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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완 워커

앤트완 워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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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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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완 워커
Antoine Walker
본명 앤트완 데본 워커
Antoine Devon Walker
출생 1976년 8월 12일 ([age(1976-08-12)]세)
일리노이 주 시카고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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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학교 켄터키 대학교
206cm (6' 9")
체중 111kg (245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프로입단 1996 NBA 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
보스턴 셀틱스 지명
소속팀 보스턴 셀틱스 (1996~2003)
댈러스 매버릭스 (2003~2004)
애틀랜타 호크스 (2004~2005)
보스턴 셀틱스 (2005)
마이애미 히트 (2005~2007)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07~2008)
메츠 데 과이나보 (2010)
아이다호 스탬피드 (2010~2012)
등번호 8번 / 88번 / 24번

1. 개요2. 커리어
2.1. 대학 시절2.2. NBA 커리어
2.2.1. 보스턴 셀틱스 1기 (1996-2003)2.2.2. 댈러스 매버릭스 (2003-2004)2.2.3. 애틀랜타 호크스 (2004-2005)2.2.4. 보스턴 셀틱스 2기 (2004-2005)2.2.5. 마이애미 히트 (2005-2007)2.2.6.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 멤피스 그리즐리스 (2007-2008)
2.3.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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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그 트랜드를 앞서간 초기 스트레치 4이자 다재다능한 포인트 포워드였다. 개성 넘치는 플레이와 쇼맨십으로 2000년대 초반 보스턴 셀틱스 시절 초창기 임팩트만큼은 매우 강렬했고, 미디어와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올스타 선수였으나 경력 후반기로 갈수록 극악의 효율과 3점 난사로 인해 계륵같은 존재로 전락해 팬들에게는 난사의 아이콘이자 파산의 아이콘으로[1] 기억된다. 국내 한정 별명은 불량감자. 화려한 초창기 커리어에 비해 선수생활 후반기 폼이 너무 떨어져 부정적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2. 커리어

2.1. 대학 시절

1996년 켄터키 대학 2학년 재학 중에 주전멤버로 NCAA 우승을 이끌었다. 덕분에 드래프트에서도 6순위라는 상위권으로 지명될 수 있었다.

2.2. NBA 커리어

2.2.1. 보스턴 셀틱스 1기 (1996-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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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셀틱스는 1996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6순위로 앤트완 워커를 지명한 이후 NCAA에서 켄터키 대학의 감독으로 주가가 오른 릭 피티노를 감독으로 임명하고, 같은 대학 출신의 스윙맨 론 머서와 함께 팀의 공격 중심을 잡는다. 그 결과 워커는 첫 해 올 루키 퍼스트팀에 뽑히며 팀의 기대에 부응했고 래리 버드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셀틱스 팬들에게 희망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다 1998 드래프트에서 운좋게 10순위로 폴 피어스까지 뽑게 되었고, 머서-피어스-워커를 동시에 선발라인으로 기용하면서 젊은 트리오로 각광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조합이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고 또한 머서가 연봉문제로 팀과 불화를 빚으면서 결국 트레이드. 보스턴은 이후 익히 알려진 피어스-워커의 '다이나믹 듀오'를 중심으로 팀을 재건하게 된다.

워커는 2년차이던 97-98시즌에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벌써 20-10을 찍고(22.4득/10.2리바/3.3어시/1.7스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는 파워포워드의 체격과 파워, 스몰포워드의 기술, 빠른 스피드를 모두 겸비한 다재다능한 선수로 기대를 받았다. 그 인기도 대단해서 무려 「NBA 라이브 99」게임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 그는 이후 피어스와 함께 팀을 플옵에 진출시키고 01~03시즌에는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달리 실상은 점점 낮은 효율을 보여주는 계륵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으른 천재형 선수였던 워커는 체중조절 실패와 더불어 점점 3점슛 빈도수를 무리하게 늘려가는 등 플레이의 안일함을 보이며 효율이 떨어졌다. 물론 워커가 파워포워드치곤 정상급의 슈팅력을 갖고 있었으나, 진짜 퓨어 슈터 수준은 아닌데도 한때 리그에서 3점을 가장 많이 시도할 정도로 난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전성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만 26세 이후 올스타 출전이 끊기며 계속 내리막을 걷는다. 사실상 순수 기량만 보면 2001-02시즌 이후로 20대 중반에 이미 하락세에 접어든 아쉬운 케이스.

