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브래들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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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폴 브래들리 Shawn Paul Bradley | |
출생 | 1972년 3월 22일 ([age(1972-03-22)]세) |
서독 라인란트팔츠주 란트슈툴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브리검 영 대학교 |
신장 | 229cm (7' 6")[1] |
체중 | 125kg (277 lbs) |
윙스팬 | 226cm (7' 5") |
포지션 | 센터 / 파워 포워드 |
드래프트 | 1993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지명 |
소속 팀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93~1995) 뉴저지 네츠 (1995~1997) 댈러스 매버릭스 (1997~2005) |
등번호 | 76번 - 필라델피아 45번 - 뉴저지 44번 - 댈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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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미국의 NBA의 농구선수였다.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숀 브래들리는 아버지가 독일 주둔 미 공군이었던 시절 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파견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브래들리의 가족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유타 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가족 모두가 독실한 몰몬교였기 때문이다. 유타 주에서 자라게 된 브래들리는 커가면서 키가 급격하게 자라 주변으로부터의 권유를 받아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2]그리고 에머리 고등학교에 진학한 브래들리는 그때부터 주를 씹어먹기 시작한다. 그는 3년간 팀을 2차례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자연스럽게 NCAA의 각종 농구명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래들리는 고민 끝에 종교적 신념에 따라 브리검 영 대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사실 브리검 영 대학은 몰몬교들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브래들리의 영입을 통해서 브리검 영은 돌풍을 일으켰고, 약체임에도 불구하고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브래들리는 해외 선교를 떠나게 된다. 몰몬교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몰몬교 신도들에게는 의무사항인지라 예견된 일이었고, 브래들리 본인 또한 훗날 좋은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했지만, 한창 성장할 농구선수에게 재앙과도 같은 일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스포츠에서의 경력단절은 거의 극복이 불가능한 레벨의 이야기이다.
NBA의 후보급 선수조차 고교 시절에는 동네를 씹어먹고 다닌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에서조차 고교 레벨에서는 팀간, 선수간 실력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엘리트 스포츠 체제라 기본적으로 모든 운동부 선수들이 수업을 거의 안듣다시피하고 운동만 해서 격차가 적지만, 미국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방과후 스포츠의 형태를 띄고 있다. 물론 엘리트 선수들의 경우 교사들이 슬쩍 수업을 빼주거나 여러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업 병행이기 때문에 NCAA에서 공부를 너무 못하면 경기를 못 뛴다. 이렇기 때문에 르브론 제임스처럼 바로 프로에 뛰어도 되는 수준의 특급선수들과 동아리 수준으로 농구를 하는 선수들이 같이 뛰는 경우도 많다. 보통 미국 고교 스포츠는 지역과 학교 크기별로 묶여서 리그를 치르며, 1부/2부 이런 식으로 구분은 하지만 1부리그 내에서도 엄청 수준 차이가 난다. 한 동네에서 프로 노릴 정도로 농구 잘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다보니 고졸로 프로 직행한 선수들의 기록들을 보면 다재다능한 선수들은 트리플더블에 근접하는 기록은 기본에 센터들은 블록 6~7개, 알 제퍼슨같이 득점원들은 평균 40점들 괴랄한 기록들이 많다. 198cm이며 NBA에서 딱 슈팅가드, 대학에서도 포워드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인 코비 브라이언트가 센터를 무난히 보고, 비슷한 키인 폴 피어스가 34번을 택한 이유가 팀에서 제일 덩치가 커서 남는 번호가 이것밖에 없어서일 정도니... 그러다보니 경쟁력 있는 7푸터들은 맥도널드 올스타 게임처럼 전국에서 뛰어난 고교 선수들을 긁어모은 대회가 아니면 거의 볼 수도 없다.
