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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의 바로크
루이 대왕(Louis le Grand) 이아생트 리고(Rigaud Hyacinthe), 캔버스에 유채, 240×150cm, 1701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
또한 프랑스는 소규모 공화국 및 공국들이 난립해 있는 옆동네 이탈리아 반도나 30년 전쟁으로 조각조각 쪼개지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이 약해진 독일보다 통일성있고 독보적인 예술 양식이 빠르게 치고 올라올 수 있었다.
1.1. 초기 바로크
프랑스 궁정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여러 가지 예술을 조합한 궁정 발레가 인기를 모았는데, 화려한 의상과 무대 장치를 동원한 최고 유흥거리였던 발레는 무용수 뿐 아니라 각료나 귀족, 심지어는 왕도 직접 출연했다. 이 시기를 다스렸던 루이 13세는 직접 발레를 추는 등 예술을 애호했지만, 자기 아들처럼 권력 강화의 도구로 생각한 것은 아니라서 궁정 발레가 많이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단순한 상류층의 여흥거리로만 남게 되었다. 루이 13세는 최초로 표준화된 오케스트라 '24대의 바이올린(Vingt-quatre violons)'을 조직했다.샹보니에르, 《클라브생 작품집Les pièces de clavecin》 중 사라방드. 프랑스 건반음악은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 |
또한 이 시기에는 자크 샹피옹 드 샹보니에르Jacques Champion de Chambonnieres가 여러가지 하프시코드 테크닉을 개발했는데, 바로크 프랑스 건반 음악의 현란한 장식음은 아마 프랑스 류트 음악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샹보니에르는 아름답고도 우아한 선율, 펼침화음 및 꾸밈음의 다양한 사용, 곡의 부제으로 프랑스 클라브생[1] 악파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그의 작품들은 전 유럽의 건반 음악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내의 후배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2. 중기 바로크
프랑수아 푸제트(François Puget), <음악모임(Réunion de musiciens)> 1688년.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소장. [2] |
중기 바로크인 1643년부터 본격적으로 루이 14세가 통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집권 하에 음악이 언제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재능있는 음악가면 누구든지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가장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음악가는 바로 장 바티스트 륄리였다. 그는 왕에게 알랑거려 다른 음악가들을 따돌리고 프랑스 음악계에서 독점적인 권력을 쟁취했다는 혹평도 받긴 하지만 그가 재능있는 음악가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 몇 편이 상연되긴 했지만 큰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에는 이미 궁정 발레같은 자국의 예술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 륄리는 동시대 프랑스 작가인 몰리에르와 합작하여 코미디 발레(Comedie-ballet)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 코미디 발레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노래와 춤을 합쳐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3]
전술했다시피 프랑스 내에서 오페라라는 장르는 별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는데, 1671년 작가 피에르 페렝Pierre Perrin과 작곡가 로베르 캉베르Robert Cambert가 합작하여 상연한 오페라 《포몬Pomone》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4]. 하지만 페렝이 사기로 졸지에 망해버리고 감옥에 갇혀버리자 영리한 륄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페렝에게 접근해 오페라 독점권을 따버린 것(...). 륄리는 1672년 해산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다시 열고 1673년부터 궁정 작가였던 필리프 퀴노Philippe Quinault와 합작한 《카드뮈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 LWV 49》을 시작으로 일년에 한 번씩 오페라를 공연했다.
륄리의 서정 비극 《아르미드Armide, LWV 71》 중 파사칼리아. 륄리의 오페라는 이런 식으로 중간중간에 기악곡이 삽입되었다. |
륄리가 만든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에 비해 극의 중요성이 훨씬 강조되었고, 발레와 합창을 중요시했고, 기악이 독립된 악곡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아리아와[5] 레치타티보는 간결화되는 등 확실히 달랐다. 이런 형식의 바로크 오페라를 서정 비극 또는 음악 비극(Tragedie lyrique ou Tragedies en musique)이라고 한다. 오늘날 륄리가 욕을 많이 먹기도 하지만(...) 타 국가와 달리 프랑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했다는 평을 받는다.
종교음악의 측면에서는 륄리를 비롯한 왕실 예배당의 작곡가들은 궁정의 종교적 행사를 담당했다. 사실, 왕실 미사라 함은, 왕을 포함해 귀족, 대신, 부인들 등 높으신 분들은 다 오는 중요한 행사였기에 작곡가들은 음악 등을 사용해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 왕실 미사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화려한 곡들을 만들어야 했다. 특히 작곡가들은 모테트를 많이 작곡했는데, 편성에 따라 프티 모테트(petit motet)와 그랑 모테트(grand motet)로 나뉘었는데, 프티 모테는 몇 개의 성악 파트와 통주저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편성이지만 그랑 모테트는 다중 합창과 독창자,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끼워져 더욱 웅장한 규모의 모테트였다.
