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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ндрей Тарковский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 | ||||
<colbgcolor=#000> 본명 |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 타르콥스키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2] | |||
출생 | 1932년 4월 4일 | |||
소련 러시아 SFSR 이바노보주 자브라지예[3] | ||||
사망 | 1986년 12월 29일 (향년 54세) | |||
프랑스 파리 | ||||
국적 | 소련[4] | |||
직업 | 영화감독, 작가, 연극연출가, 영화 이론가 | |||
수훈 | 레닌훈장 (1990년 추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활동 기간 | <colbgcolor=#fff,#191919>1958년 – 1986년 | ||
신체 | 171cm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5] | |||
묘소 | 프랑스 셍뜨쥬느비에브데부 러시아인 묘소 | |||
혈통 | 폴란드계 러시아인, 루마니아계 러시아인 | |||
부모 |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6](1907~1989)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슈나코바 | |||
배우자 | 이르마 라우쉬(1957년 결혼 / 1970년 이혼) 레리사 타르코브스카야(1970년 결혼) | |||
자녀 | 아들 아르세니 타르콥스키(1962년생) 아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1970년생) 아들 알렉산드르 타르콥스키(1986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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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한 소련의 영화감독.
역사상 최고의 영화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으며, 특히 롱테이크를 통한 몽환적이고 명상적인 영상으로 유명하다.
불우한 가정 형편, 소련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 54세로 요절한 짧은 생애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적 주제의식을 담은 탁월한 걸작들을 배출해 '영화예술의 순교자'라고 불리며,[7] 현대 러시아 영화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2. 생애
1932년 4월 4일,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 감독은 소련의 유명한 시인이며 모스크바 대학 교수였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슈나코바는 인쇄소 교정공이었다. 불행히도 1936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 타르콥스키 감독은 그의 여동생 마리아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이 시절, 그의 어머니는 레프 톨스토이의 책을 자주 읽어주셨다고 한다.그는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교를 다녔고, 음악학교 과정도 함께 이수하였다. 3년간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동양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일본어에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 고대 일본 시 양식인 하이쿠를 즐겨 읽었다. 그의 졸업 성적은 보통 수준이었으나, 문학과 음악에서만큼은 두각을 나타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 시기가 자신의 `단련의 시간'이었으며, 이때 `관찰의 훈련'을 쌓았다고 말한다. 1956년, 국립영화학교 VGIK 에 입학했으며, 1961년,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을 졸업작품으로 낸다.
1962년, 첫 장편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소련 영화계의 주목 받는 신인감독이 되었으나,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으로부터 '자본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예술성향을 가졌다'고 비판 받기 시작하며 향후 활동에 큰 차질을 겪었다. 자본주의 시장에선 기획 하나가 무산되면 다른 회사를 찾아다녀서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공산권에서는 영화 투자를 모두 정부에서 단독 승인하므로 영화 제작을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는, 〈안드레이 루블료프〉 자체보다도 러시아 영화계 황금기인 '흐루쇼프 해빙기(Хрущёвская оттепель)'가 끝난 탓이 더 컸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으로 시작된 문화적 해빙기 동안, 러시아 영화는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학이 난다〉를 내놓는 등 대외적인 최전성기를 구가했는데, 196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집권으로 해빙기가 끝나고 일명 '침체 시대(Пери́од засто́я)'가 시작되며, 좋은 작품을 만들었던 여러 러시아 감독들의 작품 활동이 위축되었고, 타르콥스키가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가장 큰 희생자가 된 것이었다. 물론 타르콥스키의 경우 워낙 그 창의성과 명성이 뛰어났기에 무작정 배척되거나 박해받지는 않았고, 도리어 소련 내 지지자들이 드러나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당대 소련 평단 안에서는 타르콥스키의 작품들을 극찬하는 풍조가 흘렀다고 하는데, 덕분에 타르콥스키의 창작 활동이 완전히 끊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타르콥스키는 정부의 탄압으로 의도치 않게 감독 생활 대부분을 사실상 실업자 신세로 살아야 했는데, 타르콥스키의 일기장을 출간한 책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를 보면 당시 그의 괴로움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1970년 9월 22일
오늘은 내게는 우울한 날이다. 〈루블료프〉의 상영 허가는 상영시간을 10분 단축시켜야만 날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 체르누짠[8]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수년 간에 걸친 싸움은 바로 필름을 자르지 않고 내용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기에, 나는 이 상영 허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미친 놈들이다! 사기꾼들이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상영시간을 단축하지 않겠다. (p.53)
1972년 2월 15일
나는 지쳤다. 4월이면 마흔 살이 된다. 이 나이에 접어들면서도 내 인생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다. 푸시킨은 자유는 누리지 못했어도 그 대신 최소한 유토피아와 내적인 평화는 누렸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p.87)
1972년 2월 21일
로마노프[9]가 〈솔라리스〉의 수정된 필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류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작품을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조프[10]가 목요일에 보자고 한다. 그는 아마 내가 좀 더 수정작업을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겠지. 그러나 뭘 어떻게 더 고치란 말인가? 〈루블료프〉 때와 똑같은 드라마가 또다시 시작되고 있다. (p.88~89)
1973년 1월 29일
아! 나와 5년 계약을 맺고자 하는 누군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년 동안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난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일곱 편의 영화는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p.101)
