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사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베드로 | 안드레아스 | 대 야고보 | 요한 |
필립보 | 바르톨로메오 | 토마스 | 마태오 | |
소 야고보 | 유다 타대오 | 사도 시몬 | 마티아스 |
유다 이스카리옷 | Judas Iscariotes | ||||||
최후의 만찬에서 빠져나오는 유다 이스카리옷[1] | 칼 블로흐 작(作) | ||||||
출생지 |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 |||||
사망지 |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예루살렘 | |||||
사인 | 자살 | |||||
축일 | 없음[2]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언어별 표기 | 아람어 | ܝܗܘܕܐ ܣܟܪܝܘܛܐ (Ihuda Skariuta) | |||
히브리어 | יהודה איש קריות (Yehûdâh Κ-Qrîyôth) | |||||
코이네 그리스어 | Ἰούδας ὁ Ἰσκαριώτης[3] | |||||
라틴어 | Judas Iscariotes | |||||
이탈리아어 | Giuda Iscariota | |||||
영어 | Judas Iscariot | |||||
중국어 | 加略人猶大(가략인유대) | |||||
일본어 | イスカリオテのユダ | |||||
한국어 | 공동번역 성서: 가리옷 사람 유다 | |||||
가톨릭: 유다 이스카리옷 | ||||||
개신교: 가룟 유다 | }}}}}}}}} |
[clearfix]
1. 개요
예수의 수제자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스승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버려 배신한 뒤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리스도교에서 살인에 버금가는 죄인 자살로 생을 끝마친 인물이다.[4]
'유다는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가 13명이었던 적은 없다. 유다가 이탈하고 사도 마티아스가 그 자리를 대체하여 12명을 유지한다.[5] 다만 후술할 서양권에 널리 퍼진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은 맞다.
2. 인식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최악의 죄인으로 손꼽히며, 기독교 전승에서는 자살한 후에 악마에게 잡혀갔다고도 한다. 다른 사도들이 다 성인으로 분류되어 축일을 가지는 데 비해 유다는 당연히 그런 거 없고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등 종파를 막론하고 죄인으로 분류되어 아직까지도 저주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슬람의 쿠란에서도 스승을 배신한 대가로 알라의 분노를 사서 알라가 유다를 예수로 보이게 하여 십자가 형을 받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스승을 배신한 제자로 여겨 좋게 보지는 않는다. 현재 유럽 일부국가에서는 아이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이는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식한테 저런 이름을 붙여주는 건 아이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라고 짓는 것과 같은 아동학대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성인이 된 뒤 본인이 자기 의지로 유다로 개명하는 건 막지 않는다.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는 지옥 최하층에 있는 루시퍼의 입에 물려 놓았다.[6]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죽음과 대속은 유다가 계획한 게 아니며[7], 그는 어디까지나 신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것이다」라는 동정적 시선도 있다. 어찌됐든 유다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주는 그리스도교의 탄생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2.1. 배신자의 대명사
서양 문화권에서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배신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각종 사료에서 배신 행위에 대해 "브루투스 같은 놈"이라거나 "유다 새끼 같은 놈" 따위의 욕을 해대는 것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배신한 이유는 '독재 예방'과 '공화정 체제 수호'라는 신념이었지만[8] 유다는 논란은 있지만 그냥 돈 받자고 한 짓이니 브루투스보다 재평가 여지도 적다. 실제로 미국 버지니아주의 문장처럼 브루투스는 폭군에 맞서는 저항자, 공화주의의 수호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유다는 그런 거 없다.3. 이름에 대하여
히브리인의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은 성씨나 Last name과는 다른 일종의 별명으로, 그 사람의 출신지나 본적, 자란 고장, 직업이나 친척,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이거나 신체적 특징 등을 주로 붙인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워낙에 많아 구별해야만 하는데, 당시에는 성씨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의 성씨들은 이렇게 수식어를 써서 구별하는 과정을 거치다 가문의 형성과 함께 고착화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라, 한국 개신교에서는 '가룟 유다'라 음역하였다. 이스카리옷 유다의 '이스카리옷'이 무슨 뜻인지는 불명확하지만, 뜻을 풀이하는 3가지 설이 있다.- 카리옷 사람 유다
여기서 카리옷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는 지명이다. 구약에서 언급되었을 때는 히브리 왕국의 외부였으나, 예수 당대에는 히브리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9] 또한 직업이 세리였으므로 적어도 본인대에는 고대 로마 제국 영역 안의 히브리인 거주지역에서 살았음이 분명하다. 카리옷이 출생지이고 나중에 로마 제국 내 히브리인 거주지역에 들어와 세리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도 이 견해를 따라 ‘가리옷 사람 유다’로 번역하였고, 한국 개신교계에서 사용하는 '가룟 유다'라는 음역도 이 해석에 기반한다. '카리옷 사람'이란 뜻으로 보고 '카리옷'을 구한말식으로 음역한 것이 '가룟'이다.[10] - 열심당원 유다
이스카리옷을 sicarii(시카리, 단도의)란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보아, 무력투쟁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 왕국의 광복을 이루어 신정(神政) 다윗 왕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한 단체의 일원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 거짓의 아들 유다
유다가 종적을 감춘 후 행방이 묘연해지자 초대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경멸조로 붙인 이명이 '거짓의 아들'이란 뜻의 '이스카리옷'이었으며, 이대로 기록됐다는 설이다.
3가지 설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종교학계는 1번과 3번에 무게감을 두는 편이고, 2번은 여러 가지 음모론이나 가설을 세우기 좋아 인지도는 비슷비슷하다.
