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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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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24242><colcolor=#fff> 신성우
Shin Seong Woo
파일:신성우1.jpg
본명 신동륜 (申東倫)
출생 1967년 5월 27일[1] ([age(1967-05-27)]세)
충청남도 서산시[2]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본관 평산 신씨[3]
신체 181cm, 78kg, 280mm, B형
직업 싱어송라이터, 배우, 조각가, 뮤지컬 연출가, 교수
가족 어머니 김영자(1937년생)[4], 여동생
아내(1983년생, 2016년 12월 12일 결혼)
장남 신태오(2017년 12월 31일생)
차남 신환준(2022년 6월 13일생)
학력 서울수색국민학교 (졸업)
연서중학교 (졸업)
숭실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조소전공 86 / 학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조소학 / 석사)
병역 전시근로역 또는 병역면제[5]
소속사 KX엔터테인먼트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활동3. 보컬4. 가족사항5. 논란6. 활동 내역
6.1. 음반6.2. 뮤지컬6.3. 드라마/시트콤6.4. 영화6.5. 방송6.6. 조각 전시회6.7. 심사 위원6.8. 수상
7. 대표곡

[clearfix]

1. 개요

파일:신성우2.jpg

대한민국가수.

2. 활동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밴드를 시작하여 여러 밴드와 언더그라운드 무대를 거친 후 1987년, 밴드 <부활>의 보컬로 참여하며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했다. 데뷔는 1992년 1집 앨범 <내일을 향해>.

원래 부활의 리더 김태원에게 발탁 되어 김태원이 당시 결성했던 밴드 GAME의 보컬로 영입, 앨범작업을 위한 곡 작업 중 음악 성향에 관한 견해차이로 탈퇴하였다. 당시 신성우는 새로운 밴드이므로 정통 락 음악을 하길 원했으나 김태원은 락발라드에 가까운 부활 스타일의 음악을 고집했으며 그 후 밴드 카리스마, 작은하늘의 기타리스트였던 이근형, 이근상 형제의 작은하늘 3기 보컬로 합류 하였으나 제작사의 기획 변경으로 중추멤버를 주축으로 곡 작업을 한뒤 솔로로 데뷔하게 되었다.

'테리우스' 태그의 올바른 예시다. 초콜릿 복근의 탄탄한 몸매,[6] 조각같은 외모, 60년대생이지만 180cm가 넘는 큰 키와 훌륭한 기럭지, 허스키한 목소리까지.[7]

데뷔 시절에는 같은 시기에 데뷔했던 이덕진과 함께 원조 테리우스 논쟁을 벌일 정도로 꽃미남 가수였다. 데뷔 때 부터 그가 하는 음악 보다는 그의 외모가 먼저 주목 받았는데, 사실 신성우는 꾸준히 자신의 앨범에서 작사, 작곡을 해 오던 싱어송라이터였다. 즉 신성우는 외모 때문에 그 음악성이 역차별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록커라고 불리는 신해철, 김경호 등은 배고픈 수준을 넘어서 생존을 고민하다가 스스로의 정체성과는 조금 다른 대중적인 노래로 히트를 치고 메이저로 편입된 경우인데 신성우는 본인의 출중한 외모를 무기로 1집때에도 록밴드 보컬리스트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AR을 틀든 MR을 틀든, 무대에 오를 때는 언제나 자신의 밴드인 '내일뉴스'를 뒤에 배경으로라도 두었다. 한참 가요프로그램에선 '신성우와 내일뉴스'로 소개된 적도 있다.[8]

다행히 LA메탈 풍의 <내일을 향해>의 인기가 워낙 오래 갔기에, 앨범 활동도 오래 할 수 있었고, 1집 활동 막바지에는 발라드 <꿈이라는 건>도 소폭 히트했다. 활동 당시 신성우는 김경호가 후에 인터뷰에서 밝힌, 초창기 포크 음악을 하다가 신성우와 라디오 공개방송을 한 후에 그의 모습을 보고 롹음악으로 장르를 바꿨다라고 말할 정도의 무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에게 퍼져있는 배고픈 락 뮤지션의 이미지 때문에 신성우는 오랜 밴드 음악 경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이 겉멋만 들어서 락커를 흉내내는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신성우 본인은 자신의 잘생긴 외모만 집중하는 그 시기 침통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이후 2집은 자기의 원류인 헤비메탈/하드록 성향을 제대로 보여준다. 복장도 헤비메탈 시대의 끝물인 LA메탈 시대 보컬리스트의 상징인 가죽점퍼/가죽바지/롱부츠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타이틀곡 <노을에 기댄 이유>는 마이너의 헤비한 록 발라드인데 그리 대중적인 곡은 아니었지만, 후반부의 샤우팅에서 신성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1집에 비해 영 신통치 않았고, 급하게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밝고 부드러운 미드템포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으로 주력 노래를 바꾸면서 다시 인기를 회복한다. 2집에는 특이한 곡들도 많이 들어 있는데 핑크플로이드의 The Wall 을 연상시키는 첫 곡 <요람에서 무덤까지>, 데이빗 커버데일의 솔로 시절을 연상시키는 피아노와 브래스 사운드가 가미된 셔플리듬의 록넘버 <민아의 일기>등 앨범 발매년도인 1993년을 무색케 하는 세련된 넘버 들로 가득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같은 실험 적인 곡들은 이후 '사랑한 후에'가 수록된 5집 앨범까지 추가적으로 발표 되었다.

