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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그랜트

호레이스 그랜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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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1992 199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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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그랜트
Horace Grant
본명 호레이스 주니어 그랜트 시니어
Horace Junior Grant Sr.
출생 1965년 7월 4일 ([age(1965-07-04)]세)
조지아 주 오거스타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클렘슨 대학교
신장 208cm (6' 10")
체중 111kg (245 lbs)
윙스팬 213cm (7' 0")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센터
드래프트 1987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0순위
시카고 불스 지명
소속 구단 시카고 불스 (1987~1994)
올랜도 매직 (1994~1999)
시애틀 슈퍼소닉스 (1999~200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0~2001)
올랜도 매직 (2001~200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3~2004)
등번호 54번 - 시카고 / 올랜도 / 시애틀 / 레이커스
가족 조카 제러미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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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커리어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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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고글 쌍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인 시카고 불스 1차 쓰리핏의 멤버였던 선수.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로 몸싸움과 공격 리바운드, 세로 수비가 좋으며 받아먹기에 능해서 볼소유도 짧고 실책도 잘하지 않으며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이해도가 높은 BQ를 갖춘 블루워커 빅맨이었다.[1]

공격력은 뛰어나지 않은 편이었지만 피지컬이 충분하고 미들슛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어 두자리 숫자의 평득을 기록할 정도는 되었고, 슈팅이나 자유투(통산69.2%) 등이 어중간했지만 불스 시스템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별명은 'The General' 및 'The Enforcer'.

2. 커리어

2.1. 데뷔 이전

1965년 조지아 주 어거스타-리치먼드 카운티의 어거스타에서 정원사인 아버지 하비 리 그랜트(1938~2023)와 어머니 그래디 매(1943~1998)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9분 차이로 늦게 태어난 동생의 이름은 하비 그랜트로 하비 역시 같은 파워 포워드 포지션의 농구선수이다. 형과 같이 행콕 센트럴 고등학교를 마치고 클렘슨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폭력사건에 휘말려 오클라호마 대학교로 전학을 가서 2학년 시즌을 통으로 날리고 호레이스보다 1년 늦은 88년 드래프트에 지명받아서 워싱턴 불리츠 (1988-1993),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93-1996), 워싱턴 위자즈 (1996-1998),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99) 등의 팀에서 활동했다.

호레이스는 어린 시절을 글래스콕 카운티의 미첼에서 보내며 스파르타에서 학교를 다녀왔고, 특히 행콕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담임 교사인 로슬린 다니엘스에 의해 남편 아서가 지휘하는 농구부로 들어가 재학 동안 2회 연속 주 대회 우승을 일궈냈고, 클렘슨 대학교 진학 후 클리프 엘리스[2] 감독의 지휘 하에 1985-86 시즌 NIT 8강 진출, 1986-87 시즌 NCAA 전국대회 진출을 각각 일궈냈고, 1987년 한 해에만 올 ACC 퍼스트팀, 올해의 ACC 선수상, 올 아메리칸 세컨드 팀을 한 몸에 안았다. 교내에서는 파이 카파 알파 회원이기도 했다.

2.2. 시카고 불스

1980년대 중반 시카고 불스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 팀구성을 짜맞추고 있었다. 조던은 자신의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출신의 조 울프라는 센터선수를 다음 드래프트에서 선발하길 희망했는데, 불스의 스카우터들이 대학경기를 보러갔다가 그랜트의 플레이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그랜트는 지극히 평범한 대학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지만 스카우터들은 불스의 단장인 제리 크라우스를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결국 1987년 드래프트에서 불스는 울프를 거르고 그랜트를 전체 10순위로 뽑았다.

동시에 불스에 입단한 그랜트와 피펜은 조던의 맹렬한 훈련시간을 거치면서 성장했고 시카고 불스 1차 쓰리핏의 주역들이 되었다.

다만 그랜트는 팀원들이 모두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팀의 에이스였던 조던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잦아 조던과 불스 프런트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3] 1991년 우승 이후 백악관 초청행사에서 조던이 빠졌던 일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훈련으로 조던이 팀 훈련에 불참한 것을 모두 비판한 것.

하지만 이런 갈등이 팀의 성적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고[4] 1993년 파이널 6차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클러치 상황에서 조던 - 피펜 - 그랜트 - 존 팩슨으로 이어지는 후일 슬램덩크에서 오마주된 그 플레이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팀의 스리핏을 견인했다.