일부 신학자들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유다에 대한 반감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로마 제국에 대반란을 일으켰다가 대대적인 탄압을 당하면서 비유대인 기독교 신자들과 분리되기 시작했고, 결국 3세기 즈음을 기준으로 사실상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은 서로 갈라진 별개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 먼저 작성된 마르코 복음서에선 그저 악인으로 묘사되는 유대인들이, 가장 나중에 작성된 요한 복음서에선 악랄한 악마 등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복음서들은 후대에 쓰여진 것일수록 빌라도를 면죄하고 유대인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유다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는 전승을 따라, 그의 이름을 딴 지옥이 바로 저 유명한 쥬데카다. 또한 그의 이름의 알파벳 표기인 Judas는 여러 언어에서 배신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3.1. 동명이인
중세시대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유다 이스카리옷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기도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유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을 지니며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하누카 축제의 기원이 되는 유대인 영웅이자 하스몬 왕조의 시조인 마카베오 유다 때문에 당대 유대 사회에서는 유다 마카베오같은 영웅이 되라고 유다라는 이름을 흔하게 붙였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해서 아들 이름을 중근이라고 짓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후대에 중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팔아먹는 바람에 사람들이 중근이라는 이름을 기피하게 된 셈.게다가 유다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이며, 현재의 '유대'인이라는 민족명칭도 유다와 어원이 같다. 당장 이 지파에서 예수와 다윗 왕이 나왔다(!). 신약의 편지 중 하나인 유다서를 쓴 유다[11]가 있고, 병자들의 성인인 유다가 있다. 특히 병자들의 성인 유다는 호주에 있는 '성 유다 종합병원'의 주보성인이다. 이 외에도 성 유다 고등학교 등 이 유다의 이름을 딴 시설들은 정말 많다. 심지어 12사도들 중에서도 유다가 한 명 더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유다 타대오'라고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
이렇게 이들은 사실 모두 같은 이름이지만, 실제 영어로 쓸 때에는 악인인 유다 카리옷은 Judas, 그 외의 유다는 Jude로 표기하여 다르게 쓴다. 영어뿐만 아니라 유럽어권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방법으로 배신자 유다와 다른 유다를 구분한다.
4. 세기의 배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 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 마태오의 복음서 26장 20-25절 (공동번역성서)-
- 마태오의 복음서 26장 20-25절 (공동번역성서)-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아 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러는 예수께서 유다에게 명절에 쓸 물건을 사오라고 하셨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신 줄로만 알았다. 유다는 빵을 받은 뒤에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 요한의 복음서 13장 26-30절 (공동번역성서) -
- 요한의 복음서 13장 26-30절 (공동번역성서) -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리가 떼를 지어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라는 사람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려고 다가서자, 예수께서는 "유다야, 입을 맞추어 사람의 아들을 잡아 넘기려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루가의 복음서 22장 47-48절 (공동번역성서) -
- 루가의 복음서 22장 47-48절 (공동번역성서) -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뽑아준 건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건 최후의 만찬 전에 예수는 이미 유다의 배신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전한다. 사실 예수는 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의 간접적 배신도 예견하고 있었다. 반면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그 유명한 배반의 입맞춤을 하러 현장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눈치조차도 채지 못했다.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에서 자리에 앉은 예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말한다. 현장에 있는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배신하여 팔아넘길 거라는 이야기였다.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앞다투어 예수에게 설마 그 배신자가 자기냐고 묻기 시작했고, 예수는 자신과 함께 대접에 손을 담그는 자가 그라고 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묘사가 살짝 다른데, 제자들이 쩔쩔 매던 와중에 베드로가 예수의 품에 의지해 누워있던 예수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신호를 주었고, 이 제자의 물음에 예수가 자신이 빵을 적셔주는 사람이 그라고 답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예수 자신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가 그 배신자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는 유다가 배신자란 것을 정확하게 알았고, 만찬 당시 유다 본인에게도 자신이 그의 배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언질을 넌지시 주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지,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하고 빵을 떼어준 후 그를 보내주고, 질책하거나 만류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후 유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도 알았는지,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되는 것은 신의 계획대로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만,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유다는 화를 입게 될 것이라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유다 본인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등,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만찬 당시 예수가 유다 본인의 배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음에도 유다가 예수와 제자들 앞에서 대담하고 뻔뻔하게 행동한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에게 앞다투어 설마 자기가 배신하게 되냐고 묻는 중에 유다 역시 예수에게 "(그 배신자가) 접니까, 선생님?"이라고 물었는데, 예수는 "네가 말하였다"라고 그의 대답을 긍정한다.[12] 유다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소름 돋을 장면.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내가 빵을 적셔서 떼어준 사람이 그 배신자"라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하며 유다에게 빵을 적셔서 떼어주고 유다는 그걸 받는다.[13] "가서 네 할일을 하라"며, 유다가 곧장 자신을 팔아넘기러 갈 것임을 알면서도 그를 먼저 보내준다. 유다는 바로 수석 사제에게로 가버리는데,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다가가서 그게 누군지 추궁을 했음에도 '사랑하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을 안 했는지, 다른 제자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며, 예수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그를 보내자 그 할 일이 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하는데, "유다가 회계 담당이고 이제 명절이니까 심부름 시키려고 보내셨나 보다~" 라고 받아들인 제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이후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친 예수가 제자들을 깨워서 자신을 팔려는 자가 다가왔다고 보여주고, 그 현장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스카리옷 유다였다. 유다는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그를 잡으라 하고, 예수에게 입을 맞추러 다가와서는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유다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온 줄 알고 있으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다가오자 입을 맞추고 자신을 팔아넘길 셈이냐고 묻는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이 유명한 유다의 입맞춤이 등장하지 않는다. 유다와 군대가 다가오자 예수가 먼저 누굴 찾느냐고 묻고 사람들이 "예수 찾으러 왔는데요" 하자 자신이 그 예수라고 본인이 먼저 나서고, 이에 군인들이 놀라서 어버버거리자 자신이 예수가 맞으니 자기만 잡고 제자들은 해치지 말고 보내주라며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후 예수는 끌려가서 재판받고 십자가형을 받으며,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유다는 은 30냥을 반환한다.
