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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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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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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иктор Цой | Viktor Tsoi
파일:ВИКТОРЦОЙ.png
본명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1]
출생 1962년 6월 21일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90년 8월 15일 (향년 28세)
소련 라트비아 SSR 투쿰스
(現 라트비아 리가 계획구 투쿰스)
장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보고슬롭스코예 공동묘지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직업 가수, 화부[2]
본관 원주 최씨
서명
파일:빅토르 초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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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신체 187cm, 75kg
학력 레닌그라드 제362학교
레닌그라드 제356학교
레닌그라드 제378학교
세로프 미술전문학교 (중퇴)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 (목공업과/중퇴)
가족 관계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명: 최동열)(1938~)
어머니 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초이(혼전성: 구세바)(1937~2009)
배우자 마리안나 이고레브나 초이(혼전성: 로도반스카야)(1959~2005)
아들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초이[3][4] (1985~)
소속 제6병동(Палата № 6)(베이스 기타/1978~1981)
자동으로 만족하는 자들(베이스 기타/1980~1981)
(Автоматические удовлетворители)
가린과 쌍곡선(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5]
키노(Кино)(리듬 기타 및 보컬, 작곡/1982~1990)
}}}}}}}}} ||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생애 및 활동 내역3.2. 사망3.3. 사생활
4. 디스코그래피5. 필모그래피6. 음악성
6.1. 음악 성향6.2. 사후의 평가
7. 빅토르 초이에 대한 오해
7.1. 크즐오르다 출생?7.2. 반체제적 가수?7.3. 한국과의 관계
8. 그 외
8.1. 여담8.2. 대중매체에서8.3. 불운의 러시아 록음악 단명사

[clearfix]

1. 개요

빅토르 초이는 소련의 가수. 록밴드인 키노의 리더이자 프론트맨이었다. 생전 소련 대중음악계의 독보적인 슈퍼스타였으며, 그가 죽은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 대중음악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Цой жив
초이는 살아 있다
'Цой жив'는 '초이 지프'라고 읽으며, 러시아인들이 빅토르 초이를 기릴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초이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의역할 수 있다. 빅토르 초이가 한국계라는 것을 아는 팬들은 이 문장을 한국어 번역기로 번역하여 써놓곤 하는데, 오역이 나올 때가 많다.[6]

2. 이름

본명은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초이(Цой)가 성씨 를 옮긴 것이기에 빅토르 최라고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ㅊ은 러시아어로 Ч로 전사하지만[7], Ц로 옮겨진 것은 고려인 대부분이 함경북도 특히 육진 지역 출신이 다수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학적으로 표준어의 ㅊ과 러시아어 Ч는 치경구개음인 데 반해 육진 방언의 ㅊ과 러시아어 Ц는 치경음이다. 그러므로 육진 방언의 ㅊ은 Ч보다는 Ц에 더 가깝다. 로마자로는 보통 Viktor Tsoi/Tsoy 정도로 적는다.

빅토르 '최'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생전 그의 정체성이 동양계 러시아인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러시아어식 표기인 '초이'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초이가 태어났을 당시, 어머니인 발렌티나 구세바는 초이의 이름을 드미트리로 짓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인 로베르트 초이는 초이의 이름을 빅토르로 짓기를 원했고, 이를 강하게 주장했기에 초이의 이름은 빅토르가 되었다.

3. 생애

3.1. 생애 및 활동 내역

1962년 06월 21일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종종 카자흐스탄크즐오르다 출생이라는 내용이 인터넷에서 보이는데, 크즐오르다는 빅토르 초이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로베르트 초이의 출생지이다.[8]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일하던 고려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어 이름 최동열)였고, 어머니는 체육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구세바였다.

아버지의 본관은 원주 최씨로,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증조할아버지 최용남(1883~1947)씨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서 살다가 같은 고려인 여성이었던 안나 바실리예브나 유가이(1896~1985)와 결혼한다.[9]

증조할아버지 부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빅토르의 할아버지인 막심 페트로비치 초이(한국명 최승준, 1914~1985)를 낳는다. 할아버지인 막심은 이후 KGB에서 근무하며 소령까지 지낸 인물이다. 막심은 빅토르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동양 철학을 가르쳐주었고 이는 빅토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자신도 시를 잘 쓰는 등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당시 소련 공무원들은 공식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최민'이라는 가명까지 지어가며 한글시를 쓰기도 했다.

이후 1937년에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데, 이때 증조할아버지 식구들은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끌려간다. 카자흐스탄에서 할아버지 막심 페트로비치 초이는 나데즈다 김(한국명 김혜정, 1917~2001)과 결혼해 빅토르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명 최동열, 1938~)를 낳는다.

외가 쪽 가계를 따라가면 외증조부였던 필리몬 구세프(1880~1939)는 오늘날 벨라루스 동북부의 비텝스크 출신으로 러시아군에 복무했다가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은 바 있다고 한다. 이후 빅토르의 외할아버지 바실리 구세프(1910~1974)는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젊은 돌격대'라는 공장에서 대장장이로 일했다고 한다.

빅토르 초이의 외모는 대체적으로 한국계인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에 비해 동서양 혼혈 비율이 낮은 기타 서양인과 동양인 모두에게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10] 빅토르는 키도 187cm로 상당한 장신이었으며, 당대 기준으로는 더욱 두드러졌다.

어린 시절, 초이는 그림 그리기와 조각 같은 미술 활동에 재능을 보였고[11], 미하일 불가코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의 거장들이 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때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를 따라 3번이나 전학을 가야 했다.

1974년, 초이의 부모는 초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초이를 미술학교에 입학시켰고, 초이는 3년 동안 미술을 배웠다. 당시 초이를 가르치던 미술 교사는 초이에 대해 '능력은 뛰어나나 반복적이고 힘든 일을 싫어한다'고 평했다.

5학년 때부터 초이는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부모님으로 부터 기타를 선물받기도 했다. 이내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던 록 음악을 비롯한 서구식 대중음악에도 푹 빠진 상태가 되었다.[12] 특히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미하일 보야르스키, 비틀즈존 레논, 이소룡과 같은 인물들에게 푹 빠져있었다.

8학년이 되던 1978년, 레닌그라드의 유명 예술교육기관인 세로프 예술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문화예술대학) 디자인과로 입학해 1년간 공부했으나, 금세 흥미를 잃었고 18세 때인 1979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퇴학당했다.[13] 퇴학을 당한 이후 빅토르 초이는 어머니의 추천에 따라 공장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했으며, 가을에는 모스크바 제147야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야간 학교를 졸업한 후 초이는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목공을 약 2년간 배웠다.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엔 이런 배척적인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단순히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던 밴드들이 오버그라운드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1950~60년대 동구권에 방문한 서유럽 기자들에게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로큰롤 레코드를 구해다 줄 수 있느냐를 묻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만들기 위해 공중전화를 부숴서 전화기 수화기를 훔쳐가는 사건이 빈발했다는 일화에서 드러난다.

