마로써 방영 직후부터 웰메이드라는 평가와 함께 보이스 2에 이어 OCN 역대 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선악의 경계 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 도치광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왓쳐를 통해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는 명불허전을 넘어서는 역대급 연기로 평가받을 정도로 마지막화까지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극 장악력을 선보였다.###

또한 12월에는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8년만에 또다시 세종 역을 맡으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개봉하였다. 한석규 본인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을 연기했을 때 장영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는데, 드라마를 하면서 '그런 군주에게 친구가 있다면 누구였을까'라는 생각을 품었었고 이에 장영실을 홀로 상상하곤 했었는데, 이번 천문에서 그런 부분을 풀어내서 기뻤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천문을 통해 허진호 감독과는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21년만에, 상대 배우이자 절친한 사이인 최민식과는 쉬리 이후 20년만에 재회하였다. 또한 허진호 감독에 의하면, 한석규와 최민식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건내주며 세종과 장영실 중에서 배역은 둘이 알아서 고르라고 전하자 한석규가 고민끝에 먼저 세종을 골랐다고 한다. 뿌리깊은 나무를 찍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는데, 그 때동안 세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서 이번엔 다른 결의 세종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총 관객수는 200만명으로 흥행에는 아쉽게 실패했다.
파일:낭닥2 김사부.jpg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2》 中
2020년, 낭만닥터 김사부의 약 3년만에 나온 후속작 낭만닥터 김사부 2에 출연했다. 후속작에 대해 한석규 본인은 지금까지 했던 작품들 중에서 시즌제는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다는 평을 내렸다다.# 전작에서 유연석, 서현진, 양세종, 서은수와 같은 주요 배우들의 시즌 2 출연이 불발되면서 방영 전부터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한석규는 드라마의 타이틀 롤을 맡은 만큼 극의 중심을 견고히 잡아주며 드라마의 흥행에 지탱했다. 무엇보다 시즌 1에서 선보였던 무르익으면서도 압도적인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하다.### 실제로 방영이 거듭할수록 우려가 기우인 듯, 시청률이 고공행진하며 마지막화에는 전국 최고 시청률 27.1%, 순간 최고 시청률 28.4%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상 덕분에 세번째 연기 대상 수상이 거론되긴 했지만, 펜트하우스 1김소연스토브리그의 남궁민을 비롯한 너무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미 같은 타이틀의 드라마로 대상을 수상한 바 있기에 언급된 후보들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대상은 남궁민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김소연은 펜트하우스 2로 대상을 수상하게 됐다. 다만 대상 수상 실패뿐만 아니라 시상식 자체에서 무관을 했다는게 아쉬울 따름. 물론 이 해 SBS 드라마가 워낙 히트작이 많아 대상 수상 경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그에 비해 KBS나 MBC 드라마의 경우 워낙 쪽박을 쳐서 만약 낭만닥터 시리즈가 SBS가 아닌 타 방송사에서 방영을 했더라면 또다시 대상을 수상했을 것이라는게 정론이다.

9. 그 후 (2021년~)

2021년에는 JTBC 드라마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에서 법의학자 장재욱 역을 맡았다. 원래 예정대로면 22년 상반기에 방영할 예정이었지만 촬영 도중에 원작과 관련된 논란이 터지면서 결국 촬영이 중단되었다.# 8부작까지는 찍어놓은 상태이고, 앞으로 진행될 상황에 따라 촬영이 재개될지가 결정날 것으로 보이는데 촬영 중단 소식 이후로는 관련 소식이 전혀 없는 상태다. 또다른 주연 배우인 정유미 또한 본인도 언제 공개될지 모른다고 언급할 정도. 그러다 결국 2023년 3월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관련 스태프들도 모두 해산한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작품이 엎어졌다.# 이에따라 기존 촬영분들도 로스트 미디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넷플릭스 드라마이자 추적자 THE CHASER, 펀치로 유명한 박경수 작가의 신작 돌풍에서 국무총리 박동호 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따라 상대 배우인 김희애와는 아들과 딸, 까레이스키 이후 약 30년만에 재회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제작이 확정 난 낭만닥터 김사부 3 촬영과 겹치자 돌풍 출연을 고사하였으며, 결국 해당 배역은 설경구에게 넘어갔다.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속 나레이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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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는 강창래 작가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강창욱 역을 맡았다. 왓챠 제작의 오리지널 드라마로, 이것으로 OTT 작품에 첫 출연을 하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부회차가 선공개 된 후 12월 1일부터 매주 2화씩 공개되었다. 암투병을 하는 아내의 옆을 지키며 그녀를 위해 요리하는 남편의 이야기 속에서 절제되면서도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다. 특히나 드라마 중간에 삽입된 한석규의 나레이션에 대한 호평이 많은데, 감독 역시 "한석규 배우를 캐스팅하며 내레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낭비"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 역시 호평을 받으며 공개 몇 주간은 왓챠피디아 내 별점도 별점도 연내 공개 콘텐츠中 1위와 왓챠 유입기여 1위를 했다.# 이후 채널 A 및 일본 후지 TV 등에서도 방영되었다.

