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앨런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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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레이 앨런 | |
헌액 연도 | 2018년 |
월터 레이 앨런 주니어 Walter Ray Allen Jr. | |
출생 | 1975년 7월 20일 ([age(1975-07-20)]세) |
캘리포니아 주 머세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코네티컷 대학교 |
신장 | 196cm (6' 5") |
체중 | 93kg (205 lbs) |
윙스팬 | 203cm (6' 8") |
포지션 | 슈팅 가드 |
드래프트 | 1996 NBA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지명 |
소속 팀 | 밀워키 벅스 (1996~2003) 시애틀 슈퍼소닉스 (2003~2007) 보스턴 셀틱스 (2007~2012) 마이애미 히트 (2012~2014) |
등번호 | 34번 - 밀워키 / 시애틀 / 마이애미 20번 - 보스턴 12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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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NBA 농구 선수. 한국 한정으로 소위 만렙찍은 남자, 만렙슈가, 만렙횽 등으로 불린다.[1][2]
누구보다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모범적인 몸가짐으로 인해 안티가 거의 없고 선수로서나 인간으로서 존경받는 남자이다. 스테판 커리가 2021년 12월 14일 경신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NBA 역대 3점슛 성공 개수 1위 기록의 보유자였다(2,973개).
2. NBA 입성 이전
5명의 형제중 3번째로 태어난 레이 앨런은 힐크레스트 고등학교를 주 챔피언으로 이끌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후 농구 명문대학중 하나인 코네티컷 대학교로 진학, 빅 이스트 올해의 선수상을 받고, 한 시즌 총득점 대학기록인 1,922점. 3점슛 115개를 성공시키는 등의 활약을 했다. 훗날 코네티컷 대학교에서는 그의 백넘버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도 했다.3. NBA 커리어
3.1. 밀워키 벅스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평가받는 1996 드래프트에서 앨런은 전체 5순위로 미네소타에 지명되었지만 바로 밀워키가 4순위로 지명한 스테판 마버리와 트레이드 되면서 밀워키 벅스에서 루키 시즌을 보내게 된다.
훗날 이 트레이드에 대해서는 아쉬워 하는 분위기가 많은 편. 당시 미네소타에는 케빈 가넷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는데, (아직은 유망주일 뿐이었지만..) 미래에 가넷과 앨런이 보스턴 빅3로 만나 보여준 꿀 호흡을 고려했을 때 그 둘이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 뛰었으면 더욱 멋진 업적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특히 이는 마버리가 지나치게 에고가 강해 얼마 못 가 팀과 결별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기량 유지도 얼마 못한 데 비해, 앨런은 말년까지도 꾸준한 기량을 선보였으며 마인드적인 측면에서도 마버리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점에 기반한다. 하지만 트레이드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마버리는 전도 유망한 포인트 가드이자 차세대 플로어리더로 평가받던 선수였기 때문에 미네소타나 밀워키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가넷은 워낙 공격에서 이타적인 선수이기 때문에 마버리같은 득점원과 경기력 면에서 조합이 나쁜 것도 아니며, 경기 외적으로 둘은 매우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고교시절 맥도널드 게임에서 만난 다음에 매일 전화통화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가넷의 파트너로 마버리를 택한 건 오히려 당시 기준에선 옳은 선택이었다. 문제는 울브스 입장에서는 가넷의 에이전트가 1억2천만 불이란, 당시 기준으로 미친 액수를 제시했고, 그 친한 마버리가 연봉 문제로 자존심을 세우며 "1달러라도 적으면 사인하지 않겠다"고 뻗대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당시 밀워키에는 1994 드래프트 1위 출신인 득점 머신 글렌 로빈슨, 빈 베이커 등 팀내 간판스타들이 있었지만, 레이 앨런은 한 경기만 빼고 81경기[3]에 주전으로 출전, 올-루키 세컨드 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다만 당시 밀워키가 워낙 하위권 팀이었던 데다 스몰마켓팀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은 받지 못했다.[4]
루키 시즌만 해도 이전의 간판스타였던 베이커, 글렌 로빈슨에 밀려, 공격 3옵션으로 팀내 비중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평균 13.4점을 책임졌다. 주포가 아니었을 뿐 3옵션 루키가 이 정도면 사실 상당히 영양만점 활약이다. 또한 당시 리그는 게임당 평균 100득점을 넘지 못할 정도로 페이스가 느린 수비농구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1997년 여름 오프시즌에는 시애틀-밀워키-클리블랜드의 삼각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이에 따라 밀워키의 간판스타 빈 베이커는 시애틀로 옮기고, 밀워키는 클리블랜드로부터 올스타 포인트가드 테렐 브랜든과 블루워커 타이론 힐을 받아들였다.
빈 베이커가 떠난 후 앨런의 팀내 비중은 당연히 더 커졌다. 프로 2년차에 앨런은 공격롤이 크게 늘어나며 1옵션 "Big Dog" 글렌 로빈슨(23.4점)에 이은 2옵션(19.5점)으로 활약하게 된다. 또한 3년차인 99 시즌에는 팀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뛰며 로빈슨과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갔고, 4년차 때는 처음으로 20점을 넘기며(22.1점) 사실상 득점 1옵션으로 올라가게 된다.
사실 1옵션, 2옵션이라곤 하지만 앨런과 로빈슨은 그렇게 공격롤이 별 차이가 있는 선수들이 아니었다. 둘은 01-02 시즌까지 함께 뛰었는데, 앨런이 득점 1위로 올라간 00 시즌에도 평균득점이 1.2점 차이였고, 01시즌에는 둘이 동률, 02 시즌에도 단 1점 차이였다. 또한 야투율은 서로 비슷했고 야투 시도는 로빈슨이 계속 더 많았으나, 운동능력이 더 뛰어나고 돌파력이 더 출중한 앨런이 자유투를 더 얻어내 득점이 비슷했던 것. 실제로 저 둘과 이들보다 득점은 약간 적지만 (그래봐야 18~19점으로 별로 차이가 안 난다) 어시스트 수치가 더 높은 샘 카셀은 누가 에이스, 누가 주력자라고 나눌 것도 없이 밀워키에서 완전히 대등한 세 명의 에이스였다.
앨런의 벅스 시절 초기는 터렐 브랜든이 PG에 있으며 포가-슈가-스포는 극강의 공격력을 가진 선수들이 배치되고, 인사이드엔 공격력은 떨어지지만 수비와 리바운드는 좋은 타이론 힐과 어빙 존슨이 버텨주는 라인업이었다.
그러다가 단축시즌인 1998-99 시즌에 샘 카셀이 합류하면서, 카셀-앨런-로빈슨으로 이어지는 그 유명한 밀워키의 빅3가 완성된다. 1998-99 시즌에는 8년만에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팀도 상승세였다.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어 금메달도 추가한다. 급기야는 2000-01 시즌에 50승을 기록하며 지난 10년동안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 밀워키는 그 해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오른다. 상대는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두 팀 다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을 7차전까지 치르고 올라왔다. 컨퍼런스 파이널 역시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이었고, 레이 앨런은 평균 27.1득점에 50%가 넘는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신들린 활약을 했으나, 7차전에서 44점을 퍼부은 아이버슨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이 빅3는 2002-03시즌 글렌 로빈슨이 애틀란타로 트레이드 된 걸 시발점으로 해체된다. 레이 앨런 역시 게리 페이튼과 맞바뀌어져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 된다.
사실 레이 앨런의 커리어 초창기에는 "슈터"보다는 "스코어러"의 이미지가 강했다. 앨런의 초창기 수치를 보면 리그 수위급 슈터라고 보긴 좀 아쉬웠는데, 96-97 시즌은 경기당 삼점슛을 1.4개 성공하며 39.3%를 기록했지만 이 시즌은 3점 라인이 짧았던 시절이고[5] 라인이 복구된 다음 두 시즌동안은 36.4%, 35.6%를 기록했으며 갯수도 1.6개, 1.5개였다.
