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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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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70100><colcolor=#F6BE3D> 파일:패밀리 컴퓨터 로고.svg
파일:Nintendo-Famicom-Console-Set-FL.jpg
개발 닌텐도
유통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현대전자
발매일
파일:일본 국기.svg 1983년 7월 15일
파일:미국 국기.svg 1985년 10월 18일
파일:브라질 국기.svg 1985년 10월 25일
파일:캐나다 국기.svg 1986년 2월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 1986년 9월 1일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1987년
파일:프랑스 국기.svg 1987년 10월 27일
파일:스페인 국기.svg 1987년 11월 1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년 9월[1]
판매량 파일:세계 지도.svg 6,191만 대
파일:일본 국기.svg 1,935만 대
파일:미국 캐나다 국기.svg 3,400만 대
홈페이지 미국 일본

1. 개요2. 상세3. 사양
3.1. CPU3.2. 그래픽3.3. 사운드3.4. 컨트롤러3.5. 기타
4. 게임 목록5. 개발6. 패미컴 출시7. 해외 진출
7.1.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현대 컴보이)
8. 다른 가정용 게임기와의 경쟁9. 미국의 반독점 규제10. 불법 복제판 범람11. 단종 및 사후 지원
11.1. 단종 이후 게임
12. 주변기기 및 기타 하드웨어
12.1. AV 패미컴 / New-Style NES
13. 특수칩
13.1. 닌텐도 특수칩
13.1.1. 서드 파티 특수칩
14. 복각판15. 레고16. 여담

[clearfix]

1. 개요

<nopad>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amicom-Console-Set.png 파일:attachment/패밀리 컴퓨터/nes2.jpg

[[일본|]][[틀:국기|]][[틀:국기|]]
패밀리컴퓨터
ファミリーコンピュータ
Family Computer

[[미국 캐나다|]][[틀:국기|]][[틀:국기|]]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현대 컴보이

닌텐도에서 출시한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가정용 거치형 게임기로, 줄여서 패미컴(ファミコン)[2]이라고 부른다. 북미에서는 패미컴이라는 이름 대신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의 줄인말)로 불린다. 북미 시장에서는 아타리 쇼크 이후 몰락의 길을 걷던 게임업계를 되살린 전설적인 게임기로 평가된다.[3]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시된 패미컴 게임은 동키콩, 동키콩 Jr, 뽀빠이 이렇게 3개이다.

발매일로부터 20년 이상 지난 2003년 9월 25일이 되어서야 슈퍼 패미컴과 함께 생산이 종료됐다. 닌텐도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패밀리 컴퓨터의 전 세계 누계 판매량은 6,191만 대이며,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4,024만 장을 기록한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이다.

2023년 7월 15일 발매 40주년을 맞이했다. 40주년 기념 홈페이지 (일본어)

2. 상세

1983년 7월 15일일본에서 '패밀리 컴퓨터'란 이름으로 처음 발매되었고, 북미에서는 1985년 10월 18일에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고, 유럽에서는 1986년 9월 1일에 북미판과 같은 이름으로 발매됐다.

대한민국에서는 보통 '훼밀리' 또는 '패밀리'라고 불렸으며, 1989년현대전자에서 북미판 NES를 닌텐도에 정식 라이선스를 받아 '현대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다수의 제품들이 수입 판매되었다.

닌텐도에서 크게 성공한 아케이드 게임 동키콩이 뛰어난 품질로 패미컴에 이식되어 게임기 자체가 이미 초반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후 허드슨이나 남코 등의 서드파티들의 참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발매로 사회현상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또한 젤다의 전설,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록맨, 메트로이드 등 패미컴에서만의 뛰어난 오리지널 게임들이 나오면서 역사상으로 매우 성공한 게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나 서드파티 비즈니스의 기준을 확립해 현재 게임기 산업 구조의 표준을 구축해 놓기도 했다.[4] 따라서 명실상부한 1980년대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라고 봐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

가격이 오르는 것을 감수하고 튼튼한 ABS수지[5]로 만들었다. 반대로, 가격 절감을 위해 일본판 패미컴 컨트롤러는 본체에 부착되도록 했다.[6] 색깔은 흰색과 빨간색인데, 빨간색은 당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와 비슷한 색으로, 그가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rowcolor=#fff,#ddd> 옛날 패미컴 광고 17가지 뉴 패미컴 광고
호주 NES 광고[7]

3. 사양

<colbgcolor=#A70100><colcolor=white> 패밀리 컴퓨터 사양
모델명 HVC-001
CPU 리코 2A03 1.79 MHz[8]
음원 CPU 내장 PAPU(Pseudo Audio Processing Unit)
PPU 리코 2C02 5.37 MHz[9]
표시 화소 수 256×240[10]
RAM 워킹 RAM 2 KB SRAM[11]
VRAM 2 KB SRAM
색 표시 성능 52~56색[12] 동시 발색 수: 25색[13]
스프라이트
오브젝트
크기 8×8 또는 8×16
표시가능 수 1화면 중 64매[14]
캐릭터 패턴(그래픽) 64종류 정의 가능
수평 / 수직 반전 가능
표시 위치는 배경화면의 앞뒷면 선택 가능
백그라운드
(BG) 화면
256×240 영역 2개 화면[15]
BG 캐릭터 8×8 도트 256개
스프라이트 별도의 BG 캐릭터 3개
카트리지 ROM 카트리지
규격 254mm×203mm×64mm / 1.25kg

3.1. CPU

CPU는 MOS 테크놀로지 6502에 음원 처리 기능과 DMA 컨트롤러를 추가하고, BCD 연산 기능은 제거한 커스텀 칩이다. 당시 리코는 동사가 라이선스권을 가지고 있는 로크웰 인터내셔널의 6502를 추천했는데, 칩의 면적이 작아 가격을 낮출 수 있고 당시 일본 내에 생소해 정체를 감추기 좋다는 이유였다. 닌텐도도 리코의 추천대로 6502로 낙점한다.[16]

그러나 로크웰 인터내셔널이 당시 MOS 테크놀로지 6502 세컨드 소스 기업이고 때문에 이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었던 건 맞지만 로크웰 인터내셔널이 리코에 MOS 테크놀로지의 IP인 6502의 설계를 라이선스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며 때문에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리코와 닌텐도가 6502를 무단 전재하고 분쟁 회피를 위한 조치까지 취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링크드인에 기고된 칼럼증언에 따르면 당시 코모도어 플러스/4, 코모도어 128을 설계한 빌 허드(Bill Herd)를 비롯한 코모도어 인터내셔널[17]의 엔지니어들은 NES의 사양을 알아내기 위해 2A03 칩의 디캡(IC decapsulation: 칩 회로를 보호하는 외부 흑색 에폭시 몰딩을 제거하는 것.) 작업을 하고 현미경으로 살펴보았고, 그 결과 6502와 똑같은 회로에 BCD 연산을 하는 전선이 끊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6502의 BCD 연산에 특허가 있었기 때문에 특허 분쟁을 회피하기 위해 이 부분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것 아닌가 추측했다고 한다. 또 6502의 개발자 중 한 명인 빌 멘시(Bill Mensh)에게 직접 물어봤더니 베낀 게 맞다는 식으로 대답을 해줬다고 한다.[18]

1989년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IC의 설계권이 국제적으로 보호받지 못했고, 특허법은 발명에 국한해 보호하기 때문에 IC 설계 전체를 특허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MOS 테크놀로지 6502 전체 설계 중 BCD 연산 부분만 특허가 나 있었고, BCD 연산 논리 블럭에 연결된 다섯 군데의 전선을 절단해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특허 분쟁을 피하고 편법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MOS 테크놀로지에게서 받은 라이선스를 로크웰 인터내셔널이 남용한 것인지, 아니면 리코와 닌텐도가 고의로 편법으로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 밝혀지지 않았다.