다음 해인 2023년에는 낭만닥터 김사부의 새로운 시즌인 낭만닥터 김사부 3에서 김사부 역을 맡았다. 본작이 시청률은 물론 방영 직후부터 연일 높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시즌 1, 2와는 비교되는 다소 아쉬운 성적표를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는 역시나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2024년, 드라마 호텔 이후 29년만에 금토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로 MBC 드라마에 복귀했다. 그가 연기하는 주인공 장태수 역은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이며 살인범죄와 연관된 딸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겪는 딜레마를 겪는 아버지 캐릭터이며,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다. 제작발표회에서 한석규에 따르면, 1991년 MBC 입사 당시 작성한 계약서를 촬영 내내 가지고 다니며 '처음처럼' 작품에 임했다고 말했다.[7]


[1] 1989년 11월 30일자 성우협회보 제7호에 실린 KBS 제22기 전속성우 최종 합격자 단체 사진이다. 아래에서 둘째 줄, 맨 왼쪽에 있는 남자가 바로 한석규이다. 그의 바로 옆에는 나중에 한석규처럼 탤런트가 되는 김경응, 그 옆에도 역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서광재, 윗줄 맨 오른쪽에 위치한 사람은 한국 레전드 성우 중 한명인 김승준, 바로 옆은 원피스상디로 열연했던 김일이다.[2] 하지만 그때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이지 아예 나은 것은 아닌지라,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때 부상 당한 허리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체중이 늘면 바로 생활이 불편해진다고. 이에 현재까지도 간헐적 단식을 하는 등의 관리를 통해 체중을 비슷하게 유지해 오고 있다.[3] 이 시기 TV에서 인기를 얻은 배우들이 충무로에 진출했다 하면 흥행 성적이나 작품성 모두 실패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TV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이병헌, 심은하를 포함한 톱스타부터 TV 드라마로 조금이나마 인기를 얻었던 배우들마저 충무로에 가면 추풍낙엽 신세가 되어 하락 테크를 타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한석규는 충무로 진출에 성공하여 배우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톱 탤런트와 한석규의 차이점은 연기력 자체로도 화제를 모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었는데, 한석규는 특히 '서울의 달'로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충무로에 진출해서도 연기력부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닥터봉이 작품성에서는 평이 갈리지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건 한석규의 탄탄한 연기력이 영화 관객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4] 이 상황은 3년 후 <쉬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쉬리>가 제작된 시점에서는 한석규가 확실히 대세였던 점도 있고, 그 자체가 화제성이 컸기 때문에 은행나무 침대처럼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다.[5] 이 영화의 배급사는 '쇼박스'다. 추석연휴에 개봉시킬 영화로 '미스터 주부 퀴즈왕'과 가문의 위기를 선정하여 두 편 모두 개봉시키려고 했으나, 시사회 결과 '가문의 위기'가 흥행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미스터 주부 퀴즈왕'은 '가문의 위기' 상영이 끝나면 바로 개봉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가문의 위기'가 흥행 대박을 터트리고 쇼박스에서도 장기간 쭉 밀어주면서 사실상 '미스터 주부퀴즈왕'은 찬밥신세가 되었다.[6] 박신양은 두번의 대상 수상 모두 공동 수상이였기에 굳이 단독 대상 수상만 따지자면 한석규가 유일한 단독 대상 2회 수상자이다. 그리고 이후 김남길이 각각 열혈사제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로 대상을 수상하며 이 라인업에 끼게 되었다.[7] 한석규는 MBC 20기 공채 탤런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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