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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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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범근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클럽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2.1.1. 유년기

농부의 아들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서 태어난 차범근은 고추장보리밥을 비벼 먹고 참기름을 살 돈조차 없어 비빔밥에 참기름 넣어 먹는 것조차 사치로 느낄 정도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학교가 끝나면 농부의 아들로서 소의 여물을 주거나 논/밭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이었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와 운동신경이 탁월했는지 화산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축구, 핸드볼, 육상씨름까지 했다. 빠른 데다 운동신경이 뛰어나니 못할 게 없었고, 그러다 보니 혼자 바빴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핸드볼 예선을 뛰고, 저 동네로 날아가 축구 준결승을 뛰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아서 동네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로 어릴 적부터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 차금동씨는 이런 차범근에게 운동선수의 재능을 알아봤고, 겨울이면 한푼두푼 어렵게 모은 돈으로 스케이트를 사서 마을 저수지로 데려가 차범근에게 신기고 계속 저수지를 돌게 하면서 하체 운동을 시켰다. 새벽이면 계속되는 운동은 아직까지 차범근이 아침 운동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차범근은 후일 아버지에게 배운 새벽 운동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회상했다. #
여러 종목을 다 잘 했지만, 특히 축구에서 가장 재능을 보였고,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던 영도중학교로 진학했으나, 유니폼을 입기도 전에 축구부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는다. 그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필드하키 선수가 되었고, 공도 못 차면서 영등포구까지 그 먼 길을 통학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던 차범근은 집에 전학 얘기를 꺼냈고, 전학가는 데 적잖은 돈이 들었던 그 당시에 아들의 운동을 하고자 하는 정신과 근성을 간파한 아버지는 삶의 터전인 땅을 쪼개 팔아서 차범근의 전학을 돕는다. 또한 당시 경신중학교 축구부 코치였던 장운수가 중학교 때까지 하키 선수였던 차범근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여 당대 최고의 축구 명문[1]이었던 경신중 축구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결국 2학년 2학기 때 경신중학교로 전학에 성공한 차범근은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기량을 키웠지만, 목표했던 경신고등학교[2] 진학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대신 경성고등학교로 진로를 타진한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경신고 교장이 노발대발하면서 난리를 쳤고, 경성고 입학시험 치는 날 감독과 선배들이 들이닥쳐 경신고로 다시 진로를 돌려놨다. 한데 이 과정에서 학교 교장에게서 큰 대접을 받고 있는 차범근을 보고 선배들이 대놓고 불만을 나타냈다. 운동부 군기가 군대 뺨치던 시절에 차범근은 겁에 질려 순간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선배들 구타가 너무 두려워 가출했습니다. 서울 친구 집에 일주일을 숨어 있었어요. 근데 친구는 학교 가고 저는 집에 있으니 친구 어머니 눈치가 보여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 농사짓는 집에서 땅을 팔아 전학까지 시켜줬는데 아들이 가출을 했으니 부모님에겐 다시 없는 불효였다.
결국 큰형에게 연락해 다시 화성 본가로 내려갔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경신고 장운수 감독 손에 넘겨졌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장 감독이 축구부 선배들에게 "다시 한번 차범근에게 손대면 내가 혼내주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방어막을 쳐준 것이다. 만에 하나 삐끗했더라면 그저 그런 필드하키 선수가 됐거나, 가출 청소년이 될 뻔했다. 그랬으면 대한민국은 축구 영웅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고교 2학년 때 청소년 국가대표가 됐고, 고교 3학년 때 A 대표팀으로 발탁됐다. 1972년 태국에서 열린 1972 AFC 아시안컵 태국 이라크와의 조 편성 경기가 데뷔전이 됐다.
섭씨 35도가 넘는 날씨에 혀를 빼 문 선배들은 경기만 뛰면 항상 "범근아"만 외쳐댔다. 죽으라 뛰었지만 0:0이 되고 결국 PK로 승부를 가려야 했다. 지친 선배들은 후배들을 앞세웠다. 청소년대표인 차범근과 황재만(당시 고려대학교 1학년)이 등을 떠밀렸고, 공교롭게도 둘 다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결국 2-4로 패배한다.
차범근이 힘껏 때린 볼은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관중석에 떨어졌다. 한 마디로 하늘 높이 새를 잡은 것이다. "선배들이 집합을 시켰어요. 외국에서 '옥상으로 올라와'를 한 거죠. 정말 라자 호텔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차범근이 태극마크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3] 아무튼 청소년 대표까지 했던 차범근은 축구 명문인 고려대학교에 순조롭게 입학하게 되었을까? 아니다. 차범근의 고려대행은 그의 고등학교 진학 과정보다 훨씬 더 버라이어티했다.

2.1.2. 고려대학교 축구부

근본적인 문제는 경신고 교장 이하영과 축구부 감독 장운수의 대립이었다. 이하영은 연세대학교, 장운수는 경희대학교 출신으로, 모교로부터 차범근을 빼내달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차범근의 친가에서는 명문인 연세대학교를 희망하고 있었고 차범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교장과 감독의 대립 속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차라리 축구를 포기하려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둘 다 허구한 날 시간 날 때마다 불러대서 "너는 연세대로 가야 한다/너는 경희대로 가야 한다" 하고 압박을 하고 있으니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이에 시달린 나머지 1971년 11월, 숙소를 이탈하면서 집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고향에서 동네 1년 선배이자 고려대 축구부 1학년 황재만[4]을 만난다. 황재만은 차범근의 상담을 듣고 아예 이도 저도 말고 제3의 길인 고려대를 권유했다. 교장과 감독의 다툼에 지쳐버린 차범근은 동네 선배의 친절한 권유에 마음을 돌려서 바로 고려대행을 결정지었다.
당연히 경신고, 연세대, 경희대, 고려대 모두 뒤집어졌다. 앞의 셋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고려대는 "이게 웬 떡이냐!"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연세대나 경희대에서 납치[5]를 할지 모른다는 우려와 경신고 내에서 차범근을 감금하는 일 같은 막장 짓거리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경신고 축구부 내 코치 이경이는 고려대 축구부 감독과 절친이었기에 이 정보는 고려대에 거진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당연히 고려대의 입장에서는 넝쿨째 들어온 호박인 차범근을 다른 대학교로 빼앗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 청소년대표 최종 선발전에 출장한 차범근이 귀가를 하려고 하자 검은색 지프가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 장교 출신 고려대 럭비팀 트레이너 김영복을 필두로 한 다수의 행동 대원이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고려대행을 권유한 당사자 황재만이 차범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고려대는 경신고가 손을 쓸 수 없는 청소년대표 선발전 종료 직후라는 그 타이밍을 노려서 전격적으로 차범근을 데려간 것이다. 차범근 본인의 동의가 없었으면 영락없는 납치였을 상황이다. 결국 고려대 축구부 및 운동 계열 수뇌부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바로 입학을 확정지으면서 연세대와 경희대를 벙찌게 만들었다. 2020년대의 요즘같으면 어림도 없을 촌극이었다.

