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가넷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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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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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득점 | 케빈 가넷 (Kevin Garnett) - 19201점 (1995~2007, 2015~2016) | |
최다 어시스트 | 케빈 가넷 (Kevin Garnett) - 4216개 (1995~2007, 2015~2016) | |
최다 리바운드 | 케빈 가넷 (Kevin Garnett) - 10718개 (1995~2007, 2015~2016) | |
최다 블락 | 케빈 가넷 (Kevin Garnett) - 1590개 (1995~2007, 2015~2016) | |
최다 스틸 | 케빈 가넷 (Kevin Garnett) - 1315개 (1995~2007, 2015~2016)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케빈 가넷 | |
헌액 연도 | 2020년 |
케빈 가넷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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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등번호 21번 | ||||||||||||||||||||||||||||||||||||||||||||||||||||||||||
스테이시 킹 (1994~1995) | → | 케빈 가넷 (1995~2007, 2015~2016) | → | 결번 | |||||||||||||||||||||||||||||||||||||||||||||||||||||||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5번 | |||||||||||||||||||||||||||||||||||||||||||||||||||||||||||
제럴드 그린 (2005~2007) | → | 케빈 가넷 (2007~2013) | → | 영구 결번 | |||||||||||||||||||||||||||||||||||||||||||||||||||||||
브루클린 네츠 등번호 2번 | |||||||||||||||||||||||||||||||||||||||||||||||||||||||||||
조쉬 칠드레스 (2012) | → | 케빈 가넷 (2013~2015) | → | 재럿 잭 (2015~2016) |
}}} ||
<colbgcolor=#008348><colcolor=#fff> 보스턴 셀틱스 No. 5 | |
케빈 모리스 가넷 Kevin Maurice Garnett | |
출생 | 1976년 5월 19일 ([age(1976-05-19)]세)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린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몰딘 고등학교 |
신장 | 211cm (6' 11")[1][2] |
체중 | 109kg (240 lbs)[3] |
윙스팬 | 229cm (7' 6") |
후원사 | 안타 스포츠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 센터[4] |
드래프트 | 199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지명 |
소속 팀 |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5~2007) 보스턴 셀틱스 (2007~2013) 브루클린 네츠 (2013~2015)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15~2016) |
등번호 | 10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21번 - 미네소타 5번 - 보스턴 2번 - 브루클린[5] |
SNS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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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6년 9월 23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2016년은 가넷과 오랫동안 리그를 누빈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이 한꺼번에 은퇴를 선언한 해가 되었다.[6] 이 셋은 2021년 5월 15일, 2020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헌액되었다.
2. 성장
케빈 가넷은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린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넷과 가넷의 어머니를 떠났고, 가넷의 어머니는 가넷이 12살때 재혼했다. Hillcrest 중학교를 거쳐 Mauldin 고등학교에 진학한 가넷은 사상 최초로 3학년[7]으로 주(州) MVP격인 Mr. Basketball에 선정되는 두각을 나타낸다.1993년에 그는 고등학교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한 나이키 농구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데, 여기는 미래의 NBA 올스타인 앤트완 재미슨도 있었다. 당시 그를 담당한 지도자는 시카고의 패러깃 아카데미의 감독 윌리엄 "울프" 넬슨이었는데, 처음엔 너무나 비쩍 마른 가넷을 보고 "장난하냐?"고 했다고 한다. 빅맨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조그만 녀석을 줬다고. 당시 가넷의 키는 208cm에 달했지만 몸무게는 90킬로그램을 조금 넘을 정도로 말라있었다. 여기서 넬슨은 가넷이 덩크를 하자 "뭐하는 거냐! 그건 기집애같은(sissy) 덩크"라면서 자신이 "짐승"이라는 걸 보여주라고 조언한다. 이때부터 가넷은 덩크나 블락을 한 뒤 고함을 지르고 가슴을 마구 두드리는 특유의 도발적인 스타일을 갖게 되며, "늑대왕"이라는 별명을 얻는데도 이 가넷 특유의 한마리 야수를 연상시키는 도발적이고 호전적인 스타일이 한몫했다.
그러나 3학년 말에 시련을 겪게 되는데, 학교 내 백인 학생과 흑인 학생 간의 패싸움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 부가 설명을 하자면 정확히는 백인 학생에게 흑인 학생들이 집단 괴롭힘, 구타를 가한 것이다. 초범이라 청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봉사 프로그램으로 가넷은 풀려나게 된다.
여담으로 덩치도 큰 가넷이 말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총기 허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폭력에 휘말리는 건 정말 위험하며 심해봤자 보통은 주먹싸움인 한국과는 달리 목숨이 걸린 일이다. 법적으로 총기 구매가 불가능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8] 한국에서 미성년이 합법적으로 술이나 담배를 구매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듯이 총이 아니더라도 칼이나 다른 흉기를 휴대하는 학생들도 많다. 미국에서는 커터칼을 "학용품"이 아닌 "흉기"로 분류해 학교 내 반입 금지 물품으로 취급하며, 만일 이런 문화를 모른채 교실에서 커터칼을 꺼내든다면 바로 교장실로 직행이다. 웬만큼 막장이 아니고서는 칼을 사용하지 않는 대한민국과 다르게 미국에선 흉기 사용 범죄가 상당히 흔하다. 어느 정도냐면 학교 주차장에서 차를 빼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을 쏘기도 하는 나라이기에... 미국 경찰들이 경고에 불응하면 바로 실탄이 장전된 총을 뽑아들 정도로 강경한 데는 이유가 있다.
후에 풀려난 가넷은 첫날 급식실에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핫도그가 날아오는 등 적대적으로 변해버린 학생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 셜리 가넷은 그와 여동생을 전학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나이키 캠프에서 친분을 갖게 된 넬슨 감독을 통해 시카고에 위치한 페러것 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가넷은 자신의 농구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평균 25.2점, 17.9리바운드, 6.7어시스트, 6.5블록슛의 활약을 펼친 것. 이를 발판으로 전미 고교농구선수의 올스타전 격인 McDonald's All-American Game[9]에서 18득점 11리바운드 4어시스트 3블록슛을 기록하면서 역시 전국구적인 관심을 얻게 된다. 고등학교에서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가넷은 1995년 NBA 드래프트 참가 신청을 내게 된다. 고졸 선수로서.[10]
그렇게 가넷은 1976년 데릴 도킨스 이후 20년만에 탄생한 고졸 NBA 선수가 되었는데, 재밌는 사실은 가넷은 원래 NBA로 직행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상술한대로 NBA는 20년 가까이 고졸 선수를 뽑지 않았으며 절친인 마버리를 포함해 모든 동기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지명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혼자 NBA 드래프트를 신청하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넷이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것. 미국 대학이 운동부에게는 일반 학생보다 훨씬 낮은 SAT 점수를 요구하지만, 이마저도 가넷은 점수를 맞추는데 실패했고[11] 결국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드래프트 당일 날에 그의 마지막 SAT 점수가 통보되었는데, 결국에는 커트라인을 간신히 통과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소식을 알려준 건 그의 은사인 울프 넬슨 감독이었는데, "야 인마 너 통과했어"란 말을 듣고 벙쪘다고...#
3. NBA 입문
워크아웃에서 보여준 엄청난 운동능력 덕분에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그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키만 본다면 빅맨이 어울렸으나, 당시에 100kg도 안되는 몸무게 때문에 파워 포워드를 보기엔 파워가 부족했다.그래서 실제로 그는 데뷔 초기에 스몰 포워드로 자주 출전하며 올스타까지 올랐다. 가넷은 전성기에 접어들던 00년대 초반까지도 스몰 포워드로도 많이 출장했으며, 198cm인 마이클 조던 같은 스윙맨과 경기 내내 매치업한 적도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파워 포워드와 스몰 포워드를 오갔고, 스몰 포워드로서도 스타였다. 다만 7피트 장신이란 그의 특성상 골밑에서 뛰는 게 훨씬 위력적이기 때문에 파워 포워드로 뛰게 한 것이다. 이는 당시 농구는 2010년 이후와 양상이 많이 달라 가능한 일이었다. 2020년처럼 3점이 필수는 아니라 코트를 지금보다 좁게 썼으며, 로우포스트 공략의 비중이 컸다. 즉 데뷔 당시 100kg이 되지 않았던 가넷이 로우포스트에서 계속해서 몸싸움을 하기엔 체력적으로 무리였고, 이 때문에 스몰포워드로 많이 뛴 것.[12] 이 때문에 당시 가넷의 공격스타일을 보면 초반에는 로우포스트에서 공략을 많이 하다가 후반에 힘이 빠지면 외곽으로 빠지는 걸 볼 수 있다. 가넷의 전성기 야투 성공률은 4할대 후반~5할대 초반이었는데, 체력이 남은 초반에 높은 성공률을 보이다가 경기 후반대에 많이 깎아먹는 경우가 많았다. 라이벌 팀 던컨과 달리 체격이 키에 비해 작아[13] 체력적 소모가 많았기에 나온 현상. 그가 "소프트하다"란 평을 받은 것도 당시 빅맨치고 로우포스트 공략 횟수가 적었이에 나온 것으로, 현대 기준이라면 그런 평가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가넷의 전성기까지만 해도 가넷 정도 슈팅범위 (3점슛 한발짝 이내)로 스몰포워드를 보는데 별 무리가 없었으며, 그의 전성기인 03-04시즌엔 월리 저비악의 부상으로 카셀-트렌튼 하셀-라트렐 스프리웰-가넷-마이클 올로워칸디의 라인업을 주로 돌렸는데 주전 중 외곽슈터가 하나도 없는 라이업이었은에도 서부1위를 했다.[14]
수비력 관해서도 스몰 포워드 가넷은 키에 비해선 사기적으로 빠르지만 너무 장신으로 인한 느린 사이드스텝 핸디캡을 탄탄한 기본기와 수비센스로 커버해야했던 좋은 수비수였다면, 파워 포워드 가넷은 리그를 평정하던 수준의 역대급 수비수였다. 당시 빅맨들은 로우포스트 1대1 대결이 기본이었는데, 현재처럼 빅맨들도 외곽에서 자유롭게 농구할 수 있었다면 포지션이 애매하단 소리도 안 들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한건 현재 트렌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선수가 가넷이지만, 애초에 그 트렌드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수도 바로 가넷이란 것. 즉, 빅맨이 맘대로 외곽과 내곽 모두를 돌아다녀도 효율적이고 위력적인 것이란 걸 본 NBA 관계자들이 이런 농구에 더 관대해진 것. 그보다 약간 선배인 크리스 웨버만 해도 센터를 시키려는 감독 돈 넬슨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고, 가넷만큼 다재다능하면서도 한번도 가넷처럼 실제 경기에서 포인트 가드를 본 적은 없다. 물론 이는 가넷과 달리 커리어 내내 확실한 포인트 가드들이 옆에 있던 덕이지만. (팀 하더웨이, 로드 스트릭랜드, 제이슨 윌리엄스, 마이크 비비, 앨런 아이버슨, 배런 데이비스 등)
거기다 그는 고졸이었다. NCAA는커녕 성인농구 경험이 전무한 풋내기로 수많은 전문가들은 그를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도박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에 대한 스카우팅이 이뤄지기 시작하자 평가는 달라졌고, 워크아웃에서 말도 안되는 운동능력과[15] 다재다능함을 보여준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해서 올라가게 된다.
당시 가넷을 스카우팅했던 Clarence Gaines가 95년 2월 18일에 남긴 평(http://cgscoutperspective.blogspot.com/2011/03/cgs-view-of-kg-kevin-garnett-when-he.html)을 보면 "올해 최고의 재능(the best prospect that I have seen this year)"이라며 "만약 95년 드래프트에 참가한다면, 우리 순번에 상관없이 뽑을 것"이라고 평했고, 최종적으로 게인스는 가넷을 1픽으로 예상했다.[16]
스카우터 크레그 심슨이란 사람이 남긴 스카우트 평(http://www.ibiblio.org/craig/draft/1995_draft/scout/pf.html)을 보면, "가넷은 매우 빠르고 손이 굉장히 좋고(볼캐칭능력이 좋다는 소리) 손끝 감각이 부드럽다. 또한 그는 굉장한 패스인데 빌 월튼과 비견될 정도이며, 매우 뛰어난 볼핸들링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심슨은 이어 "드래프트에서 언제 뽑힐지는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 1라운드 후반에 뽑힐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USA Today의 전문가 피트 서터 주니어는 '그의 성장을 기다려줄 수 있는 토론토나 밴쿠버에 딱이다'라며 6,7번으로 예상했다"는 말을 남겼다.
어쩄거나 가넷의 예상순위는 비록 불확실성 때문에 널뛰기 하긴 했지만 아무리 최악으로 봐도 1라운드 지명은 확실했고, 팀에 따라 톱10이나 톱5 안쪽도 가능하다고 예상되었다는 것.
래리 버드와 함께 보스턴 셀틱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파워 포워드 출신이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사장이었던 케빈 맥헤일은 가넷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고, 그를 전체 5순위로 지명하게 된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맥헤일의 결정을 "저런 뼈다귀밖에 안남은 해골을 데려다 뭐 어떻게 할 거냐?"라며 비웃었으나, 맥헤일은 "저 아이는 슈퍼스타가 될 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라며 쿨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그 맥헤일의 장담은 현실이 되었다.[17]
재미있는 점은, 당시의 가넷은 전성기 때의 맥헤일과 키가 비슷한데다가[18] 플레이 스타일도 맥헤일과 많이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 자신이 선수 시절 파워 포워드를 볼 때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가넷은 맥헤일의 선수시절 영광의 팀이었던 보스턴 셀틱스에서 우승을 일궈냈다. 맥헤일과 차이점이라면 준득점왕급이었던 래리 버드의 존재 때문에 더블팀에 별로 시달리지 않았고, 버드가 떠먹여주는 패스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득점할 수 있었던 맥헤일과 달리 가넷은 미네소타 시절 내내 집중 수비에 시달려야 했던 것. 이 때문에 가넷은 미네소타 시절 야투율이 높지 않으며, 체력 부담으로 인해 수준급 로우포스트 기술을 보유했음에도 점퍼 비중이 높았다. 03-04시즌에 (미네소타 시절 중) 가장 득점력이 높은 동료들과 함께 했을 때 생애 최고의 활약과 커리어하이 득점을 올린 것에서 보듯, 가넷은 공격권을 몰빵해야 하는 선수가 아니라 공격이 분산되면 오히려 더 좋은 활약을 하고, 남은 체력을 수비와 리바운드에 쏟아부을 때 가장 효율이 좋은 선수였다. 애초에 가넷의 진가는 공격이 아니라 그의 수비력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여담으로 가넷이 참가했던 95년 드래프트는 탑급 유망주들이 모두 저학년으로 당시 역대급으로 어린 드래프트로 주목받았었다. 실제로 95년 톱5 픽을 살펴보면 2학년 네명에 고졸 한명(가넷)이다. 바로 직전 94년 드래프트의 경우 2학년 한명 (제이슨 키드), 3학년 세명(도넬 마셜, 주완 하워드, 글렌 로빈슨), 4학년 한명(그랜트 힐)이었고, 93년 드래프트는 톱5 중 저학년이 세명이었지만 이 중 하나는 1학년을 마치고 2년간 선교활동을 떠났던 숀 브래들리와 다른 하나는 주니어 컬리지에서 2년을 뛰고 NCAA에서 2년을 뛴 아이재아 라이더였다.(나머지 두명은 3학년 자말 매쉬번과 페니 하더웨이) 그 전 92년 드래프트는 톱5픽 중 세명이 4학년, 두명이 3학년이었다. 90년대는 아직까지도 최상위권으론 3,4학년이 주로 뽑히던 시절이었고, 1,2학년 저학년들은 도박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93년 1순위 지명자 크리스 웨버는 79년 매직 존슨 이후 처음으로 1순위로 뽑힌 저학년 선수였다. 그만큼 95년 드래프트는 당시로선 최고급 유망주들이 상당히 어린 드래프트였던 것이다.
4. 커리어
4.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우여곡절 끝에 NBA에 데뷔했으나, 프로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빌 블레어는 아직 덜익은 가넷을 중용하지 않았고 당시 팀 에이스였던 크리스찬 레이트너가 가넷의 플레이를 비난하는 고난도 있었다. 팀의 포워드 자리에는 크리스찬 레이트너와 톰 구글리오타가 자리잡고 있었고, 아직 어린 가넷은 그들보다 분명히 기량 면에서 밀렸다. 한 때 세 사람을 동시에 코트에 세우기 위해, 가넷이 선발 센터로 출장한 경기도 있다.
그러자 맥헤일은 빌 블레어를 해고하고,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크리스찬 레이트너를 애틀랜타 호크스로 보내버리면서 가넷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감독도 자신의 친구이자 가넷과 호흡이 잘 맞는 플립 손더스로 교체했을 정도. 루키 시즌인데다 기본기가 부족했던 고교생이었지만 가넷은 33득점을 득점하기도 하는 등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레이트너가 떠나고 가넷이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구단은 가넷의 출장시간을 30분 이하로 철저하게 관리하며 배려했다. 주전 파워 포워드로 자리잡은 이후의 성적만 치면, 평균 14점 8리바운드 정도를 기록.
1996-97 시즌을 맞이하면서 팀은 아웃사이드에서 가넷을 보조할 공격형 루키 가드 스테판 마버리를 영입하면서 가넷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기존의 톰 구글리오타도 건재했고, 가넷은 루키시즌보다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 첫 올스타전에 출전한다.[19] 팀 역시 창단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물론 1라운드 상대가 하킴 올라주원, 찰스 바클리, 클라이드 드렉슬러 등이 버티는 휴스턴 로키츠인 탓에 3전 전패로 광속 탈락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팀 성적이 올랐고 미래가 기대되는 팀 이었다. 가넷은 이 시즌에서 하킴 올라주원을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제치고 덩크를 꽂았고 찰스 바클리를 높이에서 압도했으며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미스매치에서도 밀리지 않고 수비를 해냈다. 파워 포워드로 정착한 이후에도 꾸준히 20득점-10리바운드 이상을 해냈고 경력이 쌓이면서 5개 이상의 어시스트도 꾸준히 해낼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가넷의 성장은 멈출 줄 몰랐다. 꾸준히 자신의 개인기록과 기량을 향상시켜 나가면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플레이오프에 이끌었다. 그러나 팀은 매번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에 머물렀다. 1998-99 시즌에 팀은 25승,[20] 본인은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처음 달성했고 올 NBA 서드팀에도 들게 되었는데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그 해 챔피언었던 팀 던컨의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단 1승만을 거두며 탈락했다. 1999-00 시즌 때엔 처음으로 올 NBA 퍼스트팀에 들고 정규 시즌 성적을 50승까지 끌어올리는 등 물이 오른 경기력을 보였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게 1승 3패로 무너졌다.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선 디르크 노비츠키의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1승도 못 거두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주전가드였던 천시 빌럽스의 말론 노비츠키에게 가넷이 그야말로 박살이 났었다고...
이러한 저조한 성적은 가넷을 보좌할 만한 파트너의 부재, 그리고 가넷의 가능성만 믿고 루키 계약이 끝나자마자 97년도 오프시즌에 가넷에게 안긴 천문학적인 연봉이(6년 1억25백만 달러)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전력보강에 방해가 된 탓이 컸다.[21]
부가 설명을 좀 더 하면, 원래 샐러리캡이란 것은 농구관련 수익 (basketball related income:BRI)의 일부로서 정해진다. 매년 선수협상은 이 BRI에서 샐캡이 차지하는 비중을 늘이냐, 줄이냐를 두고 구단주 측과 선수협회가 씨름하는 것. 그런데 90년대 초반에 NBA가 새로운 중계권 계약을 하고, 그 기간에 마이클 조던을 필두로 한 NBA의 황금기가 이어지면서 수익이 80년대와 비교도 안되게 늘어버린다. 80년대 후반 당시만 해도 거액 계약이던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등의 장기 계약이 "노예 계약"이 된 건 이 때문. 이에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같은 스타들은 연간 천만불 이상의 장기 계약을 뻥뻥 터뜨린다. 근데 문제는 이 분위기를 타 젊은 선수들이 거액의 계약을 요구하는 트렌드가 생겨난 것. 94년에 전체 1순위로 데뷔한 글렌 로빈슨은 신인 주제에 1억불 계약을 요구했고, 데뷔가 늦어질 뻔했다. [22]. 96시즌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워싱턴 불리츠(현 위저즈)의 2년차 선수 주완 하워드는 무려 7년 1억 5백만불이라는, 오닐/모닝의 계약에 약간 모자라는 금액을 따내고야 만다. 이 와중에 하워드보다 더 큰 기대치를 받고 있고, 팀 사정이 더 절박했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가넷은 큰 금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 [23]
당시 가넷의 에이전트는 가넷을 휴가 보내놓고 협상을 전담했는데, 이에 케빈 맥헤일은 친분이 있는 가넷에게 호소할 틈도 없이 에이전트와 치킨게임을 해야했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측은 주완 하워드가 받은 것과 비슷한 1억달러를 제시했으나, 아쉬울게 없는 에이전트는 계속 튕겼고 결국 1억2천5백만이라는 전대미문의 금액까지 오른 것이다. 문제는 하워드의 계약이 가넷의 계약에 "기준"이 된 것처럼, 가넷의 계약 역시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 거대계약이 이어질 것이 뻔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계약 상한액이 없었기 때문에 마이클 조던이 3천만 달러라는, 샐러리캡 전체보다 큰 금액에 계약할 수 있었다. [24]. 게다가 하워드와 가넷 이후 잠재력이 큰 어린 선수들이 "나도 저만큼 달라"고 할 건덕지가 생겨버린 것이다. 밑에 언급될 마버리라든지...이에 구단주 측은 연차별 맥시멈 계약 및 신인계약 액수에 상한을 두자고 주장했고, 선수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직장폐쇄가 일어나고 만다. 결국 아무래도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선수 측에서 대부분 구단주의 입장을 수용하게 된다. 즉, 가넷의 계약 하나 때문에 직장폐쇄가 일어난게 아니라, 선수들의 연봉이 점점 뻥튀기되는 과정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하워드는 이후 우주 먹튀(...)가 되지만 그래도 가넷은 돈값을 충분히해줬다.
