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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3:35:02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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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야마 부시코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칸 영화제
파일:cannespalmedor.png
황금종려상
제35회
(1982년)
제36회
(1983년)
제37회
(1984년)

의문의 실종
나라야마 부시코 파리, 텍사스

역대 일본 아카데미상
파일:japan-academy-prize.png
최우수 작품상
제6회
(1983년)
제7회
(1984년)
제8회
(1985년)
카마타 행진곡 나라야마 부시코 장례식

}}}||
나라야마 부시코 (1983)
楢山節考
파일:narayamabushiko.jpg
장르
드라마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원작
후카자와 시치로 - 소설 《나라야마 부시코》, 《동북의 신무들》
기노시타 케이스케 -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각본
이마무라 쇼헤이
제작
쿠사카베 고로
토모다 지로
출연
오가타 켄
사카모토 스미코
바이쇼 미츠코
촬영
도치자와 마사오
음악
이케베 신이치로
제작사
이마무라 프로덕션
배급사
파일:일본 국기.svg 토에이
개봉일
파일:일본 국기.svg 1983년 4월 29일
파일:미국 국기.svg 1984년 9월 7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년 10월 30일
상영 시간
130분
상영 등급 파일:영등위_18세이상_2021.svg 청소년 관람불가

1. 개요2. 상세3. 줄거리4. 등장인물5. 여담6. 칸 영화제 관련

[clearfix]

1. 개요

1957년 일본에서 발표된 동명의 소설과 이를 기반으로 한 1958년 영화의 리메이크 작품.

2. 상세

이마무라 쇼헤이가 1983년에 감독한 작품이며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오가타 켄[1], 사카모토 스미코, 바이쇼 미츠코 등의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의 소설인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동북의 신무들(東北の神武たち)》 등을 원작으로 한다.[2]

19세기경 일본의 한 척박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이마무라 쇼헤이가 늘 그러했듯이 하층민들의 고단한 삶과 인간의 원초적 욕망 등을 강렬하면서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어 의외로 수위가 센 편이다.#1#2 제목인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에서 나라야마(楢山)는 극중에 등장하는 산의 이름이고 부시(節)는 민요의 선율을 뜻하며 코우(考)는 '고찰하다'라는 의미다.[3] 따라서 직역하자면 "나라산 민요에 대한 고찰" 정도가 될 것이다.[4][5]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는 1968년에 감독한 《신들의 깊은 욕망》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보냈으나 1979년에는 《복수는 나의 것》을 감독하여 재기에 성공하였고 이후 이 영화 덕분에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중에서도 특히 수작으로 뽑힌다.

3.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19세기 에도 시대 말기의 도호쿠 지역에 위치한 어느 산골 마을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비록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가지만 척박한 환경 때문에 수확량이 적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궁핍하게 살고 있는 데다 깊은 오지에 있어서 정부의 통제도 거의 받지 않는다.

그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룰을 정해 놓고 사는데 특히 식량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에 도둑질을 한 이들은 엄벌에 처한다. 먹는 입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일가족 중 오로지 첫째 아들만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고(아무리 그래도 상처하고 혼자있는 첫째아들은 이미 자식이 여럿 있다. 그런데도 둘째아들을 제쳐두고 첫째아들을 재혼시키는 건 해도해도 너무 한다..) 그나마도 갓난 아기들을 버려서 죽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6][7] 아들들은 부모가 70세가 넘으면 그들을 등에 업고 나라야마라는 산의 꼭대기에 올라서 부모를 버려두고 와야 하는 무서운 전통 [8][9] 이 있었다.