3.2. 그래픽

8×8 픽셀의 모음이 스프라이트의 최소 구성 단위이며, 이 스프라이트를 1화면에 최대 64매[19]까지 표시할 수 있으며, 가로 혹은 세로로 반전시켜서 출력할수 있다. 게임팩에 넣을 수 있는 스프라이트 전부를 한 화면에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컬러 팔레트는 한 팔레트에 3색 + 투명 1색이고, 스프라이트 4 팔레트와 배경 4 팔레트를 합쳐서 8 팔레트 동시 25색으로 표시할 수 있다. 이는 1983년 당시의 게임기로서는 매우 높은 성능이었다. 가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초기 패미컴의 게임 데이터 구성은 PRG와 CHR이라는 롬에 코드와 그래픽 데이터가 담겨 있는 형식이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예로 들면 8 KB의 칩에 8×8 스프라이트 1패턴이 256매(16×16) 담겨 있는 스프라이트와 백그라운드 데이터 테이블 2개가, 코드와 데이터는 다른 32 KB칩에 담겨있다. 이 용량이 기본 최대 용량으로서 그 한계는 금방 찾아왔고 이후에는 롬의 용량을 늘리고 뱅크 전환 회로를 붙여 롬을 전환하다가 MMC를 사용한다. 그래픽과 프로그램 롬은 통합하고 8KB의 램에 그래픽 데이터를 올려 쓰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처럼 램을 증설해 더 향상된 그래픽과 사운드, 게임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도 있다.[20]

한 픽셀당 4색의 색상 정보를 담기 위해 2비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8×8×16×16×2×2÷8(byte/bit)=8 KB가 된다.# 8×8 픽셀은 너무 작기 때문에 탄환을 표시하는 데에나 쓰고, 캐릭터는 이런 스프라이트를 4장 정도 모아서 16×16의 메타 스프라이트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21]

스프라이트는 하나의 스캔라인에 8개(8×8=64픽셀)만 표시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그냥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개발자들은 4장 이상을 표현할 때는 스프라이트의 우선순위를 틱마다 반전시켜 빠르게 점멸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4개 이상의 캐릭터가 한 줄에 설 때 깜빡이는 건 이것 때문이다.[22] 말이야 쉽지 스프라이트의 우선권 매커니즘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여 프로그래머들에게 골머리를 앓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위의 영상들처럼 기기의 한계를 초월한 뛰어난 컷신을 활용하거나 입체감을 잘 드러낸 게임들도 있었다.

3.3. 사운드



패미컴의 사운드칩은 사각파 채널 2개, 삼각파 채널 1개, 가상 백색 소음 채널 1개, 그리고 1비트 델타 변조 DPCM 손실 압축 샘플을 7비트 PCM 샘플로 변환하거나, 7비트 PCM 샘플을 그대로 써 재생할 수 있는 채널 1개, 총 5채널을 동시에 출력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게임은 앞의 4개 채널만 사용해 음악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1비트 델타 변조 DPCM은 잡음이나 왜곡이 너무 심했고, 7비트 PCM을 쓰기에는 카트리지 용량과 CPU 성능 면에서 제약이 커 사용하기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5개의 채널에서 나오는 디지털 신호를 사각파와 삼각파, 가상 백색 소음은 4비트 DAC로, 샘플 채널은 7비트 DAC로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해 각각 출력한다. 이후부터 아날로그 전자 회로로 구현했는데, 믹서 회로로 신호를 혼합해 복잡하게 설계된 대역 통과 필터(Band-pass Filter, BPF)와 증폭 회로를 통해 모노 음성 신호로 출력했다.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코모도어 64의 음원칩 SID는 채널마다 사용하는 파형을 실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닌텐도 패미컴 PAPU는 고정되어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SID는 ADSR 엔벨로프 기능을 지원하는 반면, PAPU는 Decay 엔벨로프 기능만 지원했고, SID는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디지털 필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패미컴은 아날로그 전자 회로로 대역 통과 필터를 구현했던 탓에 패미컴의 음원 품질은 코모도어 64보다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3.4. 컨트롤러

파일:Famicom_controllers.jpg

패미컴의 또 다른 장점이라면 컨트롤러이다. 왼쪽에 일체형 십자키, Select/Start 버튼, 오른쪽에 A/B 버튼을 배치해 그때까지 중구난방으로 난립하던 컨트롤러 배치의 표준이 됐다. 앞부분에는 확장 컨트롤러 포트가 있는데, 이는 재퍼와 같은 주변 기기를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북미판인 NES와 NES2는 컨트롤러가 탈착식인지라 확장 포트가 삭제되었다. 뉴 패미컴의 경우 컨트롤러가 탈착식으로 변경되었으나 일본판에는 주변기기 호환을 위해 확장 포트가 여전히 장착되어 있다.

패미컴의 2P 컨트롤러에는 마이크가 내장되어 있는데,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가 TV로 나오는 것을 좋아할 것 같아서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당시 보편적인 기술력으로 음성인식 기능 따윈 기대하기 어려웠고, 단순하게 큰소리와 묵음 두 가지만 구분하는 수준에 불과해 이걸 활용한 게임이 젤다의 전설, 타케시의 도전장, 광신화 파르테나의 거울 등 뿐이다.

패밀리 컴퓨터용 가라오케 소프트웨어로는 반다이에서 만든 가라오케 스튜디오가 있고, 한국에서 라이선스 없이 무단으로 만들어진 게임인 까치와 노래친구[23]패밀리 노래방[24]이 있지만 셋 모두 팩에 마이크 포트가 붙어 있어 동봉된 마이크를 연결해 사용하며, 패미컴 2P 포트의 마이크 기능은 쓰지 않는다.

3.5. 기타

일본 패미컴을 RF 단자(동축 케이블)로 TV와 연결하는 경우 NTSC-J 수상기는 CH 1, 2지만 NTSC-M 수상기는 유선 95, 96으로 설정해야 출력이 된다. NTSC-J의 CH 1, 2는 90~96, 96~102MHz를 사용하는데 NTSC-M의 유선 95, 96번과 주파수가 같기 때문이다.[25][26] 하지만 미국의 NES나 현대 컴보이는 NTSC-M 수상기로 CH 3, 4로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유럽판은 CH 30-36[27]으로 출력된다.

전원 어댑터는 기본으로 제공되는 것을 기준으로 일본 패미컴의 경우 DC 10V 0.85A를, 미국 NES의 경우 DC 9V, 1.3A를 현대 컴보이는 DC 9V, 0.85A를 사용한다. 슈퍼 패미컴, SNES, 현대 슈퍼 컴보이와 기본 제공 어댑터 규격과 같으며 서로 호환이 된다.

한동안 게임 진행 상황을 저장할 방법이 없어서 게임 진행 도중 게임에서 알려주는 암호를 게이머들이 기록해, 이어서 게임하려면 기록해둔 암호를 입력하는 방식을 사용해야만 했다. 1986년에 나온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은 매체가 플로피 디스크라 데이터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게임 진행 상황을 저장할 수 있었다. 그 시기를 전후로 카트리지 내부에 SRAM을 넣고 전지로 SRAM에 전원을 공급해 게임 진행 상황을 SRAM에 저장할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 대중화 되며 이를 채용한 게임들이 발매된다.

4. 게임 목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패밀리컴퓨터/게임 목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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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발

1981년 10월 게임 & 워치가 히트하면서 닌텐도의 개발 1부가 활발해졌을 때, 컬러 TV 게임 시리즈와 레이더스코프를 말아먹은 개발 2부는 직원도 줄고 할 일도 없어진 상태였다.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개발 2부 부장 우에무라 마사유키(上村雅之, 1943~2021)의 집에 전화해 게임 & 워치의 후속작을 준비해야 하니 잘 부탁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우에무라는 처음엔 컬러 TV 게임의 후속기를 준비하라는 뜻으로 알았지만, 야마우치는 몇 차례의 전화통화로 계속해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소프트웨어 내장이 아닌 카트리지 교환 방식
  2. 3년간 경쟁자가 나오지 못할 사양
  3. 카세트비전과 그 카트리지보다 저렴한 가격
  4. 샤프전자와 같이 작업하지 말 것[28]
  5. 기한은 내년 중반까지

우에무라는 시중에 판매 중인 게임기를 하나씩 분해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아타리 2600이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칩을 녹이고 회로를 살펴보며 패미컴 개발에 참고할 만한 것이나 특허 침해가 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그런 기기들로는 충분한 사양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미컴 개발 프로젝트 가동 직전에 콜레코에서 동키콩 라이선스를 얻기 위해 콜레코비전의 프로토타입을 들고 닌텐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화려한 화면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영상을 보고 개발 2부 직원 전원이 깜짝 놀랐으며, 훗날 우에무라는 이때의 경험이 패미컴 개발에 큰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제2개발부 직원들이 상상하는 패미컴 완성품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타리 2600이 아닌 콜레코비전이었다. 우에무라는 동키콩의 회로를 IC화하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3년이나 경쟁자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리라고 답했지만 야마우치는 복제품이 범람하는 게임 & 워치의 상황을 보니 그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고 샤프와 일하면 안 된다고 해 LSI 칩을 개발할 파트너 회사를 찾아다녔으나, 닌텐도라는 회사의 낮은 위치와 무리한 요구 조건 덕분에 번번이 거절당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패미컴 개발 프로젝트를 개시한 지 2개월 만에, 최신 설비가 놀고 있다는 RICOH에서 연락이 왔다.