참고로 연봉 규정은 문제가 있다고 바로 개정되는 게 아니라 몇년에 한번씩 선수노조-구단주 측이 단체협약(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수정이 된다. 가넷이 계약한 1997년 다음해에 CBA 협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넷의 케이스가 자주 언급이 되는 것인데, 만약 몇년 후에 CBA 협상이 있었다면 위에 언급된 트렌드를 타고 또 다른 젊은 선수가 더 큰 규모의 계약건을 터뜨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빅마켓에 구단주 제리 버스가 돈 쓰는 걸 주저하지 않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코비 브라이언트라든지, 또한 FA대란으로 알려졌던 2000년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그랜트 힐이라든지.
그러다보니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정상적인 전력보강이 매우 어려웠다.[25] 구단의 흑역사이자 NBA의 흑역사중 하나인 "조 스미스 부정 계약 파문"도 이 시기의 일. 이 때문에 2006년 라샤드 맥캔츠를 지명할 때까지 5년간 1라운드 지명권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26]
이중계약에 의한 드래프트 지명권 박탈로 신인 선수 영입에 실패, 스몰마켓의 한계, 선수 1명에게 샐러리가 집중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결국 아래 2003/04 시즌을 제외하고 매번 1라운드 탈락과 플레이오프 진출마저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크리스 웨버, 팀 던컨, 디르크 노비츠키는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나가서 최소 서부준결승 이상 진출했고 20대 중후반 신체적 최전성기 나이에서 결과적으로 가넷은 자신의 연봉과 팀성적을 등가 교환하고 말았는데 이는 구단측 무능한 일처리와 협상력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가넷 에이전트의 지나친 요구였다. 아직 어린 가넷 역시 미래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않고 덜컥 연봉 총액 1억 달러 이상의 계약에 싸인 한 것도 자신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스포트라이트 큰 돈, 에이스 자리를 받고 싶어하는 스테판 마버리는 뉴저지 네츠로 떠났고 본격적인 서고동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가넷이 북치고 장구쳐도 개인 성적만 압도적이지 결국 서부 6~8위 였고 당시 서부 선두권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새크라멘토 킹스, 댈러스 매버릭스 등 인것을 감안하면 그 어떤 팀을 만나도 시리즈를 이길 여력 따위는 없었다.
다만 당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성적이 가넷을 탓할 문제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 선수에게 많은 연봉이 제시되었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건 전혀 비판할 거리가 아니다. 구단의 사정을 생각해 연봉을 줄이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라도, 이게 당연시되는 건 절대 아니다. 게다가 언제 부상으로 선수생활이 끝날지 모르는 프로선수들은 젊었을 때 최대한 많이 벌어들이는 게 당연한 일이다. 팀 던컨이나 디르크 노비츠키 등 페이컷으로 유명한 선수들도 젊었을 때는 최대치 연봉을 받다가 노년에 페이컷을 했다. 당시 가넷은 르브론처럼 광고계약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들이는 선수도 아니었는데 최대한 연봉을 많이 받고자 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 결정적으로 이 항목을 보면 마치 가넷 한 명 때문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돈을 못 썼던 것처럼 나와있는데, 애초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팀연봉 순위가 2001년에는 리그 20위, 2002년에는 10위에 그칠 정도로 투자를 안 하는 걸로 악명이 높은 팀이다. 2001년의 경우를 보면 가넷보다 1백만 달러 적게 받던 샤킬 오닐은 당시만 해도 거액인 천만달러를 받던 코비 브라이언트가 옆에 있었고, 미네소타 못지 않게 작은 마켓인 밀워키 벅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인디애나 페이서스, 유타 재즈, 피닉스 선즈 등 모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보다 돈을 많이 쓰던 팀이었다. 게다가 덴버 너기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밴쿠버 그리즐리스, 워싱턴 위저즈 등은 모두 미네소타보다 더 쓰는데도 팀 성적이 안 좋은 팀이었다.
- 밑에 언급되지만 미네소타가 화끈한 투자를 한 거의 유일한 해인 2003-04시즌에는 팀성적이 잘 나왔다. 이때 가넷의 곁에 라트렐 스프리웰, 샘 카셀이라는 좋은 동료들을 붙혀주었기에 팀이 서부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이때 가넷이 받은 연봉은 2천 8백만 달러로 커리어 최고였다. 즉, 가넷이 많이 받아도 충분히 좋은 조력자들을 맘만 먹으면 붙혀줄 수 있었다는 말이다.
- 반론: 하지만 이런 조력자들이 매번 이적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샘 카셀과 라트렐 스프리웰은 단순 조력자가 아니라 올스타급 선수들이다. 이정도 선수들은 영입하려면 결국 그에 맞는 연봉을 지불해야 한다. 물론 미네소타가 스몰마켓이고 프런트가 무능한 것도 있겠지만 결국 이유가 어찌되었든 가넷의 연봉이 팀 전력을 막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전력은 당연히 강해질 수 없었다. 샘 카셀은 올스타 선정이 1회이지만 뉴저즈 네츠, 밀워키 벅스에서 이미 준올스타 선수였다. 뉴저지 네츠와 밀워키 벅스 시절 평균 18점이상, 8개 이상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선수를 올스타 여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득점효율도 좋았고 리딩능력도 수준급. 무엇보다 카셀 합류 이후 뉴저지 네츠와 밀워키 벅스 팀 성적 자체가 플레이오프권으로 올랐다. 신인시절인 로케츠에서도 강심장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핵심멤버로 2회 연속 우승 타이틀도 무시할 수 없는 타이틀. 이적 전 시즌인 02-03 시즌 PG 선수들(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시, 게리 페이튼, 배런 데이비스, 마이크 비비, 천시 빌럽스, 스티브 프랜시스, 스테판 마버리, 존 스탁턴, 토니 파커)이 있는데 당시 카셀은 충분히 저 선수들과 함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경우로 마이크 비비 역시 밀레니엄 킹스를 이끈 대표 선수였음에도 올스타 선정은 0회 이지만 그 누구도 비비의 기량에 반문하는 사람들이 없다.
- 재반론: 샘 카셀은 2003 시즌까지 한번도 올스타에 선정된 적이 없는 선수고, 라트렐 스프리웰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합류 당시 전성기가 한참 지난 만 33세 노장이었다. 카셀과 스프리웰이 좋은 선수란 걸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두 선수는 좋은 조력자였지 슈퍼스타는 결코 아니었다. 앞 문단에서는 카셀의 선수이력을 늘어놓았는데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합류 당시 그는 35세였다. 그리고 카셀이 준올스타급 선수였다는 건 맞지만 그는 선수생활 내내 팀의 중심이었던 적은 없이 밀워키 벅스 빅3의 3옵션이었던게 팀에서 비중이 가장 큰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급의 선수들은 매년 이적시장에 나오는 게 맞다. 포인트는 저 정도 급 (매우 좋은 선수지만 슈퍼스타는 아닌) 선수들이 몇년에 한번씩 수급할 수 있는 수준의 선수냐는 것이다. 또한 위의 서술은 가넷의 연봉이 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유일한 이유가 아니란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 근본적으로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란 팀이 다른 강팀에 비해 투자를 많이 하지 않고,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하는 등 프런트의 능력이 모자라는 게 원인이지 가넷 한 명의 계약 때문에 발전이 없었다고 보긴 힘든 것이다. 결정적으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가넷이 떠난 이후 1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까놓고 얘기하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2018-19시즌 종료 기준으로 30년이란 역사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는 총 9회, 그것도 가넷 없이 진출한 적은 단 한번 뿐이다. 가넷을 드래프트하기 전에 6년동안 바닥을 기어다니다가,[27] 가넷이 드래프트 된 이듬해부터 황금기를 달렸고, 가넷이 떠나고 나서 13년동안 루징 시즌을 보내고 2018시즌에 딱 한번 플레이오프 진출, 2018-19시즌엔 다시 36승 46패로 서부 11위에 그쳤다. 가넷이 재적하던 95~07, 12시즌을 제외하고 보면 18년동안 딱 한번 서부 막차로 플레이오프 진출한 것이다. 같이 1989년에 창단한 올랜도 매직, 샬럿 호네츠, 마이애미 히트 중 가장 플레이오프 진출이 늦었다. (올랜도는 93-94, 샬럿은 92-93, 마이애미는 91-92시즌) 게다가 올랜도는 샤킬 오닐-앤퍼니 하더웨이 시절 이후 드와이트 하워드 시절에 파이널까지 오르고, 샬럿은 초기 래리 존슨-알론조 모닝 시절 이후 글렌 라이스 시절, 2010년대에 세 번 플레이오프 진출, 마이애미는 글렌 라이스-스티브 스미스 이후 알론조 모닝/팀 하더웨이 시절 이후 빅3 시절까지 여러 차례 다른 코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거나 전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가넷 시절 이후론 지미 버틀러/칼앤서니 타운스/앤드류 위긴스를 코어로 해서 딱 한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게 끝이다. 무엇보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가넷을 제외하면 18년동안 위닝시즌이 딱 한 번[28]이다. 이건 무슨 잣대를 두고 봐도 팀운영이 개판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막장 프런트가 운 좋게 가넷이란 역대급 선수를 뽑아 짧은 황금기를 누리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03-2004시즌 팀이 과감한 트레이드를 통해
...는 개뿔. 샘 카셀과 라트렐 스프리웰이 연봉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겪으며, 태업이 의심될 만한 플레이를 일삼기 시작했다. 여기에 라트렐 스프리웰의 경우 "난 먹여 살릴 가족이 있으니 돈 더 내놔 숑키들야!"라는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을 해, 구단 분위기를 망쳐놨다. 2004-05 시즌에 무려 천4백만달러나 받고 기량도 하락세인 인간이 저런 헛소리를 했으니(...)
그러나 이는 헛소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미국 흑인 사회 내부의 고질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먹여살릴 가족이란, 실제로 그의 가족뿐 아니라 그에게 빌붙은 일가친척 전부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그의 주변에 붙어있던 흑인 갱단들이다. 한마디로 패밀리. 빈곤한 미국의 흑인사회에서 NBA 선수란 능력만 있으면 가장 손쉽게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 흑인 갱단들은 일찌감치 농구에 재능이 있는 흑인 어린이에게 들러붙어 보호해주겠단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고, 진짜 NBA 스타가 되면 더 뜯어낸다. 스프리웰 외에도 앨런 아이버슨, 에디 커리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흑인 스타들의 뒤에는 드러나있진 않지만 그들의 돈과 유명세를 이용해 이득을 뺏어가는 갱단들이 연계되어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스프리웰의 실력을 생각하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제시한 금액이 과다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네소타는 3년 2천 7백만 달러를 제시했는데 스프리웰이 당시 34세란 점과 이때 시세 (마누 지노빌리보다 계약기간은 짧았지만 평균 연봉은 약간 많았다)를 생각하면 이것도 후한 대우였다.
이 때문에 가넷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올스타전 주간에 인터뷰에서 가넷은 울음을 터트리며 "농구는 팀 스포츠다. 아무리 내가 잘한다고 해도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며, 원맨킴의 한계를 본인이 직접 실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넷이 신임했던 플립 손더스 감독을 구단이 해임해버리자 팀에 불만도 높아졌다. 04-05 시즌 결국,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05-06시즌, 06-07시즌 역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그동안 트레이드나 자유계약 선수 영입 등, 구단도 나름 노력은 했으나 가넷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면책성 용의 영입이 많았다.[29]
가넷은 08~09시즌까지 계약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지지부진하던 세 시즌동안 계속해서 트레이드 루머가 나왔고 마지막 두 시즌 동안은 리그 전체가 떠들썩거리는 상황이었다. 매직 존슨의 경우 TV에서 대놓고, "넌 할 만큼 했어. 케빈. 이제 떠날 때가 됐어."라고 할 정도. 매직 존슨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역대급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팀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던 선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단 걸 생각하면 그만큼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답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가넷은 2007시즌 전까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트레이드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만큼 팀에 애정도 깊고 책임감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년이 되자 가넷도 한계를 느꼈는지 트레이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미네소타 역시 변화를 원하면서 그가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그를 원하는 팀은 시카고 불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피닉스 선즈, 보스턴 셀틱스 등 다양했다.
보스턴 셀틱스의 경우 가넷이 대놓고 가기를 거부했다. "만약 나를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하면 옵션을 사용해 자유계약 선수가 되겠다."라고 했을 정도. 당시 보스턴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 팀이 답없는 상황에서도 트레이드 요구 하나없이 3년 동안 충성을 바치고 혼자 개고생하다가 드디어 포기하고 이적하려는데, 미네소타와 동급일 수준의 리그 꼴찌팀으로 보내려고 하니 빡돌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보스턴이 만렙슈터 레이 앨런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미네소타와 보스턴간의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가넷의 샐러리를 맞추기 위해서 보스턴은 다섯 명의 선수[30]와 현금, 그리고 1라운드 지명권까지 내주었다. 이로써 보스턴 셀틱스에게 NBA 게임에서나 볼 법한 사기라인업, 역대 최강 토론에 항상 올라오는 Big 3가 탄생한 것이다.
4.2. 보스턴 셀틱스
보스턴 빅3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도 전보다 정적으로 변했지만 가넷의 실력은 변함없었다. 보스턴 셀틱스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스코어러 중 하나이자 리그 최고의 해결사로 평가받던 선수인 폴 피어스, 그리고 스테판 커리가 그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 3점 기록 보유자이던 NBA 역사상 최고의 슈터 중 하나인 레이 앨런이라는 훌륭한 원투펀치 득점원이 있었고, 포인트 가드 자리에는 켄터키 대학의 떠오르는 괴물신예 라존 론도가 있었다. 또한 잘 짜여진 수비 전술 중심의 감독인 닥 리버스, 그리고 팀 디펜스에 있어서는 NBA 최고로 인정받는 천재 수비 코치 톰 티보도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넷은 이적후 자신의 장점인 수비를 극대화 시키는 수비형 빅맨으로 변신을 시도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공격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 보스턴 시절에 '올해의 수비수' 상을 탄 것과 우승했다는 사실 때문에 가넷의 수비력이 미네소타 시절보다 보스턴 시절에 더 뛰어났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미네소타 시절에 이미 가넷은 벤 월러스, 팀 던컨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빅맨 수비수 중 하나였으며, 이때가 가넷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당시 월러스가 최전성기로 매해 압도적인 수비 퍼포먼스를 보낸 것 때문에 공격에서도 팀 내에서 큰 부담을 져야했던 던컨과 가넷이 밀린 것. 보스턴 첫 시즌 당시 만 31-32세였던 당시 가넷은 05시즌을 기점으로 고질적인 문제가 된 무릎과 누적된 마일리지로 이미 최전성기 당시의 기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05시즌을 기점으로 공격에서 포스트플레이를 많이 포기하고 점프슛에 점점 더 의지하고 있었으며 [31]5시즌이나 공격리바운드 평균 3개를 찍었던 모습이 무색하게 공리 수치가 점점 떨어진다. 가넷은 탄탄한 기본기, 큰 신장과 긴 팔, 뛰어난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한 전방위 수비를 보이는 선수인데 운동능력 저하로 인해 그의 수비범위가 미네소타 시절보다 다소 좁아졌으며, 가장 큰 문제는 수비 리바운드 능력이 저하됨에 따라 보스턴은 상대팀에게 공격 리바운드를 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미네소타 시절 가넷은 4연속 리바운드왕 이었으며 역대 최강의 수비 리바운더 중 하나였다. 앞선까지 나서서 헬프 수비를 하다가 재빨리 골밑으로 돌아가 박스아웃을 해 수비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미친 기동력 때문에 이게 가능했는데, 발이 늦어지니 이전보다 골밑을 수호하는 (rim protection) 능력이 떨어진 것. 이 때문에 블락 수치가 미네소타 시절보다 많이 낮다. 정리하자면 미네소타 시절과 수비기술 자체는 동일했으나 떨어지는 기동력과 체력으로 인해 그때의 위력보다는 살짝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물론 이를 커버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대로 득점을 상당히 포기하고 수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음과 이제까지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한 정확한 위치선정, 그리고 전혀 녹슬지 않은 볼에 대한 집중력과 밀리지 않는 패기로서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위용을 보이며 많은 슈퍼스타들을 골밑에서 좌절시켰다.[32]
가넷은 건재한 수비능력으로 보스턴 골밑을 지켰고, 캔드릭 퍼킨스, 리온 포우, 글렌 데이비스 등과 같은 젊고 몸싸움 강한 거친 빅맨들을 잘
07-08 시즌에 그는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의외로 1라운드부터 애틀랜타 호크스를 상대로 7차전 접전까지 갔고, 당시 르브론이 버티고 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면서 많은 팬들이 걱정했으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결승전에서는 그전 매번 그를 플레이오프에서 좌절시킨 적 있는, 거의 천적 수준으로 생각되던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티고 있던LA 레이커스를 4승 2패로 물리치는데 크게 일조하면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가넷은 너무 기쁜나머지 울음을 터트렸다. 이전의 말그대로 몸을 깎아내면서 뛰는데도 저조한 팀 성적과 원맨팀의 부담감으로 인해 흘리는 참담한 눈물이 아닌 드디어 오랜 세월의 한을 푼것에 대한 기쁨에 겨워 흘린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승후 곧바로한 인터뷰에서 가장 팬들 마음속에 강렬하게 새겨진 한마디를, 우승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며, 온 경기장이 들을 정도로 속 깊숙이서 터져나오듯이 하며 그간의 응어리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Anything is Possible!!"[33] 파이널 MVP는 폴 피어스에게 돌아간 2인자로서의 우승이었지만 농구 인생 가장 원했던걸 수년에 걸친 피나는 노력과 헌신 끝에 간신히 얻은 가넷에게 그런건 신경쓸만한게 되지 않았고, 팬들과 가넷은 모두 감격에 겨워했다.
08-09 시즌에도 2연패를 위해 시동을 걸었으나 시즌 도중 큰 부상을 당했고, 때문에 데뷔 이래 가장 많은 경기를 결장하며 가장 중요한 플레이오프에도 뛰질 못했다. 결국 보스턴은 2라운드에서 괴물 센터 드와이트 하워드가 버티고 있던 올랜도 매직에게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09-10 시즌 가넷은 건강하게 돌아와서 자기 몫은 했지만 팀 성적은 지난 두 시즌에 비해 너무 떨어졌다. 많은 팬들은 보스턴의 Big 3도 이제 약빨이 다된 거 아니냐?"라는 우려를 보였으나, 바로 플레이오프에서 마이애미 히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올랜도 매직을 격파하고 파이널에 올랐다. 상대는 2년전 자신들이 꺾었던 LA 레이커스. 전통의 라이벌 답게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이었으나, 결국 7차전을 내주고 우승에는 실패했다.
10-11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2라운드에서 르브론 제임스 - 드웨인 웨이드 - 크리스 보시의 Big 3를 구성한 마이애미 히트에게, 빅3의 신-구 대결에서 이제 리그를 대표하는 수준으로 올라온 이 세 후배들에게 1승 4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하고, 사실상의 세대교체를 알린다.
