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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철(製鐵)이란, 철광석 또는 토철, 사철에서 철을 추출하여, 각종 철재를 만드는 공정을 말한다.철기문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족의 융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철기는 생활도구에서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인 중요성이 높았다. 특히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고대에는 철의 생산이 곧 국가의 힘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항이었던 만큼 각국은 철의 생산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였으며, 제철공정에 다양한 기술들이 접목 되었다.
제철이라는 것은 야금술의 한 분야이고, 철광석 또는 사철로부터 철을 추출하고 정련해서 각종 용도와 성격에 맞게 철의 조직을 필요한 형태로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이러한 제철기술은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분야이며, 이와 같은 야금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야금학 또는 금속 공학이라고 하며, 제철, 야금 기술을 주체로 하는 공업을 금속공업이라고 한다. 금속공업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우리 나라에서 중요 산업 중 하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서 철강공업은 매우 큰 생산량을 보유하고 있다.
2. 역사
2.1. 한국사의 제철
2.1.1. 삼국시대
한국 고고학에서 철기시대란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서기전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서기 300년경까지를 말하는 만큼, 기원전 1세기에서 4세기에 철의 제련과 제조를 전역에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었다.제철작업의 시작은 우선 철광석 또는 사철이나 토철을 채취하는 채광 작업부터 시작되고, 제철에 주로 쓰이는 철광석은 자철석, 황철석, 갈척석, 적철석 등이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주로 자철석과 적철석이 사용되었다. 사철같은 경우 해안이나 강변 등에서 주로 채취였는데, 주로 자철광이 주성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는 적철광이나 갈철광, 티타늄 철석이 혼합 되어 있다.
고대 한국의 제철 과정에 대한 연구는 주로 한성백제 유적을 통한 추론에 의존하고 있다. 삼국시대 제철소 유적지를 통하여 추론해 보면, 채광된 철광석들은 철 성분이 높은 고급 철광석, 사철을 선별하는 과정인 선광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련에 앞서서 광석을 선광하면 운송의 노동력이 절감되고 제련 공정에서 금속 손실과 제련비 감소 등의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다음 공정으로는 배소 작업에 들어가는데, 배소는 광석이 용해되지 않는 정도의 고온으로 철광석 표면에 화학 반응을 일으켜 환원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고, 광석 표면에 균열을 일으켜서 파쇄하기 용이하게 하는 공정이다. 철광석이 쉽게 파쇄되면, 제련을 할 때 철광 내부까지 쉽게 온도가 전달이 되고 이는 제련 비용을 감소시키며 운송비용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배소과정이 끝나면 제련공정을 거치게 된다. 철광석을 용광로 내에서 목탄[1]을 매개로 환원시켜 철을 얻는 과정이다. 제련공정에서 철의 탄소량과 온도등 용광로의 조건에 따라 탄소량이 높은 선철과 탄소량이 낮은 괴련철이 생산된다. 그 중간단계인 반환원괴가 생성되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철괴는 정련공정에 들어가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추론이 각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가장 흔하게 받아들여지는 고대 한성백제의 제련법은 접쇠단조가공이다. 접쇠단조가공이란 말 그대로 가열한 쇳덩이를 단조로 편 다음, 접어서 다시 두들기를 반복하는 방식이다. 쇠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쇠 내의 탄소량을 조절한다. 주목적은 철을 성형하는 것으로 고대 방식으로는 철을 녹여 액체로 만들 수 없었기에 이러한 방법이 아니면 철을 변형시킬 수 없었다.
반면 한 논문에서는 한성백제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초강법이 전래되어 운용되었다고 본다.관련 논문. 초강법에 대해서는 세계사 부분에서 후술한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명확한 초강로가 발굴된 사례가 아직 없어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오산 수천동, 포천 중리 등에서 발굴된 철기의 미세조직상 초강법으로 제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초강제법이 있었을 가능성과 개연성은 충분하다.
일본 정창원에서 소유하고 있는 신라 도검으로 추정되는 유물의 경우 소량의 티타늄이 섞여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로 보아 신라 또한 사철로 된 철기 또한 만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문화재청 산하기관에서 고대 삼국시대 용광로를 복원하고 제련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고 민간에서도 소수나마 다양하게 고증을 거쳐 연구하고 있다.
가야도 주 수출품이 철이고 지표 유물은 덩이쇠. 한국 최초로 발견된 고대 제철 유적인 부산 동래 패총이 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제철유적으로는 화성 기안리유적, 진천 석장리유적, 충주 칠금동유적, 밀양 사촌유적, 임천리유적 등이 있다.
2.1.2. 남북국 ~ 고려시대
현재 고려시대 철광석을 이용한 제철유적으로 충주 다인철소가 발견되었다. 이은철 전통제철연구가는 해당 유적지의 연구 결과로 현재 학계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화로를 만들고, 처인성에서 발견된 고려칼을 연구, 복원하였다.[ZOOM UP] 전통 제철기술 복원한 이은철 장인의 구슬땀2.1.3. 조선시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은 초기부터 광물을 채굴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철장은 안동·합천·용궁·산은·무주·영덕·무안·고산 등 17개소가 있었고, 이들 철장은 제련소에서 농한기에 광석을 취련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세종 당시 조선의 철의 산지는 34개소인데 이 가운데 사철을 생산하는 곳이 21개소라고 하였다.조선시대의 철은 크게 생철과 숙철로 나눴다. 생철은 망치로 두드리면 깨져서 주조로 가공하는 쇠, 숙철은 망치로 두들겨서 단조하는 쇠를 말했다. 생철은 무쇠라고도 불렀고, 숙철은 시우쇠라고도 했다. 시우쇠는 연철에서부터 연강까지의 스펙트럼이 포함된다. 조선의 제철법은 서구의 것과 달랐기 때문에 서구의 철 분류법에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의 철광 제련법은 다음과 같다. 쇠부리가마에 철광석을 넣고 1,200∼1,300℃ 사이에서 장시간 가열하면 묵철 또는 잡쇠 덩어리(선철)가 바닥에 생긴다. 이 덩어리를 다시 강엿쇠둑과 판장쇠둑에서 잘게 부수고 가열한 뒤 다시 두드리면 숙철이 된다. 맨 처음 만들어진 시우쇠를 신철(薪鐵)이라고 하는데, 이 신철 1근을 두드려 정련하면 품질이 열등한 정철 4냥을 얻었다.
이러한 괴련철 위주의 제철술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것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이 때문에 조선시대 전통 제철술을 재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서는 서구의 고대 제철 기술 재현 연구를 참고하기도 하였다.[2]
언제 실전되었는지는 기록의 부족으로 불명확하나, 조선 시대에는 고대 한성 백제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초강법이나 관강법은 사용되지 않았고 단조가공을 통해 주로 제작되었다.[3]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기록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우리나라의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비밀스레 전해지는 제철법이 있는데 자기도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대강 들은 바로는 그것이 중국 옛 기록에 있는 관강법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증할만한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된 바가 없다.[4]
2.1.4. 구한말
| 기기국 번사창 건물 |
당시 기기창에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번사창(飜沙廠)에서 쇠를 주조했으며, 숙철창(熟鐵廠)에서는 단조 작업을 했다. 1903년 건설된 용산 군기창에도 각종 문헌에서 주조기기와 도가니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두 시설은 구한말 국가주도의 공업시설에서 근대적 제련기술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실제로 1896년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은 기기창에서 크루프 포와 개틀링 기관총의 수리 및 부품 제작이 가능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다만 이들에서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생산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제철소가 아닌 조병창, 즉 군수공장이었기 때문.