이러다보니 브래들리는 농구를 늦게 시작해 기술이 설익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4학년때 평균 25점 17리바운드 9블록을 기록했다. 당연하지만 보통 농구할 때 브래들리 정도 키 큰 선수가 있으면 골밑돌파를 극도로 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9블록이면 실질적으로 상대팀이 그 경기에선 레이업을 거의 못하다시피 한 수준이다. 근데 9블록이면 당시 브래들리 상대하는 팀은 골밑은 버리고 시작했다는 소리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NBA급 선수들은 고교 시절 에이스 놀이를 하기 때문에 대학 농구에 와서야 비로소 팀 플레이어로서의 성장을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를 그냥 날려버리게 된 것.[3] 호주에서의 2년을 선교 활동으로 보낸 후, 브래들리는 조금 당황스러운 선택을 하게 된다. NBA 직행을 선언한 것이다. 2년간의 공백은 적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직행선언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4][5]
2.2. NBA 커리어
2.2.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브래들리는 미국식으로 7'6"의 키였는데, 재밌게도 센터부족을 겪던 필라델피아 76ers에 2순위로 선발되었다. 필라델피아는 찬란했던 80년대를 뒤로 하고 당시 암흑기 그 자체(…)를 보내고 있었다. 고군분투하던 찰스 바클리가 떠나고, 후계자로 육성되던 단신 포워드 클라렌스 웨더스푼이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나름 팀을 이끌고 있었지만, 살벌했던 동부에서 필리는 그냥 밥(…)에 불과했다. 덕분에 브래들리는 팀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대를 받았다. 삐쩍 마른 그의 몸집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트레이너를 붙여주고 팀의 레전드인 모제스 말론을 통해 부족한 기본기를 갈고 닦길 바랬다. 브래들리가 부상으로 루키 시즌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경기당 10점대 득점과 6개 리바운드, 3개 블록을 기록하며 괜찮은 성적을 보였고, 루키 세컨드 팀에도 선정되었다. 문제는 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는 점이다. 93년 드래프트에는 NCAA에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 많았다. 1순위(올랜도 매직)인 크리스 웨버를 제외하더라도 앤퍼니 하더웨이(3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 켄터키 대학교의 몬스터 매쉬라고 불리던 자말 매쉬번(4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UNLV의2.2.2. 뉴저지 네츠
뉴저지에서 브래들리는 이전의 중압감을 버리고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득점도 대폭 상승해서 15점 가까운 점수를 올리며 더블더블에 근접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갑작스럽게 팀 프런트가 교체되면서 브래들리는 또다시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되었다.2.2.3. 댈러스 매버릭스
댈러스는 이 당시 대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3J로 이름난 제이슨 키드, 짐 잭슨, 자말 매쉬번의 3각 편대가 팀을 전성기로 이끌거라 기대했지만, 제이슨 키드와 짐 잭슨은 토니 브랙스턴과의 삼각관계(…)로 인해 사이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3J 내부에선 공격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툼이 벌어지는 막장상황이었다. 때문에 댈러스는 이참에 3J를 아예 해체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세 선수를 낀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선수를 새롭게 모은다. 브래들리는 댈러스에 새롭게 자리를 잡은 이후 스티브 내시와 디르크 노비츠키라는 스타플레이어들을 보좌하면서 팀의 수비를 이끌었고, 이전의 약팀이었던 댈러스를 플레이오프 단골 진출팀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브래들리는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큰 키로 인한 무릎 부상은 계속해서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고, 팀에서 그는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브래들리는 2004-2005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올-루키 세컨드 팀 (1994) NBA 올해의 블록왕 (1997) |
4. 여담
NBA 역대 통틀어 게오르그 뮤레산(231)과 마누트 볼(231)에이은 신장과 긴팔로 주목받았으나 신장대비 적은 체중으로 파워가 부족해 득점이나 리바운드는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8].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체중덕에 거인 중에서 재빠른 움직임을 보여줬고[9] 커리어도 상대적으로 길게 가져갈 수 있었다. 블록 슛에서 평균 20분가량의 출전시간에도 통산 2.5개를 기록할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결론적으로 커리어 내내 꾸준한 출장시간을 가져가며 중용되던 중하위권 팀에서 즉전감이었던 당시 센터 전국시대였던 90년대 NBA에서도 평균수준의 준수한 센터였다.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가 고등학교 이후 브리검 영이 아닌 농구 명문으로 진학하고, 2년간의 공백없이 대학에서 선수 생활에 충실했다면 프로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팬들도 꽤나 많은 편이다.[10]항상 자기보다 작은 선수들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멋지게 당하기로 유명했다. 스타는 아니었지만 십년 이상 커리어를 이어간 준척급 선수고, 가로수비는 별로였지만 블록 슛 하나만큼은 리그 최정상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신체적인 특징이 뚜렷해 (엄청나게 큰 키, 기이해보일 정도로 길고 가는 몸) 장신 선수들이 나오면 비교대상으로 은근히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야오밍이 등장했을 때 찰스 바클리는 그를 까면서 "야오는 숀 브래들리가 빌 러셀처럼 보이게 했다면서 비교했고,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 역시 "나는 숀 브래들리와 다른 유형의 선수"라면서 더 강인하고 뛰어난 선수가 될 것이다고 하기도 했다.