1993년 조던이 1차 은퇴를 하며 야구를 하러 떠난 이후로 불스는 '조던이 없어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라는 목표로 선수들이 뭉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펜과 그랜트의 활약으로 불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이 시점부터 피펜과 그랜트도 리그의 스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피펜은 MVP 투표 3위까지 오르며 이때 처음으로 올 NBA 퍼스트팀에 올랐고, 그랜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그러나 그때도 짠돌이로 악명 높았던 불스 프런트[5][6]는 재계약이 다가온 그랜트에게 턱없이 낮은 금액을 제시. 그랜트는 불스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사실 그랜트가 불스에서 받은 마지막 시즌 연봉이 195만 달러, 매직에서 첫 시즌 받은 연봉이 212.5만 달러이기 때문에 그리 차이나지 않은 조건 같고, 오히려 시카고가 처음 제시한 계약이 연평균 액수는 더 높았다. 그러나 당시 계약 조건을 보면 매직이 불스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을 볼 수 있다. 불스는 그랜트에게 5년/2천만 달러를 제시했는데, 당시 시장 물가로 보면 얼핏 괜찮은 조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미 전반적인 연봉이 해가 다르게 매년 오르는 상황에서 그랜트를 장기계약으로 묶어두려는 속셈이었다. 반면 매직의 6년/2천2백만 달러 계약은 연평균 액수는 더 적지만 부상을 당해도 연봉을 지급한다는 옵션도 있고, 무엇보다 1년이 지나면 자유계약선수로 새로운 계약을 할 수 있다는 옵션이 있었다.[7] 실제로 그랜트는 2년간 낮은 연봉으로 뛴 이후에 96년 CBA협상의 결과로 샐러리캡이 크게 늘어나자 매직과 5년/5천만 달러로 계약하게 된다. 이 덕분에 그랜트는 97, 98년 두 해 모두 절친 피펜과 비교도 안되게 많은 1천5백만달러에 가까운 연봉을 받게 된다.[8]

이런 식으로 '일단 낮은 연봉으로 뛰고 다음에 더 높은 연봉을 주겠다'는 식의 계약은 상호간의 신뢰가 없으면 성립이 불가능하다. 올래도는 그전부터 그랜트에게 "네가 올랜도에서 은퇴하게 해주겠다"고 그를 원한다는 어필을 계속 했고 실제로 약속을 지켜 고액 연봉을 줄 정도로 신뢰가 있었기 이런게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불스 프런트는 클레프 레빙스턴에게 높은 연봉을 약속했다가 경쟁자들이 전부 빠지니 말을 싹 바꾸며 낮은 조건을 제시한 전력도 있고, 라인스도프 구단주는 그 어떤 선수에게도 계약 재협상 옵션을 주지 않았다. 프런트의 태도 차이가 이 정도로 극명하니 선수 입장에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리가 없다.[9]

그랜트의 계약관련 시카고 트리뷴 기사 링크LA 타임즈 기사 링크

2.3. 올랜도 매직

앤퍼니 하더웨이샤킬 오닐을 중심으로 젊고 강력한 팀이었던 매직에서 그랜트는 큰 형님 역할을 했고 매직은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 불스를 제압하면서 1995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이 버티는 휴스턴 로키츠에 완전히 털려버리면서 준우승[10]에 그쳤다.

그랜트는 96년 불스와의 동부결승 1차전에서 부상을 당해 결국 시즌아웃이 되었고 시리즈 0-4로 패했다. 그랜트가 건재했다면 불스로부터 시리즈를 가져오진 못하더라도 조금 더 선전했을 여지가 있다.

샤킬 오닐이 1996년 FA 계약으로 레이커스로 떠나버렸고 올랜도는 플레이오프는 진출했으나 우승권팀에서 내려왔다 (60승에서 45승으로 15승 감소) 97/98시즌에는 41승으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98/99 단축시즌에 기대이상으로 선전하며 정규시즌 동부3위를 기록했으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에 업셋을 당했다. 2년차부터 10년연속 두자리 득점을 기록했던 그랜트도 이 시즌부터 두자리 득점에 실패하며 노쇠화로 기량이 떨어졌다.

2.4. 시애틀, 레이커스, 매직, 레이커스

시애틀을 거쳐 2001년 레이커스로 이적한 그랜트는 불스 시절 감독이었던 필 잭슨과 매직 시절 동료였던 샤킬 오닐과 재결합, 4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는다. 우승 운은 확실히 있었던 선수. 우승 시즌 직후 은퇴하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올랜도로 떠났다가 2003-04시즌 전당포 라인업을 구축한 레이커스에 다시 합류하지만, 2004 NBA 파이널에서 배드 보이즈 2기에게 털리면서 다시 준우승. 그리고 그 시즌 이후 그랜트는 은퇴했다.