결국 이들은 자체 '빽판'을 만들어 듣기에 이른다. 당시 속어로 '갈비뼈(рёбра, 료브라)'라고 불리던 이 빽판의 재료는 (놀랍게도) 병원에서 쓰고 버린 X레이 필름이었는데, 특수 기계에 넣어 가운데 구멍을 뚫고 실제 LP처럼 가장자리를 둥글게 처리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재료가 재료다보니 고작해야 5-10회 재생이 한도였다고 한다. 이 빽판은 이후 카세트테이프로 대체되었다. 키노의 정규 1집 '45'의 수록곡 '당신도 한때는 비트닉이었잖아요(Когда-то ты был битником)'에 등장하는 가사 'Ты готов был отдать душу за рок-н-ролл, Извлечённый из снимка чужой диафрагмы(당신도 한때는 락앤롤에 영혼까지 바칠 정도로 심취해 있었잖아요, 다른 누군가의 횡격막 사진(X-레이 필름)으로 찍어낸 그 락앤롤 말이에요 - 의역)'에서 언급된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일부 록밴드들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 중이었고, 1968년에는 모스크바 재즈 페스티벌이, 1986년 5월 콤소몰 주최로 록 파노라마 '86(Рок-Панорама 86) 및 록 파노라마 '87이 공식 행사로 개최되는 등 생각보다 훨씬 자유로웠다.[14]

빅토르 초이는 결국 퇴학 후 보일러공으로 일하며 레닌그라드의 여러 록밴드에서 연주를 맡거나 자작곡을 발표하면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러던 중 1981년에 당시 러시아 록 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의 눈에 띄게 된다. 아크바리움은 1970년대 결성한 러시아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개러지 록과 캣 스티븐스 같은 포크 록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들려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마시나 브레메니(Машина Времени)와 비슷하게 러시아 록 개척자로 꼽히지만, 레닌그라드 투소프카 내 영향력은 아크바리움 쪽이 압도적이었다. 마시나 브레메니는 인기는 있었지만 다소 이질적인 선구자 포지션이다.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 그레벤시코프는 우연히 어느 파티 석상에서 빅토르 초이의 연주를 듣게 되었고, 즉시 빅토르의 재능을 인정해 당시 레닌그라드의 유일한 합법 록 공연장이었던 '레닌그라드 록 클럽'(Ленинград Рок-Клуб)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에도 그레벤시코프는 키노의 세션 연주나 프로듀싱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1집 '45'나 2집 '캄차카의 지배인'은 아크바리움 멤버들이 없었다면 녹음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3-4집에서 인상적인 연주를 보여준 베이시스트 알렉산드르 티토프도 원래 아크바리움 소속이다.

또 빅토르는 당시 인기 밴드였던 '조파르크/주파르크(Зоопарк)의 리더이자 한때 아크바리움의 멤버이기도 했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Михаил 'Майк' Науменко)하고도 친하게 지낸다.[* 러시아 표기법상 '조파르크'가 맞겠으나 한국에서는 영어로 해석한 건지 '주파르크'로 알려져 있으며(참고로 이 단어는 영어가 아니라 'Зоологи́ческий па́рк'의 축약어이다), '조(오)파르크'라는 표기법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 발음은 'a'에 강세가 들어가 '[zɐɐˈpark}(자아파르크)' 정도이다.]

빅토르와 조파르크의 이야기는 영화 레토의 주제이다.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자신의 메시지를 중간중간 담았기에 고증 100% 전기영화는 아니다. 빅토르가 1990년 교통사고로 요절한 뒤 마이크도 1991년 사망했는데, 두 사람을 1년 간격으로 잃은 그레벤시코프는 한동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빅토르는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 기타), 올레크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 드럼)와 함께 독자적인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고, 밴드 이름은 영화를 즐겨 보던 빅토르의 취향으로 '키노(Кино)'라고 정해졌다. 이듬해인 1982년에 공식 데뷰 앨범인 '45'를 발표한다. 물론 당시 소련에서는 모든 음반 산업을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해적판의 형태로 유통되었다. 1980년대 소련에서는 국영 음반사(멜로디야)에서 녹음하지 않은 앨범들의 상업적 판매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멜로디야를 통해 유통되지 않은 빅토르, 마이크, 보리스 등의 앨범은 유명세와 상관없이 전부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었으며 이들의 레코딩은 당시 기준으로도 질이 썩 좋진 않았다.[15]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16]'가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체제의 부조리를 짧고 우회적으로 비판한 가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알렉세이 리빈의 증언에 따르면 가사는 그냥 출근하기 싫다는 내용이며, 당시 키노의 인지도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 였다.
Я вчера слишком поздно лег, сегодня рано встал,난 어제 너무 늦게 누웠고, 오늘 일찍 일어나야 했어
Я вчера слишком поздно лег, я почти не спал.난 어제 너무 늦게 누웠고, 난 거의 잠을 못 잤지
Мне, наверно, с утра нужно было пойти к врачу,난 아마 아침부터 의사한테 갔어야 했어
А теперь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허나 지금 통근전철이 내가 원치 않는 데로 나를 데려가
(간주)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통근전철이 내가 원치 않는 데로 나를 데려가(2번 반복)
(간주)
В тамбуре холодно, и в то же время как-то тепло,연결통로는 쌀쌀하면서도 뭔가 따뜻해
В тамбуре накурено, и в то же время как-то свежо.연결통로는 담배 연기 자욱하면서도 뭔가 상쾌해
Почему я молчу, почему не кричу? Молчу.​어째서 난 침묵할까, 어째서 부르짖지 않을까, 그저 침묵...
(간주)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3 раза).통근전철이 내가 원치 않는 데로 나를 데려가
이 앨범은 매우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 소련 젊은이들에게 파급되었고,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열린 콘서트에서는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비핵화 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라는 한층 노골적인 반전/반핵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이 곡은 1985년 출반된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이건 사랑이 아냐...'에서 공식 출반되었으나, (비핵화 지대로)라는 중요한 괄호 제목은 삭제되고 그냥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로 나오는데 가사엔 그대로 나온다.[17]

이어 1984년 발매된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캄차카의 지배인'이 나온다. 캄차카(Камчатка)는 당시 속어로 '머나먼 곳', '보일러공'을 일컫는 단어였는데, 빅토르 초이가 보일러공으로 생계를 유지한 데서 착안한 자조적인 타이틀이다.[18] 이 외에 1967년 소련 코미디 '추코트카의 지배인'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한데, 추코트카캄차카 지방이나 둘 다 소련의 변방에 위치한 반도 지역이다. 당시 초이가 일하던 곳은 현재 '캄차카 하우스'라는 이름의 술집이 되어 있는데 관련 굿즈도 전시되어 있고 매일 공연이 이루어진다.