(水鐵會社請許) 南村居前郡守李駿鎬氏等이 水鐵會社를 設始고釜鼎耒耟等物을 製造 股本을 每股五十元式限千股오稅金은 春秋兩等農部에 納고本社外에 他人이 鑄造 器具 農部에 收入야 公用케기로 認許를 請얏더라
(수철회사 인가 청원)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전 군수 이준호(李駿鎬) 씨 등이 수철회사를 설립하고, 가마솥, 솥뚜껑, 쟁기 등 물건을 제조하려 하며, 자본금은 주당 50원씩으로 1,000주를 한도로 하고, 세금은 춘추 두 차례 농상공부에 납부하며, 이 회사 외의 다른 사람이 주조한 기구는 농상공부에 납부하여 공용으로 쓰게 하기로 하여 인허가를 요청하였다.
1900년 12월 1일자 황성신문
(수철회사 인가 청원)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전 군수 이준호(李駿鎬) 씨 등이 수철회사를 설립하고, 가마솥, 솥뚜껑, 쟁기 등 물건을 제조하려 하며, 자본금은 주당 50원씩으로 1,000주를 한도로 하고, 세금은 춘추 두 차례 농상공부에 납부하며, 이 회사 외의 다른 사람이 주조한 기구는 농상공부에 납부하여 공용으로 쓰게 하기로 하여 인허가를 요청하였다.
1900년 12월 1일자 황성신문
한편 대한제국 시기부터는 제철기술을 사용한 본격적인 회사설립시도도 이어졌다. 가장 먼저 설립이 시도된 것은 수철회사(水鐵會社)이다.[8] 당시 회사설립운동이 대부분 그렇듯 관민합작회사로, 권중현이나 신기선과 같은 관료들과 길영수와[9] 같은 보부상들이 함께 구성한 회사였다.
그러나 수철회사는 주식회사의 형태를 띠었으나, 철물제품을 직접 제조하기보다는 국내의 여러 대장간에서 제조한 철물을 수매하고 세금을 걷던 것으로 보아 실상은 일종의 도고회사였다고 보여진다. 궁내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폐단이 심하였는지 정부에서는 수철장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듬해인 1901년 7월경에 수철회사를 혁파한다.
西署龍山新倉內契에 水鐵店을 新設고外國卒業匠工을 두어內外國水鐵과 土鐵로 釜鼎 耒耟 水輪 爛爐 車輪과온갓 機械와 器皿을 製造放賣堅固고 價文도 廉오니僉君子 購買시기를 望홈
九成社 廣告
직역 번역
서서 용산 신창고 안 계약지에 수철점을 새로 설치하고, 외국에서 수료한 장인을 두어 내외국의 수철 및 토철로 가마솥, 쟁기, 수차, 화로, 수레바퀴와 온갖 기계와 기물을 제조·판매하니, 견고하고 가격도 저렴하오니, 여러 군자들께서는 구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구성사 광고
1901년 10월 22일자 황성신문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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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 번역
서서 용산 신창고 안 계약지에 수철점을 새로 설치하고, 외국에서 수료한 장인을 두어 내외국의 수철 및 토철로 가마솥, 쟁기, 수차, 화로, 수레바퀴와 온갖 기계와 기물을 제조·판매하니, 견고하고 가격도 저렴하오니, 여러 군자들께서는 구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구성사 광고
1901년 10월 22일자 황성신문 광고
鐵店請認漢洞居 李興宇氏가 西江新倉內에 水鐵會社를 設고各項 鐵器를 鑄造 社名은 九成이라 고每股資本은 四百元이라農商工部에 認許를 請얏더라
철물점 인허가 청원
한동에 거주하는 이흥우 씨가 서강 신창 안에 수철회사를 설립하고, 각종 철기류를 주조하려 하며, 회사 이름은 '구성(九成)'이라 하고, 주당 자본금은 400원이라 하여 농상공부에 인가를 청원하였다.
1901년 11월 9일자 황성신문 기사
철물점 인허가 청원
한동에 거주하는 이흥우 씨가 서강 신창 안에 수철회사를 설립하고, 각종 철기류를 주조하려 하며, 회사 이름은 '구성(九成)'이라 하고, 주당 자본금은 400원이라 하여 농상공부에 인가를 청원하였다.
1901년 11월 9일자 황성신문 기사
그러나 관민합작 수철회사의 폐업 몇 달 후부터 새로운 철공소가 영업을 시작한다. 이흥우라는 사업가가 자본금 400원으로 설립한 구성사(九成社)라는 이름의 이 회사는 용산 일대에 자리를 잡고 철기를 주조했다. 직원으로는 외국에서 유학하며 아마도 근대 야금술을 익히고 왔을 기술자를[10] 두었다.
平北寧邊郡有志紳士 明以恒 申泰朝 諸氏가 發起하여 鐵工株式 會社를 設立고 技手 美國에 多年留學야 鐵工學科를 卒業 張壽鎭氏로 雇聘여 現在株金을 募集대 本月拾八日發起會에 募集 株金이 壹千三百餘元에 達얏다더라
평북 영변군 유지 신사 명이항, 신태조 제씨가 발기하여 철공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기술자는 미국에 다년 유학하여 철공학과를 졸업한 장수진 씨로 고용하여, 현재 주금을 모집하는데, 금월 18일 발기회에서 모집한 주금이 1,300여 원에 달하였다더라.
1909년 4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평북 영변군 유지 신사 명이항, 신태조 제씨가 발기하여 철공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기술자는 미국에 다년 유학하여 철공학과를 졸업한 장수진 씨로 고용하여, 현재 주금을 모집하는데, 금월 18일 발기회에서 모집한 주금이 1,300여 원에 달하였다더라.
1909년 4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雜報●鉄工器機到着寧邊郡居 明以恒其他 紳士 諸氏가 實業을 發達키 爲야 鉄工場을 設置 計料로 鉄工의 所用되 機械를 日本에 注文얏더니 日昨 仁港에 到着 卽히 寧邊으로 運去다 當地附近의 有志人士들이 該事業에 對야 同情贊成 者가 多數에 達얏슨 則 完全就緖 期望이 有다더라
잡보 ● 철공 기계 도착
영변군 거주 명이항(明以恒) 그 밖의 신사 제씨가 실업을 발달케 하려 하여 철공장을 설치할 계책으로, 철공에 소용되는 기계를 일본에 주문하였더니, 어제 인천항에 도착한 바, 곧 영변으로 운반하였다 하며, 당지 부근의 유지 인사들이 해당 사업에 대하여 동정 찬성하는 자가 다수에 달하였은즉, 완전한 성과를 이룰 기약이 있다고 하더라.
1909년 7월 19일 황성신문 기사
잡보 ● 철공 기계 도착
영변군 거주 명이항(明以恒) 그 밖의 신사 제씨가 실업을 발달케 하려 하여 철공장을 설치할 계책으로, 철공에 소용되는 기계를 일본에 주문하였더니, 어제 인천항에 도착한 바, 곧 영변으로 운반하였다 하며, 당지 부근의 유지 인사들이 해당 사업에 대하여 동정 찬성하는 자가 다수에 달하였은즉, 완전한 성과를 이룰 기약이 있다고 하더라.