앨런이 처음으로 팀내 득점 1위을 기록한 99-00 시즌에 경기당 3점슛 시도가 5개를 넘기며 처음으로 4할을 돌파, 42.3%를 기록했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후대의 길버트 아레나스처럼 "3점슛을 많이 넣기는 하나 꾸준히 넣어줄 수 있는 슈터는 아닌" 이미지가 강했다. 이해에 열린 3점슛 콘테스트 예선 16개를 넣으며 결선에 안착했음에도 NBA감독 출신 해설자 마이크 프라텔로는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3점슛 대회에서 우승한 경우는 없다. 밥 수라, 앨런 아이버슨, 레이 앨런이 그런 경우로 이 셋은 (우승후보에서) 빼도 될 것 같다"고 할 정도.[6] 그러나 이듬해에 그는 경기당 3점슛 개수가 5.7개, 그 다음해에는 7.7개로 늘었음에도 계속 성공률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고 (43.3%, 43.4%) 3점슛 대회까지 2001년에 우승하면서 결국 그를 미심쩍게 보던 이들도 그가 당대 최고의 슈터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7]
3.2. 시애틀 슈퍼소닉스
2003-04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주춤했지만, 2004-05 시즌에는 78경기에 출전하고 하위권 전력으로 분류되었던 팀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올리는 등 리더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네이트 맥밀란은 레이가 솔선수범 해준 덕분에 내가 감독하기 참 편했다. 라고 인정한 바 있다. 당시 팀에는 이제 유망주 티를 벗고 뛰어난 선수로 거듭난 라샤드 루이스가 있었고, 앨런 루이스와 함께 팀의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때 시애틀의 전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앨런-루이스 쌍포는 훌륭했지만 다른 포지션이 워낙 빈약했기 때문.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2004-05 시즌 시애틀은 52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앨런-루이스 쌍포는 경기마다 40득점+를 합작했고, 골밑은 제롬 제임스와 레지 에반스를 주전으로 쓰면서 팀의 다른 빅맨들을 돌려막는(...)전법을 썼으며, 게리 페이튼의 까마득한 대학 후배인 신인 포인트 가드 루크 리드나워의 의외의 선전까지 더해졌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에서 새크라멘토 킹스를 4-1로 쉽게 꺾고 올라가며 기대감을 주었으나, 2라운드인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그 시즌 정규리그 전체 2위이자 플레이오프 최종 우승팀이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만나 분전에도 불구하고 2-4로 패해 탈락했다. 이때 앨런은 브루스 보웬의 집중수비를 받았는데, 워낙 짜증이 났는지 대놓고 보웬을 비난하기도 했다.[8] 웃긴 사실은 이 두사람이 태어난 곳은 캘리포니아 메르세드로 고향이 같다.
하지만 시애틀도 2004-05 시즌을 끝으로 다시 몰락했다.[9] 2004-05시즌엔 52승을 했던 팀이 2005-06 시즌엔 35승으로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그 다음 시즌엔 31승까지 추락했다. 앨런과 루이스는 계속 제몫을 다 했으나 [10] 그들만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특히 '농구는 센터놀음'임에도 불구하고 골밑이 너무나 무주공산이었다.
사실 스몰라인업의 한계도 있었지만 팀 자체의 한계도 있었다. 2004-05시즌 당시 소닉스는 오펜스 레이팅(공격권 100번당 예상되는 평균득점)이 리그 2위였지만, 디펜스 레이팅이 무려 리그 27위인 극단적인 공격올인팀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빅맨이 없다시피한 팀이라 슈팅이 부진할 때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농구는 센터놀음"이란 것은 농구에서 슈팅은 그 태생상 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팀슈팅이 부진할 시 이를 타개할 만한 다른 옵션이 없으면 한계가 있다는 논리이다. 로우포스트 공격이 주류이던 시기는 센터가 확률높은 득점을 짜아내며 이 역할을 했고, 전성기 시절 시카고 불스나 워리어즈는 센터가 허접해도 강력한 수비, 혹은 마이클 조던이나 커리/듀란트/탐슨을 동시에 데리고 있는 사기급 득점옵션으로 이를 극복했다.[11] 그런데 시애틀인 수비도 약한데 원투펀치의 파괴력이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가 명확한 팀이었다. 05-06시즌에 소닉스는 오펜스 레이팅 3위였지만 디펜스 레이팅 꼴찌에다가 그나마 준수하게 뛰어줬던 롤플레이어 빅맨들이 부상/이적 등으로 이탈하고 06-07시즌엔 오펜스 레이팅이 9위, 디펜스 레이팅은 27위로 떨어지면서 플레이오프에 연달아 탈락했다.
사실 04-05시즌 당시 소닉스의 돌풍에는 당시 생소한 공격올인 스몰라인업 팀이란 점도 컸는데, 비슷한 위치였던 피닉스 선즈가 역대급 PG인 스티브 내쉬, 리그 정상급 빅맨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존재가 있던 반면 소닉스는 뛰어난 포인트가드도, 빅맨도 없었기 때문에 공략법이 드러난 이후 급속하게 몰락한 것.[12]
이렇게 어렵고 답이 안 보이는 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선수로서 또 팀의 리더로서 군소리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13] 이러한 모습은 시애틀 팬들에게 큰 감동이 되었고, 이는 팬들이 차후 팀을 떠나는 에이스에게 분노가 아닌 축복의 감정을 보이게 된 밑거름이 됐다. 그렇게 2006-07 시즌까지 시애틀에서 뛴 앨런은 07년 케빈 듀란트가 지명되던 날,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여담으로 2005-06 시즌에는 NBA 한시즌 3점슛 성공 개수 최다기록 (269개)를 세웠는데, 이는 스테판 커리가 2012-13시즌 272개 [14] 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최고 기록이었다.
3.3. 보스턴 셀틱스
[15]
당시 많은 팬들은 폴 피어스와 레이 앨런의 콤비의 탄생에 급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게 아니라 무려 2003-04 시즌 MVP 케빈 가넷까지 합류하면서 보스턴 셀틱스에서 앨런의 커리어 두 번째 빅3를 결성하게 되었다.[16][17]
물론 당시에 전혀 불안함이 없던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각자의 팀에서 독고다이 해오던 슈퍼스타 3명이 과연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지의 문제가 가장 컸고, 특히 앨런의 경우 빅3 중 나이가 가장 많고[18] 양쪽 발목 모두를 수술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위에 언급한 브루스 보웬의 소행이었다.) 이는 민첩성이 생명인 가드 포지션의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이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런은 투철한 노력과 자기관리로 이러한 우려를 씻고, 여러 번의 결정적인 클러치샷들을 성공시키며 팀을 구하는 모습을 매우 자주 보였고, 보스턴 시절 동안 40.9%라는 높은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했다.
이전까지 앨런은 자신이 뛰었던 모든 팀에서 공격 1옵션으로 뛰었던 뛰어난 스코어러였다. 하지만 앨런-피어스-가넷 모두 슈퍼스타들이었고 공은 1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공격주도권을 양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기꺼이 자신의 역할 감소를 받아들인 선수가 앨런이었다. 그전까지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로 뛰어오던 피어스가 팀의 확고한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건재했기에, 그간 자신이 해오던 역할을 피어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자기 최고의 리쎌 웨폰이었던 슈터로서의 역할에 집중한 것이었다. 즉 공격에선 공을 쥐고 플레이 하는 것보다 오프더볼 플레이에 더욱 주력하기 시작했고,[19] 또한 아직 어리고 부족했던 라존 론도를 대신하여 볼운반에 실질적인 게임 리딩 역할까지 도맡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팀에 대한 헌신. 보스턴에서의 앨런부터 본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것이, 앨런이 원래부터 캐치앤 슛만 하는 슈터로 생각하는 점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 어느 팀에 가든 공격 1옵션에 에이스 역할을 맡으며,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평균 25점 근방을 올릴 수 있는 전천후 스코어러였는데 팀 사정상 양보한 것 뿐이었다.
