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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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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American Occupation of the Ryukyu Island
アメリカ合衆国によるりゅうきゅう統治
류큐 열도 미국 군정청[1]
[ruby(琉球列島米国軍政府, ruby=りゅうきゅうれっとうべいこくぐんせいふ)]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of the Ryukyu Islands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2]
[ruby(琉球列島米国民政府, ruby=りゅうきゅうれっとう べいこく みんせいふ)]
United State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
미국의 군정(1945~1950)
미국의 민정(1950~1972)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상선기.svg
국기(1950~1959) 상선기[3]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령 류큐 국기.png
국기(1960~1972) 비공식 민정청기[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cation_Ryukyu_Islands.png
1945년 ~ 1972년
성립 이전 반환 이후
대일본제국 오키나와현 일본국 오키나와현
<colbgcolor=#002664> 위치 쿠치노섬 이남의 류큐 열도
정치체제 군정체제
국가원수 미국 대통령[5]
정부수반 군정장관 → 민정장관 → 고등판무관
언어 일본어, 류큐어, 영어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라틴 문자
종교 류큐 신토, 불교, 신토, 기독교
민족 류큐인, 미국인
주요 사건 1945년 오키나와 전투
1945년 류큐 열도에 미군정 시작
1950년 미국 민정청 수립
1972년 일본에 류큐 시정권 반환
통화 A엔(1945~1948)
B엔[6](1948~1958)
미국 달러(1958~1972)

1. 개요2. 전후 상황 정리3. 미군정 시대4. 역대 지도자5. 각종 정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Seal_of_High_Commissioner_of_the_Ryukyu_Islands.svg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시기의 문장.

1945년 6월 미국일본 제국으로부터 오키나와 전투를 통해 점령한 류큐 열도를 1972년 일본에 반환하는 시점까지 군정의 형태로 통치하던 시대이다. 크게 미군이 직접 통치하던 류큐 열도 미국 군정청(USMGR, 1945년 ~ 1950년)과 미국 군정청의 후신인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USCAR, 1950년 ~ 1972년) 시기로 구분한다.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미국시대(アメリカユー)\'라고도[7] 불린다.

2. 전후 상황 정리

1945년 4월부터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5년 6월 오키나와를 완전히 점령한 미국조선처럼 이 지역을 일본에서 완전히 떼어놓기 위해 류큐에 군정부를 세웠다. 동년 8월에는 일본이 패전했고 일본 본토와 한반도 역시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나, 추후 독립시킬 작정이던 한반도나 일본 본토와 달리 류큐는 미국의 태평양 전쟁 전리품으로서 계속 통치할 생각이었다.[8] 미국은 잠시 류큐를 독립시키는 구상도 고려했지만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공산당이 세를 잡아 버리고(1949)[9], 급기야 북한6.25 전쟁을 터뜨리는 바람에(1950) 미국의 류큐 독립 구상은 완전히 폐기되었고, 미국은 일본과 함께 애치슨 라인에 이 지역을 집어넣으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군사 기지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때부터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이후 오키나와는 동북아 미군의 거점이 된다. 동중국해 포위망의 정중앙이므로 중국이 오키나와를 손에 넣을 경우 한국과 대만을 손쉽게 양동공세로 밀어붙이는 게 가능하며, 한국과 대만이 중국의 손에 떨어질 경우 일본과 필리핀도 무사할 수 없다. 사실상 오키나와를 포기할 경우 극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며 중국의 태평양 진출로가 생기게 된다. 오키나와 반환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에 관한 미국 내부 협의에서도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고 이를 어떻게든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였다.[10]

우선 일본이 패전한 직후 상황부터 살펴보자면,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 국내 여론은 당시 전쟁의 최고 책임자였던 쇼와 덴노를 당연히 전범재판에 세우려고 했으며 천황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쇼와 덴노는 미국이 자신을 재판에 세우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전진기지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쇼와 덴노는 당시 주일 미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협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쇼와 덴노는 법적 책임을 권력 박탈과 재산 몰수로 끝내고[11] 형사책임은 피하게 되었으며, 전(前) 총리 도조 히데키 같은 A급 전범들만 형사책임을 지게 되는데, 그 대가로 미국에 넘어간 게 오키나와였다.