1909년 7월 19일 황성신문 기사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민족자강을 통한 독립 움직임이 거세게 일면서 수많은 민족자본 회사들과 교육시설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영변군의 사업가인 명이항이[11] 주도하여 제철회사를 세우고자 했다. 자본금은 구성사의 3배인 1,300원이었다. 이 계획은 지역 인사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준비 역시 꽤나 철저하게 추진되어 일본에서 철공기계를 수입하고 미국에서 야금술을 수학한 장수진이라는 기술자를[12] 실무진으로 채용했다. 이듬해인 1910년 6월 24일 박은식이 기고한 여행기에 따르면 명이항의 제철회사는 여타 사업가들의 모범이 될 만큼 잘 운영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1.5.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공업의 일환으로 본격적인 일관제철소가 설치되었다. 1910년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건함 경쟁이 극에 달하자, 일본은 1915년도부터 황해도의 재령 철광과 은율 철광의 고품위 철광석을[13] 가지고 일관제철소를 설립하려는 작업에 들어간다. 부지는 진남포 인근의 겸이포(송림시)로 선정되었다.1918년 완공된 이 겸이포제철소는 한반도 최초의 본격적인 제철소로, 미쓰비시가 운영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주요 강판을 납품하던 기업이기도 하였는데, 특히 모기업 미쓰비시의 나가사키 조선소에 상당량의 강판을 수출했다. 그러나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일본해군의 건함계획이 파토나자 강재 생산은 중단하고 한동안 선철 생산에 집중했다. 그러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군축조약을 탈퇴하고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폭주하기 시작하자 다시 해군에 강재를 납품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북한 정권의 주요 제철소가 되었다. 현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바로 이곳이다.
한편 1930년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일본해 중심발전론'을 추진하며 함경도를 공업화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청진제철소가 건설되었다. 본래 일제는 안산-번시 철광대와[14] 푸순시 일대의 탄광을 사용하는 제철소를[15] 신의주에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장진강수력발전소가 생산하는 막대한 양의 전기 및 무산철산의 거대한 철광석 매장량을 활용할 목적에서 청진시가 부지로 낙점된 것. 그러나 완공 자체는 태평양 전쟁기에 끝났기에 일본은 얼마 운영하지 못했으며, 해방 후 그대로 북한이 입수하여 김책제철련합기업소라는 이름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태평양 전쟁 중반 이후인 1943년부터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곳곳의 빈광 근처에 5~20톤 규모의 소규모 고로들을 대량으로 지어 전시수요를 충당하고자 했다. 한반도에는 해주시, 진남포시, 겸이포, 청진시, 삼척시, 이원군, 평양시, 원산시, 평안남도에 총 75기의 고로가 설치되었다. 역청탄 부족으로 인해 이 소형고로들은 무연탄 또는 무연탄에 제철부산물을 섞어 만든 연해탄이라는 저질 연료를 사용해 돌아갔다. 코크스를 사용할 수 있던 곳은 상술한 일관제철소들이 근처에 이미 존재했던 겸이포와 청진뿐이었다. 이 제철소들 역시 해방 이후 남북한이 적산 기업으로 분류해 인수한다.
2.1.6. 광복 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제철산업은 상술한 소형고로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본이 설치한 일관제철소들는 전부, 그리고 소형고로들은 대부분 북한 소유가 되었으나 딱 하나, 삼척시의 삼화제철만은 예외였다. 인근의 빈광인 삼화광산의 철광석과[16] 강원도 무연탄을 원료로 돌아가던 이 광산은 일본 사업가 고레가와 긴조가 1943년에 건설했다. 이름 역시 원래는 고레가와제철이었으나, 전후 미군정을 거치며 일본인들이 쫒겨나고 삼화제철공사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게 된다. 20톤짜리 고로 수 개가 존재하였던 이 제철소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대한민국의 유일한 선철 생산 공장이었다.삼화제철은 6.25 전쟁 당시 피해를 입고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 한동안 수리해야만 했다. 이후 중화학공업과 국방건설을 추진하던 대한민국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에서 큰 기대를 가지고 재차 본격적인 운영을 시도했으나 삼화제철의 고로가 규모가 너무 작아 수요를 맞추지 못했다. 거기다 시설의 노후화로 제대로 된 운영이 힘들자 실망한 박정희는 동국제강 등 당시 한국에 존재하던 사설 제강소들과 접촉하며 일관제철소 사업을 구체화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일청구권자금까지 유용해 가며 건설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이다. 포스코는 한국의 중공업 건설에 필요한 철 대부분을 공급하며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1992년에는 제2제철소인 광양제철소까지 건설한다.
한편 1938년에 세워진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 역시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인수되어 1956년 대한민국 최초의 제강시설을 구축했다. 이후 1978년 현대그룹에 인수되어 다른 제강소들을 합병하며 크기를 불려간 인천제철은 일관제철소 사업에도 도전했으나 그때마다 포스코에 밀려 계속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계속 포스코에 선철을 의존할 수 없었던 현대는 21세기가 되어 기어이 일관제철소 건설에 성공했다. 그것이 현재의 당진제철소이다.
2.2. 세계사의 제철
강철의 대량생산은 산업 혁명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힐 만큼, 철을 비롯한 금속의 양산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대약진운동 시절 대표 오류로 치부된 토법고로조차도 중세 중~후기에 들어서야 만들 수 있었다. 천 년 이상 강철을 마음대로 생산하지 못했던 유럽과 원시적 침탄로를 오랫동안 사용한 일본 등의 문헌은 강철 제조법의 어려움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반면, 아시아에서는 중세 말까지도 꾸준히 쓰였던 단련강 제조법이 인도-중국에서는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이미 완성되었다. 유럽에서는 도가니 제강법, 반사로 기술, 베세머 전로법 등이 18세기~19세기에 개발되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고대부터 원리적으로 같거나 유사한 수준의 제강 기술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반사로와 같은 구조의 제철로는 중세 일본에도 존재했고, 도가니 제강법과 같은 원리의 제강법은 고대 인도에도 있었다. 베세머 전로법과 원리가 같은 제강기술(초강법)은 고대 중국에 이미 존재했다. 한나라 시대에 발명된 초강법은 한국의 원삼국시대에도 한성 백제가 수입하여 운용했다.
세계 문명은 일반적으로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갔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청동기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서 전파된 철기를 바로 사용했다. Primitive Technology와 같은 유튜브 채널에서도 청동기 기술을 생략하고 바로 철기를 사용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으며, 대체로 도가니법을 이용한다. 이는 청동기를 위한 동과 주석이 흔치 않은 반면 철은 흔해서 쉽게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1. 고대
고온을 얻기 어려운 초창기의 철기는 철을 녹이는 대신에 직접 환원법을 통해 1200℃ 정도에서 처음부터 고체인 해면상, 그러니까 스펀지 형태의 괴철(塊鐵, bloom)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17] 자연흡기식 소형 괴철로(bloomery, 블루머리)에 이미 한번 구운 철광석을 넣은 뒤에 불을 지피면, 불순물이 녹아서 빠져나가며 슬래그를 형성하고, 녹지 않은 철은 스펀지 구조로 성겨 있는 괴가 된다.서양의 역사학자들이 재현을 해 본 결과 꼭 숯이 아니어도 화력이 좋고 잘 말라 있는 풀이나 나무를 써서 제철 작업이 가능하기는 하나, 숯 자체는 만들기가 어렵지 않아서 인류가 금속보다 먼저 쓰기 시작했으리라 여겨지기에 숯을 사용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해면상 철괴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으므로, 보통은 망치로 때려 부순 뒤에 경험 많은 대장장이가 각 조각을 검사하여 불순물이 많은 부분은 버리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 또 다시 괴철로에 넣어 불순물을 빼내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초기 괴철로는 1회용인 경우가 많아, 칼 2~3자루를 만들 철을 얻기 위해 건장한 남성 대여섯명이 달려들어 일주일 가량을 꼬박 투자해야 되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이었다.