2.1.3. 공군 축구단

이후 대학 재학 중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며 이후 신탁은행과 공군에 입단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원래는 해군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한민국 공군 측에서 부상 시 의병 전역과 복무 단축을 조건으로 제시해서 낚아채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복무 단축에 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는 결국 차범근의 첫 분데스리가 진출에 해당하는 SV 다름슈타트 98와의 가계약이 취소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차범근의 이름을 알리게 한 것은 국대에서의 뛰어난 활약 때문이었다. 이때 스탯이 엄청난데, 국대 데뷔 때부터 대한민국에 있던 때인 72년부터 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을 넣었으며, 24세 139일로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다. 당시에는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에서 한국을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국가 주최로 자체적으로 많은 컵 대회들(메르데카컵, 박스컵 등등)을 개최했었고 종종 해외 클럽들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박스 컵에서 열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슐테 프랑크푸르트 코치 측이 박동희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타진하게 되며 결국 78년 12월 다름슈타트에 입단한다.
슐테 코치가 직접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박 교수에게 제의를 한 것이고 링크참고, 박스컵 이전 5월 재팬 컵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도 라텍 감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차범근의 현역 시절, 특히 국가대표 차범근은 이른바 박지성, 손흥민 세대인 현시대 적지 않은 라이트 팬이나 축알못 들에게 심하게 저평가되고 있다. 이유는 첫째, 차범근이 뛰던 시기의 국가대표 경기 기록이나 영상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차범근의 젊은 시절 국가대표 경기, 대표적으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1976년 대회때 나온 6분 해트트릭같은 20대 차범근의 활약상을 지금 거의 볼 수 없고, 둘째, 차범근이 현역 에이스였던 86년 이전의 대한민국 축구는 월드컵 본선 진출은커녕 아시안컵에서도 힘겹게 경쟁하는 중상위권 국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국대 축구팬이나 축구협회나 그 시기를 아예 없던 시기로 치부하고 86년 월드컵부터 시작된 FIFA 월드컵 9회 연속 본선진출만 강조하고 있기에 차범근이 아무리 국대를 캐리했다고 한들 "월드컵 진출도 못 시켜서 86년 멕시코때 무임승차한 선수가 에이스가 무슨 에이스? 박지성, 손흥민 미만잡" 이런 논리에 동조하는 국대 FC 코리아들이 매우 많다는 점. 셋째, 차범근의 활약을 실제 본 장년, 노인세대들 중 후배들인 어린 국대 축구팬들에게 이를 전할 한국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를 포함한 대한축구협회 수뇌부에서 차범근을 홀대하는 복잡한 문제로 인해 거의 없어서 구전조차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 대해 그를 아는 해축빠, 전문가들과 한국 축구팬들과의 온도차가 극명한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신문선같은 핫바리를 제외하면 현 세대의 축구인들은 차범근을 저평가하는 태도에 "그게 무슨 헛소리냐?" 라면서 코웃음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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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서독 진출로 인해 불똥이 튄 쪽들은 다름 아닌 현대그룹과 한국축구계인데,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스타 선수들을 끌어 모아 축구단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축구계는 이를 계기로 프로축구를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타 선수의 정점이 바로 차범근이었던 것. 그러나 차범근이 서독으로 가면서 현대는 축구단 창단을 포기했고 프로축구 출범도 연기되고 말았다.

참고로 다름슈타트의 제안이 차범근의 해외 진출 첫 제안은 아니다. 1977년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에서 제안이 온 적이 있는데, 당시 창단된 지 3년 밖에 안된 신생팀이었지만 1968년 대한민국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에크하르트 크라우춘(Eckhard Krautzun)[6]이 감독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메리트가 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차범근은 군인 신분이기도 했거니와 해외 진출을 한다면 분데스리가로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서 진행되지 않았다. #

차범근이 서독 진출을 처음 꿈꾸던 것은 우연히 TV에 나온 푸른 잔디 위에서 경기를 뛰는 프란츠 베켄바워의 모습을 봤을때라고 한다. 경기를 끝마치고도 멀끔한 베켄바워의 모습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우 잔디 구장은 커녕 국가대표 조차 시멘트 바닥이나 흙으로 된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던 가난한 시절로, 경기를 끝마치고 흙먼지로 뒤덮이는 게 일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축구에 대한 성취도나 성적마저 대한민국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세계 무대는 차범근에게 궁금증과 도전의 대상이었다.

2021년 6월 방영된 대화의 희열 시즌3에 출연 중 회고하기로 당시 한국 축구 선수들 모두 자신의 신발을 직접 수선해 신었다고 한다. 특히 스터드의 경우 워낙 저품질이라 경기를 할 때마다 닳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못으로 스터드를 교체하였고 잘못 수선하면 못이 신발 안으로 파고들어 피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유희열은 수선을 잘하는 선수는 국대에 뽑혔겠다는 드립을 쳤는데, 그에 차범근은 너무나 담담하게 당시에 그걸(스터드 교체) 못하면 축구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2. SV 다름슈타트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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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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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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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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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자존심과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광부들의 아픔을 안고 전투를 치르듯 경기를 뛰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 속에, 정말 기계처럼 산 10년이었다.”
차범근, 축구 매거진 포포투+ 창간호 인터뷰 中
통산 372경기 121골 97도움[7]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76도움[8]/DFB포칼 27경기 13골 13도움/UEFA컵 37경기 10골 8도움)
흔히 말하는 국뽕을 빼더라도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국제적 위상을 가진 몇 안 되는 선수이다. 이른바 신계의 영역이나 80년대 최고의 선수까지는 아니었지만, 당대[9] 최고의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서도 손꼽히는 외국인 선수이자 팀을 대표했던 간판 선수였으며, 심지어 한때는 월드 클래스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는, 한국 축구와 분데스리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선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득점이 주력이 아닌 돌파와 연계 플레이를 바탕으로한 플레이메이킹을 주 역할로 한 세컨드 스트라이커였음에도 준수한 득점력을 갖춘 만능형 선수였다. 이에 더불어 왕성한 활동력까 갖췄기에 팀에 대한 기여도가 높아 팬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였다.[10]

차범근의 현역 시절을 평가함에 앞서 우선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은 현재와 최소 10년 이상의 간극이 있는 선수들의 기록이나 업적은 시대상을 적용하여 '당시'의 기준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록의 산물인 스포츠의 특성상 현재와 완전히 단절시킬 수는 없지만 과거의 세계기록이 지금에 와서는 평범한 수준의 기록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무작정 현재의 기준을 적용하여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 물론 펠레나 마라도나와 같이 시대를 뛰어넘는 활약을 보인 선수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이 특별한 이유기도 하다.

차범근분데스리가 선수 생활 중 모두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바로 출전 기록이다.

차범근이 달성한 분데스리가 308경기의 출전 기록은 당시 역대 외국인 선수 2위,[11] 아시아 선수 1위[12]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여기에 가려져 있는 것이 선발 출전과 풀타임 경기 횟수이다. 차범근은 10년의 분데스리가 선수 생활 동안 총 372경기에서 369경기를 선발 출전했다. 교체로 출전한 것은 단 세 차례뿐으로(리그 2회와 컵대회 1회) 이마저도 커리어 말년에 이뤄졌다. 그뿐만 아니라 무려 335경기를 풀타임 출전했으며 교체된 경기가 34회에 지나지 않는다. 차범근의 팀에서의 입지와 엄청난 신체 능력이 돋보이는 기록이다.

심지어 이는 공식적인 경기만 따진 것이고 친선 경기를 감안한다면 경악스러운 스케줄을 소화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유럽에서 축구란 스포츠는 가장 큰 오락거리다 보니 당시만 하더라도 온갖 친선 경기가 성행하던 시절이었고 리그 시작 전과 끝나고 뿐만 아니라 리그 중에도 친선 경기가 있을 정도였다. 일례로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8라운드가 끝난 10월 6일 바로 다음 날인 10월 7일부터 14,17일까지 연이어 세 번의 친선 경기를 뛴 뒤에 10월 20일 분데스리가 9라운드 경기를 소화하는 식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2군을 운용하는 친선경기가 아닌 주전 선수 대부분이 뛰었기 때문에 관중 수도 적게는 2천 명에서 많게는 4만 5천 명에 다다랐다.[13] 참고로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뛴 네 시즌 동안에만 143경기의 친선 경기를 치렀고 101골을 넣었다.[14][15]