1973년 4월 14일
영화는 보잘것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주된 원인은 영화가 이른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와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인들에게 영화란 돈을 버는 수단이 되고 이름을 얻는 방법을 의미할 뿐이다. 나의 작품들과 내 작품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나의 인생관과 반드시 일치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물론 나의 이런 자세를 기분나쁘게 생각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고 있다. (p.112)
1975년 3월 2일
예르마쉬[11]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거울〉을 칸 영화제에 보내는 것을 무조건 거절했다. 배씨는 매우 분노했다. 예르마쉬는 배씨에게 본다르추크, 비코프, 플리세즈카야 등의 작품을 추천하며 설득시키려 했으나 배씨는 작품들을 보고나서는 〈거울〉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될 것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라며 더욱 흥분했다. 그러나 대상을 수상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을 당국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내 작품들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폄하시키려고 항상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 (p.135~136)
1979년 2월 6일
시조프가 나를 불렀다. 그는 나의 이탈리아 여행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또한 〈거울〉의 이탈리아 시사회도 문제될 게 없단다. 당국은 심지어 〈잠입자〉를 모스크바 영화제에 선보이려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작품을 빨리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조치를 취하는 이유는 뻔하다.
* 〈잠입자〉를 칸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기 위해서.
* 작품 수정을 강요하기 위해서.
* 궁극적으로 나의 이탈리아 여행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 (p.182)
1979년 10월 22일
외로워서 미칠 지경이다. 슬픔과 역겨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온다. 고독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이 고독감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린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배반했거나 지금도 배신하고 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내 영혼의 모든 숨구멍들은 열려 있고 저항력과 보호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죽음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지고 말았다. (p.203)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김창우 역, 1997, 두레
지속적인 소련 당국의 압박과 그로 인한 생활고에 견디지 못한 타르콥스키는, 이탈리아에서 〈노스탤지아〉를 촬영하는 가운데 몰래 온 가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망명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1984년,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기자회견과 함께 아내와 아들들을 남겨두고 홀로 서방으로 망명하였다.오늘은 내게는 우울한 날이다. 〈루블료프〉의 상영 허가는 상영시간을 10분 단축시켜야만 날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 체르누짠[8]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수년 간에 걸친 싸움은 바로 필름을 자르지 않고 내용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기에, 나는 이 상영 허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미친 놈들이다! 사기꾼들이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상영시간을 단축하지 않겠다. (p.53)
1972년 2월 15일
나는 지쳤다. 4월이면 마흔 살이 된다. 이 나이에 접어들면서도 내 인생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다. 푸시킨은 자유는 누리지 못했어도 그 대신 최소한 유토피아와 내적인 평화는 누렸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p.87)
1972년 2월 21일
로마노프[9]가 〈솔라리스〉의 수정된 필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류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작품을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조프[10]가 목요일에 보자고 한다. 그는 아마 내가 좀 더 수정작업을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겠지. 그러나 뭘 어떻게 더 고치란 말인가? 〈루블료프〉 때와 똑같은 드라마가 또다시 시작되고 있다. (p.88~89)
1973년 1월 29일
아! 나와 5년 계약을 맺고자 하는 누군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년 동안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난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일곱 편의 영화는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p.101)
1973년 4월 14일
영화는 보잘것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주된 원인은 영화가 이른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와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인들에게 영화란 돈을 버는 수단이 되고 이름을 얻는 방법을 의미할 뿐이다. 나의 작품들과 내 작품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나의 인생관과 반드시 일치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물론 나의 이런 자세를 기분나쁘게 생각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고 있다. (p.112)
1975년 3월 2일
예르마쉬[11]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거울〉을 칸 영화제에 보내는 것을 무조건 거절했다. 배씨는 매우 분노했다. 예르마쉬는 배씨에게 본다르추크, 비코프, 플리세즈카야 등의 작품을 추천하며 설득시키려 했으나 배씨는 작품들을 보고나서는 〈거울〉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될 것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라며 더욱 흥분했다. 그러나 대상을 수상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을 당국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내 작품들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폄하시키려고 항상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 (p.135~136)
1979년 2월 6일
시조프가 나를 불렀다. 그는 나의 이탈리아 여행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또한 〈거울〉의 이탈리아 시사회도 문제될 게 없단다. 당국은 심지어 〈잠입자〉를 모스크바 영화제에 선보이려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작품을 빨리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조치를 취하는 이유는 뻔하다.