왼쪽: 장 바티스트 륄리의 주님께서 당신에게 응답하시고Exaudiat te Dominus, LWV 77. 그랑 모테트. 오른쪽: 앙드레 캉프라의 피어라 풀이여, 무성하라 백합이여Florete prata, frondete lilia. 프티 모테트. 이 둘을 비교하며 들어보자. |
륄리가 극장과 세속적인 음악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면, 종교적인 음악에서는 미셸 리샤르 드 랄랑드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 앙드레 캉프라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드 랄랑드는 70곡이 넘는 그랑 모테트를 남기고 있는데, 우아한 선율, 대담한 화성과 독창과 합창의 대조 등을 사용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샤르팡티에는 계락에 능한(...) 륄리가 여러 작곡가들이 자신을 거치지 않으면 오페라 등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분야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폈기 때문에, 고용주들을 위한 종교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특히 그는 전술했던 카리시미에게 젊은 시절 로마에서 배웠기 때문에 프랑스에 처음으로 라틴어 오라토리오를 소개했다. 샤르팡티에의 오라토리오는 이탈리아식 오라토리오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륄리의 프랑스식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절묘하게 결합시켰으며, 극적인 대조와 가사 표현이 뛰어났다.
기악곡의 측면에서는 루이 쿠프랭과 장 앙리 당글베르(Jean-Henri d'Anglebert), 니콜라 르베그(Nicoloas Lebegue)나 니콜라 드 그리니(Nicolas de grigny)같은 뛰어난 오르가니스트, 쳄발리스트들이 배출되었다. 이 시대에는 '비정량 전주곡'이 수록되었는데, 이 전주곡의 악보는 실제 연주하려는 리듬과는 관계없이 한 가지 음표로만[6] 기보하고 그 음들이 속한 그룹만을 나타낸다. 악보에도 세로줄 없이 박자나 리듬은 연주자가 재량껏 연주해야 했다. 오르간 곡들은 대부분 궁정예배에 쓰일 화려한 곡들이었다. 미사통상문에 따라 나눠져 있으며, 성가대와 교대로 연주하는 식이었다. 또한 봉헌과 성체배양 때에 쓰일 오르간 독주들이 들어있었다. 프랑스 바로크 오르간 음악의 특징은, 많은 성부와, 리드 스톱의 빈번한 사용, 친절한 악보 가이드(...) 등이 있다.[7] 중기 바로크 시대는 프랑스 바로크 오르간음악의 최전성기였으며 바로크 시대 후에는 이에 필적한 만한 오르간 음악이 나오지 않게 된다.
왼쪽: 오르가니스트 니콜라 드 그리니(Nicolas de grigny)의 오르간 작품집(Livre D'Orgue) 중 오소서 성령이여(Veni Creator) 오른쪽: 자케 드 라 게르(Jacquet De La Guerre)의 전주곡 d단조. |
또한 바이올린족에 밀려 빠르게 뒤쳐지던 비올족은 프랑스에서 대단히 인기가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비올의 표현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생트 콜롱브와 그 제자 마랭 마레가 있었다. 그들의 비올 작품집은 화려하고 우아하기 비길 곳 없는 프랑스 양식의 걸작으로 전해진다. 비올 작품집이라 불리던 비올 연주자들의 작품들은 세련된 춤 전통에 바탕을 둔 프랑스적인 곡들이었으나, 푸가 곡들이나, 라 폴리아 변주곡 등 이탈리아 양식들도 조금씩 찾아 볼 수 있다.