닌텐도는 컬러 TV 게임의 LSI를 미쯔비시와 공동으로 개발했었는데, 마침 그 LSI 개발자가 리코로 이직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쉬워진 것도 있었다. 거기에서 꺼낸 "동키콩이 돌아가는 칩을 만들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그 어떤 요구사항보다도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다. 수십 개의 칩으로 돌아가는 아케이드용 기판을 원칩으로 한다는 도전과제도 과제이지만, 자신들이 잘만 만들면 동키콩을 집에서 플레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큰 자극이 된 것이다. 닌텐도는 참고용으로 동키콩 아케이드 게임기를 리코에 갖다 놓았다.

거기에서 리코는 CPU로 코모도어 PET애플 II에도 쓰인 MOS 테크놀로지의 6502를 제안했다. 자일로그 Z80의 라이선스를 받는데는 시간도 걸리고 리코에서는 MOS 테크놀로지의 6502가 자일로그 Z80 칩 크기의 1/4밖에 되지 않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MOS 테크놀로지의 6502의 칩 크기가 작아 저렴하다는 점과 일본 내에 잘 알려지지 않는 CPU라는 점, 이 두 가지 장점을 보고 닌텐도는 리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특히 후자는 엄청난 강점으로 작용해서 타사에서는 1년 동안 패미컴에 손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유행한 인텔 8080이나 자일로그 Z80을 건너뛰고 생소한 MOS 테크놀로지 6502를 선택하면서 닌텐도 내부에서도 큰 반발이 일어났다. MOS 테크놀로지 6502로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 안에서 손에 꼽을 지경이었는데, 닌텐도는 개발 도구[29] 제작과 동키콩을 비롯 다양한 게임들을 개발하기 위해 인근의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모집해도 단 1명만 응모할 정도였다. 개발 1부에 파견한 팀원까지 복귀시킨다. 여기에 운좋게도 '살아있는 6502 매뉴얼'이라는 별명을 가진 카토 슈헤이(加藤周平)라는 당시 신입사원 덕분에 게임 개발에 가속도가 붙는다.

MOS 테크놀로지 6502 자체만으로는 당시 유행이었던 카세트비전이나 퍼스컴 등의 경쟁 게임기들을 압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픽 보조 처리 칩인 PPU(Picture Processing Unit)도 같이 개발했다. PPU는 강력한 성능으로 괜찮은 그래픽 묘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제시한 CPU와 PPU 한세트당 2천 을 넘기면 안 된다는 조건에 리코는 "게임기라고는 해도 어엿한 컴퓨터인데 그 안에 들어가는 칩을 2천 엔 이내로 만들라고 하니 울음이 나왔다."라고 했다. 일설에서는 2년간 300만대 주문을 보증했다는 소문이 돌었으나 야마우치 사장은 그런 일은 없었고 반도체는 양산하면 가격이 내려가니 리코에서 충분히 팔릴 것이라는 판단 하에 결단했을 것이라며 부인했다. 1988년에 출판한 <테레비 게임 전시유희대전>에 따르면 야마우치의 요구에 "100만 대를 주문하면 가능하지만 그 이하라면 불가능하다."라고 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82년 3월부터 구체적인 게임기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처음에 '테레비 게임'으로 시작했고 나중에는 게임 컴퓨터를 줄인 가메코무(GAMECOM)라 불렀는데 그 외에도 다들 제각각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품명은 홈 비디오 컴퓨터를 줄여 HVC[30]로 결정되었지만 패미컴이라는 이름 자체는 '홈 컴퓨터도 퍼스널 컴퓨터도 아닌 패밀리 컴퓨터를 줄여 패미컴'이라는 식으로 최후에 결정되었다고 한다.

디자인은 최초 구상이 본체에 조이스틱이 붙은 형태였는데 요코이 군페이의 개발 1부에서 디자인을 맡아 본체에 패드가 두 개 붙은 형식으로 변경되어 돌아온 것에 사와노 타카오의 제안으로 우에무라가 십자키를 붙였다고 한다. 사양만으로도 1만 5천엔은 넘는 수준이었는데 ABS를 외장에, 값비싼 유리에폭시 기판을 수지 내부에 사용하는 등 직접 고급품이라 부를 정도로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에는 ROM은 낡은 것이고 이제는 DRAM의 시대라는 풍조가 있어 게임 카트리지용 롬을 생산해 줄 곳 조차 없어서 찾아다니느라 고생했는데 워드프로세서를 만드느라 ROM을 생산하고 있었던 도시바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의 문제로 디스크 시스템을 만들게 된다.

개발 환경은 지금처럼 전용 개발 도구나 레퍼런스 같은 것이 제대로 갖춰진게 아니어서 사실상 알아서 개발해야 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HP 64000나 샤프 X1등 범용 PC에서 개발하고 ICE(인서킷 에뮬레이터)나 자체적으로 제작한 ROM 에뮬레이터 등으로 확인을 하는 등 비싸기도 하고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했다. 나중에는 인텔리전트 시스템즈에서 제작한 에뮬레이션 보드를 장착한 후지쯔 FM R 계열 PC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6. 패미컴 출시

발매 초반엔 그렇게 순조롭지는 못했다. 발매 1년만에 100만 대, 그리고 1984년까지 250만 대가 팔렸지만, 기기 불량으로 인한 클레임 처리, 쏟아지는 반품으로 상당히 고생했다. 컨트롤러의 버튼은 100만 회나 테스트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통고무로 된 버튼이 패드에 박혀 빠지지 않는 일이 생겼고[31] 소비자들이 RF 단자에 연결할 줄 모른다거나, 게임 화면이 옆집 텔레비전에 나온다거나 본체와 연결된 컨트롤러를 끊어먹는다거나 등등 당시 닌텐도로서는 스스로의 역량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기에 문제가 많았다.

특히 PPU 열처리 문제로 게임에 버그를 일으켰고 닌텐도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소매점 주인들에게 직접 수리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타 게임회사들과 협의해 타사의 게임들도 디버그 작업을 했다. 이걸 두고 닌텐도의 전략이 아니었냐며 음모론을 제기하는걸 두고 우에무라는 턱도 없는 소리라며 부인했다. 1983년 연말 연시 시즌이 되기 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패미컴 전량 회수를 지시하면서 그 해 시즌을 놓치고 말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패미컴 초기엔 서드파티가 없었다. 닌텐도 역시 아타리처럼 서드파티라는 걸 만들 생각도 못했고, 애시당초 게임을 못 만들게 하려고 CPU의 정체도 감췄기 때문이다. 허드슨은 닌텐도와 친한 샤프의 소개로 패미컴 발매 전부터 인연을 맺게 되어 패밀리 베이식을 만들 수 있었지만 게임이나 개발 도구는 제멋대로 만든 다음 들고가서 교섭하고 계약해 최초의 서드파티가 된 것이었다.

남코의 경우도 어느 날 한 사원이 요즘 잘 나가는 거라며 패미컴을 사서 사무실에 가지고 왔다가 해킹한 결과 CPU 명령어 세트가 MOS 테크놀로지 6502라는 걸 알아내고 그 자리에서 패미컴 게임 제작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32] 그렇게 닌텐도의 도움 없이도 제멋대로 게임을 만들어서 닌텐도에 가져가서 서드파티에 참여시켜 달라고 반 협박으로 서드파티가 된 것이었다. 야마우치 사장의 반응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 그 자체였고 당시 남코는 굳이 참여시켜주지 않아도 잦은 송사로 다져진 남코 법무팀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완성품을 가져간 덕인지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코의 게임들은 엄청나게 팔렸고 패미컴도 1984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업계의 큰 손들이었던 허드슨, 남코, 타이토, 아이렘, 코나미, 자레코 6개 회사에는 연간 게임 제작 개수의 제한을 없애주었으며 허드슨을 제외한 5사와 선소프트, 반다이는 카트리지를 직접 제조할 수 있도록 우대해주었다. 사실 닌텐도에서 할 수 있던 것이라고는 '패밀리 컴퓨터는 닌텐도의 상표'라는걸 주장하고 그 상표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불과했고, 이후 부랴부랴 라이선스 규칙을 만들어서 1986년에 완성했다. 대충 알려진 라이선스 규칙들은 '서드파티 참여시 라이선스 비용 납부와 1대 500만엔의 개발 기재를 빌리거나 구입', '1년에 발매할 수 있는 게임 수의 제한', '게임 카트리지의 제조는 닌텐도에게 위탁하고 비용은 선납', '게임의 내용을 닌텐도가 검사' 같은 것들이 있다. 남코는 이러한 우대 계약을 악용해 타사의 게임을 자사에서 생산해서 발매하는 등 닌텐도의 뒷통수를 치다가 밉보이고 첫 계약이 만료된 1989년 라이선스 우대 계약을 철회당한다.

