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휴스턴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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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등번호 20번 | ||||
대니 영 (1992~1993) | → | 앨런 휴스턴 (1993~1996) | → | 칼리드 리브스 (1999) |
뉴욕 닉스 등번호 20번 | ||||
론 그랜디슨 (1996) | → | 앨런 휴스턴 (1996~2005) | → | 자레드 제프리스 (2006~2010) |
앨런 웨이드 휴스턴 Allan Wade Houston | |
출생 | 1971년 4월 20일 ([age(1971-04-20)]세) |
켄터키주 루이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테네시 대학교 |
신장 | 198cm (6' 6") |
체중 | 93kg (205 lbs) |
윙스팬 | 206cm (6' 9") |
포지션 | 슈팅 가드 |
드래프트 | 1993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1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지명 |
소속 팀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93~1996) 뉴욕 닉스 (1996~2005) |
등번호 | 20번 - 디트로이트 / 뉴욕 6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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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NBA 선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뉴욕 닉스를 대표하는 간판 스타였다. 현재 뉴욕 닉스의 어시스턴트 GM이자, 닉스 산하 D리그 팀인 웨스트체스터 닉스의 GM을 맡고 있다.2. NBA 커리어
2.1.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뒤에서 바라보는 팀 동료는 포인트가드였던 린제이 헌터
테네시 대학교 시절에 아버지인 웨이드 휴스턴 감독 밑에서 농구 수업을 받으며 활약했다가 1993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1순위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부름[1]을 받아 NBA 커리어를 시작했다. 루키 시즌은 말 그대로 루키답게 평범하게 보냈지만, 2년차인 1994-95시즌엔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79경기 동안 평균 14.5득점, 3점슛 성공률 42.4%를 기록하며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3년차인 1995-96시즌은 주전으로 발탁되어 전 경기 82게임을 출전했다. 그 시즌 입단한 그랜트 힐과 원투펀치로 활약하며 평균 19.7득점과 3.7리바운드 3.0어시스트 42.7%의 3점슛 성공률로 한 단계 더 스텝업한 모습을 보여주며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피스톤즈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자유계약선수가 된 휴스턴은 뉴욕 닉스가 제시한 7년 U$55M의 조건에 사인하고 닉스로 이적했다.
2.2. 뉴욕 닉스 Part 1
앨런 휴스턴이 합류할 당시인 1996년의 뉴욕 닉스는 패트릭 유잉이라는 확실한 리더가 이끄는 강팀이었다. 이 뿐 아니라 래리 존슨, 크리스 차일즈, 벅 윌리암스 등 타 팀의 주전 선수들을 잇달아 영입하고, 드래프트 당시 1라운드에서 유망주 셋을 건지는 등[2][3] 매우 전도유망한 팀이었다. 로스터의 뎁스가 엄청 두꺼워진 덕택에 전 시즌까지 부동의 주전 슈팅 가드였던 존 스탁스가 자진해서 식스맨 롤을 맡고 휴스턴에게 주전을 양보했을 정도.[4][5]
닉스로 이적 후 처음 맞은 1996-97시즌은 패트릭 유잉이 확고부동한 1옵션인 탓에 휴스턴의 개인 기록은 평균 14.8득점으로 크게 떨어졌다.[6] 하지만 닉스에 없어서는 안 될 레귤러로 성공적으로 안착했으며, 이듬해인 1997-98시즌은 유잉이 시즌아웃을 당한 이후 1옵션이 되어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다.
유잉의 노쇠화로 1998-99시즌부터는 실질적인 뉴욕의 간판스타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이 시즌 팀에 합류한 라트렐 스프리웰과 원투펀치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덕택에 둘은 '트윈 테러'라는 별칭을 얻었고, 스프리웰이 미네소타로 떠난 2003년까지 호흡을 맞췄다.
휴스턴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면 아무래도 1999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최종 5차전[7]일 것이다. 당시 닉스와 마이애미 히트와의 라이벌리는 매우 뜨거웠고, 이 시즌의 플레이오프 또한 역시나 최종전까지 간 상황에서 닉스는 경기종료 5초도 채 남기지 않고 1점차로 뒤지고 있었다. 작전타임 후 볼을 받은 휴스턴이 플로터를 시도했고 공은 거짓말처럼 림을 한번 튀긴 뒤 0.8초를 남기고 골망으로 빨려들어갔다. 이 극적인 위닝샷을 성공시킨 후 단숨에 코트 반대편까지 내달리며 주먹을 내지른 세리머니는 휴스턴 개인 커리에에 있어서 가장 큰 영광의 순간이었다. 기적적으로 히트를 물리친 닉스는 사기가 충전해 플레이오프에서 꼴찌인 8번 시드였음에도 세미파이널에선 애틀랜타 호크스, 컨퍼런스 파이널에선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덜미를 잇달아 잡으며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전율의 기적을 일궈냈다. 8번 시드팀이 파이널에 진출한 사례는 2023년의 마이애미 히트와 1999년의 뉴욕 닉스가 유이하다.