반면 기존에 팀의 중심이던 앤트완 워커가 점점 3점슛만 던져대면서 하향세를 그리는 사이 피어스는 견실한 플레이로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며 보스턴의 리더로 자리잡아 갔다. 그래도 워커는 보스턴 시절 5시즌이나 평균20점 이상을 기록하며 제 몫을 했고 무섭게 성장한 피어스와 시너지를 낸 덕분에 보스턴은 2000년대 초반 동부의 강호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2001-02시즌, 보스턴은 49승 33패를 기록하며, 1992-93 시즌 이후 오랜만에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 단숨에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가는 돌풍을 일으켰다. 여기서 보스턴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제이슨 키드와 케년 마틴의 뉴저지 네츠를 상대로 명승부를 펼쳤는데, 특히 피어스의 미칠듯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팀은 2승 4패로 아쉽게 탈락했다. 다음 시즌에도 보스턴은 상승세를 이어갔고 플레이오프에 무난히 진출, 뉴저지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다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4전 전패로 맥없이 탈락했다. 이때부터 언론에서도 보스턴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어스-워커 체제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긴 침체기 끝에 강렬하게 불타올랐던 보스턴은 다시 서서히 추락해가고 있었다.

결국 대니 에인지 단장은 2003-04시즌 당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3회 올스타였던 워커를 댈러스로 트레이드 하는 결단을 내린다. 팀은 폴 피어스를 보스턴의 미래로 낙점한 것이었는데, 당시 워커는 3점에 맛을 들여서 32.3%의 성공률에도 무려 경기당 7.5개나 던져대는 통에 필드골 성공률이 많이 떨어지고, 팀내 득점에서 피어스에게 역전된 (25.9점 vs 20.1점) 상태였다. 하지만 보스턴에서 데뷔해 꾸준히 기록을 내고 올스타급 활약을 보여준 그를 트레이드한다는 것은 팬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이로 인해 에인지는 멸칭에 가까운 "트레이더 댄"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2.2.2. 댈러스 매버릭스 (2003-2004)

03-04시즌 댈러스는 스티브 내시디르크 노비츠키 콤비를 도와줄 지원군으로 앤트완 워커와 앤트완 재이미슨 등을 데려오면서 나름 사기라인업을 구축하며 기대를 모았다. 주전 파워포워드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아직 올스타급과 주전급 중간 정도는 되었기에 평균 14득점 8리바로 이적 첫 해 무난한 활약을 펼쳐보였으나, 여전히 버리지 못한 외곽 남발 습성이 다시 도졌고(3점슛 성공률-26.9%) 댈러스가 요구했던 터프한 움직임도 보여주지 못했던 데다가 팀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순식간에 탈락하며 영입효과를 보지 못했다.

2.2.3. 애틀랜타 호크스 (2004-2005)

결국 한 시즌 만에 밀레니엄 최약체 팀으로 꼽히는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고, 서른이 다 되어가는 워커에게 그의 NBA 초창기 시즌의 포스를 바란다는 것은 점점 힘든 일이 되어만 갔다. 당시 애틀랜타는 변변한 스타선수 하나 없던 동부의 약체 팀이었고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팀을 옮긴 워커도 애틀랜타를 반등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팀의 주축 선수로서 40분이상 출장해 20득점 9리바 3어시 1.2스틸 이상을 기록하며 보스턴 시절만큼의 모습은 보여주었다. 물론 효율은 좋지 않았지만 애틀랜타엔 그정도라도 해줄 다른 선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워커는 애틀랜타에서 53경기만 뛰고 다시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2.2.4. 보스턴 셀틱스 2기 (2004-2005)