3. 미군정 시대

1950~60년대 당시 일본에선 안보투쟁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일본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본토 내의 미군기지를 1/4까지 줄이는 데 합의했지만 결과적으론 본토에서 줄어든 기지만큼 오키나와의 미군 규모가 증강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기지화하면서 현지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시작한다. 먼저 기지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해 땅을 빼앗거나 헐값에 강매하도록 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고, 1954년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해 미군은 오키나와의 경제를 흔드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12] 결국 땅값을 올려서 지불하는 것으로 오키나와 주민들과 어거지로나마 합의하였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속속 들어서면서 미군 관련 사건사고도 크게 증가했다. 1959년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를 비롯하여 잦은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 오키나와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게다가 사격 훈련으로 자연이나 농지가 훼손되고, 군사기지에서 나온 오염물질이 우물이나 하천을 오염시켰다.[13] 심지어 원자력 잠수함에서 방사능이 누출되기까지 했다. 1969년에는 치명적인 독가스를 미군이 오키나와에 대량 비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누출사고로 인해 폭로되기도 했다.[14]

미군 병사에 의한 범죄도 매우 자주 발생했다.[15] 게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도 증거불충분 등으로 무죄를 선고받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 12월에는 주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미군 병사의 뺑소니로 인해 코자시(コザ市)에서 코자 폭동(コザ暴動)이 발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 미군정 하에서는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분위기가 생겨나 1960년 오키나와 조국 복귀 협의회(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조직되어 조국복귀운동(祖国復帰運動)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귀속되면 본토의 평화헌법이 적용되어 미군 기지를 철수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진행된 운동이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 안보투쟁에 참여하거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도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16]를 쫓아내기 위해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을 지지했다.

고자 폭동(コザ暴動)과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의 여러 모습들.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가 1965년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반환 없이는 일본에 전후(戰後)란 없다"고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9년 사토 에이사쿠와 리처드 닉슨과의 회담에서 1972년에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것으로 양측은 합의하였다.

1972년 당시의 '복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역 내에서 독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많고 오키나와 현에서도 독립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지만, 독립하고자 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장을 묵살해 버리고 날치기로 오키나와 현 유지안을 통과시켰다는 설도 있어 두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당시 주민의 24.9%는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반환 여론의 주된 근거였던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 반환 이후에도 실현되지 못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미군 핵무기 철수를 포함한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에 대해 반대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상사태 발생 시 전쟁 억지력의 감소를 심각하게 우려했었다. #

4. 역대 지도자

직위 대수 이름 기간
美군정 군정장관 제1대 사이먼 버크너 (중장)[17]1945년 4월 1일 ~ 1945월 6월 18일
대행 로이 가이거 (대장)1945년 6월 18일 ~ 1945년 6월 23일
프레드 클루트 월리스 (소장)[18]1945년 6월 ~ 1946년 4월 23일
제2대 조지프 스틸웰 (대장)1945년 6월 23일[19] ~ 1945년 10월 16일
제3대 로렌스 로슨 (준장)1945년 10월 17일 ~ 1945년 12월 29일
제4대 프리몬트 바이런 호슨 (준장)1945년 12월 30일 ~ 1946년 2월 26일
제5대 리오 도노반 (소장)1946년 2월 27일 ~ 1946년 5월 21일
제6대 프레드릭 로드 헤이든 (준장)1946년 5월 24일 ~ 1948년 5월 11일
제7대 윌리엄 이글스 (소장)1948년 5월 12일 ~ 1949년 9월 30일
제8대 조셉 시츠 (소장)1949년 10월 1일 ~ 1950년 7월 21일
제9대 로버트 매클루어 (소장)1950년 7월 28일 ~ 1950년 12월 6일
대행 해리 셔먼 (준장)1950년 12월 6일 ~ 1950년 12월 9일
제10대 로버트 S. 바이틀러 (소장)1950년 12월 9일 ~ 1950년 12월 15일
직위 대수 이름 기간
美민정 민정장관 제1대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1950년 12월 15일 ~ 1951년 4월 11일
제2대 매튜 B. 리지웨이 (대장)1951년 4월 11일 ~ 1952년 5월 12일
제3대 마크 클라크 (대장)1952년 5월 12일 ~ 1953년 10월 7일
제4대 존 헐 (대장)1953년 10월 7일 ~ 1955년 4월 1일
제5대 맥스웰 테일러 (대장)1955년 4월 1일 ~ 1955년 6월 5일
제6대 리먼 렘니처 (대장)1955년 6월 5일 ~ 1957년 6월 30일
미국 민정청 고등판무관 제1대 제임스 에드워드 무어 (중장)1957년 7월 4일 ~ 1958년 4월 30일
제2대 도널드 프렌티스 부스 (중장)1958년 5월 1일 ~ 1961년 2월 12일
제3대 폴 캐라웨이 (중장)1961년 2월 16일 ~ 1964년 7월 31일
제4대 앨버트 왓슨 주니어 (중장)1964년 8월 1일 ~ 1966년 10월 31일
제5대 퍼디난드 토머스 엉거 (중장)1966년 11월 2일 ~ 1968년 1월 28일
제6대 제임스 벤자민 램퍼트 (중장)1968년 1월 28일 ~ 1972년 5월 14일