이후 유다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출처마다 내용이 다르다.
-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판 후 후회하여 자신과 작당한 대사제들에게 은전 서른 닢을 되던져준 후 목 매달고 자살했으며, 그가 되돌려준 돈이 껄쩍지근했던 대사제들은 그 돈으로 근처에 땅을 사 나그네, 즉 무연고자들의 묘지로 썼다고 적혀 있다.
- 사도행전에서는 자살이나 은전 반납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가 산 밭에서 거꾸러져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 2세기 초에 활동한 교부 파피아스(Papias, 60?-130?)[14]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파피아스에 따르면 유다는 저주를 받아 온몸이 퉁퉁 부어 문을 빠져나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며,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고름이 흘러나와 주변 땅을 적셨다고 한다. 파피아스가 쓴 기록은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내용이 매우 다르다.
흔히 마태오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온 내용을 합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는데 시신을 거둬주는 이가 없어 썩어가다 줄이 끊어져 떨어지고 복부가 터져 내장이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과학적으로도 말이 되는 이야기라[15] 이미 고대 시기부터 인기 있던 해석이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양자가 완전히 다른 전승을 서술했음이 명확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전승끼리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뒤 종적을 감추었고, 초대교회 신자들 사이에서는 유다의 최후를 두고 (아마도 비참하게 죽었으리라는 내용으로)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던 듯하다. 그런 소문의 일부가 전해져서 복음서나 사도행전 또는 교부의 글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후대의 우리로서는 "예수를 배반한 뒤 유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5. 배신의 이유
가장 흔하게는 물욕에 눈이 멀어서 팔아넘긴 것이라 하지만, 이런 설명은 약간 부족하다. 그럼에도 목회 중에 성직자 혹은 목사가 이렇게만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서를 따로 연구하지 않는' 일반 신도 기준에서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는 것이 그나마 잘 와닿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돈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마침 그 전에 비싼 향유를 깨트린 걸 보고 유다가 돈이 아깝다며 시샘했다는 묘사가 나오기에[16] 일반 신도들은 이렇게 설명해도 크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아래에 나올 여러 문제 때문에 단순 돈 문제라고 하기엔 배신을 하기엔 액수 묘사가 다소 애매하다던지 이후 돈을 돌려주고 자살하는 유다의 행동이라던지, 유다 본인이 작정하고 돈을 긁어낼 작정이면 굳이 스승을 배신하지 않고 계속 한무리로 엮여서 조금씩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도 있었다던지 여러 이유로 단순 돈 문제로 치부하기엔 개연성도 떨어지고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일단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다는 서술은 마태오의 복음서에만 나오고, 그마저도 유다가 배신을 하기로 결심하고 대사제들에게 가서 얼마를 주겠냐고 하자 제시한 값이다. 사실 이 가치도 알기 힘든데, 그냥 '작은 은 30[17]'이라고만 써 있지 화폐 단위가 안 써 있다.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만 해도 드라크마, 데나리우스, 스타테르 등 다양하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거금도 아니고, 유대교 율법으로 성인 노예의 값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은전 서른 닢에 대한 기록은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종종 나온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서는 남, 여종을 따지지 않고, 소(가축)가 뿔로 들이 받아서 노예를 죽게 한 경우 소의 주인은 30 세겔로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소는 돌로 내리쳐 죽인다는 구절이 있다. 즉 장성한 남자에게 율법상 목숨 값으로 줄 수 있는 최소 비용인 셈이다.
이럴 경우 문자 그대로 유다가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 받아들이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생긴다. 아무리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공동체를 배신하고 그 수장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를 행하기 전에 충분한 대가를 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제시받은 대가는 고작 노예 1명의 값 뿐인데도 유다는 이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배신을 결심했다는 것이다.[18][19]
따라서 성경을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는 문학으로 보는 신학인 성서비평학에서는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첫째는 창세기의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간 이야기를 모티브로 차용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20], 둘째는 즈카르야서 11장에서 '주님의 종'이 제사장들에게 경고하며 나를 믿으면 품삯을 달라고 했더니 제사장들은 겨우 은 30세켈만 줬고, 결국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자는 예수가 미리 천국에 가서 제자들을 기다릴 것을 암시하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들은 저주받을 것임을 암시하는 셈이다.
유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혁명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제자가 되었지만, 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적 혁명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의 행보에 배신감이 들어 배반했다는 해석도 있다. 다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직후 자신이 그저 무죄한 사람을 팔았다면서 예수를 팔아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성전에 도로 던졌다고 한다. 후에 제사장들이 이 돈을 피가 묻은 돈이라 여겨 성전의 금고에 넣어두길 꺼렸기 때문에 바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무연고자, 나그네의 무덤으로 사용했다. 밭을 살 때 쓰인 돈의 출처를 따 지은 이 밭의 이름은 피밭(하켈다마하≒아겔다마).[21] 십자군 시대에는 이곳에 성 마리아 성당이 지어졌고, 그 후 성지에서 병자와 순례자들을 돌보는 일에 종사했던 기사수도회에 양도되면서 성지순례 도중 예루살렘에서 죽은 순례자들을 묻는 곳이 되었다. 현재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아이러니.
사탄이 들어갔다는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22]의 주장을 무시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오는 자, 즉 이방인(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를 회복할 부흥 군주라고 인식되어 왔다. 메시아 신앙의 기원이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이 모두 무너지고 장기간에 걸쳐 포로 생활과 외세의 지배를 받을 때 생성됐기 때문. 더불어 예수가 활동하기 100여년 전, 그리스 계열 헬레니즘 왕조들에게 이스라엘이 지배받을 때 유다 마카베오가 무장 봉기를 일으켜 마카비 전쟁을 통해 하스몬 왕조를 세워 이스라엘 독립왕국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른바 진짜 메시아가 등장했던 셈.