두 번째는 등번호다. 차범근은 현역 시절 내내 백넘버 11번을 달았다. 언뜻 보면 뭐가 대단한가 싶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껏 아시아 출신으로 유럽 클럽에 진출해 처음부터 메인 등번호를 받고 그 번호를 커리어 내내 유지한 선수가 없다.[16] 특히 메인 번호의 경우 부진할 경우 한 클럽은 커녕 새 시즌이 시작될 때 다른 선수에게 번호를 뺏기는 경우도 있고, 다른 클럽으로 이적 시에도 큰 기대를 받지 않는 이상 당장 남아 있는 번호 중에 등번호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군 문제로 단 한 경기에 그쳤던 78/79시즌 다름슈타트 98에서조차 차범근의 등번호는 11번이었다. 정확히는 '프로 데뷔' 이후 뛴 세 곳의 클럽에서 모두 11번을 단 것인데, 이 때문에 당대 분데스리가에서는 물론 현재까지도 차범근의 등번호를 연상하면 11번이 떠오른다. 아시아 선수가 유럽에서 뛰는 것 자체가 없다시피하던 시절, 동양인 선수가 유럽 첫 진출부터 메인 등번호 중 하나를 부여받아 10년 넘게 고정적으로 달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당시 함께 뛰며 경쟁한 선수들이다. 차범근이 뛰었던 1970~80년대는 그야말로 전설들의 시대였다. 차범근과 동시대에 경쟁한 분데스리가 선수만 해도 국내에 익숙한 프란츠 베켄바워, 클라우스 피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울 브라이트너,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루디 푈러현재 독일의 전설로 불리는 선수들이다. 이외에도 케빈 키건을 비롯해 국내에 익숙지는 않지만 커리어를 보면 역대에 손꼽히는 선수들이 즐비하였으며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입성하기 단 1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트 뮐러가 뛰던 시기이기도 하다. 다른 리그에는 디에고 마라도나, 미셸 플라티니, 요한 크루이프, 게리 리네커, 케니 달글리시, 파올로 로시, 우고 산체스, 울리 슈틸리케, 루드 굴리트,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 등등 수많은 유럽 축구 역사의 별들이 뛰었고 심지어 파넨카 킥의 창시자인 안토닌 파넨카도 이 당시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 전설적인 선수들과 경쟁을 했다'가 아닌 이미 이런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지내던 유럽 사람들, 특히 당시 UEFA 리그 랭킹 1위에 있던 분데스리가 관중들에게 차범근의 플레이가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차붐이란 애칭까지 생기면서 말이다.

심지어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한 팀이 경기에 기용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는 오로지 2명에 불과했다. 지금에야 EU(유럽연합) 소속 국적 선수들은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지만, 그 당시에는 독일인이 아닌 모든 선수들, 즉 브라질 아르헨티나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나라의 선수들도 모두 외국인으로 취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팀당 2명에 불과한 외국인 용병 자리는, 조금만 부진하여도 라인업에서 제외되거나 다른 외국인으로 교체됐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 즉, 차범근은 팀당 단 2명만 경기에 기용할 수 있던 외국인 쿼터 제도를 운영하던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17] 외국인으로서 10년 내내 주전 자리를 지킨 것이다.

차범근의 활약은 단순히 이룬 업적만 보아도 무시할 수 없다. 분데스리가 308경기에서 98골을 달성했는데, 이는 당시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으며[18]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에 해당했다.[19] 여기서 더 대단한 점은 단 한차례도 페널티킥 골을 넣지 않았다는 것.[20]

그리고 UEFA컵을 각각 다른 팀에서 들어 올렸는데[21], 이렇게 각기 다른 팀에서 두 번 이상 우승한 커리어를 이뤄낸 선수는 현재에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16명 밖에 되지 않는다.[22]특히 차범근이 들어올린 UEFA컵은 각 구단의 처음이자 유일한 UEFA 우승컵이다.

더불어 1900년대 유일무이하게 유럽 빅 리그뿐 아니라 유럽 전체 리그에서 아시아 국적 선수로 리그 10골 이상을 여러 시즌 연속으로 기록했다. 81/82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 5회 연속 리그 10골 이상을 기록했는데[23] 이후 아시아 선수 중 이렇게 5시즌 연속으로 골을 넣은 선수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리미어리그에서 2016/17 시즌부터 2023-24시즌까지 8시즌 연속으로 10골 이상을 기록한 손흥민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두 시즌 이상 연속으로 유럽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를 따져도 2022년까지 10명뿐인데, 이마저도 2번째부터는 모두 2000년대에 와서야 이뤄진 것으로 2002/03 시즌부터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3회 연속 리그 10골을 넣은 막심 샤츠키흐가 두 번째다. 그와 같이 분데스리가에서 같은 시즌인 2002~03시즌에 리그 10골,다음 03~04시즌에 16골을 넣은 이란 선수 바히드 하셰미안이 공동 2번째이며 4번째로 손흥민이 분데스리가에서 2012/13~14/15 시즌 동안 3회 연속 10골 이상을 기록했으며 분데스리가 13-14시즌에 15골, 다음 시즌 리그 12골을 넣은 오카자키 신지가 5번째. 15~16시즌에 네덜란드에서 리그 10골, 다음 시즌에 21골을 넣은 알리레자 자한바크슈가 6번째, 15-16.16-17시즌 리그 11골씩 벨기에리그에서 넣은 쿠보 유야가 7번째. 8번째는 이란 선수인 사르다르 아즈문이 러시아 리그에서 2회 연속 10골을 넣었으며, 9번째로 이란 선수인 메흐디 타레미가 포르투갈 리그에서 2회 연속 10골을 넣었다. 그리고, 10번째로 황의조가 프랑스 리그1에서 2020-21시즌에 12골 21-22 시즌에 11골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 적인 수상으로 봐도 주간 MVP(Spieler des Tages) 6회, 주간 BEST 11(Elf des Tages) 36회,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두 차례 선정되었고, 20회의 Kicker 랑리스테 중 18회 등급 선정과[24](WK 1회, IK 4회, K 9회, B 4회) 당해 공격수 평점 순위 1위 1번(88/89)[25], 3위 2번(79/80, 82/83), 80년대 상반기(79/80~83/84)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2위, 80년대 하반기(84/85~88/89)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5위를 기록했다.[26]

더욱이 이 모든 것들이 K리그가 출범 전이던 시절, 군 만기 전역 후 만 26세의 나이에 해외로 건너가 이룬 업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차범근이 일반 사람처럼 군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고, 공군 소속으로 경기를 뛰거나 국가대표로 차출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군사 훈련을 받은 시기도 분명 존재하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1970년대는 프로 축구라는 것이 없는, 대한민국 모든 축구선수가 '아마추어' 신분이었던 시절이다.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SV 다름슈타트 98 첫 경기에서 가장 놀란 점은 자신이 제쳤던 선수가 다시 따라붙었다는 점인데 아시아에서는 자신이 골을 몰고 선수를 제치면 못 따라 왔었기 때문이었다.[27] 이 정도로 유럽과 아시아의 축구 격차는 컸기 때문에 군시절 경기를 뛰었다한들 당시 훈련 수준이나 경기력 향상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차범근은 군 문제로 복귀한 후 5개월간은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으로 인해 경기 출전을 하지 못한다. 5개월을 공군에서 개인 훈련만 한 것이다. 제아무리 명문팀 소속의 선수라도 2군 경기나 벤치 멤버로 출전을 못한다면 폼이 떨어지는데, 군대에서 5개월을 보내고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저런 성적을 낸 것이다.

간혹 차범근이 속한 팀의 순위와 득점 순위 및 득점력을 들며 폄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순 수치만 놓고 본다면 팀의 성적이 아쉬운 건 사실이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차범근이 오기 전 네 시즌의 성적은 9-4-7-5위로 중상위 수준의 팀이었고 차범근 역시 레버쿠젠보다 프랑크푸르트가 구단 위상이 더 높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분데스리가에서 강호에 속했다. 차범근이 오고 나서의 성적은 9-5-8-10인데 리그 순위만 봐서는 성적이 다소 떨어졌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대회 우승 유무다. 차범근이 오기 전 네 시즌(74/75~78/79)에 프랑크푸르트가 얻은 트로피는 전무하다. 하지만 차범근 영입 당해 연도에 UEFA컵 우승과 다음 시즌 DFB-포칼 우승을 차지한다. 여기서 단순히 우승 멤버가 아닌 주요한 활약을 펼쳤는데, UEFA컵에서는 11경기에서 3골을 기록했지만 11경기 전부 선발 출장에 10경기를 풀타임으로 뛰었으며[28] 64강, 32강, 16강 경기에 각 한 골씩 넣고 나머지 경기에서 골 없이도 경기 MVP에 선정될 정도의 활약을 펼쳤다.[29] 또한 DFB-포칼 우승 당시에는 6경기에 선발 출장해 풀타임을 뛰고 6골을 넣었는데 준준결승전까지 두 차례 멀티 골을 뽑아내었고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연속 골을 이끌며 맹활약한다. 이것만 봐도 차범근이 팀을 이끌어 나가던 대표 선수였다는 걸 알 수 있지만 팀 자체도 리그 중위권 성적을 거뒀어도 당시 거둔 성과가 결코 미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이적 후 프랑크푸르트의 성적도 주목할만한데, 중위권을 유지하던 팀 성적이 여섯 시즌 동안 16-12-15-15-9-16위로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며 기나긴 침체기를 겪는다.[30] 심지어 여섯 시즌 동안 팀 내 리그 10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단 두 번 존재했다.