하지만 아무도 선수의 앞날을 알지 못한다고 했던가. 단장 부임과 함께 워커를 내쳤던 대니 에인지는 04-05시즌 트레이드 마감일을 앞두고 다시 워커에게 화이트 & 그린 유니폼을 입혔다. 댈러스로 보낸 이후, 2003-04시즌을 처참하게 말아먹은 셀틱스는 약팀에서 위상이 애매해진 그를 헐값에 다시 데려옴으로서 반등을 꾀한 것이다. 그렇게 워커는 친정팬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속에 플릿 센터로 복귀하게 되고 다이나믹 듀오의 재결성에 거는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친정복귀가 동기부여가 된 듯, 워커는 복귀 후 10경기에서 팀에 9승을 가져다주며 자신을 다시 선택한 팀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충분히 입증해냈고, 복귀 후 ‘다소’ 외곽 공격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며 포스트에서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17경기에서는 9승 8패에 그치며 초반의 상승세를 완전히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워커는 24경기를 보스턴 소속으로 소화했고 결국 보스턴은 애틀란틱 디비젼 1위, 동부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보스턴은 당시 동부의 다크호스였던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나게 되고, 예상치 못한 불운을 만나고 말았다. 이 시리즈에서 워커는 16.7득점, 7.3리바운드, 2.7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 기대이하의 성적과 효율로 폴 피어스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부담을 덜어주지 못했고, 게임 당 3개에 육박하는 3점슛 시도로 인해 포스트와 인사이드진은 센터 레이프 라프렌츠와 고졸 루키 알 제퍼슨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워커의 합류로 인해 저메인 오닐, 데일 데이비스 등에 맞서 대등한 골밑 싸움을 펼칠 수 있을거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보스턴은 취약한 인사이드 한계를 절실히 느끼며 접전 끝에 4-3으로 패하고 만다.[2]

결국 워커는 홈에서 펼쳐진 1차전을 제외한 3경기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며 홈 팬들로부터도 심한 야유를 들어야 했고, 이는 팀의 떠오르는 신예 알 제퍼슨의 플레이오프에서의 선전과 맞물려 부진이 더욱 도드라지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3]

결국 05-06시즌을 앞두고, 팀은 지난 시즌 동부 3위의 성적을 떠나 명백히 한계를 보였던 점을 인정하고, 계륵이 된 베테랑 멤버인 워커와 노장 게리 페이튼을 정리하게 된다. 셀틱스는 1-3-4번을 중심으로 이뤄진 팀이지만, 파워 포워드인 워커가 골밑에서 존재감이 높지 않고 1번 게리 페이튼은 노장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기 힘든 팀이었다. 이 팀으로 계속 중위권을 가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판을 짜려고 한 것. 그렇게 보스턴은 변화를 선택했고 미래 청사진에서 배제된 워커는 친정팀에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트레이드 되고 만다. 이후 팀은 더 적극적으로 신인들을 중용하며 미래를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물론 베테랑 동료들을 잃고 홀로 팀을 꾸려야 했던 피어스의 불만은 매우 커져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팬들은 충분히 플레이오프 경쟁력이 있는 팀을 해체하고 리빌딩을 하는 구단의 행보에 비난을 퍼부었고, 역시나 06-07시즌은 팀 역사상 최악의 시즌으로 기록된다.[4][5][6]

2.2.5. 마이애미 히트 (2005-2007)

파일:앤트완 워커 마이애미 히트 시절 우승했을 때.jpg
05-06시즌을 앞두고 마이애미 히트는 드웨인 웨이드를 도와줄 자원으로 워커 본인을 포함해 샤킬 오닐, 제이슨 윌리엄스, 게리 페이튼 등 즉전감 베테랑들을 긁어 모으면서 팀을 단번에 우승후보권 팀으로 끌어 올렸다. 물론 마이애미 팬들은 낮은 효율과 슛성공률을 보이던 워커 영입을 매우 탐탁지 않아했다. 그래도 워커는 대체로 벤치멤버에서 나오고, 간혹 주전으로 기용되며 팀에 득점이 필요할 때, 베테랑으로서 묵묵히 조연의 역할을 해주었다.

2005-06 시즌 중반 스탠 반 건디 감독이 사임하고 팻 라일리가 다시 감독직을 맡고 난 후 마침내 06년 파이널에서 6경기만에 댈러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히트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워커 또한 플레이오프 승부처에 투입되어 꾸역꾸역 득점을 해주고, 파이널에서는 주전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득점력과 센스만큼은 남아있었기에 큰 경기에서 중용받을 수 있었던 것. 출장시간이 많은 날은 너끈히 두 자릿수 득점을 책임져 주었다. 그는 팀의 기대에 부응하듯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묻지마 3점포까지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 비록 주연이 아닌 조연이지만 우승컵을 들어올린 워커는 무척 기뻐했다. 부진한 커리어 말미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