이 '캄차카의 지배인' 앨범에서는 이후 라이브와 후속 앨범들에서도 자주 재편곡되어 등장하는 대표작 '마지막 영웅(Последний герой)'이 인기를 얻었고(1번 트랙), 색소폰이나 첼로, 키보드 등의 세션 악기를 적절히 가미해 밴드의 소리 영역을 확장시켰다.

각각 1985년1986년 발매된 후속 앨범들인 '이건 사랑이 아냐(Это не любовь...)'와 '밤(Ночь)'도 큰 인기를 얻었지만, '키노'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대표작은 1988년 발표된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이었다. 원래 이 앨범은 러시아 내에서 발매할 계획이 없었고 미국에서만 발매할 예정이었다. 당시 소련 락 가수들은 미국 진출을 꿈꾸고 있었으나 서방의 무관심 및 언어적 장벽 등으로 인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키노 초기 시절부터 같이 협업해 오던 가수이자 엔지니어 비시냐는 "이 좋은 앨범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며 이를 소련에 발매했고, 이 때문에 초이와 비시냐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혈액형"은 반전가요라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지만, 초이 본인이 이에 대해 의견을 직접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또 다른 유명곡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의 경우, 초이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 노래는 페레스트로이카나 정치적 변화와 무관한 노래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개인의 변화를 그린 곡이다. 현재도 이는 팬들 사이의 논쟁 대상이다. 조금 마이너하게는 정치적 혹은 반전 사상의 영향이 전무한 자신의 길을 나서는 전사(warrior)의 노래라는 설부터 스타워즈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는 설까지 온갖 주장이 존재한다. 다만 이 때문에 저작권이 완전히 무시되어 키노 멤버들이 손에 쥔 돈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고 한다. '밤' 앨범만 해도 당시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1988년 무단으로 찍어내 20만 부나 팔았지만 멤버들에게 돌아간 돈은 1코페이카도 없어 논란이 있었다.

같은 해에는 라시트 누그마노프(Рашид Нугманов) 감독의 '이글라(Игла, 바늘이라는 뜻의 러시아어)'라는 영화#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체제와 인습에 냉소적인 반항아 스타일의 주인공 모로(Моро)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혈액형'에 이은 후속 앨범인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에서는 더욱 묵직한 록 사운드를 선보이면서 인기몰이를 했는데, 1990년에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면서 최절정을 맞이했다.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급의 이벤트를 연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초이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금전적 이익과는 별개로, 점차 반복적인 공연 활동에 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몇몇 지인들과 팬들은 당시 초이가 상업적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본다.
Сегодня отыграл ещё пару концертов, и понял что больше не могу, или просто сойду с ума.
오늘 공연을 또 몇 탕 더 뛰었어, 그리곤 깨달았어. 더 이상은 할 수가 없다고, 아니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19]

3.2. 사망

파일:inv-choi.png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차(모스크비치 알레코)를 타고 낚시 여행에서 돌아오다 버스(이카루스 250 빨간색 모델)와 충돌한다. 이후 이 이카루스 버스는 러시아 인터넷에서 초이를 상징하는 또다른 밈이 되었다.[20]

이 충돌로 빅토르 초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차는 완전히 박살났으며, 전해지는 말로는 가슴에 핸들이 찍힌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향년 28세. 당시 아들이었던 사샤와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자던 사샤가 일어나지 않아 혼자 낚시 여행을 갔기에 사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날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house no. 37의 벽)에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는 문구가 검은색으로 쓰였으며, 이 아래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를 말이 덧붙여지며 일명 '초이 벽(Стена Цой)이 만들어졌다. 누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초이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한 다른 팬이 "헛소리 하지 마라. 초이는 멀쩡히 살아 있다"라는 뜻에서 이렇게 적었거나, "이 세상에선 떠났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항상 살아 있다"라고 추모하는 뜻에서 적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이후 이 글귀는 후자의 뜻으로 받아들어져 빅토르 초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를 기리는 팬들이 외치는 슬로건이 되었다.

이 외의 도시에도 존재하나 여기가 제일 유명하며, 모스크바의 랜드마크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현재 이곳은 키노 팬들의 성지와 더불어 만남의 장소로 취급받고 있으며, 이 곳을 방문할 때는 아래에 위치한 재떨이에 부러뜨린 불 붙인 담배를 두고 가는 것이 전통이다. 그냥 담배만 두고 가도 되는 것 같다. 골초였던 빅토르를 추모하는 뜻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키노는 해산을 선언했으며, 초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롭스코예 공동묘지(Богословское кладбище)에 안장되었다.

초이의 죽음에 KGB가 관여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여러가지 정황상 케네디 암살과 더불어 정보기관과 관련되어 있다는 음모론이 가장 신빙성 있게 여겨지는 사건 중 하나이다. 빅토르 최 의문사 사건 항목 참조.

3.3. 사생활

4.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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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필모그래피

<rowcolor=#fff>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86년 Йя-Хха 본인 역 특별 출연[30]
1986년 Конец каникул(휴가의 끝)[31] 주연
1987년 Рок(록)[32] 다큐
1987년 Асса(아싸) 본인 역 특별 출연[33]
1988년 Игла(이글라) 모로 역 주연
1988년 Город(도시)[34] 본인 역 특별 출연[35]

6. 음악성

6.1. 음악 성향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혈액형.


라이브 영상.


어두운 톤으로 바뀌었지만 뒤에 깔리는 기타 선율이 훌륭하다.

해당 영상의 곡은 게임 GTA4의 차량 라디오 음악으로도 등장했다. 정확히는 본인이 부른 영어 버전.

가사의 신랄한 체제 비판 외에 음악도 당시 소련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모습으로 주목받았는데, 미국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계열 음악의 어법을 대단히 빨리 도입한 것이 즉효였다. 물론 서구에서 받은 강한 영향 외에도 러시아 포크 음악의 어법이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등의 대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가사 운율의 고전적인 분절법 등 전통적인 요소도 중시되었다.