바이엘 04 레버쿠젠 시절은 오히려 리그 순위를 보면 그 성과가 확연히 드러난다. 차범근 영입 후 레버쿠젠의 분데스리가 순위는 7-13-6-6-8-8위로, 단순 수치만 보자면 저 정도의 중위권 성적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할 수 있겠지만 차범근이 오기 전 레버쿠젠의 리그 순위는 12-11-16-11위로, 1979년 2부 리그에서 승격한 후 네 시즌동안 10위 안으로 들어가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팀이었고, 구단 자체적으로 잡은 시즌 목표 순위도 10위권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를 생각한다면 성공적인 시즌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DFB-포칼의 성적 역시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네 시즌 동안 3라운드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던 구단이 8강 2번에 4강 1번을 기록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87/88 시즌에는 구단 최초로 UEFA컵까지 우승한다.[31] 과연 팀 성적이 별로였다 치부할 수 있을까?

차범근의 득점력도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늦은 나이에 진출한 만큼 노쇠화로 인해 커리어 후반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드필더로 뛰기도 하였고(심지어 마지막 시즌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경기도 있었다.) 해당 세 시즌만 해도 110경기에서 18골을 기록했다. 이외에 공격수로 뛴 일곱 시즌 동안 262경기에서 103골을 넣었는데 2.5경기당 1골을 넣는 수준이고, 공격수로 뛴 기간에 있어서도 차범근은 온전히 정통적인 센터포워드로서 뛰었다고 볼 수 없다. 현대로 따지면 세컨드 스트라이커 개념의 역할을 했는데, 차범근의 경기 영상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듯 당시 1선에서 골만을 노리던 전통적인 공격수가 아닌 좌우 측면을 넘나들며 공격의 활로를 뚫고 허리 라인까지 내려가 수비 가담까지 해주는 공격수였다. 후술하겠지만 차범근이 무득점 경기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경기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공격적인 역할뿐 아니라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팀 자체를 보조하는 스트라이커로서 요즘 현대 축구에서 각광받는 컴플리트 포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멀티플레이를 선보였던 차범근은 리그만 따진다면 여섯 시즌, 시즌으로 본다면 일곱 시즌 모두 10골 이상을 넣었고 멀티골만 20차례 기록했다. 득점력이 매우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무시할 수준이 결코 아니다.

리그 득점 순위에 있어서도 공격수로 뛰던 시절 12-39-25-10-18-27-4위를 기록했는데 득점 순위 4위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상위권이라 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차범근은 중위권 구단의 공격수였다. 매 시즌 성적은 변화하고 구단에 뛰어난 동료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객관적인 팀 전력에서 소위 명문 팀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고, 상위권 팀의 공격수들에 비해 득점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득점 순위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상위 득점 랭킹은 대다수 당시 리그 상위 팀들의 공격수들의 차지였다. 그럼에도 차범근은 여러 시즌 동안 꾸준히 10골 이상씩 넣어주며 구단의 득점을 책임지었고 득점 랭킹 4위를 차지하기까지 한 것이다.[반론1] [반론2]

애초에 골 기록만 놓고 본다면 8-12-11-7-10-11-4-15번째 수준의 득점 횟수인데다 당시 로타어 마테우스파울 브라이트너, 한스 페터 브리겔, 빌프레트 하네스처럼 미드필더나 수비수임에도 상위 득점 순위를 기록한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34] 차범근의 득점 기록은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100여 명의 공격수 중 11-29-17-10-14-22-4위에 해당한다. 특히 당시 외국인 용병 중 차범근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거의 없었다. 79/80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 외국인 선수 중 1-8-4-2-2-2-1위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당시 용병들 중 손꼽히는 득점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단순히 외국인으로 분류했을 때뿐만 아니라 팀 내 득점 순위로 봐도 1-3-1-1위 (프랑크푸르트)/2-2-1-3-6-7위(레버쿠젠)로 두 구단에서 상위권의 득점을 기록했다.

이를 보고 당시 팀에 마땅한 선수가 없었던 것 아니냐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는 베른트 횔첸바인[35], 바이어 04 레버쿠젠에는 헤르베르트 바스[36]라는 걸출한 공격수가 있었다.

또한 차범근이 활동한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10여 년 간 외국인 선수가 분데스리가 득점 순위 5위 안에 든 경우가 단 두 번 존재하는데, 82/83 시즌 3위에 오른 아틀리 에드발드손(Atli Edvaldsson)[37]85/86 시즌 4위를 기록한 차범근이다.

참고로 분데스리가 최초의 외국인 선수(비 독일인) 득점왕은 차범근 은퇴 다음 시즌인 1989/90 시즌에 이르러서야 탄생한다. (욘 안데르센[38]- 18골)

분명히 득점 순위는 공격수에게 평가의 주요한 지표 중 하나로, 특히 실제로 경기를 볼 수 없었던 선수일수록 수치의 중요성은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득점 순위가 공격수 혹은 선수의 평가를 하는데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득점력 자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거니와 무엇보다 차범근은 골 결정력이 높은 선수였다. 차범근에 관해 함께 뛴 동료나 경쟁한 선수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 중 하나가 '골 기회가 생기면 어김없이 득점했다'라는 것인데 이는 차범근의 골 결정력을 말해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만약 골 찬스 대비 득점 횟수가 적었다면 절대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없다.

현재 뛰고 있는 해외 선수들 중에서도 수치 상 높은 득점 기록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골 결정력은 공격수로서 평가를 내릴 때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차범근은 중위권 팀의 공격수로서 끊임없이 공격 활로를 뚫으며 팀의 공격을 주도하며 한정된 골 기회를 높은 확률로 득점하는 선수였다. 그리고 이는 차범근이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공격수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순히 수치만으로 섣부르게 선수를 평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과거의 선수들을 평가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차범근같이 과거의 경기 영상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는 선수들의 경우 수치화된 기록들이 평가의 기준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선수의 경기력을 배제한 채 골의 개수나 득점 순위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득점 왕을 차지했는데도 종합적인 활약도가 떨어져 방출 대상이 되는 선수가 있는 것처럼 한 선수를 평가할 때는 종합적인 부분을 모두 따져 평가해야 한다.

차범근 역시 마찬가지인데,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공격수라 하기에 모자라 보이는 득점 순위를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평점이다.

공격수로서의 차붐의 위상은 평점으로 확인 가능하다. 당시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점들을 보면 단순히 골을 넣었다고 평점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골을 넣지 않고도 고평점을 받는 선수들이 꽤 있었는데, 차범근도 마찬가지였다. 현역 당시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평점 1점 17회와 2점 81회를 받았는데, 특히 2점을 받은 경기 중 골을 넣지 않은 경기가 45회나 된다.