3. 기타

마이클 조던과 팀원들의 불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던 마이클 조던이 동료들에게 폭군처럼 군다는 내용으로 인해 논란이 일어났던 베스트셀러 'The Jordan Rules(1992)'의 저자이자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 샘 스미스에게 불스 라커룸 내부의 일을 알려줬다고 의심받았고, 지금도 마이클 조던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다만 본인은 샘 스미스와 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선수들의 관계까지 말해준 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B.J. 암스트롱도 그 책은 불스 조직의 온갖 사람들의 말들을 종합한거지 전부 호레이스 그랜트가 출처일리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 본인의 주전 도약 과정 때문에 생긴 트러블이 꽤 크고 오래 갔기 때문에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는 찰스 오클리, 빌 카트라이트 항목에 나와 있듯이, 이 두 선수의 맞트레이드에 조던이 크게 분노했기 때문.

한편으로 "마이클은 항상 승리를 찾아내는 선수다." 라면서 존중하는 발언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랜트는 조던과 동료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불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 그의 실력에 대해선 한번도 부정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뛴 팀과 동료들 중 최고를 꼽으라면 (그는 전성기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과 레이커스에서 뛰며 우승을 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no question) 조던과 불스지." 라고 꼽는다. 위에 언급된 발언도 이 과정에서 나온 것. 즉, 조던이 있는 팀은 어떻게든 승리할 것이란 소리다.

불스의 홈경기에 스카티 피펜과 함께 가끔 모습을 보인다.

전 부인과 아들 둘이 있고, 현재의 부인과 아들 하나 딸 셋이 있다. 전술한 쌍둥이 동생 하비는 아들 셋이 있는데(호레이스에겐 조카) 이들은 프로농구선수로 성장하여, 둘째 제리언은 올랜도 매직, 막내 제라미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활약중이다.[11]

드래프트 동기인 피펜과 굉장히 절친한 사이여서 데뷔하고 똑같은 차를 사고, 같은 동네에 집을 사고, 같은 종의 개를 입양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하는데다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으며 서로의 best man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불스의 year book에서 "달 여행을 간다면 누굴 데려가겠느냐?"란 질문에 피펜은 "호레이스 그랜트." 라고 썼다고 한다. 실제로 그랜트는 훈련이건 경기 때건 툭하면 자신을 갈구는 조던보다는 항상 자신을 챙겨주고 다독여주는 피펜을 훨씬 더 잘 따르던 편이다. 다만 피펜이 조던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하고 결혼 몇 년 만에 이혼을 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친분과 별개로 같이 나가 노는건 자제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많은 선수들이 원정 경기에서 클럽에 나가 노는 반면 원정경기에 아내 도나를 대동하기까지 했다. 다만 둘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2020년 5월 20일 ESPN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의 내용 중 90%가 사실과 다르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라스트 댄스는 전체적으로 호레이스 그랜트에게도 매우 우호적인 내용이었고 그가 가장 많이 까이는 음모론, '샘 스미스 기자에게 시카고 불스의 라커룸 생활을 누설했다.(1993년)'도 그랜트가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쉴드쳐주었기 때문에 왜 갑자기 급발진을 하는 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는 반응.[12][13] 아무래도 조던과 그랜트의 앙금은 아이제아 토마스만큼 깊은 것 같다.

다만 갈등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진짜 원수지간인 아이제아와 달리 조던은 한창 팀이 성장할 시점에 젊고 재능있지만 아직 미숙한 피펜과 그랜트가 우승을 도울 수 있을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에 둘을 많이 갈궜다. 사실 말이야 '의구심을 가져 많이 갈궜다' 이지 당하는 입장에선 피말리는게 사실이고, 피펜처럼 악에 받혀 이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는 유형도 있겠지만 섬세한 성격의 그랜트는 이에 꽤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는 그랜트가 부진하자 이동 중 팀 전용기에서 "그랜트에게 음식 주지 마라."고 갈궜다는 일화가 포함된다.