휴스턴의 역전 플로터 장면
1999-00시즌은 유잉을 비롯해 전 시즌 파이널 진출의 주축 멤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우승에 도전했으며, 아쉽게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가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이 시즌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드림팀4 멤버로 선발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잉이 떠난 2000-01시즌은 새롭게 합류한 글랜 라이스와 '트리플 테러'를 구축했으며 2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되었다.
2.3. 뉴욕 닉스 Part 2
2001-02시즌을 앞두고 뉴욕 닉스와 연장 계약을 맺었는데 그 계약규모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무려 6년 100m의 규모였는데 당시로서는 정말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되는 어마무시한 오버페이였다. 아무리 그 시점에서 휴스턴이 닉스의 간판 스타이자 2년 연속 올스타로 선발된 선수였다고는 해도, 그제껏 평균 20득점 한 번 넘어본 적이 없는 30대로 접어든 슈팅가드에게 연 20m에 육박하는 계약은 너무 지나치다는 여론이 대세였다.[8] 당시 닉스의 단장이자 아직도 닉스 팬들에게 공공의 적 취급받는 스캇 레이든이 벌인 큰 실책 중 하나. 레이든 입장에서는 최고 인기팀의 간판스타인데다 유잉을 떠나보낼때 된통 데인 경험 때문에라도 팀의 간판스타에게 확실한 대우를 해 준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결과적으로 NBA 역사상 손꼽히는 최악의 계약이 되고 말았다.
연장계약을 맺은 첫 시즌인 2001-02시즌은 드디어 커리어 최초로 평균 20득점을 넘기며 활약했고, 다음 2002-03시즌은 82경기 전 경기를 선발 출전해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그러나 팀은 본격적으로 암흑기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03-04 시즌 무릎부상에 시달리며 50경기에 출전에 평균 18.5득점을 기록하는 데 그치며 부진했다. 그나마 시즌 도중에 합류한 스테판 마버리의 활약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이 무릎부상에 제대로 발목이 잡혀 선수생활 자체를 일찍 마감하게 된다. 수술을 해야할 정도의 부상이었지만 수술을 거부하고 재활로 극복해보려 하다가 더욱 악화된 케이스. 2004-05시즌은 고작 20경기에 출전해(그나마도 절반은 벤치 출장이었다.) 평균 11.9득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에 그쳤다. 팀의 최고연봉자가 경기에 뛰지도 못하고 팀성적이 내려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 탓에 비난의 한 축을 감당해야만 했다. 오프시즌에도 무릎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2005-06시즌 개막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휴스턴의 거대 계약은 닉스팀의 샐러리캡 유동성을 꽉 막아버렸고, 그 탓에 2000년대 기나긴 암흑기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NBA, 아니 북미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계약을 꼽는 순위에 항상 빠지지 않고 상위권을 차지한다. 고액 계약자들 때문에 샐러리 유동성이 막히는 팀들이 속출하자 NBA는 2005년 역대 최초로 팀에서 1명을 방출시 샐러리캡에서 제외할 수 있는 '사면룰'이라는 조항을 도입했는데, 이 '사면룰'이 속칭 '앨런 휴스턴 룰' 로 불렸으니 그 심각성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많은 팀들이 이 사면룰을 활용하여 약간이나마 숨통을 틔웠는데, 정작 유력한 방출 후보였던 휴스턴은 방출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당시 닉스는 휴스턴이 곧 은퇴를 선언할 것이라고 여겨 제롬 윌리엄스에게 사면룰을 행사하였다.
2.4. 뉴욕 닉스 Part 3
은퇴 후 ESPN의 해설자로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아직 선수생활에 미련이 남은 듯, 은퇴 선언 후 2년 뒤인 2007년 오프시즌에 닉스와 새로 계약을 맺고 컴백했다. 이는 2001년 맺은 6년 100m의 계약이 종료된 시점이기도 했다. 프리시즌 게임에도 출전하며 복귀를 타진했지만, 휴스턴 본인이 아직 시즌을 치를 만큼의 몸상태는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2007-08시즌이 개막하기 전 자진해서 퇴단했다.
휴스턴은 2008년 오프시즌에 다시 한 번 닉스와 계약을 맺으며 컴백을 시도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번호인 14번을 달고 뛰는 것 만큼이나 본인에게도 팀에게도 여의치 않았다. 현실적으로 실전경기 공백이 4년이 넘는 30대 후반의 슈팅가드는 더 이상 NBA 수준의 리그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는 것. 프리시즌 동안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개막전 최종 15인 로스터에 들지 못하며 방출되었다.
