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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9:20:13

연일 정씨

영일 정씨에서 넘어옴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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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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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신라 6성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70><tablebordercolor=#ecd8e9>
파일:연일 정씨 종문.svg
延日 鄭氏
연일 정씨
}}}
<colbgcolor=#710048> 관향 경상북도 포항시 연일읍
시조 정종은(鄭宗殷)
중시조 정습명(鄭襲明), 정극유(鄭克儒), 정자피(鄭子皮)
집성촌 경기도 용인시, 평택시
충청북도 영동군
경상북도 김천시, 봉화군, 의성군
울산광역시 울주군
함경남도 고원군
평안남도 룡강군
황해도 평산군
인구 393,622명[1](2015년)
1. 개요2. 인구통계3. 본관과 성씨의 기원4. 역사
4.1. 시조 묘에 대한 전설4.2. 포은설화
5. 집성촌
5.1. 연일정씨 집성촌유래비
6. 항렬표7. 역대 과거 급제자 (조선시대)8. 양자 입적 문제9. 주요 인물10. 관련 사이트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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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87950124A4C7171B7F5D7.jpg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의 연일 정씨 시조를 모시는 남성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Goryeo-Portrait_of_Jeong_Mongju-02.jpg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의 초상화
경상북도 포항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연일 정씨는 영일 정씨, 오천 정씨, 포항 정씨로도 표현하고, 전부 같은 가문이다. 포항시의 옛 이름이 연일, 오천, 영일이라 지명이 변천해왔어서 집안마다 달리 부를 뿐이다.[2]

2. 인구통계

2015년 인구통계에서 정(鄭)씨는 5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이다.

정(鄭)씨는 우리나라 총인구 49,705,663명중 2,151,879명인데 그 중 연일정씨의 인구는 393,622명인이다.
동래 정씨 다음으로 많으며, 연일 정씨 다음으로는 경주 정씨가 있다.

연일정씨, 영일정씨, 오천정씨는 모두 연일정씨랑 같은 이름이며 각각의 인구는 연일정씨 284,290명, 영일정씨 65,991명, 오천정씨 43,341명이다.

보통 본관인 포항시를 위시로 한 경상북도 동부 지역,[3] 충청북도, 강원도 영동에 많이 살고 있다.

3. 본관과 성씨의 기원

영일(迎日)은 경상북도 포항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의 근오지현인데 경덕왕이 임정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연일(延日)로 고쳐서 경주에 속하게 하였다. 이 후, 명칭이나 영역에 큰 변화가 없다가 1914년 일제가 이웃한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을 병합하여 영일군(迎日郡)으로 개칭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일 정씨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육부촌중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 봄, 유리왕으로 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받을 때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 정종은이 신라조에서 간관으로 직언을 하다가 인동 약목현에 유배된 후, 후손 정의경이 영일로 이거하여 호장을 지내고 영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로 시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가 실전되고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조에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받드는 지주사공파와,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 그리고 고려 현종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정자피(鄭子皮)를 시조로 하는 양숙공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잇고 있다.

4. 역사

시조는 신라 때 간관 정종은(鄭宗殷)이다. 주요 종파로는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중조(中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중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 현종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정자피(鄭子皮)가 중조인 양숙공파(良肅公派)가 있다. 연대로 보면 양숙공파가 고려 현종 때로 계보가 가장 앞선다. 그러나 지주사공파에서는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감무공파에서는 송강 정철(鄭澈)이 잘 알려져 있다.

연일 정씨 가문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 5명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고 정유성(鄭維成:현종 때의 우의정)을 비롯한 3인은 정몽주의 후손이고 정홍명(鄭弘溟:인조 때 대제학)·정호(鄭澔:영조 때 영의정)·정우량(鄭羽良:영조 때 우의정) 등은 정철의 후손이다.

종파별 출신인물로는 지주사공파에, 상술한 정유성의 손자이자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에는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 등의 인물이 있다.

4.1. 시조 묘에 대한 전설

시조 정습명은, 고려조 의종의 태자적 스승, 즉 국사(國師)로 태자의 교육과 인종조 폐위 논란에서 태자를 지켰던 충신이다.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에 정습명(鄭襲明)을 제향하는 남성재와 신도비가 음성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원래 구 연일현청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옛날 현청에 새로 부임하는 현감마다 원인도 모르게 죽는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게 되자, 이 소문을 들은 담력이 좋은 한 선비가 자청하여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임 첫날, 두려움 중에 밤을 새우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내가 누운 자리에 무엄하게 현청을 지었으니, 빨리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감이 엉겁결에 대답하였다.
“정확한 묘자리가 어디입니까? 알려주시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새벽 일찍 까치 한 마리 날아와서 맨처음 앉는 자리가 그 자리니라.”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리고 느닷없는 까치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까치가 날아와 있었다. 훗날 마을의 촌로들에게 까치가 날아와 앉은 자리를 수소문한 결과 현청부지가 정습명의 묘역임을 알게 되었다. 현감은 서둘러 현청을 고읍리로 옮겼다고 전한다.