다만 록이라고는 해도 서구의 그것과 달리 강렬한 기타 사운드나 화려한 드러밍, 고음역을 넘나드는 보컬 톤 등의 자극적인 요소 는 생각보다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서구 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프트 록이나 포크 록 정도의 임팩트밖에 느낄 수 없다는 이들도 종종 있다. 뉴웨이브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것과는 거리가 좀 있기도하고.

강렬한 헤비사운드 같은 것을 원한다면 Ария같은 그 당시의 헤비메탈 밴드를 들으면 되지만....록 음악을 '서구의 퇴폐적인 산물'이라며 신물나게 까고 있던 소련 문화 당국의 제도권 밖에서는 누가 들어도 아이언 메이든 삘이 나는 메탈 밴드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련은 록 음악을 단순한 하위 문화 취급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3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도 젊었을 적에 록에 심취해 있었다.

본래 걱정 없는 낙관적인 백수가 노래하듯 밝은 톤을 즐겨 사용했으나, 1988년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앨범 전후를 기점으로 어두운 톤이 주류가 되어갔다. 그럼에도 듣기에 부담되거나 억지로 연기하는 느낌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표현하였기에, 그런 비약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 거부감 없이 오늘날까지 고루 받아들여지고 있다. 84년 곡 캄차카 (Камчатка)와 88년 곡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전체주의 사회의 탄압 속에서 이 정도로 정제되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 밴드는 극히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이 만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는 없었기 때문에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위에도 언급한 전설의 음유시인이자 배우였던 비소츠키나 프리 재즈를 소련에 도입하고 꾸준히 발전시킨 재즈 뮤지션인 뱌체슬라프 가넬린 등과 함께 소련 반체제 음악인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지금도 키노를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키노 이전엔 이 땅대중음악이란 것이 없었다. 키노가 오고 나서 소련에 대중음악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빅토르 초이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유다."

사족으로 빅토르 초이의 유명세를 모른 채 들어도, 오래된 음악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아 상당히 듣기 좋은 이지리스닝에 속한다. 유튜브에서 리믹스 돼서 돌아다니기도 하기 때문에 '어 이걸 이 사람이 불렀구나' 라고 느낄 곡도 꽤 있는 편.

6.2. 사후의 평가

그 당시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러시아의 록가수 중에서는 아직까지 사랑받고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묘소에는 무보수 묘지기를 자처하는 극성 팬들을 늘 볼 수 있다고 하며, 거리의 건물 외벽 곳곳에서도 빅토르 초이나 키노와 관련된 그래피티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빅토르 초이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충격에 빠진 팬들이 투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또 영혼결혼식을 올리거나, 그가 꿈속에 나와서 시를 읊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모스크바에는 대중가요에 많이 언급되는 아르바트 거리에 아예 빅토르 초이의 팬들을 위한 낙서용 외벽이 있어서, 빼곡하게 쓰여진 낙서들을 볼 수 있다. 사후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후배 록 뮤지션들이 키노의 히트곡들을 모아 녹음한 트리뷰트 앨범을 발표했고, 6월 항쟁 이후 공산권 국가의 문화예술 규제가 완화된 뒤에는 한국에서도 한대수윤도현 같은 음악인들이 키노의 노래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2020년 시점에서도 유튜브에서 빅토르 초이의 음악에 달린 댓글을 보면 어떻게 수십 년 전 뮤지션한테 이 정도로 댓글이 달리나 싶을 정도로 키릴 알파벳으로 적힌 추모 댓글이 달린다. 더 놀라운 건 번역기를 돌려서 읽어보면 옛날 올드팬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듣고 유입된 신규 팬도 상당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규 팬 유입에는 동유럽산 게임 스토커메트로 2033에 빅토르 최의 곡들이 들어간 것과 큰 관련이 있기도 하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현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음악성을 갖췄다는 점이 놀랍다.

한국에서도 1995년에 KBS 일요스페셜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부터 이름이 알려지자 삼성영상사업단(나이세스) 부곡무역 같은 음반사에서 키노의 노래를 수록한 베스트 앨범이나 정규 앨범 몇 종류를 1990년대 중반에 라이선스로 제작해 발매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이세스판 12번 트랙이 'Троллейбус'라 되어 있는데 실제론 'Электричка'가 들어 있다. (첫 앨범 '45'에 실린 것은 아니고 89년에 나온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마지막 영웅)' 버전)

그런데 당시 한국에서는 러시아어 전공자가 아닌 이상 이걸 온전히 이해하는 대중음악 애호가들이 극히 적은 탓도 있고 고립된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달된 음악의 희박한 시장성도 있었는지 매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후새드. 게다가 당시 키노의 음악은 사실상 포스트 펑크에 속했는데, 펑크 록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은 당대의 상황에서 매우 생경한 음악이었던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펑크 록 음반이 제대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너바나가 한국에 얼터너티브/그런지 붐을 일으킨 90년대 초반 이후다. 그 전까지는 섹스 피스톨즈의 음반도 수입 금지 품목이었다.

빅토르 초이 탄생 50주년을 맞아 2012년에는 미공개 곡을 수록한 '아타만(ataman)' 앨범이, 2017년에는 러시아 락 음악가들의 헌정곡이 담긴 '우리는 영화관을 떠났다(Мы вышли из Кино)'와 '55'가 발매되었다.


탄생 55주년을 맞아 제작한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1989)' 뮤직비디오. 무려 러시아 최대 포털 사이트인 얀덱스가 제작을 맡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음악가, 배우, 학생, 행인들과 찍었다고 한다. 초이와 관련된 몇 가지 상징이 있는데, 자신이 빅토르 초이에 대해 좀 안다 싶으면 찾아보자. 정답은 코멘트에 적혀 있으니 구글 번역기 돌려서 확인해보면 된다. 1분 20초와 25초 벽에 적힌 문자열은 얀덱스 뮤직 1달 무료이용권이라고 한다.

2018년 빅토르 초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레토가 러시아에서 제작, 개봉되었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으로 출품되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배우 유태오가 연기했다. 같은 해 개봉된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와 미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각각 소련과 영국의 소수민족 출신인 보컬의 전기 영화이고, 둘 다 요절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연히 다른데, '보헤미안 랩소디'가 단순히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다룬다면, '레토'는 빅토르와 마이크라는 스타가 아니라 80년대 레닌그라드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와 사회에 대한 간접 비판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한 이유로 초기 가린과 쌍곡선 시절밖에 다루지 않으며,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키노 후기 모습은 크레딧이 나오기 직전 2~3분 나오는 게 다이다.