* 〈잠입자〉를 칸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기 위해서.
* 작품 수정을 강요하기 위해서.
* 궁극적으로 나의 이탈리아 여행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 (p.182)
1979년 10월 22일
외로워서 미칠 지경이다. 슬픔과 역겨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온다. 고독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이 고독감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린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배반했거나 지금도 배신하고 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내 영혼의 모든 숨구멍들은 열려 있고 저항력과 보호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죽음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지고 말았다. (p.203)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김창우 역, 1997, 두레
1985년, 암 판정을 받은 타르콥스키 감독은 1986년 12월 파리에서 사망하게 된다.[12] 소련 당국의 방해로 생이별해야 했던 아내와 아들과는, 다행히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아 투병생활 중이던 1986년에 재회하였다.[13] 이 덕분에 〈희생〉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에는 투병 중인 타르콥스키를 대신해 아들이 대리수상할 수 있었다.[14]
장례식은 파리에 위치한 정교회 성당에서 치러졌으며,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참석해 평소 좋아했던 바하의 무반주 첼로를 연주했다고 한다. 로베르 브레송과 크리스 마르케도 참석했으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왔다고.
3. 작품의 특징
소련이 배출한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미조구치 겐지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과 더불어 롱테이크의 상징으로 꼽히는 거장. 미조구치가 롱테이크를 통해 미학적 탐구를, 앙겔로풀로스가 정치적·역사적 문제를 다루었다면, 타르콥스키 감독은 종교적·철학적 문제을 주로 다루었다.
누벨바그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편집, 몽타주와 같은 기존 영화 문법에 집중해 영화미학을 발전시킨 반면, 타르콥스키는 시청각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시간'을 체험하는 것에 영화의 성질이 있다고 보았으며,[15] 그 독특한 미학을 통해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16]
1990년대, 한국 극장가에 예술영화 붐이 일었을 때, 정성일의 《키노》와 함께 그 상징과도 같았던 존재. 물론 그의 작품들을 찬양하는 관객들도 많았던 반면, 취향에 맞지 않는 이들은 낯선 구성, 느린 전개, 잦은 롱테이크 등에 힘들어 하기도 했다.
4. 그에 대한 말들
"만일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타르콥스키 같은 감독 덕분일 것이다."
"타르콥스키는 저에게 있어 모든 감독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영화의 본질에 맞는 말입니다. 그것이 삶을 반영으로, 삶을 꿈으로 포착하기 때문입니다."
ㅡ 잉마르 베리만[17]
"타르콥스키는 저에게 있어 모든 감독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영화의 본질에 맞는 말입니다. 그것이 삶을 반영으로, 삶을 꿈으로 포착하기 때문입니다."