왼쪽: 마랭 마레의 《비올 작품집 4권Pièces de viole, Livre 4》 중 <바디네즈(농담)(Le badinage)> 오른쪽: 같은 곡집의 <꿈꾸는 여인(La rêveuse)>.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을 본 사람이라면 가장 기억에 남았을 곡. |
1.3. 후기 바로크
장 필리프 라모의 오페라 《플라테(Platée, RCT 53)》 중 한 장면. |
바로크 후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극음악 작곡가는 장 필리프 라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라모가 작곡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1733년에[8] 라모 최초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 RCT 43》가 초연된 후였다. 2년 뒤에는 《멋쟁이 인도인들Les Indes galantes, RCT 44》로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에도 주옥 같은 오페라들을 쏟아내면서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도 받게 되고 작위도 받는 등 부유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오페라는 륄리의 오페라를 따르고 있지만, 극적인 면을 한 층 더 끌어올렸다. 합창과 춤은 극 중 결정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관현악곡의 화성처리의[9] 독창성, 합창과 독창이 함께 연출하는 효과가 매우 독창적이었다. 위의 플라테만 들어봐도 상당히 프랑스 오페라가 발전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륄리빠들은 이 오페라가 불협화음이 너무 많고 시끄럽다며 비판했다.[10] 익명의 한 평론가는 이런 이유 때문에 라모의 아폴리트와 아리시가 '바로크'하다고 비평했는데, 이것이 '바로크'라는 단어가 예술작품의 특성을 지칭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아무리 비판이 쏟아져도 라모의 오페라는 인기가 대단했는데, 이 시대의 모 영국인은 모든 사람들이 라모의 끔찍한 작품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그의 오페라 좌석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기록했다.
프랑스 칸타타는 1700년이 시작돼서야 찾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칸타타의 선구적인 작품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의 《지옥으로 내려간 오르페오Orphee descendant aux enfers, H. 471》으로 이 작품은 작곡가의 프랑스식 낭송법과 이탈리아의 화성, 기악 표현들을 드러낸다. 초기 프랑스 칸타타에 뛰어난 작곡가들은 위의 라모나 니콜라 베르니에(Nicolas Bernier)나 앙드레 캉프라, 미셸 몽테클레어(Michel Monteclair), 루이 니콜라 클레랑보(Louis-Nicolas Clerambault)가 있었다. 이들의 작품은 대위법과 성악 작법이 이탈리아의 양식을 나타내는 반면 선율적인 부분이나 기악은 프랑스 서정 비극들과 유사하다.
건반음악을 보자면,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은 프랑수아 쿠프랭[11]에 의해 최고봉에 도달했다. 그는 1716년에 <클라브생 연주법>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그의 연주법을 전 유럽에 알린 계기가 되었고, 운지법의 현대적인 체계를 주창하고 꾸밈음의 바른 연주법을 강조한 중요한 논문으로 꼽힌다. 쿠프랭의 음악은 선배 작곡가들보다도 더욱 유연한 선율과 매우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장식음, 표현적인 화성 사용 등은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정수로 할 수 있겠다. 쿠프랭은 기존의 모음곡에 더 많은 춤곡을 넣어 오르드르(Ordre[12])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은 라모나 조세프 니콜라 르와예(Joseph-Nicolas Royer)나 자크 뒤플리(Jacques Duphly)등이 이어받았다. 오르간 음악에서는 노엘(Noël) 즉 크리스마스 캐롤이 유행하였으며 작곡가들은 많은 노엘 변주곡들을 작곡하였다.
클라브생 작품집 1권중 3번째 오르드르의 '어두운 알르망드'(Allemande La Ténébreuse). 화려한 장식음이 계속된다. |
또한 쿠프랭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식 트리오 소나타를 시도한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음악의 밝고 분명함과 프랑스 음악의 섬세함과 우아함을 섞어 두 나라 양식을 융합하고자 했다. 그의 사후부터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소나타 양식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으며, 그중에서도 장 페리 르벨(Jean-Ferry Rebel)은 1713년에 《2성과 3성 소나타들(Sonates a II et III》를 출판하는데 이런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들은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히 드문 것이었으며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 양식이 잘 어우러진 그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장 바티스트 세나이예와 장 마리 르클레어, 장 조세프 몽동비유 등이 이탈리아 양식의 훌륭한 소나타들을 작곡하였다. 쿠프랭이나 브와모르티에가 비올 작품집을 출판하기는 하였지만, 당시부터는 비올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다.
한편 협주곡은 조셉 보댕 드 브와모르티에(Joseph Bodin de Boismortier)나 미셸 코레트(Michel Corrette) emddl 18세기 초반이 돼서야 나오기 시작했는데 역시 시초는 르클레어의 작품들이었다. 비록 이들의 작품은 베네치아 협주곡의 양식을 따르긴 했지만, 아이디어의 폭이 넓고, 주제페 타르티니나 피에트로 로카텔리에 견줄 만한 기교적인 패시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바이올린 뿐 아니라 당시에 가로플루트라 부르던 플루트가 유행하였고, 이를 위한 많은 기악곡들이 작곡되었다.