06-07시즌에 히트는 다시 한번 웨이드와 오닐 콤비를 앞세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1라운드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패하며 우승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했고, 워커도 벤치멤버로 8.5점 4.3리바를 기록하며 어느덧 평균이하의 빅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2.6.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 멤피스 그리즐리스 (2007-2008)

2007년 10월 케빈 가넷이 셀틱스로 이적한 뒤, 파워 포워드 포지션이 취약해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등번호는 24번. 그곳에서 벤치 멤버로서 평균 8점 3.7리바 36%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하며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2008년 6월 멤피스 그리즐리즈로 팀을 옮겼는데 거기서는 프리게임 단 2경기만 뛰고, 정규시즌은 아예 출전도 하지 못한 채 12월 팀에서 방출되며 영욕의 NBA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었다.

한때 동부 명문구단 보스턴의 에이스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올스타였던 그에게 실로 초라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2.3. 은퇴 이후

워커는 데뷔 이후, 총 1억810만 달러(약 2,032억)를 벌어들였다. 평생 부족할 것이 없는 액수. 하지만 흑인 특유의 호미(homie)문화로 인한 대가족의 부양과 무분별한 지출, 도박 등의 문제로 2010년 파산까지 이르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부진한 선수 커리어에 그나마 남은 보스턴 시절의 좋은 이미지마저 파산이라는 꼬리표에 다 묻혀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2006년 마이애미 히트에서 따낸 우승 반지까지 팔아치웠고 돈을 벌기 위해 NBA로 복귀하고자 노력까지 했다. 2010년 푸에르토리코 리그에서 뛴 뒤 D-리그 팀과 계약하며 선수 생활의 꿈을 이어갔으나 운동능력 감소와 낮은 야투율 등의 이유로 NBA 복귀에는 실패했다.

그가 파산한 근본적 원인 경제관념이 떨어진 탓이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으면 하는 바람에서 현재는 운동 선수들의 자산관리 멘토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간간히 토크쇼에도 출연해 굴곡 많았던 인생스토리를 들려주면서 얼굴을 비추고 있는데, 나름 올스타 출신인 덕에 미국내 인지도는 괜찮은 편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 '퍼리미터보다는 포스트에서의 움직임이 더 많아야 할 선수’로 평가받았다.[7]

난사꾼 이미지로 박하게 기억되는 선수지만, 전성기에는 포지션인 파워 포워드의 틀을 벗어난 능숙한 드리블, 패싱능력, 넓은 시야 그리고 외곽슛 능력으로 ‘올라운드 플레이어’, ‘포인트 포워드’로 불렸으며 래리 버드 은퇴 이후 암흑 속을 헤매던 팀을 동부 강호로 만들고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8]

데뷔 초창기 파워포워드로서 뛰어난 득점 스킬과 패싱센스가 돋보였다. 보스턴 시절 평균 20점 기록한 시즌이 5시즌이었다. 데뷔 2년차부터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하는 등 존재감을 보여주었고, 2000-04시즌 구간에는 평균 4~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하는 다재다능함도 선보였다. 애틀랜타 이적 후에도 주전으로 출전하며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했다. 즉 공을 주면 어떻게든 점수는 내주는 유형이었다.

그러나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은 오히려 양날의 검이 되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는 1998-99 시즌 당시 빅맨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3점 성공률이 36.9%를 넘기며 외곽에 자신감이 생기자 난사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빅맨으로서 기본인 골밑 플레이와 허슬을 점점 소홀히 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99-00 시즌에는 3점이 25.6%까지 수직낙하하며 쓴맛을 보고 언론과 팬들로 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날씬하고 빨랐던 초창기 모습과 달리 몸관리에 소홀하며 물살이 오른 워커는 민첩함을 자랑했던 파워 포워드로서의 경쟁력을 잃어갔다.

포스트에서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단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긴 드리블과 몇 번의 레그스루 이후 샷클락에 쫒겨 외곽슛을 던져버리는 단조로운 패턴에 사로잡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했다. 또한 불어난 그의 몸은 포스트에서보다는 외곽 위주 공격을 할 수 밖에 없게끔 하는 요소가 되고 말았다. 재능은 아주 뛰어났지만 워낙 게으르고 자기관리가 안 된 선수로 결국 커리어에서 말도 안되게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빠르게 하락세를 탄 케이스였다.