ㅡ 잉마르 베리만[17]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
ㅡ 장뤽 고다르
ㅡ 장뤽 고다르
"그의 특이한 감수성은 압도적이면서도 놀랍다. 거의 병적인 강도에 다다른다. 아마 지금 살아 있는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난 타르콥스키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성격과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그의 영화의 모든 컷은 그 자체로 멋진 이미지이다. 그러나 완성된 이미지는 그의 아이디어의 불완전한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ㅡ 구로사와 아키라[18]
"난 타르콥스키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성격과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그의 영화의 모든 컷은 그 자체로 멋진 이미지이다. 그러나 완성된 이미지는 그의 아이디어의 불완전한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ㅡ 구로사와 아키라[18]
5. 필모그래피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 장편 연출 작품
(단편) 킬러 Убийцы (1956) 타르콥스키가 영화학교 학생 시절에 만든 단편 영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두 친구와 함께 제작했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만들었다. 타르콥스키가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 |
(단편) 데어 윌 비 노 리브 투데이 Сегодня увольнения не будет... (1959) 영화학교의 제안으로 만들게 된 단편으로, 전작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예산으로 제작되었다. 1959년 대독 승전일에 소련 중앙 텔레비전에서 연속으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 |
(단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21] Каток и скрипка (1961) 바이올린을 켜는 소년과 로드롤러를 모는 노동자 청년 사이의 우정을 다룬 단편영화. 졸업작품으로 만든 영화지만, 제작은 모스필름의 아동영화부에서 맡았다. 작품을 제출하고 가장 높은 등급의 점수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 |
이반의 어린 시절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이반이라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독소전쟁 영화. 타르콥스키 특유의 느린 리듬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빠르고 긴장감 있는 전개가 돋보인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영화의 몇몇 대목을 두고 소련 당국과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비판을 가했는데, 실존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장폴 사르트르가 그에 대해 변론을 쓰기도 했다. | |
안드레이 류블료프 Андрей Рублёв (1966) 15세기 러시아의 이콘 화가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전기 영화. 말만 '전기 영화'지, 영화 전체가 거의 픽션이다. 총 9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삶과 현실과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67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30위 | |
솔라리스 Солярис (1972) SF 심리 좀비 로맨스 예술영화. 렘 스타니스와프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며 그 특유의 우주적인 리듬으로 동유럽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몇 년 뒤 타르콥스키는 이 영화를 자신의 작품 중 최악으로 꼽았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154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69위이다. 2002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했으나.....비평과 흥행 모두 처참하게 망했다. | |
거울 Зеркало (1975) 영화 전체가 회상과 꿈으로 진행되는 타르콥스키의 역작. 이로 인해 촬영과 편집이 무척 현란한 작품이 되었으며, 당대 러시아의 상황에 중점을 두고 영화가 진행되기에 타국 관객들에게는 타르콥스키 영화 중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31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 |
스토커 (잠입자) Сталкер (1979) 근미래 SF 영화. 제목 그대로 금지구역에 잠입하는 이야기. 타르콥스키의 시간 미학이 선명히 드러나는 작품이며, 타르콥스키도 이 작품을 만들며 확신을 느꼈는지 그의 일기장에서도 이 작품을 두고 자찬했다. 타르콥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43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 |
노스텔지아 Ностальгия (1983) 이탈리아 망명을 결심한 즈음에 만든 작품으로, 온갖 이론적 논쟁에 지쳐가던 유럽 영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준 작품이다. 1983년 칸 영화제 공개 당시 극찬을 받으며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꼽혔지만, 영화제 소련 심사위원의 뒷공작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로베르 브레송과 공동 수상. | |
(다큐멘터리) 여정의 시간 Tempo di Viaggio (1983) 노스텔지아의 시나리오 작가인 토니노 게라[22]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이며, 이 여행은 노스텔지아 제작의 토대가 되었다. "여행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문 제목은 Voyage in Time. | |
희생 Offret (1986) 타르콥스키의 유작. 제목 그대로 '희생'에 대한 영화이며, 잉마르 베리만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만들어졌기에[23] 베리만의 느낌도 살짝 난다.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영화 후반작업을 진행하였다. 타르콥스키의 아들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대리 수상했으며, 그로부터 몇 달 뒤 타르콥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도 개봉하여, 당시 기준으로 11만명이라는 대흥행을 기록했다. |
6. 기타
- 생전에 로베르 브레송을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았다. 물론 브레송도 이를 알았으며, 말년에 서로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인연 때문인지 브레송은 타르콥스키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기도 하였다.