신성우 3집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과 발표 시기가 거의 같았는데, 서태지와 비슷하게 얼터너티브 록으로 발매되었다. 실제로 몇몇 방송에서 서로를 '같은 실험적인 장르로 돌아온 동반자'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얼터너티브 록에 맞추어 춤을 춘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달리, 신성우는 제대로 록밴드의 형태를 갖추고 방송과 무대를 누빈다.

당시 활동에서 특이한 점은 타이틀곡으로 두 곡을 밀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카세트 테이프 기준 A면 첫번째 곡인 <기쁨이 될 것을>, 다른 하나는 B면 첫 번째 곡인 <서시>. 업템포에 경쾌한 분위기가 두드러지면서도 실험적인 성격이 있어 많은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했던 전자와 달리, 후자는 익히 알려진 서정성으로 금세 많은 인기를 끌었고, 결국 그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역대 가요 중에 좋은 가사를 뽑는 순위에선 늘 상위에 랭크된다.) 그런데 묘하게 유명세를 잘 못타는 성격이 반영 되었는지 노래를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하고 아는 사람들도 제목이나 가수는 모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서시는 현재까지 넓은 연령대에서 불리워지는 명곡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노래방 애창곡 들중 항시 상위 랭크되어 있다. 참고로 <서시>는 신성우 본인이 앨범작업을 위해 합숙을 하며 곡들을 만들던 중 연습실 근처 감자탕 집에서 식사를 하고 연습실로 돌아온 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기타리스트 이근상이 친 코드진행에 영감을 받아 그 자리에서 원 테이크로 만들어 졌다고 전해진다.[9]

사실 3집 또한 <서시> 한 곡을 제외하곤 대중적인 앨범으로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본인의 말마따나 정통 얼터너티브록 앨범이다.[10] <초연>은 퍼즈톤이 두드러지는 질펀한 블루스 록이며, <천사여 울지 마세요>는 그런지가 구현할 수 있는 따뜻함과 온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건달의 허세>[11]는 얼핏 코믹하지만 당시에도 존재했던 취업난을 풍자하여 작은 인기를 끌어서 2000년대로 넘어와 (신성우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플래시 영상물로도 만들어졌다.

이후 신성우는 015B장호일, N.EX.T의 멤버였던 이동규와 함께 프로젝트 밴드 '지니'를 결성해서 펑크 롹 쟝르의'뭐야 이건'과 '바른생활'이라는 곡을 히트시켰다.

1996년 발표한 신성우 4집은 녹음을 진행한 영국에서 오페라의 유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캐츠의 작곡가로 유명한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전설의 록 밴드 Stone Roses의 기획사인 SGO에서 영국에 머물며 활동할것을 권유까지 할 정도로 그의 음악적 역량이 절정에 오른 시절이었으며, 1998년 발표한 5집에는 그의 노래 중 서시와 더불어 가장 히트한 곡 '사랑한 후에'가 실려있다.

1998년엔 '드라큘라'로 뮤지컬을 시작, 활동 영역을 확장했으며 1999년 'Rock햄릿' 이후부터는 아예 뮤지컬 배우로 전환하여 '삼총사', '모짜르트 오페라 락', '체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하루', '메피스토', '아이언 마스크'에 이르기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잭 더 리퍼'의 살인마 잭. '락 오브 에이지'의 스테이시로 캐스팅되어 폭풍 간지를 선보였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행보는 진행 중이며, 현재 백석대학교 문화예술학부 뮤지컬 전공 전임교수로 2016년 부터 재직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뮤지컬 배우 외에도 연기자로서 활약하고 있으며,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12], 드라마 첫사랑, 위기의 남자, 위풍당당 그녀, 12월의 열대야, 디어 마이 프렌즈 등 20여 편이 넘는 드라마에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예능 프로그램 룸메이트에 나와 신엄마로 불린다.