2020년 8월에 벨라루스의 시위 현장에서 벨라루스 시민들이 끌려가는 상황속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 '변화'를 불렀다.#

빅토르 초이의 사망 30주기를 맞이한 러시아에서 그의 죽음을 다룬 영화 개봉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사후의 평가에 대해 정리하자면 러시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넘어서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21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당대 소련의 시대를 대표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7. 빅토르 초이에 대한 오해

7.1. 크즐오르다 출생?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출생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닌다. 여기에 이로 인해 '러시아 연방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가 초이의 고향을 두고 싸웠다'는 투의 썰이 붙어 다니기도 한다. 크즐오르다는 초이의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다. 초이는 레닌그라드 출생이고 레닌그라드에서 활동했다.

파일:빅토르 초이 소련 여권.jpg
초이의 여권. 왼쪽 면에 보면 '1962년 06월 21일 레닌그라드 출생'이라고 적힌 걸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여권은 2018년 초이의 어느 친구(익명 처리)의 냉장고 뒷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외에도 친구들의 주소록과 '변화(Перемен)'의 초이 자필 악보도 같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걸 경매에 붙였고,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한화 1억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키노의 초기 멤버인 알렉세이 리빈은 이걸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 친구를 비난했다.

여담으로 러시아 현지에서는 초이가 극동 지방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36] 정말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반농담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7.2. 반체제적 가수?

흔히 빅토르 초이를 소련 반체제의 상징으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종의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초이 본인이 "자신의 음악은 정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Q: Отражаются ли как-то на вашем творчестве перемены в общественной жизни?
(사회적 삶의 변화가 당신의 예술세계에 어떻게든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A: А как они могут отражаться? Я же не певец социального протеста, не пишу песен "на злобу дня".
(그게 어떻게 반영된다는 건가요? 저는 무슨 사회운동을 하는 가수도 아니고, '원한의 시대'[37]에 대한 노래를 쓰지도 않는데요.)
- '젊은 레닌주의자 신문' 1985년 4월 인터뷰

초이의 지인인 영화감독 라시드 누그마로프도 초이 사후의 QnA에서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Q: Могли бы Вы сказать, что Цой избегал разговоров о политике или что политика его интересовала мало?>
(빅토르 초이가 의도적으로 정치 화제를 피했는지, 아니면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A: Я бы сказал так: политика не входила в круг главных интересов Виктора. Но сказать, чтобы она вовсе его не интересовала, не могу. Слишком разносторонним человеком был Виктор для столь однозначного утверждения.
(정치는 전반적으로 빅토르의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주제로만 한정짓기엔 빅토르는 너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번역의 출처는 여기

사실 소련 미디어가 전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크다. 당시를 살아보지도 않은 입장에서 '소련이라니 얼마나 억압이 심했을까? 분명 해방에 대한 메시지가 있을 게 분명해!' 하는 식의 1차원적인 시각이 널리 퍼진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본토인 러시아 및 해외의 팬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일종의 '전설'이다.

사실 러시아의 반문화인 투소프카(тусовка)자체가 상당히 비정치적인 편이었다. 원래 투소프카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의 총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이는 밴드 아크바리움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 속해 있었다.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이 건립된 1981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 다른 많은 투소프카들처럼 이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돈을 벌면서 클럽, 아파트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으며[38] 이들의 라이브 공연은 80년대 소련의 락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소프카'는 이념이나 신념을 투사한 구체적인 메시지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억압적인 체제에 냉소적이었다.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서 이런 흐름과 반대로 대놓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던 밴드는 사실상 '텔레비조르(Телевизор)'가 유일했다[39] 이들은 정부와 충돌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투소프카에서도 좋은 취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텔레비조르와 리더 미하일 보르지킨(Mikhail Vorzykin)은 2010년대에도 현역으로 활동중인데, 심지어 푸틴과 러시아 극우파를 씹어하는 위엄을 보인다. 또한 이들의 장르는 일렉트로닉으로 분류될 정도로 전자 음향에 친화적이었다. 평단에서도 토킹 헤즈갱 오브 포, 조이 디비전을 언급할 정도였다. 이 또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서는 주요 장르가 아니었다. 이들의 대표곡은 '너네 아빠는 파시스트다(Твой папа — фашист)'라는 비범한 제목의 곡이다. 보르지킨은 주파르크(Zoopark)의 리더이자 초이와 친했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와 이 문제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이후 화해해 그와 같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

고로 빅토르 초이나 키노에게 '구 소련 국민들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가수' 같은 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오해는 키노의 대표 앨범인 '혈액형',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검은 앨범'들이 전부 후기 앨범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초이의 작품은 초기와 후기가 상당히 다르다. 초기 곡은 상대적으로 직설적이고 가벼운 어쿠스틱 기타가 주가 되는 반면, 후기 곡들은 가사들이 모호해 해석의 여지가 갈리는데다 음악 및 초이의 보컬 자체도 상당히 중후해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 앨범이나 라이브 판을 들어보면(특히 45, 46 앨범) 소탈한 20대 '백수'로서의 초이의 면모를 잘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레토 역시 이런 빅토르의 초창기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와 후기의 스타일을 나누는 시각을 가지면, 첫 앨범 '45' 에서 선보인 '알루미늄 오이' 가 미사일을 은유한 반전 노래라거나, '엘렉트리치카(전철)' 나 앨범 '46' 에서 처음 나온 '트롤리버스' 가 아프간 전쟁에 끌려가는 노래라거나[40] 하는 시각이 얼마나 본래 의도와 맞지 않는지 보이게 된다. 후기의 시각만으로 초기 곡들을 이해한 것. 초이가 '알루미늄 오이' 는 직접 학창시절 오이를 수확하는 경험에서 나왔다고 밝혔으며, 엘렉트리치카는 그저 '백수가 출근하기 싫다는 노래' 내지는 아무리 가봤자 '전체주의 사회 비판' 정도, 트롤리버스는 인생에 관한 철학적 노래라 볼만하다. 사실 후기 스타일이라고 해도 '전쟁' 에 관한 노래만 있었지, 직설적으로 '아프간 전쟁에 끌려간다' 라고 해석될 만한 곡은 없었기에 이는 과한 해석에 가깝다.