11-12 시즌 또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1라운드 애틀랜타 호크스를 4-2로, 2라운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4-3으로 꺾고 컨퍼러스 파이널에 진출하였는데 또 다시 Big 3가 이끌던 마이애미 히트에게 7차전 접전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4.2.1. 08년 플레이오프
가넷의 08년 플레이오프에서 활약과 파이널 MVP 관련해 여러 갑론을박이 있는데, 결론적으로는 플레이오프 전체적으로는 가넷이, 파이널에선 피어스가 보스턴 최고의 선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08플레이오프 통틀어 가넷은 팀내 득점 1위, 리바운드 1위, 어시스트 3위, 블럭 2위, 스틸 2위였으며, PER, 윈쉐어, OBPM, DBPM, VORP 등 각종 부문에서도 팀내 1위를 쓸어담았다. 그러나 파이널에서는 가넷의 평득이 18점, 피어스가 21점이었으니 어쨌건 그 차이가 적지는 않았고, 부상당했음에도 돌아와 맹활약을 펼친 피어스의 투혼은 수치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가로 피어스가 득점만 잘 한 게 아니라 상대팀 1옵션인 코비를 상대로 기대 이상의 호수비를 펼친 것도 생각해야 한다.(그렇다고 코비의 전담 매치업 수비는 아니었다. )
당 시즌 정규리그를 보나 플레이오프를 보나 가넷이 피어스보다 클래스 자체는 더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어스의 파이널 MVP 수상이 81년도 세드릭 맥스웰(BOS), 14년도 카와이 레너드(SAS), 15년도 안드레 이궈달라(GSW)의 파엠 수상과 결이 같다고 보면 곤란하다. 피어스의 경우 엄연히 가넷과 원투펀치에 해당되는 위치였지만, 위 세 선수는 말 그대로 '파이널에 한해서' 팀 내 1~2옵션의 임팩트를 제치고 X팩터로 활약한, 단적으로 말해 단일 시리즈 한정으로 반짝 큰 활약을 펼친 덕에 수상을 가져간 케이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맥스웰은 보스턴에서 버드는커녕 패리쉬나 아치볼드와 비교해도 살짝 밑도는 위치였고, 카와이의 경우 우승 직후 슈퍼스타로 성장하긴 하나 그 당시만 놓고 보면 샌안은 해결사 지노빌리의 기량이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던컨과 파커가 여전히 원투펀치로서 팀을 이끌어나가는 중이었다. 이궈달라 역시 커탐그라는 확실한 빅3를 가진 워리어스의 준주전 식스맨 정도의 위치. 반면 피어스는 당시에도 All-NBA Team에 선정된 선수였고, 시즌 및 플옵 전체로 본다면 총체적인 기여도는 가넷에게 밀릴지 몰라도 경기 단위, 시리즈 단위로는 가넷에 필적하거나 능가할 저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가넷이 08 파이널 5차전에서 클러치타임에 심각하게 부진했던 것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인데, 당시 가넷은 폴 피어스와 샘 카셀이 만들어낸 추격 분위기에서 야투 0/2, 코비와 가솔에게 나란히 스틸당해 2턴오버를 범했고 이후 자유투를 4개 시도해 한 개만 성공하는 삽질을 한 바 있다. 단, 그렇다고 가넷이 파이널 내내 삽을 푼 것처럼 오해하지도 말자. 가넷은 1차전부터 6차전까지 매경기 톱리바운더였으며, 코비가 피어스의 호수비로 인해 정규시즌보다 못한 득점스탯을 올린 것처럼 정규시즌 18.9점을 올렸던 가솔을 14.7점으로 제한한 것도 가넷이다. 또한 피어스는 피어스대로 3차전에서 야투 2/14를 기록하며 6득점에 그친 바 있으니 단일경기 부진한 것 정도로는 서로가 서로를 나무라기 어렵다.
별개로 08년도 파엠 하면 피어스와 가넷 위주로만 언급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빅3의 또다른 일각인 레이 알렌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레이 알렌의 평균기록은 20.33득점, 야투 50.68%, 3점 52.38%, 자유투 86.67%, 4.67리바, 2.5어시, 1.33스틸, 0.67블락, 1.83턴오버로 상당한 수준이었고, 가넷과 피어스보다 높은 수치를 낸 2차 스탯도 여럿 있었다. 종합 게임 스코어(GmSc) 역시 알렌 16.7, 피어스 15.6, 가넷 14.6로 알렌이 1위. 물론 비교적 근소한 차이에 그친 만큼 셋 다 잘 한 경기가 못 한 경기보다 많은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파이널에서 가넷이 알렌이나 피어스에 밀린 것은 맞지만, 1,2,3라운드에서 가넷은 파이널에서 밀린 것보다 월등히 높은 격차로 저 둘보다 잘했었다. 1라운드에서 가넷은 평균 21점 8.9리바운드/게임스코어 18.1을 기록하며 평균 18점/게임스코어 13을 기록한 피어스, 16.1점/게임스코어 11.3점을 기록한 알렌에 크게 앞섰으며, 2라운드에선 가넷이 게임스코어 17.6을 기록하는 동안 피어스는 11.4, 알렌은 5.8에 그쳤다. 피스톤즈 시리즈에선 가넷이 17.7, 피어스가 14.1, 알렌이 12.1을 기록했다. 그리고 세 시리즈 모두 가넷이 팀내 득점 1위였다. 즉 가넷이 파이널에서 게임스코어 수치가 알렌보다 2.1, 피어스보다 1 떨어졌지만, 1라운드에 가넷은 피어스보다 5.1/알렌보다 6.8 높았으며, 2라운드에선 피어스보다 6.2/알렌보다 11.8, 3라운드에선 피어스보다 3.6/알렌보다 5.6이나 앞섰다.[34]
가넷 입장에선 다소 억울한 것이, 피어스와 알렌은 초반에 부진/후반에 살아났고 가넷은 초반부터 계속 잘하다가 후반에 다소 부진했다. 위에 수치상에서 보이듯 가넷이 제일 못한 파이널 게임스코어가 피어스/알렌이 동부 플레이오프 통틀어 가장 잘한 피스톤즈 시리즈 스코어보다 앞선다. 피어스/르브론의 40점 쇼다운으로 기억되는 캐브스 시리즈 7경기 중 피어스가 팀내 1위였던 두 경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경기에선 전부 가넷이 팀 득점 1위였고, 피스톤즈 시리즈에선 팀내 득점 1위인 경기수가 가넷3/피어스2이었다.(나머지 1경기는 알렌). 당시 플레이오프를 풀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피어스와 알렌은 초반에 들쭉날쭉한 경기력을 보였고, 그 사이 팀 공격을 이끈 건 가넷이었으며 2라운드 1차전에선 게임을 결정짓는 샷까지 성공했다. 빅2가 부진하는 사이 팀을 이끌다 체력이 고갈된 파이널에서 득점 한정 평소보다 약간 못한 수준이다. 그리고 그의 장점인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평상시러럼 강력했듯이, 평소에 비해 아쉽다는 수준이지 진짜 못한 것도 아니다.
파이널을 포함한 평균 전체를 내보면 가넷의 게임스코어는 17.1, 피어스는 13.4에 알렌은 11.3으로 단순히 '빅3가 고르게 활약했다'고 하기 힘든 수준으로 셀틱스에서 단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35] 파이널 MVP가 그 전까지 플레이오프 활약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넷이 수상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즉, 08시즌 당시 가넷의 활약을 종합하면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 전체적으론 가넷이 팀 내 최고의 선수였으나, 파이널 시리즈에선 피어스에게 다소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Finals MVP에는 닿지 못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하지만 피어스는 셀틱스 프렌차이즈 였음을 무시할수 없다. 가넷은 이적 첫해...)
4.3. 브루클린 네츠
12-13 시즌이 끝난 후, 보스턴이 리빌딩에 들어가면서 폴 피어스, 제이슨 테리와 묶여 브루클린 네츠로 트레이드되었다. 부상과 노쇠화로 많은 경기에 결장하고, 출장시간도 20분 남짓으로 줄어들면서 평균 득점도 커리어 처음으로 한자리 수 대로 줄었으며, 비록 수비력은 여전히 상당했으나 그래도 보스턴 시절보다 폼이 많이 떨어져있었다. 결국에는 벤치 신세를 지고 평균급 활약만을 보여주는 선수로 전락해버린것이다.이렇게 언제까지나 리그 최강의 야수로 군림할 것 같았던 늑대왕 가넷조차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던 와중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다가오자...
4.4.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기
옛 스승인 플립 손더스 감독과의 재회.
은퇴는 모든것이 시작되었으며, 자신을 뽑아주었고 무려 12년 동안 자신이 몸담고 모든것을 바쳤던 고향 팀에서 하고싶다며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돌아간다!!!
데뷔 팀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10년 넘게 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브루클린 네츠 사이에서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미네소타의 PF/SF인 테디어스 영과 케빈 가넷의 1:1 트레이드로 브루클린은 사치세 절감 및 젊은 재능의 추가, 미네소타는 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선수 복귀 및 유망주 양성을 위한 베테랑 겸 라커룸 리더의 충원이라는 양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 구단끼리의 딜은 한국 시간 새벽 3시경 이루어졌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는 가넷이 고민하면서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데드라인인 한국 시간 새벽 5시를 얼마 안 남긴 4시 30분 경 트레이드 거부권을 풀면서 딜이 이루어졌다.
케빈 가넷을 환영하는 현장 직촬 영상. 미네소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트레이드 이후 복귀시즌에도 부상을 입고 시즌을 종료했고, 다음해인 15-16 시즌에도 시즌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 채 아웃되었다. 철저하게 출장 시간을 관리해주고 있지만 쌓인 마일리지 탓인지 제대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철인이라 불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나이가 야속할 뿐... 그래도 출전한 시간만큼은 수비에서 제 몫을 해주었다. 계약 마지막 해인 16-17 시즌이 마지막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복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플레이오프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신의 몸 상태 탓에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애초에 주 전력으로 모든것을 맡기기 위해 데려온 선수는 아닌데다가 어린 선수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이끌기 위해 가넷을 데려온 것이 컸기 때문에 딱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가넷 정도의 승부욕이면 본인이 아쉬웠겠지만.
현지 시간 2016년 9월 23일, 이미 계약이 되어있던 16-17 시즌에 대한 바이아웃 협상을 마치고 계약을 종료시키더니 결국 은퇴를 선언하였다.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에 이은 명예의 전당급 선수의 은퇴에 많은 농구계 인사들이 감사와 존경, 아쉬움을 표현하였다.[37] 특히 15-16, 루키 시즌을 가넷과 함께 뛰면서 그로부터 선수로서, 한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배워 늑대왕의 의지를 이은 새로운 프랜차이즈 스타 칼앤서니 타운스는 선배의 커리어에 대한 찬사와 함께 선배의 의지를 이어가, 가넷 대신 미네소타에 우승컵을 가져오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농구팬들의 감동을 자아냈다.[38]
5. 은퇴 이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밀워키 벅스 등의 팀과 코칭 컨설턴트 직에 대해 이야기 중이라고 한다.[39]미국 현지시간 2016년 10월 28일 TNT Inside The NBA에 Area 21[40]라는 자신 만의 코너로 합류했다. 코너 자체는 샥틴 어 풀처럼 짧은 코너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한명의 게스트와 함께 회상하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첫 게스트는 2기 배드 보이즈의 멤버 라시드 월러스였고, 그 외에 케빈 맥헤일, 게리 페이튼 등도 참여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디트로이트의 레전드 아이제아 토마스와 공룡 센터 샤킬 오닐이 같이 참여 하여 그 장소에서 샥틴 어 풀 방송을 봤다.
2019년 사프디 형제의 영화 언컷 젬스에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애덤 샌들러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NBA 스타 케빈 가넷 본인 자신으로 출연하였다고, 2020년 2월 2일부터 넷플릭스에 공개 중. 카메오 비중이 아닌[41] 주연급 비중의 조연으로 출연하여 수준급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2020년 2월 보스턴 셀틱스가 그의 5번을 영구결번하기로 발표했고, 4월 6일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사를 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아직도 그의 번호를 결번시키지 않다가 가넷이 명예의 전당을 간다니까 비로소 결번을 제안했는데, 가넷은 필요없다고 응수하며 지금의 구단주와 그 어떤 거래도 하지 않겠다고 한 상황.[42] 자세한 내용은 구단주와의 악연에서 후술.
2022년 3월 14일 영구결번식이 거행되었다. 올 블랙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가슴팍에 우크라이나뱃지를 끼고 왔다. 가장 화제가 된건 오래도록 묵은 감정이 있었던 레이 앨런과의 샤라웃과 화해[43]가 있었으며,
5.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인수시도
2020년 7월 22일, 가넷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지분 매입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무려 글렌 테일러를 칭찬하면서 자신과 테일러 만큼이나 이 도시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44]후술하겠지만 선수 시절에 엄청난 연봉을 받고 광고계약으로도 높은 수익을 올린지라 재산이 수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었다.[45] 가넷은 이를 이용해 은퇴 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인수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었는데, 그 오랜 숙원을 풀 기회가 온 것이다.[46] 물론 아무리 알부자인 가넷이라도 조던처럼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진 못했으니[47] 단독으로 팀의 대주주가 되진 못하고,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사장이자 팀 지분을 약간 소유하고 있는 플립 손더스와 함께 투자 그룹을 만들어 인수할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다. 플립 손더스 사장 사후엔 여타 조건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컨소시엄을 구성해 매입절차를 밟을 확률이 높다. 농구 구단은 아니지만 매직 존슨이 이런 식으로 메이저리그의 LAD를 인수했었다.
당시만해도 구단주인 글렌 테일러가 팀을 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당시엔 말 그대로 희망사항에 불과했었다. 테일러는 NBA 구단주 중에서도 상당히 부유한 편인데, 현재 재산이 22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구단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가넷이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친 테일러에게 이런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가넷이 얼마나 미네소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 둘의 관계는 후술히겠지만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데도 그 자존심 드세고 싫은 놈한테 손을 내미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성격의 가넷이 먼저 화해를 청한셈이다.
여담이지만 테일러는 현재 최소 가격을 12억으로 정했으며, 여타 좋은 조건의 계약도 많았으나 전부 연고지 이전을 포함하는 바람에 계약을 모두 취소했다고 전했다.
허나 이것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2021년 3월 이 컨소시엄 그룹과의 협상이 결렬되어 가넷이 가넷은 인수를 포기했다는 내용 본인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게제하였다.
6.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2008) NBA 정규시즌 MVP (2004) 올-NBA 퍼스트 팀 4회 (2000, 2003-2004, 2008) [[파일:NBA 로고.svg|width=auto&height=20] NBA 올해의 수비수상 (2008) NBA 올스타 15회 (1997-1998, 2000-2011, 2013) NBA 올스타전 MVP (2003) 올-NBA 세컨드 팀 3회 (2001-2002, 2005) 올-NBA 서드 팀 2회 (1999, 2007)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9회 (2000-2005, 2008-2009, 2011)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2006-2007, 2012) NBA 올-루키 세컨드 팀 (1996)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4회 (2004-2007)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20)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
7. 플레이 스타일
센터의 사이즈에 스몰 포워드의 운동능력, 그리고 다재다능한 스킬셋을 겸비한 토탈 패키지형 빅맨이었다. 6시즌 연속으로 평균 20-10-5 이상을 기록했으며 디펜시브 팀에 12회나 선정되었을 정도로 수비력까지 역대 손꼽히는 수준이었던 선수. 앨런 아이버슨이 동네농구 선수들의 로망이라면, 케빈 가넷은 게임에서나 볼수 있는 캐릭터가 툭 튀어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팬들은 그에게사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파워 포워드가 사실상 중장신 스윙맨들의 포지션으로 변하고, 센터 중에도 리딩이나 드리블, 3점 슛 등 외곽 플레이에 능한 빅맨들이 여럿 등장한 관계로 더 이상 위와 같은 서술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당시 가넷의 임팩트는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빅맨들은 기본적으로 골밑에서 뛰는 게 당연했고, 다재다능한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 웨버도 볼운반을 하거나 리딩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 가넷은 키가 7피트에 달함에도 볼운반, 리딩, 혹은 외곽에서 크로스오버로 수비수를 제끼고 풀업 점퍼를 던지는 등 정말 스윙맨처럼 뛰는 플레이를 했다. 이런 모습이 당시 팬들에겐 마치 게임에서 에디터를 통해 포인트가드의 키를 7피트로 만들거나, 6피트짜리 땅꼬마 센터를 만드는 변칙플레이를 하는 것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아 보인 것이다.
팀 성적이 좋지 않아 국내에선 스찌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이건 그만큼 미네소타 팀 전력의 문제가 휠씬 더 컸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너무 이타적이라 피해 본 선수다. 애초에 스탯 찌질이가 거의 만장일치로 MVP를 탈 정도로 NBA가 만만한 리그는 아니며, 가넷에게 "에이스 근성이 부족하다"거나 "고투무브가 약하다"고 한다면 모를까 스탯찌질이는 결코 적합한 비판이 아니다. 이는 실제 활약에 비해 스탯이 더 높게 나오는 선수에게 붙는 비판으로, 스탯에 드러나는 득점은 잘하지만 스탯으로 드러나지 않는 궂은 일을 게을리하는 선수들에게 붙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가넷은 수비, 허슬, 스크린 등 1차 스탯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언제나 큰 기여를 하는 선수였다.
공격에서는 다양한 옵션이 있지만 스피드를 앞세운 페이스업 돌파가 1대1 공격의 주를 이루고 주 무기가 롱2 점퍼이니만큼 슈팅 레인지도 넓은 편이다.[49] 림어택도 잘하지만 체력을 세이브하기 위함인지 많이 시도하진 않으며, 포스트업 이후에도 점프슛으로 처리하는 것을 즐겼다. 흔히 00년대 포스트-페이드 본좌는 디르크 노비츠키라고 알려져있지만, 가넷도 노비츠키에게는 미치지 못할 뿐 상당한 수준의 페이더웨이를 구사하는 선수였다.
올라운드형 파워 포워드인 만큼 코트 전체를 활용할 줄도 알고 시야가 넓어 패싱 센스도 뛰어나다. 심지어 2003, 04년 플레이오프에서는 7푸터가 진짜 포인트 가드처럼 볼을 운반하며 손을 들어 플레이콜링을 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2004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새크라멘토 킹스와의 시리즈 7차전은 가넷의 다재다능함을 극한까지 보여주는 경기로 손꼽히는데, 가넷은 이 경기에서 30-20을 넘기는 스탯은 물론이고 경기 막판에는 직접 포인트 가드(!) 역할까지 하며 공격을 이끌었다.[50]
미네소타는 한때 월리 저비악 - 프레드 호이버그 - 라트렐 스프리웰 - 케빈 가넷 - 엘빈 존슨이라는 오프 더 볼 득점원 세 명, 수비형 센터 한 명, 가넷이라는 특이한 라인업을 돌렸는데, 여기서 오는 PG의 부재를 가넷이 주 득점원과 리딩 롤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메꿨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농구선수의 표본. 그렇다고 온볼러 타입은 아닌지라 오프 볼 상태에서는 뛰어난 스크린으로 팀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그의 최대 강점은 바로 디펜스다. 긴 팔과 빠른 풋워크에서 나오는 가로 수비와[51], 긴 팔과 점프력을 사용한 세로 수비에 모두 뛰어났고 BQ가 뛰어나 수비 전술 이해도도 좋았기에 지역 수비가 부활하고 듀얼 가드들이 득세하면서 리그가 픽앤롤 중심의 농구로 전환하자 이에 대항하는 강력한 전진 압박 수비 뒤 복귀[52]로 스크린을 믿고 돌파해온 상대의 가드들을 2선에서 압살하는 수비로 현대 NBA 농구의 큰 흐름을 이끌었다. 이런 큰 선수가 스위치 상황에서 작은 포인트 가드에게 외곽에서 맞붙으면 뚫리거나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53] 가넷의 경우 전성기 기준으로 굴욕을 당하기는커녕 스피드와 신장을 이용해 오히려 압박 수비를 가한다.[54]
넓은 수비 범위 못지않게 단단한 하체 힘을 이용해 상대 포스트업도 적극적으로 잘 막는 타입이었고[55][56] 3번, 4번, 5번을 동시에 수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57] 거점 수비도 뛰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상대가 스몰라인업을 돌릴 경우에 그것에 가장 잘 대처하는 빅맨이었다. 거기에 4년 연속 리바운드 왕을 거머쥔 것에서 보이듯이 수비 리바운드 또한 역대급 선수이다. 또한 팀 디펜스이상으로 맨투맨 디펜스 역시 동시대 파워 포워드에서는 군계일학으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가넷과 동시대의 공격력이 뛰어난 4번으로는 팀 던컨, 디르크 노비츠키, 크리스 웨버, 엘튼 브랜드, 파우 가솔, 크리스 보시, 샤리프 압둘라힘, 라시드 월러스, 알 제퍼슨 등이 있는데, 가넷은 이들을 상대로 뚜렷한 상성이 없이 전부 맨투맨적으로 잘 수비해냈으며 특별히, 팀 던컨과는 정규시즌 및 플레이오프에서도 라이벌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수비에서도 역시 팀 던컨과의 비교가 많은데, 객관적인 수치로 본다면 팀 던컨은 센터와 포워드를 넘나들며 교차 투표의 덕으로 디펜시브팀에 15회(퍼스트8회) 선정되었고 가넷은 디펜시브 팀에 12회(퍼스트9회) 선정되었으나, 던컨에게는 없는 올해의 수비수 경력이 1회 있다. 던컨의 경우 올해의 수비수 득표에서 3위에 오른 것이 최고 기록이었고[58], DBPM에서도 가넷에게 밀린다. NBA와 관련된 국내외 커뮤니티와 미국의 ESPN, 훕스 사이트 등 전문가들이 기고하는 칼럼을 종합해서 볼 때, 가넷은 맨투맨 디펜스에 중점을 두면서도 팀 디펜스로서의 수비범위가 넓은, 4쿼터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수비하고 체력을 바탕으로 뛰어다니는 수비수이다. 반면 던컨은 맨투맨 디펜스보다 팀 디펜스에 비중을 두면서 강력한 퍼리미터 디펜더가 있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팀 특징 상 가넷과는 다르게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수비하며 전반적으로 체력을 비축하는 영리한 디펜스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수비는 둘 다 매우 우수하며 굳이 우열을 가린다면 인사이드 수비는 던컨, 대인 수비는 가넷이 앞선다고 보며 도움 수비에서는 뚜렷하게 가넷이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미국의 전문가 등의 칼럼에서도 수비는 가넷이 우세하다는 평론이 많다.[59] 물론 둘 다 역대급 수비수임에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수비에 대한 평가는 가넷이 앞서는 경향이 있다는 소리.