이적 첫 시즌인 2007-08 시즌에 바뀐 역할과 줄어든 공격 기회에도 불구하고 평균 17.4점에 3점 성공률 39.8%를 기록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하여 팀의 66승을 이끈다.[20] 플레이오프에서는 2라운드에서 좀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컨퍼런스 파이널과 파이널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생애 첫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21]
2011-12 시즌 라존 론도와의 불화설이 계속되다 결국 시즌 종료 후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한다. 이후 폴 피어스 등이 인터뷰를 통해 론도와의 불화는 그리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주장했고 팬들 사이에서도 이적의 주된 이유 또한 이것이 아닐 거라는
어쟀든 보스턴에서의 앨런은, 플레이 스타일 상으로의 양보는 물론, 재계약 당시 다른 빅2에 비해 상당히 적은 금액으로 계약하는 등 금전적으로도 팀을 위해 상당히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반대로 구단은(특히 단장인 대니 에인지) 그를 계속 트레이드 대상으로 올리는 등 충분히 대우해주지 않은 측면이 있긴 있었다. 특히 2011-12시즌 뒷꿈치 부상으로 인해 잠시 결장한 후에 돌아왔을 때, 앨런을 새파란 애송이었던 에이브리 브래들리의 백업으로 써먹으려고 함으로써 베테랑 슈퍼스타의 자존심을 많이 긁어놓았다는 풍문이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보스턴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 보긴 힘들다. 2012 시즌 당시 2년차였던 브래들리는 단순한 애송이가 아니라 훌륭한 수비수였으며, 실제로 풀타임 주전으로 올라선 2013 시즌에 바로 올-디펜스 세컨팀에 올랐다. 이미 당시 주전라인업에 피어스와 가넷이 있는 보스턴 입장에서는, 주전라인업의 화력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앨런을 식스맨으로 돌려서 2진에 힘을 실어주는게 더 효율적이긴 했다. 게다가 앨런은 2012 시즌 당시 36세 노장이었으므로 체력 안배 차원도 있었다. 어쨌거나 보스턴의 팀 플랜과 앨런 개인적인 비전이 맞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데, 여기에 더해 팀의 또다른 주축인 론도와 불화가 발생했고 해소가 기미가 없자 결국 이적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리그 라이벌팀으로 이적한 덕분에 다수의 보스턴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보스턴과 마이애미와의 경기에서 앨런이 교체 될때, 그리고 레이 앨렌 헌정 영상이 TD가든에서 틀어졌을 때 야유의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본 항목의 주인공이 레이 앨런이기 때문에 앨런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술되긴 했지만, 까놓게 말해 팀 캐미에 문제가 생긴 근원은 앨런의 성격 때문인 측면이 있다. 애초에 베테랑인 앨런과 신인 급인 론도에게 불화가 생겼는데, 론도 편을 드는 선수들이 있고 팀에서 내보내는 선수가 앨런이라는게 상식 밖의 얘기긴 했다. 앨런에게 전혀 문제가 없었다면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것은 론도였을 것이기 때문.
물론 앨런이 굳이 론도롤 밀어내지 않고 자신이 팀을 떠나는 선택을 받아들인 것은, 본인 스스로의 기량이나 체력이 전성기에 비해 날이 갈수록 떨어져가고 있고, 셀틱스의 우승확률 또한 매년 낮아져 가고 있다는 것도 명확했기 때문. 심지어 앨런은 이미 우승 반지까지 있기 때문에 딱히 반지 원정대 노릇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 앨런은 셀틱스에서 입지 축소, 팀동료와의 불화 등으로 속을 썩다가 그냥 마음 고생을 내려놓고 다른 우승권 팀에서 조연 노릇을 하며 행복 농구나 하겠다는 선택을 내린 것.
그 결과 앨런은 셀틱스에서 자신과 역할군이 겹치고 더 젊은 드웨인 웨이드가 있는 히트로 이적해서 벤치멤버 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봉 또한 보스턴시절(천만불)보다 훨씬 적은 3백만불. 어쨌거나 앨런에게 돈 욕심이 없긴 없었다.
3.4. 마이애미 히트
마이애미 히트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 2012-13 개막전 상대로 친정팀인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30분 출장에 19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의 준수한 기록으로 팀의 첫 승리에 공헌했다. 히트에서는 나이가 나이다보니 이전의 슈퍼스타스러운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벤치멤버로 출장하면서 평균 25.8분을 뛰면서 10.9 득점을 올렸으며 히트의 연승행진과 파이널 진출에 공헌한다.
James catches, puts up for three! Won't go! Rebound Bosh, Back out to Allen, his three pointer!
BANG!!!!! TIE GAME WITH FIVE SECOND REMAINING!! Spurs do not have a time out!
마이크 브린(Mike Breen)[22], 당시 캐스터
BANG!!!!! TIE GAME WITH FIVE SECOND REMAINING!! Spurs do not have a time out!
마이크 브린(Mike Breen)[22], 당시 캐스터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파이널 6차전에서는 마지막 5초를 남겨놓고 오펜스 리바운드에 성공한 크리스 보시의 패스를 받은 다음 팀의 전체 시즌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동점 3점 슛을 성공시켜 마이애미의 2013년 우승의 가장 큰 요인이 되면서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이 영상만 봐도 앨런 포함 모든 히트 멤버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히트 포인트가드가 스퍼스 코트로 넘어가자 바로 르브론이 스위치로 미스매치를 유발했고 히트는 보시와 웨이드가 양쪽 45도에서 스크린을 걸고 언제든지 3점을 대비한다. 결국 왼쪽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3점을 던졌고 동시에 오른쪽에 있던 앨런은 재빠르게 공격리바운드에 참여하여 수비(그린)에게 부담을 주었고 앨런을 따라가게끔 한다. 결국 크리스 보시가 공격리바운드 쟁취하는 순간 앨런은 백스텝으로 순식간에 다시 코너 3점 라인으로 갔고 수비 정돈이 흐트러진 스퍼스는 앨런에게 극적인 3점을 얻어맞고 말았다. 만약 앨런이 처음부터 코너 3점 라인에서 멍하니 오픈찬스를 기달렸다면 대니 그린 역시 앨런 수비에만 신경쓸 것 이고 동점 3점 슛은 나오지 못할 것 이다. 물론 보시가 완전오픈 르브론에게 패스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앨런이 앞에 있다면 그에게 패스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이 슛으로 인해 망연자실한 표정의 토니 파커와 카와이 레너드, 쉽게 보기 어려운 포커페이스가 흐트러진 팀 던컨 등 이 슛이 스퍼스의 사기를 박살냈다는 걸 알 수 있다.
2013-14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었다. 2014년 12월 휴가를 즐기고 있고 아직 NBA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한다. 은퇴 선언만 안했을 뿐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뜬금포로 2016-17 시즌을 앞두고 갑자기 지금 레이 앨런의 복귀가 점쳐지며 그의 행선지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하는 루머가 돌고있다. 일단 골든스테이트 입장에서는 벤치멤버로 간다하더라도 굉장히 좋은 옵션이 될 것 이다.
결국 2016년 11월 1일(한국시간 기준) 은퇴선언을 했다.