2. 이탈리아의 바로크
이탈리아야말로 바로크 음악의 시작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전술한 대로 최초의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협주곡, 소나타 등 수많은 장르를 만들고 쏟아낸 국가가 바로 이탈리아다. 이탈리아 음악은 전 유럽의 귀감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음악이 화려하다면, 이탈리아 음악은 무엇보다 바로크 음악의 기본이 되는 기초적인 표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다만 이탈리아도 독일 만만치 않게 사보이아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교황령, 나폴리 왕국 등 여러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음악이 조금씩 다르다.
2.1. 초기 바로크
사실상 전술한 새로 만들어진 오페라 등 극음악의 창시가 초기 바로크 극음악의 역사나 다름없다.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새로운 바로크 양식으로 된 교회음악에는 모테트나 미사곡 대신 성악과 기압 합주의 다양한 편성을 포괄한 의미로 '콘체르토'라는 이름을 붙였다.[13] 이러한 곡을 '종교 협주곡'이라 불렀는데, 독창에 통주저음만 붙은 것부터 몇 개의 합창단을 포함하는 대규모 협주곡도 있었다. 음악가 로도비코 비아다나(Lodovico Viadana)는 1602년 <백 개의(...) 교회 협주곡>(Cento concerti ecclesiastici)라는 협주곡 작품집을 출판하였는데 그는 종교음악에 '협주곡'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최초로 채택한 작곡가로 꼽힌다.
전술한 몬테베르디는 종교음악에서도 새로운 양식을 바탕으로 곡을 썼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양식과 옛 양식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몬테베르디의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 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는 화려한 악기편성과 새로운 양식으로 유명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의 무반주 다성 미사곡들도 작곡했다.[14]
왼쪽: 몬테베르디의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 기도, SV 206 중 예루살렘을 찬양하라Lauda Jerusalem. 연주는 존 엘리엇 가디너. 오른쪽: 같은 곡집에 실린 미사곡, SV 205 중 키리에. 연주는 필립 헤레베헤. 이 둘을 한번 비교해서 들어보자. |
오라토리오도 이 시기에 탄생한 장르나,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넘어가자(...).
몬테베르디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몇몇 등지에서 오페라가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요한 작곡가는 프란체스코 카발리이다. 그는 몬테베르디에 비해 아리아를 중시하였다. 또한 적기는 하지만 아리아에 풍부한 기악 반주를 넣기 시작했다.
바로크 초기의 소나타는 단순히 '연주되는 곡'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초기의 소나타는 짧은 악장이 여러 개가 있고, 성부의 수가 네 개 이상이였다. 초기 이탈리아의 소나타 작곡가 중 가장 중요히 다루어지는 작곡가는 살라모네 로시(Salamone Rossi)와 비아조 마리니(Biagio Marini)이다. 로시는 거의 유럽 최초로 트리오 소나타를 작곡했고, 마리니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기 때문에 바이올린의 혁신적인 주법에 맞춘 화려하고 기교적인 작품을 작곡했다.
이 시대 건반악기 작품의 작곡가로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가 유명한데, 그 이후 100여년간 이탈리아에서는 그와 견줄만한 건반악기 작곡가나 연주가가 없었다. 프레스코발디의 건반악기 곡은 바흐는 물론 당대와 후대의 모든 건반악기 작곡가들, 특히 남부 독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연주자 개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상상력과 연주자의 자유로운 표현이 기교적이고 실험적인 연주를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2. 중기 바로크
《메디치 궁의 세 음악가(Músicos de la corte de los Medici P Pitti)》 안톤 가비아니(Anton Domenico Gabbiani), 캔버스에 유채 150×210cm, 1687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오페라 <티그라네>(Tigrane) 중 아리아 '영광의 획득'(All' acquisto di gloria). 다 카포 형식이다. |
17세기에 탄생한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는데, 바로크 시기 동안 오페라는 궁정과 귀족의 오락물로 성장하였다. 오페라를 처음 만든 토스카나 대공국의 피렌체 궁정에서부터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가 오페라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위의 도시들의 여러 군데에 오페라 극장이 차례로 생긴다는 것은 어느 사람들이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 유명한 카스트라토
또한 중기 바로크 극음악을 논하려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이다. 스카를라티는 오페라를 형식적으로 확립시켰는데, 그의 업적은 스카를라티는 다 카포라는 형식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오페라에 차용했고, 또한 전술한 빠름-느림-빠름의 이탈리아식 서곡을 확립시켰다는 점 그리고 여러 가지 형식의 레치타티보를 새로히 개발해내었다는 점에 있다. 스카를라티는 또 칸타타라는 장르를 정점에 올려놓았는데, 칸타타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교대되는 패턴으로 정형화되는 데 어느 작곡가보다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러한 형식은 오페라, 오라토리오, 수난곡등 바로크 시대의 주요 성악곡에 계속 사용되었다[15].