공격에선 적극적으로 골밑을 선호하지 않아 공격 리바운드가 약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런 편견과는 정반대로 전성기 시절 2개 후반대에서 3개 정도의 공격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가장 높은 공격 리바운드 갯수를 기록했던 99시즌에는 경기당 3.5개를 기록했는데, 라이벌이었던 팀 던컨이 기록한 가장 높은 시즌 평균 오펜스 리바운드가 3.5개로 같다는 걸 감안해보면 가넷의 오펜스 리바운드 참여도가 낮은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60]
추가로 특유의 다재다능함 덕분에 "역대 최고의 1대1 플레이어" 떡밥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선수이다. 실제로 NBA급에서 1대1에서는 가드보다 키 크고 다재다능한 빅맨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이 정도 레벨의 선수들은 대다수 득점이 중거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61] 이 때 가드들은 스크린 활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인기로 완벽하게 따돌리고 쏘지 않는 이상 신장차이로 모든 슛이 터프 슛이 되고, 슛이 약한 정통 빅맨들의 경우 중거리슛에서 약점을 보이는데, 가넷같이 볼핸들링이 가드급으로 좋고 슛도 좋은 선수들은 1대1에선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62][63]
실제로 가넷이 미국 대표팀 선수들과 붙은 1대1 영상을 보면, 자신과 키가 비슷한 포워드들과 붙으면 스피드와 드리블을 이용해 제껴버리고 레이업, 자기보다 작은 가드들과 붙으면 신장차를 이용해 쉽게 중거리슛으로 득점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제이슨 키드의 경우 해당 시즌 올디펜스 퍼스트팀 멤버이자 당대 최고의 가드 수비수 중 하나였는데[64] 가넷이 별로 어렵지 않게 제치고 코트를 넘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넷이 실제 경기에서 포인트 가드를 볼 정도로 볼핸들링이 좋기에 생기는 일.
7.1. 약점
최대 약점은 마인드에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농구, 특히 48분이나 되는 NBA의 농구에서는 매 경기마다 코트위의 5명이 80~100번 정도는 공격을 하고 공격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에 있어서 팀내 1인자는 팀이 중요한 순간에 처했을 때 1인자가 해결해줘야 한다. 1인자에게는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처럼 자신감을 넘어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슛을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넷은 자신의 올라운드 플레이 능력을 더 선호한 나머지 1인자다운 슈팅 욕심을 내지 않았다.[65]가넷의 경우 MVP 출신 파워 포워드 중에서는 팀 던컨과 더불어 가장 득점력이 낮았으며, 플레이오프에서의 공격 효율도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새가슴설에 휩싸였던 적이 있으며 아직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가 시야와 패싱 등 전방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고 팀 역시 이런 그의 면모를 잘 활용했지만, 에이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중요한 순간 슛을 성공시키는 기질인데 가넷은 그런 점에서 1인자 타입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는 것.
미네소타 때는 좋은 동료가 없어서 그가 모든 공격과 수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됐지만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한 이후에는 공격 비중을 확 줄이고 수비 타워 역할에만 전념하는 디펜시브 앵커 역할에 전념하면서 커리어 연장과 함께 그가 평생 원하던 우승반지도 손에 넣고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할 수 있다.[66] 네이버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 '파울아웃'에 종종 나오는 이승기 기자는 이런 가넷의 스타일과 행보를 두고 농담으로 롤플레이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에 꽤 후폭풍이 있었지만 조던보다는 피펜에 더 가까운 유형의 선수라고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으며, 보스턴 Big 3 시절을 언급하며 "우승에 일조할 순 있어도 주도하지는 못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7.1.1. 반론
새가슴 논란은 정규시즌에 비해 플레이오프에서 기록이 크게 하락하거나 제 몫을 못하는 선수들에게 생긴다. 그런데 가넷은 오히려 미네소타 시절 유일하게 우승 후보급이었던 03-04 시즌, 실제로 우승했던 보스턴 Big 3 시절의 07-08 시즌, 그리고 동부 4번 시드에 불과했으나 결승까지 올라갔던 09-10 시즌엔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팀이 결승까지 가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67] 이후 나이가 들고 나서는 몇 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그가 무릎을 포함해 몸 여러군데가 망가진 노장이었기 때문이고, 적어도 멀쩡히 뛰던 시절에는 큰 무대에서 두드러지게 부진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미네소타가 약체여서 1라운드에서 늘 탈락해 이런 오해가 있을 뿐 이때 가넷의 활약상은 결코 정규시즌보다 못하지 않았다. 즉, 새가슴의 정의가 중요한 경기에서 평상시보다 더 못하는 선수라고 한다면, 가넷은 중요한 경기에서 변함없이 (혹은 더) 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가넷이 피펜 타입이라는 것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게, 우승 시즌만 놓고 보더라도 가넷은 MVP 3위 + All-NBA 퍼스트팀 + DPOY라는 엄청난 시즌을 보냈으며, 위 이승기 기자 식의 분류라면 조던 포지션에 해당될 폴 피어스는 서드팀이었다. 그렇다고 플옵에서 못했나? 우승을 해낸 08 플레이오프에서 가넷은 팀 내 득점 1위, 리바운드 1위, 어시스트 3위, 블록 2위, 스틸 2위로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정규시즌을 보더라도 가넷이 딱히 피어스보다 견제를 덜 받은 게 아님에도 피어스 19.6점, 가넷 18.8점으로 0.8점 차이가 날 뿐이다. 때문에 보스턴 팬들 중에서도 어지간히 프랜차이즈 성골에게 편파적인 부류가 아니라면, 피어스가 파엠을 수상했다고 해서 가넷을 겨우 '2인자'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천시 빌럽스가 04 파이널에서 fMVP를 차지했다고 해서 벤 월러스, 리차드 해밀턴의 플레이오프 활약을 빌럽스보다 못했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듯이 말이다.
올NBA 팀에서 이 둘은 같은 포워드 슬롯이었음에도 수상은 퍼스트/서드로 갈렸는데, 이건 누가봐도 가넷이 더 뛰어난 시즌을 보냈다는 의미이다. 실제 MVP투표에서도 가넷은 1위표를 15표 얻어 3위치고는 꽤 득표를 해 총 670점을 얻었으나 피어스는 5위표 단 한장 얻어 1점에 그쳤다.[68]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 어떤 것을 기준으로 봐도 가넷의 공헌도가 월등히 높으며, 피어스가 제일 잘했다는 파이널도 '가넷이 피어스보다 확실히 못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69]
대량 득점보다는 팀 플레이로 공헌하는 선수라는 점 때문에 가넷을 롤 플레이어라고 까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60년대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이끌었던 빌 러셀도 롤플레이어다.[70] 더불어 가넷의 가장 큰 장점은 기록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수비라는 걸 감안하면 스탯 이상으로 팀에 큰 공헌을 해왔다.
더군다나 2차 스탯으로 넘어가면 08 플옵의 가넷은 PER, 윈쉐어, OBPM, DBPM, VORP 등 각종 부분에서 팀내 1위를 쓸어담았을 정도로 보스턴 최고의 선수였다. 애초에 수비, 리바운드, 스크린 등이 최고 장점인 선수가 득점량조차 피어스와 대동소이한 정도라면, 그저 클러치 옵션이 피어스라는 이유로 가넷을 마냥 2인자로 보는 게 타당하느냐는 것이다.
에이스 기질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비슷한 역대급 선수 중 득점력과 슈팅력이 뛰어난 디르크 노비츠키 같은 선수들과 득점력을 놓고 비교하니 그렇다는 것이고[71] 가넷의 클러치 능력은 오히려 나쁘지 않은편이다. 누구나 얘기하면 알수있는 역사에 남을 클러치샷은 없다만 보스턴 시절 다른 빅2가 부진하자 혼자 공격을 이끌기도 했고[72] 03-04 시즌 당시엔 새크라멘토 킹스와의 벼랑끝 7차전에서 인생 경기를 펼쳤으며, 저비악, 카셀 등이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LA 레이커스와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LA 레이커스의 그 괴물과도 같던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칼 말론, 게리 페이튼을 상대로 상당히 분전했었다.
"에이스 기질"이라는 것은 대량득점을 하며 팀을 이끄는 선수에 대한 팬들의 선호도 문제이지, 이걸 갖고 선수로서 클래스를 평가하긴 어렵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는 둘 다 동급의 실력자, 동급의 승부사이지만, 위닝샷이나 대량득점으로 팀을 이끈 빈도수는 버드가 월등히 높다. 이는 두 선수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둘 다 다재다능하지만) 버드가 득점으로 리그를 지배했다면 매직은 다재다능한 플레이와 리딩으로 리그를 지배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매직이 버드에 비해 에이스 기질이 부족하다"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두 선수가 잘하는 게 다른데? 마찬가지로 원래 득점과 슛이 특기인 노비츠키보다 원래 수비와 리바운드가 가넷이 위닝샷, 대량득점 경기가 적다고 해서 에이스 기질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가넷이 중요한 경기에서 쪼그라글거나 폭탄돌리기를하는 스타일이라면 확실히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아래에서 설명됐듯이 가넷은 클러치 플레이로 대표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클러치에 쪼는 선수 역시 아니었다.
같은 팀에 당시 최고의 스코어러들이었던 레이 앨런, 폴 피어스가 있는만큼 파워 포워드가 위닝샷을 시도할 일이 많이는 없지만 그런데도 가넷은 종종 마지막 슛을 쏘는 경우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클러치 능력이 없다면 지장으로 유명한 닥 리버스가 앨런, 피어스를 놔두고 가넷에게 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원맨팀 시절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엔 당연히 훨씬 많았다.[73] 비단 위닝샷 뿐만 아니라 특기인 수비력으로 클러치 스틸을 만든적도 제법 있었다.[74]
7.2. 가넷은 정말 새가슴인가?
사실 가넷이 새가슴이란 논란이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원맨팀 시절, 공수부담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플레이오프에서 경기후반이 되면 체력이 바닥나 슛난조에 시달리는 경우가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가넷은 당대 파워 포워드 중 가장 뛰어난 슈팅력을 지닌 선수 중 하나였고 슛거리 역시 롱2는 무난하고, 3점도 가능할 정도로 길었다. 그러나 슈팅스트로크를 보면 릴리스가 투박하고 포물선이 낮았는데, 이런 선수들의 경우 체력 고갈이 슈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심지어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역대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인 마이클 조던 역시 1998년 파이널 막판에 체력 고갈로 슈팅난조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6차전을 예로 들면, 전반전에 쏘는 족족 슛이 들어갔던 그는 후반이 되자 슈팅력이 고장나며 한동안 부진에 시달리다가 막판에 정신력으로 슈퍼플레이를 해내며 우승으로 이끌었다. 시카고 시절 조던이나 미네소타 시절 가넷 모두 점프로 충분한 추진력을 얻고 슛을 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체력=점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던이 가넷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이며 안정적인 슈터라는 차이점은 있다.[75][76] 반대되는 케이스가 래리 버드나 디르크 노비츠키처럼 포물선이 높고 점프와 크게 상관없이 안정적인 손목의 스트로크를 활용해 쏘는 스타일이다.그런데 당시 가넷은 팀내 비중이 어마어마했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사상 최초로 50승을 넘긴 2002-03시즌을 보자. 당시 주전들을 보면 2옵션 월리 저비악은 30경기나 결장했고 뛴 경기에선 고작 17.6점 넣었으며[77], 그나마 쓸만한 선수였던 센터 라쇼 네스트로비치는 커리어 통틀어 두자리수 득점을 넘긴게 한 번 (11.2점)일 정도로 반쪽짜리 선수였다. 트로이 허드슨은 10점을 넘긴게 두 번으로 이해에 14.2점을 넣었다. 로테이션으로 슈팅 가드로 나왔던 켄달 길과 앤소니 필러는 둘 다 한자리수 득점에 30대 중반 노장이었다. 허드슨은 당시 NBA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픈샷만 겨우 넣을 정도로 득점스킬이 지극히 빈약했는데, 포인트는 허드슨과 라쇼 둘 다 03시즌이 출장시간/득점에서 커리어하이였다. 즉, 한자리수 득점을 커리어 한 두번 넘길 정도로 빈약한 공격력의 선수들이 중용받을 정도로 당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득점력은 형편없었던 것.
공격만 그랬느냐, 수비의 경우 네스테로비치는 블락이 많진 않지만 제법 골밑존재감이 있었고 허드슨은 괜찮은 수비수였다. 그러나 저 둘도 디펜스팀 경력이 전무할 정도로 1급 수비수와는 거리가 멀었고 나머지 선수들은 구멍이었다. 결국 공수에서 뛰어난 선수는 가넷 뿐이었다. 실제로 당시 가넷은 전경기/40.5분을 뛰었는데, 00시즌부터 6시즌동안 세경기 결장했으며, 풀타임 주전으로 올라온 96-97시즌부터 이적하기 전인 06-07시즌까지 그는 시즌당 평균 77경기/39.2분을 뛰었다.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99-00~04-05시즌까지 6시즌은 평균 81.5경기/39.5분이었다.
전문가들이 주구장창 가넷이 골밑위주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그의 플레이 스타일상, 점퍼에만 의존하면 공격에서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가넷은 데뷔 당시 220파운드였던 몸무게를 02-03시즌 기준으로 240파운드까지 벌크업하고, 이후 250파운드 이상으로 늘렸다. 특히 포스트업 무브는 02-03시즌을 기점으로 리그에서 어떤 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 되었으며, 페인트존 야투율은 5할대 후반으로 팀 던컨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랐다.
문제는 당시 팀 사정상 가넷은 골밑에서만 "비빌 수" 없었던 것. 위에 언급된 라인업을 보자. 외곽슈터가 저비악 하나 뿐인데 그는 인저리프론이었다. 수비를 분산시킬 선수들이 없기 때문에 더블/트리플팀을 매번 부딪혀가며 골밑공략을 할 여유가 없다. 또한 위에 언급된 체력문제도 있다. 모든걸 해야 하는 그는 공격에만 체력을 퍼부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78]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규시즌부터 중노동을 해온 가넷이 플레이오프에서 폭발적인 득점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가넷은 고득점 폭발보다는 꾸준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을 하는 선수였다. 실제로 그는 매번 21~24점, 12~18개 정도의 스탯을 올려줬다. 실제로 그는 득점에서 극히 부진했던 적이 98,00시즌 정도였다.(다만 00시즌에는 어시스트를 8.8개나 올렸다)
그가 미네소타 시절 얻었던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한 03-04 시즌에 생애 최고의 활약을 올린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때도 저비악이 아웃되었다가 2라운드에 돌아오고, 마이클 올로워캔디가 제대로 못 뛰고, 샘 카셀도 2라운드 후반부터 삐걱거리다가 3라운드 절반 정도를 빠지는 바람에 공수에서 과도한 부담으로 슈팅난조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79]
실제로 가넷이 슈퍼스타 동료들과 함께한 보스턴 셀틱스 시절에 이미 무릎에 고질적인 고장이 있었음에도 2008년 1라운드 당시 레이 앨런/폴 피어스가 동반 부진 (각각 18점/44.8%, 16.1점/42%)하는 가운데 2옵션이었음에도 21점/48.4%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다. 2라운드에서 피어스가 후반에 정신차리고 7차전 르브론 제임스와 40득점 매치의 임팩트가 컸지만 엄밀히 말해, 시리즈 최고선수는 팀내 득점/리바운드/야투율까지 1위였던 가넷이었다.[80] 물론 파이널에서 피어스는 파이널 MVP를 받기 충분한 활약을 펼쳤지만, 그럼에도 가넷의 파이널 MVP 얘기가 많았던 것은 그 활약조차도 종합적으로 보면 비슷하고, 플레이오프 통틀어 피어스가 평균 득점에서 가넷을 능가한 건 이 시리즈 뿐이었기 때문이다. 피어스의 최대 장기인 득점에서 말이다.
가넷이 파이널 야투율이 42.9%로 부진한 것을 두고 큰 경기에 약했다고 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해당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레이 알렌은 42%, 2라운드에서는 32.8%에 그쳤다. 피어스는 1라운드에선 44.8%, 2라운드에선 40.4%를 기록했다. 종합스탯인 게임스코어에서 가넷/피어스/알렌 순으로 1라운드에선 18.1/13/11.3, 2라운드에선 17.6/11.4/9.1, 3라운드에선 17.7/14.1/12.1, 파이널에선 알렌/피어스/가넷 순으로 16.7/15.6/14.6이었다. 즉, 08년 플옵 당시 빅3는 각자 잘하던 순간과 못하던 순간이 있는데[81] 이걸 두고 가넷만 큰 경기에 약하다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
위 단락에 따로 정리했지만 파이널에선 알렌과 피어스가 가넷보다 잘한게 맞고, 따라서 피어스의 Finals MVP는 충분히 적합한 수상이었다. 그런데 그전까진 가넷이 알렌과 피어스보다 잘했다. 이 때문에 (가넷이 상대적으로 못했던 파이널을 합산한) 플레이오프 종합 스탯에선 1차건 2차건 가넷이 더 높게 나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가넷이 원맨팀 시절 플레이오프에서 새가슴 논란이 있었던 것은 1. 몇몇 경기에서 팀사정상 지나친 공수부담으로 인한 체력적 난조 2. 본인의 스타일상 공격력에서 한계 3. 임팩트 있는 초고득점 경기 부족, 4. 역대를 논하는 큰경기에서의 명장면 부재 5. 일부 레전드 선수들에 비해 떨어지는 클러치 득점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는 마치 가넷이 클러치 명장면이 없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는데, 그건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etChMXvySU 이 경기에서는(4분28초부터) 4쿼터 29.2초를 남겨두고 팀이 6점차로 뒤지고 있는 와중에 3점슛 2방을 연속으로 넣어 경기를 연장->승리로 이끌었으며, 2008년 동부준결승 1차전에선 동점상황에서 1대1로 마크맨을 제치고 위닝레이업을 넣은 적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0LWM-vkq3Q 클러치득점이 특기인 코비나 노비츠키에 비해 적은 것이지, 동시대 다른 빅맨들에 비해 가넷이 위닝샷이나 클러치 샷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kw4emDauZo[82]
그러나 이때도 활약을 종합적으로 보면 결코 부진한 것은 아니었다. 가넷은 애초에 디르크 노비츠키같은 리그 정상급 득점원은 아니었다. 득점력만을 기준으로 둘을 비교하면 불공정한 것이, 가넷은 노비츠키보다 비교도 안되게 뛰어난 수비수이며 리바운드 능력도 확연히 뛰어났다. 그런데 둘은 각종 랭킹에서 비슷한 순위권으로 묶이는 선수들이다. 이는 당연히 노비츠키가 가넷보다 월등히 위력적인 공격수이자 타고난 강심장에서 나오는 클러치 능력을 가진 선수였기 때문이다. 근데 노비츠키가 공격으로 상대를 박살내는 것처럼, 가넷은 수비로 박살내는 선수이다. 가넷이 노비츠키보다 득점을 못하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노비츠키가 공격으로 레전드가 된 것처럼, 가넷은 수비로 레전드가 된 선수이기 때문이다.[83]
새가슴이냐 아니냐를 떠나 수비와 리바운드 위주의 선수라고 해서 그가 롤플레이어니, 에이스의 자격이 부족하니 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스타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빌 러셀은 수비와 리바운드를 팀동료들을 뒷받침해주는 선수이며 득점력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슛을 넣는 능력은 다른 동료들에 비해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가 위대한 선수가 아닌가? 그가 일궈낸 11번의 우승은 그가 주도한 것이 아니던가? 가넷은 러셀과 마찬가지로 득점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선수가 아니라, 수비와 리바운드로 승리를 만들어내는 선수였다.