다만 후에 하스몬 왕조에게 정복당한 에돔 출신 안티파트로스가 하스몬 왕조의 내분을 틈타 로마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의 실권을 장악했고,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헤롯이 하스몬 왕통을 단절시키고 새로운 헤롯 왕조를 열었다. 이 헤롯왕이 성경에 등장하여 갓난 아기들을 죽인 그 헤롯왕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렸던 이유도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아(=예수)가 새로운 다윗 왕조를 일으켜 이스라엘 왕조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23] 그렇기에 당시 유대인들에겐 메시아=카리스마 쩌는 무장봉기세력의 리더라는 인식이 있었다. 물론 이땐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아 후보들도 있었다. 누가 됐든 로마로부터 무장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면 메시아가 됐기 때문.[24]
그래서 12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대부분도 예수가 그렇게 행동하리라 믿고 따라다녔을 것이다. 심지어 엄청난 기적 및 능력도 가졌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독립전쟁의 신호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를 지켜보던 유다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음 2가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다.
- 첫째, 예수를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면 예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야훼의 아들'로서 초인적인 권세를 드러낼 것이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본격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가능성이다. 1961년도작 성서영화 <왕 중 왕>에서도 유다가 이런 논리로 예수를 배신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사탄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니까."라고 유혹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예수는 "주 하느님을 함부로 시험하지 말라." 하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으며 많은 창작물에서 이러한 구도를 차용하기도 했다. 한국 창작물 중에는 신돈에서 신돈과 원현의 관계가 이 해석에 따른 예수와 유다의 관계와 흡사, 아니 아예 빼다 박았다.
그러나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런 해석은 낭설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정말로 유다가 끝까지 예수를 구원자라 믿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면, 그가 십자가상 죽음 이전부터 예수가 수없이 언급한 부활의 결과를 보지도 않은 채 바로 자살을 하였다는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25] 또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사도들 중 하나인 유다가 그리스도교에서 금기시되는 자살을 하였을 리도 없다. 유다는 예수를 넘기려고 마음 먹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타락하여 사도가 아니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다만 예수와 함께했던 나머지 사도들 역시 예수가 죽자 그가 부활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각자도생했음을 생각하면 어떠한 변호와 기적도 보이지 않고 예수가 순순히 죽자, 그저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스승마저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 수는 있다. 쉽게 말해 타락의 시점에 대한 관점 차이인데 정통 기독교는 이미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기 전에 타락했다고 보지만 이 논리에 의하면 유다가 예수를 고발할 때 까지만 해도 "이 사람은 신의 아들이니 뭔가 위기가 코앞에 닥치면 큰 권능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예수가 온갖 모욕과 고통을 받고 죽으니 그제서야 "이제보니 이 사람은 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엄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26] 그러나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경우에는 유다에게 어느 정도 정당성도 성립되는데다 자칫 "의도는 나쁘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일을 틀어졌다"는 프레임이 걸릴 수 있으니 당연히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받아들일만한 해석은 아니다. 이러면 유다 자체의 개연성이나 정당성은 둘째치고 마치 유다의 배신을 예측한 예수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이다.
- 둘째, 자신이 믿고 따른 예수가 이제 와 보니 글러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 혐의를 벗기 위하여 배신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가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것을 직접 본 제자라면 모순이 된다.[27]
유다가 예수를 따르기 전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리로 알려진 경우가 꽤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사도들 가운데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학자들은 그가 금전욕이 많았던 자라 해석한다. 따라서 그가 정말로 금전을 탐하여 배신을 하였을 경우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금전욕과 위 해석에서 언급된 예수에 대한 실망이 맞물린 결과라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 셋째, 2006년 복원된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유다에게 자신을 팔아넘겨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구, 즉 예수가 메시아로서 완성되는 것을 도운 인물이란 내용의 설이 나온다. 이 메시아 완성설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제시된 것인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유다의 행동도 하느님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은 그 자체로 예수의 대속을 완성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식의 해석으로 정통적인 기독교적 해석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신의 의도한 악행이나 피해를 입은 자들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오래된 철학적 문제기도 하다.[28]
이사야서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초반에 소개되듯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반드시 필요했다. 세례자 요한은 처음 예수를 보았을 때 한 말이 '보아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주님의 어린 양이다' 이다(요한 복음서 1장 29절), 유대교 전통에서, 어린 양은 제물로 바쳐지기(살해당하기) 위해 준비된 제물이며, 그냥 자연사한 양은 제물로서의 가치가 없다.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죽이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예수는 '단순히 죽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유대교 의식에서 어린양이 번제로 바쳐지듯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로 간주되는데, 예수는 무죄한 존재였음에도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뒤집어써야 했고,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해 이에 절망하며 고통을 맛봐야 했다. 즉 예수의 십자가형은 필연적이었으며, 여기서 성부는 죄를 뒤집어쓴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짓밟히도록 놔두는 공의로운 면모를 만족해야만 인류의 구속을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예수가 이 세상에 성육신하고 살다 갔다는 걸로 성립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누군가는' 예수를 죽여야 하며, 이스카리옷 유다는 '예수를 죽게 만든' 제1원인제공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라 해서 그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 속 섭리에선 저들의 이기적인 동기로 임한 행동 역시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전능자의 지혜가 묘사된다. 이스라엘을 벌할 때 이방국가들을 이용하거나, 현대 그리스도인을 징계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 간에 수치를 당하게 하거나 고난을 내리는 식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시에 각자의 자기의지로 하고 싶은대로 행했을 뿐이므로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된다. 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해서 기존의 질서를 되돌리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이었듯이, 모두가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결국은 세상 만사가 창조자의 완벽한 통제 하에 있다는 역설은 유한한 지성을 가진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스케일의 신비이다.