왼쪽: 주세페 토렐리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8의 9번. 오른쪽: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크리스마스 협주곡》, Op.6 No. 8. |
이 시기에는 소나타가 더욱 발전되었다.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에 대한 구분은 바로크 중반부터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소나타 작곡가로는 조반니 레그렌치, 조반니 비탈리, 아르칸젤로 코렐리 등이다. 이들의 트리오 소나타와 독주 소나타는 이탈리아 실내악의 정점이자 가장 위대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협주곡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바로크 시대의 기악 협주곡[16]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독주 협주곡, 합주 협주곡, 오케스트라 협주곡이 그것이다. 하지만 음악가들이 이 세 가지 형식을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op.6[17]>을 보면 기악 협주곡의 기원을 알 수 있는데, 보면 솔로 파트에는 두 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이, 오케스트라 파트에는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통주저음이 들어가 있는데, 당연히 솔로 파트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솔로 파트가 트리오 소나타와 똑같은 편성이므로, 이 곡들은 트리오 소나타에서 출발했으며 오케스트라는 여기에 풍부한 음향을 더하기 위해 추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가 되어서야 협주곡에 오케스트라 편성은 필수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바로크 협주곡의 발전을 가장 앞장서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주세페 토렐리다. 코렐리처럼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는 최초로 독주 협주곡들을 작곡하였으며, 독주악기의 기교를 과시하는 독주 부분을 넣은 협주곡의 표준 양식인 리토르넬로 형식을 만들었다. 항목 참조.
2.3. 후기 바로크
《가수 파리넬리와 친구들(il cantante farinelli con amici)》 야코포 아미고니(Jacopo amigoni), 캔버스에 유채, 172×245cm, 1750년,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 소장. 당대 오페라 세리아 유행을 주도하던, 왼쪽부터 피에트로 메타시타지오, 소프라노 테레자 카스텔리니,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화가. |
바로크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오페라는 18세기에도 여전히 인기를 유지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비현실적이고 너무 거창하게 변질되었다는 반발과, 음악의 아름다움이 극의 흐름을 해친다는 이유로 아포스톨로 제노나 프란체스코 실바니 같은 시인들이 고전 비극 쪽에 눈을 돌려 개혁적인 오페라 대본들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오페라 세리아라 불리는 장르의 복잡한 줄거리를 단순하게 축약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 오페라 세리아는 바로크 말기까지 가장 영향력있는 오페라였다. 오페라 세리아는 항상 줄거리를 고대 역사에서 가져왔는데 신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합창은 거의 없었고 프랑스 서정비극과는 달리 춤도 없었다. 후기에는 쟁쟁한 오페라 세리아 작곡가들이 늘어나며 작곡가별로 오페라는 꼭 있을 정도. 아고스티노 스테파니,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 요한 요제프 푹스, 안토니오 칼다라, 안토니오 로티와 영국에서 활동한 아틸리오 아리오스티나 조반니 보논치니, 나폴리의 도메니코 사로, 니콜라 포르포라, 레오나르도 레오와 드레스덴의 요한 다비트 하이니헨, 조반니 알베르토 리스토리, 요한 아돌프 하세나 심지어 기악곡으로 유명한 토마조 알비노니, 안토니오 비발디와 마르첼로 형제들도 당대의 오페라 작곡가로 한 이름 하던 사람들이었다.