2018년 9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2회 (2008, 2013) 올-NBA 세컨드 팀 1회 (2005) 올-NBA 서드 팀 1회 (2001) NBA 올-루키 세컨드 팀 (1997) NBA 올스타 10회 (2000-2002, 2004-2009, 2011) NBA 3점슛 콘테스트 챔피언 (2001)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2003)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8) |
5. 플레이 스타일
슈팅가드로서 정석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이며 슛,패스,드리블 모두가 다재다능한 만능 플레이어. 슈팅폼이 대단히 부드럽고 릴리즈도 빨라, 본래 슛만 치면 이른바 6성 슈가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던 선수. 주로 45도 지역에 자리를 잡고 공을 받아 미드레인지 게임을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하며, 돌파는 근본적으로 슛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선택지 정도였다. 하지만 수비가 슛을 막기 위해 달라붙으면 스리슬쩍 제끼고 돌파하여 뜬금없는 덩크를 간간이 보여주었다.[24] 운동능력이 떨어진 이후 덩크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간간이 시도되는 돌파에서의 마무리는 말년에도 매우 출중했다.보스턴 셀틱스 시절 이후의 활약만 본 사람들은 그를 오픈 찬스에서 3점 넣는 게 임무인 슈터로만 생각하겠지만,[25]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슬램덩크를 꽂아넣기도 하기도 했다. 또한 일정 시간 보조 리딩이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패싱능력도 갖추었다. 괜히 나이키 에어 조던의 프로젝트에 선택받은 게 아니다.
다만, 알려진 것처럼 정석적인 점퍼 메커티즘을 가진 슈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슛을 릴리스하기 직전의 점퍼 자세는 정석이 맞다. 왼팔을 적절한 각도로 조여서 힘이 분산되지 않게 하며[26] 밸런스도 기본에 충실한 편. 그러나 슛을 쏘는 메커니즘 자체는 정석이 아닌데, 원래 점프슛은 점프 이후 최고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쏴야 하체에서 올라온 힘이 위까지 부드럽게 전달이 된다. 그러나 레이 앨런은 정점에 도달한 후에 쏘기 때문에[27] 손목감각에 크게 의지한다. 이때문에 앨런의 슛은 포물선이 상당히 낮고 회전을 비교적 적게 먹는다.
사실 이런 점퍼 폼하면 가장 유명한 선수인 마이클 조던처럼 이런 투모션 슛은 베이스라인, 코너 등 좁은 공간에서 미드레인지 점퍼를 주로 쏘는 선수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데 하체에 크게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페이더웨이같은 터프샷을 보다 안정적으로 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드레인지 터프샷을 자주 던지는 슈터들은 이 자세가 익숙하다. 특히 조던이나 앨런처럼 사이즈 자체가 동포지션 최고급인 선수들은 점퍼의 높은 타점으로 마크맨을 달고 던지는데 특화된 폼으로 동포지션 선수가 앞에서 블로킹하기가 더럽게 힘들다. 점퍼 타점이 어마어마하게 높기 때문이다. 반면 하체힘을 점퍼 높이에 다 쏟아붓기 때문에 높은 타점에 비해 릴리스한 공의 포물선,회전은 손목힘으로만 실어야해서 사거리 자체가 부담이 될수밖에 없는 3점 슛에는 적합하지 않은 폼인데(조금만 힘떨어지면 슛이 짧아지거나 에어볼이 된다) 앨런같은 3점까지 장착한 슈터가 이런 슈팅 메커니즘을 갖는 건 특이한 케이스다. 이 때문에 앨런이 슛을 쏘면 부드럽다기보다는 좀 딱딱한 느낌을 준다. 또한 슈팅 스트로크 자체가 딱딱해 슛의 포물선이 낮고 회전이 적게 먹기 때문에, 거리가 조금만 어긋나면 공이 림을 맞히고 튀어나올 확률이 높다.[28][29] 그가 3점 슈팅만 전담했다는 편견은 선수 말년에 셀틱스, 히트 등에서 정대만[30] 롤을 수행하면서 생긴 오해로, 원래 앨런이 포스트 조던 클럽의 정회원이었음을 생각해보자.
앨런은 교과서적인 슛폼이라기보단, 상대수비를 달고 던지는 미드레인지 점퍼에 적합한 베이스라인 에이스에 맞는 모션의 슈터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폼이 흔들리지 않아 그의 슛폼 사진을 모아놓고 Ctrl + C, Ctrl + V 식의 짤방(각주 참조[31])도 돌아다니는 수준. 시애틀 시절 동료인 라샤드 루이스는 과거 인터뷰에서 "레이 앨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늘 같은 자세로 슛을 한다."라며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32][33]
위에도 살짝 언급되었지만, 레이 앨런은 레지 밀러와 함께 공을 잡지 않은 상태에서의 움직임이 가장 좋은 선수로 자주 거론되었다. 경기를 보면 둘 다 쉴 새 없이 노마크 찬스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코트 좌우를 스크린을 이용해서 정말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패스를 받자마자 바로 올라간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완벽한 자기관리로 전성기를 상당히 오래 유지했으며 클러치순간에서 강한 사실이야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
또한 과소평가받는 선수중에 하나이다. 그가 전성기였을때는 비인기팀에 있었고 두세 번은 더 받아야 정상일 올 NBA팀 수상이 단 두번밖에 있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서야 보스턴 마이애미 같은 명문팀에 들어가서 더 주목받을 기회가 생겼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레이 앨런을 수상실적 때문에 과소평가받는 선수중 한명이라고들 말한다.[34]
앨런은 절정의 슈터란 점 때문에 한 세대 전의 레지 밀러와 자주 비교되지만 사실 전성기 플레이스타일 자체만 보면 밀러보다는 코비 브라이언트-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류의 만능 스윙맨 쪽에 더 가까웠다. 득점 면에서는 패스받아서 쏘는 캐치앤 슛 외에 볼을 드리블하다가 바로 슛하는 오프더 드리블 슛 역시 훌륭하고, 한때 덩크 콘테스트까지 참가하던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한 돌파능력 역시 매우 뛰어났다. 보스턴에서 첫 우승하던 시절 아직 2년차라 설익은 기량이던 론도가 폭주할 때 옆에서 차분하게 리딩을 도와주던 것도 앨런이었으며, 의외로 과소평가받는 수비수 중 하나였다. 08시즌 당시 코비 브라이언트를 벤치의 제임스 포지가 막은 임팩트가 크지만, 주전 중에 브라이언트를 많이 막은 것은 앨런이었다. 또한 밀워키 빅3 시절 가장 강한 맨투맨 수비수가 앨런이기도 했다. 운이 따랐다면 올디펜스 세컨팀 정도는 노려볼 만한 수비수였다지만, 전성기 시절엔 수비가 약한 팀(밀워키-시애틀)에서 뛴데다 특히 시애틀 시절엔 원맨팀이었던 시기가 많아 수비에 에너지를 많이 쏟아부을 수 없었고, 수비가 강하다곤 해도 리그를 대표하는 수비수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간과되는 면이 있었다.
종합하자면 코비나 티맥급의 파괴력은 없어도 못하는게 없는 만능 스윙맨이자 특급 슈터로, 기본적으로 알찬 육각형에 슈팅 능력을 쭉 늘려놓은 듯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6. 기타
- 부친이 미국 공군 장병으로, 군인 가정에서 자랐다. 대부분의 아프리카계 출신의 운동 선수들과는 달리, 꽤 건실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공부도 꽤 잘했었다고 한다. 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어려서부터 독일, 영국 등을 오가면서 성장했다고 한다.
- 마이클 조던을 존경했던 선수이며, 에어 조던의 스타 육성 프로젝트인 팀 조던의 멤버여서인지, 코트 위에서는 늘 깔끔한 모습을 유지했다. 늘 시합전에 면도를 했다고. 팬들에게 깔끔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늘 체육관에 일찍나와서 연습하고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가는 선수였다. 대학시절 때부터 이런 부지런함이 몸에 베었다고 한다.