당초 우에무라는 장난감 세계에서는 100만대라면 그럭저럭, 300만대쯤 팔면 대단할테고 그 이후엔 판매대수가 꺾이겠거니 생각했지만 1984년 11월 제비우스가 나오며 히트를 이어갔고 1985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가 발매되고 그때까지 400만대가 팔린 패미컴은 그 인기가 식기는 커녕 사회 현상이 되기에 이른다.

7. 해외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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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는 패미컴 출시 초기부터 북미 시장 진출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당시에는 세계 최대 게임기 기업이었던 아타리와 협상을 시작했다. 아타리에게 패미컴을 독점 공급하기로 하고, 이에 대한 내용을 1983년 여름 미국 소비자 가전 박람회(CES)에서 아타리가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소비자 가전 박람회에서 콜레코가 가정용 컴퓨터 콜레코 아담을 발표하면서 동키콩을 시연한게 문제가 됐다. 콜레코가 시연한 동키콩은 콜레코 아담의 콜레코비전 하위 호환 기능을 이용해 시연된 것이었으나, 아타리는 계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해[33] 출시를 연기시켰다.

이후 북미 게임 시장은 아타리 쇼크로 큰 타격을 입었고, 레이몬드 카사르 아타리 CEO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타리를 떠났다. 이후 아타리를 사들인 잭 트러멜은 아타리를 코모도어 인터내셔널과 경쟁할 회사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패미컴의 유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이 거래는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닌텐도 역시 그래픽 칩 불량으로 인한 리콜 문제로 잠시 북미 시장 진출을 접었다.

1985년이 되자 닌텐도는 다시 북미 시장 진출을 추진했는데 이번엔 독자적인 진출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아타리 쇼크가 진행중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 소비자들에게 비디오 게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미국의 소매상들은 비디오 게임을 지나간 유행이라고 생각해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를 취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를 피하려고 닌텐도는 패미컴을 가정용 컴퓨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Nintendo Advanced Video System이라는 제품으로 출시하려 했다. 패미컴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치 세련된 가전제품이나 컴퓨터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했고, BASIC 인터프리터 카트리지와 키보드, 카세트테이프 데이터 레코더와 동봉해 판매하기로 했다. 컨트롤러는 전부 무선이었다. 그리고 1985년 1월 소비자 가전 박람회(CES)에 출품했다. 그러나 컴퓨터 기능은 열악했을 뿐더러 아무리 봐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 시스템을 주문하지 않았다. Electronic Games라는 미국 게임 잡지에서는 이에 대해 1985년 3월호에 "미국의 비디오 게임 시장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는 닌텐도의 오판일 수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닌텐도는 패미컴을 가정용 컴퓨터 제품으로서의 접근을 포기하고 장난감 제품으로서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85년 6월 자로 소비자 가전 박람회에 다시 출품했다. "Nintendo Advanced Video System"에서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으로, '카트리지'라는 이름 대신 '팩'으로, '콘솔' 대신 '컨트롤 덱'으로 개명했다.[34] 또한 재퍼R.O.B. 등의 주변기기를 내세우며 장난감임을 강조했다.[35] 그러나 그런 전략에도 소매상들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임을 알아채고 진열을 반대한다.

이에 1985년 10월 18일,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는 닌텐도 본사의 반대를 무시하고 직접 보증을 선 뒤, 소매점에서 90일 이내에 상품이 판매되면, 그 때 소매점이 닌텐도에 들여온 제품 값을 지급하고, 90일 동안 팔리지 않은 상품은 전부 무상으로 반납 받기로 합의하면서 결국 토이저러스와 몇몇 소매점에서 5만 대 정도를 주문해 출시하게 된다.

처음에는 30% 정도가 팔리지 않았으나, 서서히 인기가 붙기 시작해 이후에 9주 만에 9만 대 가까이 팔려 나갔다. 이 기세로 1986년 2월부터는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포함한 12곳의 미국 대도시에 출시됐고, 9월에는 미국 전역에 출시될 수 있었다. 닌텐도는 NES를 1986년 한 해에만 110만 대를 팔아치웠으며, 1987년에는 누적 판매량 500만대를 돌파했다.

미국에서의 NES의 성공 덕에 아타리 쇼크 이후 1985년에 1억 달러 규모밖에 되지 않았던 비디오 게임 시장은 1986년에 무려 4.3억 달러로 4배 넘게 팽창했다. 닌텐도는 1986년에 무려 3.1억 달러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NES는 북미 지방에서 3,400만 대 가량 판매했는데, 이는 아타리 2600의 판매량을 경신한 수치이다. 미국 진출 이듬해인 1986년에는 서유럽 일부 지역에도 출시되었으며, 1987년에는 서유럽 전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지역에도 출시됐다. 정식 출시는 아니지만 홍콩, 싱가포르 같이 영국과 호환되는 콘센트 규격을 가진 나라에서는 고급 백화점에서 영국판을 팔았다.

7.1.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현대 컴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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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0월 18일과 1986년 9월 1일에 북미와 유럽 시장을 대상으로 판매된 패밀리컴퓨터. 흔히 NES라고 불린다.[36] 가격은 북미판 기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가 번들된 일반 모델은 $130, 재퍼덕 헌트 게임이 번들된 모델이 $150, 그리고 재퍼, R.O.B.가 번들된 디럭스 세트가 $250다.

상술한 사정으로 컨트롤러는 탈착식으로, 2P 컨트롤러의 마이크와 볼륨 노브가 제거되었으며 출력단자는 기존의 RF 단자 외에도 측면에 모노 AV 단자가 추가되었다. 카트리지 삽입은 상단부에서 삽입하던 방식을 마치 VHS처럼 전면부에 프론트로딩 하는 방식으로 크게 변경되었는데 카트리지를 넣고 아래로 내려야 하는 이 방식은 고장이 잦았다. 때문에 후기에 나온 NES2는 탑로딩 방식으로 변경 일본과 같이 통일했다. 서양에서는 이 고장이 쉽게 나는 구조를 변경해주는 장치인 Ninten-Drawer를 개발했다 #,

본체의 하단부에는 패밀리컴퓨터의 확장 컨트롤러 포트에 몇가지 기능을 더한 48핀 확장 단자가 있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이 단자를 통해 세가 마스터 시스템의 게임팩을 구동할 수 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실제로는 이 포트를 사용하는 모뎀을 연결해 일본처럼 증권이나 경마를 위한 통신장치로 사용하기 위한 테스트까지 했었다.# 그러나 확장 장치는 발매되지 않았고 리비전을 변경하면서 탈착이 가능한 블럭형 커버에서 1회용 커버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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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컴보이 발매 당시 광고

우리나라에서 1989년에 발매된 현대 컴보이가 바로 이 모델이었다. 재퍼가 포함된 번들이었으며, 발매 당시 권장 소비자 가격은 139,000원이다. 초창기 모델은 현대전자에서 라이선스 받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생산한 것이다. 다만 닌텐도의 직접 출시가 아니라 현대전자를 통해 출시한 것이라 생김새가 약간 달랐다. 제품 자체는 동일하나 상표가 찍혀 있는 부분이 달랐는데, 오리지널 NES는 붉은색으로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이라고 적혀 있으나 현대 컴보이 NES는 검은색으로 현대 컴보이 COMBOY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Korean version이라고 적혀 있다. 1990년대 부터는 현대전자에서 자체적으로 생산을 했었던지라 후기형에선 Made In Korea 표시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외 컨트롤러 등 주변기기는 오리지널과 완전히 동일하지만, 정식 발매 게임팩에는 현대전자 상표가 찍혀 있다. 제품 밑면의 라벨에는 특이하게도 '닌텐도 주식회사'가 아닌 任天堂株式会社라는 닌텐도의 한자 상호명을 그대로 썼으며, 국내 '소비자보호센터' 전화번호를 기재해놨다.