보통 1점이나 2점은 득점 유무와 상관없이 경기 자체를 지배하거나 특출난 활약을 한 선수들에게 부여했던 점수였고, 3점 역시 Good 정도에 해당하는 점수로 골을 넣어도 3점을 받는 선수가 대단히 많았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308경기를 뛰는 동안 211경기에서 1~3점의 평점을 받았는데(1점 17회+2점 81회+3점 113회) 이는 약 전체 경기 중 70%에 육박하는 수치로 10경기를 뛰면 6~7경기 정도는 못해도 Good에서 최상급의 활약을 보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은 이 비율이 82%에 이른다.[39]

또한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차범근의 한 시즌 평균 평점 순위는 분데스리가 선수 220명 中[40] 25-77-78-20-57-106-84-117-83-63위에 해당한다. 이는 전 포지션을 통틀었을 때의 순위로, 단순 수치만 보면 기대 이하거나 좋게 봐줘도 분데스리가 전체에서 중상위 그룹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당대 시대 상황과 분야별 평점 순위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80년대 분데스리가의 평점은 골키퍼와 수비수들에게 굉장히 후한 편이었고 반면에 공격수들에게는 매우 짠 편이었다. 독일 역대 최고의 공격수인 게르트 뮐러 조차 분데스리가 한 시즌 최다 득점인 40골을 넣은 71/72 시즌 평점 순위가 15위에 불과하다. 특히 차범근이 뛰었던 79년부터 89년까지 10년간의 평점 순위를 보면 1위부터 10위까지의 선수들 대다수가 골키퍼나 수비수들이고 간혹 드물게 미드필더가 섞여 있는 상황이다. 해당 10년 동안 공격수 중 10위 안에 들어간 선수는 루디 푈러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뿐이며[41] 푈러는 10위에 한 번, 루메니게 역시 10위 한 번에 7위에 두 번 든 것이 전부다. 범위를 20위까지 넓히더라도 겨우 5명이 추가되는데 그중 한 명이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42] 범위를 더 넓혀 30위까지 늘려도 11명 밖에 되질 않으며(한 시즌이 아니다. 10년 동안 평점 순위 30위 안에 든 공격수가 11명 뿐인 것이다.)[43] 심지어 84/85시즌에는 평점 순위 30위 안에 든 공격수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질 않는다.

이렇게 저평가되던 포지션이었음에도 차범근은 꾸준히 분데스리가 평균 평점 2점 중후반 혹은 3점 초반을 유지했는데, 이는 분데스리가 공격수들만 놓고 봤을때 50명 中[44] 3-6-7-3-6-9-5-13-5-1위에 해당하고, 팀 내 공격수 기준으론 1-2-1-1-1-1-2-2-1-1위에 해당한다.[45] 더욱이 랑리스테 평점으로 본다면 외국인 공격수 중 3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46] 다시 말해서 당대 분데스리가의 주전 공격수들 중 상위 평점을 받은 것이다.(괜히 공격수 부문 평점 2위겠나)

쉽게 감이 안 오는 사람들을 위해 당대 유명했던 공격수들과 비교를 해보자면 81/82 시즌 27골로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오른 호르스트 흐루베슈[47]의 평점은 3.12로 해당 시즌 전체 평점 순위 140위에 불과했으며, 79/80 시즌부터 82/83 시즌까지 득점 순위 2-4-1-5위를 기록했지만 2.97의 평점 외에 전부 3점대의 평점을 기록했다. 또한 85/86 시즌 22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슈테판 쿤츠[48] 역시 평점 3.39에 평점 순위 139위에 랭크됐다. 두 선수 모두 득점 랭킹 상위에 당대를 포함 분데스리가 역사를 놓고 봐도 손꼽히는 공격수들이지만 차범근보다 평점이 높았던 적이 단 한차례도 없다. 이들보다 국내 팬들에게 친근한 선수인 위르겐 클린스만의 경우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7시즌 동안 평점 2점대를 받은 적이 한 번 존재하는데, 87/88시즌 자신의 리그 최다 골인 19골을 넣고 득점왕과 함께 평점 2.74를 받았고 전체 평점 순위 20위를 기록했다. 이 시즌을 제외하면 전부 3점대 평점을 받았으며, 클린스만 역시 차범근과 활동 시기가 겹치는 84/85시즌부터 88/89시즌까지의 기간 동안 앞서 말한 87/88시즌을 제외하면 차범근보다 평점이 좋았던 적이 없다.[49]

무엇보다 차범근은 다섯 시즌 연속으로 분데스리가 시즌 평점 2점대를 받았는데, 이렇게 5회 연속으로 시즌 평점 2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1980년대를 통틀어서 차범근루메니게[50] 단 두 사람뿐이다. 당시 득점왕이나 꾸준히 상위 득점 순위에 들었던 선수들조차 연속은 고사하고 평생 커리어에서 2점대 평점을 한두번 받은 것이 전부일 정도로 시즌 평점 2점대를 받기 어려웠는데, 이는 루디 푈러(8시즌 2회)나 클린스만(7시즌 1회) 같은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51]

정리하자면 차범근은 꾸준히 10골 이상을 넣으며 팀 내 득점 1위를 고수하던 선수로, 평점에서도 분데스리가 전체 공격수 중 상위에 속하는 공격수였다. 이런 선수를 단지 득점 순위가 낮다는 이유로 폄하할 수는 없다. 학교로 따진다면 전국 1위의 명문 학교에서, 매 학기 반 1등 혹은 최소 상위의 성적을 내며 전교 등수 4등을 한 적도 있는 학생으로, 성적 우수자에 여러 번 뽑히거나 한 해 동안 가장 공부 잘한 학생 11명에 두 차례 뽑히고 전국의 성적 우수 학교들이 참여하는 전국 경시대회에서 학교 대표로 나가 두 차례나 우승을 했음에도 단순히 전교 등수가 낮다는 이유로 공부를 못하거나 평범한 수준의 학생이었다고 취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장에 팀 순위 및 득점 순위가 선수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은 현재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를 봐도 알 수 있는데, 2020/21 시즌 황의조만 하더라도 팀성적 12위에 12골로 득점 순위 14위를 기록했음에도 몸값이 100만 유로가 뛰었고 프랑스 리그1 올해의 팀 공격수 후보에 올랐다. 보르도 현지 매체에서는 무려 킬리안 음바페에 비유하며 경의를 표했다. 현재 아시아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는 손흥민은 어떤가, 손흥민은 2016/17 시즌부터 20/21 시즌까지 팀 순위는 2-3-4-6-7위에 득점 랭킹은 13-10-16-18-4위었다. 그럼에도 이 기간동안 수많은 개인 수상과 영국 현지의 극찬은 물론 FIFPro 월드 XI의 공격수 부문에 2년 연속 선정되고 발롱도르 후보 30인에도 들어갔으며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었다.[52]

결론적으로 차범근은 당대 독보적인 톱클래스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분데스리가와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급 선수 중 한 명이자 국제적 수준의 명성을 가진 선수였다. 각 팀 시절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언론의 말도 안 되는 곡해와 시대적 상황으로 온전히 축구에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차범근 스스로도 그런 주변의 오해와 갈등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었을 때의 열정이 사라져 루메니게브라이트너와 같은 초일류 선수들의 경지에 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데뷔 시즌부터 전체 외국인 선수(전체 포지션) 1위에 랭크되며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를 받았고, 경쟁이 치열하던 용병의 위치에서 10여 년간 붙박이 주전을 꿰찼을 뿐 아니라 공격수로서 상위 평점을 유지하며 중위권 팀을 이끌고 두 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일궈낸 당대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주축 공격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은퇴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쉽사리 지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축구사에 있어서는 21세기의 이영표, 박지성, 손흥민 등으로 이어지는 해외파 선수의 선구자이자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처음으로 써내려갔던, 대한민국 축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3.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70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1971년과 1972년 연속으로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고려대학교 학생 신분이던 1972년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5월 7일 이라크와의 AFC 아시안컵 경기를 통해 국가대표팀에서 데뷔하였고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22225
1972년 6월 2일 펠레의 산투스와의 친선전에 참가해 69분 팀의 첫번째 골을 터뜨리면서 선전했지만 2:3으로 패배했다.[53] 1978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과 당시 아시아 3대 대회라 불리며 주요한 국제 대회 중 하나였던 메르데카컵을 4회 우승했다. 1986년 FIFA 월드컵 24개국 본선에 출전하였던 1986년 6월 10일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136경기에 출전해 58골을 넣었는데 A매치 58골은 대한민국 선수 중 A매치 최다 골 기록이다.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렸다.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
1970년대 동요 종이비행기를 개사한 이 노래의 내용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나 함께 국가대표를 뛰었던 선수들, 전문가 및 중계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가대표에서는 윙 포워드로 뛰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엄청난 득점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고 이는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기록이다. (24년 139일)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1-4로 뒤지고 있을 때 6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로 만든 일화가 유명하며 특히 일본과의 한일정기전을 치를 때마다 눈부시게 활약하였고, 차범근이 출전했던 한일전에서는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뉴스 기사로 정리되어있다. 관련 기사 