8. 더티 플레이
원래 현역 시절부터 NBA에서 가장 악명높은 트래쉬 토커 중 1명이었지만 보스턴 셀틱스 이적 이후부터 지나친 트래쉬 토킹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찰리 빌라누에바의 트위터에 의하면 "암환자같이 생겼다."라고 떠든 적이 있는데 가넷 측에서는 "넌 리그의 암적인 존재야!"라는 뜻으로 얘기했다고 항변했다. 찰리 빌라누에바는 어렸을 적에 병을 앓아서 몸에 털이 없는데, 이런 증상은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물론 가넷은 그런 뜻이 아니었으며 빌라누에바의 병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코트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전이라고 해명했지만, 정도가 지나친 트래쉬 토크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참고로 빌라누에바는 이 트위터에서 가넷을 링에서 때려눕힐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했었다.던컨과의 악연도 있다. 그는 한번 던컨의 귀에 대고 욕을 하였고 그 후에 그의 뒤통수를 가격한 적도 있어 그 침착하던 던컨이 빡쳐서 머리를 맞대며 꽤나 성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때 한 리포터가 던컨에게 가넷에게 매직이나 버드가 서로에게 느꼈던 그런 동료감을 느낀적이 있냐는 질문을 했을 때 던컨은 호텔 벽에 기대어 한참을 생각하더니, "동료감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보세요" 라고 답했다고.[84]
토론토전에서는 토론토의 포인트 가드 호세 칼데론을 자기가 수비할 선수가 아닌데도 계속 수비하면서 "넌 아무것도 못하는 애송이야!" 라며 계속 도발했다.# 잠깐 그런 것도 아니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짜증나게 했던지 칼데론도 말싸움을 벌였다. 이 행동 때문에 팬들마저도 가넷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인디애나와의 경기에서 타일러 핸스브로의 얼굴을 가격하고 플래그런트 파울2를 받고 퇴장을 당했다.# 가넷 본인은 고의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을 향해서 가격을 했고, 경기 도중에 과격한 행동이 종종 나온적이 많기에 크게 사람들이 믿지는 않는 상황이다. 또한 점프슛 도중이었던 채닝 프라이의 낭심을 가격한 적이 있었다(...).#
2013년에는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는 카멜로 앤서니와 신경전을 벌였는데,# 멜로가 경기 후 분기탱천해서 보스턴 셀틱스 라커룸에서 소리를 치고 보스턴 버스 앞에서 가넷을 기다리기도 했다.#[85]
미네소타 시절 섬머리그 연습 도중에 자신을 상대로 선전한 2라운드 출신 루키 릭 릭커트에게 주먹을 날려 이빨이 나가고 일곱 바늘을 꿰메게 만든 사건도 있다. 당시 릭커트가 가넷을 상대로 연속해서 득점을 올리고 인유어페이스 덩크마저 성공시키자 가넷이 어떤 경고도 없이 갑자기 얼굴을 가격했다고 한다. 일부 가넷 팬들은 릭커트가 가넷에게 건방지게 굴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옹호하지만 어떤 기사에도 릭커트가 가넷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언급은 없으며, 단지 연습을 구경하던 팀 동료들이 가넷을 약올렸다는 얘기만 있을 뿐이다. 즉 가넷은 그저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국내의 케빈 가넷팬들 중 극소수는 아닌 몇몇이 이러한 행동과 언사들을 두고 승부욕에 있어 과도한 열정때문이라고 두둔할 때가 있다(...).
위에 서술된 트래쉬 토크와 더티 플레이로 인해 케빈 가넷에게 질린 선수들이 좀 있는 편인데 대표적으로 조아킴 노아와 드와이트 하워드다. 노아는 함께 뛰면서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집에 있던 가넷의 브로마이드를 찢어버렸고(...)[86]
2014년 12월 28일 인디애나와의 경기에서는 데이비드 웨스트의 귀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
함께 한솥밥을 먹고 지낸 레이 앨런의 얘기론 입에서 Fxxx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88]
유도니스 하슬렘의 경우, 가넷이 하슬렘 본인에게 트래쉬 토킹을 한 적은 없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하는 말을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매우 짜증났으며 선수 시절 동안 가넷보다 더 무례한 말들을 늘어놓는 선수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2015년 1월 13일 휴스턴 로키츠와의 경기에서 드와이트 하워드와 싸움이 날 뻔했다.#
다만 위에 언급된 조아킴 노아는 베테랑이 된 이후 오히려 가넷을 존중(respect)한다고 한 적이 있다. 이 인터뷰에서 노아는 가넷이 오직 승리를 위해서 자신을 불태우는 방식에 대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자신의 팀동료가 아닌 선수들과 친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걸 참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올스타 주간에 둘이 앉아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오해를 풀었다고.
2016년 뉴올리언스와의 경기에서는 라이언 앤더슨의 얼굴을 팔로 쳐서 또 한 번 구설수에 올랐다.# 팬들은 대체로 '혈기왕성한 신인도 아니고 은퇴를 코앞에 둔 노장이 왜 이러느냐.'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요약하자면 욕쟁이 더티 플레이어다.
9. 여담
- 한때 팀 던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지만, 던컨이 수 차례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양측의 커리어에 큰 차이가 생겨버렸다. 오히려 플레이오프에서 치열하게 붙어왔던 노비츠키가 던컨과 더 라이벌에 가까울 정도. 하지만 사실 팀 던컨은 이견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압도적인 역대 파워포워드 No. 1이기 때문에 가넷 뿐만이 아니라 팀 던컨과 비교가 가능한 선수는 많지 않다.
- 디르크 노비츠키와의 비교는 줄곧 우위를 점해왔으나, 2011년 노비츠키가 뛰어난 활약으로 댈러스 매버릭스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현재 둘 사이에서 평가는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다. ESPN에서 2016년에 선정한 역대 파워 포워드 랭킹에선 노비츠키가 3위, 가넷은 5위였다. 4위는 찰스 바클리. 반면 Fox Sports에서 각 팀별로 베스트 플레이어를 꼽은 다음에 이 중에서 1위에서 30위까지 순위를 매긴 랭킹에서는 노비츠키는 15위, 가넷은 13위로 뽑혔다. 주의해야 할 게, 이 말은 해당 선수가 역대 15위, 13위라는 말이 아니라 "프랜차이즈별로 한 명씩 뽑힌 선수들 중에서 15위, 13위란 말이다. (우리는 이들을 서로와 비교해서 순위를 매겼습니다: we ranked them against each other for good measure.) # 이것만 봐도 둘의 현지 평가가 엎치락뒤치락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거물 기자 잭 맥캘럼이 선정한 랭킹에서는 기자 개인의 평가라 신뢰도는 떨어지지만 전 포지션 통틀어서 가넷 34위, 노비츠키가 37위였다. 이것만 봐도 가넷을 높이 평가하는 측, 노비츠키를 높이 평가하는 의견들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존한다는 게 명확하기 때문에 둘 중 누가 앞선다고 못박아 말하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것이다. 추가로 다임 매거진에선 역대 파워 포워드 순위를 논할 때 추가적으로 가넷과 노비츠키를 비교하는 글도 함께 올랐었는데 결론적으론 노비츠키의 손을 들어주었고[90] Sports Illustrated에서 2014년 10월 (즉, 2013-14 시즌이 끝나고 나서) 펴낸 "Basketball's Greatest"에서도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가넷을 4위, 노비츠키를 5위로 뽑았다. # 아울러 2019년엔 ESPN에서 역대랭킹을 논할 때 노비츠키는 17위 가넷을 21위(바클리 보다 아래) 몇 계단 아래로 랭크했다.[91]
메이저 언론에서 계속 둘의 순위가 바뀌고 있으며, 심지어 같은 ESPN에서 펴낸 순위에서도 (은퇴 직전이라 두 선수의 랭킹이 바뀔만한 업적이 없었음에도) 왔다갔다하는 건 둘이 근본적으로 위상이 매우 비슷해서 참가하는 전문가에 따라 바뀔 정도이기 때문. 둘의 장단점이 다르고 가장 중요한 MVP와 우승횟수가 각각 1회씩이기 때문에 비록 가넷에겐 노비츠키가 가진 파이널 MVP가 없으나[92] 그냥 동급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93]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현지 언론 사이에서 둘의 평가는 동급이지만, 국내 커뮤니티 한정으론 노비츠키 은퇴후 여러 재평가와 둘의 맞대결 일화[94] 커뮤니티에서 노비츠키를 근소우위에 두는 경우가 많기는 하나[95]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노비츠키 vs 가넷 떡밥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주제다.[96]
- 스펜서 헤이우드라는 흑역사 이후, NBA에서 고졸 선수들의 프로직행 신호탄을 쏜 선수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바로 NCAA의 존재감 때문이다. NBA보다 시청률 잘 나올 정도로 큰 리그의 경험을 통해 검증을 받고 NBA 드래프트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가넷은 그 통념을 깨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코비 브라이언트의 성공을 통해 NBA에서 가능성 있는 고졸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NBA 문을 두드렸고, 2003년 드래프트에서는 NBA 최고의 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전체 1번 지명을 받아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97] 가넷이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98], NCAA도 거치지 않은 고졸 선수가 NBA의 문을 두드려서 환영받게 된 전초를 제공한 그 자리에 바로 케빈 가넷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가넷, 르브론 이후로 많은 고졸 선수들이 NBA 직행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오히려 고등학생 선수들에 대한 분석이 정확히 이뤄지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NBA 사무국에서 제제를 걸면서 더이상 고졸 신화는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 재밌는 버릇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경기 중 파울이나 작전 타임, 레프리 타임 등으로 인해 휘슬이 울리고 상대 선수가 그냥 연습처럼 던지는 공이 골대로 향하는 꼬락서니를 절대 두고보지 않는다는 것.[99] 골대 아래에서 훌쩍 뛰어서 공을 잡아내거나 옆에 있으면 블로킹을 해버린다(...) 이에 대해서 가넷은 농구의 슛 또한 그날 그날 감에 의해 좌우되는데, 상대방에게 경기 중 연습 슈팅을 굳이 내줘서 감을 찾게 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농구장 외에는 얌전한 듯하다.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될 때 보스턴에서 뛴 적이 있던 천시 빌럽스[100]에게 '여기 놀 데 어딨음?'이라고 물어보자 '너 어차피 집에서 안 나갈 거잖아'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히키코모리??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6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 농구잡지인 베켓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잘 안해주는 선수로 꼽혔었다. 아주 가끔해 주는데, 검색해보면 매번 사인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잡지에서는 '그의 손은 은행에서 돈을 입금하고 출금할 때만 쓰는 모양이다.'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최근 유명 카드 제작사와의 사인카드 발행 계약도 연장하지 않았다.
- 한때 미네소타에서 같이 뛰었던 말릭 실리라는 선수를 존경[101] 해서 그가 대학시절 달던 21번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릭 실리는 케빈 가넷의 생일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을 하는 차량과 충돌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가넷은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자기 생일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랬으니 오죽했으랴...말릭 실리는 이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첫번째 영구결번 선수가 되었다.[102]
- 미국의 가수 겸 코미디언 그룹인 The Lonely Island의 노래 'I'm on a boat'의 가사에 그의 이름이 잠시 언급된다.
육지 좆까노래에서 앤디가 가넷의 보스턴 셀틱스 시절 우승 후 눈물을 흘리며 외쳤던 우승 소감인 "Anything is Possible!!(무엇이든 가능하다)"을 연호한다. 유튜브 영상
- 리복을 제외한 웬만한 농구화 메이커를 섭렵한 선수다. 나이키[104], AND1과 아디다스를 거쳐 지금은 중국메이커인 ANTA와 계약되어 있다."가넷이 내가 마이애미로 떠난 이후 차가운 태도로 돌아섰지만 나는 그를 이해했다. 가넷은 자신과 다른 팀소속일 경우엔 자신의 할머니도 모욕할 남자다."- 레이 앨런 본인의 자서전에서
- 상대 팀에게는 독사같은 존재지만, 자기 팀은 끔찍히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빌 시몬스가 운영하는 Grantland란 팟캐스트 서비스에서 예전 동료 브라이언 스칼리비리니가 출연해 가넷이 팀동료로 "정말 최고(the best)"라고 증언하면서 "모든 NBA 팬들은 가넷의 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두 사람은 동료가 아니었다) 또한 닥 리버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매년 들어오는 신인 선수들도 잘 챙겨준다고 한다. 리버스의 증언에 따르면, 가넷은 매년 이들을 데리고 나가 "프로라면 제대로 입고 다녀야지" 하면서 재단사를 불러 고급양복을 두 벌씩 맞춰줬다고 한다. 사실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하는 신인 중에는 드래프트되어 들어온 선수들 외에 자유계약으로 들어온 선수, 단기계약으로 들어온 선수들은 정규시즌 로스터에 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즉, 다시 볼 가능성이 낮은 선수들도 여럿 있는데 이들까지 전부 챙겨준 것.
- 앞서 서술한 내용을 보자면 알겠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선수이다. 그렇다고 선수의 기량이나 기록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며, 커리어 전반에 걸친 수상과 남긴 누적만은 두말할 것 없이 역대급. 가끔 빠가 까를 만드는 것인지 까가 빠를 만드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안티와 열성팬들에 의해 평가가 과도하게 격하되고 또 미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부디 어느 한쪽의 의견을 편파적으로 보고 한쪽의 의견을 맹신할 것도 없이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으로 각자 잘 판단하길 바란다.[105]
- 호불호를 떠나 '자기 사람'에 대한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다. 구단주 글렌 테일러와의 갈등이 봉합되는데는 감독이자 친구인 플립 손더스의 울브스 복귀가 결정적이었으며, 테일러가 손더스 사후 그의 유산을 거의 치워버리고 친했던 동료 샘 미첼 감독을 자르자 바로 은퇴할 정도였다. 게다가 춥고 프로 데뷔 전에는 별다른 연고도 없었던 미네소타 지역에 아직까지 살고 있으며[106], 첫 우승 이후 미네소타 팬들을 위한 헌사를 남겼다. 자기 친구들에 대한 의리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하셀이나 허드슨같은 평범한 선수들이 가넷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한다는 비판도 받을 정도였다. 실제로 팀이 망해가는데도 한번도 미네소타에게 먼저 트레이드 요구를 한 적이 없으며[107], loyalty란 단어를 상당히 자주 쓰고 실제로 이에 걸맞게 행동하기도 했다.
- 플립 손더스는 가넷에 대해 프런트 오피스로서는 상당히 유능하겠지만, 그의 치열한 성격 때문에 감독직에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봤는데, 이런 평가는 마이클 조던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그가 미네소타로 돌아온 날 기자가 혹시 감독이나 코치를 할 의향이 있냐고 하니까 "Hell No"라고 대답했다. 자기 와이프나 딸이 부탁하면 다른 것들은 해줘도 감독이나 코칭은 죽어도 절대 안 한다면서 코치 전향 가능성은 아예 없는 걸로 못을 박아버렸다. 관련 링크 그런데 LA에서 클리퍼스 선수들을 코칭하는 동영상이 등장했다. 특히 블레이크 그리핀에게는 여러 포스트 무브를 지도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껏 보여온 경기 외적으로 과묵한 모습과 그의 언행을 고려할 때, 상당히 놀라운 행보다. 다만 그 이후에 행보를 보면 코치로 일하려는 밑밥을 깐 것도 아니고 이런 쪽에 관심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그냥 아는 후배들을 좀 봐준 것에 불과해 큰 의미는 없다.
- 덩크 콘테스트에 나간 적도 없고, 숀 켐프나 드와이트 하워드 같은 역대급 장신 덩커들에 비해 많이 부각되진 않지만, 7피트 언저리 장신 덩커 중에선 역대급 실력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ESPN에서 2005년에 역대 최고 덩커 리스트를 뽑았을 때 15위에 랭크되기도 했다.[108] 큰 키에 긴 팔, 높은 점프력에서 오는 압도적인 높이, 긴 팔을 뒤로 쭉 뻗거나 접어서 꽂아넣는 파워와 박력, 덩크하고 짓는 다양한 표정과 가슴을 치는 등 포즈, 덩크하고 짐승처럼 포효하는 등 퍼포먼스까지 특유의 스타일이 있었다. 다만 덩커로서 명성을 떨친 건 사실상 커리어 초반 7, 8년 정도인데, 소속팀에서 워낙 맡은 역할이 많아 체력소모가 많아 오버스러운 덩크들을 다소 자제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좀 더 골밑에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2004년 언저리부터 꾸준히 벌크업을 해 00년대 초반까지 220파운드 정도였던 몸이 240->250파운드대 근육질 몸이 되면서 예전만큼의 점프력이나 활동량을 보여주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109] 특히 04-05 시즌에 무릎 통증을 참고 전경기 출장한 이후 무릎이 고질적인 문제가 되면서 결장도 슬슬 잦아져서 더욱 덩크에 에너지를 쏟아부을 여력이 없어졌다. 다만 점프력이 기본적으로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노장이 된 이후에도 2008년 파이널 1차전 당시 파우 가솔 위에 꽂아넣은 풋백 덩크처럼 거의 머리가 림까지 올라가는 미친 덩크도 가끔 보여줬다.
-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은퇴한 후 운동량이 부족해져서 살이 찌는데, 가넷은 원체 마른 체형이라 오히려 은퇴한 후 홀쭉해졌다. 실제로 커리어 초창기에는 220파운드가 될까말까할 정도로 말랐다가 근육을 꾸준히 붙여서 240, 250파운드 이상까지 올렸고, 말년에 다시 근육이 빠졌다. 많은 빅맨들이 말년에 살이 붙어서 몸무게가 는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케이스.[110] 이 때문에 40대 중반이 된 이후에도 군살이 하나 없어 스키니진을 즐겨 입는데,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패션이기 때문에 Area21을 진행하다가 Inside NBA과 방송연결할 때 Inside NBA팀, 특히 찰스 바클리의 놀림을 받는다. 바클리 曰, "너 스키니진 입기는 너무 늙은거 아니냐?"고.[111]
- 가넷과 바클리는 방송에 나올 때마다 장난스럽게 투닥투닥거리는데, 가넷이 아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 전에 한 방송에서 바클리가 방송 진행하는 샤킬 오닐과 Area21에 게스트로 나온 게리 페이튼을 호명하며 "샤크 자네도 명예의 전당 멤버고, 나도 명전 멤버고, 게리도 명전 멤버고, 케빈도 명전에 가까운(borderline-hall-of-famer) 사람이고"라고 은근슬쩍 놀리자 가넷이 바로 "나 챔피언이고, 샤크 당신도 챔피언이고, 게리도 챔피언이고, 찰스는 거의 챔피언(almost-a-champion)이고..."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또한 가넷이 말을 장황하게 하자 바클리가 "KG 들려? 자네 이거 방송시간 30분밖에 안되는 거 알지?"라고 태클을 걸었는데, 뒤이어 바클리도 말을 장황하게 하자 바로 "찰스 들려? 형 이거 방송시간 30분밖에 안되는 거 알지?"라고 한방 먹이기도 했다.
- 데뷔 초기였던 95-96시즌에 마이클 조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탈탈 털린 아찔한 추억이 있다. 정규 시즌 후반 당시 시카고에서 시카고 불스와의 원정경기를 치르게 되었던 가넷은 그 날 마침 친구들이 경기장에 응원을 와 주기도 했고, 본인도 시즌 후반이 되면서 긴장했던 게 어느 정도 사라지는 등 컨디션이 상당히 좋았는데, 그 날 시합에서 조던의 전담마크맨이었던 JR 라이더가 조던을 상대로 선전하는 것을 보고 흥분해서 "조던을 뭉개버려! 아주 반 죽여버려!"라고 소릴 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걸 옆에서 듣고 말았던 조던이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짝다리를 짚은 특유의 시그니처 포즈로 15초 정도 지긋이 자기를 쳐다봤고, 가넷은 움찔했지만 이내 갈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더 크게 라이더에게 "X까고 조던을 아주 그냥 발라버려!"라고 소리쳤으며, 이런 철없는 막내 신인때문에 당혹스러웠던 JR 라이더는 가넷에게 "알았으니까 제발 좀 가자"라고 진정시킨 뒤 조던에게 다가가 "쟤가 아직 어려서 그런다"고 달랬지만, 역사상 최고의 소인배는 이미 빡칠 대로 빡쳐버렸다고 한다. 가넷 본인 말로는 그 이후론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6~7분동안 10초 바이얼레이션도 2번이나 범했고, 분명 조던은 18점을 기록 중이었는데 나중에 전광판을 보니 조던이 22점을 추가해 40점을 기록한데다 2점이었던 점수차는 25점까지 벌어져 있었다고 한다. 시카고는 조던, 피펜을 비롯한 주전 3명을 교체하는 여유를 보여준 반면 가넷과 라이더는 4분동안 단 한 골도 못 넣었고, 나중엔 아무 것도 못하고 똥개 훈련하듯 코트를 왔다갔다 하는 것만으로 힘들어하며 라이더에게 사과를 하니 라이더는 그런 가넷에게 "뭐 상관없어. 근데 다음부턴 제발 입닥치고 조용히 있어"라며 한 소리를 했다고... 한편, 게토레이를 마시는둥 마는둥 하면서 지쳐 널부러진 가넷과 라이더 옆을 조던이 지나가면서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좋아~ 젊은 친구들. 니들 시합 다 한거야? ■■"라고 욕을 섞어가면서 도발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그 때 조던 앞에서 함부로 입을 털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래도 가넷 본인은 이 썰을 풀면서 이 에피소드가 MJ와 얽힌 본인의 최애 스토리라고 하기도 했다.