이렇게 얻은 해면상 철괴는 내부에 기공이 많고 여전히 불순물이 상당량 함유되어 있었다. 이런 기공들은 하나하나가 파단의 시발점이 되는지라 기공이 많은 철을 그대로 썼다간 뽀각…이기 때문에, 불에 달군 뒤에 미칠 듯한 망치질을 통해 이런 기공을 눌러서 도로 접합시켜 붙여야 쓸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슬래그가 계속 떨어져 나가며 순도가 높아진다. 이러다 보니 철을 완성하는 데에 많은 노동력이 소모되었다. 이렇게 얻은 탄소 함유량이 매우 낮은 철을 '연철(練鐵, wrought Iron)'이라고 한다.[18][19]
아주 고대에는 한번에 3 kg 미만의 철만 소량 생산할 수 있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괴철로의 크기가 점차 커져서 고대 로마 시대 쯤이 되면 한번에 10 kg 전후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괴철로의 크기가 이 정도로 커지면 연료로 숯을 써야만 하며, 잔뜩 쌓여 있는 철광석과 숯 더미 깊은 곳까지 공기가 침투할 수 있게 공기를 강제로 과급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더미의 안쪽은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서, 일부는 탄소 함유량이 연철보다 높은 강철이나 선철이 생성된다. 제품을 제작할 때 철괴을 망치로 미친듯이 때려 모양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단조 가공이 불가능한 선철을 그냥 버렸고, 기껏해야 저탄소강까지 사용했다.
현대에도 중탄소강 이상의 강철은 공구와 같은 특수 목적에나 쓰고, 철근이나 자동차와 같은 보다 일상적인 물품은 가공이 쉬운 저탄소강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고대의 철제품 대부분은 그냥 연철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강도가 높은 강철을 만드려면 연철에 탄소를 더 침투시켜야 한다. 연철은 거의 1500℃에서 녹기 때문에 당시 기술로는 연철을 녹여서 무엇인가 해보기 힘들었고, 연철 조각들을 숯과 섞은 뒤에 강한 불로 1주일 가량 구워서 금속의 표면에 탄소를 침투시켰다. 이런 침탄 공법의 최적 온도는 900℃이지만, 740℃ 정도에서도 아주 느리게나마 침탄이 일어나기는 한다. 그러나 표면만 탄소 함유량이 높아졌지 내부는 여전히 연철이어서 제품이 균일하지 않으며, 연료가 많이 드는 값비싼 과정이었다. 이렇게 침탄 처리한 연철은 그냥 쓸 수 없고 가열해서 때리고 접고 꼬아주어서 속의 연철층과 겉의 강철층이 서로 켜켜히 겹치게 해서 제품을 만들었다. 아니면 연철이나 저탄소강으로 그냥 칼을 만든 다음에 마지막에 칼날 부분만 침탄시키기도 했다.[20]
고대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비교적 균일한 강철을 생산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서 생산했던 다마스쿠스 강이고, 서양에서도 기원전 300년 경부터 현재의 오스트리아 일대에서 노릭 강철(Noric steel)을 만들기도 했으며, 제정 로마 시대에는 이베리아 강철이 유명하기도 했다. 이런 강철은 대부분 특정 지역에서 나오는 특수한 철광석을 이용한 것으로, 아직 연구가 충분하지 않으나 노릭 강철과 같은 경우는 이 지역에서 나오는 망간이 풍부한 능철석(siderite)을 괴철로에서 제련하면 자연스럽게 품질 좋은 강철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그러나 이렇게 지엽적으로 나오는 강철의 양은 로마 제국같이 거대한 국가에서 소비하기에 부족하여, 강철을 아시아 쪽에서 수입하거나 그냥 연철 제품을 썼다. 일부 바이킹 소드는 무역이 활발한 바이킹이 아시아에서 강철을 수입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의 덴마크 남부와 알자스-로렌 지역에서 일부 나오는 철광석으로 강철을 만들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2.2.1.1. 중국
괴철로 제철법과 표면침탄을 이용한 제강법을 중세까지도 사용했던 서유럽과 달리, 고대 중국에서는 주철을 만들고 주철에서 탈탄, 즉 탄소를 제거하여 강철을 만드는 법을 이미 발명하였다. 이러한 제강법은 명나라 시대 백과사전 천공개물에서는 초강법(秒鋼法)이라고 이름 붙였다.초강법은 녹인 주철에 잘게 빻은 고순도 철광석이나 붉은 녹을 첨가하고 공기 중에 노출된 상태에서 막대로 저어주는 것으로, 고순도 철광석과 녹은 즉 산화철덩어리이므로 고온에서 산화철이 분해되며 내뿜는 산소가 탄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어 증발하며 탈탄 작용을 한다. 공기 중에 노출시켜 휘젓는 것 역시 쇳물 속의 탄소를 공기 중의 산소와 접촉시켜 탈탄을 하게 된다. 이러한 초강법은 서구는 산업혁명 시대에 발명한 베세머법과 원리가 같다는 평가가 흔히 나타난다. 일설에서는 반사로법과 같다고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강법은 원리 상으로 보면 매우 진보한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약점 때문에 중국에서 강철이 대량생산되지는 못했다. 문제의 원인은 무쇠는 비교적 낮은 온도인 1,200도에서 녹지만, 무쇠로부터 탄소를 제거한 강철은 1,500도 수준에서 녹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쇠를 공기와 접촉시켜 어느 정도 탄소를 산화시키면 곧 굳어져서 탈탄 작용이 멈췄다. 이 문제는 명나라 시기에는 초강을 하는 로의 구조를 바꿔서 온도를 올려 해결이 되긴 했는데, 그러자 탈탄효과가 지나쳐 강철이 아니라 연철만 생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휘젓는 과정에서 공기가 철에 유입되어 기포가 형성되기 쉬웠다. 이것은 철의 조직을 불균질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즉, '초'강법이라는 강한 어감 때문에 근대 강철과 맞먹는 제련술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그냥 단조하는 게 더 품질이 좋았다는 소리다.
또한 원리를 모르고 경험에 의존하던 당대 기술은 또 퇴화를 불렀다. 초기에 탈탄제로 철광석이나 녹슨 철을 첨가하던 것이 불명확한 이유로 황토흙을 첨가하는 것으로 변했는데, 황토흙은 산소를 내놓아 탄소를 태워서 날릴 수 있었으나, 동시에 잔존 규소가 탄소와 반응하여 악질 슬래그를 생성해 품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초강법으로 얻은 기포와 슬래그가 다량 함유된 고체 상태의 강철괴에 다시 미칠 듯이 망치질을 해서 내부 조직을 다듬은 뒤에야 쓸 만한 강철괴를 얻을 수 있었다. 초강법과 비교되는 기술 중 하나인 반사로법은 롤러에 철을 넣어 빠르게 망치질하는 압연법이 함께 개발되었으나, 중국에서는 그냥 사람이 망치로 두들겼다.