미국에서 NES 게임을 대여하기도 했다. 일본이 중고 중심으로 거래된 것과 달리 미국은 대여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디오 대여점 같은 곳에서 겸업하기도 했다. 일부 게임은 해외 진출 시의 리스크를 줄이고자 대여용으로만 출시했다. 특히 허드슨 게임이 이런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게임은 게임기가 세대 교체될 때 폐기된 경우가 많아서 시중에 중고 유통이 잘 안 되며 일부 인기 대여 게임은 중고 게임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고전 게임 스트리머들이 별 수 없이 에뮬레이터를 쓰며 에뮬레이터를 쓰면 불법이라 지탄받는 일본과 달리 시청자들에게 크게 비판받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 게임은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37] 이후로도 미국에서는 2010년대까지 비디오 게임 대여가 활발했으나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나 PS Store, 스팀같은 온라인 게임 판매가 대중화되면서 대여점이 많이 폐업하면서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8. 다른 가정용 게임기와의 경쟁

발매 당시 일본에서는 에폭사에서 만든 카세트비전이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패미컴은 이 구조를 깨부수고 단숨에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경쟁사에서 스펙이 뛰어난 기기(세가 마스터 시스템)가 나오거나, 16비트 기종(메가 드라이브)이 먼저 나오긴 했으나, 세가의 실수가 있었고 닌텐도의 서드파티들 덕분에 항상 뛰어난 게임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교활할 정도의 언론 플레이(곧 있으면 슈퍼 패미컴 나온대!)로 경쟁사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패미컴은 1983년 7월 15일에 나왔고, 같은 날에 경쟁 기종인 세가의 SG-1000도 나왔으며, 세가 마크 3는 1985년 10월에 나왔다.[38] 실제로 패미컴은 메인 CPU 외부에 그래픽 프로세서를 따로 채용했고, 탑재된 램도 같은 시대의 다른 기종들보다 고용량이기 때문에 한 화면에 표현 가능한 화소 수도 압도적이었다.

MSX 및 비슷한 사양의 SG-1000은 '부드러운 화면 스크롤' 조차 구현하기 어렵고[39], 아무튼 당시를 기억하는 제작자들에게는 아타리 5200 따위는 비교도 안되는 파워풀한 차세대기였다는 평가를 받았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또한 패미컴이 SG-1000 보다도 200엔 낮은 14,800엔이었다. 아타리 2600의 일본판인 아타리 2800이 24,800엔에 발매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패미컴의 가격은 당시로써는 성능에 비하면 말도 안될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당시에 일본에서 판매된 8비트 게임기 사이에서는 가장 낮은 가격이었으며, 발매 당시에 이보다도 낮은 가격을 보인 기기는 13,500엔의 카세트 비전 정도뿐이었으나 그쪽은 8비트급이 아니다 보니 아타리 2600보다도 훨씬 낮은 성능이며, 그나마 CPU를 본체가 아닌 게임 카트리지에 넣어서 저 가격이 나왔다.[41]

상황이 이렇다보니 경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장 독점 상태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패미컴은 동키콩은 물론이고 남코의 각종 아케이드 이식작들이 쏟아져나와 게임 라인업도 풍부했었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이전에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잘 팔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연말 시장에 세가의 직원들이 상점에 파견나가 패미컴이 매진된 곳에서 '세가의 패미컴이예요~' 라고 하며 SG-1000을 팔았다고 한다. MSX는 마이컴의 영역에 가격도 엄청나게 차이가 났으니 애시당초 경쟁의 분야조차 달랐지만 판매량도 당연히 비교도 안되고 고성능 차세대기인 메가드라이브는 발매일에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를 내보내 압살했다.

독점 상태였지만 닌텐도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다. 디스크 시스템으로 게임 공급 가격을 낮춘다거나, 우수한 게임을 개발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후속 기종인 슈퍼 패미컴이 1990년에 나왔지만, 그 이후로도 패미컴의 목숨은 질기게도 이어졌다. 본체의 출하량도 슈퍼패미컴 발매 전후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팔렸으며 게임도 직전해와 마찬가지로 151작이 발매되고 92년에는 90여작, 93년에는 50여작으로 계속해서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제조비가 많이 드는 닌텐도의 카트리지 제조 특성상 훗날 플레이스테이션처럼 교육용이나 저가형 게임을 마구 찍어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후속작 위주이긴 해도 하나같이 양질의 소프트라고 봐도 무방하며 별의 커비와 같은 세컨파티 대작이 발매되어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한다. 또한 이때의 패미컴 게임은 카트리지에 특수칩을 사용하고 그간 쌓인 노하우를 활용하여 16비트 게임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게임들도 많았다.

1993년 10월 말에 북미에서 'New-Style NES', 1993년 12월 초에 일본에서 'New Famicom'이라는 이름의 신형 패미컴이 출시되기도 했고, 닌텐도의 퍼스트 파티 게임 한정으로 일본에서는 1994년 2월에 와리오의 숲까지, 북미에서는 1994년 3월에 'Zoda's Revenge: StarTropics II'까지 발매되었으며, 서드 파티 게임까지 확장하면 1994년 6월에 발매된 '타카하시 명인의 모험도 4'[42]를 마지막으로 신작 게임 공급이 끝났다. 94년 7작을 끝으로 신작 발매는 끝나게 되었음에도 패미컴 본체는 계속해서 팔렸으며 닌텐도도 꾸준히 생산을 이어가다가 2003년이 되어서야 생산을 중지한 것을 보면 단순히 게임기가 아니라 국민 가전으로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받았는지 짐작 가능하다.

햇수로 4년이라는 시간은 어느 한 세대 기종의 라이프 스팬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시간인데 당장 슈퍼 패미컴에게도 1994년은 타사들의 차세대 게임기가 등장하면서 자사의 차세대 기종인 닌텐도 64의 출시를 기다리는 황혼기였다. 그런데 전세대기인 패미컴이 슈퍼 패미컴 주력시기 내내 시장을 나눠먹으면서 마치 다른 계열의 기기인 마냥 끈질기게 살아남아 실로 대단한 생명력을 보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해서, 일본보다 2년 정도 늦게 출시했음에도 패미컴이 죽질 않아서 기껏 발매한 슈퍼 패미컴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팀킬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43]

9. 미국의 반독점 규제

닌텐도는 패미컴으로 사실상 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는데, 닌텐도의 서드파티 계약 조항이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원인을 저질 게임들의 범람으로 보았다. 닌텐도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이를 두고 조제남조(粗製濫造)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규제하겠다는 미명 하에 서드파티 게임 회사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때 1년간 게임 발매 개수 제한을 둔다든가 2년간 다른 게임기에 게임을 내지 못하게 하는 조항을 두었다.

이를 서드파티가 반발할 수밖에 없었으나 1990년까지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90%를 패미컴이 장악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대놓고 반발하는 회사는 적었다. 물론 남코코나미 같은 대기업들은 음반 레이블 개념으로 계약 조항을 우회하려 시도하기도 했고[44], EA 같은 회사는 닌텐도의 정책에 반발해 가정용 컴퓨터 게임 회사로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또한 이 서드파티 정책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는데, 상원 의회에서는 닌텐도를 청문회로 불러내 계약 조항 철회를 촉구했고, 주검찰과 법무부는 닌텐도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으며, 연방거래위원회에서는 닌텐도에 대해 반독점법 위반 혐의 조사를 시작했다. 닌텐도는 게임 품질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 해명했으나, 아무리 봐도 시장 선도자로서 경쟁자를 고사시키기 위한 계약 조항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90년에 닌텐도는 연방거래위원회가 지적한 나쁜 조항들을 철회하고, 1991년 4월에 최종적으로 합의했는데, 1988년부터 1990년까지 NES를 구매한 모든 소비자에게 5 달러의 바우처를 주기로 했다. 이에 대해 언론이었던 게임 스파이는 게임 산업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닌텐도를 처벌한 것이 아닌 사실상 판촉행위를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시기 닌텐도의 사업 형태는 주위에 적을 만드는 일이 많았다. 아타리 게임즈와는 10NES 특허 침해 소송과 테트리스 저작권 분쟁, 반독점 소송으로 마찰을 빚었고, 닌텐도는 게임팩 대여 행위를 저작권 침해라며 VHS 비디오 테이프 대여 프랜차이즈 회사였던 블록버스터에 소송을 했다. 남코에게는 게임기 개발을 시도했다가 들켰다면서 서드파티 계약 갱신할 때 그 동안 보장해 줬던 최혜 대우 특혜를 빼앗기도 했다.

또한 연방거래위원회에서 지적한 나쁜 조항은 사라졌어도, 게임 카트리지 독점 생산, 초기 수량과 발매 시기를 닌텐도가 정하는 관행, '초심회'라는 닌텐도의 도매상 연합을 통한 유통 독점, 카트리지 생산 선급금과 보험료까지 받아가는 행태는 계속되었다.

결국 이 시기부터 쌓아 왔던 갈등은 그 다음 게임기 세대 시절인 세가 제네시스 시절에 세가 오브 아메리카가 미국의 서드파티[45]를 끌어들이는 데 요긴하게 써먹었으며, 닌텐도는 닌텐도 64 시절에 서드파티에게 철저한 외면을 받게 된다.[46]

10. 불법 복제판 범람

복제 패미컴은 보통 패미클론으로 지칭된다. 한국의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만졌던 패미컴이나 게임은 복제품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런 패미클론의 범람은 패미컴의 높은 인기와 더불어 복제의 용이성(…)을 역설해주고 있다.

