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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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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세터 감독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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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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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업적상
제68회
(1995년)
존 라세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이름 존 라세터
JOHN LASSETER
분야 영화
입성날짜 2011년 11월 1일
위치 6834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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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세터
John Lasseter
파일:external/www.thetimes.co.uk/110343997_lasseter_322238b.jpg
<colbgcolor=#ff8000><colcolor=#000000> 본명 존 앨런 라세터
(John Alan Lasseter)
출생 1957년 1월 12일 ([age(1957-01-12)]세)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1]
가족 배우자 낸시 라세터(1998년 결혼~현재), 자녀 5명
학력 페퍼다인 대학교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소속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1986~2018)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1979~1983, 2006~2018)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 (2019~현재)
직업 애니메이터, 영화감독
활동 1978년 ~ 현재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John_Lasseter_signature.svg.png
링크 파일:IMDb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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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 and the technology inspires the art.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게 영감을 준다.
ㅡ 존 라세터
미국의 애니메이터, 감독이자 픽사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전 CCO.

2. 생애

쉐보레 판매원인 아버지와 미술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만화영화를 보고 자랐는데, 10대가 되었어도 남들은 자동차나 여자친구에 관심을 가질 때도 여전히 만화영화에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도서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한 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국으로 고3이 되는 나이에도 만화영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방과 후에 달려왔을 정도다.

어린 시절부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대학에 진학할 때 칼아츠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1977년에 개봉한 스타워즈를 보고 그는 큰 감명을 받았고 이는 곧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2][3] 그리고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꿈에도 원하던 디즈니에 입사해 애니메이터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 아티스트들이 아닌 경영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 무렵, 라세터는 디즈니 내부에서 제작되어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한 1982년작 트론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일찌감치 CG 애니메이션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라세터는 글렌 킨(Glen Keane)[4]과 함께 이러한 비전을 디즈니 측에 강력하게 어필했지만[5] 그 때는 CG 산업이 정말 태동기에 있었던 상황이라 당시 디즈니의 CEO였던 론 밀러[6]는 이러한 비전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훗날 컴퓨터가 2D 애니메이터들의 일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7]에 론 밀러는 얼마 안 가 라세터를 디즈니에서 해고했다.[8]

하지만 곧 기회는 찾아왔고, 라세터는 루카스필름 산하의 컴퓨터 그래픽 팀[9]에 입사했다. CGI 부서를 이끌던 에드윈 캐트멀과 올비 레이 스미스는 CG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은 뚜렷했으나 전문 애니메이터가 아니었던 만큼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은 부족했고, 라세터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로서 CGI 부서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 때 동료들과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단편 애니메이션이 'The Adventures of André and Wally B'로, 이를 통해 CG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업계에 어필하는 데에 성공한다. 영 셜록 홈즈(피라미드의 공포)를 만들 때 스테인드글라스 기사가 나오는 부분은 같은 루카스필름 산하의, 아날로그 시각효과를 담당하는 ILM과 함께 4달 동안 만들었다. 그 스테인드글라스 기사세계 최초로 100% CG로만 된 캐릭터이다.

조지 루카스가 이혼과 관련한 문제로 픽사를 스티브 잡스에게 팔아치운 이후, 그는 잡스의 후원 아래서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 작품 틴 토이를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확장시켜 개봉함으로서 그의 비전이었던 3D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열었다.[10] 이후 스티브 잡스의 전폭적 지원 하에 픽사의 수장으로 발탁되고 토이 스토리 시리즈부터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CG 애니메이션들의 제작을 지휘했다.

2006년, 삽질을 반복하던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픽사를 인수했고, 존 라세터는 근 20년만에 자신을 내쳤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로빈슨 가족'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존 라세터가 디즈니에 돌아와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스튜디오의 분위기 쇄신이었다. 2006년까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경영진의 통제 아래 철저히 묶여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스튜디오 환경을 픽사와 같은 영화 제작자 위주의 환경[11]으로 바꿈으로써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겨울왕국의 프로듀서인 피터 델 베초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빅 히어로의 프로듀서인 로이 콘리도 인터뷰에서 라세터의 열정적인 지원이 스튜디오의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말하며 비슷한 코멘트를 남겼다. #

그가 처음으로 제작에 관여한 작품인 로빈슨 가족은 평과 흥행 모두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볼트공주와 개구리의 흥행 성공[12]을 기점으로 재기를 시작하여 라푼젤, 주먹왕 랄프겨울왕국까지 연달아 성공시킴으로써[13],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할 뻔했던 디즈니를 완벽하게 부활시키고 제 2의 디즈니 르네상스디즈니 리바이벌을 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쫓아냈던 회사가 훗날 맞닥뜨린 위기를 자기 손으로 직접 끝낸 것이다. 묘하게 스티브 잡스랑 겹친다

2011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명에 포함되었다.

2018년까지 CCO(Chief Creative Officer)로서 모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지휘하며[14], 애니메이션 제작 기획 역시 에드 캐트멀(픽사 CEO)과 함께 심사했다.

2019년부터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으며 2022년 작품 《럭(Luck)》으로 업계에 다시 복귀했다. # # #

3. 작품

작품명 옆에 세부적인 직책이 첨언되지 않은 작품은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한 작품들이다.