예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슬람[29]에서는 이스카리옷 유다가 십자가에 예수(이슬람에서는 '이사'로 불림) 대신 못박혔다는 전승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의 모습으로 변한 유다이고, 진짜 예수는 죽지도 않고 그냥 승천했다는 것.
6. 유다와 예수의 관계
우선 유다에게는 나자렛 예수가 스승인지, 아니면 작은 선교 그룹을 이끄는 리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를 배신하고 산헤드린 공의회의 비뚤어진 카야파 파벌에게 팔아치운 것이 인간적으로는 비난받을 배신 행위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그러나 자신을 배신할 유다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본인의 결정이다. 예수의 짧은 인생 마지막 시기에 배신했다고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회계장부를 담당하는 경리 역할을 맡겼다. 어지간히 믿고 신용한 것이 아니라면, 제자라고 해도 선교 그룹의 얼마 되지도 않는 소중한 자금을 맡길 리가 없다.
사실 크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직전의 인간관계는 처참한데,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요한 등을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 체포 후 뿔뿔이 흩어진다. 골육지친인 모친, 제자 둘을 제외하고는 추종자 오천 명을 먹이던 놀라운 인기는 급격히 식어 들어갔다.[30]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마저 예수를 세 번 부인했고,[31] 다른 제자들도 부활 이후 다시 모이기 전까지는 흩어져 있었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베드로나 유다나, 마리아와 요한,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를 제외한 다른 추종자들 모두 예수의 배신자인데, 그들 모두를 예수가 제자로 삼고, 무리의 일원으로 삼았다. 배신자마저 먼저 찾아가 거두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 후 예수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하면서 용서 받고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32]"을 받았지만, 유다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말로를 자살로 검토한다면 회개하지 않고 인간적 죄책감에 빠져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것이고, 저주를 받아 병에 걸려 죽었다고 검토한다면 역시 회개하지 않은 채로 악에서 벗어나지 못해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33] 만약 유다가 자살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을 지켜보았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가정을 해볼 수 있는데 아마 그랬다면 초기 기독교 최악의 적으로 등장했지만 개심하여 12사도를 능가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바울로의 역할이 그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기독교 신자, 역사학자, 호사가들이 미치도록 알고 싶어하는 배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위의 항목에서 배신의 원인을 분석했지만, 진짜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인 예수와 유다만이 알 것이고 후세 사람들은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성경이나 여러 복음에서도 유다가 뜬금없이 스승을 팔아넘겼다고만 이야기하지, 그 계기나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들 모두 그냥 별 생각 없이 있던 와중에 최후의 만찬에서 갑작스럽게 배신자 이야기가 나왔고, 유다는 그로부터 얼마 후 그들 곁을 떠나버려 제대로 그 내막을 아는 제자가 없다.[34]
7. 여담
독실한 기독교 신자 상대로는 굉장히 심한 욕이며, 기독교를 국교로 믿거나 실질적인 국교인 나라에서는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 유다같은 놈아!'라고 하면축구에서 더비 매치의 라이벌 팀으로 이적하는 경우 배신자라는 설정이 붙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팀이나 팬과의 사이가 좋지 않게 벌어진 경우 유다라는 별명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이스 피구와 솔 캠벨이 있다. 피구는 그래도 이적료도 컸고 뒷면의 숨겨진 계약 관계가 있었다고 핑계는 댈 수 있지만, 캠벨은 유스 출신의 주장이 라이벌 팀으로 자유계약으로 떠난 거라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유다로 회자된다.
13이란 숫자가 재수없다는 속설의 원흉.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 중 13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만찬이 벌어진 식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13명이 앉은 식탁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이 좋지 않은 최후를 맞게 된다거나 불길해진다는 속설이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가능한 한 13 자체를 피하는 편.[36]
8. 대중매체
- 애니메이션 마왕 단테의 에피소드 제3화에서 이름이 언급된다.
-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지옥 밑바닥에서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 카시우스와 함께 루시퍼에게 물어뜯기고 있다. 지옥의 이름도 자기 이름에서 딴 쥬데카(Judecca). 당시 시대상이 시대상이다보니 허리부터 물어뜯기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달리 예수를 배신한 죄로 가장 고통스럽게 머리부터 물어뜯기는 중이라고.
-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의 미니시리즈 <나자렛 예수 (Jesus of Nazareth, 1977)>에서는 예수와 화해하고 싶다는 제사장 세력의 속임수에 넘어가 예수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나중에서야 자신이 미끼가 된 것을 알고 비통하여 자살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유다는 예수가 히피적인 광신도들에게 휘말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믿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지나친 관심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끝내 배신을 하게 되지만, 예수에게 가해지는 상상 이상의 폭력에 괴로워하다 자신을 악역으로 설정한 신을 저주하며 자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실상 해당 작품의 진 주인공.
-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의 마틴 스콜세지 작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하비 카이텔. 작중에서 유다는 예수를 위하여 험한 일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예수가 유다에게 자신을 로마에 밀고할 것을 끊임없이 부탁하자 유다는 이를 계속 거절하면서 "당신이 나라면 당신을 배신하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아니.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 더 쉬운 일을 맡기신 거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하고 대답한다. 유다는 끝내 예수의 부탁을 들어준다.[37]
- 보르헤스의 소설 <Three versions of Judas>에서는 '유다가 사실 하나님이자 진짜 구세주'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육체적 쾌락을 거부하고 고행을 선택하는 것처럼, 천국의 행복을 거부하고 지옥을 택했다는 이야기.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38]
- 데스노트 애니판 25화에서 L이 죽기 전에 빗속에 함께 서있다가 흠뻑 젖은 야가미 라이토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장면이 있다. 작가 왈, 이 장면은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발을 닦아준 것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한다.