최초의 패미클론의 등장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대만에서 정품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기기가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색깔은 빨간색 대신 회색을 사용했다. 이러한 패미클론은 점차 발전해 외부 케이스의 모양을 당대의 차세대 게임기[47] 디자인으로 바꾸는 것은 예사였고, 게임패드도 단순한 2버튼에서 연사가 달린 6버튼 이상의 패드가 달려 나오는 식으로 발달했다.

옛날에는 게임기는 물론이고 게임팩의 복제도 워낙 흔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패미클론을 생산 판매하는 업체가 제법 있었다. 한때 게임 시장에서 패미컴은 거의 대부분이 복제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현대전자가 정식 라이선스판인 현대 컴보이를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있는 다른 대기업(?)들에서도 패미클론(해태 슈퍼콤, 영실업 파스칼 등)을 내놓기도 했다. 삼근물산의 조이콤같은 경우는 당시 인기 아역 배우였던 이건주를 앞세워 대놓고 TV와 유명 잡지에 광고를 해대서 매우 높은 인지도를 얻기도 했다. 당시 광고

1990년대 전후로 발매된 한국산 개발 패미컴 게임[48]들도 대부분 무단으로 게임을 내놓았고 그 가운데에 몇몇은 롬 덤프가 아직 되지 않아서 원 롬팩은 프리미엄이 붙어서 거래되고 있다. 주옥 같은 여러 게임들이 있지만 둘리 부라보 랜드도술동자 구구는 2017년 2월에 롬 파일로 덤프되었다. 게다가 한국산 패미컴 게임 사이에는 바둑학습용 게임도 있는데, 당시에 프로 바둑 기사이던 장두진의 이름을 내세운 장두진 바둑교실 입문편이라는 게임도 있다.[49]

패미클론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시대가 흐르며 원칩 간소화되어 다른 게임기들과 퓨전되어 나오거나, 액정을 달고 휴대용으로 나오고 있으며 아예 새로운 패미컴용 게임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다.

현재는 일본에서도 복제 패미컴이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는 패미컴 호환기를 DIY할 수 있는 키트까지 팔고 있다. 이런 호환기 중에는 일부 호환이 되지 않는 게임도 더러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패미컴 게임을 만들던 회사를 게임월드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최소 3000개는 팔아야 이윤을 볼 수 있었는데 몇만개씩 팔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11. 단종 및 사후 지원

1990년 11월 21일 후속기종인 슈퍼 패미컴이 발매되었음에도 패미컴의 기세는 바로 수그러들지 않았다. 1990년, 1991년 모두 150여종의 게임이 발매되었으며, 1992년에도 95개, 1993년에 52개의 신작이 출시되었으며, 1994년이 되어서야 7개로 줄어들게 된다.

패미컴 플랫폼으로 판매된 마지막 게임은 일본 기준으로 1994년 6월 24일에 발매된 타카하시 명인의 모험도 4이며, 북미 기준으로 1994년 2월 19일에 일본에서 먼저 발매된 후 동년 12월 10일에 발매되어 유일하게 ESRB 심의 패미컴 게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와리오의 숲, 유럽 기준으로 1994년 10월에 슈퍼패미컴으로 가장 먼저 나오다가 1995년 5월 25일에 패미컴으로도 이식되어 유럽 한정으로 발매된 라이온 킹이다.

마지막 소프트가 발매된지 약 20년 뒤엔 2013년에도 키라키라 스타 나이트 같은 각종 비라이선스 게임들이 발매되었으나 비라이선스임으로 셈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외로 원래 북미에서 발매하려다가 묵혀둔 MOTHER의 영문판 Earthbound Beginnings가 2015년에 Wii U버추얼 콘솔로 깜짝 출시된 바 있다.

패미컴용 게임은 패미컴 출시 후 11년 뒤인 94년이 끝이었으나 패미컴은 2003년 9월 30일까지 무려 20년간 지속적으로 생산 되었으며[50], 자주 고장나는 디스크 드라이브 벨트도 이 당시까지 계속 생산해서 판매했다. 다만 북미판인 NES는 1995년 8월 14일에 일찍 생산 종료되었다.[51]

2007년 10월 말 패미컴 시리즈와 게임보이 시리즈, 그리고 닌텐도 64 같은 구형 게임기에 대한 사후지원을 종료했다. 부품 조달이 어려운 상태이고, 구매를 희망하는 사람과 수리요청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는데 패미컴 정식 A/S를 요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물경 24년 동안 사후지원을 해왔다는 것이다.[52]

11.1. 단종 이후 게임

12. 주변기기 및 기타 하드웨어

12.1. AV 패미컴 / New-Style NES

파일:AV사양 패미컴.jpg

1993년 10월 15일(북미), 12월 1일(일본)에 $49 / ¥6,800으로 출시된 염가판이다. 북미에서는 흔히 "탑로더 NES"라고 부른다.

북미판은 카트리지 삽입구 부분이 팩 크기에 맞춰 일본판보다 좀 더 높고 둥근 형태로 디자인 되어 있다. 기존 NES의 프론트 로딩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원래 있었던 AV 단자를 제거한데다가 RF 단자의 품질이 더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후 멀티 AV 단자로 교체된 버전[56]과 화질이 개선된 RF 단자 버전이 나왔다.

일본판도 북미판과 똑같이 10월 발매 예정이었으나 멀티 AV 단자로의 사양 변경으로 인해 발매를 연기했다. 북미판과 달리 오리지널에 있는 확장 포트도 그대로 이식했으며, 일본판은 AV 케이블과 AC 어댑터가 별도로 판매되었다.

카트리지 삽입구가 슈퍼 패미컴처럼 자동개폐식이지만 배출 시스템이 없어서 카트리지를 손으로 뽑아야 한다. 컨트롤러는 슈퍼 패미컴의 것과 비슷한 좀 더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57] NES처럼 탈착형이며 오리지널에 있었던 2P 컨트롤러의 마이크와 볼륨 조절 기능은 삭제되었다.

모델의 완성도는 높고 불량률은 원작보다 월등히 낮은 편에다 호환성[58], 내구성, 가격까지 휘잡은 '결정판 NES'라고 불리울 뻔했으나, RF 단자 문제와 통칭 '블랙 박스' 패키지 게임들과 출시된 이미지와 거리감이 꽤 있어 많은 레트로 게이머들은 더 구하기 힘든 구형 NES를 찾거나, 모딩을 해 후면에 AV 단자를 만드는 식으로 즐기고 있다.

13. 특수칩


패미컴 출시 3년차가 지나던 시기에 패미컴의 하드웨어 사양은 서서히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패미컴은 CPU에서 32KB, PPU에서 8KB를 포함, 최대 40KB의 ROM까지 지원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또한 메모리 역시 워크 메모리 2KB 및 비디오 메모리 2KB로 총 4KB 밖에 되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RAM 추가 및 대용량 ROM을 지원하기 위해 게임 카트리지 안에 뱅크 전환 기능과 같은 메모리 관리 제어장치를 집어넣은 것이 특수칩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래픽 처리 보조 기능, 추가 음원 기능까지 집어넣은 특수칩도 등장했다. 패미컴 게임팩에 출시된 특수칩이 들어간 게임들 중 주로 MMC1과 MMC3 그리고 UNROM이 널리 쓰였다.

영어권에서는 '매퍼(Mapper)' 칩이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특수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메모리 영역을 배정하는 매핑 기능이었기 때문에 패미컴 에뮬레이터 개발 초기에 이렇게 불리던 것이 그대로 정착하게 된 것이지만 엄밀히는 비공식 용어이다. 이 초기 시기에는 매퍼의 이름을 정할 때 칩의 이름을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매퍼 001'과 같은 숫자로 나열했는데, 이후로는 실제 칩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과거에 쓰던 넘버링과 병기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가령 과거 매퍼 005라고 불리던 것은 실제로는 MMC5를 말하는 것이다.