1972년 데뷔하여 1979년 프랑크푸르트 진출전까지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으며, 1979년 이후로는 국가대표를 은퇴했었다. 여러 정황을 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이는데, 독일 진출과 계약서에서 국가대표 차출과 관련된 내용이 명확히 되지 않아 후자와 같이 월드컵 예선 참가 요청에도 불발된 경우가 있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1979년과 1986년 월드컵 본선 사이에 엔트리에 포함된 기록이 없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서 축협이 합류를 요청했으나 계약상의 문제로 불발되었다.

이후 1986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32년만에 1986 멕시코 월드컵 24개국 본선에 진출하면서 레버쿠젠과의 계약에서 국가대표 차출 문제가 해결되고 차범근을 다시 불러야한다는 목소리가 다시금 높아지게 되었는데 이에 차범근 본인은 처음에는 본인이 아예 기여하지 않은 성과인데다가 나이도 이미 상당했기에 후배들을 위해 출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일부에서도 "예선전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대표 팀에 넣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대여론도 있었지만 활약상이나 실력 등을 고려해 그냥 기용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차범근의 명성이 잘 알려진 해외, 특히 독일에서는 "차범근을 대표선수로 뽑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엔트리에 여유가 있다면 한국은 우승후보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당시 차범근의 월드컵 차출 과정에 문제가 되던 것 중 하나가 차범근에 걸린 보험비였는데 레버쿠젠에서는 차범근이 다쳤을 시 보험금을 한국측에서 부담하도록 요구를 했고 당시 돈으로 10억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였던 만큼 한국에서는 난색을 표하며 차범근의 차출을 보류하기에 이른다. 결국에는 양자간의 합의가 잘 끝나긴 했지만 레버쿠젠 구단에서는 차범근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서, 부상을 대비한 전담 의료팀을 따로 파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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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경기에서는 월드컵 직전 복숭아뼈 아래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던데다 타 팀 선수들의 집중견제로 큰 활약은 못했다. 상대팀의 마인드가 '무조건 차붐만 막으면 된다.' 였기 때문에 공을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무조건 수비수 2명이 기본적으로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54] 경기 시작 전부터 전력 평가에 차범근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했는데 정작 부상으로 한국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는 차범근을 '현역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칭하며 "차범근을 막지 못하면 한국에게 당할 수 있다."라고 평했으며[55] 불가리아의 이반 부초프(Ivan Vutsov) 감독은 "한국에 차범근이라는 우수한 선수가 있기는 하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것이지 그 혼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덧붙여 "우리는 최강의 선수가 가득한 이탈리아의 공격도 묶었다.[56] 한국 정도의 공격력은 안중에도 없다."라는 도발적인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유일하게 차범근에 대해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고 "한국은 스피디한 역습을 지닌 무시할 수 없는 팀으로 자만하지 않고 임하겠다"라는 멘트만 했는데 그 당시의 아르헨티나가 워낙 쟁쟁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인지라 세르히오 바티스타에게 철저하게 지워져 버렸다. 차범근이 바티스타에게 지워지는 바람에 허정무가 무리하게 되었고 결국 허정무는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본의 아니게 태권킥을 시전하고 만다[57]. 이탈리아 상대로 2-3, 더군다나 그 중 하나가 조광래자책골인지라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를 상대로 호각의 경기력을 보였고 한국이 일방적으로 밀린 유일한 상대가 아르헨티나였다. 특히, 유럽팀 불가리아를 상대로 1:1 무승부 첫 승점 1점을 획득하였다. 실제로도 차범근이 막히자 수비진을 뚫을만한 공격수도 없었고. 그리고 당시 차붐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이미 34세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대였다. 게다가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아니고 클럽과 달리 윙에서 뛰었으니.. 결과적으로 24강 조별리그에서 16강은 실패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첫 승점 1점 1무 2패 월드컵 20위를 기록하며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을 마무리한다.

86년도 월드컵과 차범근에 대한 축구팬의 회고링크를 참조하면 당시 차범근의 활약상이 지금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은 다름을 알 수 있다. https://mlbpark.donga.com/mp/b.php?m=search&p=1&b=bullpen&id=201902180028035668&select=sct&query=%EC%B0%A8%EB%B2%94%EA%B7%BC+86%EB%85%84&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6jLHltYghRRKfX2h4aXGg-Yhhlq

여담으로 화려한 클럽 경력과 국대에서의 골 수, 경기 수에 비해 월드컵 출전은 위의 86년 월드컵뿐인데 이만한 선수가 왜 월드컵 경력이 1회뿐이냐고 묻는다면 그 이전의 월드컵은 78월드컵까지는 전세계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단 16자리, 82월드컵부터 본선 월드컵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24자리로 확대되었고 현재 32자리 ~ 48자리 본선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보다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58].

또한 윗 문단에도 나와있듯이 차범근은 24세 139일의 나이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역대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다. 또한 1978년 다름슈타트에 입단하면서 사실상 국가대표를 은퇴한 상황. 그의 마지막 A매치 경기 득점도, 1978년에 이루어졌으며, 화려한 분데스리가 생활 때는 A매치에 소집되지 않았었다. 당시는 A매치 데이 같은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었고,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영공을 통과하지 못해 서독으로 가려면 알래스카를 경유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6년 월드컵에 드디어 대한민국이 24개국 본선에 진출했고, 차범근은 8년만에 국가대표에 복귀해서 24강 조별리그 3경기를 뛰고 정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74년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의 경우, 호주와 1장(우승)의 16개국 본선 진출티켓을 놓고 홈앤 어웨이를 모두 비기고, 마지막 홍콩에서의 재경기에서 대한민국이 패배하면서 7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을 실패했는데, 차범근은 이 호주와의 3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하지 못했기에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1978년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에서 한국은 5강 결승리그[59]에 진출하였으나, 이란이 우승으로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하여 아쉽게도 한국은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 준우승으로 78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을 하지 못했다. 특히 이 당시 쿠웨이트의 기세가 매서웠는데 한국은 2000년대까지 쿠웨이트와의 상대전적에서 밀렸다. 차범근은 1차예선에서 2골, 최종예선에서 3골을 넣었음에도 조국의 탈락을 바라봐야만 했다. 82년은 A매치를 뛰지 않았었기에 86년 월드컵에 드디어 첫 출격을 하게 된 케이스다.[60]