그 외에도 "조던이 나를 괴롭히려고 하면, 나는 바로 조던에게 대들었어. 하지만 퍼듀, 커, 버렐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팠어. 리더가 선수들을 때리고, B나 H라고 부른 건 선을 넘은 거야." 라며 조던의 방식에 불만을 표하거나, "연습할 때 조던은 엄마, 마누라, 자식, 가족, 연봉 등을 limit가 없이 갈궈댔다." 라고 언급하는 등 조던의 방식에 꽤나 반감을 가졌음은 확실하고 이를 이따금씩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사실 아무리 조던의 리더십이 대단해도 저러한 일화들에 대해선 '조던이 과했다.' 라는 평도 만만치 않다 보니, 그랜트가 이따금씩 조던에 대해 표출하는 불만에 동조하는 여론도 제법 상당한 편.

그랜트는 인터뷰에서 위 기내식 일화를 거론하며 "당시 난 바로 (조던에게) 받아쳤다. 조던은 말 뿐이었다. 만약 실제로 붙었다면 조던을 박살냈을 것"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는데, 조던과 딱히 원수진 것은 없지만 강한 조던의 이미지에 반해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여린 것처럼 비춰지는 것에 반발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육체적으론 90-91시즌부터 팀에서 가장 힘이 센 선수가 바로 그랜트였고, 조던 룰즈에는 승부욕이 붙은 조던이 그랜트가 역기를 드는 것만큼 들려고 해서 주변에서 말렸다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제임스 워디, 카림 압둘자바 등과 함께 고글로 유명했던 선수 중 하나였는데[14], 여기엔 비하인드가 있다. 그랜트는 원래 본인이 눈이 나쁘다는 걸 인식하지 못해 안경이나 고글을 끼지 않았는데, 90-91시즌 이전에 근시가 있다는 안과의사의 진단을 받고 고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랜트는 데뷔시즌에 야투율이 50.1%, 이후 51.9%, 52.3%를 기록하다가 이때 고글을 쓰곤 갑자기 54.7%, 이듬해엔 57.8%까지 올랐는데 이 급격한 경기력 향상을 고글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근시가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안경을 쓰지 않고 경기하면 굉장히 지장이 많다.