4.2. 포은설화

비슷하게, 포은공파 파조인 정몽주가 현신하는 설화도 전해진다.
손칠휴(孫七休)가 경상도 안찰사로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지역을 순시하는 도중 영천군의 경계를 막 넘어가려고 하였을 때 몹시 졸려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말에서 내려 잠시 잠을 청했다.
그러자 꿈에 눈과 같이 핀 수염을 흩날리면서 웬 노인이 나타나 "나는 포은이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이 몹시 퇴락하여 비도 새고 바람도 세차게 들어와서 몹시 괴롭다."고 하면서 마치 부탁하는 것과 같은 말씨였다.
칠휴는 깜작 놀라 일어나 그 지역의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당의 흔적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으며 완공 후 칠휴가 스스로 자신이 그곳에 가서 제전(祭奠)을 지냈으며 글을 지어 사당의 벽에 붙여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中

5. 집성촌

5.1. 연일정씨 집성촌유래비

<colbgcolor=#bdb76b><colcolor=#fff>
파일:bi.jpg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왕산리 465-3
설립일 2016년 11월 6일
연일 정씨 왕곡파 종중은 포은 정몽주의 묘소인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서 동남쪽으로 9km 떨어진 모현읍 왕산리에 종중회관을 둔 종중이다.

1630년 들어 포은의 직계후손 3형제 정응선(별좌공), 정명선(판서공), 정종선(포천공) 중 셋째인 정종선 포천현감은 후손을 번창시키고자 당시 풍수지리에서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금거북이 알을 낳으려 진흙에 꼬리를 넣은 형세)의 길지로 되어있는 왕구리(旺龜里, 모현읍 왕산리의 옛이름)에 장성한 맏손자 정지한을 보내어 집안을 이어가도록 하였다. 정지한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셋째 동생 정영한의 장남인 정태징을 양자로 들였으며, 정태징 또한 아들이 없어 판서공파 정노징의 차남인 정찬종을 양자로 들였다. 정찬종은 서자 셋이 있어서 대를 물려줄 수도 있었지만,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는 서자손을 꺼리는 기운이 있어 부득이 1750년경 황해도 첨추공파에서 정련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더구나 정련은 무인이었으므로 모두가 형뻘이며 성품이 조용한 서자 3형제인 정연(15살 위), 정윤(두살 위), 정단(두살 위)과 갈등이 있어 왔다.

일제가 종중 임야를 빼앗으려 토지조사를 할 무렵, 집안 어른들은 집안에서 내려오던 임야를 지키고자 3만여 평의 임야를 부득이 양자손인 정대영 이름으로 사정받았는데, 이후 1960년대 들어 집성촌에 한국외대 캠퍼스가 들어와 땅값이 오르게 되자 그 아들인 정연준이 아버지가 물려준 차명을 이용하여 몰래 종중 산을 팔아먹는 일이 생겼다. 이를 지키려는 포천공파 양자손과 황해도의 첨추공 양자손 간에 반목과 갈등이 발생하고 재산 싸움으로 이어져 수십 년간 종중이 평화롭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10월 26일, 종중 갈등을 통합하려는 원로들의 요청으로 정덕화[5]가 종중의 통합회장으로 선출되자 경향각지로 흩어진 종원들을 모으고 정관을 바로잡아 종중을 정립시키고 집안의 이러한 역사적인 유래를 후손들에게 전승하고자 2016년 11월 6일 파조 정지한의 시제일[6]에 종중의 위토였던 곳에 그 유래를 밝히는 연일 정씨 집성촌유래비를 설치하였다. 많은 연일정씨 후손들이 경향각지로 진출함에 따라 이곳 집성촌에 남아있는 집안은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2016년 11월 16일 전 종중회장 정덕화는 종중의 유서깊은 토지를 대대로 지기기 위해 이곳에 설치하고 이후 주변관리를 해 와서 평소 몇몇 종원들이 이를 시기해 왔는데 2023. 8. 18. 당시 실권을 행사하던 정덕교(정연창의 장자) 총무가 마침 마을 이장이던 정연중(정시화의 장자)을 시켜 모현읍 이장회의 때 용인의 보호수 앞에 자리를 허락받아 유래비를 몰래 옮겨놓았다. 이 때 종원들은 정덕화가 지키려던 종중재산을 정덕교가 팔아먹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2024. 4. 20. 정덕교는 본인이 사주한 것을 감추기 위해 정연중에게 감사패를 만들어 주기도 했으나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이 비석에는 종중로고와 함께 거북 모양의 종중심볼이 새겨져 있는데, 이 거북은 금거북을 나타내는 것이며 한자로는 왕구(旺龜)로, 왕산리의 옛이름 왕구리도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현재 이 금거북 심볼이 연일정씨의 심볼로 표시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것은 연일정씨 족보찾아주기 운동을 하던 정덕화가 2004. 12. 21. 홈페이지 Yuniljung.com에 사용하다가 2007년 고향인 왕구리 왕곡파 종중에 관여하면서 사용하던 심볼이다.