이러한 강철은 직접 환원법과 침탄으로 얻은 강철에 비해 성분을 조절할 여지가 적어 숙련된 장인이 침탄법과 접쇠로 만든 철에 비해서도 질이 낮았다. 무협에서 나오는 백련정강이 이런 초강법으로 만든 철을 망치질하여 단련한 철로, 백련강이라는 표현은 한나라 시대의 기록에 나온다.
북송 시대에는 제철법으로 관강법(灌鋼法)이 존재[22] 했는데,이것은 주철과 연철을 한데 모아 융해하는 제철법이다. 후술할 서구의 도가니법과 원리상 같은 것으로, 조직을 미세관찰해도 현대의 공구강과 비슷한 수준의 우수한 질의 강철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관강법은 남북조 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관강법으로도 강철을 대량 양산하지는 못했는데, 관강법의 주목적은 탄소량을 조절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녹이기 힘든 연철을 주철과 함께 섞으면 연철도 쉽게 녹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녹여서 기포와 슬래그를 배출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관강법으로 강철이 생산되는 것은 주철을 더 많이 섞어 녹였을 때의 경우였는데 후대로 갈수록 연철을 더 많이 써서 관강법으로 연철이 주로 생산되게 된다.
2.2.1.2. 인도
인도는 다마스쿠스 강의 사례에서 보이듯 고대에서부터 도가니법과 유사한 제강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강은 제법만이 아니라 지역의 철광석의 성분과도 관련이 큰 것이었고, 광석이 고갈되자 제작법도 실전되었다.2.2.2. 중세
유럽은 중세 초중반에 철광석을 제련하기 위해 계속 전통적인 괴철로를 사용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괴철로를 석재로 만들어 계속 재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가 중세의 후반부인 13세기에 현재의 스웨덴과 프랑스 동부~독일 서부를 중심으로 2가지 새로운 제철 공법이 보급되었다. 첫번째는 수차(물레방아)를 이용한 풀무로 공기를 강제 과급[23]하여 규모를 최대 300kg급까지 키운 대형 괴철로이고, 다른 하나는 선철을 대량 생산하는 고로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대략 이 시절부터 석회석이나 조개 껍질을 용제(flux)로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용광로 안에 넣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24]13세기 서양은 사회가 안정되고 삼포제 농업으로 농작물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인구가 폭증하는 동시에 상공업과 국제 무역이 발달하고 있었기에, 철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14세기부터는 백년전쟁으로 대표되는 끊임없는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기는 했으나, 오히려 전쟁은 무기를 만들기 위한 더 많은 철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4세기 말~15세기 초가 되면 유럽 전체로 이 새로운 제철법들이 퍼져 나갔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일부 학자들이 십자군 전쟁으로 획득한 다마스쿠스 강을 재현해 보려는 노력과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을 통한 동양 제강 기술의 유입을 꼽기도 하지만, 중세 말기에 새로 도입된 제철 기법으로 다마스쿠스 강을 전혀 만들 수 없는 데다가, 신기술이 처음 나온 곳이 몽골이 침공했던 동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반박을 받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라피탄(Lapphyttan)에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로의 추정 연대가 몽골 제국의 성립보다도 더 이전인 1150년까지도 올라간다.
중세 말기에 등장한 두 기법 중에 동 괴철로는 예전과 같이 연철을 만들어서 추가적인 공정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지만, 선철(주철 혹은 무쇠)을 대량 생산하는 고로는 필연적으로 탄소 함유량을 줄이는 후공정이 필요했다. 물량으로 승부하는 중국 같은 경우는 병사들에게 주철제 무기를 지급하기도 했다지만, 서양은 원래 주철을 많이 쓰지 않았던 데다가 특히 무기는 충격을 받았을 때 잘 깨지는 주철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13세기부터 정련 단조로(finery forge)가 도입되었다.
가끔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주철을 수력 망치로 두들겨서 강철로 변한시켰다는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단조와 탄소 함유량 사이에는 별다른 관계가 없고, 정련 단조로의 기본 원리는 사실 괴철로와 비슷하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선철 막대에 공기를 왕창 불어넣으면서 다시 녹였다가 특정한 속도로 식히면,[25] 스펀지 상태로 엉기게 성긴 연철 덩어리가 나온다. 망치질은 그 다음에 하는 것으로, 스펀지 형태로는 그대로 제품을 만들 수 없는 데다가 불순물로 이루어진 슬래그가 잔뜩 껴 있기 때문에, 달구어 망치질을 하면서 연철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고 슬래그를 떼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량 생산이 목적이므로 인력으로 망치질을 했다가는 예전에 쓰던 괴철로에 비해서 딱히 장점이 없다. 그러다가 15세기 벨기에 지역에서 수력을 이용한 망치가 개발되어 비로소 대량으로 연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제철 기법이 발전한다고 해도 만약 철광석의 채광 속도가 따라가지 못했다면 철의 생산량은 답보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주로 지상에 노출된 철광석을 채취해서 사용했으나, 12세기 경이 되면 지표상의 철광석이 모두 고갈되어 이제는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야 했다. 이렇게 되자 광산을 만드는 기법 뿐만 아니라, 갱도 내에 고인 물을 퍼내고, 환기를 시키며, 광부들이 한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가능한 많은 양의 철광석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 과정에서 동물이나 수력으로 움직이는 각종 펌프, 외발수레 등 인력을 절약할 수 있는 여러 도구가 개발되었다. 또한 광부들은 지역의 영주나 땅 주인으로부터 매일의 할당량과 사용할 광업 도구를 강제받았다.
이렇게 대량으로 철을 제련할 수 있게 되자 철판을 활용한 갑옷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강철은 이런 대량 생산 과정에서 부산물로 조금 나오는 양을 사용하거나, 예전처럼 침탄법으로 만들어야 했다.
2.2.3. 근세
정련로가 더욱 발전한다. 오스몬드 제철(Osmond process)법이라고 불리는 선철에서 연철을 제작하는 제법이 만들어진다. 원래 14세기 경에 스웨덴에서 시작한 방식이지만 16세기 말이 되면 영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도 퍼져 나갔다. 바닥이 파여 있고 주변이 막혀 있는 구조의 로에 목탄을 가득 깔고 불을 붙인 후, 풀무로 바람을 넣어 온도를 높히면서 목탄에 닿지 않도록 살짝 높은 위치에 파인 구멍으로 선철을 살짝 집어 넣어서 선철이 숯에 닿지 않게 가열한다. 이렇게 해서 선철이 녹으면서 흘러내리면 그 수철은 탈탄된 연철이 되는데, 이 떨어지는 철 액체에 쇠 막대를 살살 가져다 대면서 솜사탕 마냥 빙빙 돌려서 막대에 엉기게 하는 것이다.한편 예전부터 쓰던 침탄법도 개량되어, 16세기 또는 그 이전의 특정 시점에[26] 1미터가 넘는 크기의 석관[27] 안에 연철괴와 숯을 가득 넣고 진흙으로 밀봉한 다음에 거대한 노 안에서 1주일 이상 구워 철괴의 표면을 강철화하는 방식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강(粗鋼, blister steel)은 표면에만 탄소의 함량이 높지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라, 여러 다발을 묶어 가열하고 망치질로 압착한 뒤에 접쇠 가공을 하듯이 늘리고 다시 반으로 접어서 합치는 패고팅(fagotting) 공정을 거쳐야 했다. 조강을 패고팅 가공한 것을 전단강(shear steel)이라고 하는데, 완전히 녹여서 섞지 않았기 때문에 균일한 강철이 아니었다.
