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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타운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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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존스타운 홍수.jpg

1. 개요2. 존스타운과 사우스 포크 댐3. 홍수4. 사고 이후

1. 개요

Johnstown Flood

1889년 5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홍수.

2. 존스타운과 사우스 포크 댐

파일:존스타운.jpg

존스타운은 1800년에 세워진 작은 도시로, 인근에 대서양과 닿는 운하와, 피츠버그와 연결되는 철도가 개발된 1800년대 중반에서야 마을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철광석이 많이 나오면서 캠브리아 철광 회사(Cambria Iron Works)가 자리잡았다. 그러면서 존스타운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19세기 후반엔 인구가 3만명을 넘을 정도였다. 마을이 커지면서 새 병원과 도서관, 심지어 오페라 극장까지 들어섰다.

파일:사우스 포크 댐.png

운하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상류 23km 지점에 사우스 포크 댐(South Fork Dam)이 1853년에 지어졌는데, 길이는 284m, 높이는 22m였다. 댐의 상류 부분은 진흙을 쌓은 뒤 점판암으로 도배했다. 그리고 돌을 쌓아 흙에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했다. 맨 밑에는 수위를 낮추기 위한 배수로가 있었다. 물이 일정량 이상 차면 물넘이로 흘러가면서 수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댐은 당시만 해도 세계 최대 규모의 사력댐이었다.

하지만 운하보다 철도를 더 많이 쓰게 되면서 댐은 점차 쓸모 없어졌고, 1857년, 펜실베이니아 연방에서는 운하 시스템 전체를 펜실베이니아 철도에 팔았다. 이후 헌레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과 앤드루 카네기를 포함한 재벌들이 1879년에 댐을 구입해 레저 시설 사우스 포크 피싱 앤 헌팅 클럽(South Fork Fishing and Hunting Club)으로 바꾸었다. 댐에 물고기를 풀어 낚시터를 만들고, 보트를 대여해주고, 인근에 클럽도 지었다. 레저시설을 만드는 과정에서 댐의 일부를 깎아 도로를 만들고,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배수로를 막았다. 댐이 레저 시설이 된 후 폭우가 매년 왔다. 개조당한 댐은 폭우를 견디지 못해 조금씩 물이 세어나왔고, 그럴 때 마다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큰 사고는 없었다.

3. 홍수

그래픽으로 재현한 당시 상황

그러던 1889년 5월 30일, 강수량 50cm에 달하는 폭우가 내렸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존스 타운이 겪지 못한 양이었다. 댐의 수량은 꼭대기 까지 60cm만 남겨두고 꽉 찼다. 비상상황이 오자 댐에 흙을 쌓아 높이고 동시에 배수로도 새로 파는 공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레저시설 관리자 측에선 물고기가 빠져나갈 수 있다며 배수로를 만드는 걸 반대 배수로 공사는 취소됐다. 결국 폭우를 못견딘 댐은 무너졌다.

댐을 가득 채웠던 1450만톤에 달하는 물이 1시간 만에 빠져나갔고, 그대로 하류로 내려갔다. 물은 12m 높이의 대형 파도를 만들었다. 물의 양이 너무 많아, 인근 숲을 전부 쓸고 지나가서 하류의 다리가 바위와 나무로 막혀 댐이 형성됐다가 그 댐이 물에 다시 뚫릴 정도였다. 인근 마을 사우스포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마을 주민들이 높은 곳으로 대피해 4명이 사망하고, 집 30채가 무너진 걸 빼면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물은 시속 64km로 내려가면서 미네랄 포인트(Mineral Point)를 쓸면서 6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동 코노마(East Conemaugh)를 덮치면서 50명이 사망했다. 물은 더 밑의 캠브리아 철강공장을 다 쓸어버리며 34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더 밑의 존스 타운마저 덮쳤다.

물이 위의 여러 시설들을 쓸고 오면서 나무와 바위는 물론, 철로에 열차, 공장 울타리, 심지언 집까지 통째로 떠내려왔다. 과거에 잘못된 경보가 몇번 울려, 이번에도 울린 경고가 잘못됐다 생각한 존스타운 사람들은 대피를 하나도 하지 않은 상황이라 피해가 커졌다. 존스타운이 전부 쓸려나가기 까지는 1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이 하류를 타고 계속 가다가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서 만든 다리에 닿고, 온갖 잔해들이 다리에 막히면서 댐을 형성해 물이 막혔다. 같이 떠내려 온 사람들은 홍수가 끌고 온 파편들 사이에 끼인 채 갇혀버렸다. 그 상태에서 화재까지 일어나 80명이 더 사망했다. 화재는 3일간 지속됐다.

6월 1일, 생존자들이 모여 사람을 한명이라도 더 구하려 했다.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했다. 6월 2일이 되어서야 물이 어느정도 빠지면서 사태가 진정됐다.

홍수로 2,208명이 사망했다. 어린이 98명은 사고로 고아가 됐고, 가족이 전부 사망한 건도 99건에 달했다. 시신 중 한구는 640km 넘게 떨어진 신시내티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시신 777구의 신원은 파악되지 못했다. 사고 11년 뒤에도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재산 피해는 당시 기준으로 17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홍수는 19세기에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홍수, 댐 붕괴사고로 기록됐다.

4. 사고 이후

홍수가 만든 댐은 너무 튼튼해 철거하는데 폭파 전문가를 고용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서 폭파해 없애는데 3달이나 걸렸다. 존스타운에 뿌려진 잔해를 치우는데는 1년도 넘게 걸렸다.

사고가 일어나고 돕기위해 미국 전역에서 사람이 모였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선 철도를 새로 깔아 보급품을 옮겼고, 사람들이 모여 홍수가 끌고 온 잔해를 치우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미국 적십자의 창시자인 클라라 바튼(Clara Barton)도 직접 와 5달간 머물며 사람들을 도왔다. 러시아, 독일, 호주, 영국, 터키, 프랑스 등 18개국에서도 후원금을 보냈다. 후원금으로만 약 370만 달러가 모였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레저시설 관계자들을 고소했다. 그러나 법원에선 사고를 천재지변으로 봤고, 처벌받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후 나온 각종 논문들은 전부 레저시설 관계자들의 탓이라 지적했다.

존스타운은 사고 이후 재기했다. 1920년대엔 인구 수가 67,000명을 돌파했다. 이후 1936년 세인트 패트릭 데이 홍수를 겪어 25명이 사망하고, 4200만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1977년에도 댐이 무너져 40명이 사망했다.

1964년엔 추모 국립공원이 세워졌다.# 현장에선 추모비와, 사우스 포크 댐의 일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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