그랜트는 현역시절에 라식 수술을 해서 고글이 필요없는 눈이 됐지만, 안구 보호 차원에서 계속해서 고글을 계속 쓰고 경기를 했다. 이 때문에 불스 시절엔 사석에서 안경을 꼈지만, 은퇴 이후엔 사석에서 안경을 끼지 않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당시 리그에는 수비, 리바운드 등 궂은 일에 특화된 터프한 블루워커 파워 포워드들이 많았는데, 찰스 오클리, 데니스 로드맨, 호레이스 그랜트, 90년대 후반 데일&안토니오 데이비스 등이 대표적이다.[2] 1945년 12월 5일 플로리다 주 마리아나 출생. 학창 시절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와 미들 테네시 주립대학교를 거쳐 1968년 러켈 중학교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1969년 나이스빌 고등학교에서 감독으로 데뷔하여 2년 후 뱅가드 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컴벌랜드 대학교 체육부장 겸 감독으로 대학 무대에 입성했다. 1975년부터 9년 동안 사우스 앨라배마 대학교를 지휘하며 1979년 및 1980년에 두 차례 NCAA 전국대회 진출을 달성했고, 1984년 클렘슨 대학교로 전근간 후 임기 10년 동안 호레이스 외에 데일 데이비스, 엘든 캠벨, 크리스 휘트니, 샤론 라이트 등을 발굴/육성했고, 1990년 전국대회 때 16강에서 테이트 조지, 스캇 버렐, 크리스 스미스 등이 포진한 당시 신흥 강호 코네티컷 대학교를 70점대 동점으로 몰고 갔다가 1점 차로 역전패당한 바 있었지만 1992년 선수였던 웨인 버킹엄의 학업성적 미달 등 온갖 비리 문제로 1989-90 시즌 기록 말소, 정기 조사 등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1994년 오번 대학교로 또 옮겨 임기 10년 동안 크리스 포터(전 대구 오리온스 용병) 등을 발굴/육성했고, 2007년부터 코스탈 캐롤라이나 대학교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여 2023년 12월 은퇴 시까지 임기 16년 동안 NCAA 전국대회 진출 2회, NIT 진출 2회, CIT 진출 2회, CBI 진출 3회, 더 배스킷볼 클래식 진출 1회 등을 달성했다.[3] 피펜과 그랜트 둘 다 평범한 조던과 훈련하면서 성장했지만 둘의 성격 차이가 컸다. 피펜조던이 혹독하게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독하게 받아치는 독종이었고, 이 때문에 조던과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됐다. (조던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동료들을 좋아하고 오히려 쥐어사는 동료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 그랜트는 성격이 너무 착하고, 섬세해서 조던의 갈굼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4] 조던과 빌 카트라이트의 불화도 유명하지만 조던과 카트라이트는 1차 쓰리핏 당시에는 이미 화해를 했고, 공동주장까지 맡았다. 그리고 조던은 그랜트가 공개적으로 비판했음에도 그의 견해를 존중해줬다.[5] 시카고 불스 프런트가 제대로 된 금액으로 선수를 잡은 케이스는 딱 2번 있었다. 마이클 조던데릭 로즈다.[6] 조던도 선수 시절 내내 연봉이 높지 않았는데 각 각 96/97, 97/98시즌에 지금도 높은 2,500만 달러와 3,000만 달러 이상에 계약했다. 불스 수뇌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MVP가 아니면 재계약에 관심이 없다.[7] 즉 의도치 않게 노예계약으로 뛰게 된 피펜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연봉 재협상' 옵션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스와 덜컥 재계약을 맺었다가 본인이 슈퍼스타가 된 이후에도 계속 낮은 연봉에 억지로 뛰어야 했던 피펜은 그랜트와 절친이었다. 베프가 불스와 계약 한번 잘못했다 손해를 보게 된 꼴을 본 그랜트가 같은 수작에 넘어갈리가 만무했다.[8] 그랜트의 전성기는 90년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시카고의 계약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99년에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을 것이고, 피펜도 돈 아깝다고 잡지 않은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당시 피펜보다 기량이 떨어지던 그랜트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해줬을 리가 없다. 그랬다면 그랜트는 피펜과 비슷하게 계약 기간 대부분을 시장가보다 낮은 연봉에 뛰어야 했음은 물론이고 전성기가 지난 34세 나이에 자유계약 시장에 나와야 했을 것이다. 반면 올랜도는 이미 31세이던 그랜트에게 5년 계약을 제시함으로서 대접을 확실히 해주었다.[9] 사실 97년에 이미 왕조를 자진해서 해체하려고 했던 라인스도프 구단주의 태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불스는 적극적으로 큰 돈을 써서 반드시 우승을 노리는 구단이 아니었다. 이를 보면 당시 그랜트의 기량으로 받을만한 연봉의 하한선에 가까운 오퍼를 한 것 자체가, '받아들이면 좋고, 안 그러면 어쩔 수 없고' 식의 면피성 오퍼에 가깝다. 또한 미국 프로스포츠에서 연봉 협상은 팀들이 한 선수에게 일제히 비딩을 하고 다른 팀들의 오퍼 내용을 알 수 없는 블라인드 협상(blind negotiation)이 아니다. 이 점은 불스가 96년 당시 원래 마이클 조던에게 연평균 1천~2천만달러 수준의 안일한 오퍼를 해놓고 닉스가 2천5백만 달러 이상을 오퍼하자 화들짝 놀라 3천만달러를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른 팀에선 이런 조건 있던데요?'라고 알려주며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것도 에이전트의 일이다) 즉 당시 그랜트는 샐캡 인상이 확실시되는 와중에 헐값에 장기계약에 묶이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고, 이 점을 확실하게 해소해준 것이 올랜도, 그렇지 못한게 시카고였다고 볼 수 있다.[10] 파이널시리즈 0-4 스윕패[11] 농구 집안이 생각보다 많다. 팀 하더웨이 부자, 글렌 로빈슨 부자, 델 커리와 스테판/세스 커리 형제, 가솔 형제, 사보니스 부자.[12] 손대범 편집장과 조현일 기자 등 농구 기자들이 함께하는 유튜브 방송에서도 그랜트의 발언에 다들 당황해했다.[13] 예컨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기자 샘 스미스의 책 조던룰즈의 정보를 누가 제공했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조던의 입장("호러스가 흘렸다"), 그랜트 본인의 입장("내가 아니다"), 제3자의 입장(BJ 암스트롱: 호러스만 얘기를 했을리가 없다. 여러명으로부터 얘기를 들었을것")을 전부 포함했는데 이 정도면 교차검증이 잘 된 편이며 다큐에서도 누가 유출했는지 결론을 내고 있지 않다. 또한 아래에 나오는 기내식 일화나 그랜트가 조던에게 일방적으로 갈굼당하는 일화는 아예 언급도 되지 않았다.[14] 하킴 올라주원도 초창기에 고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