아리아는 매우 길었고 중요했는데, 이렇기 때문에 모든 관심이 가수에게 집중되었다. 하여 가수들은 즉흥적으로 표현을 넣을 수 있도록 훈련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왕, 장군 같은 남자 배역이 테너나 베이스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프라노나 알토 카스트라토가 불렀다. 오페라에서 남자 배역이 고음을 내며 부르는 아리아를 상상해 보자. 이러한 오페라 세리아 양식은 전 유럽에서 고전주의까지 유행했으나 지나치게 비슷하다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한 번 들어보자. 곡은 안토니오 칼다라의 오라토리오 '세데치아' 중 예레미야의 아리아. 1732년 초연 당시 예레미아 역을 맡았던 가수는 유명 카스트라토 가에타노 오르시니. 참고로 이 오라토리오의 초연에서 주인공 치드키야역을 맡았던 가수는 다름아닌 파리넬리였다. |
이탈리아 바로크 말기,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협주곡도 비로소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협주곡에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구성을 도입한 사람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흔히 오해를 받는 토마조 알비노니였다. 바로크 협주곡은 안토니오 비발디에 의해 정점에 달했는데, 비발디는 세 개의 악장에 더욱 개성을 부여하고, 솔로 기교의 극대화, 음량 등을 뚜렷히 대조시킴으로써 협주곡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특히나 자기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발디는 협주곡에 매우 화려한 솔로를 집어넣었는데, 연주자의 기교를 과시할 수 있는 후대의 협주곡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알레산드로 마르첼로와 베네데토 마르첼로 형제가 뛰어난 협주곡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비발디의 이후에는 피에트로 로카텔리 나 주제페 타르티니, 프란체스코 제미니아니 등의 비르투오조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어 바이올린의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왼쪽: 토마조 알비노니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Op. 9 No. 2. 오른쪽: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바이올린 협주곡 c단조, Op.1, No.2. 전형적인 바로크 협주곡을 즐겨보자. 중기 바로크 협주곡과 비교하며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
3. 독일의 바로크
독일은 당시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 타국에 비해 유행이나 문화에서 한참뒤쳐져 있었는데, 30년 전쟁의 여파로 나라들이 조각조각 나눠졌고 또 종교도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18] 오스만 제국 등과의 전쟁이 끝나자 각 국의 공작들이나 왕들은 뒤늦게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해 예술을 택하였으며, 프랑스나 이탈리아 음악가들, 건축가들 등을 초청하였다. 초반에는 남부 독일 음악가들이 유행 양식들을 들여오는 등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갈수록 무역도시가 많고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인 중부, 북부 독일 음악 스타일이 중요해지게 되었다.가장 큰 특징으로, 독일에서는 특히 종교음악이 융숭히 발달하였는데, 루터교회에서의 예배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옛 학자나 목자들이 쓴 코랄들이 계속 쓰이면서, 독일 바로크 음악의 뿌리가 된다. 한편으로는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이였는데, 하인리히 이그나츠 폰 비버나 얀 디스마스 첼렌카 등에 의해 바로크적인 웅장한 미사곡들이 여럿 작곡되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도시마다 악사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들은 도시나 교회들이 후원했다. 도시의 중요한 행사나 결혼식, 축제 등에서 연주를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대중 연주회가 열리는데 큰 기여를 한다.
3.1. 초기
루터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지역은 코랄을 중요시하였지만, 새로운 모노디 양식을 적극 받아들였다. 앞서 언급한 종교 콘체르토가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선구자 역할은 한 사람은 헤르만 샤인 이다. 이러한 콘체르토의 악곡 수가 늘어나면서 그것이 독일만의 종교 칸타타의 효시가 된다. 샤인 이후 더욱 다양한 가사들과, 독창, 합창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옛날부터 수난시기에 연극처럼 하던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재구성한 수난곡이 인기를 끌었다. 이 두 장르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 음악 장르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오라토리오와 모테트 등이 자주 연주되었다. 하인리히 쉿츠의 《요한 수난곡(Johannes-Passion, SWV 481)》 중의 마지막 합창. 그의 사후 독일 교회에서는 성주간의 음악으로 수난곡을 채택하게 되며 이후 우후죽순처럼 수난곡이 작곡되게 된다. 르네상스적인 편성이지만 느낌은 오히려 바로크적 느낌을 준다. |
두말할것도 없이 이시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하인리히 쉿츠로, 위의 언급한 양식들에 직접 이탈리아로 유학 다녀온 경험들을 풍부히 녹여냈다. 그는 모테트, 종교 협주곡, 오라토리오 등 수백곡을 작곡했으며, '수난곡'을 최초로 작곡한 독일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기악곡에서 보면 북독일악파의 시초라 불리는 얀 피터르존 스벨링크가 독보적인 오르간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며, 사무엘 샤이트같은 후세대 오르가니스트 등을 지도했다. 그외 프란츠 툰더 등이 오르간이 '악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한편 남부 독일의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역시 쳄발로 음악을 주류로 올려놓는 데 노력했으며, 건반 모음곡, 즉 알르망드-쿠랑트-사라반드-지그 로 이어지는 춤곡 장르를 정형화시켰다.