크크섬의 비밀에 같이 나온 배우 김광규와는 이웃사촌으로 무척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2015년 드라마 엄마에서 민태헌 역을 맡아 연기자로 복귀했다. 무사 백동수와 영화 결혼식후에 OST도 불렀다. 그리고 무림학교, 디어 마이 프렌즈, 위대한 유혹자 등에도 출연하였다. 2021년에 데뷔 30주년을 맞이했다.

3. 보컬

신성우의 노래들은 음역대가 넓은 노래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2집의 <구식사랑>, 4집의 <자유하는 삶을 위해>라는 곡과 5집의 <내 맘대로>가 있다. <자유하는 삶을 위해>와 <내 맘대로> 두곡은 실제로 들어보고 피아노로 쳐보면 3옥타브 미 수준으로 음역대이며 또한 <구식 사랑>은 2옥타브 시를 자랑한다. 무겁고 탁한 바리톤의 목소리인 신성우의 보컬로 과연 저 음역대까지 가능한지 의문이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상당히 시원한 고음을 자랑하는 곡들이다.

예전 초창기 2집 시절 <노을에 기댄 이유>의 라이브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굵직하고 어두운 톤에 무겁고 탁한 목소리를 가진 그가 3옥타브를 거뜬히 넘겨서 실제로 불러보면 굉장히 어려운 그 노래를 소화하는 모습은 상당히 절륜하다. 발성의 특이점을 볼수있다. 신해철도 비슷한 발성 (그로울링 샤우트:성대 포지션은 베이스에 있으며 목젖 앞의 구강 천정 연개구를 울려 비강의 공명과 동시에 두개골의 부비동을 공명시키는 발성)을 질러대다보니 성대가 무리하게 되어 목소리가 저음에 가까운 쪽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지만 성대 포지션이 철저히 베이스 위치에 있어야 하는 발성이기 때문에 저음 역대에 소리에 관심을 갖고 음역을 넓힌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두 가수의 노래들을 잘 살펴보면 음역대가 매우 비슷하다. 가요대전에서 신해철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라는 곡을 아주 깔끔하게 그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내기도 했다. 현재 저작권 문제로 방송분은 유튜브에서도 볼수 없지만 매년 진행되는 신해철의 추모공연에서 실제 라이브를 감상할수 있다.

한 예시로 뮤지컬 '잭더리퍼'에서 '잭'역할을 맡은 무대에서 "이 밤이 난 좋아"라는 곡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애드리브로 장식을 하는데 이 애드리브 부분의 음역을 체크해봤을때 3옥타브 솔까지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즉, 지금은 뮤지컬로 인해 하청 베이스 보이스와 고음역대 발성이 상당히 안정이 되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소리가 잡혀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4. 가족사항

2016년 겨울, 16세 연하의 플로리스트와 결혼했다. 결혼 1년 후인 2017년에 첫째를 득남했고, 5년 후에 태어난 둘째도 아들이다.

방송에 아들을 공개했지만 아내의 얼굴은 공개하지 않는데, 20년 넘게 집요하게 괴롭히는 스토커 때문이라고 한다. 신성우의 결혼 후 스토커의 집착이 더 심해지는 등 아내의 신변의 위협을 느껴 비공개로 두기로 했다고 한다.

5. 논란

가수 활동 시기였던 1992년 10월에 대마초로 불구속 입건된 사건이 있다. 링크 링크 2 1988년 9월에 김태원의 권유로 잠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멈추었던 오랜 과거의 에피소드가 뒤늦게 회자 되어 발목이 잡혔던 불명예.[13]

당시에는 정상 참작되어 별다른 방송 규제는 받지 않았고, 매스컴에서도 대서특필하지 않아 모르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듬해인 1993년SBS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면서 뒤늦게 그 사실이 알려졌다. 링크

참고로 사건 직후인 1992년 11월에 신성우는 SBS SBS 인기가요에 출연하여 해당 사건에 대한 인터뷰도 했었다. 링크[14]

다만, SBS에서만 규제를 받은 것이지 MBC 출연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고, 밤의 디스크쇼라는 인기 라디오 방송 DJ도 맡았다.[15][16][17]

채시라와의 연애와 파혼 과정도 시끄러웠다. 미남미녀 커플로 화제를 모았으며, 커플 수영복 화보까지 찍을 만큼 애정을 과시하며 무난하게 결혼하나 싶더니 1997년 성격차이, 두 집안의 갈등으로 인해 파혼을 선택했다.

