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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겐지 [ruby(溝口, ruby=みぞぐち)] [ruby(健二, ruby=けんじ)]|Kenji Mizoguchi | |||
국적 | 일본 | ||
출생 | 1898년 8월 24일 | ||
일본 제국 도쿄도 분쿄구 | |||
사망 | 1956년 9월 6일 (향년 58세) | ||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 |||
수훈 | 예술선장 (1954년 수상) 자수포장 (1955년 수상) | ||
직업 | 영화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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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923년 – 1956년 | ||
묘소 | 오타구 혼조지(本行寺) | ||
부모 | 아버지 미조구치 젠타로 어머니 미조구치 마사 | ||
배우자 | 미조구치 지에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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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 "
ㅡ 장 뤽 고다르, 존경하는 감독 3명을 묻는 질문에 답하며
일본의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 영화의 4대 거장으로 꼽히는 감독이다.ㅡ 장 뤽 고다르, 존경하는 감독 3명을 묻는 질문에 답하며
일본 고전주의 영화의 상징으로 통하며,[1] 한 컷에 평균 5분을 넘는 롱테이크로도 유명하다.[2]
흔히 '거장'이라 불리는 일본 감독들 중 가장 앞선 경력을 자랑하며, 당대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말년인 1950년대부터 서구에 알려져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 영화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선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즈 야스지로와 달리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었다. 80~90년대 영화월간지에서도 두 감독은 특별기사로 일생이나 작품들을 상세하게 올리던 거랑 달리 이름이 언급된 경우는 적었다.
2. 생애
여동생을 게이샤로 팔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학대를 일삼았다. 결국 생계를 위해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닛카츠(日活)영화사에 입사했다. 처음 취직해서는 배우로 일하기도 했으며 1923년에 각본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감독으로 데뷔했다.그의 영화는 주로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핍박받는 여인의 삶을 묘사한다. 남성에게 지배당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묘사로 최초의 대중적 페미니스트 감독으로도 꼽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상처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에 가까운 거지, 실제로는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있다. 실생활에서도 여자 관련 트러블이 많아서 1926년에는 그와 사귀던 게이샤에게 등에 칼을 맞고 부상당하면서 신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오즈 야스지로 못지 않게 형식미를 추구하는 감독이었으나 오즈가 많은 컷을 사용하면서 카메라의 이동을 자주 했던 것과 달리, 한 컷이 5분 이상을 넘는 롱테이크를 사용해서 인물의 감정에 접근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50년대 초반에 일본 영화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당시 이러한 미조구치의 롱테이크에 감화된 평론가와 감독들이 많았으며, 특히 장뤽 고다르를 포함한 누벨바그 세대들이 미조구치 스타일에 경도되고 영향받았다.
지독한 완벽주의자였으며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예화로, 당대의 최고 여배우였던 다나카 기누요는 역할을 위해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으라고 강요당했으며, 와카오 아야코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비하하는 의미)으로 불렀다고 한다. 스가이 이치로에겐 "너는 뇌에 매독이 있으니, 의사에게 가봐라." 라고 말했으며, 〈산쇼다유〉 촬영 때는 아역을 향해 "이 아이는 어쩔 수 없는 바보구나!" 라고 말해, 근처에 있던 모친을 낙담시켰다(...)
무려 15편의 영화를 함께한 다나카 기누요와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나카가 감독으로 데뷔할 때는 "다나카의 머리로는 감독을 못한다."는 발언을 하였고, 그 때부터 사이가 멀어졌다. 미조구치의 조감독이었던 신도 가네토 감독과 다나카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미조구치는 다나카 기누요를 짝사랑 했었고, 여러 차례 구혼을 하기도 했었지만, 다나카는 미조구치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해 그를 찼다고 한다.
1956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3. 기타
1951년 9월 1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한 번도 서방세계에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는 일본 영화, 게다가 처음 들어보는 감독의 영화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 첫마디로 신음을 내면서 "하필이면 구로사와가…" 라는 그 유명한 탄식을 했다.#
후배의 성공을 발판 삼아, 미조구치는 말년에 다양한 작품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고,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4. 대표작 일람
연출한 작품은 90편. 남아있는 작품은 31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기온의 자매 (1936년)
- 마지막 국화 이야기 (1939년)
- 겐로쿠 추신구라 2부작 (1941년~1942년)
- 밤의 여자들 (1948년)
- 서학일대녀-오하루의 일생 (1952년)
- 기온바야시 (1953년)
- 우게츠 이야기 (1953년)[4]
- 산쇼다유 (1954년)[5]
- 치카마츠 이야기
- 신 헤이케 이야기 (1955년)[6]
- 양귀비 (1955년)[7]
- 적선지대 (1956년)
[1] 빅토르 에리세는 미조구치를 "일본의 존 포드"라 평하기도 하였다.[2]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평균 1분 컷보다 훨씬 길다![3]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도 있으나 이 감독의 해외 인지도는 칸 영화제/황금종려상을 수상한『지옥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크다. 이외엔 초기작인 미친 한 페이지가 언급되긴 하나, 마이너한 편.[4]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59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10대 영화 중 1위. 2016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 상영[5]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고다르가 매우 극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다르가 비평가로 있던 잡지 카예 뒤 시네마가 선정한 1960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최고의 10대 영화 목록에 올랐고, 그 중 1위로 지정되었다.[6]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61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10대 영화 중 5위.[7]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59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10대 영화 중 9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