- 트래시 토킹의 일가견있는 그가 밝힌 최고의 트래시 토커는 다름아닌 팀 던컨, 게리 페이튼, 찰스 바클리였는데, 팀 던컨은 아무리 트래시 토킹으로 도발을 해도 반응이 없는데다 길게 안 말하고 별 거 아닌 한 마디만으로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 특이한 재능을 가져서 가넷이 먼저 GG를 쳤다고 할 정도고, 게리 페이튼은 쉴 새없이 떠드는 입으로 도발, 작전지시, 심판어필까지 다 해내는 걸 보고 트래시 토크 마스터라 인정했을 정도였고, 찰스 바클리는 트래시 토킹도 진심으로 하는 상남자였다고 회상했다.
- 선수들간의 친목이 당연해진 2000년대 선수라 거친 언동과 행동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 거칠었던 기성세대에 속하는 농구인들은 가넷을 올드스쿨 타입의 선수라고 부르지만, 신세대 팬들은 지나치게 거칠다며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밖에 없는 선수.
- 가넷의 체형이 근육질이 아닌것은 절대 아니나 워낙 몸이 길어서 가넷이 너무 말랐다, 파워가 약하다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가넷 본인의 자서전에서 쓰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나는 힘이 매우 좋다"라고 하며 보스턴 시절 팀동료이자 후배였던 글렌 데이비스와의 팔씨름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글렌 데이비스라는 선수도 힘이 겁나게 좋은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한번은 데이비스가 보스턴 선수들을 팔씨름에서 하나둘 꺾으며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결국 가넷에게까지 트래쉬토킹을 시전하며 도발하자, 빡친 가넷이 건방진 후배를 상대로 팔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데이비스가 땀을 비오듯 흘릴때까지 그냥 가만히 버티고 있다가 힘이 조금 빠진다 싶을 때 면전에다 고함을 지르며 팔을 내리쳤다고 한다. 이때 이긴후 "이 구역의 왕은 나다, 이 뭣도 아닌 xx야."라고 하였다고...[112][113] 인게임에서도 그 무지막지한 덩치의 야오밍의 포스트업을 버텨내는 위엄을 보였다.
- 가넷의 우상이 매직 존슨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넷의 플레이 스타일이 매직에게 영향을 받았고 첫 올스타전에서 매직과 하이파이브를 한 손을 안 씻을 거라고 카메라를 향해 농담할 정도로 매직을 존경한다.
9.1. 글렌 테일러와의 악연
케빈 가넷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역사상 비교대상조차 없는 가장 위대한 농구선수임에도 은퇴한 수년이 지나도 그의 저지는 타깃 센터에 걸리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바로 구단주 글렌 테일러와 가넷간의 악연이다.가넷은 자신이 드래프트되어 황금기를 보낸 미네소타와 팀버울브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구단 인수를 고려하고 말년에 복귀한 것만 봐도 명확하다. 또한 은퇴 이후부터도 고향인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아닌 미네소타에 살고 있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114] 그러나 울브스 구단주 글렌 테일러와는 오랜 악연이 있다.
원래 가넷과 테일러는 서로에 대한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넷은 팀의 기둥으로서 팀 구성원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며, 팀은 그만큼 가넷의 의견을 존중했고 이와 관련해 '가넷이 좋아하는 동료들만 계약하는 것이 아니냐'고 다소 논란이 있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2004-05시즌 도중에 벌어졌는데, 전 시즌에 프랜차이즈 역대 최고 성공을 거두고도 시즌 내내 5할 승률 언저리에서 허덕거리고 있었던 울브스를 두고 구단주 테일러가 팀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던 케빈 맥헤일 부사장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맥헤일은 이에 플립 손더스를 해임하고 본인이 감독대행을 맡았다. 손더스는 오랜 경력과 훌륭한 인품으로 미네소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가넷과 맥헤일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구단주 테일러에 많은 비난이 쏠렸다.
팀의 부진이 계속되던 2006-07시즌, 가넷의 트레이드 루머가 돌기 시작했으나 가넷은 처음에 이런 움직임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여러 차례 미네소타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가넷은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런 움직임에 대해 "매우 모욕적으로 느꼈고(deeply offended)" 배신당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테일러는 공개적으로 가넷이 트레이드 요구를 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가넷은 트레이드 이후 "다른 사람도 나에게 의리를 지킨다면(loyal) 나도 의리를 지키는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 상황(상대방이 의리를 지키는 것)이 바뀐다면 나도 (결정을 내리는데) 별 문제가 없게 된다(it's pretty easy for me)"란 모호한 코멘트를 남겼다. 다만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비난하진 않았다.
그러나 2008년의 3월 중에 상황이 달라졌다. 트레이드 이후 폭망한 울브스에게 실망했던 건지 테일러는 공개적으로 가넷이 미네소타에서 뛴 마지막 시즌에 고의로 '태업(tank)'을 했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KG가 태업한 것에 가깝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뛰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요. 그게(KG의 탱킹)이 팀을 바꿔놨고 우리팀이 예전만큼 뛰어나지 못하게 됐습니다(It was more like KG tanked it. I think the other guys still wanted to play. But it sure changed the team and it didn't make us [as good])"라고 주장했다. 또한 몇몇 선수들이 가넷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을 해야했다며 이 때문에 "미칠 뻔했다(it drove me nutes)"라고 말했다.
참고로 KG가 06-07시즌에 태업했다는 주장은 생억지에 가깝다. 당시 가넷은 총 6경기를 결장했으며, 이 중 징계로 1월에 한 경기를 결장하고, 나머지 5경기는 시즌 막판 4월 9일 경기 이후 넓적다리 통증 때문에 결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즌에 KG는 평균 39.4분을 뛰었다. 게다가 당시 가넷의 부상 자체가 과로로 인한 것이었다. 넓적다리 부상 자체가 4월 9일에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 맥헤일이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부상은 가넷을 몇달간 괴롭혀왔으며, 맥헤일은 가넷이 너무 많이 뛰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해왔다고 한다. 또한 이 부상이 지난 수년간 많은 출전시간을 소화한 것 때문에 너무 많이 써서 생긴 고질적인(chronic)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맥헤일은 이미 관리를 받고 있던 팀 던컨의 예시를 들며, 앞으로 가넷의 출전시간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즉,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지고 있던 가넷이 그동안 쌓인 마일리지 때문에 내구력이 다해서 부상을 입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었던 것인데 이걸 갖고 태업이니 뭐니하는 게 개소리다.[115]
게다가 가넷이 몇달간 부상을 안고 뛰다가 왜 하필 4월 9일 이후 아웃됐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월 9일 당시 미네소타는 토론토 랩터스와 홈경기에서 패배했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유타 재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시즌 38승째를 거뒀다. LA 레이커스는 이미 40승을 거둔 상황. 이로서 팀버울브스는 잔여경기에서 전승을 거둬도 37승에 그쳐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었다. 즉, 몇달동안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플레이오프 진출시키겠다고 경기당 40분 가깝게 억지로 뛰던 선수가 어차피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자 막판에 결장한 것을 가지고 태업 운운한 것이다. 애초에 76경기/39.4분을 뛴 선수에게 "태업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개소리.
심지어 가넷은 위에서 맥헤일이 지적한대로 미네소타에서 너무 과하게 뛰는 바람에 보스턴 셀틱스 시절부터는 출장경기수와 출전시간이 현저하게 줄었다. 당장 07-08시즌에 71경기/32.8분을 뛰었고, 이후에는 72경기 이상 뛴 적도, 33분 이상 뛴 적도 없었다. [116] 즉, 06-07시즌 당시 가넷은 태업은커녕 엉망이 된 몸상태에 비해 오히려 너무 과하게 뛴 것이다. 이런데 태업 운운하니 빡돌지 않을 수가 없다.
가넷은 테일러의 코멘트에 대해 "난 지금 보스턴에 있고, 글렌 테일러가 케빈 가넷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저 말은) 그저 어떤 사람들의 기질에 대해 보여줄 뿐이다.(I'm in Boston right now, I care less what Glen Taylor thinks of Kevin Garnett. It just shows the taste of some people)"라고 말했다. 이후 가넷은 다들 알다시피 08년에 우승을 했으며, 우승 이후 팀버울브스 팬들에 대한 헌사를 남겼다. 그러나 미네소타와 팬들에 대해서는 꾸준히 사랑을 표하면서도 팀 프런트에 대해서는 "하나도 긍정적인 말을 할게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러나 플립 손더스가 2013년에 울브스 사장으로 임명되고, 2014-15시즌을 앞두고 감독직까지 겸임하게 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가넷의 절친한 친구이자 멘토였던 손더스의 복귀로 인해 미네소타 프런트에 대한 가넷의 악감정음 많이 누그러들었고, 시즌 초인 2014년 11월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언젠가 매입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손더스가 테디어스 영을 보내고 가넷을 데려오면서[117] 울브스 팬들에게 감동을 준 가넷의 친정팀 복귀가 드디어 이뤄졌다.
가넷은 2015년 오프시즌에 팀과 2년 재계약을 했고, 테일러와 악연에 대해서는 "용서해야 할 때"라며 "몇가지는 잊진 않겠지만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갈등을 봉합하고자 하는 의지를 밝혔다. 앞서 인수 문서에서 언급했듯이 손더스는 또한 가넷이 팀버울브스 인수를 시도할 때 같이 힘을 합칠 투자자 그룹 후보 중 하나이기도 했다. [118]
그러나 2015년 10월에 비극이 닥쳤다.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손더스가 안타깝게 사망하고 만 것이다. 울브스는 당연히 개막전에 그에 대한 추모 영상을 상영하고, 시즌 내내 져지에 "Flip"이란 문구를 달고 뛰는 등 그를 기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가넷과 테일러 사이를 중재해주던 손더스가 사라지자 테일러 구단주가 칼을 든 것. 시즌 이후 테일러는 프런트를 아예 갈아엎다시피했으며, 코치에서 감독대행으로 승격되었던 샘 미첼조차 잘라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톰 티보도와 스캇 레이든 등 외부인으로 채웠다. 당연히 이와 같은 행보는 가넷을 격노하게 했다. 원래 가넷은 복귀 당시 은퇴 후 (당시 손더스가 이끌고 있던) 미네소타 프런트에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가넷에 대한 양해도 없이 프런트를 전부 다 잘라버리고 심지어 절친인 미첼도 잘라버린 것이다. 갑자기 실업자가 된 미첼은 자신이 해고된 것으로 가넷이 흔들릴 수 있으며, 은퇴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으며, 아니나다를까 이후 가넷은 팀과 남은 계약기간 1년에 대한 바이아웃 협상 이후 은퇴했다.
이후 가넷은 애초 약속처럼 미네소타 프런트직을 제안받지 못하고 방송인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테일러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가넷은 팀이 플립 손더스를 영구결번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으며, 손더스에 대한 추모도 그에 대한 기억도 많지 않은 젊은 선수들을 강제로 참여시키는 식으로 억지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영구결번에 관한 말도 엇갈렸다. 가넷이 은퇴한 이듬해인 2017년 2월에 테일러는 팀이 가넷에게 그의 영구결번식을 치러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했으나, 가넷은 울브스가 자신과 접촉한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뒤이은 인터뷰에서 그는 테일러의 제안 자체가 진심이 아니라 팬들의 압박 때문에 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플립 손더스가 죽기 전 둘이 동의한 바가 있었으나 손더스 사망 이후 이를 테일러가 뒤집었으며, 이에 대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테일러가 "뱀(snake)"이며, "난 뱀같은 인간들과 절대 비지니스를 안 하겠다"고 했다. 앞서 언급된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입성에 때맞춘 팀버울브스의 영구결번 제의 관련 내막은 이런 것에 기인한다.
또한 가넷은 인터뷰를 통해 미네소타의 프런트는 "형편없다(sucks)"라고 했으며, 지미 버틀러가 울브스로부터 트레이드를 요구했을 때 방송에서 "글렌(테일러)은 농구에 대해 개뿔도 모른다(doesn't know shit about basketball)"라고 말했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2020년 7월에 가넷은 인수시도를 계속하던 와중에 그간 악연이 계속되었던 테일러에 대해 공개적인 칭찬을 했다. 허나 글렌은 또다시 가넷은 접촉조차한적 없다며 말을 뒤틀어버렸고, 결국 가넷의 인수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가넷역시 인스타 라이브에 굉장히 뼈있는 말을 써내렸고, 2021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후반기 시작시점기준
결국 테일러는 15억불 가량에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팀을 팔아넘기면서 그 길고 긴 늑대군단과의 인연을 마쳤다. 약동자 역시 뉴욕 메츠 인수전에서 밀려나 메츠 대신 팀버울브스를 인수했다는 인식을 만회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가넷 영구결번에 힘쓸 것이라는 게 주된 의견이다.[119] 다만 실제 영구결번은 로드리게스와 공동구단주인 마크 로어가 실제 대주주가 되는 2023년 정도에나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테일러가 지분을 팔기로 합의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딜의 내용은 2021년에 20%, 22년에 20%, 23년에 40%를 마저 사기로 한 것이다. 참고 즉 2022년 현재 울브스의 구단주는 아직까진 글렌 테일러이며, 저 두 사람이 구단주가 되는 건 2023-24시즌부터이다. 팀 매각 소식이 나온지 1년 넘게 가넷의 영구결번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다만 위 내용이 오보인지 원래 알려진 정보가 잘못된 것인지 2023년 기사에는 매각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2024년이라고 나와있다. https://www.startribune.com/marc-lore-alex-rodriguez-own-40-percent-minnesota-timberwolves/600262661/ 확실한 건 2023년 9월 시점에 아직 지분 매각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 이 때문에 아직 팀버울브스의 구단주는 테일러로 나와있으며, 로드리게스는 minority owner로 언론에 나오고 있다. 어쨌거나 가넷과 테일러의 악연이 정리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24년 3월에 잔여 지분 매입을 위한 서류 작업이 한창이던 로드리게스가 가넷의 영구결번을 진행할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이 기사에 따르면 에이로드가 SNS에 올린 사진에서 "해야 할 것"이라도 적힌 리스트에 "울브스 매입"에 (이미 했다는 뜻으로) 취소선을 치고, 그 밑에 "KG 영구결번"이라고 적어놨다.[120] 즉 새 구단주가 취임하는 이상 울브스에서 가넷의 영구결번은 이제 시간문제라고 볼 수 있다.
10. 관련 문서
[1] 맨발 기준 211cm (6' 11") / 착화 신장 213cm (7' 0")[2] 가넷의 키는 해외 팬들 사이에서 의외로 키베가 자주 일어나는 사안인데, 정확히 말하면 가넷의 정확한 키는 공개된 적이 없다. 가넷 시대에는 드래프트 사전 신체검사 결과가 일괄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으며, 가넷 본인이나 주변인들이 지나가는 말로 한 것 외에는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 그의 정확한 키가 공개된 적이 없다. 또한 드래프트 당시 19세였기 때문에 키가 변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그가 라쉬드 월러스보다는 확실히 크고, 샤킬 오닐보다는 확실히 작다는 것. 두 선수 모두 한때 가넷의 동료였기 때문에 나란히 서거나 걸어다니는 영상이 많아서 이 점은 확실하다. 문제는 두 선수 모두 신체검사 결과 공표가 되기 전 시대 사람들이다. 그리고 가넷과 오닐은 체형이 워낙 차이가 크기 때문에 사진이나 영상에 따라 둘의 키 차이가 거의 없어보이거나 꽤 나 보이는 등 편차가 크다. 또한 쉬드는 NBA카드에 과거 208cm로 표기된 적이 있다. 어쨌거나 가넷의 맨발 신장은 211cm~213cm 사이일 것이 팬들 사이에선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가넷의 키가 유독 논란이 되는 이유는 가넷이 팔다리, 목이 길어서 길쭉해보이는 인상임과 동시에 어깨가 좁고 말라서 (키에 비해) 체격이 작은 NBA선수치고 특이한 체형이기 때문. 이 때문에 단독으로 보면 정말 키가 커보이지만, 오닐같은 비슷한 키의 거구 옆에 서있으면 작아보이기도 한다.[3] 신인 시절에는 97.8kg (215 lbs), 최전성기였던 03-04시즌엔 109kg (240 lbs), 보스턴 시절에는 115kg (253 lbs), 은퇴 후 체중이 빠져 현 체중이 되었다.[4] 데뷔 초기에는 스몰 포워드로 나오기도 했지만 커리어 대부분을 파워 포워드로 대부분 뛰었다. 또한 팀 사정에 따라 센터로 나오는 시기도 있었는데, 2005년에서 2007년에 팀이 부진의 절정을 달릴 때는 센터로 많이 나왔으며 나이가 들어 발이 느려진 이후로는 센터로 나오는 비중이 점점 늘다가 미네소타로 돌아오면서 다시 파워 포워드로 복귀했다.[5] 이 등번호는 자신이 존경했고, 같이 뛰었던 말릭 실리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달았던 백넘버. 이 2번 백넘버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구단의 유일한 영구결번이다.[6] 팀 던컨과 케빈 가넷이 둘다 21번, 코비 브라이언트가 24번으로, 21을 뒤집으면 12가 되는데 이렇게해서 둘의 번호를 더하면 24가 나오기에 흥미로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 셋이 서로를 상대로 시합이 있는 날은 코트 위가 말 그대로 전쟁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치열했기에, 이 셋이 역대 명예의 전당 헌정 최고의 멤버들이라는 평도 적지않다. 그리고 코비의 죽음으로 인해 그 감정적인 부분이 극대화 되기도 했었다.[7] 미국의 공립고등학교는 대부분 4년제[8] 애초에 편의점 같은 곳에서 총기를 판매한다.[9] 본 게임 이전에 열린 3점슛 콘테스트에도 참가했다. 비록 결승에서 9점에 그치지만 빅맨이 3점슛 대회에 나선다는 게... 참고로 이 대회에선 가넷의 절친인 스테판 마버리, 빈스 카터, 폴 피어스, 샤리프 압둘라힘 등 미래의 NBA 스타들이 대거 참여해서 초고교급 플레이를 펼치는데, 워낙 유명한 대회라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가넷은 210cm에 가까운 신장임에도 마치 가드처럼 뛰어다니는데, 한번은 레이업을 하고, 상대팀이 반대쪽 코트까지 기습 롱패스를 하자 순식간에 반대쪽 코트까지 질주해 블럭을 시도하는 괴물같은 스피드와 점프력을 보여준다.[10] 미국의 대부분 주는 그해에 그 주에서 가장 탁월한 농구선수에게 MVP격인 Mr.Basketball란 상을 수상하는데(각 주마다 시행하기 때문에 선발 시스템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선발하지 않는 주도 있다), 한주에 한명씩 선정하기에 대부분 4학년이 선정된다. 그런데 가넷은 Mr.Basketball을 두차례 수상한 극소수의 선수 중 하나였다. 그는 3학년이던 1994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수상한 뒤, 위에 언급된 폭행 사건 이후 일리노이주로 전학가 95년엔 일리노이에서 수상했다. 그가 수상하기 1년 전인 93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Mr.Basketball은 다름 아닌 가넷의 훗날 동료가 되는 레이 알렌이었으며(알렌은 가넷보다 1살 위지만 학년은 2학년 위였다), 96년 수상자는 NBA에서 가넷과 한때 치열한 경쟁을 한 저메인 오닐이었다. 