이 시기 서구에서 균질한 품질의 강철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해진 것이 독일 등지와 이탈리아였는데 아직도 강철 제품을 만들던 지역의 박물관들은 당시에 생산한 균질한 품질의 똑같이 생긴 검들을 수십자루씩 진열하며 자랑하고 있다. 이는 길드나 브랜드가 이미 존재했던 서구의 특징이었으며 똑같이, 균일하게 만들수록 더 실력있는 것이었다. 즉 동양보다 대량생산에선 밀렸으나 품질 면에서는 동양을 뛰어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는 다마스쿠스 강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로 보기도 하는데 다마스쿠스강의 성능이 재료의 차이가 아닌 특수한 제조법에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인들은 다마스쿠스강을 만들기 위한 열정으로 철에 수천, 수만 번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열처리 스프링강을 완성해 이를 이용한 태엽, 플레이트 아머, 기계식 시계, 플린트락, 아바레스트같은 발명을 이루었으며, 결국에는 동양과 서양의 기술력 차이를 불러왔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주철기술이 발전하여 주철대포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청동대포보다 우월하지는 않았으나 가격이 저렴해 대량으로 구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초기 주철대포 기술을 독점하여 대항해시대에 주도권을 잡게 된 국가가 영국이었다.
1709년 에이브러햄 다비 1세(Abraham Darby I)[28]가 현대의 용광로와 마찬가지로 코크스를 사용하여 선철을 대량 생산하는 방식을 개발했다.[29] 그러나 이때는 용광로의 내부 온도가 충분히 높지 않아서 생산된 철에 황의 함량이 너무 높아 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다가 1750년에 수력으로 공기를 불어 넣는 방식으로 개량되면서 용광로 내부 온도가 더 높아지는 동시에 충분한 석회석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이 때부터 품질이 좋아진 코크스 선철이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742년에 벤자민 헌츠맨(Benjamin Huntsman)이 도가니강 제련법을 개발하여 사우스 요크셔에 제강소를 차렸다. 원래 시계공이었던 그는 우수한 품질의 스프링강을 만들기 위해 침탄 방식으로 만든 조강을 잘게 부순 후 도가니에 넣고 녹여서 우수한 품질의 강철을 만들었다. 헌츠맨의 제강로 내부의 온도가 1600℃ 가량으로 강철도 녹이기에 충분히 높았기 때문에, 이만큼의 온도를 만들어내고 또 이 온도를 견디는 재질을 쓰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었다. 헌츠맨은 유리 제조공이 쓰는 도가니가 고온에서도 잘 깨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용했고, 공기를 자연스럽게 흡입하는 황동 제련로를 개량하여 막대한 공기가 들어오게 설계했으며, 근처의 사암과 특수 제작한 내화 벽돌로 로의 내부를 두텁게 발라 높은 온도를 견디고 충분히 단열이 되게 만들었다. 또한 유리 조각을 용제(flux)로 조강과 함께 넣어서 불순물을 빼내었다. 도가니법은 접쇠라는 방식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균일했던 이전의 철들과 달리 서구에서는 최초로 균질한 상태의 강철을 만들었기에, 최초의 현대적인 제철법이라고 평해진다. 그러나 도가니법은 한번에 소량의 강철만을 생산할 수 있었다.
2.2.4. 근대, 산업 혁명
헨리 코트가 반사로를 통한 연철 제철법을 만들었으며, 헨리 베서머가 1855년에 선철을 강철로 바꾸는 베서머 전로법을 개발하였다.2.2.5. 현대
지멘스-마르탱 평로, 베이직 산소 제강법, 그리고 전기 아크로가 등장하였다. 20세기 후반에는 나노미터 크기의 강재 분말을 적층시켜 제강하는 분말강이 등장하였다.3. 제철로의 종류
3.1. 고로, 용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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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용광로#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용광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 용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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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선로(熔銑爐, Cupola Furnace) |
선철을 녹여 단순한 주철로 만드는 로의 예시는 용선로가 있다. 구조 자체는 그냥 높게 쌓은 굴뚝 수준이다. 점토 벽돌로 쌓은 로에, 내부에 다시 점토 모르타르를 발라서 내화성을 갖게 만들면 된다. 바닥 부분에 모래를 비스듬히 깔고, 슬래그를 뺄 높은 구멍 하나, 녹아서 나오는 주철을 뺄 구멍 하나를 내준다. 그리고 녹은 쇠가 나오는 바닥 바로 위에 구멍을 숭숭 뚫어서 재료들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녹은 쇠는 흘러나올 수 있는 망 구조 바닥을 하나 얹어주면 된다. 그리고 그 망구조 바로 위 옆에 불기운이 들어갈 구멍을 뚫어주고, 풀무 화로를 연결해 주면 완성. 이 안에 선철-코크스-석회석을 번갈아서 깔아 넣고 화로에서 불바람을 넣어주면 된다.
이런 용선로에서 나오는 무쇠는 탄소 함량이 높은 주철이라 단단하고 잘 깨진다. 유럽에서는 냄비 등 생활도구를 만들 때나 사용했고, 무기로는 구리가 부족해서 급하게 대포를 만들 때나 사용했다. 창, 검, 갑옷 등 냉병기로는 거의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주철이 널리 사용된 것은, 철과 연료(탄소)가 접촉하지 않으면서 철의 온도를 녹는점까지 올리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고대 내지 중세의 제철법은 철을 녹일 수 있는 대신 연료와의 접촉으로 탄소를 흡수하거나, 아니면 연료와 직접 접촉하지 않지만 녹는점까지 온도를 올리지 못하는 방식 뿐이었다.
3.3. 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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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사로(反射爐, Reverberatory furnace) |
반사로는 쇠를 연철 혹은 강철로 전환하는 전로의 역할이 가능한 로다. 위의 괴철로처럼 철광석과 연료를 함께 굴뚝 속에 쌓은 형태가 아니라, 마치 전통 온돌 같은 구조의 로에 철과 연료를 분리해서 철에 탄소가 흡수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상기한 그림의 좌측이 연소실이고, 중앙의 길다란 복도쪽이 철을 놓는 반응실이다. 우측 위는 굴뚝, 우측 아래는 작업용 구멍. 녹은 철을 빼는 구멍은 로의 측면에 설치된다. 연료에서 나온 고온의 기체와 연료의 복사열이 반사로의 벽에 반사되어 철로 전달되는 방식이다. 연소 기체와 함께 공급되는 산소가 철의 탄소가 결합해서, 녹은 철로부터 탄소가 빠져나가게 된다. 일부 반사로는 firebox에서 발생하는 복사열을 철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내부 통로의 형상이 타원체 모양을 하기도 했다.
일단 반사로 내부에 내화물을 바르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내화물을 반사로 내부에 바른 후 한번 4~5 시간 가량 예열을 해서 내화물이 세라믹화 되도록 하고, 반사로를 식힌다. 그 뒤 선철과 고철 등을 장입한다. 이제 철들을 가열하는데, 이 과정에서는 철을 저어서 반응을 더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 철들의 상단 표면이 녹으면 이후 온도를 더 높여서 철을 완전히 용해시키고, 위에 떠오르는 슬래그를 남기고 밑의 철만 사출구로 용출한다.