이러한 레이 앨런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전수(??)받은 것이 라샤드 루이스. 루이스가 올랜도로 이적한 후 앨런이 올랜도로 시즌 첫 원정을 갔을 때의 일화가 있다. 앨런은 언제나 그랬듯 자기가 가장 먼저 왔다고 생각하며 체육관에 도착했으나 자신보다 먼저온 사람이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는데, 그게 바로 루이스였다고 한다. 루이스는 앨런이 나를 올스타로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레이 앨런을 동경했다. 앨런이 늘상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 자전거를 따라 사기까지 했다. 2017년의 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당신이 본 선수 중 가장 노력을 많이 했던 선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주저없이 레이 앨런이라 답했다.
- 지금은 팀 선수단만 이전해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된 옛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대한 애정도 상당해서, 시애틀에서 뛰는 동안 지역 사회 공헌도 많이 했고 2007년 소닉스의 연고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틀 뒤 보스턴 셀틱스 행. 그래서 2013년에 추진했던 시애틀 슈퍼소닉스 재창단(새크라멘토 킹스의 매입후 연고 이전을 골자로 진행중이었다.)시, 2024년 NBA팀 추가 창단 허가가 떨어지면 1순위로 부활하는게 시애틀인 만큼, 가장 먼저 시애틀 시민들이 계약하여 은퇴식을 해줄 선수로 게리 페이튼과 레이 앨런을 꼽고 있다.
- 늘 정해진 식단으로만 식사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유기농. 이것은 앨런 본인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아들인 워커 앨런이 소아당뇨병에 걸렸던 것도 컸다. 하필이면 그때가 2008년 파이널에 열리던 한창때였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워커 앨런은 생후 22개월밖에 안된 아기였다. 그래서 경기하랴 아들 병간호하랴..5차전에서는 13개의 슛을 던져 9개를 놓치는 부진을 보였다. 앞뒤사정을 모르는 팬들은 앨런이 왜 저러냐? 면서 앨런을 비판(??)했으나 나중에 전후사정을 듣고는 데꿀멍 할수밖에...하지만 이 부분은 프로 의식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게 예를 들어 데릭 피셔의 경우에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딸의 간호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게임 도중 복귀해서 활약을 펼치는 등 이런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레이 앨런은 또 2010 파이널 때 아들이 아파서인지 2차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6경기를 모두 처참한 성적을 내면서 패배의 주역이 되였다.
아들의 일 이후로 레이 앨런은 당분을 줄이고, 식단에 올라오는 재료는 모두 유기농만 고집했다. 담배? 술? 그런건 당연히 하지 않았다. 몸관리가 철저하다는 폴 피어스 마저도 나는 저렇게 정해진 식단으로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앨런은 정말 대단한 사람 이라고 칭찬했다.[35]
- 실제로 커리어 내내 좀 험한일도 겪었다. 양아버지가 전처의 아들에게 청부살인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어머니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그럼에도 정작 경기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고 있다. 정말 뛰어난 평정심.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0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밀워키 벅스 시절. 스파이크 리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히 갓 게임이라는 영화에서 극중 워싱턴의 아들인 지저스 셔틀스워스 역으로 분했다.[36] 영화자체도 수작이고 레이 앨런도 정식 연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좋은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다. 사실 앨런이 맡은 역할이 전미고교 최고의 선수라는 설정도 있지만, 출세밖에 모르고 자신을 발판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며 아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애증을 잘 표현했다는 평.[37][38] 위에 역할 이름 때문에 한때 팀메이트와 팬들에게 지저스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후에는 2001년 하버드 맨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주조연은 아니고 단역.
- 과거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탑건과 포레스트 검프라 답했다. 포레스트 검프를 좋아하는 이유는 '심플한 기본원칙들을 지킴으로써 세상을 정복했기' 때문이라고. 그가 끝없는 연습으로 슛계를 평정한 모습과 오버랩이 된다.
- 한국에서 월간 해외농구잡지 루키의 조현일 편집장이 취재차 찾아간적이 있었는데 단순히 비즈니스적으로 대하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굉장히 매너있고 젠틀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루키(잡지)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어달라는 요구에 책을 잠깐 살펴보고 좋은 코멘트와 함께 사인도 해주었다고.
- 자기관리가 매우 뛰어나서 부상도 거의 안당했다. 또한 사진들을 보면 알수있듯이 몸매에도 큰 변화가 없이 본인 스타일에 맞게 적당히 슬림한 말 근육 몸매를 유지했다.
- 폴 피어스의 말에 의하면 자기만의 세계가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경기 끝나고 같이 모여서 클럽이나 미국 문화 특유의 집에 초대하여 즐기는 파티에도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고.. 사실 굳이 피어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리그에서도 손에 꼽히는 성질의 가넷과 론도의 쌍욕 잘하는 성격과 레이 앨런의 차분한 성격은 정말 어울리기 힘들어 보인다는 세간의 인식이 팽배해 있기는 했다.
- 팬들 입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202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NBA 75주년 팀에 선정될 정도로 누구나 인정하는 레전드급 커리어를 보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팀을 몇번 옮겼고, 히트를 제외한 세 팀에서 뛴 시간이 비교적 균등한데다가 (벅스 6년반, 소닉스 4년반, 셀틱스 5년) 이때 활약이 영구결번해주기는 다들 애매해서 영구결번해준 팀이 없다는 것. 벅스 시절에 가장 많이 뛰었지만 올NBA 서드팀 1회, 올스타 3회에 불과하고, 소닉스 시절엔 올스타 4회에 올NBA세컨팀 1회, 셀틱스에선 올스타 3회이다. 게다가 세 팀 모두 역사가 있는 팀들인데다가[39] 영구결번에 후한 편인 셀틱스에선 안 좋게 결별했고, 저렇게 짧게 뛰고 영구결번이 될 만큼 리그를 씹어먹은 것도 아니다보니 영구결번 가능성은 많이 낮은 편이다. 그나마 케빈 가넷의 영구결번 당시 가넷과 피어스 둘 다 레이에 대한 샤라웃을 했고, 구단도 보스턴 빅3 당사자들도 묵은 감정들이 모두 가신만큼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40] 특히 2014년부터 벅스의 34번은 50년만의 우승을 이끌며 구단 최고의 리빙 레전드로 발돋움한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달고 있어 영구결번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41][42] 만약 벅스에서 몇년 더 뛰거나 소닉스로 몇년 더 빨리 이적, 혹은 보스턴에서 은퇴했다면 영구결번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43]
- 2021년 중으로 앨런의 몇몇 누적 기록이 갈아치워지게 되었다. 앨런의 NBA 통산 3점 슛 성공 1위 기록은 스테판 커리에게 따라잡혔으며[44], 앨런이 가지고 있던 밀워키에서의 통산 3점 슛 성공 1위 기록(1,051개) 역시 크리스 미들턴이 넘어섰다.
6.1. 보스턴 빅3와의 관계
- 대니 에인지가 실력이 올라오던 에이브리 브래들리를 알렌 대신 주전으로 세우기로 결정하자[45][46]을 예고하자, 레이는 군말 없이 라이벌 팀 마이애미 히트로 가버렸다. 형제라고 자타공인하던 보스턴 빅3와의 우정이 깨진건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특히 라존 론도와 켄드릭 퍼킨스에게 꽤나 미움을 샀었다. 어느정도였냐면, 2008년 우승을 기억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 앨런만 초대받지 못했을 정도.