사실 듣보잡이라면 이런 비교에서 언급조차 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나마 브래들리가 어느 정도 실력이 있기 때문에 언급되는 것. 대표적으로 포르징기스랑 비슷한 키이며 야오밍과 같은 동양인에 부상이 잦은 것도 비슷한 하승진은 이런 식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그의 이름 자체를 아는 이가 미국에서 드물기 때문.
팔이 워낙 가늘어 굉장히 길어보이는데, 의외로 농구선수치고 팔이 긴 편은 아니었다. (물론 키에 비해서...) 대부분의 농구선수들은 신장보다 훨씬 긴 윙스팬(양팔을 옆으로 쫙 펼쳤을때 왼손 끝부터 오른손 끝까지의 거리)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래들리는 맨발 신장(229cm)보다 오히려 짧은 윙스팬(226cm=7피트5인치)를 가졌다. 이는 팔 짧기로 유명한 야오와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이건 야오의 떡대가 의외로 좋은 반면 브래들리는 역대급 어좁이(…)란 점이 크지만, 어께가 결코 넓은 편이 아닌 케빈 듀란트는 그보다 21cm 작지만 윙스팬이 비슷하단 걸 생각하면 브래들리는 신장 대비 팔은 NBA 기준으로 오히려 약간 짧은 편이다.
NBA 빅맨 기준으로 파워가 매우 약한 편인데다가[11] 너무 길고 둔해 균형잡기 힘든 몸이란 한계상 두들겨 맞거나 밀쳐져서 힘없이 넘어지는 등 유독 싸움에서 굴욕장면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이 영상에서 월트 윌리엄스란 선수는 점프슛하는 브래들리에게 대놓고 펀치를 날려 피까지 나게 한다. 그러나 본인 성격이 별로 호전적이지 않은 것도 있어 반격하는 모습은 흔치 않은데 한번은 작정하고 맞다이를 뜨려고 나서다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골든스테이트의 마크 데이비스(키가 201cm의 포워드로 브래들리보다 거의 28cm 작다) 번쩍 들려서 바디슬램을 당한 적도 있다. 자세히 보면 바디슬램을 시전한 데이비스는 동료 상대편 할 것 없이 떼거지를 몰려가 말리는데, 흥분한 브래들리는 심판 한 명(…)에게 잡혀서 또 힘없이(…) 한쪽으로 팽겨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12]
이 선수가 유독 인 유어 페이스 덩크의 희생양이 되는 영상이 많은 이유는 수비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저돌적으로 돌파하는 공격수를 막기 위해 열심히 수비해서이다. 또한 그만큼 오랫동안 NBA에서 플레이를 했고 팀 보드진이나 코치진들이 브래들리를 장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패트릭 유잉,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 야오밍 등 당시 센터들도 많은 블록을 했지만 그만큼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한 플레이도 상당히 많다.