3.2. 중기
《음악모임(Häusliche Musikszene)》 요하네스 포르호우트(Johannes Voorhout), 1674년, 함부르크 박물관 소장[19] |
중기 독일에서는 게오르크 무파트(George Muffat)나 요한 카스파르 페르디난트 피셔(Johann Caspar Ferdinand Fisher)등이 이탈리아 양식을 독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군데에서 유학하며 그곳의 양식들을 흡수하였고, 그 양식에 따른 모음곡이나 춤곡, 기악곡등을 출판하면서 이러한 해외 양식들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무파트는 트리오 소나타를, 요한 로젠뮐러, 요한 하인리히 슈멜쳐, 요한 야콥 발터, 요한 파울 폰 베스트호프, 하인리히 이그나츠 폰 비버 같은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기교적이고, 독일만의 바이올린 소나타들과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들을 작곡하였다.
하인리히 이그나츠 폰 비버의 파사칼리아 중 장대하고 심오한 <묵주 소나타>를 마무리하는 곡. 장중하고 조용한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가장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악기는 오르간이었다. 요한 아담 라인켄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등이 선배 작곡들의 작품들로부터 오르간 음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오르가니스트들은 게오르크 뵘, 빈센트 뤼벡,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하우, 요한 쿠나우, 요한 파헬벨등이 있다. 이런 작곡가들은 토카타와 전주곡을 연주자의 재량과 악기의 잠재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오르간의 대표장르로 올려놓았다. 또한 이탈리아 양식의 푸가를 도입하였고, 코랄을 기초로한 오르간 음악들을 전주곡, 환상곡, 파르티타 등으로 늘려놓았다.
왼쪽: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전주곡 g단조, BUXWV 149. 당시 전주곡은 웅장하고 화려한, 오르간의 이미지와 걸맞은 곡들이었으나 동시에 연주자의 기교도 뽐낼 수 있는 곡이었다. 오른쪽: 요한 아담 라인켄의 바빌론의 강가에서(An Wasseflüssen Babylon). 코랄 환상곡으로, 후대 오르가니스트에 많은 영감을 준 곡이기도 하다. |
쳄발로 음악에서는 전술하였던 피셔는 프로베르거가 확립하였던 '건반 모음곡'이라는 장르를 널리 알렸고, 기본적인 모음곡에 미뉴에트와 가보트, 샤콘느, 부레 등 새로운 춤곡들을 추가하였다. 특히 1702년 그의 작품집인 《음악의 아리아드네(Ariandne musica》에는 평균율에 조율된 스무개의 조성들은 5도로 순환하고 있다. 요한 쿠나우는 각 모음곡의 앞 소절에 전주곡을 붙였고, 최초의 쳄발로 소나타 들을 작곡하였다.
왼쪽: 요한 쿠나우의 성서 소나타 2번. 오른쪽: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칸타타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uxWV 101)》 |
중기 독일의 가장 큰 음악적 발전은 바로 칸타타다.[20] 이는 바로 등장하자마자 모테트와 종교 협주곡을 제치고 루터교회 예배의 주류 음악을 차지하였다. 이런 초창기의 칸타타의 가사는 성경 구절이나 중세시대의 코랄 가사, 전세기 독일 시인들의 시들 중에서 발췌해 편집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장르를 '코랄 칸타타'라고 한다. 이 칸타타는 소나타와 콘체르타토 양식, 독일만의 종교적 색채를 결합시켰다.