- 가장 갈등의 중심이었던 케빈 가넷과는 사실 고딩때 부터 카풀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그때 성격을 알아서 인지 가넷과는 다툼같은게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마이애미로 떠난 이후부터는 굉장히 서먹해지며 좋지않은 감정으로 인터뷰도 서슴없이 했을 지경. 202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도 레이, 폴, 가넷 세 명 모두 모인 자리였으나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은 커녕 얘기를 나눴다는 목격담 조차 없었다. 레이는 오히려 같은날 헌액된 크리스 보시와 옛 마이애미 히트 동료들과 같이 엮여 사진촬영을 했었다.
- 그 후 세월이 흘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서 폴 피어스와도 9년만에 사진과 인스타라이브등으로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2022년 올스타전에 열린 NBA 가장 위대한 75인 세레모니에 참석했을때는 서로 악수를 주고 받으며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보스턴에서 해준 3월 13일 가넷의 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식에 가넷이 레이를 초청하는 화해의 제스쳐를 보여주면서 화해무드로 돌아섰다.
7. 관련 문서
[1] 당시 인기 있었던 온라인 농구게임 프리스타일의 영향. 프리스타일 내에서 만렙을 찍은 슈팅 가드는 3점슛이 사기적으로 잘 들어갔는데, 이를 3점 장인이었던 레이 앨런에 빗댄 것이다.[2] 외국에서는 Sugar Ray 혹은 Jesus Shuttlesworth(그가 출연한 'He Got Game' 영화에서의 배역 이름)이라 불린다.[3] 한 경기는 쥐가 나서...[4] 지금도 밀워키는 스몰마켓 팀에 비인기 팀이다. 아무리 야니스가 활약해도 대중에게 어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국내 방영이 거의 없다.[5] NBA는 공격농구를 권장하기 위해 94-95 시즌부터 기존의 7.24 미터보다 50cm 짧은 6.71미터로 줄였고, 이 기간동안 마이클 조던처럼 장거리 2점슛이 강한 선수들은 고감도 슈팅력을 보였다. 조던은 95-96시즌에 경기당 1.4개를 42.7% 확률로 넣기도 했다.[6] 여담으로 이때 결선에서 앨런은 첫 3점대회 출전이라 긴장했는지 계속 슛감을 못 찾고 10점에 그쳤으며, 18점으로 예선 1위였던 디르크 노비츠키도 2년차인데다 마찬가지로 처녀출전이라 긴장했는지 11점에 그쳤다. 우승은 베테랑 제프 호너섹에게 돌아갔는데, 호너섹은 바로 직전에 치러진 2볼 대회에서 극강의 슛감을 보이고 1라운드에서도 17점이란 준수한 기록을 냈으나 마지막 시즌을 치르던 노장이라 체력이 떨어졌는지 결승에서 부진하며 13점에 그쳤다. 그럼에도 우승을 했기에 우승하고도 멋쩍은 표정과 찜찜하다는 인터뷰를 했는데, 실제로 13점은 역대 3점대회 우승자 중 최저점이었다.[7] 사실 한 이미지가 강력하게 박힌 선수가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이런 경우가 많다. 지금에 와서야 마이클 조던이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란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가 사상 최초로 200스틸/100블록을 동시에 돌파한 선수가 된 86-87 시즌만 해도 조던이 특급 수비수라는 이미지는 많이 없었으며 심지어 디펜스 세컨팀에도 못 올랐다.[8] 단순히 보웬이 수비를 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앨런은 그렇게 징징대는 허접멘탈이 아니다.) 보웬은 (해당 항목을 참고해도 알 수 있지만,) 점프슛한 상대방의 발밑에 발을 집어넣어 발목 부상을 유도하는 등 워낙에 더티 플레이로 악명이 높은 선수였다. 앨런과 상대한 시리즈에서도 역시나 그런 모습들을 보이자 앨런은 이에 대해 비난한 것이었다.[9] 당시 앨런을 든든하게 받혀주던 롤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이 시즌만 좀 잘하고 원래 바닥인 실력으로 돌아갔다. 제롬 제임스는 당시 플레이오프만, 그것도 전체 플레이오프도 아니고 1라운드만 좀 잘했다고 (시즌 평균 4.9점, 3리바운드 하던 선수) 뉴욕 닉스가 낚여서 당시로선 주전급 계약이던 평균 6백만달러 계약을 5년짜리로 때렸다가 대참사를 맞이했고, 에반스나 대니 폿슨 역시 그냥 평범해졌으며 리드나워는 성장세가 딱 멈췄는데 파훼법이 드러나서 엄청나게 약화되었다. 유일하게 잘해준 건 루이스 정도.(물론 몇년후 장기계약하고 엄청난 먹튀가 되긴 하지만) 결국 2005 시애틀은 재능 자체는 지극히 평범한 팀이 환상의 팀워크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팀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성장하는 건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10] 앨런은 23.9점 → 25.1점 → 26.4점으로 매년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마지막 2006-07시즌엔 부상으로 시즌의 1/3 정도를 결장하긴 했다.) 루이스도 20.5점 → 20.1점 → 22.4점으로 꾸준히 활약을 했다.[11] 찰스 바클리가 그토록 외쳐댔던 '점프슈팅팀은 우승 못한다'는 것이 이 논리인데, 실제로 점프슛이란 득점 옵션이 골밑공격에 비해 기복에 더 취약하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조던은 점프슛 외에 골밑공략과 자유투 획득률도 최강급이었고, 커리/탐슨 듀오나 커리/듀란트/탐슨 트리오는 강력한 득점 옵션이 셋이나 된다는 점에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명의 슈퍼스타가 동시에 슈팅슬럼프에 빠질 확률은 거의 없을테니까...사실 점프슈팅팀이 기복에 취약하다고 해도 70년대 워리어스처럼 강력한 수비가 뒷받침된 점프슈팅팀이 우승을 차지한 경우도 종종 있었고 불스의 파이널 상대였던 재즈 역시 공수밸런스가 좋은 점프슈팅팀이었다. 워리어스는 수비 역시 탄탄한 팀이었고 불스는 역대 최강을 논하는 수준이었으므로 '수비력이 뒷받침된 점프슈팅팀'은 그 기복을 충분히 이겨낼 저력이 있다. 수비는 기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98파이널의 구도를 보면 불스는 조던을 빼고 공격이 거의 망하는 수준이었는데, 수비로 한 수 위의 공격력을 갖고 있던 재즈를 물고 늘어져 진흙탕 싸움을 만든 다음 조던이란 사기옵션으로 결정타를 가했다.[12] 실제로 04-05시즌 당시 소닉스의 초반 기세는 무서웠는데, 극초반에 리그 1위를 잠깐 달리기도 했으며 첫 20경기동안 17승 3패로 같은 기간 선즈의 성적과 동률이었다. 스퍼스가 같은 기간 16승4패로 근접한 것 외에는 소닉스와 선즈의 초반 기세에 비할 팀은 없었다. 그러나 선즈나 스퍼스가 꾸준히 성적을 내준 것에 비해 소닉스는 이후 35승 27패란 비교적 평범한 성적에 그치게 된 것. 초반 20경기 이후 승률로 따지면 56%로 46승 페이스였다.(17승3패 당시는 67승 페이스) 사실 초반 스케쥴 난이도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덕도 있긴 했지만 20경기동안의 파죽지세, 특히 이 기간동안 무려 스퍼스를 홈과 원정에서 두번 잡은 것은 놀라운 성과였다.[13] 그 와중에 출전시간 문제로 징징대는 블라디미르 라드바노비치를 달래주기도 했다.[14] 이 기록은 바로 그 다음 시즌 본인에 의해 286개로 경신. 그리고 이는 2015-16 시즌에 다시 한 번 무려 402개로 경신되었다.[15] 앨런이 레지 밀러의 2,560개를 깨고 NBA 역대 최다 3점슛 기록자가 되던 순간이다. 즉 커리어 2,561개째 3점슛을 넣은 후의 세레머니. 때는 2011년 2월 10일 레이커스 상대 홈경기. 뒤에 코비 브라이언트가 보인다.[16] 물론 이 빅3에 비하면 이전의 밀워키 빅3는 무게감이 많이 떨어지긴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케빈 가넷의 존재감 때문. 