반사로에서 정련한 철은 강하게 탈탄되어서 탄소 함유량이 낮은 연철이 된다. 탈탄 과정을 중간에 멈추면 강철을 만들 수 있다. 두 명이 붙잡고 12시간 동안 작업하면 1500kg 의 연철 혹은 강철이 생산된다. 헨리 코트가 발명한 이 반사로를 통한 연철 제법은 영국의 연철 생산을 급증시켰다. 1770-1820년의 1차 산업 혁명기의 영국의 철 생산량의 급증은 이 반사로법의 보급에 의한 것이었다. 그 유명한 에펠탑 역시 이 반사로법을 통해 생산된 연철로 만들어진 것이다.
헨리 코트가 낸 특허는 오직 연철에 한정되었다. 헨리 코트 본인도 반사로법의 개선에 다소 무관심했는지 새로운 특허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1860년대에 독일 지역에서 반사로를 통해 강철을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선철과 고철을 섞어 장입하고, 고온으로 가열하여 철을 빠르게 녹여 탈탄이 과도하게 진행되기 전에 녹은 철을 용출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서구의 강철 생산 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메이지 시대 일본도 서구의 제철업자들을 초빙하여 반사로를 만들어 대포를 대량생산하고자 시도했으며, 이때 만들어진 니라야마 반사로가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일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사쓰마 번 역시 슈세이칸 사업을 추진하며 반사로를 건설, 대포를 제작했다.
3.4. 도가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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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가니로(crucible furnace) |
▲ 1949년, 영국 요크셔 애터클리프의 '헌츠맨 철강'에서 도가니로를 통해 철을 생산하는 모습. 도가니로를 최초로 개발한 벤자민 헌츠맨이 18세기에 세운 회사이다. 사실상 도가니로의 본가.
점토를 구워 만든 도가니[30]에 선철, 고철, 그외 첨가물 등을 넣고 코크스로(이미지 상 d)에서 1600℃ 정도로 3시간 구워준 다음, 위에 뜬 규소 등 불순물(슬래그)을 버리면 아래쪽의 강철을 얻을 수 있다.
이 도가니 정강은 양이 적긴 하지만 생산 과정을 쉽고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고급 강철을 만들기 좋다. 또 생산량이 적다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혁신적이라, 1차 산업 혁명기 영국은 도가니법으로 1840년 8만 톤에 달하는 강철을 생산하며 유럽의 철강 산업의 거의 절반을 점유했다. 위의 반사로법도 강철을 만들 수 있긴 한데, 산업의 과학화가 이뤄지지 않아 숙련된 기술자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했던 당시 산업계 상황 상 숙련된 제철업자들만 가능했고 반사로법은 주로 연철 생산에 쓰였다.
3.5. 전로(轉爐, Conve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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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세머 전로(Bessemer converter) |
바닥에 구멍이 숭숭 뚫린 도가니와 풀무를 이어 두고 용융된 선철을 부어준 후, 밑바닥으로 공기를 불어넣어주면 된다. 들어간 공기가 선철을 뚫고 올라오면서 탄소와 결합해서 불덩어리가 되어서 전로의 입으로 일산화탄소 가스가 뿜어져 나온다.
베세머 전로법은 강철 생산 산업화의 첫 기술이었다고 불릴 정도로 큰 의의를 가지지만, 사실 여러모로 불완전한 기술이었다. 공기를 불어넣는 과정에서 쇳물이 풀무쪽으로 흘러나온다던가, 뿜어져 나오는 일산화탄소 가스로 화재와 인명사고가 발생한다던가 많이 위험했다. 게다가 공기가 균일하게 주입되지 않으면 철의 품질도 불균일했다. 또 질소가 철에 유입되어서 철강의 품질이 떨어졌다. 또 생짜 공기를 그대로 투입했다가는 철강의 온도가 내려가 철강이 굳어버리는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베세머 당대에는 탈인 탈황제를 몰라서 인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과 황이 많이 섞인 영국산 철광을 쓰면 똥철이 나왔다.
결국 베세머 전로법은 정작 고향인 영국에선 별 빛을 못봤고 영국 제철업자들은 그냥 반사로법을 계속 썼다. 베세머법이 빛을 본 것은 중화학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2차 산업 혁명기 독일과 미국에서였다. 이것은 20세기 들어서 영국이 두 나라에게 철강 산업의 우위를 뺏기게 된 원인이 되었다. 다만 저 두 나라도 1890년대 무렵부터는 더 질 좋은 강철이 생산 가능한 평로법을 중심으로 전환한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공기를 냉각시켜 액화 순산소를 값싸게 제조하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나, 이를 벳세머식 저취전로에 사용할 경우 반응이 지나치게 강하여 조업 제어능력이 떨어졌다. 순산소를 사용하는 제강법은 1952년 오스트리아 Voestalpine社가 전로의 상부에서 랜스를 통해 순산소를 초음속으로 용강면에 분사하는 상취전로법(린츠-도나비츠 전로법, 줄여서 LD전로법)을 실용화하고서야 보편화되었다.
LD 전로를 필두로 한 순산소를 사용하는 전로제강법은 일반적으로 염기성 산소 제강법(basic oxygen steelmaking)이라고 일컬어지며 기존 전로제강법의 문제점을 대부분 해결하였으므로 1970년대부터 전로제강법은 평로를 거의 완전히 대체하고 제강법의 주류로서 현재에 이른다. 평로제강법은 우크라이나 등 극히 일부에서만 남아있고 현재 세계적으로는 대부분 염기성 산소 제강방식으로 강철을 만들고 있다. 현대의 전로는 순산소 상취전로법이 가진 교반력 저하의 문제로 하부 풍구를 통해서도 불활성 기체를 불어넣는 복합취련식 전로로 발전되어 있다.
3.6. 평로
베세머법의 바로 다음에 나온 기술은 20세기 중반까지도 큰 변화 없이 이어진 지멘스-마르탱의 평로법인데, 기계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베세머법보다 간단하다. 때문에 오래된 제강 시설에서는 LD 전로보다 더 많이 쓰였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경우 최후의 평로 제강 설비는 1980년대까지 가동했으며, 소련(예컨대 우크라이나) 시절의 평로 제강 설비는 2000년대까지도 가동되는 것이 존재했다. 기본 원리는 위의 반사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연료의 연소열을 효과적으로 철에 전달하여 강철을 녹이면서 탄소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반사로와 비교할 때 평로의 핵심적인 진보는 고열을 얻기 위해 연소공기를 예열한다는 점과, 연소공기의 예열을 위해 노에서 배출되는 고온의 배기가스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즉 레큐퍼레이터(recuperator)를 도입한 것이 핵심이다. 평로는 고온의 배기가스가 연소공기 유입 통로를 이루는 내화벽돌을 가열하고, 연소공기는 가열된 내화벽돌로부터 열을 얻어 예열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연소공기가 처음부터 가열되어 있으므로 동일한 연료로 얻을 수 있는 단열 화염 온도(adiabatic flame temperature)가 상승하여 더욱 쉽게 고온을 얻을 수 있고, 배출된 배기가스의 버려지는 폐열을 연소공기 예열에 활용하므로 연료의 에너지 효율성이 증가한다.평로제강 조업에는 선철뿐만 아니라 고철, 철광석 등의 철원을 함께 장입할 수 있고, 그 외에 조재제[31]로서 석회 등이 첨가된다. 베세머 전로법은 탈탄시의 발열반응이 강철을 녹이는 열원이 되므로 반드시 철원의 대대수는 선철이 되어야 한다. 이와 대비하여 평로법은 연료의 연소열이 열원이므로 이러한 제한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다. 따라서 고철의 재활용을 위해서는 베세머 전로법에 비해 평로법이 유리하다.