1983년, 타르콥스키와 브레송[24][25] |
1986년, 타르콥스키 장례식 뉴스 中[26] |
- 앞서 말했듯이 소련 당국의 탄압, 투자 난항, 순탄치 않은 가정사 등으로 인해 작품을 많이 남기질 못했는데, 타르콥스키 본인도 일찍이 이를 감지한 듯 하다. 타르콥스키가 남긴 일기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73년 2월 16일
파스테르나크와 주고 받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앞으로 영화를 몇 편이나 더 만들 것 같은가 라는 내 질문에 그는 네 편이라고 대답했었다. 나는 즉각 "겨우 네 편?"이라고 소리쳤고 그는 곧바로 "그러나 아주 좋은 네 편"이라고 말했었다. 네 편 중 한 편은 이미 만들었다.[27] 그것이 좋은 영화라고 불릴 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내 작품을 사랑한다. (p.103)
1985년 12월 21일
매일 매일 폐암 증세가 악화된다. 심령술사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의 예언대로 되는 것인가? 내가 네 편의 영화밖에 더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언 말이다. 그러나 그는 셈을 잘못 헤아렸다. 그는 내가 모두 일곱 편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나의 모스크바 영화학교 졸업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까지 함께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p.335)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김창우 역, 1997, 두레
파스테르나크와 주고 받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앞으로 영화를 몇 편이나 더 만들 것 같은가 라는 내 질문에 그는 네 편이라고 대답했었다. 나는 즉각 "겨우 네 편?"이라고 소리쳤고 그는 곧바로 "그러나 아주 좋은 네 편"이라고 말했었다. 네 편 중 한 편은 이미 만들었다.[27] 그것이 좋은 영화라고 불릴 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내 작품을 사랑한다. (p.103)
1985년 12월 21일
매일 매일 폐암 증세가 악화된다. 심령술사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의 예언대로 되는 것인가? 내가 네 편의 영화밖에 더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언 말이다. 그러나 그는 셈을 잘못 헤아렸다. 그는 내가 모두 일곱 편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나의 모스크바 영화학교 졸업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까지 함께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p.335)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김창우 역, 1997, 두레
- 상단의 일기 내용에서 가리키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논란이 조금 있는데, 같은 이름의 작가를 가리킨다고 하기엔 생몰연도가 맞지 않기 때문. (타르콥스키는 〈루블료프〉 촬영 이후 심령술사에게서 예언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그보다 몇 년 앞서 죽었다) 일단 연구자들은 작가 파스테르나크가 맞다고 짐작하는데,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에서도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을 가져오며 위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 비슷하게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었던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와도 사적으로 친했다. 파라자노프가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당했을 때에는 타르콥스키가 당국에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당국이 무시해서 별 효과는 없었다(...) 어쨌든 그만큼 서로 아껴주던 사이였던 지라, 파라자노프가 1988년 뮌헨 영화제에서 타르콥스키를 추모하는 뜻에서 1분 간 침묵을 제안하기도 했다.[28]
타르콥스키를 추모하는 파라자노프 (1988) |
- 타르콥스키는 SF 소설의 팬이 아니었으며, 대부분 "만화책"의 왜곡과 저속한 상업주의 때문에 그것을 무시했다.
-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미래비전과 인간운명의 관계를 예술의 경지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 잔인함과 수준 낮은 연기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 위 터미네이터 평도 그렇고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상당한 독설가에 취향도 까탈스러워 다른 영화에 대한 평이 혹독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루나〉,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포제션〉[29]을 신랄하게 깠고, 평소에 자주 호평하던 루이스 부뉴엘도 〈트리스타나〉만큼은 "부뉴엘도 이런 졸작을 만드나?"라며 혹평했다. 이 밖에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30] TV에서 보고 '끔찍하게 지루하다'며 혹평하기도 했다.[31] 전반적으로 내용이 흥미롭지 않고 평범하거나, 자극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마구 쓰는 영화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 박평식이 존경하는 영화 감독 중 하나이며, 이동진이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은 인물이다.# 특히 이동진의 경우, 타르콥스키를 자신의 평론가의 길을 걷게 해준 감독이라며 언급[32]했으며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올타임 베스트 3편 중 하나로 선정했다. 1세대 예술영화 배급사인 백두대간이 후기작들을 개봉한데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예술영화 붐을 이끌었던지라 이 시절을 거친 영화광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인터뷰 젊은 감독들에게 해주는 조언 #
- 사카모토 류이치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앨범인 async의 분위기를 '타르콥스키가 만든 가상의 영화에 삽입된 사운드트랙'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앨범에 수록된 음악 중 하나인 solari는 타르콥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런 그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async 뮤직비디오. 감상해보자.