픽사의 경우에는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부터 존 라세터가 관여하지 않았으며 디즈니의 경우에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부터 존 라세터가 관여하지 않았다.

3.1. 디즈니 계열

3.1.1. 픽사


그 외 인크레더블 2까지의 모든 픽사 작품에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하는데, 이 사람이 하차하고 토이 스토리 4 이후 피트 닥터가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3.1.2.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3.1.3. 디즈니툰 스튜디오

3.2.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

4. 사건 사고

4.1. 성추행 논란과 디즈니 퇴사

2014년에 토이 스토리 4의 제작이 발표되면서 카 2 이후로 오랜만에 감독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2017년 말에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 이후 미국 전역에서 성추행 의혹이 나오면서 같이 성추행 의혹이 터졌고 본인이 이를 인정하며 6개월간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원래 연출을 맡게 될 예정이였던 토이 스토리 4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시 쿨리로 변경 되었다.

결국 디즈니는 2018년 12월 31일자로 라세터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퇴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회사를 나가기 이전까지는 사내에서 컨설팅 역할만 맡을 거라고. #

그리고 2019년 초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16] 대표로 부임하면서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 이로 인해 엠마 톰슨은 원래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의 신작 '럭(Luck)'에서 더빙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존 라세터의 영입 소식에 분개하며 영화에서 하차했다.

5. 여담

파일:포춘지 존 라세터.jpg

파일:external/3.bp.blogspot.com/john_lasseter_hawaiian_shirt_collection.jpg

[1] 출처[2]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그 당시 스타워즈에 충격을 먹은 동료 애니메이터들이 대부분 VFX 쪽으로 직업을 바꾸려고 했다고.[3]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의 사망과 함께 디즈니의 핵심 애니메이터들이 전부 은퇴할 무렵으로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였으며 애니메이션 그 자체에 대한 인식도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오락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타워즈에 열광을 하던 광경은 그에게 애니메이션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새롭고 혁신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4]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원로 애니메이터.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 굵직한 작품을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라푼젤을 작업한 후 디즈니를 퇴사했고, 2013년 디즈니 레전드에 올랐다.[5] 이 때 만든 테스트 애니메이션이 Where The Wild Things Are(1983)이다.[6] 월트 디즈니의 맏사위이며 1978년부터 사장직을 맡았고 1983년부터 CEO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장인어른과 달리 사업적 수완은 부족했는지 론 밀러가 이끌었을 당시의 디즈니는 그야말로 내리막길 그 자체였고 이같은 침체기는 마이클 아이스너에게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계속되었다.[7] 실제로 토이 스토리의 대성공 이후 헐리우드에서는 2D 애니메이션 인력을 대폭 축소하고 3D 애니메이션의 투자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어떤 점에서는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픽사 스토리(The Pixar Story)라는 다큐에서 론 클레멘츠(인어공주알라딘의 존 머스커 감독의 친구)가 CG 애니메이션 때문에 많은 2D 애니메이터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훗날 곰돌이 푸 2011 이후 디즈니가 더이상 2D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면서 이 불안감은 결국 실현이 되었다.[8] 라세터가 디즈니에서 쫓겨난 지 1년 후 디즈니의 임원진들이 싹 물갈이되었고 새롭게 영입된 마이클 아이스너제프리 카첸버그는 단편 틴 토이를 보고 가능성을 엿본 후 라세터에게 디즈니로 다시 돌아오라고 계속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라세터는 '지금 디즈니로 가면 감독 자리는 얻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 남는다면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9] 이후 픽사로 개명한다.[10] 이후 드림웍스가 '신밧드-7대양의 전설'의 흥행실패로 2D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하게 되면서 고자본이 들어간 극장판 2D 애니메이션은 사실상 사양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당황한 디즈니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보물성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지만 연이은 흥행 실패로 카우 삼총사 이후 5년 후에 나온 공주와 개구리곰돌이 푸 리메이크판을 낸 후로는 극장판 장편 2D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했다.[11] 스튜디오 내의 재무팀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영화 제작진이 자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게끔 회사 구조를 재편하였다. #[12] 다만 이 과정에서 의견 충돌로 비뮤지컬 계열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릴로와 스티치의 감독이자 스티치의 성우인 크리스 샌더스을 해고했다. 그는 이후 드림웍스로 들어가 드래곤 길들이기를 만든다.[13] 곰돌이 푸(2011)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 면에선 아쉽게도 제작비 정도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14] 현재 모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에 'Executive Producer'로 이름을 올렸다. 바지사장은 아닌 것이, 제작 인터뷰마다 존 라세터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Let It Go의 영상 제작 과정이나 올라프의 캐릭터 형성 과정.[15] 당초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하였으나 제작 중간에 쫓겨났기 때문에 크레딧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16] 영화 제작사 스카이댄스 미디어의 신설된 애니메이션 부서다.[17] 라푼젤의 빛 효과와 겨울왕국에서의 각종 얼음결정, 눈 효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18] 아카데미 시상식의 연설에서 '아무도 마크 데이비스나 올리 존스턴에게 '무슨 연필을 썼느냐'고 묻지 않는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라세터가 올리 존스턴에게 연필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는 말이 있다(...).#[19] 카 시리즈는 픽사 작품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완구 판매량은 어마어마하다.[20] 디즈니의 메인 작품이 아닌 홈비디오용 후속작품을 제작하는 스튜디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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