이 특수칩의 존재는 해적판 업계에서 만들어지는 합팩에 들어가는 게임의 종류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80년대 후반부터는 합팩에 있는 게임도 합팩에 탑재된 특수칩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면 구동이 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MMC5나 VRC6급 이상의 고급 특수칩은 비용이 많이 들었기에 이런 칩을 사용하는 게임들은 거의 수록되지 않았다. 합팩에는 MMC3를 기반으로 한 칩이 흔히 탑재되었는데, 이 정도만 해도 많은 인기 게임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패미클론이나 컨버터로 구동 시 특수칩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13.1. 닌텐도 특수칩

13.1.1. 서드 파티 특수칩

닌텐도에서 특수칩을 포함한 게임을 내놓자 남코, 코나미 같은 회사들도 특수칩을 포함한 게임을 내놓을 수 있도록 닌텐도에 요청했고, 1986년부터 특수칩이 포함된 게임을 내놓았다. 서드 파티의 특수칩이 들어간 게임은 닌텐도의 카트리지 생산 통제 정책에 의해 주로 일본에서만 출시되었다. 이런 특수칩들이 들어간 게임이 북미나 유럽판으로 이식된 경우 자사의 칩을 넣을 수 없어 닌텐도에서 제작한 다른 칩 중 하나를 사용하도록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추가 음원은 당연히 빠질 수밖에 없었고 닌텐도의 칩이 원래 사용하던 칩의 성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그래픽이나 음악, 사운드 효과가 닌텐도의 칩에서 처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하향되거나 원래는 없던 처리지연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코나미의 VRC6, VRC7이나 선소프트의 5B 칩 등이 보여준 추가 음원 활용 능력은 칩튠 제작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 원래 이러한 칩을 사용하지 않았던 게임의 BGM을 칩을 사용한 것을 가정해 어레인지해 내놓는 작품이 많이 나왔고, 추가 음원을 제공하는 칩으로 인지도가 높다. 실제로는 이 칩들은 강력한 메모리 관리 능력을 함께 제공하기 때문에 없으면 음원이 재생되지 않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게임이 정상적으로 구동될 수 없다.

14. 복각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닌텐도 클래식 미니 시리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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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레고


NES 35주년 기념을 겸해서 2020년 7월 14일, NES 레고가 발표되었다. NES 본체, 게임패드, 카트리지 팩, 레트로 브라운관 TV로 구성되어 있으며, TV 측면의 레버를 돌리면 화면이 옆으로 스크롤한다. 레고 슈퍼 마리오 세트에 동봉된 마리오 피규어를 올려두면 화면 진행에 맞춰 마리오가 음향효과를 낸다. NES와 카트리지, 패드는 1:1 크기다.[78] 발매는 2020년 8월 1일이며, 정가는 299,900원이다.

16. 여담

파일:노스탤지어 시리즈.jpg
피크민 4보물로도 등장했다.