- 2021년 한국에서 그의 책 《시간의 각인》이 출간됐다. 자신의 영화 이론을 저술한 타르콥스키의 주저이자 영화사에서도 그 중요성에서 손꼽히는 책이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어로 작성되었지만 처음 출간된 것은 독일에서 발간된 독일어 역본인데, 국내에서도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2005)》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어본을 중역한 책이 나왔다가 절판된 후, 세월이 흘러 러시아어 원본 번역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 다만 여기서 제기된 의견에 따르면, 타르콥스키가 《시간의 각인》에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이반 뇌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에서 누락된 내용이 존재하고 이것은 영어 번역본pdf에서도 똑같이 누락되었지만, 러시아어 원문에는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시간의 각인》 번역본이 "러시아어 원본 번역"이 과연 맞는지 의심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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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러시아어 원문#을 보면,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다. 러시아어 원문에서 볼드체로 강조된 것이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There is not a single detail that is not permeated with the author's intent. (I have heard that Eisenstein himself once spoke ironically in a lecture of these hieroglyphics and arcane meanings: Ivan's armour has a picture of the sun and Kurbsky's of the moon, since the essence of Kurbsky is that he 'shines with reflected light'.) The characterisation, the harmonious composition of the images, the atmosphere, take Ivan the Terrible so close to the theatre (the musical theatre), that it almost ceases—in my own purely theoretical view—to be a cinematic work. ('Day-time opera', as Eisenstein once said of a colleague's film.) The films made by Eisenstein in the 'twenties, above all Potyomkin, were very different; they were at Andrey Rublyov Audrey Tarkovsky on the set with his principal adorn. 67 Andrcy Rublyov Boriska, the bell-caster (played by Kolya Burlyaev, who also had the title role in Ivan's Childhood), kneels before his patrons. least naturalistic visually.
Sculpting in time. Texas: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7.
Sculpting in time. Texas: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7.
Фильм этот не только в своем целом представляет иероглиф, он сплошь состоит из иероглифов, крупных, мелких и мельчайших, в нем нет ни одной детали, которая не была бы пронизана авторским замыслом или умыслом. (Я слышал, что сам Эйзенштейн в одной из лекций даже иронизировал над этой иероглификой, над этими сокровенными смыслами: на доспехах Ивана изображено солнце, а на доспехах Курбского — луна, поскольку сущность Курбского в том, что он «светит отраженным светом»?..) Тем не менее картина эта удивительно сильна своим музыкально-ритмическим построением. Чередование монтажных кусков, смена планов, сочетание изображения и звука — все это разработано так тонко, так строго и так закономерно, как разрабатывает себя только музыка. Поэтому «Иван Грозный» и действует так убедительно: во всяком случае, на меня эта картина именно своим ритмом произвела совершенно ошеломляющее, завораживающее действие. А в построении характеров, в конструкции пластических образов, в атмосфере «Иван Грозный» настолько приближается к театру (к музыкальному театру), что даже перестает, с сугубо моей точки зрения, быть произведением кинематографа; фильмы, сделанные Эйзенштейном в 20-е годы, и прежде всего «Потемкин», были совсем иными.
Запечатлённое время
Запечатлённое врем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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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은 곡의 가사로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것으로 무척 유명한데, 그래선지 타르콥스키 팬들은 종종 그의 선곡을 따로 추려내 플레이리스트로 쓰기도 한다. 전기작들에서는 주로 바흐를 사용하다가 후기작들에서는 다른 작곡가를 택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가령 전기작 〈솔라리스〉에서는 BWV 639를 사용했고, 후기작 〈스토커〉에서는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노스텔지아〉에서는 베르디의 레퀴엠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사용했다. 〈거울〉에서는 BWV 614, 요한수난곡, 마태수난곡, 페르골리지의 '스타바트 마테르'와 퍼셀의 '인디아 퀸'을 동원하며 최대 선곡 수를 기록했으며, 유작인 〈희생〉에서는 다시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사용하였다.