- 헬싱에 나오는 바티칸의 이단심문소 이스카리옷 기관은 유다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비밀결사다. 다만, 여기서는 신의 뜻을 어둠 속에서 행했다는 쪽의 해석을 바탕으로 성립한 듯 하다. 작중 안데르센의 말에 따르면 사도(使徒)가 아닌 사도(死徒)로, 때가 오면 은화 30을 신전에 바치고 밧줄로 목을 멘 뒤, 지옥으로 내려가 740만 5926의 악귀[39]와 싸울 거라고 여러모로 신을 위해서라면 살인조차 마다않는 광신도들다운 표어다.
-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는 사후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예수가 살아생전 12사도에게만 줬던 (오리지널) 면죄부를 이용해서 구원받았다는 설정이다. 물론 자기가 지은 죄가 죄인지라 한 장으로는 안 되고 다섯 장을 모두 사용해서. 이에 대해 붓다는 "그 배신이 이걸로 용서가 되는 거였냐?!"라며 황당해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면죄부는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우개 도장으로 만든 어버이날 안마 쿠폰' 수준이기 때문. 하지만 퀄리티가 어땠든 예수가 직접 만들어준 진짜배기 면죄부였던 만큼 죄를 면해준다는 효과는 확실하게 있어서, 그 아들바보에 격정적인 성격의 성부조차도 유다를 배신의 죄를 물어 공개적으로 벌하지 못하고 쪼잔하면서도 은근히 살벌한 뒤끝 수준에 그칠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보여준다.
예수와 다른 제자들은 그를 용서해 줬지만 본인은 배신한 일 때문에 자책감과 자학 의식이 대단히 심한 편. 배신의 단초가 된 향유 일화 때문에 기름값 계산하는 데엔 도사가 되었다.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기름의 가치를 알아내는 능력자 수준. 한번은 성격을 바꿔보려고 긍정맨이 되려 시도했으나, 갑자기 바뀐 성격 탓에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이 여럿 피를 본다. 그리고 예수가 '다음에는 은화가 아니라 동(구리)전 30냥으로 나를 팔거라. 몇번을 팔아도 다 용서해 주마.'라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다시 자학 모드로 바뀐다.이 외에도 언제나 주님의 메세지를 받고 있는데, 그게 다른 사람이 초코칩 스콘을 사면 초코칩이 많이 들어있지만 유다가 사는 초코칩 스콘은 플레인 스콘에 어쩌다가 초코칩이 하나 들어간 수준의 상태이거나 카레가 나와도 밥만 많고 카레는 조금 나온다거나 등의 처참한 상황. 부처는 그것을 '아들은 용서했어도 난 용서 못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다.[40] 이 외에도 패션센스가 심하게 안 좋다. 예수와 제자들 왈 "오사카 아줌마 취항."
- 이 이스카리옷 유다에 대한 인문학 책이 나왔었다. 제목은 <예정된 악인, 유다(원제: Judas: The Troubling history of the renegade Apostle)> 현재는 절판.
- GTA5에서 막판에 A엔딩을 선택하면 트레버 필립스가 죽으면서 마이클 드 산타와 프랭클린 클린턴에게 자신을 배신하고 죽이려 들자 "유다는 한 놈인 줄 알았는데, 그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불에 타죽는다.
- 모바일 게임 영원한 7일의 도시의 등장인물 이스카리오 역시 이스카리옷 유다에서 유래됐다.
- 만화 UQ HOLDER!에서는 여자로 등장한다. 본명은 이슈트 카린 오테지만 현재는 다른 이름으로 활동 중.
- Lobotomy Corporation의 ALEPH 등급 환상체 백야는 탈출 시 역병의사의 시계에 새겨진 12명의 직원을 사도라는 이름의 적대개체로 만드는데, 예외적으로 12번째 사도는 적대개체가 아니고 여전히 직원으로 간주되어 조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12번째 사도가 단 한번의 악과 수백 가지의 선행 환상체에게 고해 작업을 진행하면 백야의 체력이 갈려나가며 순식간에 제압되고 사도들은 전원 자살한다. 12번째 이름이 시계에 새겨질 때 인용되는 문구가 요한서 6:70[41]이라는 것을 보면 12번째 사도의 모티브는 유다인 듯하다.[42]
- 2000년에 개봉했던 흔한 드라큘라의 2차 창작물 중 하나인 드라큘라 2000 이라는 영화[43]에서는 최후에 드라큘라의 정체가 이스카리옷 유다라고 나온다. 은에 타격을 입는 이유가 예수를 은화 세닢에 팔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거라고.
-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캐릭터 판나코타 푸고의 모티브였었다. 왜 과거형이냐 하면, 초기안에서는 푸고가 죠르노 일행을 배신하고 중간 보스가 되는 스토리로 가려고 했다가 암울해져서 포기했기 때문.
- 그래픽 노블 쥬다스(Judas)에서는 유다가 자살한 뒤 지옥에 내려가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본작의 유다는 예수가 펼친 기적들과 현실 간의 괴리를 보면서 그를 원망하지만 나중에는 예수를 이해[44]하고 용서하며, 예수가 부활한 뒤에는 지옥에 있는 다른 이들을 인도하게 된다. 이때 검은 색의 광배가 그려진 모습이 특징.
- 다음웹툰 중 월요일에 연재되는 그라티아의 등장인물인 사신 진오기가 유다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악마들과 인간들을 배신하였다.
- 아이작의 번제의 캐릭터 중 하나로 구현되었다. 은화 세닢에 판걸 반영해서 처음부터 동전 3개를 들고 시작한다. 또한 악마와 거래를 해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벨리알의 서를 기본템으로 들고 시작하며 체력도 1칸으로 다른 캐릭터보다 낮다. [46] 유다가 죽은 장소인 아겔다마도 아이템으로 구현되어 있는데, 적이 있는 방에서 눈물방울이 이어진 모양으로 생성되는 아이템이다.