주인공인 타츠헤이의 어머니인 오린은 69세가 되자 나라야마에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타츠헤이는 무척 괴로워한다. 그 해에 타츠헤이 가족은 사계절에 따라 농사를 짓고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이거나 타츠헤이의 아들 케사키치가 결혼할 아내를 들이는 등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된다. 결국 초겨울에 오린이 70세가 되자 타츠헤이는 어머니를 지게에 싣고 나라야마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고 타츠헤이는 어머니가 떠날 때 눈이 오길 바란다고 중얼거린다. 나리야마 부모를 버리러 갈 때 눈이 내리면 좋은 곳으로 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 공교롭게도 타츠헤이가 어머니를 두고 산에서 내려갈 때 눈이 내리고 이에 타츠헤이는 놀라서 나라야마에 갈 때는 뒤돌아봐선 안된다는 규율을 어긴 채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오린은 눈에 덮여 가부좌를 틀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타츠헤이를 보며 가라고 손짓한다. 결국 타츠헤이는 어머니를 두고 내려오고 새로운 가정을 맞이하면서 삶을 꾸려나가는 도중 가족들이 곳곳에서 어머니가 사용하던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여전히 곁에 있음을 깨달으며 막을 내린다. 또 한 세대가 끝났음을 깨닫게 된다.

4. 등장인물

5. 여담

6. 칸 영화제 관련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데 이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당시 일본 영화계에선 같이 칸 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 기대를 걸었고 관련 영화계 인사 20여 명이 수상을 점치며 칸으로 향했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이마무라 쇼헤이 본인 조차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31] 영화가 너무나도 일본 특유의 문화를 다루고 있어서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2] 여주인공 사카모토 스미코와 제작사 대표 2명만이 칸 영화제에 참석했다.[33] 한편 이마무라 쇼헤이는 스태프들이랑 후쿠시마 시골에 농활을 갔다가 도쿄에서 마작을 즐기고 있었다.

정작 칸 영화제에서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노스텔지아>가 큰 주목을 받았고 황금종려상이 유력해 보였다. 그런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영화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34]소련 당국의 미움을 받던 안드레이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상시키면 프랑스와 소련의 외교적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에게는 감독상이 돌아갔다. 호평이었던 <돈>의 감독 로베르 브레송에게도 감독상이 공동 수여됐는데 수여식 단상에서 수여 증서를 패대기치는 패기를 보였다.