여담으로 두번 타기도 힘든 Mr.Basketball을 세번이나 탄 유일한 선수가 바로 르브론 제임스이다.[11] 한국의 수능과 달리 SAT는 1년에 7회의 시험이 치러지고, 이중 제일 높은 점수를 골라서 쓸 수 있기에 비교적 대입 시험의 난이도가 낮다고 평가된다.[12] 가넷이 현대농구에 더 맞는 선수였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로우포스트 몸싸움의 비중이 당시보단 적어진 2010년대 이후였다면 가넷은 당연히 4번이나 5번을 봤을 것이고, 멀티포지션이 당연한 시대였다면 (비록 '리그에서 가장 유니크한 선수'란 소린 못 들었어도) 초창기처럼 그의 포지션이 애매하거나, 골밑 비중이 너무 적어 아쉽다는 말은 안 들었을 것이다.[13] 자유투 시 정렬할 때 보면 빅맨치고 어깨가 굉장히 좁다.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2미터 초반처럼 보일 정도.[14] 미네소타가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팀이 된 2023-24시즌 스쿼드와 이 시기 울브스를 비교하는 팬들도 많은데, 두 팀은 판이하게 다른 시대와 룰에 뛴 전혀 다른 팀이기에 비교가 힘들다. 23-24시즌은 리그 페이스 (각 팀이 48분당 갖는 평균 공격권)이 98.6에 달하는 빠른 페이스 시대고, 03-04시즌은 리그 페이스가 90.1에 불과할 정도로 느린 페이스 시대였다. 현재 팀당 35개에 달하는 3점슛 시도갯수도 당시는 14.9개에 불과했다. 이런 시대에 울브스는 리그 21위의 느린 페이스로 평균 94.5점을 넣으며 상대팀에게 89.1점을 내주는 공수밸런스가 잡힌 팀으로서(오펜스 레이팅 5위/디펜스 레이팅 6위), 느린 하프코트 농구로 경기를 끌고 가 상대를 수비로 압박하며 주로 3점라인 안쪽에서 점수를 짜내는 중거리 위주 팀이었다. 핸드체킹 폐지 이후 고득점이 대세가 된 리그에서 코트를 넓게 쓰는 24 울브스와는 경기 스타일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즉 리그 룰과 심판 성향 차이로 인해 '당시 룰로 붙으면 04울브스가 유리하고, 현재 룰로 붙으면 24울브스가 유리하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코트를 좁게 쓰던 당시 울브스가 현재 룰로 붙는다면 평균 113점씩 넣는 현재 울브스를 막기 힘들며, 피지컬한 수비에 훨씬 관대한 당시 룰로 붙는다면 당대 최강의 수비수인 가넷과 수위급 퍼리미터 수비수 하셀에게 현재 울브스가 고전할 것이다.[15] 가넷의 회고에 따르면 점프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백보드의 네모 윗 부분을 손으로 터치해보라고 했는데(11.5피트 정도 되는 지점이다), 가넷은 이곳을 공을 들고 양손으로 터치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드와이트 하워드가 보여준 12피트 골대 덩크도 무난한 수준.[16] 다만 이건 전반적인 평가가 아니고 게인스란 스카우트가 가넷에 대해 그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가넷의 재능이 뛰어나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드래프트 당시 압도적으로 최고의 선수가 되었어도) 20년만의 첫 고졸선수가 전체 1순위로 뽑힐 가능성은 0%였다.[17] 재밌는 것은 맥헤일은 원래 가넷을 뽑을 생각이 없었으며, 원래 가넷을 칭찬한 것은 미네소타보다 상위 픽을 갖고 있던 네 팀 중 하나가 가넷을 고평가해 그를 뽑고, 울브스는 당시 톱4로 꼽혔던 대학선수 4인방(조 스미스, 안토니오 맥다이스, 제리 스택하우스, 라쉬드 월러스) 중 한명을 뽑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크아웃에 참가한 이후 가넷의 실력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톱4가 아니면 의미 없으니 도박이나 한번 해보려고 했던 것인지, 가넷을 뽑게 된다.[18] 체격이 비슷한 것은 아니었다. 맥헤일과 가넷은 둘 다 키가 크고 깡마르고 팔이 길었지만, 어께가 좁은 가넷과 달리 맥헤일은 엄청나게 어께가 넓었다. 가넷보다는 오히려 (좀 더 길고 날씬한) 필 잭슨 체형에 가까웠다. 맥헤일은 윙스팬이 8피트에 달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있다고 해도 7피트5인치 정도(이것도 상당히 긴 편이다)로 알려진 가넷보다 훨씬 윙스팬이 길었다.[19] 가넷과 이때 같이 선정된 톰 구글리오타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역사상 최초의 올스타로 기록된다.[20] 직장폐쇄로 인한 단축시즌이었다.[21] 바로 다음 시즌 CBA 협상결렬로 인한 직장폐쇄 (lockout) 이후 엄청나게 복잡한 맥시멈 조항이 만들어진 것은 가넷의 크레이지 딜 때문이란 것이 거의 정설이다.[22] 결국 그는 1억불까진 아니지만 10년 8천만불에 사인하고야 만다[23] 원래 한 선수가 계약하면 그 계약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선수들에게 "기준"이 된다[24] 물론 조던의 가치를 생각하면 과도한 금액은 아니며, 사실 조던은 커리어의 대부분을 실력보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뛰었다.[25] 위의 가넷 계약 이후 그의 절친이자 팀동료인 스테판 마버리는 자존심이 상해서 "1달러라도 모자란 금액엔 싸인 못한다(I won't sign for a dollar less)"라고 못박아버렸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자기가 가넷보다 못할 게 없다고 믿은 마버리 입장에선 자존심 문제가 컸다. 결국 마버리는 뉴저지 네츠로 이적하고, 기대를 모았던 가넷-마버리 콤비는 허무하게 해체되고 만다.[26] 이러한 계약은 단순히 미네소타의 뻘짓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가넷의 에이전트가 요구액을 상당히 크게 불렀으며 이 때문에 케빈 맥헤일과의 사이가 잠깐 소원해질 뻔했다는 설이 파다하다. 여담으로 가넷은 2014년 기준 NBA 누적 연봉 역대 1위다.[27] 89-90시즌부터 22승, 29승, 15승, 19승, 20승, 21승을 거두고 가넷이 입단한 첫해 26승, 가넷이 주전급으로 올라서고 그와 구글리오타가 올스타에 오른 이듬해에 40승으로 첫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다.[28] 굳이 위닝시즌이라 꼽은 것은 "서고동저 때문에 플레이오프 실패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네소타는 가넷 없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17년동안 단한번도 5할을 넘긴 적이 없다.[29] 또한 이 시기는 가넷의 리더십 문제도 크게 대두되던 시기이다. 초기의 파트너였던 스테판 마버리는 가넷의 장기계약 때문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부담을 느끼고 트레이드를 해버렸고, 윌리 저비악과 가넷의 사이는 최악이었으며, 케빈 맥헤일의 가넷 감싸기가 과도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30] 알 제퍼슨, 라이언 곰스, 세바스찬 텔페어, 제럴드 그린, 티오 레틀리프[31] 원래 빅맨치고 점퍼 비중이 높았지만 더 심해졌다.[32] 전방위 수비와 리바운드가 장점인 빅맨들은 나이가 들고 기동력이 떨어지면 한 분야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데, 이때 가넷은 리바운드에 들이는 노력을 어느 정도 줄이는 대신 수비에 집중하고, 30대 중반에 시카고 불스에 합류한 데니스 로드맨의 경우 특급 수비수 조던/피펜이 함께 했기에 수비범위를 좁힌 대신 리바운드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보스턴 시절 가넷은 리바운드 단속력에서 울브스 시절에 비해 많이 아쉬운 모습을 보였는데, 울브스 시절 가넷은 무너지는 팀수비를 혼자 떠받들면서도 4년 연속 리바운드 1위에 올랐었다. 우승을 노리던 셀틱스는 이미 신체능력 저하가 온 가넷을 이렇게 굴릴 수 없었기에 출장시간을 줄이고 가넷을 수비에 집중하게 했으며, 이 때문에 10년만에 평균 리바운드 수치가 한자리수로 떨어지게 된다.[33] 후에 이걸 론리 아일랜드가 I'm On A Boat에 차용한다. 그리고 가넷이 홍보하는 신발 브랜드의 광고 문구기도 했다.[34] 또 하나 감안해야 할 것은 수비는 스탯으로 드러아지 않는다는 것이다. 케빈 가넷이 파이널에서 오돔과 가솔을 고전하게 한 수비력이 고작 1.7스틸/1블럭이란 스탯으로 커버된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렌과 피어스의 장점인 득점과 야투율/자유투성공률/3점슛 성공률은 전부 게임스코어에 반영되는 수치지만, 가넷의 장점인 수비는 극히 제한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스탯만 보고 '가넷이 파이널에서 빅3중 가장 못했구나'는 결론을 내리긴 무리가 있다. 물론 언급한대로 스탯만 봐도 1~3라운드에서 단연 최고의 선수는 가넷이었다.[35] 파이널 이전까지 1~3라운드에서 가넷은 17.8, 피어스는 12.8에 알렌은 9.8을 기록하고 있었다.[36] 사실 미네소타 팬들은 10년이 넘게 팀에 충성했는데도 원맨팀의 한계로 우승을 하지 못했던 가넷에게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였고, 그래서 그가 미네소타 유니폼을 입고 다시 한번 뛰는 걸 보고 싶었을수도 있다.[37] 실제로 세 선수는 지구가 멸망하거나 NBA가 갑자기 해체되지 않는 이상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예정이고 실제로도 세명 모두 2020년 입성이 확정되면서 그렇게 됐다.[38] 실제로 타운스의 플레이 스타일은 가넷과 비슷한 면이 없지않아 있다.[39] http://basketball.realgm.com/wiretap/243803/Kevin-Garnett-Joining-TNT-Could-Also-Work-As-Coaching-Consultant[40] 자신의 등번호 21번을 딴것이다. Area 51은 굉장히 미스테리한 지역으로 여러 문화에 자주 언급되는 장소이다. 그것을 오마주한 듯.[41] 또 다른 본인 역으로 출연한 더 위켄드는 카메오로 나온다.[42] 가넷이 디애슬래틱 인터뷰에서 밝힌 내막은 이렇다. 가넷이 홈커밍을 했던 2015년 당시 미네소타 사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플립 손더스와 은퇴 후 프런트에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손더스는 모두 아는대로 가넷의 스승으로서 두 사람은 10년 넘게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가넷이 다시 미네소타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 해 플립 손더스 사장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고, 글렌 테일러 미네소타 구단주가 가넷의 통수를 치면서 둘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43] 조짐은 있었다. 2021 네이스미스 농구 명에의 전당 당시 폴 피어스와 앨런이 먼저 사진을 찍었고, NBA 선정 위대한 75인때도 군말 없이 사진도 찍었다. 그때도 어색했던 티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모든 감정을 풀어낸 상징적인 장면.론도만 머쓱해졌다.[44] 가넷이야 설명할 필요가 없고, 테일러 역시 미네소타 주 의원으로까지 활동한 미네소타 토박이다.[45] 인터내셔널 비지니스 타임즈에 따르면 2013년에 재산이 1억9천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가넷은 연봉으로만 3억달러 넘게 받고 광고수익까지 합하면 거의 4억에 가까웠겠지만, 고액 연봉자인 만큼 세금도 많을 것이며 그동안 소비한 것도 있을 테니 누적 수익의 거의 반을 모은 건 굉장히 알차게 모은 셈이다.[46] 본래 NBA는 선수가 다른 국가의 농구팀이나 미국의 스포츠팀의 지분을 소유하는 것은 몰라도 NBA 팀 지분을 소유하는 걸 금지한다. 현재 독일 농구팀 브라운슈바이크를 지분 100%로 인수한 데니스 슈뢰더와 필라델피아 유니언의 지분 일부를 구입한 케빈 듀란트가 그 예시. 그래서 은퇴선수들 일부가 NBA 팀 지분을 소유하는 경우가 전부다. 가장 대표적인게 새크라멘토 킹스의 지분 일부를 가진 샤킬 오닐.[47] 조던은 2014년 기준으로 스포츠 선수 출신으론 최초로 자산이 10억 달러를 넘겼다. 조던같은 경우 엄청난 도박광에다 평소 돈도 물처럼 쓰고 이혼하느라 재산분할 털리고도 이정도다.[48] 그 외 미국에서 불리는 별명으로는 Big Ticket, KG등이 있다.[49] 이는 후에 가넷이 터프하지 않았다는 일설이 나올 때마다 가담되는 얘기. 찰스 바클리도 이런 말을 했다.[50] 이 경기를 찾아보면 가넷이 지쳐 숨을 몰아쉬면서도 4쿼터의 거의 모든 득점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51] 가넷은 2000년대 초반까지 파워 포워드로도 뛰다가 스몰 포워드로도 뛰다가 하면서 왔다갔다했는데, 전성기 시절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나 워싱턴 위저즈 시절 마이클 조던을 맨투맨으로 막은 적도 있다. 한 두번 공격권에서 막은 게 아니라 시합 내내 매치업된 것. 물론 두 선수가 상당히 민첩하기에 봉쇄하거나 그러진 못했지만, 7푸터가 스윙맨을 경기내내 막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 이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가넷의 가장 효율적인 활용법(외곽까지 커버가 가능한 골밑 수비수)을 찾으며 이 역할로 정착하게 된다.[52] 이를 헷지 앤 리커버라고 하며 2대2 수비의 필수요소이다.[53] 야오밍이 루키시절 스테판 마버리와 1대1 상황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54] 이런 식으로 작은 선수 막는 능력은 벤 월러스도 있었으며(가넷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타이슨 챈들러도 가넷보다는 떨어지지만 젊었을 때 포인트 가드를 잠깐씩 무리없이 막고는 했다.[55] 가넷은 고교 시절에 포인트가드를 포함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고, 고졸이었기에 초창기엔 로우포스트 공격에선 모자란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우포스트 수비에선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에도 기본 포지션은 센터로 두고 수비만큼은 (프로에서처럼) 커버 범위는 넓되 골밑 수비가 중심인 역할을 주로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고등학교 시절인 맥도날드 올스타전 경기를 보면 골밑수비시 풋워크가 굉장히 탄탄하고 수비스탠스가 매우 뛰어나다. 다만 공격에서는 프리롤을 갖고 아무렇게나 하고, 고등학교 때에는 그게 다 통했기에 프로 데뷔 초창기에는 포지션이 애매했던 것.[56] 사실 가넷 이후 무수히 쏟아져나온 '제2의 가넷', 조나단 벤더나 스트로마일 스위프트, 대리우스 마일스 같이 키 크고 운동능력 좋은 고졸빅맨들과 가넷을 가른 게 이 수비 기본기와 파워였다.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운동능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고졸 빅맨들은 대부분 갸냘픈 체격을 갖고 있었고, 골밑수비를 할 만한 파워나 기본기가 없어 NBA에서 애매한 선수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가넷은 호리호리한 체격으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강한 편이었고,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센터나 파워포워드들과도 매치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슈퍼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다. 2000년대에 트렌드가 서서히 바뀌긴 했지만 가넷의 전성기이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로우포스트 공격의 비중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로우포스트에서 버틸 능력이 없다면 빅맨으로 뛰기가 힘들었다. 가넷은 체력의 한계로 로우포스트 공격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경기 내내 로우포스트 수비를 하며 팀의 수비 앵커가 될 능력이 있었다. 당시는 2010년대 이후부터 포지션의 구분이 명확했고, 로우포스트 플레이의 비중이 높았기에 한 가지 포지션을 확실히 소화하지 못하는 트위터류는 살아남기 힘들었는데, 가넷은 파워포워드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다른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었고, 그 원동력이 빅맨급의 파워와 스윙맨에 준하는 운동능력이란 독특한 조화였다.[57] 다만 5번 수비는 얇은 하드웨어 때문에 좀 버거워하긴 했다[58] 두 선수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초중반까지는 역사상 최강의 수비수 중 하나인 벤 월러스가 수비왕을 쓸어담던 시기였는데, 세 선수의 수비력 비교를 떠나서 다방면에서 팀에 공헌하던 던컨이나 가넷에 비해 수비와 리바운드에만 신경쓰는 월러스가 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보스턴에서 가넷이 기량이 하락했음에도 전성기 수준의 수비력을 보인 것과 같은 원리) 그런데 이때에도 가넷은 꾸준히 던컨보다 수비왕 득표를 많이 했다. 1위표로 치면 02년에는 가넷만 2표, 03년에는 가넷 8표에 던컨 2표, 04년에는 둘 다 1위표는 못 얻었지만 순위는 가넷이 한 단계 위였으며, 가넷이 과부하로 몸이 망가지던 04-05시즌이 되어서야 던컨 6표, 가넷 4표로 던컨이 앞섰다. 위에 언급된대로 2007년에는 던컨이 15표를 얻으며 3위, 가넷은 08년에 수비왕을 한다. 그전까지 거슬러올라가면 던컨이 데뷔하던 98년에 던컨은 1위표 두 장을 얻으며 공동 5위, 가넷은 순위 밖, 99년에 던컨은 2장, 가넷은 1장이었으나 00년에 가넷이 (1위표 없이) 7위, 던컨은 순위 밖으로 역전했고 01년에 가넷이 1위표를 무려 26표나 받으며 14표를 받은 던컨을 크게 앞선다. 가넷은 08년에 무려 90표를 받으며 수비왕을 무난히 수상했고, 01년에도 26표를 받은 반면 던컨은 07년에 15표, 01년에 14표가 최다 득표이다. 결국 던컨답게 초창기부터 완성되어있던 수비력이 초반엔 더 인정받았지만, 전성기 전반적으론 가넷의 수비력이 더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59] 사실 현지에서는 대체로 수비력은 가넷>던컨이라는 게 비교적 정설에 가까웠다면, 국내에서는 유독 던컨의 극성 팬들이 던컨의 수비력 열세를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경향이 강했다. 가넷 뿐 아니라 로드맨, 하워드 등 역대 최고의 수비수들이 수비 vs 논의에서 크고작은 폄훼를 받았는데, 객관적으로 이들은 던컨보다 급이 낮은 수비수일 수가 없다.[60] 90년대 4대 센터중 한 명인 패트릭 유잉이 기록한 가장 높은 시즌 평균 오펜스 리바운드가 3개인데 이걸 지적하는 전문가는 없다. 물론 두 선수를 비교하면 던컨의 오펜스 리바운드가 확실히 낫다. 오펜스 리바운드 3개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가넷은 5시즌이지만 던컨은 9시즌일 정도로 꾸준히 잡아줬기 때문.[61] 작은 선수들은 스크린 없이 골밑까지 갈 정도로 완벽하게 따돌리기 힘들고, 빅맨들은 볼핸들링이 어느 정도 되지 않는 이상 포스트업으로 골밑까지 가기 힘들다. 물론 아예 작은 가드를 빅맨이 상대하는 경우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갈 순 있다.[62] 5대5 농구에서 빅맨들은 패스를 받아 골밑공격을 하기 때문에 팀 던컨이나 샤킬 오닐같은 정통 빅맨들이 가넷보다 성공률이 높다. 그러나 패스를 받아 공격할 수 없는 1대1에선 이런 선수들도 외곽에서부터 공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볼핸들링과 중거리슛 능력이 필요하고, 이 점에서 가넷이 더 유리한 것이다.[63] 가넷이 match-up nightmare라고 불렸던 이유도 이와 같다. 가넷은 몸무게가 가벼운 시절(220파운드 정도)부터 자신보다 30파운드는 족히 더 나가는 팀 던컨과 경기 내내 매치업할 정도로 누구든 막을 수 있는 선수였다. (샤킬 오닐처럼 체급 자체가 말도 안되게 차이나는 경우는 제외) 반면 공격에서는 빅맨들이 막기엔 너무 빠르고, 작은 포워드들이나 가드들이 막기엔 너무 컸다. 가넷 본인이 포스트플레이와 외곽플레이 모두 능하기도 하고. 5대5 농구에서는 간결하고 효율적인 농구를 해야했기에 가넷의 1대1 능력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1대1은 다른 것. 실제로 크리스 웨버와 아이솔레이션 상황에서 그를 그림같은 크로스오버로 제껴버리고 골밑돌파 후 덩크를 한 장면이나, 3점 라인 바깥에서부터 크로스오버로 돌파 후 풀업 점퍼를 날리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64] 즉, 당시 가로수비의 최고봉[65]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리한 공격이 1인자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조던과 코비 모두 감독한 필 잭슨은 자신의 "Eleven Rings: The Soul of Success."에서 "슛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코비는 슛감이 돌아올때까지 계속 슛을 던진다. 그러나 마이클은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수비나 패스, 스크린플레이 등에 신경을 쓴다"고 설명했다. 링크[66] 다만 그 대가로 플레이스타일이 바뀌고 출전시간도 줄면서 득점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팀 던컨보다 20-10이 더 빨리 깨졌다. 팀 던컨은 13-14 시즌 후에야 19.9득점 - 11리바운드로 20-10이 깨졌는데 가넷의 13-14시즌 후 통산 기록은 18.6득점 10.3리바운드.[67] 물론 09-10 시즌 당시 팀 내 최고선수는 라존 론도였다. 게다가 이 시기 가넷은 애초에 몸상태가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다.[68] 사실 파이널 MVP를 수상하면서 피어스의 입지가 급격히 높아졌지만 애초에 2007 오프시즌 당시 피어스와 가넷은 거의 급이 다른 선수였다. 가넷은 MVP출신으로서 전성기 시절 팀 던컨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선수였고, 피어스는 비슷하게 퍼스트팀을 나눠갖던 코비 브라이언트/트레이시 맥그레이디보다는 쳐지는 레벨의 선수였고(이 점은 레이 알렌도 비슷하다) 세컨팀 이력도 한 번 뿐이다. 당시 기량, 네임밸류, 선수로서 입지, 인기 등 2007-08시즌 보스턴 최고의 선수는 가넷이었으며, 실제로 가넷은 07-08시즌 올스타 투표 1위(239만표), 져지 판매 1위를 기록한 거물선수였다.