사실 오히려 최정상의 블러커일수록 명장면으로 남은 굴욕 장면이 많다. 축구를 예로 들면, 페테르 체흐, 잔루이지 부폰과 같은 정상급 골키퍼를 상대로 성공시킨 중장거리 득점이나 프리킥 골이 길이길이 명장면이 되는 것과 같다. NBA란 동네가 워낙 신체능력이 초월적인 선수들이 많아서 178인 선수들이 덩크하는 것 정도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수준이라 아무리 블록 슛 능력이 좋아도 덩크를 안 먹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킴 올라주원만 해도 185cm인 케빈 존슨에게 아주 제대로 덩크를 먹은 적도 있고, 데이비드 로빈슨은 샤킬 오닐에게 아주 처참하게 덩크를 먹은 적이 있다.(두 선수 모두 올해의 수비수 수상자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유어페이스 영상의 희생자가 되는 건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며, 오히려 그만큼 수비력이 뛰어난 선수란 걸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04-05시즌 당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서 하승진 위로 찍은 덩크는 그 누구도 돌려보지 않았지만, 같은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맥그레이디가 브래들리 위에 찍은 영상은 몇 년째 하일라이트로 활용되었다. 형편없는 실력의 하승진 위로 덩크하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브래들리처럼 블록을 잘하는 선수 위로 덩크하는 건 놀라운 플레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인유어페이스가 없다는 건 오히려 그 선수가 얼마나 수비를 악착같이 안 하는지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샤킬 오닐로, 오닐은 역대급 대인수비수이자 골밑 존재감 역시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이런 굴욕 영상을 보이는게 싫어서 덩크를 먹을 것 같으면 피해버리거나 아예 파울로 끊어버리곤 했다. 오닐은 자기가 평생 두 번밖에 인유어페이스를 안 먹었다고 자랑했지만(여담이지만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오닐이 인정하는 데릭 콜먼 외에 빈스 카터, 유잉도 오닐에게 덩크를 먹인 적이 있다.), 그 이면엔 그가 수비를 포기하거나 파울로 끊어버린 수많은 플레이들이 있었다. 막강한 대인수비에도 오닐이 뛰어난 수비수란 평가를 못 받는 데는 극악의 팀수비력 외에 이런 태도 탓도 크다.
영화 스페이스 잼에도 출연했다.
체중과 관련해서 상단의 프로필에는 그가 277파운드였다고 되어 있었으나 이는 최대한 벌크업을 했을 때의 몸무게이며,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드래프트에 나올 당시 몸무게는 235파운드(106.6kg)에 불과했다. 이는 키가 그보다 28cm나 작고 탄탄한 근육질이었던 스카티 피펜의 90년대 후반 몸무게(104.8kg/231파운드)와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벌크업을 한 277파운드도 그의 신장에 비하면 모자란 몸무게였는데, 이는 같은 키인 타코 폴을 보면 알 수 있다. 폴은 근육질이긴 하지만 슬림한 체형인데도 311파운드로 NBA에서 뛸 당시 가장 무거운 선수였는데, 이 키의 선수라면 최소한 300파운드는 넘어야 한다는 얘기다. 폴과 브래들리보다 약간 작은 야오밍도 2년차 때 이미 310파운드를 넘겼는데, 야오는 하체는 튼실하지만 상체가 NBA기준으론 부실한 편이었다. 어쨌거나 야오도 빼빼 말랐던 중국리그 시절에 이미 290파운드를 넘겼다.
2021년 당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상태가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 바 있다. 현재 가족과 함께 재활 중이라고 한다.