3. 은퇴 이후
닉스는 휴스턴을 선수로서는 더 이상 함께 하기 힘들어 방출하긴 했지만 그가 계속 팀과 함께하길 원했고, 그즈음 팀의 새 GM이 된 도니 월시의 보좌역으로 채용했다. 그 이후 계속 닉스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어시스턴트 GM, 닉스 산하 D리그 팀인 웨스트체스터 닉스의 GM을 겸직하고 있다. 팀 차원에서 차기 GM으로 키우고 있다고 한다.4. 기타
실질적으로 은퇴한지 10년이 넘었고, 리그를 주름잡는 슈퍼스타급은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심심찮게 회자되는 선수인데, 가장 큰 이유는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하고 멋진 슛폼 때문이다. 그간 리그의 많은 슈퍼스타들이 멋진 슛폼을 뽐내왔지만, 이 슛폼 하나만큼은 앨런 휴스턴을 최고라고 꼽는 사람들이 많다.[9] 또한 슛폼 뿐 아니라 점프해서 쏘는 타이밍(정점에 도달하기 직전), 매우 부드러운 릴리스, 훌륭한 follow-through [10]까지 슛에 한해선 흠잡을게 하나도 없는 선수였다. 이에 걸맞게 커리어 통산 3점 슛 성공률도 무려 40.2%, 자유투 성공률은 86.3%를 기록했다.
의외로 NBA 커리어 초창기엔 상당한 어깨 깡패였다.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체형에 어깨가 유독 도드라져 한 눈에 봐도 눈에 띄었던 수준. 특히 닉스로 이적한 첫 해인 1996-97시즌은 이 어깨의 벌크가 절정에 달했는데, 이 당시 닉스의 경기 영상을 찾보면 휴스턴이 자유투라인에 섰을 때 상반신 클로즈업에서 비정상처럼 보일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를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후로 어깨의 벌크는 조금씩 빠지며 평범한(?) 체형으로 변해갔지만, 여튼 휴스턴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12년 NBA 올스타전 슈팅스타 챌린지에 출전해 맹활약을 펼치며 팀 뉴욕의 승리를 이끌었다. 실질적으로 은퇴한지 7년이 된 40대 나이라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웬만한 현역보다 더 나은 몸상태와 슛감을 뽐내며 많은 팬들을 향수에 젖게 했다. 저 사진속의 휴스턴은 절대 현역 시절의 모습이 아니다.(!)
은퇴 선수임에도 이례적으로 개인 홈페이지인 http://www.allanhouston.com 을 갖고 있으며,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으로도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친한 사이다.
2008년 1월 'NBA 2K8 아시아 챔피언십' 홍보차 우리나라에 방한한 적이 있다.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7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닉스의 어시스턴트 GM으로 여러 대외활동까지 겸하고 있다. 위 사진은 2016년의 모습. 50대로 접어드는 나이인지라 이제는 나이든 티가 좀 나긴 하지만, 여전히 매끈한 몸과 패션 감각을 자랑한다.
[1] 10순위 린지 헌터와 같이 피스톤스 유니폼을 입었다. 이 당시 드래프트 1,2,3순위는 크리스 웨버, 숀 브래들리, 앤퍼니 하더웨이다.[2] 닉스는 18순위 존 월러스, 19순위 월터 맥카티, 21순위 단테 존스를 지명했다. 셋 다 모두 포지션은 포워드였다.[3] 드래프트 1순위는 앨런 아이버슨, 2순위는 마커스 캠비, 4순위는 스테판 마버리, 5순위는 레이 앨런, 6순위는 앤트완 워커, 13순위 코비 브라이언트, 14순위 페자 스토야코비치, 15순위 스티브 내시, 17순위 저메인 오닐 등 쟁쟁한 스타들이 등장한 드래프트였다.[4] 당시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는 휴스턴을 주전 슈팅가드로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주전을 지켜온 스탁스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내심 고민중이었다고 한다. 이를 눈치챈 스탁스가 먼저 밴 건디에게 자청해서 식스맨 롤을 맡겠다고 하면서 그의 부담을 덜어줬다.[5] 1996-97시즌 스탁스는 벤치에서 웬만한 주전 이상의 생산성을 보여주는 좋은 활약으로 이 시즌 식스맨상을 수상했다.[6] 전 시즌 샬럿에서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한 래리 존슨은 하락폭이 더 커 평균 12.8득점에 그쳤다.[7] 당시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5전 3선승제였다.[8] 이해가 잘 안간다면 올스타에 한 번도 뽑힌 적 없는 마이크 콘리가 2016년 멤피스와 재계약하며 받은 5년 153m의 계약소식이 알려지며 NBA 역사상 최초로 연 3천만달러의 연봉을 받는 선수로 등극했을 때의 충격과 최소 동급 혹은 그 이상이었다고 보면 된다.[9] 여담으로 주석의 '정상을 향한 독주 Part 1(Mo' Smooth Remix)'의 가사를 보면, '앨런 휴스턴의 자로 잰 듯한 3-포인트 샷'이라는 구절로 앨런 휴스턴의 슛을 극찬하기도 했다.[10] 슛을 쏜 후 자세를 유지하는 것. 이게 잘 되지 않으면 슛을 쏘는게 아니라 툭 던지듯이 되는데, 이러면 공을 정확하게 날아가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