이렇듯 7년간 130여경기를 출전하며 국가대표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로의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따져도 매년 20여 경기를 소화한 수준인데 당시는 A매치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스포츠 국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도 축구 변방으로 이런저런 경기를 많이 뛰었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활약했다는 점에서 국가대표에서 차범근의 위엄을 알 수 있는 부분. 이 때문에 정작 신체적 전성기였던 20대 초반 국가대표 활약 시기에 관심이 쏟아지지만 당시의 경기 영상은 물론 텍스트, 기사등 그 당시를 복기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차범근의 20대 국가대표 경기 장면이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1] 경신학교 축구부는 1904년 창단되었고, 1세대 원로 김용식 옹을 배출한 축구부라 명성이 높았다.[2]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는 같은 경신학원이다. 참고로, 차범근은 경신 12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3] 그리고 이 사건 이후부터 차범근은 PK를 자신없어해서 나서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4] 황재만 선수도 이젠 거의 잊혔지만, 1970년대 국가대표에서 주전 붙박이 레프트백이었다. 차범근과 같이 국가대표 경기를 뛴 적도 있었으니 기묘한 인연이다.[5] 장난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당시 대학에서는 상대 대학에 좋은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달이었고, 보통은 스카우트할 적에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해당 선수와 친한 선수 몇몇을 뽑아다 같이 데려와서 대어 선수를 모셔오는 게 기본이었고, 안된다 싶으면 집요하게 따라오거나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 음식점 같은 곳에 붙잡아놓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 예로 한양대학교빙그레 이글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박찬호도 하마터면 빙그레에게 납치를 당할 뻔했다.[6] 한국 역사상 첫 외국인 국가대표 감독이다.[7] PK 유도 5회[8] PK 유도 5회[9]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차범근은 1978년 26세의 나이로 진출.[10] 실제로 활약 당시 독일 신문에 차범근이 부상 중에 팬들에게 전한 한국어 편지가 실리고 구단에서 전광판에 한국어 자막을 띄워주거나 독일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현지에서도 인기가 상당했으며, 차범근이 몸 담은지 30년이 지난 프랑크푸르트를 브라질 월드컵 기념 방송에서 방문했는데 여전한 인기를 자랑했다.[11] 비유럽권 선수로서는 1위에 해당한다.[12] 이 기록은 31년이 지난 2020년 하세베 마코토가 분데스리가 12년 차 만에 경신했다.[13] 여기서 말하는 친선경기란 기본적으로 독일 내 팀들과의 경기는 물론 타국 리그 팀을 초청해 벌이는 친선 토너먼트 대회 등을 포함하는 이야기로 관중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이런 경기들의 표값이 상당하다 보니 당시 분데스리가 구단들에 굉장한 수익을 가져다 주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주전 선수들을 내보내고 팬 사인회를 갖는 등 부가적인 행사를 많이 가졌다. 선수들 입장에서도 수입의 50%를 가져가는 독일 세금 때문에 추가적인 수익이 필요해 뛰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루메니게와 베켄바워 역시 마찬가지였다.[14] 다만 143경기를 모두 풀타임 뛴 것은 아니고 전반전만 뛰거나 교체 출전을 하기도 하였다.[15] 프랑크푸르트는 아카이브로 확인 가능하지만 레버쿠젠은 친선경기 아카이브가 없어 안타깝게도 몇 경기를 뛰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16] 이와 비슷한 사례로 손흥민과 이재성을 들 수 있는데, 손흥민의 경우 유망주였던 함부르크 시절을 제외하면 레버쿠젠과 토트넘 두 구단에서 등번호 7번을 9년간 유지하고 있으며 이재성 역시 유럽 진출 후 홀슈타인 킬과 마인츠에서 연이어 7번을 달고 있다. 두 선수 모두 프로 데뷔 이후 줄곧 한 번호를 달고 뛴 차범근과 정확히 같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유럽 진출 후 메인 넘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대단히 드문 경우에 속한다.[17] 차범근이 뛰던 시절 분데스리가가 최고에서 내려오던 시절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차범근이 뛰었던 79년부터 89년까지 UEFA 리그 랭킹 1-1-1-1-1-1-3-2-3-3-2위로 여전히 최상위에 해당하는 리그였다.[18] 이 기록은 11년동안 유지되다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인 스위스 출신의 스테판 샤퓌자가 99년에서야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추후 FC 바이에른 뮌헨의 브라질 출신 선수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기록을 깼지만 몇 년 뒤 당시 베르더 브레멘 소속이던 페루 출신의 클라우디오 피사로가 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2015년 바이에른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2018년 아르연 로번이 차붐의 기록을 넘어섰다. 2021년 8월 기준 외국인 최다득점 공동 8위에 랭크되어 있다.[19] 2021년 8월 기준 55위(3800명 中)[20]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시도 자체를 한 번도 안 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98골이 전부 다 필드 골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 vs 파라과이 경기를 해설(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16강, 또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일본을 참고)할 때, 분데스리가에서 페널티 킥을 하나도 안 찬 사실을 본인 입으로 인증했다. 이유는 실축할까 봐 무서워서...즉 분데스리가 골 기록 중에 페널티 킥은 한 골도 없다는 소리가 된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참고로 당시 경기는 너무 재미없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21] 근래 들어 유난히 객관성을 빙자하여 선수들이 이룬 업적들을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차범근이 들어 올린 UEFA컵 역시 그 위상에 대해 말이 많다. 우선 기본적으로 현재의 유로파 리그에 비해 수준이나 흥행, 권위가 높은 것은 명백하다. 각 리그 우승 팀과 FA컵 우승 팀을 제외한 현재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에 해당하는 순위의 팀들이 대거 출전하는 만큼 흥행 면에서는 오히려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컵을 앞지르기까지 했다. 문제는 이 UEFA컵이 당시에 어느 정도 위상이었는지가 화두로 떠오른 것인 데, 애초에 이런 논쟁 자체가 타인의 위상이나 그에 대한 찬양을 비하하기 바쁜 이들의 고약한 줄 세우기 일뿐,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UEFA컵은 유럽 대회 중 가장 권위가 떨어졌으며, 당대 유러피언컵과 위너스컵에 비해 취급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우승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궤변까지 일삼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런 논쟁이 의미가 없는 이유는 각 대회의 특성이 분명히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유럽 리그 우승 팀들끼리의 경쟁 대회인 유러피안컵, 유럽 리그 FA컵 우승 팀들의 경쟁 대회인 UEFA컵 위너스컵, 유럽 리그 상위권 팀들의 경쟁 대회인 UEFA컵까지 애초에 이 셋은 본질적으로 의의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각 대회의 자격 요건에 해당하는 유럽 리그의 모든 팀들이 경쟁을 하는 유럽 축구 역사의 대표적인 대회들로, 특정 대회의 위상이 높고 낮음을 따지며 낮은 대회의 우승은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취급할 수준이 아닌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유럽 각 리그 최상위 팀들이 참여하는 유럽 대회의 우승은 분명 의미 있고 위대한 업적이다.[22] 그 중 한 명이 울리 슈틸리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슈틸리케는 1975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으로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0년 뒤인 1985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른 인물들로는 데니스 베르캄프(1992년 AFC 아약스,1994년 인테르), 로타어 마테우스위르겐 클린스만(1991년 인테르, 1996년 FC 바이에른 뮌헨), 파울루 페헤이라(2003년 FC 포르투, 2013년 첼시),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20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4년 세비야), 마르코 마린(...)(2013년 첼시, 2014년 세비야), 후안 마타(2013년 첼시, 201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페르난도 토레스(2013년 첼시,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다멜 팔카오(2011년 포르투, 2012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다비드 데 헤아(20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케빈 가메이로 (2014년 세비야,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비센테 이보라 (2015년 세비야, 2021년 비야레알) 비톨로(2014년 세비야, 201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윌리안 (2008년 샤흐타르, 2018년 첼시)[23] 시즌으로 보면 일곱 시즌 연속이다.[24]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뛴 선수는 대략 360여 명 정도였는데, 그중 140여 명 정도만 랑리스테 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25] 공격형 미드필더를 제외한 순수 포워드 기준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포함하면 88/89 시즌 평점 순위는 4위에 해당한다.