- 영화 세계사에서 예수와 다른 제자와 함께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을 갖던 중 예수가 이 자리에 배신자가 있다고 말하고, 웨이터가 주문을 받기 위해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크게 놀란다.
-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에 등장하는 이스카리옷의 이름의 유래도 이 사람. 정확하게는 출신 지역 이름이다.
- 웹툰 뉴 바이블에서는 예수를 오마주한 제이의 열두 제자 중 1명인 '김뽕'이 유다를 오마주했다. 마약사범이라는 특징 때문에 작중 내내 눈치없는 언행으로 제이의 어그로를 끌어 얻어맞는 역할로 나왔고, 이에 앙심을 품어 사적제재로 중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제이를 배신하고 신고해 사형을 선고받게 만드나 "어차피 곧 죽을건데 길동무 한 명 정도는 괜찮잖아?"라는 논리를 펼친 제이에게 살해당한다.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배우 김무생이 연기한 장면에 의해 이름이 언급된다. 5.16 군사정변 이 후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자신을 찾아온 장도영(노주현 분)에게 "가룟 유다만도 못한 놈"이라고 호통을 치는 장면이다.
9. 관련 문서
[1] 오른쪽 어두운 구석에 서있는 붉은 옷의 인물이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2] 예수의 제자였지만 그를 배신해 팔아넘기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 데다, 자살까지 했으므로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여겨져 축일이 있을 수 없다.[3] 현대 그리스어 표기는 Ιούδας ο Ισκαριώτης.[4]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인간을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존재로 여기며, 이러한 맥락으로 자살은 신의 피조물인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처럼 여겨 중죄로 본다.[5] 케빈 스미스 감독의 영화 도그마에서는 이를 비틀어서, 13번째 사도 루퍼스가 등장한다. 원래 사도들은 13명이 맞는데 루퍼스가 하필이면 흑인이어서 다른 백인 사도들의 견제를 받아 성경에 잘렸다고 한다. 근데 예수도 흑인이였지만 예수를 뺄 수는 없으니 졸지에 화이트워싱을 해야 했다고 한다.[6] 그가 있는 장소의 이름 주데카 자체가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뜻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이름 자체가 천벌 받아 마땅한 배신자라는 의미를 지닌 셈이다.[7] 후술하겠지만 위경(僞經) 유다 복음서를 믿던 영지주의 이단의 일부 분파는 유다가 예수로부터 밀명을 받고 예수의 대속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8] 괜히 브루투스와 카이사르파가 벌인 내전이 해방자 내전이라고 불리는게 아니다. 물론 해방자는 브루트스였다.[9] 당장 예수가 성장하며 지낸 나자렛이 위치한 갈릴레아 지방도 구약 시대에는 '이방의 갈릴레아'라고 불리던 히브리 왕국의 외부였다.[10] 구한말의 외래어 음역에서는 요즘 같으면 ㅋㅌㅍ 등 거센 소리로 음역할 것을 예사소리나 된소리로 음역하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 요새 같으면 '페트로스'라고 음역했을 것이다.[11] 예수의 (친척)동생 중 한 명이라는 설이 있다.[12] 한글판 성경 등에서는 유다가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는데 예수가 "네 말 그대로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정반대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리스어판 원문을 보면 유다가 "μήτι ἐγώ εἰμι(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고, 예수는 "σὺ εἶπας(네가 그렇다고 이야기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부분을 현대 그리스어로 옮겨도 "Εσύ το είπες"로 의미는 동일하다. 이는 인도유럽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정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에 기인하며, 보다 쉽게 영어로 풀이해보면 “Is it not me, Rabbi?”에 대한 답을 “Yes you are” 정도로, 그러나 덜 직접적으로 한 셈이다.[13] 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 13장 27절에서는 조각을 받고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말한다.[14] 파피아스는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현대의 튀르키예 파묵칼레)의 주교였으나 생몰년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단지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전반에 걸쳐 살았으며, 서기 100년 이후부터 저술활동을 했다는 정도로 두리뭉술하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본문에서 생몰년을 "60?-130?"이라고 물음표를 달아 설명하긴 했으나, 실제 역사와 10여 년 이상 차이나는 추정일 수도 있다.[15] 목 매달아 죽은 시신을 오래 두면 내장이 부패하면서 복부가 터져 장기가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다.[16] 쉽게 말해 그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한테 낭비하느니 차라리 그 돈을 날 줬으면... 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17]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τριάκοντα αργύρια(triakonta argyria). 은전도 아니고 그냥 '작은 은 30'이다.[18] 다만 요한복음 12장 6절의 유다의 성격에 따르면 진짜 물욕에 눈이 멀어 얼마 되지도 않는 양에 예수님을 판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배신이라는 측면에서 죄를 지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양심에 찔려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고작 30 세겔로 팔아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19] 아니면 단순히 제사장들이 조롱의 의미로 그렇게만 준 것일 수도 있다.[20] 요셉을 팔자고 한 인물의 이름도 유다이다.(창세기 36:25-28)[21]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밭에 대한 구절은 1장 18~19절인데,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2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 13:2)[23] 마침 또 헤로데 왕조는 에돔 혼혈에 하스몬 왕조를 찬탈한지라 첫번째 왕인 헤로데 대왕은 충분히 명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성경에서나 악한 왕으로 평가받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윗, 솔로몬 시절에 필적할만큼 넓히고 수많은 도시, 건축물을 건설했다.) 그다지 지지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이스라엘은 헤로데를 명군이라 여긴다(...)[24] 메시아 개념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 해방자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메시아로 인식했던 인물 가운데는 동족인 모세, 다윗 외에 이방인이었던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도 있을 정도. 키루스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바빌론 유수를 끝냈기 때문이다.[25] 이미 예수는 라사로 등 여러 사람을 되살린 바 있다. 단순히 물질적인 기적 뿐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기적까지도 보여주었다. 게다가 이미 유대교 속에서도 부활은 존재했다.