5. 관련 문서
[1] 맨발 기준 229cm (7' 6") / 착화 신장 231cm (7' 7")[2] 당시 가족과 지인이며 유타 재즈의 감독이던 프랭크 레이든이 브래들리가 말 타는 모습을 보고 권유했다는 일화가 있다. 좀 과장해서 그냥 다리를 뻗으면 말을 세울 수 있을 것처럼 보었다고(…).[3] 2010년대 대학 선수들의 트렌드는 원앤던이기에 조금 이해가 안 갈 수 있지만, 90년대까지 1학년이 NBA에 진출하고 성공하는 케이스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대학 농구 내에서도 1~2학년은 배우는 시기, 2~3학년쯤 되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졸업 전 얼리 엔트리를 하더라도 3학년 쯤에 가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였다.[4] 한국에서 기사가 날 정도였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 그만큼 브래들리가 주목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90년대의 농구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당시로선 NCAA 내에서도 잊혀진 유망주 기사가 날 정도라니.[5] 당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숀 브래들리를 노렸다는 것도 현지에서 유명한 얘기다. 이때 워리어스는 외곽이 강한대신 골밑이 약했기 때문. 이들은 원래 가진 3순위로 브래들리를 노리려고 했으나 결정적으로 2순위 지명권의 주인인 필라델피아 역시 브래들리를 원했기 때문에 이는 브래들리를 뽑는건 불가능했다. 결국 이들은 드래프트 최고의 유망주이자 올랜도 매직이 1순위로 뽑은 (센터 소화가 가능한) 크리스 웨버를 자신들이 3위로 뽑은 앤퍼니 하더웨이 1라운드 지명권 세장을 주고 트래이드해온 다음에 웨버를 센터로 쓰려고 했으나 실패했다.[6] 드림팀의 대항군으로 나설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NBA 루키 시즌 중 교통사고로 다리 부상을 당하면서 일찍 은퇴하게 되었다.[7] 다만 웨버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 중에는 부상과 멘탈 문제로 제대로 전성기를 누리지 못한 선수도 있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선수생활을 이어나간 선수도 있다.[8] 득점의 경우 일단 골대로부터 스크린아웃으로 조금 격리시키기만 해도 저지가 가능했기에 저조한 게 맞지만, 리바운드는 그래도 평타 이상은 한 편. 주로 스타팅 멤버로 뛰었던 시즌에는 경기당 리바운드 5~6개 정도는 평균적으로 꾸준히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대치에 많이 못 미쳤던 맞다.[9] 물론 "거인 중에"라는 거지 실제로는 빅맨 중에서도 굉장히 느린 편이다. 거인 센터 중에 사기적인 스피드와 민첩성, 점프력을 자랑했던 야오밍도 다른 7피트급 빅맨들과 비교하면 느린 것처럼.[10] 다만 브래들리는 신체능력의 한계가 있었고 전성기이던 90년대는 S급 센터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에 슈퍼스타로 성장까진 무리였을 것이다. 브래들리는 벌크업을 한 이후에도 NBA의 특급센터들과 상대할만한 파워를 평생 갖추지 못했는데, 압도적인 높이에도 불구하고 파워부족으로 리바운드 및 로우포스트 플레이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아무리 대학에서 실력을 향상시켜도 이 부분은 타고난 피지컬 차이라 커버하기 힘든 부분. 초장신 중 로우포스트에서 위력을 발휘한 야오밍이나 게오르규 뮤레산은 센터들 중에서도 상급의 파워를 가진 선수들이었다. 비슷하게 골밑의 벽이었던 무톰보나 한 세대 전 마크 이튼만 하더라도 브래들리보다 월등한 파워가 있었기 때문에, 타고난 신체가 매우 가는 브래들리는 공격에서건 수비에서건 로우포스트에서 한계에 부딫힐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팀수비와 커버수비의 중요성이 훨씬 커진 2000년대 이후 데뷔했다면 훨씬 위력적이었겠지만, 90년대 빅맨들은 상대 빅맨의 로우포스트 공략을 1대1로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는 이상 특급수비수가 될 수 없었다.[11] 사실 브래들리의 체형으로는 근력 강화에 상당한 한계가 있기도 하다. 신체가 길기 때문에 같은 부피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력 운동을 해야하는데, 큰 신체를 움직여야 하는 만큼이나 체력 소모도 엄청나다. 비록 신장은 브래들리보다 작지만 역시 큰 키에 삐쩍 마른 케빈 듀란트의 경우 대신 타고난 운동 능력이 매우 뛰어난 반면, 브래들리는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 그 괴물들로 가득한 NBA에서 저렇게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긴 하다.[12] 물론 오해해서는 안될 게 NBA 경기가 워낙 페이스가 빨라 체력소모가 굉장하기 때문에 NBA 심판이라면 피지컬이 상당하다. 또한 스타가 아닌 평범한 전직 선수들이 많이 하는 직업 중 하나가 심판이기도 하고 그것 외에도 프로지망하다 실패한 사람들이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심판들이 능숙하게 비하인드 패스로 공을 선수에게 건네주는 등 일반인들과는 구력이나 체력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브래들리가 NBA 기준 약골이라도 그 괴물들과 10년 넘게 몸을 치열하게 육탄전을 벌인 선수다.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에게 댈 피지컬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