다만 평로법은 반사로법에 비해서는 개선되었으나 철을 녹이고 전환하는데 4~10시간가량이나 걸려서 비용은 많이 든다. 따라서 베세머 전로법과 그 후신인 염기산소전로법이 개선되어 전로강의 품질이 평로강을 따라잡자 차츰 도태되었다. 또 다른 평로의 용도인 고철의 재활용은 전기로(특히 전기아크로)가 이어받았다.
3.7. 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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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전기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상용화 자체는 19세기 후반에 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점유율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3.8. 파이넥스 공법
4. 철의 성분별 분류
| 철의 탄소 함량에 따른 분류 | |||
| 순철 | 연철 | 강철 | 주철(무쇠) |
| 0.02wt% 이하 | 0.035wt% 이하 | 0.035~1.7wt% | 1.7wt% 초과 |
5. 제철의 가공방식별 분류
6. 철의 형상별 분류
- 슬라브: 납작하게 뽑은 반제품
- 빌렛: 길게 뽑은 반제품.
- 블룸: 어중간하게 굵고 두꺼운 반제품.
- 봉: 속이 차고 긴 완제품.
- 형재: 용도에 따라 모양을 낸 완제품.
7. 관련 문서
[1] 용광로 유적지에 흔적이 발견된다.[2] 조대연. (2017). 고대 철 제련로의 전개과정 및 철 생산 복원실험에 관한 검토 - 유럽의 사례를 중심으로 -. 숭실사학, 38, 47-76.[3] 아래에서도 나오지만 초강법의 경우 강철의 대량생산은 가능하나 그 품질이 제대로 만든 단조가공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도태되었다고 쳐도 이상하지는 않다.[4] 정해득. (2020). 조선시대 철장(鐵場)의 운영과 제철(製鐵)기술에 대한 문헌적 검토. 한국중세고고학, 7, 79-102.[5] 현 요코스카 해군기지.[6] 때문에 김양한은 한국 최초의 근대 조선기술자이기도 하다.[7] 당시 일본 최초의 고로가 설치된 곳이다.[8] 수철(水鐵)은 무쇠를 뜻한다.[9] 당시 보부상단과 황국협회의 주요 인물.[10]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11]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독립운동에 매진한다.[12] 1908년경 퇴역 참령 출신의 구의조라는 인물과 함께 한국 최초의 증기 기관을 개발한 기술자다. 이후 구의조와 함께 삼륜차 개발도 시도했으나 이는 경시청이 안전을 이유로 막았다고.[13] 황해도의 철광산들은 품위가 대략 51%가량으로 매우 높으며, 매장량 역시 수천만 톤에서 1억 톤 가까이 되어 매우 풍부하다. 노천 광상이기에 채굴 역시 아주 편한 것도 장점이다.[14] 중국 제 1의 철광구다.[15] 두 광산을 이용하는 또 다른 제철소는 만주국의 쇼와제철소다.[16] 경제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판명되어 곧 양양군의 철광석을 사용하는 것으로 바뀐다.[17] 산화철에 포함되어 있는 산소가 일산화탄소와 결합해서 나가는 반응은 1250℃에서부터 발생하지만,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거나 압력이 엄청나게 높으면 반응 온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물론 고대의 기술로 압력을 엄청나게 높일 수는 없으나 우연찮게 철광석에 촉매가 포함될 수는 있었다. 심지어 특수한 예이기는 하나, 현대인들이 세계 각 지역의 철광석을 가지고 실험해본 결과, 고작 900℃ 수준의 온도에서 제련하는데 성공한 경우도 있다.[18] 'wrought'는 고대 영어에서 'work(일하다)'의 과거 분사형이다. 즉 '일(work)을 가한 철'이라는 뜻. 일반적으로 'wrought Iron'은 '시우쇠'라고 번역하나, 한국과 서구권의 전통 제철법은 차이가 있으므로 이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19] 練鐵은 연할 연자가 아니라 단련할 연자를 쓴다. 망치질을 해서 단련해 강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때문에 단철(鍛鐵)이라고도 불렸다. 탄소가 적은 철로, 전통적으로는 강철이 되기 전의 순수한 철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실제론 공정 상 아무리 단련 과정을 반복해도 2% 정도의 슬래그가 섬유 같은 형태로 섞여 있어 강도가 낮았다. 탄소도 슬래그도 안 섞인 순수한 철을 만들 수 있게 된 건 현대의 일이다.[20] 침탄의 문제는 애써 담금질을 해서 만든 철-탄소 혼합물 결정 구조가 침탄 과정에서 날라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마지막에 침탄을 시키는 방식은 애초부터 탄소 함유량이 너무 낮아 담금질을 하지 않는 연철이나 저탄소강에 적합하다.[21] 망간이 철 결정 안에 탄소가 들어오게 도와주고, 자신은 불순물을 껴안고 슬래그로 나온다고 한다.[22]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23] 공기를 불어넣는다는 뜻이다[24] 반면에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 경부터 써왔다고 한다. 중세 초기의 유럽 유적에서도 석회 성분이 일부 포함된 슬래그가 출토되기는 하나, 석회가 불순물로 포함된 철광석이 흔하다는 점에서 일부로 넣지는 않은 것으로 추론된다. 석회석을 용제로서 사용할 경우, 철광석에 포함된 이산화규소(SiO₂)와 같은 불순물과 결합하여 액체 상태의 슬래그를 형성해 주고, 황을 일부 흡수하여 품질을 높이는 역할도 하며, 혼합물의 유동성을 높여 노의 내부 반응을 원활하게 해준다. 그래서 석회 용제를 쓰면 제련된 철의 품질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슬래그에 섞여 나오는 철의 양이 줄어들어 수율이 크게 증가한다.[25] 참고로 탄소를 빼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선철 막대와 연료인 숯이 직접 닿지 않게 해야 하고, 오로지 열기와 함께 일산화탄소 가스나 산소만 선철에 닿아야 한다.[26] 이렇게 두루뭉실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16세기에 이 기법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이 처음 출판되었기 때문이다.[27] 제철업과 철제품 생산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셰필드에 남아 있는 석관의 크기는 4.3x1.2x1.1 m (14x4x3.5 ft) 이다.[28] 그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들도 제철업에 이름을 남겼기에, 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다비 1세라고 한다.[29] 가끔 한국의 인터넷에서 다비 1세가 코크스를 개발했다고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코크스는 이미 거의 1세기 전에 나와 있었다. 다비 1세는 젊은 시절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맥주를 만들 때 코크스를 쓰는 것을 보고 코크스가 화력이 좋은 데다가 맥주에 잡냄새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불순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나중에 제철업에 적용했다. 또한 대장장이인 그의 할아버지가 숯 대신에 석탄을 연료로 써서 철을 싸게 제련할 수 있었으나 품질이 좋지 않아 돈을 벌지 못했다는 사실도 듣고 자랐기에, 이 두 가지 경험을 합쳐서 코크스 고로를 개발했다고 한다.[30] 사실 점토는 내열 한계가 좀 낮기 때문에 비철금속 제련에 사용하고, 강철 제련을 위한 도가니는 흑연이나 돌로마이트 등으로 만드는 편이다.[31] 슬래그를 형성시키기 위해 넣는 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