6. 활동 내역

6.1. 음반

6.2. 뮤지컬

6.3. 드라마/시트콤

<rowcolor=#fff> 방영 연도 방송사 제목 배역 비고
2000년 파일:SBS 로고(1994-2000).svg TV 영화 러브스토리 - 미스힙합 미스터록 하정우
2002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위기의 남자 강준하
2003년 베스트극장 - 꽃 강호균
위풍당당 그녀 서인우
파일:SBS 로고.svg 첫사랑 이준희
2004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드라마시티 - 사랑한 후에 이상현
파일:SBS 로고.svg 미드나잇 DJ 강준호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아름다운 유혹 강민우
파일:MBC 로고(1986-2005).svg 12월의 열대야 민지환
2005년 파일:MBC 로고(2005-2011).svg 한뼘드라마 - 리허설
떨리는 가슴 정남수
베스트극장 - 메이, 준
2006년 내 인생의 스페셜 정형석
파일:SBS 로고.svg 무적의 낙하산 요원 강은혁
2007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사랑해도 괜찮아 안철웅
2008년 파일:MBC 로고(2005-2011).svg 크크섬의 비밀 신과장
2010년 즐거운 나의 집 이상현
2015년 파일:MBC 로고.svg 엄마 민태헌
2016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무림학교 채윤
파일:tvN 로고(2012-2021).svg 디어 마이 프렌즈 한동진
2018년 파일:MBC 로고.svg 위대한 유혹자 권석우
2021년 파일:SBS 로고.svg 펜트하우스 III 클라크 리 특별출연
2022년 파일:tvN 로고(2012-2021).svg 살인자의 쇼핑목록 안영춘

6.4. 영화

<rowcolor=#fff> 개봉 연도 제목 배역 비고
2006년 형사 공필두 음악감독
2009년 결혼식 후에 김지홍

6.5. 방송

6.6. 조각 전시회

예술 전공 출신 연예인(가수, 연기자)들은 학부를 예술계로 나왔어도 보통 대학원 과정은 방송연예학이나 연기 쪽으로 가는데, 그 중에서는 드물게 대학원 과정까지 원래의 조각(조소) 전공으로 마쳤다. 그래서인지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조각가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다.