하지만, 빅토르는 '나는 나의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언한다' 같은 반체제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가득한 노래도 분명히 냈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동유럽이나 아시아권의 연예인들은 정치 자체에 얽히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놓고 반정부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진보 성향이 아니라고 속단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특히 구 소련권 국가의 민중들 사이에서 민주화운동 때마다 애송되는 '혈액형'이나, '변화를'이라는 노래를 빅토르 초이가 손수 작사, 작곡을 했다는 점을 보면, 그가 반체제 가수가 아니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41]

정리하자면, 활동 초기에는 정치적인 요소와 무관한 행보를 보였나 몰라도, 후기로 가면서 조금씩 사회 문제에 눈을 뜨면서 이를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지만,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하지 않았던 사람 정도로 해석하는 게 가장 무난하다[42].
Я подразумевал под переменами освобождение сознания от всяческих догм, от стереотипа маленького, никчёмного, равнодушного человека, постоянно посматривающего „наверх“. Перемен в сознании я ждал, а не конкретных там законов, указов, обращений, пленумов, съездов.
(내가 말하는 변화란 것은 갖가지 도그마나, 온갖 사소한, 무가치한, 무심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위"를 바라보는 정신 세계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특정한 규칙이나 법률, 상소, 총회, 의회 같은 것이 아닌 정신 세계의 변화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빅토르 초이의 발언, 생전 인터뷰 중.

7.3. 한국과의 관계

한국에서는 초이의 아버지가 고려인 출신이지만 소련 국적자이기도 해서 초이도 소련 출신 가수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체성과 관련된 그의 메모나 일기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그는 다민족 국가인 소련 인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고 볼 수 있다. 2022년 현재도 러시아를 포함한 구 소련계 국가들에는 백인동아시아인혼혈이 많다[43].

그러나 초이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 한국은 전반적으로 강한 국수주의적 기조를 보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빅토르 초이에 대한 이미지는 한국에서 상당히 왜곡된 바 있는데, 음악적 업적에 주목하기보다는 '고려인 혈통' 운운하며 가족사를 줄줄이 나열하며 '한국의 피를 가진 러시아 최고의 락스타' 내지는 (상기 문단의 정치적인 시각까지 더해) '소련의 자유화를 이끈 한국의 가수', 혹은 더 과장되어 '칭기즈칸 이래 유럽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친 동양인'[44] 같은 타이틀만 강조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이는 신문 칼럼부터 다큐멘터리 방송까지 일관적으로 보이는 문제점이었으며, 이로 인해 현재에도 국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일단 '한국과 관계된 가수' 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상태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생긴 2020년대에도 키노나 빅트로 초이에 대한 한국 유튜브 영상은 대부분 적어도 혈통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시작한다.[45] 물론 이러한 타이틀이 러시아 음악에 대해 클래식이나 민요, 소련 군가 등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국내에서 그나마 키노와 초이의 이름을 퍼트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로 인해 키노 혹은 빅토르 초이의 한국 팬들 중에서는 이러한 시각을 비판하다 못해 혐오하는 경우도 많다. 단순히 민족주의적 기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으나, "초이와 키노의 음악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데, 한국에서는 고려인 혈통만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초이의 음악적 성취나 그 의의가 가려져 버렸기에" 초이와 한국을 연관짓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한국 팬들 중에서는 "빅토르 "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대신 "빅토르 초이"라는 러시아어식 표기법을 강박적일 정도로 강조하는 사람들이 보이며, 이 문단의 긴 설명 또한 이런 인식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소련 국적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고려인으로 러시아에 정착한 게 맞지만,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고 빅토르 본인은 당시 소련 국적으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빅토르와 비슷한 고려인 3세 또한 한국을 모국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46]

빅토르가 고려인이라는 것이 빅토르의 민족 정체성을 판단할 근거는 될 수 없다. 그의 노래에서는 수많은 비유와 은유들이 나오지만, 그 중 한국과 관련돼 있거나 자신의 핏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빅토르 초이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한 한국계 러시아 가수가 아니라 "노래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통해 자신이 동경하는 세계와 자유, 그리고 소련의 변화를 외친 소련의 청년 가수"라고 보는 게 맞다.

전반적인 그의 말년 행보를 보았을 때, 초이가 한국은 물론 전반적인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음악 커리어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초이는 일본에서 공연을 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47] 사망 당시에는 일본의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즈와 조인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예당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990년 겨울 즈음 한국 공연 역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다만 초이 본인도 자신의 혈통에 대해서 일정 정도의 관심이나 자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후반 당시 그의 홍보 담당자이자 프로듀서였던 유리 아이젠슈피스(Юрий Айзеншпис)는 회고록에서 초이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한 고려인 식당의 단골이었으며, 그 식당에서 초이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한국계 소련인들의 대표'로 여겨졌기에 매우 환영받았다고 서술했다. 또한 키노는 전국적 인기를 얻기 전에 투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슈퍼스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고려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또 초이는 당시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숙소를 애용했는데, 숙소를 운영하는 고려인들이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고로 최소한 당시 소련의 고려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초이의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하나인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Q&A에 따르면 초이는 자신의 한국 혈통에 관심이 있었으며 한국 요리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48] 다만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리해보면 당대 고려인들에게는 한국계의 대표격으로 환영받을 만큼 순수하게 소련인이라기보단 고려인 계열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빅토르 초이 본인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강하게 발현되었다고 보기엔 현재까지 마땅한 내용이 없다. 그가 더 오래 살아 동아시아 곳곳에서 공연도 하고 한국을 직접 더 접하고 관련되어 이야기가 나왔다면 몰라도, 현재까지 주어진 그에 대한 정보를 종합했을 때는 자신의 혈통에 어느정도 관심이 있었다는 정도로는 정리가 될 것이다.