[26] 공격형 미드필더를 제외한 순수 포워드 기준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포함하면 하반기 순위는 6위에 해당한다.[27] 2021년 대화의 희열3에 출연해 말한 이야기로, 이런 압박감은 선수 시절 내내 느꼈다고 한다.[28] 풀타임 출전이 아닌 유일한 경기인 8강전 2차전에는 86분을 소화하였다.[29] 당시 어시스트 기록이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범근의 정확한 어시스트 기록을 알 수는 없지만 차범근의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득점만큼 많은 어시스트와 키패스를 양산해 내었으며 UEFA 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79/80 시즌 UEFA 컵에서의 어시스트 횟수도 언론 매체 등에 따르면 5~6개, 유튜브 등 영상으로 확인 가능한 도움도 4개에 이른다.[30] 당시 한 독일 언론사는 차범근을 잃은 프랑크푸르트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31] 결승 2차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켜 승부차기 우승을 이끈 주인공이 차범근이다.[반론1] 그러나 차범근이 우승권 팀으로 이적했다고 해서 득점 순위가 반드시 올라간다는 보장은 없다. 중위권 팀에서는 팀이 경기 주도권을 잡기가 어려워지지만, 대신 팀내 공격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압도적으로 높아져 감독의 전술과 동료의 지원이 본인에게 맞춰서 본인이 공격 주도권을 가지면서 공격을 이끌어 대부분의 득점 루트가 본인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또한 중위권 팀에서 뛰면 우승권 팀에서 뛸 때보다 상대의 수비 라인이 높아지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공략하기 용이해진다. 차범근이 우승권 팀으로 이적한다면, 팀이 점유율을 비롯한 경기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많은 기회를 제공받아 득점 기록이 늘어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과거 레알 마드리드의 벤제마처럼 팀의 에이스 공격수를 조력하는 역할을 맡거나, 심하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골 기록이 하락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의 잭 그릴리시나 리버풀 시절의 이아고 아스파스같이 중위권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가 상위권 팀으로 이적하고 공격 주도권을 잃고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오히려 공격 포인트가 하락한 경우도 많다.[반론2] 본문에 적힌 논리대로 약팀이었기에 개인 골 기록에 불리한게 사실이라면 같은 수의 골을 기록한 두 공격수가 있다면 약팀에서 같은 스탯을 기록한 선수가 더 뛰어난 득점력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과 축구 팬들의 공격수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와 위상을 살펴보면 동일한 골수를 기록했을때 약팀에서 같은 수의 골을 기록했다고 딱히 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은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본문의 논리대로라면 중위권팀 셀타 비고 소속으로 2시즌 연속 20골을 돌파하고 꾸준히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이아고 아스파스가 20-21 시즌까지 우승권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25골을 돌파한 적이 없는 카림 벤제마보다 월등한 득점력을 가진 선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아스파스가 벤제마보다 뛰어난 득점력과 개인기량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전문가, 축구팬이 과연 있을까?[34] 81/82 시즌의 경우 득점 순위 10안에 미드필더만 4명이 들어가 있다.[35] 74년 서독 월드컵 우승 멤버이자 프랑크푸르트 최다 득점 1위(519경기 204골),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순위 14위(420경기 160골)를 기록한 독일의 레전드[36] 분데스리가 247경기 74골을 기록한 레버쿠젠의 레전드[37] 분데스리가 224경기 59골을 기록했고 외국인 선수 최초로 한 경기 5골을 넣은 아이슬란드 레전드 공격수[38] 2018-2019년에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은 그 안데르센 감독 맞다[39] 122경기 중 100경기(1점 13회+2점 37회+3점 50회)[40] 당시 분데스리가 전체 선수는 360여 명이었으나, 리그 최종 평점 순위는 리그 경기 50% 이상을 뛴 선수만 대상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해당 글에선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 사이에 50% 이상 리그 경기를 뛴 선수들의 평균값인 220명을 평점을 받은 총 인원으로 잡았다.[41] 평점 3위를 차지했던 우베 란도 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와 센터 포워드를 오가던 이른바 미들라이커였고, 랑리스테(공격형 미드필더)와 수상 경력(84,85,86 분데스리가 올해의 미드필더)에 있어서도 미드필더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42] 나머지 4명은 케빈 키건, 위르겐 클린스만, 카를 알괴버(VfB 슈투트가르트 역대 최다 득점자), 미로스와프 오콘스키(폴란드 역대 윙포워드 8위)[43] 이 11명 중 두 번 이상 30위 안에 들어간 선수는 단 4명으로 루메니게(5회/11-7-11-10-7위), 루디 푈러(2회/10-19위), 차범근(2회/25-20위), 카를 알괴버(2회/27-11위)이다.[44]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공격수는 100여 명 정도였으나, 리그 최종 평점 순위는 리그 경기 50% 이상을 뛴 선수만 대상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해당 글에선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 사이에 50% 이상 리그 경기를 뛴 공격수들의 평균값인 50명을 평점 받은 공격수 총 인원으로 잡았다.[45]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들을 제외한 순위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포함하면 전체 공격수 평점 순위는 3-6-7-3-6-15-7-18-6-4위, 팀 내 평점 순위는 1-2-2-1-1-1-3-3-2-1위에 해당한다.[46] 80년대 랑리스테는 독일 국적의 선수들은 포지션 별로 평가를 한 반면 비 독일인 선수들은 전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포지션에 상관없이 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79/80시즌 전반기 WK-1이라는 건 월드클래스급의 활약을 했으며 분데스리가 전체 외국인 선수들 중 포지션 통합 1위라는 뜻으로, 차범근은 포지션 통합으로도 놓고 봐도 10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 밖에 없다.[47] 유로 80 우승과 82년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 멤버로, 분데스리가 224경기 136골로 역대 득점 순위 20위와 함부르크 SV 역대 득점 3위에 랭크되어있는 함부르크 레전드 공격수이다.[48] 1991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수상자. 449경기 179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득점 8위에 랭크된 공격수로, 1.FC 카이저슬라우테른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을 안겼다.[49] VfB 슈투트가르트 시절 클린스만의 평점 순위는 106-125-150-20-66위[50] 루메니게의 경우 분데스리가에서 뛴 10시즌(74/75~83/84) 동안 무려 9번의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다.[51] 노파심에 말하지만 평점 3점을 받은 선수들을 낮게 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범근의 평점에 관한 의의와 평점 2점대를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기 위한 예시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 언급하는 모든 선수들은 분데스리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선수들이다.[52] 윙 포워드인 손흥민과 중앙 공격수였던 차범근의 포지션적인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엄연히 공격수로 분류되는 손흥민이다. 중앙 공격수에 비해 윙 포워드의 득점력이 다소 감안되더라도 골을 넣는 위치이기 때문에 득점력이나 득점 순위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특히 손흥민이 구단에서 원톱이나 투톱의 역할을 맡기도 하는 것처럼 차범근 역시 정통적인 센터 포워드라기보단 좌우 측면을 휘젓는 스타일을 살려 윙 포워드로 출전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는 비교에 대한 합리성을 드는 것일 뿐이지 차범근의 주 포지션이 윙 포워드였다는 얘기는 아니다.[53] 두번째 골은 71분 이회택이 넣었다.[54] 최순호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차범근은 당시에 타겟맨같은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상대팀이 차범근을 집중 마크할 것이 당연하니 역으로 자신이 그렇게 선수를 끌고 다니고 타 선수들에게 공격 기회를 만들어주었다고.[55] 로시는 차범근과 직접 붙어본 적은 없지만 유럽 컵 대회 등에서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여러 번 감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56] 당시 불가리아는 1차전에서 이탈리아와 1:1로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둔 상태였다.[57] 사실 태권킥 역시 절묘하게 찍혀서 그렇지 멀쩡한 플레이 중에 운 없이 타이밍이 겹쳐서 그렇게 나온 것이다.[58] 대한민국은 1950년은 한국전쟁, 1954년은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첫 진출(월드컵 16위), 1958년 신청서 분실로 지역예선 불참, 1962년은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유고에 패배하여 탈락, 1966년은 북한에 지는 게 두려워서 기권, 1970년은 1라운드 예선에서 호주에 밀려서 탈락, 1974년도는 최종예선에서 호주에 밀려서 탈락, 1978년은 최종예선에서 이란에 밀려 탈락, 1982년에는 1라운드 예선에서 쿠웨이트에 밀려 탈락하였다. 1986년에 들어서야 겨우 최종예선에서 일본을 꺾고 24개국 본선에 진출하였고 2022년까지 10회 연속 진출하고 있다.[59] 최종예선[60] 82년 월드컵은 1차예선에서 쿠웨이트의 편파판정에 패해서 최종예선에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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