참고로 용인이 포은 후손의 세거지가 된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복권된 정몽주의 묘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517년 종중 때 능원리 일대 약 700여 정보를 사패지로 하사받고 수백 년 동안 자손들이 그곳에 정착, 번성하였다. 이후 손자인 정보(鄭保)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가, 숙종 때 단종이 복권되고 사육신이 포상받게 되면서 연일정씨도 다시 번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의 7대손에 이르러 별좌공파·판서공파·포천공파로 분파되었고, 상술된 바와 같이 포천공 정종선(鄭從善)의 손자인 정지한(鄭之翰)이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왕산리 왕곡마을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이후 갈담리와 일산리 등으로 퍼졌다. 사실 능원리 집성촌에 터잡은 포은의 직계 삼형제인 별좌공, 판서공, 포천공 간에는 후손이 귀하여 서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주고받는 일이 빈번했던바 이들 후손들은 모두가 한 식구라는 정서가 있으며 각자가 포은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다.

6. 항렬표

해당 항렬표는 임의로 가져온 것이고 출처가 명확치 않음. 각 파에 따라 항렬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니 유의해서 보길 바람.
파일:2-3.jpg

7. 역대 과거 급제자 (조선시대)

8. 양자 입적 문제

고려의 문하시중이자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집안에는 양자에 얽힌 사연이 있었다.

가통(家統)을 중시했던 조선 후기에는 비록 양자법이 보편화 되어 있었으나 양자를 들이기 위해서는 정실 부인은 물론 부실(副室)도 아들이 없어야 했고, 생가와 양가 부모의 합의는 필수적이었다. 이런 조건이 갖춰져도 왕의 재가를 얻고서야 비로소 예조에서 입안(立案)이라는 인준문서를 발급해 주었다.

포은의 자손들이 사회적인 대우는 받았지만 가세는 무척 빈한했던 것인지, 12세손이었던 정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인 안동 권씨 집안에 외탁되는 등 처지가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송시열이 정호에게 벼슬과 식량을 내려 줄 것을 숙종에게 건의한 적도 있었다.[8] 그러나 배려가 무색하게 정호의 가세는 펴지지도 않았고, 어린 아들 하나만 달랑 남겨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 버렸다. 이에 의정부의 최석정, 이정신이 나서 아들의 생계대책을 적극적으로 주선해 주었지만, 그 아들 역시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결국 포은 집안에는 가난과 종통의 단절이라는 이중고가 찾아들었다. 이를 두고 관료사회에서 연민의 시선이 많아, 영의정 오명항은 정호의 조카 정도제를 종손으로 입양하고 예조의 증명서도 단단히 받아 두어 자손을 잇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조카 정도제마저 요절해버렸다. 추후 좌의정 김재로영조의 면전에서 포은 종손의 입양 문제를 간청하여 재가를 얻었으니, ‘건륭원년6월일예조입안(乾隆元年6月日禮曺立案, 1736)’이 바로 그 증명서다. 하지만 이때도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궁여지책으로 정도제의 생가 아우 정하제가 양자로 내정되었지만 여기에도 곡절이 있었다. 정하제는 정정석의 외아들이었고, 정하제를 양자로 들이기 위해서는 정도제의 입양사실이 파기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은의 ‘종통잇기’에 골몰했던 신료들은 정도제의 입양 파기와 하제의 입양을 아예 공론으로 정해 버렸고, 포은의 후손이며 양명학의 대가였던 정제두도 이에 동의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신료들이 사전준비를 마쳤고 왕과 대신이 상견하는 자리에서 좌의정이 나서서 사안을 매듭지었다.

9. 주요 인물[9]

10. 관련 사이트

11. 관련 문서


[1] 연일 정씨 284,290명 + 영일 정씨 65,991명 + 오천 정씨 43,341명 =393,622명[2] 이외 다른 명칭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포항시 지명이 시대별로 달랐기 때문일 뿐, 다 같은 조상으로부터 계보를 잇는 동성동본이다.[3] 경상북도 북부와 대구광역시를 위시로 한 서남부 지역은 동래 정씨들이 더 많이 산다.[4] 1973년 7월 1일 봉화군 상운면으로부터 두월리와 함께 편입됨[5] 웹사이트 연일정씨 족보찾아주기 운동의 운영자이다.[6] 매년 음력 10월 5일이 속하는 주의 일요일 10시이다.[7] 문과 111명, 무과 34명, 사마시 277명, 의과 1명,음양과 2명, 율과 1명[8] 정몽주의 열성팬이었던 송시열은 이 문제와 관련된 얘기가 많다. 자세한 사항은 송시열 문서 참조.[9] 가나다 순으로 적어주세요.[10] 간첩 적발 후 수감 중에는 본관을 정부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이른바 '한양 정씨'의 시조로 정해버리기도 했으나 출소 후 족보 수소문을 통한 증빙 과정을 거쳐 연일 정씨로 규명되었다[11]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억류당하고 강제로 예편당한 비운의 인물. 위의 공군참모총장 정상화와 고향도 같고 동성동본에 이름 돌림자도 비슷한 걸로 보아 가까운 집안인 듯.[12] 25세손 'O澤' 항렬[13] 형제 : 정지택, 정윤택[14] 감무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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