(피어스는 57만4천표) 보스턴이 우승후보로 여겨진 것도 가넷 합류 이후였으며, 빅3 결성 이후 미디어 데이에서 사진도 거의 가넷이 중앙에 서있는 상태에서 찍은 게 대부분이다. 즉 파이널 MVP 수상으로 피어스가 이후 입지가 올라가서 그렇지 당시 팀의 중심은 누가봐도 가넷이었다.[69] 피어스가 르브론과 7차전 쇼다운을 펼치며 41점을 넣은 클블 시리즈에서도 전체 시리즈 성적은 피어스 19.4점 5리바운드 3.6어시스트 1.1스틸 야투율 40.4% 3점슛 33.3% 자유투 86%, 게임스코어 11.4, 가넷은 19.6점 10.9리바운드 3.1어시스트 야투율 54.5% 자유투 85% 게임스코어 17.6이었다. 글이 길어지니까 게임스코어만 간략히 언급하면 1라운드에서 피어스는 13, 가넷은 18.1, 3라운드에서 피어스는 14.1, 가넷은 17.7이었다. 파이널에선 피어스가 15.6, 가넷이 14.6으로 역전했다. 이것도 게임스코어는 어디까지나 스탯을 기반으로 내는 스탯이기 때문에 가넷의 가장 큰 장점인 스탯에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이 포함되지 않은 결과다.[70] 실제로 이승기 기자는 가넷은 제 2의 러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덧붙여서, 러셀이 가장 아끼는 후배 선수가 팀플레이에 능하기로 유명한 가넷과 팀 던컨이라고 한다. 가넷이 보스턴에 처음 왔을 때 러셀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자네라고 항상 얘기했잖아. 이제야 맞는 색 유니폼을 입었구먼."이라고 한 적도 있을 정도.[71] 참고로, 노비츠키는 가넷과 달리 원래 슛이 장점인 선수다. 노비츠키가 가넷보다 더 많은 것은, 가넷보다 원래부터 슛성공률이 높은 선수니만큼 당연하다. 위에서 빌 러셀 얘기가 나왔지만, 러셀은 슛이 장점인 선수가 아니었고 따라서 위닝샷을 넣은 적도 없다시피하다. 그 유명한 69년 파이널 7차전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슛을 성공시킨 건 롤플레이어 돈 넬슨이었는데, 러셀보다 넬슨이 강심장이라고 봐야 할까? 버드와 존슨은 동급의 승부사들이자 둘 다 강심장 중 강심장이지만 위닝샷의 갯수나 빈도수는 (매직도 적잖게 있지만) 버드가 월등히 많다. 매직은 리딩이 가장 큰 장점이지만 버드는 슛이 가장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72] 07-08 시즌, 팀의 에이스인 폴 피어스와 레이 앨런이 동반 침묵하자 1라운드, 2라운드 초반 공격을 이끌었는데 피어스가 4점, 앨런이 무득점에 그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2라운드 1차전에서 침묵한 동료들을 대신해 28점을 넣으며 르브론과 일기토를 벌이다가 마지막엔 조 스미스를 제치고 승부를 결정짓는 레이업까지 성공시켰다.[73] 다만 이땐 케빈 가넷이 에이스이자 소년가장이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믿고 맡길 사람이 가넷 이외에 샘 카셀 말고는 없었다.[74] 가장 유명한 장면이 2008년 시즌 당시 친정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가진 홈경기에서 나온 클러치 스틸이었는데 이때 가넷보다 거의 30cm가 작은 재빠른 포인트 가드 세바스찬 텔페어가 마지막 순간에 공을 잡았는데 1대1로 붙은 가넷이 몸을 바싹 낮추고 공을 뺏었다.[75] 오해가 있을까봐 첨언하면, 당시 6차전은 후반의 슛부진으로 야투율은 4할대에 그쳤지만 조던은 거의 시리즈 내내 단체로 부진하던 시카고 불스의 공격을 혼자 이끌었으며, 6차전에도 후반에만 부진한 적이 있다는 거지 전체적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포인트는 조던 같은 선수조차 체력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76] 가넷처럼 슈팅 스트로크가 딱딱한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져서 슛을 쐈을 때 거리가 안 맞을 경우 포물선이 낮고 볼에 회전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슛이 림을 맞고 튀어나올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반대로 후술되는 선수들처럼 포물선이 높고 회전이 많이 들어가면 슛이 조금 짧거나 길더라도 림을 맞고 들어갈 확률이 훨씬 높다. 이 때문에 슈팅 스트로크가 딱딱하고 회전이 적게 먹히는 선수들이 역대급 3점 슈터가 되는 경우는 드문데, 거의 유일한 예외가 바로 레이 알렌이다. 알렌은 엄청난 훈련으로 인해 매번 동일한 폼으로 슛을 쏘는 선수라 확률 높은 3점을 쏠 수 있다. 알렌이나 가넷 같은 선수들의 특징 중 하나는 슛이 빠르게 날아가 빠르게 튕겨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리바운드를 잡기가 꽤나 어렵다는 것.[77] 월리 저비악은 "가넷도 올스타급 선수와 뛰었기 때문에 원맨팀이 아니었다"는 논리로 가넷을 평가절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상하게 과대평가되던 선수 중 하나인데, 저비악은 슈팅 원툴 선수에 스스로 득점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어서 우승을 노리는 팀에서 2옵션을 맡을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2002년 단 한 번 올스타로 선정된 선수를 올스타급 선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78] 가넷은 실제로 당시 포인트 가드 역할을 종종했는데, 특히 2003, 2004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포인트 가드로 출장해 경기를 리딩했다. 실제로 2004년 LA 레이커스 시리즈에선 아예 리딩력이 거의 없는 가드들을 세우고 이들은 볼운반 정도만 하고, 경기 내내 본인이 포인트 가드를 본 적도 있었다. 가넷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지만, 키가 7피트나 되고 팀내 비중이 비상식적으로 높은 선수가 PG까지 본다는 건 무리수다. 이런 무리수를 둬야했던 건 주전 샘 카셀이 부상으로 시리즈 절반 가까이 못 뛰고 그나마 트로이 허드슨까지 아웃된 마당에 PG를 볼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79] 그 전설적인 04년 2라운드 7차전에도 괴물같은 활약을 했고 4쿼터에도 고득점을 했지만 막판에 자유투를 연속으로 놓치고 슛을 여러번 놓쳤다.[80] 비록 폴 피어스와 0.5점 차이지만 야투율은 54.5% 대 40.4%였다. 심지어 3라운드에서 가넷은 피어스보다 3.1점이나 더 넣었다. (52.5 vs 49.4%).[81] 가넷은 파이널 5차전 클러치타임에 부진했지만, 2라운드 1차전 당시 1대1로 골밑돌파를 해 위닝레이업을 넣은 것도 가넷이었다.[82] 가넷의 클러치 득점이나 위닝샷이 적은 것은 주특기인 노비츠키나 코비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지, 팀 던컨처럼 골밑 위주 빅맨들에 비해서 적은 것이 아니다. 기존 버전에는 "팀 던컨은 3점 위닝샷도 있다!"고 마치 가넷은 없고 던컨은 있는 것처럼 쓰여 있었는데, 위닝샷만 아닐 뿐이지 클러치 상황에서 3점슛을 넣은 것은 오히려 가넷이 더 많다. 당연한게 3점을 거의 쏘지도 않는 던컨과 달리 애초에 가넷은 3점까지 가능한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위 킹스전 영상처럼 가넷이 3점을 쏠 때는 수비가 타이트하게 마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83] 물론 굳이 비교하자면 한때 24점씩 올리던 가넷의 공격력 열세보단, 디펜시브팀은 언감생신이었던 노비츠키의 수비력 열세가 더 크다. 리바운드의 차이도 있다. 하지만 농구는 기본적으로 공격이 매우 중요한 스포츠이며, 특히 주도적으로 득점하는 에이스급 플레이어들간의 비교에선 더더욱 공격력을 많이 보는 편이다. 더더욱 가넷 이상으로 수비와 리바운드만 잘했던 벤 월러스는 이 둘보다 훨씬 평가가 낮다.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그 노비츠키의 공격 하나에 가넷이 1승도 못 거두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걸 생각해보자. 즉, 가넷은 수비와 리바운드가 가장 큰 장점이긴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공격도 수준급으로 잘했기에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역대급 공격수인 노비츠키와 동급으로 평가되는 것. 아울러 노비츠키의 경우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면 득점과 리바운드면에서 더 상향된 활약을 펼치기에 어떤면에선 노비츠키와의 비교에 팽팽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가넷의 위엄이라고도 볼수있다[84] 물론 이랬던 던컨과는 결국 호프집을 같이 가게 되었고, 던컨도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함께 경쟁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라는 표시를 했고 가넷 역시 같이 경쟁했던 것에 대한 감사함을 서로 표시하며 어느 정도 응어리를 푼 듯하다.[85] 가넷이 멜로의 아내가 Honey Nut Cheerios (미국의 시리얼) 같은 맛이라고 말했다는 카더라가 트위터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후에 멜로의 부인인 La La가 자서전에서 '절대 그런적이 없다.'라고 해명했다.[86] 원래 노아는 어렸을 때부터 가넷을 동경해왔다고 한다[87] 참고로 그 경기에서 도발에 걸려든 웨스트는 가넷을 밀쳐내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다.[88] 이걸 사람이 숨을 내쉬는 것에 비유했으니 보통 욕쟁이 레벨이 아닌 듯하다...[89] 언뜻 보면 하워드가 먼저 가슴팍을 친걸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넷이 먼저 하워드의 허리를 밀었다.[90] 참고로 여기선 노비츠키가 올타임 파워 포워드 랭킹에서 칼 말론을 넘어 2위다.[91] 여담이지만 해당 랭킹에서 팀 던컨이 칼 말론에 밀려난 것 때문에 공신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샌안토니오 언론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는 시스템의 허점으로 인한 오류로 단 한명을 뺀 모든 패널들이 던컨을 1위로 뽑았지만 나머지 한 명이 던컨이 파워 포워드가 아닌 센터라고 분류했기 때문에 2위로 밀려난 것이다.[92] 이 하나 차이로 평가가 엇갈릴때가 많다. 레전드 선수들이 나누는 티어표에도 이 파이널mvp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 가넷의 우승이 긍정적으로 봐도 big3우승이라 즉 더 맨 우승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에 생기는 현상. 심지어 같은 선수들이 내리는 평가에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한편이다. 물론 여기에서 살펴봤다시피 노비츠키는 파이널 MVP가 있는 반면 가넷은 올해의 수비수 상이 있고, 이렇게 두 선수는 서로에게 없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현지 언론에선 평이 엇갈리고 있다.[93] "우승 당시 노비츠키가 더 독보적인 에이스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MVP 수상 당시 가넷이 독보적인 선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노비츠키는 11년 파이널 MVP였지만 가넷은 08년에 1인자로서 우승을 하지못했고,(폴 피어스가 파이널mvp를 수상했다) 04년에는 전체 1위표 123표 중 120표를 받으며 압승한 반면 노비츠키는 07년에 83표 vs 44표(스티브 내시)로 수상했다. 이처럼 두 선수가 내세울 수 있는 강점이 서로 다른데다가 둘 다 역대급 선수인만큼 우열을 매기기가 굉장히 애매하고, 뭘 기준으로 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열을 따질 수 없는 동급이란게 가장 무난하면서 정확한 평가.[94] 가넷이 최전성기였던 시절, 당시 슛감이 미친 수준이었던 노비츠키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 만나 3-0의 전적으로 무기력하게 패배했던적이 있다. 가넷이 공수에서 애를 많이 쓰긴 했으나 세경기 내내 노비츠키의 득점 퍼레이드를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했다.[95] 1011 우승과 만장일치 파엠의 임팩트가 그만큼 크긴 했다 코비와 르브론의 쓰리핏을 막았고 컨파에선 케빈 듀란트까지 이기고 올라갔으니[96] 국내 팬들 사이에선 더 맨 우승의 임팩트가 크기 때문인지 노비츠키가 근소우위란 평이 거의 정설에 가깝게 퍼져있는데, 위에서 살펴보듯이 현지 언론에서는 매체마다 둘 중 누가 더 평가되는지 다르다. 노비츠키의 위상이 가넷보다 위인게 정설인 것처럼 강요하는 서술이 자꾸 은근슬쩍 추가되고 있는데, 이건 국내 NBA팬들이 하는 커뮤니티 한정이다.[97] 르브론 제임스의 임팩트가 워낙 강력해서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은 최초의 고졸 출신이 아니냐고 흔히 착각하는데 최초의 고졸 1순위 지명자는 저 유명한 기름손 콰미 브라운 이다.[98] 가넷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95년 드래프티 중 유일한 고졸은 가넷이었고, 96년에 코비 브라이언트, 저메인 오닐 등이 있었는데 오닐은 데뷔 후 4년간 쩌리였고 코비는 2년차였던 98년에 인기 빨(팬투표)로 올스타가 되긴 했지만 이때 아직 팀에서 후보선수였다. 가넷은 97년에 실력으로 올스타에 선출되었고 (감독추천), 98년에 올스타 주전이 되었고 한 프랜차이즈의 미래이자 독보적인 에이스였단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가넷이 루키시즌 후반부에 주전으로 자리잡고 30점도 한번 넘기는 등 성공적인 정착이 없었다면 후배들 중 NBA 직행을 포기할 선수들도 몇 있었을 것이다.[99] 이 버릇은 루키시절부터 있었는데, 당시 베테랑이었던 레지 밀러가 슛을 던지는 걸 쳐냈다고 한다. 밀러는 밀러대로 왜 저러냐 의아해하면서 몇번이고 다시 슛을 했는데 이걸 계속 쳐냈다고... 보다못한 심판이 "니들 뭐하냐? 그만해!"라고 하자 밀러는 "쟤가 저러는 거에요!" 이러면서 황당해했다고 한다. 이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한 이야기로 빈스 카터는 일부러 가넷을 골탕 먹이려고 엄청 높게 공을 띄우기도 했다고 한다. 가넷은 신인 시절부터 선배 스타들에게 전혀 기죽지 않았는데, 데뷔 시즌 뉴욕 닉스와의 첫 경기에서 가넷보다 14살이나 많은 대선배 패트릭 유잉에게 "여어, 어린 친구(What's up, young fella)"라고 인사를 하자 유잉은 곧바로 "여어, 할배(What's up, gramps)"라고 받아쳤다고 한다.[100] 빌럽스는 디트로이트에서 올스타급 선수가 되기 전에 미네소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당연히 가넷과 같이 뛰었다.[101] 오죽하면 실리가 미네소타 합류 이후, 감독이 지시하는데 가넷은 실리 얼굴만 바라봤다고 한다. 실리가 기가 막혀서 "감독님이 너한테 얘기하잖아! 네가 프랜차이즈(Franchise player로 한 팀을 대표하는 선수를 의미)야!"라고 했을 정도. 실리는 대학농구 스타 출신으로 가넷이 어렸을 때 우상이었는데, 그 우상과 같은 팀에서 뛰게 되니 가슴이 벅찬 것. 실제로 둘은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실리의 장례식 때 운구를 한 것도 가넷이었다.[102] https://www.youtube.com/watch?v=dG8IMtsgMms 실리의 영구결번은 그가 사망한 2000년 5월 20일 이후 울브스가 치른 첫 홈 개막전에서 이뤄졌는데, 경기 시작 전 영구결번식 이후 실리의 가족들과 오랫동안 포옹하며 감정적이 된 가넷의 모습을 영상 말미에 확인할 수 있다. 가넷의 하일라이트 장면에 빠지지 않는 명플레이가 바로 울브스 시절 킹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엄청난 풋백덩크를 꽂아넣고 천장에 걸린 실리의 져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가슴을 치고 포효하는 장면인데, 이게 바로 이 경기에서 나온 장면이다.[103] 1위는 팀 던컨, 2위는 칼 말론, 3위는 디르크 노비츠키, 4위는 찰스 바클리.[104] 그 유명한 팀 던컨, 제이슨 윌리엄스와 함께한 '못말리는 녀석들' 캠페인의 한 명이었다. 그러고보니 팀 던컨도 나중에 아디다스와 계약을...[105] 사실 안티들도 가넷이 전설이라는 말을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 부정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팬들도 그가 더티 플레이어라는 거나 트래쉬 토킹이 심하다는 것을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106] LA지역에 두번째 집으로 쓸 것으로 추정되는 저택을 샀었으나, 실제로 입주는 하지 않고 재건축 공사로 오랜기간 방치해뒀다가 2018년에 아예 팔아버렸다. 미네소타에 뿌리를 박겠다는 제스쳐로 보인다.[107] 가넷이 트래이드를 처음으로 요구한 것은 (알렌 합류 전) 보스턴 트래이드가 그의 거부권 때문에 불발된 이후였다. 팀이 리빌딩으로 선회하고 가넷을 트래이드하기로 방침을 정했기에 기왕이면 강팀으로 보내달라 요구한 것.[108] https://www.youtube.com/watch?v=PmO41v27k00 다만 이 리스트는 경기 중 덩크만을 갖고 판단한 것으로, 덩크 콘테스트에서 덩크는 고려되지 않았다.[109] 초창기 가넷의 활동량이 어느 정도였냐면 루키시즌에 상대편의 슛을 블락, 튕겨나간 공을 다른 선수가 잡아 슛하자 수비 리바운드, 그리고 가드에게 공을 주고 속공 때 반대쪽까지 빠르게 달려나가 공을 다시 받아 덩크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코트 한쪽부터 다른 쪽까지 날아다녔다. 현재 야니스 아데토쿤보를 연상하면 될 듯.[110] 비슷한 체형이 바로 레지 밀러인데, 이 둘은 커리어 내내 육중한 체형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고, 은퇴해서 운동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어졌을 때 오히려 더 마르는 걸 보면 살을 붙히는 것 자체가 힘든 체형인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칼 말론은 50을 훌쩍 넘어 흰머리와 흰수염이 덮수룩해진 현재도 근육질 체형인데, 이 아저씨는 운동을 그만둔 적이 없기 때문에 쉴 때 체형이 어떤지 알 수 없다. 50살이 된 기념으로 가진 지역언론과의 인터뷰 당시 하루에 빠지지 않고 두 시간 운동+현역시절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라...[111] 사실 가넷이 나이에 비해 동안이고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체형이기 때문에 상당히 어울린다. 다만 아무래도 스키니진이 젊은 남자들이 입는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외모가 어쨌든 중년기에 접어든 가넷이 입는다는 것만으로 놀림받는 것.[112] 참고로 데이비스는 가넷을 존경하고 배울점이 많은 선배로 생각하였으며 실제로 둘의 사이도 매우 좋은 편이다. 팔씨름 건이 일어난 게 2007-08시즌이었는데 이후에도 둘은 친한 사이로 지냈다.[113] 이 일화에 대해서 08시즌 당시 팀에 있던 켄드릭 퍼킨스와 브라이언 스칼리브리니가 둘 다 증언한 만큼 사실일 확률이 높다.https://brobible.com/podcasts/article/kevin-garnett-glen-davis-arm-wrestling-match/ https://www.nbcsports.com/boston/celtics/kendrick-perkins-speaks-kevin-garnetts-epic-arm-wrestling-match-glen-big-baby-davis. 디테일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데이비스가 당시 리온 포우(힘과 운동능력이 매우 좋은 백업파워포워드)를 이기고 난 뒤였다는 것, 그리고 폴 피어스 혼자 가넷이 이기는데 돈을 걸어 전부 따갔다는 것에는 입을 모으고 있다.[114] 가넷이 2021년에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본인의 집에서 진행한 인터뷰 기사. 미네소타는 미국 내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이며 백인 비율이 높아 흑인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아니다. 많은 NBA 선수들은 거주지역으로 LA나 마이애미 같은 지역을 선호하며, 르브론 제임스 같은 경우 LA 레이커스로 이적하기 전부터 매년 여름을 LA에 있는 자기 집에서 보냈다. 사실 가넷 역시 2003년에 캘리포니아 말리부에 저택을 구매한 적이 있으나 (당시 미네소타 소속이었기 때문에 르브론처럼 두번째 집으로 쓰려고 한 듯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재건축 공사만 하다가 2018년에 미완성 상태의 저택을 내놓았다.[115] 출처:https://www.twincities.com/2007/05/17/garnetts-quadriceps-injury-has-healed/,https://www.espn.com.au/nba/news/story?id=2833938.[116] 시즌 전체로 보면 가넷은 06-07시즌에 2995분을 뛰었는데, 보스턴 이적 직후엔 2328분으로, 출장시간이 전 시즌의 78% 수준으로 폭락했다. 그리고 이후 가넷은 한번도 2300분을 뛰지 못했다.[117] 가넷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었으나 친정팀으로 돌아오기 위해 포기했다.[118] 가넷의 재산만으론 단독으로 NBA팀의 대주주가 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투자자 그룹을 결성해 이 그룹이 대주주가 되는 형태이다. 앞서 언급된 대로 매직 존슨이 이 방식으로 LA 다저스를 인수할 수 있었다.[119] 사실 가넷의 영구결번을 막는 단 하나의 요소가 글렌 테일러였기 때문에 다른 누가 인수했어도 테일러가 구단주만 아니라면 이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다.[120] 가넷은 영구결번되기에 차고넘치는 공헌을 했으며, 미네소타 팬들의 지지 역시 절대적이기에 새 구단주 입장에서 가장 손쉽게 지역 민심을 얻을만한 수단이기도 하다. 거물급 프랜차이즈 선수가 팀을 떠나며 잡음이 발생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가넷은 어려운 시기에 팀을 지키던 프랜차이저가 팀의 리빌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난 케이스였으며, 이는 이적 직후 첫 미네소타 원정에서 그가 현지 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말년에 팀에 복귀까지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