[26] 이러면 베드로의 행동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데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를 잡으러 올때까지만 해도 칼을 들고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후에는 정작 스승을 3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병력은 상대가 훨씬 많고 작정하고 무장하고 왔으니 그저 호신용 칼만 들었을 뿐인 제자들이 무력으로 이들을 이길리가 없는데도 저항한 것은 '이분은 신의 아들이니까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런거고 정작 그 신의 아들인 스승이 평범한 인간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분은 신의 아들이 아닌 거 아닐까?'하는 의심에서 스승을 부인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베드로든 유다든 처음부터 안 믿고 처음부터 믿고 이런 게 아니라 처음에는 믿었으되 어느 순간부터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27] 사실 성경에선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봤으면서도 야훼를 저버려 광야에서 죽었다고 서술하긴 한다.[28] 이런 문제는 굳이 유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나오는데 예컨대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집트 파라오는 몇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려고 하였으나 하느님이 마음을 나쁘게 먹도록 유도하여 결국 7개의 재앙을 다 채우도록 만들고 욥기에 나오는 욥은 결국 보상을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욥의 원래 가족들은 모조리 몰살 당했다. 이러면 당연히 성서를 읽는 사람들 중에서는 "파라오는 (성경 기준으로 하면) 악인이긴 하지만 신이 의도한 대로 행동한건데 죄가 되느냐? 욥은 그렇다쳐도 억울하게 몰살당한 욥의 가족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가? 유다도 큰 맥락에서는 신의 뜻이었는데 그럼에도 지옥에 떨어지는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문제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로 갈음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다.[29] 전지전능한 알라가 보낸 예언자이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본다. 즉 알라가 보낸 예언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신이 '전지전능' 한 게 아닌데, 알라는 전능하므로 고통받지 않았다는 논리.[30] 예수가 다윗처럼 로마를 물리치고 다시 새 나라를 건국해주리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31] 그나마 베드로는 예수가 예상한대로 예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배신한 것에 크게 부끄러워했다고는 한다.[32]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상징한다.[33] 기독교는 절대자가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사용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절대자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선한 선택 혹은 악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영원을 사모하고 선을 따르는 본연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인간을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더불어 하느님은 선하든 악하든 어떤 인간에게든지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를 원한다. 때문에 주어진 은총을 거부하고 그릇된 길로 가는 인간에 대해서는 죄악에 그저 내버려 둘 따름이다.[34]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후임을 선택하기 전 했던 기도 중 "유다는 이를 버리고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갔나이다"란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적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이들도 있다.[35] 다만 유다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열심당원이라는 속설은 정확한 근거가 남아있지 않고, 오히려 소심하고 찌질한 모습을 많이 보이거나 예수 공동체의 회계를 관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본문이 있고, 예수를 판 돈으로 땅을 사는 등, 그냥 돈을 위해 예수를 판 것이다라는 해석도 존재한다.[36] 파티를 계획할 때 초대할 사람이 13명이면 1명을 더 초대한다든가. 이와 관련된 유명한 소설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13인의 만찬이 있다. 원제 에지웨어 경의 죽음. 우리나라의 건물들의 4층을 F로 대체한것과 유사하나 이에 비해서는 좀 더 믿는 경향이 크다. 4층은 어쩔수 없이 가야할때도 있지만 13명은 굳이 13명으로 맞춰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37] 예수가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임종에 임박하자 유다가 그를 찾아온다. 이 장면에서 유다가 예수에게 "배신자!!"라며 분노하는 모습이 백미.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지만 그러기 위해서 악역을 떠맡을 사람은 유다가 되었다. 물론 유다는 몇 번이고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끝내 겨우겨우 배신을 했는데 그 대가가 이 모양이니 울화통이 치밀어오를만도 하다. 하지만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에 경험한 환상으로 밝혀진다.[38] 기독교에서는 사실 육체적 쾌락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식욕도 성욕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 다만 지나친 것과 옳지 못한 방법으로 그것을 취하는 것을 거부한다. 혼외정사나 간통 등이 그에 해당된다. 그런 것을 거부하는 것이 육체적 쾌락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그 까닭은 고통이 선이고 쾌락이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올 더 큰 기쁨, 더 큰 쾌락인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위해서이다.[39] 기독교 오컬트에선 지옥에 있는 악마들이 각 6666마리로 구성된 1111개의 군단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40] 사실 성부는 지금까지도 아들을 팔아넘긴 유다를 몹시 미워하며 용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면죄부가 죄를 면해주어 그 죄를 이유로 들어 벌주는 것을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지. 면죄부로 죄를 면했어도 배신이란 게 꽤나 큰 죄였던 터라 주기적으로 지옥을 방문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41]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42] 아이러니한 점은 12명의 사도를 거느리는 백야는 적그리스도가 모티브이고, 12번째 사도의 고해를 받고 백야를 제압해주는 단 한번의 악과 수백 가지의 선행은 예수가 모티브라는 점이다.[43] 무명시절의 제라드 버틀러가 허여멀건한 드라큘라로 나온다. 드라큘라는 관에 봉인되고, 반헬싱은 드라큘라의 혈청을 주사해가며 수명연장을 해가면서 드라큘라를 죽일 방도를 모색한다. 그와중에 딸을 낳았는데, 딸에게도 드라큘라의 피가 흐른다.[44] 처음에는 자신이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곧 몰려든 수많은 죄인들과 악마들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저항하기는커녕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들의 죄를 짊어지는 예수를 보고 신이 정한 이야기에 갇혀있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선택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45] 그의 주요기술들이 거짓말을 사용한 기술이라 그렇다.[46] 이 게임에선 악마와 거래로 최대체력을 소모한다.[47] 석가모니와 대적한, 불교의 유다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