결국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나라야마 부시코에게 황금종려상이 수여되었고[35] 이 일을 계기로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떠올랐으며 1997년 우나기로 다시 한 번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단순히 정치적인 알력으로 인한 수상이 아님과 동시에 이마무라 본인의 연출력을 전 세계에 증명해냈다. 나라야마 부시코도 현재 IMDb 평점 7.9점의 고득점으로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36] 이 와중에 황금종려상을 들고 귀국하던 사카모토 스미코는 대마 혐의로 언론에 시달려야만 했다. 사카모토 스미코는 이 영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마 혐의 때문에 활동을 거의 접어야 했고[37]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이시이 세이코(石井聖子, 1973년생 가수)의 양육과 더불어 1993년 보육원을 물러받은 후 커리어도 희미한 편이다. 그나마 이마무라 쇼헤이의 최후기작인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2001)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1] 배우 오가타 나오토의 아버지로, 풍림화산의 우사미 사다미츠, 태합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모리 모토나리의 아마고 츠네히사 역으로 유명하다.[2] 정확히 말하자면 두 작품의 내용을 적절히 버무렸다. 참고로 나라야마 부시코는 이미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손에 1958년에 영화화되었는데 이것도 상당한 걸작으로 뽑힌다. 동북의 신무들 역시 1957년 이치카와 곤 감독의 손에서 영화화되었다.[3] '나라야마 부시코'로 표기된 제목은 사실 '나라야마부시코우'가 옳다. 일본어는 기본적으로 띄어쓰기가 없으며 나라야마와 부시코가 의미단위로 분절되는 것도 아니다.[4] 나라산 민요(楢山節)는 영화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70살이 되면 나라산 행이라네(70歳になったら楢山参りだ)'라는 노래다.[5] 영어판의 제목도 "Ballad Of Narayama"이다.[6] 딸은 자식 낳을 몇몇만 빼면 가끔 외지에서 찾아오는 소금장수에게 팔아넘길 수라도 있지만 아들은 최소한의 일할 일꾼들만 빼면 다 죽인다. 작중에서 케사키치가 '딸을 낳으면 안 죽여도 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7] 죽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개구리를 잡아먹는 장면이 대표적이다.[8] 마비키와는 별개로 이는 실화가 아닌 일본설화인 우바스테야마에 나와있는 내용이다.[9] 우리나라 문화는 아니였으나 고려장이란 이름으로서 국내에 잘못 알려진 것 과도 그 내용이 비슷하다.[10] 물론 리스케가 동네 개와 수간하는 등의 사고를 치고 다녀서 자주 화내긴 했지만 동생을 위해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동침을 부탁하는 등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스포일러1] 다만 그 역시 마을에 속한 주민인지라 과거 규율을 어기고 자신의 어머니, 즉 할머니를 버릴 수 없다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 쏴죽이기도 했다. 이는 후반부 어머니인 오린을 나리야마에 두고 돌아갈 때 나라야마에서는 뒤돌아봐서는 안된다는 규율을 깨고 어머니에게 달려감으로서 종국에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스포일러2] 사실 남편은 마을의 법을 어기려고 한다는 이유로 장남인 타츠헤이가 총으로 쏴죽였다.[13] 과거 아버지를 쏴죽인 타츠헤이에게 산신령이 그런 것이라고 하거나 차마 어머니를 버릴 수 없어 괴로워하는 아들 타츠헤이에게 하는 말이 "너는 네 아버지처럼 망설이는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어머니를 산에 버리는 행위를 마치 용감한 결단인 것처럼 미화하는 듯한 대사도 하는데 이 영화를 본 이덕일은 이 부분에 대해 일본인들 사이의 사무라이 정신으로 표상되는 군국주의의 침투라는 평을 했다.[14] 다만 이는 마츠야와 마츠야네 가족들 자체에 문제가 컸다. 마츠야는 가난한 타츠헤이네 집안 사정을 생각하지 않은 채 집안에 들어와서 일도 똑바로 하지 않고 식량을 축냈던데다가 마츠야네 가족들은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감당하지 못할 아이들을 낳아 숨겨 기르고 마츠야도 이에 동조해 타츠헤이네 식량을 훔쳐다가 본가에 퍼나르고 있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주민들에게는 식량을 축내는 밥충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수 밖에 없다. 단지 어린아이들도 한꺼번에 생매장당하는 등 마을에서 내린 처벌이 지은 죄에 비해 컸을 뿐이다.[15] 이때 타마얀에게 타츠헤이가 리스케와의 동침을 요구하면 칼같이 거절하라고 얘기하는 등 자신이 가고 타마얀이 겪을 소소한 고충을 이해해준다.[16] 물론 리스케도 만만치 않게 반격하지만 오린이 가장이 될 케사키치를 감싸기 일쑤이다.[17] 케사키치가 어느 때처럼 삼촌 리스케를 놀려대자 리스케가 마츠야네 가족이 생매장 당해 하루아침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일을 들며 반격했고 이에 케사키치가 바로 곁에 있던 알몸의 여성을 들어 보여주자 리스케는 할말을 잃는다.