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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1:23:56

샌 이시드로 맥도날드 총기난사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맥도날드 총기난사.png

1. 개요2. 범인3. 범행4. 이후

1. 개요

San Ysidro McDonald Massacre

1984년 7월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샌디에이고 시의 산 이시드로 맥도날드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

2. 범인

파일:제임스 휴버티.jpg

1942년 오하이오주 캔튼시에서 막내로 태어난 제임스 휴버티(James Huberty)는 8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우울증에 빠졌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왕따 당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사격장에서 풀곤 했다.

1975년 결혼 후 두 딸의 아버지가 됐다. 1970년대 중반엔 용접공으로 일하며 연봉으로 3만 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칼로 협박하고, 키우던 개가 차에 스크래치를 냈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등 폭력성을 보였다. 같은 반 학부모를 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휴버티는 직장 동료에게 "사람을 한번 쏴보고 싶다." 말하기도 했다. 때로는 이웃에게 총을 겨누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평상시에도 집 지하에 만든 사격장에서 총을 쏘곤 했다. 이웃의 평은 점점 안좋아졌다.

1983년, 휴버티는 돈 문제로 좀 더 땅 값이 싼 멕시코로 이사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언어 문제로 적응을 못했고, 직업도 못구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국경수비대로 몇달 간 일했으나 환청 증세가 더 심해져 그만뒀고 이듬해 실직했다. 얼마 안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도 당하면서 한 쪽 팔에 장애도 생겼다. 뒤이어 그가 앓던 정신적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져 아내에게 "자살하라는 환청이 들린다." 고 말했으며 이것이 너무 심해져 인근 보건소에 전화로 도움 요청을 했다. 하지만 그곳 직원이 휴버티의 이름을 잘못 기억하는 바람에 전화가 오지 않았다.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휴버티는 전화 앞에 5시간동안이나 앉아 전화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밖에 나가 오토바이를 몇시간 동안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다음 날, 휴버티는 가족을 데리고 샌디에이고 동물원에 들렸다. 거기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뒤 아내에게 키스 후 "사람 사냥을 하러 간다.(Going hunting for humans)" 라 말했다. 아내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휴버티는 두 딸에게도 인사를 하며 "안녕. 난 안돌아올거란다." 고 인사를 하고 UZI 기관단총과 M1200 전투산탄총, 그리고 브라우닝 하이파워를 들고 근처 맥도날드로 향했다.

3. 범행

파일:샌 이시드로 맥도날드.jpg
사건이 일어난 맥도날드
오후 4시 10분, 산 이스드로의 맥도날드에 들어간 휴버티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쐈다. 직원, 손님 가리지 않고 총을 쐈고,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을 향해서도 쐈다. 아직 부상을 입고 죽지 않은 사람이 보이면 총을 쐈다. 총에 놀라 갓난아기가 울자 아기도 쏴 죽였다.

신고를 받고 911이 달려왔다. 하지만 단순 경찰들로만 해결할 순 없는 상황이라 SWAT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얼마 안가 맥도날드가 포위된 와중에도 휴버티는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음식을 먹었고, 부상을 입어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에게 욕을 하며 음식을 집어던졌다.

부상을 입은 인질이 도망가고 휴버티 혼자 남은 사이, SWAT팀의 저격수가 휴버티의 심장을 저격했다. 휴버티가 사망하면서 사태는 끝났다.

휴버티는 21명을 살해했고, 1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희생자 대다수는 멕시코인이었는데, 휴버티가 멕시코인을 노리고 쏜건 아니고,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 멕시코 국경과 접근한데다 멕시코 사람들도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그렇다. 휴버티가 쏜 총알은 275발에 달했으며, 당시만 해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총기난사로 기록됐다.

4. 이후

사태가 일어났던 맥도날드는 48시간의 정비 끝에 다시 오픈했다. 하지만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원성이 자자해 결국 문을 닫고 철거됐다. 맥도날드에선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100만 달러를 후원했다.

이 사건은 후에 '피의 수요일(Bloody Wednesday)'이라는 스릴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평가는 좋지 않았다.

1993년 영화 폴링 다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건 현장에는 현재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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