커리어 평균 3점 성공률은 32.5%이고, 야투 성공률이 41.4%다. 특히 야투 성공률은 빅맨으로서는 아쉬운 수치.[9]

빅맨으로서 3점슛을 주요한 득점옵션으로 매우 공격적으로 시도했던, 시대를 앞서간(혹은 잘못 타고난) 선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다재다능하고 유니크한 유형의 스트레치4 선수로 오늘날 리그 트랜드에서 관리와 코칭을 잘 받고 뛰었다면 어떤 활약을 보여주었을지 궁금한 선수다. 빅맨이 3점 쏜다고 엄청 욕을 먹었던 당시보다는 마음 편하게 3점을 던져 더 좋은 결과를 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워커의 악명이 단순히 "빅맨이 3점을 던져서" 뿐만은 아니다. 워커는 올스타에 뽑히던 02, 03시즌에 연속으로 야투율 3할대 후반을 기록했으며, 01시즌부터 세 시즌동안 3점슛 7.4~8개 사이를 기록했다. 성공률은 각각 36.7%, 34.4, % 32.3%. 사실 워커는 슛거리가 길고 슈팅력이 당시 빅맨치곤 좋은 선수지만, 슈팅 터치가 그렇게 정교한 선수는 아니었다. 자유투 성공률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커리어 63.3%, 7할을 단 두번 넘었고 커리어하이가 74.1%에 불과했다.[10] 슈팅터치로 따지면 스카티 피펜처럼, 슛거리는 길고 긁힐 땐 잘 들어가지만 안정적인 슈터라고 보긴 힘들었다. 실제로 그가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10리바운드를 넘긴 98시즌에도 야투율은 42.3%로, 당시가 공격가뭄 시대란 걸 감안해도 파워포워드로선 매우 낮은 편이었다.[11]

워커는 그보다 약간 어린 라마 오돔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재다능한 천재적인 선수였으나 [12] 슛을 잘해서 득점을 많이 할 선수는 아니었다. 오돔, 피펜, 그리고 케빈 가넷같이 슈팅터치가 괜찮지만 슈터급은 아닌 선수들의 경우, 준수한 득점력으로 20점대 초중반 득점은 충분히 해주지만 어느 정도 이상 공격롤을 많이 맡으면 비효율적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은 할 줄 아는게 워낙 많아 다방면에서 공헌해준다.[13] 즉, 워커는 능력에 비해 너무 공격욕심이 많았다.[14]

워커는 득점력만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작은 키에도 상당히 힘이 좋아 인사이드에서도 꽤 강해 수비를 끌어올 수 있었으며, 패스와 드리블은 풀타임 스몰포워드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이런 면에서 워커는 폴 피어스와 잘 맞을 수 있었다. 피어스는 슈팅 터치 자체가 상당히 뛰어나고 안정적인 선수이며, 워커와 달리 2-3번에 걸친 선수이기 때문에 이 두명이 인사이드-아웃사이드 조합을 보여줬다면 상대로선 정말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피어스는 스윙맨치고 힘이 굉장히 좋아 포스트업에서도 위력적이고, 반대로 워커는 빅맨임에도 슛이 좋아 외곽으로 빠질 수 있으니 스페이싱 면에서 더 할 나위 좋은 조합...이어야 했다. 문제는 워커가 자신이 잘하는 것보다 피어스가 잘하는 것에 욕심을 냈다는 것. 또한 스탯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지만 그는 무리한 1대1이나 막무가내 공격이 많았다. 이 때문에 피어스가 26점 스코어러가 된 02시즌에 수비를 분산시키는 정상급 득점원을 옆에 두고도 4할도 안되는 야투율에 그친 것. 즉, 시너지를 낼 수도 있는 조합임에도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는 피펜이 되었어야 하는 능력치에도 조던을 꿈꾸다 본인의 재능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한 선수였다. 물론 워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적인 선수였다. 그러나 실제 자신의 능력에 비해 비효율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고, 만약 그가 다른 방향으로 플레이했다면 더 위력적일 수도 있던 선수였다.