8. 그 외

8.1. 여담

8.2. 대중매체에서


8.3. 불운의 러시아 록음악 단명사

희한하게도 이 시절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를 포함한 러시아 록 음악가들은 단명하거나 러시아를 떠나버린 케이스가 꽤 되며, 밴드 또한 해체 및 멤버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심지어 이런 사건들이 대부분 소련 해체 이후인 1990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러시아 록 팬들은 이 시기를 참 암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 Viktor Robertovich Tsoi [ˈvʲikt̪ər ˈrobʲɪrt̪əvʲɪtɕ ˈtsoi̯\][2] 당시 소련의 많은 아파트 및 건물은 중앙난방식이었기에 보일러실이 따로 있었고, 초이는 여기서 보일러에 석탄을 공급하는 화부로 일했다.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관제 예술가가 아닌 이상 예술가라는 직업을 인정받지 못하고 공식적인 수익을 창출하지 못했던 소련 특유의 환경으로 인해 초이는 이름을 날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화부로 일했다. 그가 일하던 곳은 이른바 '캄차트카'라고 불렸으며, 초이 사후 그를 기념하는 음악 카페로 지금도 남아 있다.[3] 초이는 자신의 동양계 혈통에 관심이 많아 아들의 이름을 티무르로 지으려 했으나 아내 마리안나의 강한 주장으로 알렉산드르로 지었다고 전해진다.[4] 현재도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초이는 사샤(알렉산드르의 애칭) 초이로 음악 활동을 하는 중이다. 최근 인터뷰를 보면 아버지가 죽은 후 빅토르 초이의 팬들이 초이의 죽음을 자기 어머니에게 풀며 폭행까지 하려고 했고 학교에서도 초이의 아들이라며 아버지와 비교당하며 살며 음악을 하는 지금도 악플에 시달린다고 한다. 다만 최근 노래 나의 일부(나에겐 없는)에서 생전 빅토르 초이와 자신이 같이 찍었던 어린 시절의 짤막한 비디오들로 뮤비를 만드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의 대한 악감정은 많이 사라진 듯.[5] 키노의 전신[6] 과거 구글 번역에 ‘Цой жив'를 입력하면 ‘최살아’라는 오역이 나왔는데, 한국 팬들 사이에서 재미로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7] 학술적으로는 콘체비치 표기법에 따라서 어두에서의 ㅈ을 Ч, 통상적인 ㅊ을 Чх로 전사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Чучхе'로 표기한다. 다만 러시아어 원어민들 입장에서는 'Чх' 같은 자음쌍이 상당히 이질적이고 발음하기 힘든 데다 발음을 잘못하는 문제가 있어 그냥 Ч로 전사하는 사례가 많다. 'Чучхе'만 보더라도 원래 의도는 'Чу-чхе'인데 많은 러시아인들은 'Чуч-хе'로 읽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8] 크즐오르다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를 온 곳으로, 홍범도 장군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9] 초이의 증조모의 성씨 '유가이'는 유씨 성을 의미하는 '유가(-哥)'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한 성씨. 즉 원래 유씨였다는 소리다. 고려인이나 한국계 러시아인 중 성씨가 '-가이'로 끝나면 다 이 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0]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동양으로 영토를 넓히며 진출했듯이 동양인과 혼혈이 이루어진 역사가 깊기 때문에 빅토르의 외모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11] 초이의 유치원 교사는 초이의 부모에게 초이를 미술학교에 보내라고 말하기도 했다.[12] 당시 소련이 서구와는 거리가 먼 제2세계 국가였지만, 암시장이나 다양한 루트로 서방의 음반(또는 해적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빅토르 초이가 살았던 레닌그라드는 지척에 핀란드가 있어서 서방의 음반을 구하기가 더욱 쉬웠다.[13] 종종 초이를 다룬 글에서 '시콜라/쉬콜라(Школа/Shkola)'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냥 러시아판 중고등학교 혹은 중등 교육 과정이다.[14] 재즈의 경우도 스탈린 시절에는 '즈다노프시나'(Ждановщина)로 대표되는 상당한 탄압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에는 그 인기로 인해 사실상 정식 장르로 편입되었다.[15] 그런데 웃기게도, 몇 년 뒤 빅토르가 앨범 '밤'을 찍다 영 아니다 싶어 프로젝트를 폐기하자 당시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안드레이 트로필로가 이를 멜로디야로 가져가 좀 손을 본 뒤 발매했고, 이는 무려 20만 장이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멜로디야 측에서 키노에게 지불한 저작권료는 0루블이었다.[16] 엘렉트리치카는 한국의 광역전철 개념과 비슷한, 러시아의 대도시 근방을 잇는 전기철도를 가리킨다. 통근용으로 애용된다.[17] 한국 웹에서는 이로 인해 공공장소에서 공연을 금지당했다는 말이 정말 널리 퍼져 있으나, 실제로는 당국에서 제재를 받은 전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18] 초이는 사망할 때까지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당시 소련의 아파트들은 중앙집중식으로 난방되었고 초이의 업무는 아파트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에 석탄을 퍼넣는 화부 역할이였다. 소련 시절에는 무직이 금지되어 있었고 보일러공은 업무 시간이 짧다보니 초이가 음악 활동에 전념할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19] 마리안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20] 대충 의미가 마티즈 드립과 비슷하며, 유사한 상황에서 쓰인다.[21] 공연으로도 거의 수익을 얻지 못했지만 초이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으며 자신들의 노래를 좋아하는 대중들을 위해 서비스 개념으로 진행한것에 가깝다. 언론과의 인터뷰 질문에서도 늘 유명세나 상업적 성공에 대해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다.[22] 根付. 일본식 나무 조각 공예품. 학창 시절 배웠다고 한다.[23] 이 외 소련 담배 "벨로모르"도 즐겨 피웠다는 기록이 있다.[24] 마리안나는 키노의 무대를 꾸미거나 초이의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키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초이 사후 번역가로도 활동했고, 키노 콘서트 주최,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남편에 대한 책도 냈다.[25] 현재 사샤는 아버지를 이어 뮤지션 일을 하고 있다. 키노 콘서트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한다.[26] 빅토르는 아들을 매우 아꼈다. 죽음의 원인이 된 낚시 여행 당시에도 원래는 같이 데려가려 하였으나, 사샤가 유난히 잠에서 깨질 않아서 빅토르 혼자만 여행을 갔기에 사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27] 아버지라고 해도 5살 당시 사망했으니 그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빅토르 사망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 팀이 빅토르에 대해 유족을 찾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갓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사샤가 카메라에 대고 아버지의 얼굴이 달린 배지를 자랑하는 안타까운 장면을 보여주었다.[28] 초이 사망 이후 일부 과격한 팬들이 집까지 찾아와 마리아나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까지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도 러시아 웹에서는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 "돈 때문에 키노를 예토전생시켰다",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음악 활동을 하면서 성씨도 갈아치웠다", "키노의 저작권을 전부 꿀꺽했다" 등 인신 공격 수준의 댓글이 심심찮게 보일 지경이다.[29]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는 집에서 거의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 마리아나와 외조모 발렌티나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고, 기분이 좋은 날에나 가끔씩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30]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Дальше действовать будем мы (우린 계속 행동할 것이다)를 부른다. 배경으로 당시 초이가 화부로 일하는 장면 등이 스쳐 지나간다.[31] 세르게이 리센코 감독의 대학 졸업 작품용 단편 영화. 키노의 4곡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32] 소련의 록씬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빅토르 초이가 화부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33] 엔딩 부분에 등장해 Перемен!