[18] 리스케처럼 결혼을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마을 남자들은 욕정을 풀 대상이 없어서 동네 개들을 수간하기까지 한다.[19] 이 때문에 잠도 방이 아닌 헛간에서 잔다.[20] 할아버지가 딸을 덮치던 총각을 때려죽인 적이 있어 그 업보 때문에 아픈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딸에게 액땜해야 한다며 참 해괴한 유언을 남겼다.(...)[21] 오죽이나 싫었으면 남편의 무덤에 가서 리스케는 봐달라고 빌었다고....[22] 마츠야가 낸 연기가 온 집안을 뒤덮자 이를 타미얀이 케사키치를 놀려먹고 케사키치 역시 할말을 잃는다.[23] 마츠야의 아버지는 이때 케사키치에게 "나는 자네의 장인이니 좀 도와주게"라고 하소연하지만 케사키치는 장인의 뺨을 후려치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윽박지른다. 마을 사람들이 식량을 훔치는 것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24] 당시 일본 영화 수입 기준은 공동투자로 제작된 영화, 한국 영화에 일본인 배우가 참여한 영화, 소위 4대 외국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수상작이었고 나라야마 부시코는 칸 영화제 수상작이었기 때문에 대상에 포함되었다.[25] 원래는 카게무샤가 될 뻔 했으나 상영 프린트 뜨는 문제 때문에 (카게무샤는 3시간짜리 영화라 프린트 제작에 공이 더 많이 들었다.) 하나비가 며칠 먼저 개봉했다.[26] 그나마도 일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껏 본 사람들도 적지 않은 수가 부모는 내다 버리고 총각들은 개와 수간 못해 안달난 이상한 영화 정도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소문나 버렸다.[27] 러브레터는 1995년작이지만 일본 내 영화제에서만 수상했기 때문에 1차 문화개방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식 개봉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 해적판 불법복제 비디오가 돌았음에도 흥행에 성공해서 일본 영화 수입 붐을 일으켰다. 실제로 일본 실사 영화중에서 러브레터 다음으로 흥행에 성공한 것은 주온, 일본침몰, 데스노트밖에 없고 애니메이션을 포함해도 10위 안에 들어간다.[28] 이마무라는 이 영화 이전까진 3대 영화제에선 조금 알려진 수준이고 수상하고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칸 영화제에 흥미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9] 테렌스 맬릭이나 말년의 장 뤽 고다르처럼 행사를 싫어하는 경우 불참하는 경우가 있지만 예외에 속한다.[30] 연기 당시 40대 후반이었다. 분장의 힘이 컸던 편. 원래 진짜 60대 배우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리허설 중 본인이 힘들어한 데다 감독도 뭔가 아닌 듯해서 하차했다. 아들 역의 오가타 켄보다 1살 연상이다 2021년 1월 23일 뇌경색으로 사망하면서 주역과 감독 모두 사망했다.[31] 이마무라는 베를린 영화제랑 연이 깊었던 감독이며 나라야마 부시코는 첫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었다. 이전에 에에쟈나이카로 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긴 했지만 이마무라도 실패작이라 단정했던 영화라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32] 출품도 토에이 쪽에서 했지 이마무라 프로덕션과는 연계가 없었다. 어차피 전장의 크리스마스가 수상할 텐데 내 영화를 왜 당신들 멋대로 출품하냐며 이마무라 감독도 화가 난 나머지 영화제엔 가지 않았다.[33] 아들 덴간 다이스케가 밝히길, 전장의 크리스마스 팀이 주최한 상영 후 파티에서는 데이비드 보위사카모토 류이치가 등장해 북적북적거렸는데 나라야마 부시코 팀의 상영 후 파티는 조촐하게 사카모토 스미코가 노래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카모토 스미코는 홍백가합전에 6번이나 출전한 가수 출신으로 소시적에 라틴송의 여왕으로 불렸다.[34]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는 소위 말하는 소련 주류파였던지라 타르콥스키를 상당히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 공산당 기관지에서 대놓고 '부르주아 인텔리겐차'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아이러니한 게 이 사람의 딸인 나탈리아 본다르추크는 타르콥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에 주연으로 출연한 바 있다. 정황상 나탈리아의 어머니랑 이혼한걸로 아버지와 사이가 소원해져서 이런 문제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걸로 추정된다. 나탈리아와 타르콥스키는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35] 덕분에 스미코는 오슨 웰스에게 답례 키스도 받았다고 한다.[36] 물론 평점이 영화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37] 불구속 입건으로 끝나서 활동 자체는 문제없이 계속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