7. 외부 링크
-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두레
- 타르콥스키의 삶과 작품들 - 정성일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에 대하여 - DVD프라임
- 타르콥스키 영화 입문방법 (영어)
- nostalghia.com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팬사이트 (영어)
[1] 해당 상은 1967년부터 1988년까지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 (Grand Prix Spécial du Jury)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현재의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2] 러시아식 이름이므로, 가운데 이름이 아버지 이름이다. 즉 아버지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3] 현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코스트로마주 자브라지예[4] 소련 성립 후에 태어나 소련 해체 전에 죽었다.[5]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라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나 개인의 신앙은 건들지 않았다.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종교에 대한 입장은 소련, 폴란드처럼 이권을 박탈하고 차별할지언정 신앙 자체에는 간섭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북한, 중국, 알바니아처럼 개인의 신앙을 말살하려는 경우가 있는 등 천차만별이었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소련에서는 당국이 허용하지는 않았으나 개인적으로 외국의 문화를 접하는 경우도 많았다.[6] 문학 교수이자 시인. 여러 사정으로 시집 출간이 늦어져서, 실제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시기는 아들의 활동 시기와 겹친다.[7] 애초에 타르콥스키도 창작활동에 온 열정을 쏟겠다는 다짐으로, 생전 자기 일기장 제목을 "순교록(Мартиролог)"이라고 지었다. 어느 정도 의도된 별명인 셈.[8]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화부 부장[9]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위원장. 1963~1972년 재임[10] 영화감독. 모스크바 시의회 의장 직무대리. 향후 모스필름 대표 역임[11]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위원장. 1972~1986년 재임[12] 여기에 대해서는 한때 소련 당국이 암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스토커〉에 스태프로 참여했던 부인과 배우가 같은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스토커〉를 촬영했던 장소 근처의 공장 탓이 아니겠느냐는 설도 있다.[13] 다큐멘터리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의 어떤 하루〉에 아들과 만나 기뻐하는 타르콥스키의 모습이 담겨 있다.[14] 당시에 롤랑 조페 감독의 가편집 상영작 〈미션〉이 황금종려상을 받아 논란이 되었다.[15] 이에 걸맞게, 타르콥스키 감독이 쓴 책 제목도 "시간의 각인"이다.[16] 다만, 타르콥스키의 시간 미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거울〉부터다. 이전 작들에선 그 낌새만 관찰될 뿐이다.[17] Title quote of 2003 Tarkovsky Festival Program, Pacific Film Archive[18] #[19] #[20] #[21] 원 제목은 〈로드롤러와 바이올린〉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국내 영화제나 네이버 영화 등에선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이라는 제목으로 표기되었다.[22] 이탈리아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타르콥스키는 물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테오 앙겔로풀로스, 페데리코 펠리니 등 거장들과 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23] 영화 스태프와 촬영지를 통째로 빌려줬다.[24] 제36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공동 수상하며 찍은 사진. 당시 수상자가 오슨 웰스였기에, 관련 사진을 찾다보면 웰스-브레송-타르콥스키 세 사람이 모두 찍힌 사진도 찾을 수 있다. 영화사에 다시 없을 전설의 트로이카[25] 황금종려상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 이때 경쟁작들이 쟁쟁했던 지라, 수상결과를 두고 정치적 논쟁이 이는 등 뒷소문이 많았다.[26] 마지막에 잠깐 브레송과 그의 아내 밀렌이 포착된다.[27] 〈솔라리스〉 개봉 직후에 쓰여진 일기이므로, 〈솔라리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28] (하단 영상 1분 24초부터) 침묵 후 정교회 성호경과 함께 아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29] "이름 갖다붙일 수 있는 온갖 것들의 미국식 조합"이라고 깠는데, 정작 이 영화는 폴란드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독일 합작 영화다(...) 아무래도 영어 대사를 써서 오해한 듯.[30] "가을 Autumn"이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를 혹평했는데, 오즈의 영화 중 영제에 Autumn이 붙여진 영화는 〈가을햇살〉과 〈꽁치의 맛〉 뿐이고, 원제를 따지면 〈고하야가와가의 가을〉도 포함되기에 이 세 작품 중 하나로 추정된다.[31] 아이러니하게도 오즈 야스지로는 타르콥스키랑 친했던 구로사와 아키라랑 비평적으로 상극인 평가를 받는 감독이다. 실제로 오즈 야스지로를 열렬히 지지하는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타르콥스키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화 베스트에도 넣지 않았다.[32] 출처: 옥탑방의 문제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