(변화!)를 부른다. 초이와 키노의 유일한 등장 장면이지만 유명세 문제 + 상당히 인상깊은 연출로 인해 이 부분만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고, 아싸가 초이 주연의 영화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연은 당시 레닌그라드의 음악가였던 세르게이 '아프리카' 부가예프(Сергей 'Африка' Бугаев)이며 실제 삽입곡도 아크바리움 노래 등이 주(主)이다.[34] 알렉산드르 부르체프 감독의 작품으로 1988년 버전과 1990년 버전으로 나뉜다. 88년도 버전은 부르체프 감독의 대학원 졸업 작품용 단편영화로 런닝타임은 대략 40분 정도이다. 90년도 버전은 88년도 버전을 바탕으로 러닝타임을 83분 장편 영화로 확대했다. 1988년도 버전은 원래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를 주요 등장인물로 찍으려 하였으나 바실라초프가 자살하며 엎어졌고 대신 초이가 특별 출연했다. 이후 1990년 초이를 주요 등장인물로 장편으로 재촬영하러 하였으나 초이도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데데테의 유리 셰프추크가 대신 출연하였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35] 저녁 식사 와중에 주연들 집을 방문하여 본인의 노래 '전설'(Легенда)을 부른다.[36] 일반적으로 사하인 계열이라고 말한다.[37] 매우 현실적인 삶, 살기 힘들고 부조리한 현실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관용어구[38] 이 때문에 초이와 키노의 라이브 공연은 대부분 '아파트' 혹은 '나이트클럽' 녹음이 많다.[39] 텔레비조르의 1987년 노래 Три-четыре гада(개자식 서넛)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느낌이 빅토르 초이와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40] '트롤리버스' 를 이렇게 해석하는 시각은 특히 영미권에 아주 널리 퍼져있다. 영어로 kino trolleybus만 쳐도 중간중간 아프간 전쟁 관련 편집이 보일 정도. 상기했듯이 백수같은 스타일의 '46' 이나 '캄차트카의 지배인' 버전보다는 '마지막 영웅' 의 리믹스를 틀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41] 그러나 여기에 또 생기는 반문은, 본인은 정치적인 메시지는 없다고 했으며, 특히나 '변화를' 의 경우 인생의 변화를 바라고 작곡했으며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는 해석을 극구 부인했다는 점이다. 어찌보자면 이 민중들의 해석도 빅토르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지만, 일단은 본토에서까지 빅토르의 곡이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상기한 '빅토르는 정치적인 작곡가다' 라는 '전설' 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42] 대한민국에서 빅토르 초이와 가장 비슷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뮤지션이 바로 양희은이다. 그녀도 빅토르처럼 초기에는 정치적인 요소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이후로도 직접 정치 논객으로 활동한 건 아니었지만, 대중들로부터 진보 성향의 민중가요 가수로 인식되어왔고, 스스로도 이를 인지하고 의식하는 모습은 꾸준히 보여왔다.[43]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부터가 집안 자체가 튀르크계-러시아계 혼혈이었다.[44] 실제 모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한 과장된 수식어구.[45]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영상이더라도 아예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혈통을 얘기한다. 말하자면 '국내에는 이런 혈통이라서 고려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러시아 가수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같은 식.[46] 물론 러시아 국내여권에는 자신의 민족이 적혀있는데, 고려인들은 한국계임이 명기되어 있어서 최소한 자신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는 자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자신의 핏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고려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점으로 러시아 밖의 고려인들은 오히려 러시아와 엮이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났다.[47] 당시 일장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구매했는데, 그 유명한 올림픽 공연 당시 이 티셔츠를 입고 나와 "반자이!"를 외친 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48] 이 '한국 요리'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혹자는 코레이스키 마르코비(Корейский морковь)로 추측하기도 한다. 요리를 아는 한국 사람들은 흔히 '당근 김치' 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근을 얇게 채썰어 기름 등에 무친 일종의 샐러드인데, 사실 한국 고유의 특별한 요리는 아니지만 고려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식 요리나 반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현재는 러시아에서 주류 반찬으로 자리잡았으며, 짜장면라멘 그리고 캘리포니아 롤처럼 '본국과 크게 괴리된 본국 요리'의 사례로 꼽힌다.[49] 초이는 피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신병원 입원을 위해 손목을 긋기도 했다.[50] 초이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혈액형 역시 직접적으로 전쟁을 언급하지 않지만, 당시 명분도 없는 침략전쟁에 투입되어 상부의 명령으로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르고 죽을 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싸워야 했던 소련 청년들의 심정을 잘 나타낸 반전가요로 평가받는다.[51] 최종적으로는 조울증 진단을 받아내서 징병을 피하는데 성공했다.[52] Joanna Stingray (~1960). 로스앤젤레스 출신, 1984년 첫 소련 방문을 시작으로 키노, 아크바리움, 알리사등 여러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소련 락 음악을 서방 국가로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반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만큼 극성 반공주의자였다고 한다. 80년대 초중반엔 미소관계가 험악했을 때라 미국인의 소련 여행이 최대 일주일간 매우 제한적인 단체 여행으로만 이뤄졌는데, 음악가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 도중 이탈하거나 소련 음악이 녹음된 카세트를 몰래 미국으로 가져오기도 한 용감한 여성. 미국과 소련을 너무 자주 오가다보니 FBI와 KGB 양쪽에서 간첩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고, 1990년 8월엔 절친이였던 초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공허함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후 1996년까지 러시아에 머물며 음악가 및 방송 관련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귀국.[53] 초이가 미국을 여행한것과 키노의 일부 노래가 영어로 발매된것도 그녀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특히 초이가 처음 디즈니랜드에 놀러갔을 때 어린 아이처럼 정말 즐거워했다고 한다.[54] 학창 시절 길거리에서 고프닉들에게 괴롭힘과 인종차별을 당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런 그에게 이소룡은 그야말로 취향저격을 한 셈이었다.[55] 냉대기후의 동유럽은 겨울이면 늘 흐리고 눈과 비가 자주 내린다. 칼바람이 불지만 화창하고 건조해서 옷만 잘껴입으면 금세 따뜻해지는 한국과 달리 이쪽은 햇빛이 거의 안나서 냉동창고마냥 뼛속까지 시리다.[56] 한 예로 1982년, 초이와 마리안나는 모스크바에서의 크바르티르니크를 위해 집에서 떠나려고 했다. 이때 빌은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간다고 생각해 긴장하여 초이의 손바닥을 세게 물었다. 초이의 손이 크게 다치었고, 고통은 모스크바로 떠나는 기차에서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이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57] 본문에 빅토르 초이의 노래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이는 오역인 듯 하다. 원래 가사는 "А кто будет петь, если все будут спать?"로, 해석하면 "모두가 잠들면 누가 노래하리"에 가깝다.[58] 본명이 안나 빅토로브나 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