6.7. 심사 위원

6.8. 수상

7. 대표곡


[1] 음력 4월 19일. 본래 1968년 생으로 알려졌다가 어느샌가 67년 생으로 바뀌었다. 포털사이트 등지에는 7월 26일로 등재돼 있으나, SBS 룸메이트에서 이는 사실과 다르고 본인이 음력 4월 19일이라고 손수 인증(?)한 바 있다.[2] 초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얻어준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의 자취방에서 여동생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다.[3] 평산 신씨 35세손 '東'자 항렬이며 코미디언 신동엽항렬이 같다.[4] #. 9살 때 양친이 이혼했고, 여군인 모친 밑에서 자랐다.[5] 여러 커뮤니티들과 일부 인터넷 뉴스들을 보면 성격장애를 사유로 면제됐다고 나오나, 본인이 명확한 해명을 하지 않아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보통 병역면제라 하면 5급 전시근로역과 6급 완전 면제를 다 통틀어서 일컫는데, 소위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장애인을 제외하면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 구 3급 장애인에 한정하여 전시근로역이 되기는 한다) 5급 전시근로역인 경우가 거의 100%라고 봐야 한다. 다만 옛날 1974 ~ 1993년에 20살이 된 1955 ~ 1974년생은 베이비 붐이라 병력 자원이 수요를 크게 웃돌았던 때라 현역 판정률이 절반으로써 유독 낮았고, 시력이나 청력, 비만, 저체중, 질병, 학력 미달, 가정사, 전과 등 각종 자질구레한 사유들로 현재 기준으로는 현역(3급)이나 사회복무요원(4급) 판정을 받아야 할 인력들이 전시근로역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삼대독자나 편모가정 등 독특한 가정사가 있는 경우도 5급으로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신성우 본인도 편모가정의 외아들(당시 용어는 부선망 독자)로, 나이 든 여성은 경제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생계 곤란 사유로 면제가 된다.[6] 사실 록커 활동시에는 그런 몸매는 아니었고, 꾸준한 운동을 통해 단련한 것이다.[7] 원래는 미성의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나 로커의 보이스를 만들기 위해 하루 10시간 이상의 연습으로 목소리를 바꾸었다고 한다.[8] 실제로 1집은 기타리스트 이근형, 이근상 형제와의 공동작업이며 밴드 형태의 음반이다. 형인 밴드 '카리스마' 기타리스트 이근형의 프로듀스하에 동생인 이근상과 밴드 '작은하늘'로 데뷔하려고 했으나, 제작 중에 신성우의 솔로 앨범으로 변경 됐다는 얘기가 있다 '부활'의 '신성우'와 '작은하늘' 2기 보컬인 '김재기'가 서로의 밴드 자리를 바꾸면서 김재기는 '사랑할수록'을 발표, 이후 '작은하늘'은 '신성우' 솔로 앨범으로 기획 전환 하며 동생 이근상이 내일뉴스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1집 앨범 뒷면에는 신성우, 그리고 드러머와 함께 사진도 실려있다.) 1집부터 5집까지 이 형제는 편곡자로서, 기타리스트로서, 몇곡에서는 공동작곡가로 꾸준히 크레딧을 올리고 있다.[9] 그 때문인지 이근상과 공동 작사,작곡,편곡에 같이 올라있다.[10] 록음악 팬이 아닌 TV에서 서시 나 내일을 향해 등의 팝 성향의 히트곡으로 그를 처음 접한 팬들은 앨범 구매후, 한 두곡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중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실험적인 넘버들에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를 폄하 하던 록매니아들은 그의 앨범을 접하고 나서는 그의 외모에 가려진 음악성을 안타까워 했다.[11] 노래 자체는 1991년 8월경에 완성되어 1992년 라이브 앨범에 처음 수록되었다.[12] 사실상 진 주인공인데다가 연기도 괜찮았고 김선경과 로맨스 호흡도 상당히 잘 맞았다. 김광규와 함께 최고의 인기 캐릭터.[13] 기사에 나온 구속자 명단을 보면 1967년생인 신성우가 선배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김태원이 유일하다. 한편, 1988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흡입한 것만 본인 진술로 확인되고, 마약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14] 정말 대마초를 문제삼은 것이었다면 이미 1992년에 출연 정지를 시켰어야 하나, 이듬해인 1993년 3월이 되어서야 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다만 백반기행에 출연했을 때, 당시 활동 전반을 회고한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그때는 '거만'해서 시상식에 일부러 불참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1994년 당시 음반 관련 시상식에서 신성우의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상을 안 준 적은 있었는데, 이 경우는 대마초가 문제가 아니라 신성우의 출연 거절에 보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가수가 시상식에 불참했을 경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한 불참일지라도 일부러 상을 안 주는 식으로 갑질을 하는데 그 당시면 말할 것도 없다. 암튼 호불호가 분명한 본인 성격으로 인해 방송 활동이 순탄치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15] KBS의 경우는 복장 규제가 엄격해서 출연 횟수가 적었던 것일 뿐, 4년 전 대마초 흡연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앞서 링크한 기사에도 나오듯, 마약 검사 결과 대마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고, 그래서 과거의 잘못이 뒤늦게 드러나 발목 잡힌 케이스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참고로, 이때는 70년대와는 달리, 소변 검사를 하는 과학적인 수사를 했다. 참고로 당시 수사관의 말에 따르면 마약 사범들이 일단 혐의를 시인하는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이라 한다.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별다른 처벌이나 규제를 받지 않은 것은 이런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링크[16] 여담으로 같은 시기에 검거된 유명인 중에는 이현우도 있었는데, 현재의 이미지와는 달리, 저때는 순순히 수사에 협조해 수사관들이 동정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7] 그런데 1992년에 신성우와 함께 검거된 김태원은 당시 이미 동종 전과 4범이었음에도 정작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보통 마약 전과 3범 이상이면 방송출연은 고사하고, 1~2년간 수감 중일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김태원은 여러 인터뷰에서 1987년과 1991년에 검거되었다고 말해 왔다. 그중 하나가 이 인터뷰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인터뷰를 보면 1987년에 처음 걸린 이후 1992년 10월에 두 번째로 걸렸다고 회고하는데, 신성우에게 대마를 권유한 1988년 9월 사건은 언급한 적이 없다. 따라서 신성우에게 대마를 권유한 1988년 9월 사건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김태원이 언급을 피한 것이라 봐야 하며, 기자가 1992년1991년으로 오타를 냈다 해도 이미 전과 3범이다. 그리고 애초에 1988년 9월 사건이 드러난 계기가 1992년의 대마초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었다. 즉, 대마초로 처벌을 받은 지 불과 1년 만에 후배까지 범행에 끌어들인 것이 4년 후에야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1993년 11월에 나온 부활 3집으로 부활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활발히 TV 방송 활동을 펼쳤는데, 리더인 김태원이 출연정지되었다거나, 대타 멤버가 김태원 대신 출연했다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밴드 음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보컬인 김재희가 밴드의 본체이고, 다른 멤버들은 김재희를 위한 백밴드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