4. 여담


[1] 파산으로 한정하자면 유사 사례로는 데릭 콜먼, 랜디 브라운이 있다.[2] 사실 원래 인디애나는 전 시즌 NBA전체 승률 1위였고, 우승팀 피스톤즈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한 강팀이었다. 여기에 에이스 저메인 오닐, 론 아테스트가 더욱 성장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큰 경기에 강하고 승부근성이 뛰어난 스티븐 잭슨을 영입하며 시즌 개막 당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꼽혔었다. 그런데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바로 그 아테스트가 대형 사고를 치며 시즌이 망해 6위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 사건 이후 오닐은 다시는 원래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아테스트도 출전하지 못해 전력이 확 깎였지만, 풍부한 경험과 두터운 로스터를 자랑하던 페이서스는 버거운 상대였다.[3] 당시 제퍼슨은 고졸에도 불구하고 침착한 플레이와 포스트에서의 강력한 움직임으로 팀이 요구하는 피지컬한 몸싸움을 잘 수행했으며 이러한 제퍼슨의 플레이스타일은 겉에서 맴도는 워커와는 가장 대조적인 면이었다.[4] 물론 이는 미래를 생각한 대니 에인지의 빅픽처였고, 07-08시즌 빅3를 구성하며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5] 사실 에인지의 원래 계획은 07시즌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대박 드래프트로 알려진 2007 드래프트에서 거물신인을 뽑아 전 시즌에 가능성을 보인 알 제퍼슨, 라존 론도, 제럴드 그린, 라이언 곰즈 등 영건들과 함께 리빌딩을 하는 것이었다. 만약 케빈 듀란트를 뽑았다면 이미 준척급 PG 3인방을 로테이션으로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듀란트-폴 피어스의 원투펀치가 결성되고 한층 성장한 제퍼슨이 골밑을 맡아주는데다가 수비 하나는 끝내주는 토니 알렌도 있기 때문에 당장 전력만 봐도 무시못할 수준이 된다. 그렉 오든을 뽑아 제퍼슨을 파워포워드로 세운다면 더 대박이다.(물론 오든은 유리몸 때문에 bust였지만 당시엔 누구도 이걸 몰랐다.) 그런데 동부 꼴지이자 전체 통틀어 꼴찌에서 두번째였던 보스턴이 희박한 확률을 뚫고 기적적으로(...) 5픽에 당첨되는 바람에 이 계획을 전부 수정하고 대대적인 트레이드로 로스터를 전부 갈아엎은 것.[6] 여담으로 당시 셀틱스가 1픽을 얻을 확률은 19.9%로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25%에 이은 두번째 확률이었다. 세번째 높은 확률은 밀워키 벅스로 15.6%였는데, 이 세팀은 나란히 4,5,6픽으로, 이들의 확률로 얻을 수 있는 가장 낮은 순위에 당첨되는 최악의 불운을 겪게 된 것. 반면 포틀랜드가 당첨될 확률은 5.3%에 불과했었다.[7] 당시 NBA는 요즘처럼 빅맨의 외곽슛을 당연시하는 시대가 아니었다.[8] 데뷔 초기 플레이만 보면 효율도 좋고 깔게 없다.[9] 커리어 평균 17.5점/ 7.7리바운드/ 3.5어시스트/ 1.2스틸/ FG 41.4%/ 3P 32.5%[10] 비슷하게 3점 던지는 빅맨이던 라쉬드 월러스는 자유투 성공률이 초창기 3시즌과 중간에 69.7% 한번 기록한 걸 빼면 전부 7할을 넘겼으며, 커리어 평균은 72.1%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커보다 3점을 훨씬 적게 쐈다. 커리어 평균이 4.8개 대 2.9개이며, 시즌 평균으로 8개, 7.5개, 7.4개 던지던 워커와 달리 가장 높은 시즌 평균이 5.6개, 4.8개, 4.1개이다. 중요한 건 쉬드의 저 수치는 전부 30대 이후에 팀내 역할이 중장거리 슈터로 자리잡은 것들이다. 전성기 시절엔 가장 많이 쏘던 시즌에도 경기당 4.1개였다. 반면 워커는 같은 기간에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달리면서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쏜 것.