[1] 한국닌텐도 설립 이전이므로 현대전자에서 들여와 현대 컴보이라는 명칭으로 출시했다.[2] 한국에서 PC를 가리키는 말인 컴퓨터를 일본에서는 퍼스널 컴퓨터를 줄인 파소콘(パソコン)이라고 부른다. 세부적으론 당시의 개인용 컴퓨터인 마이크로 컴퓨터를 줄인 마이컴(マイコン)이나 하비 퍼스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 타임지는 이를 두고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패미컴이 지니는 위치는 로큰롤의 역사에서 비틀즈의 위치와 같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비틀즈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기 전에 미국에서의 로큰롤은 인기 뮤지션들을 둘러싼 스캔들과 불행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반발과 함께 그 뜨거웠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이미 한물간 장르 취급받고 있었다가, 비틀즈의 등장으로 젊은 세대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며 부활했으니 적절한 비유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비틀즈영국락 음악의 주도권을 미국으로부터 빼앗는 계기를 마련했듯이, 패미컴의 북미 발매 역시 일본미국으로부터 게임기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은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의가 있다. 미국은 전세계의 거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정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두 분야만큼은 세계 제일이라고 하지는 못 하고 있다.[4] 오늘날 업계 표준으로서 게임 플랫폼들이 개발사로부터 징수하는 30%의 수수료는 패미컴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구글 플레이App Store와 같은 종합 플랫폼들 역시 이 기준을 따르고 있다.#[5] 오래된 패미컴이 누렇게 되는 이유이다. 그래도 패미컴 정도면 누래지는 것으로 끝나니 양호한 편이다. 이 시기 플라스틱 재질의 전자제품들 중에서는 오래 쓰다 보면 자외선과 온도 변화 등에 의해 갈라지고 부러지는 일이 흔했다.[6] 북미판과 유럽판인 NES는 컨트롤러와 본체를 분리할 수 있다.[7] 왼쪽의 광고는 You Cannot Beat Us로 유명한 기괴한 광고다.[8] NTSC 지역에 쓰인 칩이다. PAL, SECAM 같은 50 Hz 필드 출력이 필요한 지역에는 2A07이 들어갔다.[9] NTSC 지역에 쓰인 칩이다. PAL, SECAM 같은 50 Hz 필드 출력이 필요한 지역에는 2C07이 들어갔다. 래스터 검출이 가능하다. 0번 스프라이트의 표시 라인을 거친다.[10] TV 표시 범위에 들어가는 것은 위 아래로 8도트씩 뺀 224개 라인이다.[11] 1980년대 후반부터는 카트리지에 8 KB의 WRAM을 탑재해 메모리 부족을 해결했다.[12] 색 표시 수가 어중간한 이유는 패미컴의 색 표시가 RGB 지정이 아닌 NTSC 신호를 직접 생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이고, 적절한 패러미터가 64종이기 때문에 (유채색 12계통+무채색 2계통)×휘도 4계조 = 56색 중에서 일부는 중복되어 있다. 패밀리 베이식에는 52색으로 기술되어 있다. 실제 사양은 색을 일일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52색이라는 색 표현의 선택폭을 결정했다고 해야 옳다.[13] 스프라이트, 배경용 각 4팔레트이다. 1팔레트는 4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1색은 모든 팔레트 공통색이다. 다시 말해서 스프라이트면이 투명하다. 록맨 캐릭터들 같이 투명 포함 4색 이상으로 구성된 캐릭터들이 있는 게임들도 있는데, 이는 2개 이상의 스프라이트를 겹치는 방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8팔레트×3색 + 공통 1색 = 25색[14] 수평은 8매까지 가능하다.[15] 추가 VRAM을 장착하면 최대 4면까지 가능하다.[16] 2008년 10월 3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특집 기사, '닌텐도 패미컴은 이렇게 태어났다'#[17] MOS 테크놀로지는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의 자회사였다.[18] 빌 멘시는 1977년 MOS 테크놀로지를 나와 웨스턴 디자인 센터를 설립한다. 리코도 슈퍼패미컴 때는 웨스턴 디자인 센터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65C816을 넣었다.[19] 수평은 8매까지[20] 카트리지별 구성은 데이터베이스 참고 #[21] 고전 게임의 스프라이트 시트를 뜯어보면 캐릭터들이 마구 조각나 있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스프라이트를 아끼기 위해 좌우가 동일한 그림은 하나의 스프라이트를 반전시키는 등의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는 용량을 아끼기 위해 풀숲과 구름에 동일한 스프라이트가 사용되었는데 팔레트 스왑을 해서 달라보이는 것이다.[22] 롤플레잉 게임의 파티원이 보통 4명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열혈 돗지볼같이 한 화면에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게임들은 화면이 매우 깜빡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23] 현대 컴보이용으로 만들어졌다.[24] 1994년 열림기획 개발. 팩에 FM 음원인 YM2413 OPLL칩이 있다.[25] 클래식 감성을 느끼려고 하거나 로터리식 TV로 테스트하는 경우 CH 6(82-88MHz)에 설정하고 미새조정 다이얼을 조절하면 된다. 다만 CATV-MID 대역을 지원하지 않는 구형 TV는 케이블 채널 확장기나 VCR을 연결하거나 CH 2, 3 또는 CH 3, 4에서 출력이 되는 희한한 경우도 있다.[26] 이것도 TV의 공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데 LG전자의 경우 유선 131, 132로 수출형 SONY는 유선 101, 102로 출력된다.[27] System-B/G,I,D-K,L[28] 이렇게만 보면 닌텐도와 샤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별 사건이 없었고 그저 당시 샤프가 게임 & 워치 제작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닌텐도는 샤프랑 잘 지냈고 2016년 샤프가 폭스콘에 인수되기 전까지 닌텐도 콘솔의 생산을 계속 맡았다.[29] 초기에는 NEC PC-8001을 사용했었는데, CPU가 자일로그 Z80이었던 탓에 MOS 테크놀로지 6502와 전혀 달라 디버깅을 하려면 일일이 EPROM을 구워 시험용 카트리지에 꽂아 실기에서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을 개발할 당시에는 프로그래밍 작업에 HP 64000이, 그래픽 작업에는 후지쯔 FM R-50 HD가 사용되었다.[30] 패미컴의 모델명(HVC-001)에 그 잔재가 남아 있다.[31] 버튼을 수직으로 누르는 게임 & 워치와 달리 TV 게임기는 버튼을 누르는 힘이 대각선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 힘을 견디는 원형 플라스틱 버튼으로 교체한다.[32] 남코의 나카무라 사장이 직접 "왜 우리는 패미컴에 게임을 내지 않는 것인가"라고 일갈하며 패미컴 해석의 지시를 내렸다고도 하지만 저것도 실제 당사자들이 증언한 내용이다.[33] 그 당시 동키콩에 대해 콜레코는 게임기용 라이선스를, 아타리는 가정용 컴퓨터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콜레코의 가정용 컴퓨터였던 콜레코 아담에 동키콩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아타리는 라이선스 계약 위반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34] 이후 '팩'이라는 명칭은 게임보이 어드밴스까지 사용되었고 다음세대인 DS부터는 카트리지의 근본적인 작동방식이 바뀌면서 '게임 카드'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DS한정으로, GBA 하위호환을 위해 하단에 마련된 슬롯2 에 장착되는 게임과 주변기기는 팩이라고 불렀다)[35] 닌텐도가 비디오 게임 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장난감 회사였던 것을 생각하면 초심으로 돌아간 셈이다.[36] 한 글자씩 읽어서 엔이에스라고도 하고, 그대로 읽어 네스라고 하기도 한다. 일단 닌텐도에서는 엔이에스라고 읽는다.[37] 대여전용으로 출시하지 않은 게임도 실제 수요에 비해 판매 유통량이 적었기 때문에 NES 게임은 전체적으로 중고 가격대가 높다. 일본은 케이스와 메뉴얼을 분실하면 중고 게임의 가격이 크게 내려가지만 미국은 카트리지만 있어도 상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다 있으면 더 비싼 건 마찬가지지만.[38] 몇십 년 전이니 동시대라고 대충 뭉개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에서 2~3년이면 반도체 집적도가 두배하고도 조금 더 늘어났을 시간이고, 드림캐스트에서 엑스박스로 넘어갔을 정도의 시간이다.[39] 제대로 된 성능을 구현한 건 MSX2부터이다.[40] AVGN에서 아타리 관련 영상을 보자. 패미컴과 비교하면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타리 5200과 패미컴으로 발매된 마리오브라더스의 그래픽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41] 이후 패미컴의 가격에 충격을 받아서 반다이에서 자사에서 수입하던 아카디아 2001을 50%나 할인한 9800엔에 판매했고, 에폭에서도 기존의 카세트비전을 기반으로 원가절감을 한 카세트비전 Jr을 5천 엔이라는 초특가에 발매하기는 했으나 결국 패미컴의 가성비 앞에서는...[42] 이 게임은 타카하시 명인이 허드슨 영업부 사원에게 아직도 패미컴 게임이 팔린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기획해서 만든 게임으로 쏠쏠하게 팔렸다는 후문이 있다.[43] 일본에서는 패미컴이 보급형 캐주얼 게임 콘솔 정도로 자리잡아 프리미엄급 슈퍼 패미컴과 다른 특성을 가진 다른 계열의 기종으로 이해되어 차별화되었던 반면에, 북미의 소비자들은 "닌텐도는 이미 보유중이니까" 라거나, "닌텐도를 얼마전에 사줬는데 무슨 닌텐도를 또 사달라는거냐" 라는 식으로 당시만해도 최고 브랜드의 인기기종을 대체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하였으며, 반대로 이는 기존 점유율이 없던 세가가 메가드라이브로 북미시장을 공략할 수 있게 되는 실마리가 된다.[44] 남코는 NAMCOT를 그 방식으로 사용했고, 이를 지켜본 코나미는 울트라 게임즈와 팔콤 소프트웨어(Palcom Software)(절대 Falcom이 아니다.)를 만들어 우회했다. 어클레임 엔터테인먼트는 LJN을 인수하기도 했다.[45] 특히 EA, 물론 트립 호킨스 성격 상 순순히 들어가지 않았고, EA는 제네시스를 해킹하는 데 성공해 그걸로 서드파티 라이선스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 세가에게서 최혜 대우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46]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세가 새턴에게 서드파티를 모두 뺏긴 이유로 닌텐도 64의 게임 수는 약 300개(…)이다.[47]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북미판 NES 등등[48] 사실 패미컴이 현역인 1980년대 중후반에 한국산 게임의 주된 하드웨어는 MSX였다. 한국에서의 패미컴 붐은 일본보다 약간 늦었기 때문에 이러한 게임들도 보통 1990년 앞뒤로 나온 것들이다.[49] 당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이었던 시절이었으며 닌텐도도 한국 시장에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게임 회사들이 닌텐도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기는 어려웠다.[50] 2003년이면 증손자 뻘인 게임큐브엑스박스까지 발매되고 2년 가까이 흐른 시기이다. 이는 2000년부터 2013년까지 생산되어 온 플레이스테이션 2보다도 월등히 길다![51] 사실 이쪽도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후속기인 SNES의 성장을 팀킬하고 있었다. 북미의 많은 부모님들은 SNES 구매를 요청하는 아이들에게 닌텐도는 이미 집에 있으니 안된다고 했다고(...).[52] 2007년의 '최신예'였던 엑스박스 360PS3, Wii는 보편적인 게임기 세대 구분법 보면 패미컴 이후 4세대 뒤의 기종이다. 참고로 초대 플레이스테이션도 AS 접수를 20년 동안 해왔다.[53] 기존 키라키라 스타 나이트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음악에...[54] 정식적인 라이선스를 받은 하드웨어가 아닌 불법 복제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55] 테이프에 소리로 0과 1을 기록하고 그걸 다시 들어서 읽는 방식이다.[56] 단, 북미에서는 출시 당시 많이 팔리지 않아 품귀가 심하다고 한다.[57] 파일:640px-Nintendo-Famicom-NES-Dogbone-Controller-FL.jpg
일명 Dogbone(개뼈다귀) 컨트롤러로, 슈퍼 패미컴의 것은 상부에 L/R 버튼이 있어서 아래 부분만 불룩하지만 도그본 컨트롤러에는 그런 것이 없기에 완전히 개뼈다귀 모양이다.
[58] 북미판과 유럽판은 모양은 같지만 국가코드 비슷한 것이 있어서 상대 게임을 실행할수 없지만, 탑로더는 둘다 실행이 가능했다.[59] 게임팩 버전[미] 북미판. 참고로 유럽판은 NES로 발매되지 않았다.[61] # 상세한 구동 설명은 여기[미] 북미판. 참고로 유럽판은 NES로 발매되지 않았다.[63] 일본에 있는 닌텐도의 R&D3에서 만들었으나 일본에 출시되지 않았다.[64] 북미, 유럽판[65] 일본에서는 전설의 기사 엘론드로 출시됐다.[66] 이 때문에 패미컴 팩 기판에 어댑터를 장착해서 발매한 NES 카트리지는 어댑터에 CIC칩이 장착되어있다.[일] 일본판[일] 일본판[일] 일본판[일] 일본판[일] 일본판[72] 야마하 YM2413 OPLL칩에 비해 3채널의 리듬 채널이 제거되었고, 악기 세트가 다르다.[일] 일본판[74] 다만 특정 개수 이상의 채널 및 샘플링을 사용하게 되면 음질 저하와 노이즈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일] 일본판[일] 일본판[77] 이 게임에만 3채널의 PSG 음원을 추가 지원하는 야마하 YM2149F 코어가 추가됐으며, 선소프트 5B칩이라고도 부른다. 참고로 야먀하 YM2149F는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AY-3-8910 PSG칩을 수정한 모델이나 기능은 거의 같다. 참고로 유일하게 야마하 YM2149F를 쓰는 Gimmick!에서도 사운드 칩 기능의 극히 일부분만 썼다. 그래서 정확도보다는 성능을 중요시 하는 일부 에뮬레이터에서는 야마하 YM2149F 기능의 일부분만 구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78] 정확히는 약간 작다.[79] 여담이지만 당시 홍콩은 영국령이었기에 영국과도 콘센트도 호환이 되었기에 영국 내수용도 고급 백화점에서 팔기도 했다.[80] 한국에서 1994년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책인 한호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주니어판을 보면 이런 '닌텐도=고유명사'인 세태가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게이머가 아니고 캐나다 이민자 1세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에 불과한 저자도 알고 있을 정도의 고유명사. "이것이 무엇인고? Nintendo에라도 연결해 쓰는 기계냐?"라는 서술의 주석으로 "닌텐도 = 게임기"라고 아예 적어놨다.[81] 롬은 영문판이라 NES로 나온다[82] 자이로 마이트와 스택업이 게임 내 타이틀명이 다른 이유가 이런 구조이기 때문이다. NES 카트리지의 플라스틱이 컨버터를 사용한 카트리지도 안전하게 고정할 수 있는 내부지지대가 있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도 출시할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