여담으로 이 이후 '빅3'라는 수식어의 기준점이 많이 상향되었다[17] 사실 슈퍼팀의 시대 전에는 빅3란 표현은 단순히 팀에서 주축이면서 리그 내에서도 꽤 알아주는 선수 세명을 지칭하는 것이지 현재처럼 각자가 슈퍼스타급이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일례로 시카고 불스의 빅3중 로드맨은 불스 시절 올스타 이력이 없고, 밀워키의 샘 카셀도 벅스시절엔 올스타에 선정된 적이 없다. 그러나 보스턴 빅3 당시 예전같으면 한 팀의 중심이 됐을 슈퍼스타들이 전성기가 조금 지난 상태에서 뭉치며 기존의 관념을 깼고, 히트 빅3는 아예 그런 슈퍼스타들이 전성기 때 뭉치며 슈퍼팀의 시대가 열린 것. 2020년 현재는 에이스급 선수들이 두세명 모이는 것 정도는 별로 이상하지도 않게 됐으며, "빅3"란 단독으로 에이스급을 할 수 있는 선수, 슈퍼팀이란 수식어가 붙으려면 최소 MVP후보급은 될 수 있는 선수가 두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 당시 카셀 정도면 현재 기준으로 보면 일급조력자선수라 "빅" 수식어가 붙진 않았을 것이며, 사실 앨런도 벅스 시절이라면 리그를 대표하는 슈팅가드까지는 아니었다. 올 NBA써드팀 1회가 끝이었으니...또한 2회 올스타에 불과하고 올NBA팀은 없는 글렌 로빈슨 역시 슈퍼스타라고 보긴 좀 애매했다.[18] 앨런 1975년생, 가넷 1976년생, 피어스 1977년생[19] 이때부터 '동네 한바퀴'가 앨런의 플레이의 대표주자가 되기 시작했다. '동네 한바퀴'란 슈터가 노마크 찬스를 맞기 위해 공이 없는 상태에서 코트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수비를 제끼려는 플레이를 말하는데, 앨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던 전술이었고 레지 밀러도 이에 뛰어나긴 했으나, 실제 '동네 한바퀴'라는 명칭으로 불린 것은 이때의 앨런이 사실상 처음이었다.[20] 이는 앨런 커리어 사상 정규시즌 최다승이었으며 해당 시즌 리그 1위의 기록이었다. 앨런은 그 후 마이애미에서 2012-13 시즌 다시 한 번 66승을 경험한다.[21] 우승 또한 2012-13 시즌 마이애미에서 다시 한 번 경험한다.[22] 맛깔나는 BANG!과 PUTS IT IN!으로 유명한 ESPN 소속 캐스터[23] 아닌 게 아니라, 이 샷이 만약에 안 들어갔다면 5초 남은 샷클락은 아마 그대로 종료됐을 것이고, 자연스레 스퍼스가 파이널에서 우승하게 된다. 만약 디시전 쇼까지 하면서 우승을 쫒은 르브론이 마이애미의 4년동안 준우승만 3번이나 기록했다면 그의 대한 후세의 평가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모로 르브론의 커리어를 살린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4] 덩크슛을 자주 시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꽤나 고난도 묘기 수준의 덩크를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그 덕분인지 NBA LIVE시리즈나 NBA 2K와 같은 농구 게임에서 그의 덩크슛 스탯이 꽤나 높게 나온다.[25] 그를 그저 3점 넣는 롤 플레이어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서운할 일이지만, 백 번 양보해서 단순 3점 슈터로 본다 하더라도 앨런같은 슈터가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픈 찬스는 가만히 서 있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프 볼 무브로 스스로 오픈 찬스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팀원들의 스크린을 이용하여 정말 미친 듯이 각 사이드 코트로 움직이다가 팀원에게서 패스를 받자마자 숨 고를 틈도 없이 바로 슛을 던진다. 슈팅의 정확성과 함께 지치지 않는 체력이 있기 때문에 릴리즈 하는 순간에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다.[26] 너무 벌리면 힘이 위로 전달안되고 너무 좁히면 시야가 가려진다[27] 정점에 도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쏘는데, 이렇게 되면 하체에서 올라온 힘의 대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장점은 릴리스 포인트가 더 늦기 때문에 보다 높은 타점을 갖게 된다는 것.[28] 만약 포물선이 높고 회전을 충분히 먹인 슛이면 슛이 조금 짧거나 길어도 공이 위쪽 방향으로 부드럽게 튕기기 때문에 림을 맞고 들어갈 확률이 높다. 그러나 알렌처럼 슛을 쏘면 공이 옆쪽 방향으로 강하게 튕겨나오게 된다. 이런 슛은 빠르고 강하게 튕겨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리바운드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다. 이 때문에 알렌같은 슛폼을 지닌 선수가 (중거리가 아닌) 3점 슈터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는 드물며, 그 완성도가 역대급인 경우는 사실상 알렌 밖에 없다. 밑에 언급되는 '이상한 폼을 지닌 역대급 슈터'들의 경우 폼은 이상해도 다들 공을 고각도로 쏘아올리는 메커니즘으로 쏘는 선수들이다.[29] 공격입장에서 롱리바운드가 안 좋은 이유가, 수비팀이 리바운드를 잡아서 바로 역습하기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롱리바운드는 상대팀 가드가 잡기 좋은 위치에 떨어지는 경우도 많으니. 그러나 알렌은 운동능력도 뛰어나고 수비력도 좋은 편이라 롱리바운드 후 속공이 발생해도 상대팀의 1차 속공은 저지할만한 능력이 되었다. 위에 언급된 조던도 당연히 이런 속공 저지능력이 뛰어났고, 80년대 후반엔 속공을 2대1의 불리한 상황에서 혼자 저지한 적도 종종 있었다.[30] 사실 정대만도 고3 이전까지는 앨런과 마찬가지로 3점 위주로만 공격하던 선수가 아니었다. 플레이스타일 변화는 앨런이나 정대만이나 매우 흡사하다.[31] [32] 레이 앨런은 경미한 강박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는 휴지조각이 떨어진 방바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한다. 무시해 버리려 노력해봤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줍게 된다고. 그러나 이 강박이 슛을 연습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33] NBA 선수들도 사람인지라 고유의 습관이 있어 각기 성장하며 다른 폼을 갖게 되는데, 폼이 어쨌든간에 자기가 평소 연습하던 대로 슛을 쏘는게 중요하다. 실제로 NBA 역사에 남을 점프슈터들 중엔 오히려 정석폼이 아닌 선수들이 더 많다. 스테판 커리는 빠른 릴리스에 중점을 둔 슛이며, 스티브 커는 손목스냅보다는 슛을 밀어내듯 원모션으로 쏘는 폼이고 (위에 언급된 휴스턴같은 정석폼은 점프+쏘는 모션이 물흐르듯 연결되는 투모션. 이 투모션이 딱딱하게 구분되는게 앨런과 조던같은 케이스다), 버드는 하체힘을 거의 쓰지 않는다. 레지 밀러?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NBA 역사에 남을 슈터 중에 그나마 정석적인 슈팅폼을 가진 슈터는 단일시즌 3점슛 최고 성공률 기록을 가진 카일 코버와 역대 최고의 3&D 플레이어인 클레이 탐슨 정도가 있다.[34] 사실 그가 받는 과소평가는 그의 묵묵한 스타일 때문도 있다.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소위 '스타 플레이어'가 되려면 경기 외적 화려함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플레이를 좀 더 화려하게 펼치는 쇼맨십과 세레모니, 언론 플레이 등이 그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팀 던컨의 경우 NBA 전체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실력과 커리어를 가졌음에도 그에 비해 스타성이 한참 떨어졌던 것은 그의 과묵하고 지루한 플레이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35] 폴 피어스도 몸 관리와 식단 관리에 깐깐한 편이다. 펩시 콜라를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이 안 난단 말을 할 정도다. 