[11] 보스턴 시절 워커의 야투율은 가장 높았던 99-00시즌에 43%였고, 98시즌 이후 올스타에 뽑힌 02,03시즌에는 39.4%, 38.8%였다. 즉, 전성기 시절에도 공격효율은 낮았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부딫히던 선수가 아니라 자유투 갯수도 적었다. 01,02시즌엔 야투를 21개씩 던지는데 자유투가 4개 수준. 야투시도가 그보다 적은 폴 피어스가 8,9개씩 자유투를 얻어내는 것의 절반도 안되었다. 물론 자유투 개수는 야투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실제 둘의 공격시도 횟수는 비슷했다. 그래더 저렇게 비효율적인 선수가 25,26점 스코어러를 옆에 두고 저렇게 던져대는게 문제.[12] 오돔보다 키가 더 작지만 오히려 골밑에서 강세를 더 보이는 선수였다.[13] 가넷이 가장 위력적일 때는 샘 카셀, 라트렐 스프리웰과 공격롤을 분산시키고 리바운드, 수비, 패스에서 큰 공헌을 할 때였고, 혼자 공격을 다 할때는 오히려 득점 수치가 내려갔다.[14] 가넷이나 워커에 비해 공격력이 훨씬 떨어지지만 이런 측면에서 드레이먼드 그린과도 비교할 만하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우승 시절처럼 적당한 수준의 공격가담을 하는 그린은 괜찮은 득점지원을 해주는 선수다. 그러나 KD, 커리 등이 빠진 이후처럼 슈팅수가 많아지면 크게 비효율적이 된다. 사실 위에서 쭉 읽어보면 눈치챘겠지만 공격수로서 워커의 약점은 가넷과 유사하다. 빅맨치고 낮은 야투율, 적은 자유투, 빅맨치고 슛을 잘하지만 슛 터치가 슈터급은 아니고, 낮은 인사이드 공략 빈도수 등. 그러면 가넷은 왜 역대급 선수고 워커는 평가가 낮냐, 일단 가넷은 자기가 최정상급 득점원이 아니란 걸 알고 공격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가넷이 무리해서 득점할 때는 팀내에서 공격을 맡길 다른 선수가 없을때 뿐으로, 다른 옵션이 있을때는 항상 볼을 돌린다. 실제로 "빅맨치고 야투율이 낮다"고 하지만 가넷은 항상 야투율 4할대 후반~5할대 초반이었고 38세가 된 14시즌 전까진 47%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낮다는 것도 팀 던컨처럼 센터에 가까운 정통빅맨에 비하면 낮다는 거지 커리어 야투율이 49.7%는 슛 쏘는 빅맨치고 오히려 상당히 높은 편이다. 두번째로 가넷은 프레임이 얇고 체력 한계상 골밑공격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큰 키,긴 팔, 뛰어난 기술로 실제로 하면 굉장히 잘했다. 마지막으로 수비와 리바운드. 즉, 자신의 한계를 알고 무리하지 않으며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효율적인 선수였다는 것. 워커는 가넷 수준은 아니지만 (키는 좀 작아도) 스피드와 기술을 겸비한 빅맨에 패스도 뛰어났다. 포인트포워드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가끔 3점을 쐈다면 좋은 선수로 기억됐을 것이다.[15] 스테판 커리같이 혼자 한 시즌에 400개 이상을 넣는 선수도 있는 지금 기준으로는 평범한 수치지만, 당시엔 200개도 굉장히 높은 수치였다.[16] NBA는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전문 캐스터와 전현직 농구인 해설자(color commentator이라고 한다. 캐스터가 경기 상황을 중계하면 옆에서 "아 저건 ~해서 이런건데요"라고 설명하는 역할.) 조합을 쓰는데, 보통 레전드나 대선배급이 많고 미국 농구계에는 트래쉬토킹 문화가 있기 때문에 눈치보지 않고 편하게 자기 할말을 다 한다. 마찬가지로 스코어러지 슈터는 아닌 앨런 아이버슨이 00년 콘테스트에 나와 폭망했을 때 사이드라인 리포터인 쉐릴 밀러(여자농구계 레전드이며 레지 밀러의 누나다.)가 아이버슨을 붙잡고 폭소하면서 "대체 뭔일이 일어난거에요??(What the hell happened)"라고 하고(어감으론 "너 뭐한거냐?"에 가깝다), 찰스 바클리케니 스미스 일행은 덩크 콘테스트 때 조쉬 스미스가 야심차게 예고까지 한 말도 안되는 장거리 덩크슛을, 예고거리보다 훨씬 짧은 자유투라인에서 하자 신나게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