5. 각종 정보

이하 내용은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郎)의 홈페이지(현재는 접속불가) 『世界飛び地領土研究会』에 의함.

6. 관련 문서



[1] 1945년~1950년[2] 1950년~1972년[3] 이 깃발은 류큐 상선들의 깃발로 1950년~1972년까지 사용.[4]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를 제외한 미국 통치 류큐 민정청을 상징했던 비공식 깃발. 미국 통치기 류큐의 국기는 아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한민국정부상징 정도이다. 합병 전 류큐 번기와 노란색과 파란색의 위치가 다르다.[5]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6] 미국이 오키나와 한정으로 발매한 군표.[7] '시대'를 뜻하는 ユー는 일본 본토 일본어 世(よ, 요)에 대응되는 것으로 생각된다.[8] 이 점에서 미군이 마찬가지로 군정을 실시하다가 훗날 완전히 미국령으로 편입한 북마리아나 제도(사이판)과 유사하지만 1차 대전 전리품으로서 독일로부터 빼앗아 남양 군도라는 식민 기관을 통해 일본이 고작 20여 년 관리한 사이판 등 북마리아나 제도와 달리 오키나와는 이미 17세기 초부터 사쓰마번에 복속된 일본의 속국이었으며 19세기에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어 본토 행정단위인 도도부현으로 직할 통치를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미국 입장에서도 오키나와 군정은 온전한 일본령을 미국이 귀속했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이 점에서 일본 본토 가운데 1968년까지 미국이 통치한 오가사와라 제도와도 유사하지만 오키나와가 인구가 훨씬 많고 중요한 지역이었다. 패전국의 영토가 전리품이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칼리닌그라드쿠릴 열도 등과 유사하다.[9] 중국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오키나와를 탐냈다는 말이 있다. 다만 오키나와는 대만과는 달리 중국의 영토였던 적이 없고,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도 없다시피 한데다가 중국의 내부 사정도 개판이라 국민당 내에서도 그닥 환영받는 주장은 아니었다.[10] 『미일동맹: 안보와 밀약의 역사』 출처.[11] 정확히 말하면 이런 점에서 민사상 책임은 진 셈이다. 그리고 재산 몰수의 경우 겉보기로만 봐서는 "일본 황실은 지금 누릴 거 다 누리고 특권도 다 있는데 재산이 몰수됐다니?"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 일본의 황실은 사유재산을 보유할 수 없고 내각에서 주는 국민 세금으로만 생활할 수 있다. 일본 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내탕금, 즉 황실의 사유 재산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나 지금은 0엔이다.[12] 전쟁 직후의 오키나와의 실질적인 화폐는 미군의 군표였다.[13] 한때 미군 훈련장이었던 얀바루 국립공원 같은 곳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당시 미군이 버린 폐기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14] 이 독가스는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 끝에 1971년 초 태평양의 존스턴 환초로 이송된다.(레드 햇 작전) 이 사건은 돌아온 울트라맨독가스괴수 모그네즌의 모티브가 되었다.[15] 특히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미군은 술과 마약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다.[16] 오키나와는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보내던 B-52 폭격기의 기지로 쓰이는 등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중요한 후방 지원기지였다.[17]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 사후 대장 진급[18] 오키나와사령부 사령관[19] 1945년 7월 31일까진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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