하지만 그런 피어스도 레이 앨런한테는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36] 원래 리 감독은 코비 브라이언트를 주연으로 쓰고 싶어했고 코비도 역시 관심은 있었으나, 코비는 루키시즌이었던 96-97 포스트시즌에 막판 체력이 고갈된듯 끔찍한 부진을 겪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강도 높은 오프시즌 훈련 프로그램을 잡아놓아서 도저히 촬영을 병행할 여건이 안되어서 고사했다고 한다.[37] 앨런이 마이애미에서 뛰던 시절에 이벤트성으로 각 선수가 유니폼 등에 자신의 성이 아닌 별명을 적고 뛴 경기가 있었는데, 앨런은 당연히 등에 Shuttlesworth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38] 재미있는 일화로 영화 내에서 아버지 역인 덴젤 워싱턴과 아들 역인 앨런이 1대1로 농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각본상으로는 앨런이 15:0으로 이기는 거였으나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스파이크 리 감독은 각본없이 진짜 시합처럼 하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시작한 후 앨런이 약간 봐주면서 한건지 몰라도 덴젤이 4점 연속 집어넣자, 빡친 앨런은 10점 연속 득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경기 양상을 보면 초반부터 빡세게 수비하진 않으므로 덴젤이 레이업을 두번 넣고, 럭키샷도 두번 정도 들어가서 앞섰다. 그런데 프로와 일반인의 대결이고 피지컬 차이가 나다보니 덴젤이 체력이 빠져 헉헉거리며 5점 이후 한 점도 못 넣을때 앨런은 아주 여유있게 외곽슛, 덩크, 페이더웨이 등을 넣고 마지막은 (부자 간 갈등을 표현하는 의도로) 포스트업을 하면서 힘으로 압도한 다음 넘어진 덴젤 옆을 돌아가 덩크로 마무리. 실제로 잘하는 일반인과 프로의 대결도 이런 식으로, 럭키샷이 터지면 일반인이 잠깐 앞설 수 있지만 피지컬과 기술 격차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면 반드시 발린다.[39] 역사가 짧은 팀이면 초창기 공헌을 해준 멤버가 있으면 짧게 뛰어도 영구결번해주는 경우가 있다.[40] 샤킬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에이스로 팀의 첫 파이널 진출, 혹은 우승을 이끌거나 MVP를 수상한 덕에 더 짧게 뛰고 영구결번된 경우도 있다.[41] 사실 레전드가 달고 있는 번호라고 해서 다른 레전드에게 영구결번을 안 해주는건 아니다. 번호 관련해서는 NBA사무국의 규정을 따라야하지만 영구결번 관해서는 각 구단의 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같은 번호로 여러 선수가 공동 영구결번되는 것도 가능하다. MLB가 재키 로빈슨의 42번을 전구단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당시 42번을 달던 마리아노 리베라는 계속 42번을 달았으며, 뉴욕 양키스는 리베라 은퇴 후 42번을 은퇴시켜 현재 양키스의 42번은 로빈슨, 리베라가 둘 다 영구결번되어 있다. NBA에서 6번이 전구단 영구결번된 빌 러셀도 마찬가지로, 이 결정 이전에 6번으로 영구결번된 줄리어스 어빙등 레전드들은 현재 각 구단에서 러셀과 공동 영구결번된 상태고, 6번을 달고 활약한 다른 현역 레전드(예를 들어 히트 시절 르브론 제임스)도 은퇴 후 각 구단이 원하면 영구결번시킬 수 있다. 이처럼 야니스가 GOAT가 되더라도 팬들의 여론에 따라 알렌과 34번으로 공동 영구결번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위에 언급했다시피 팬들의 여론이 중요하기 때문에, 현역이자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인 야니스가 뛰고 있는데 은퇴한지 몇년이나 된 된 알렌을 먼저 영구결번시킬 확률은 매우 적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야니스가 은퇴 후 영구결번되고, 알렌과 벅스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해 그를 영구결번시키란 여론이 높아진다면 뒤늦게 34번이 공동 결번처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야니스가 벅스에서 GOAT로 남는다면 그의 번호를 다른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에 대한 팬들의 반감이 클 것이므로 역시 확률이 낮다. 결국 위에 언급되지만 밀워키 팬들의 여론에 달려있다.[42] 그러나 현재는 벅스에서 34번은 결국 아데토쿤보 단독 영구결번으로 지정해야 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아데토쿤보는 벅스에서만 2024년 현재 2번의 MVP 수상, 1번의 DPOY 수상, 1번의 MIP 수상, 벅스의 50년만의 우승에 파이널 역사상 기억에 남을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파이널 MVP 수상, 그리고 All NBA 퍼스트팀 6회 선정, All 디펜시브 퍼스트팀 4회 선정, 세컨드팀 1회 선정까지되었다. 벅스 역사상 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아데토쿤보는 영구 결번이 사실상 확정이고 거기에 앨런은 전체 커리어에서 평생 하지못한 MVP, 파이널 MVP, All NBA 퍼스트팀, All 디펜시브팀까지 벅스에서만 모두 수상하면서 이미 앨런의 전체 커리어를 넘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나마 아직 앨런이 앞서는게 올스타 10회로 8회의 아데토쿤보를 앞서지만 이마저도 아데토쿤보가 부상이나 급격한 폼 하락없이 기량을 꾸준히 유지한다면 넘어설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오히려 아데토쿤보 단독 결번이 아니라 공동 결번을 하게 되면 벅스 팬들에게서 더 큰 논란이 생길 수 있다.[43] 커리어로 보면 앨런과 큰 차이가 없는 제임스 워디는 레이커스에서만 뛴 덕분에 영구결번 잘 안 해주기로 유명한 레이커스에서 결번이 되었다. 만약 마지막 2년을 셀틱스에서 뛰고 은퇴했다면 비록 3옵션이라도 22년만에 우승을 이끈 주역인데다 보스턴은 영구결번이 후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44] 플레이오프 포함 기록(3,358개)은 11월 12일 불스전에서 이미 경신되었고, 일반적으로 중시하는 정규 리그만의 기록(2,973개)은 커리가 12월 14일 뉴욕 원정에서 뛰어넘었다.기록 맛집 MSG 앨런은 이 경기를 관전하다 자신을 넘어선 커리에게 훈훈한 포옹을 건넸다.[45] 계약금 자체는 셀틱스 쪽이 높았으나, 에인지는 그를 백업으로, AV를 주전으로 내세운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결국 AV도 보내버린 보사구팽엔딩이 예고됐던만큼, 레이는 살길 찾아 갔다는 의견과 말도 안하고 라이벌 팀에 간건 좀 아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전자의 경우는 유도니스 하슬렘이, 후자의 경우는 폴 피어스의 말. 다만 위에 언급됐다시피 당시 실력이 올라오던 에어버리가 노장 알렌의 주전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결정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알렌은 히트 이적 이후에도 벤치에서 뛰었다. 애초에 37세 선수가 주전에서 밀려나는 건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46]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96-97시즌을 앞두고 당시 주전이었던 존 스탁스가 앨런 휴스턴으로 교체된 경우인데, 당시 닉스는 스탁스를 배려해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스탁스도 팀의 사정을 고려해 흔쾌히 주전을 넘겼다. 이런 면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팀이나 이를 거부하고 라이벌 팀으로 가버린 알렌이나 둘 다 아쉬움을 남기는 행보였으며, 둘 중 누구 책임이 컸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