3.3. 후기
《엘베강 오른편에서 본 드레스덴》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 ), 캔버스에 유채, 51.5×84cm 1750년, 아일랜드 내셔널 갤러리 소장 당시 드레스덴은 후기 바로크 예술의 중심이었다.[21] |
라인하르트 카이저의 브로케스 수난곡 중 ''내 죄의 사슬로부터(Mich vom Stricken meiner Sünden)'. |
완벽하게 타국의 양식들과 토속적 음악에 독일만의 독특한 음악성이 어우러져, 후기 바로크 독일 음악은 바흐나 텔레만 등에 의해 당대 유럽 음악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당시 플루티스트였던 요한 요아힘 크반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로 다른 나라들의 양식들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구별해 낼 줄 아는 필수적인 식별력을 갖추고 있다면 혼합 양식이 도출되기 마련인데, 이를 독일 양식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겸손하지 못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을 것은, 독일이 이 양식을 처음 창출해 냈을 뿐 아니라 이 양식이 여러 해 동안 이미 자리 잡아왔으며, 지금도 융성하고 있고 이탈리아나 프랑스 또는 어느 나라도 이 양식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 요아힘 콴츠, 『가로플루트 연주법(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ere zu spielen)』 中, 1752년
요한 요아힘 콴츠, 『가로플루트 연주법(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ere zu spielen)』 中, 1752년
함부르크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Erdmann neumeister, 1671 ~ 1756)가 교회력에 맞추어 시를 쓴 것과, 성경구절과 찬미가 가사들이 포함된 책들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기존의 칸타타를 새롭게 정의한 것이었다. 노이마이스터의 모음집은 교회력의 일년치에 해당하는 사이클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성은 아리아, 합창, 레치타티보 등 이탈리아식 칸타타와 유사하나 독일만의 코랄이 추가되었고, 코랄 칸타타도 여전히 작곡되었다. 이는 대부분 독일의 저명한 도시교회의 음악을 총괄하는 '칸토르'나 공국이나 선제후국의 작곡가들에게 채택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들이 칸토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과 공국 궁정 작곡가였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나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슈퇼첼이다. 한편 쉿츠 때부터 내려오던 오라토리오, 수난곡 역시 당시 독일의 주류 종교음악으로 자리잡았고, 시인 바르톨트 하인리히 브로케스(Barthold Heinrich Brockes)가 쓴 대본 <세상의 죄를 위해 고통받으시며 돌아가신 예수(Der für die Sünde der Welt gemarterte Jesus)>가 히트를 치면서, 당대의 작곡가들이 '브로케스 수난곡'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곡을 쓰기도 했다.[22]
왼쪽: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칸타타 《주께서 계시하시리라(Der Herr hat offenbaret, TWV 1:262)》 오른쪽: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의 칸타타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Gott sei uns gnädig, GWV 1109/41)》. 두 작품 모두 크리스마스 시즌을 위한 화려한 칸타타로, 독일 칸타타의 극치를 보여준다. |
협주곡은 비로소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전되었다. 당시자유로운 분위기의 독일에는 많은 대중연주회가 열렸고, 그에 따라 많은 협주곡이 작곡되었다. 많은 독일 음악가들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베네치아 협주곡을 본보기로 삼아, 그 위에 독일만의 색채를 더하려 하였다. 당시 협주곡의 발전을 주도하던 사람은 요한 게오르크 피젠델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로,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 비발디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그는 협주곡에 플루트, 오보에, 호른 파트 등을 집어넣었는데[23], 고전주의 협주곡의 편성과 굉장히 유사하다. 또한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나 요한 크리스토프 파쉬(Johann Friedrich Fasch) 같은 음악가들은 독일에서 계속 개발되었던 오보에 다모레, 샬뤼모 등을 위한 독특한 협주곡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독일의 화려한 협주곡은 초기 교향곡의 토대가 된다.
왼쪽: 요한 게오르크 피젠델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이러한 편성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 A장조. 바흐는 건반악기 협주곡을 시도한 최초의 음악가였다. |
1678년이 돼서야 독일 함부르크에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이탈리아어로 되었거나 이탈리아 작품을 모방한 작품이 종종 올려지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징슈필로 요한 마테존, 라인하르트 카이저,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등이 만든 독일어 오페라였다. 하지만 1급 오페라 작곡가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이 셋의 오페라는 독일 외에서는 들을 기회가 없어서 독일의 오페라는 크게 발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독일 내의 공국들이나 선제후국들에게는 인기를 끌었는데, 요한 다비트 하이니헨이나 요한 아돌프 하세,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이 뛰어난 독일의 오페라 세리아를 남긴 작곡가들이다.
건반음악 부분에서 보자면, 단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오르간 이나 쳄발로 모든 분야에서 탑을 차지하게 된다. 그의 작품들은 기교뿐 아니라 음악의 예술성에서도 단연 뛰어나며,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 양식을 완벽하게 사용할 줄 알았으며 그것은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BWV 971)》이나 《프랑스 서곡(BWV 831)》같은 걸작들에서 드러난다. 오르간 음악에도 매우 뛰어나 그의 사후에 그에 필적할 만한 오르간 연주곡을 작곡한 사람은 별로 없다. 아들이었던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나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그의 제자들이었던 호밀리우스나 요한 루트비히 크레프스, 요한 키른베르거 등이 역시 뛰어난 오르가니스트 였다.
4. 영국의 바로크
섬나라였던 영국의 음악은 다른 대륙의 음악 양식과 달랐다. 영국은 타 대륙 국가의 진보적인 음악양식과 자국만의 양식을 결합하여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음악 양식을 만들어냈으나, 이런 음악이 인기가 없는 게 문제였다. 바로크 초반에는 이미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유행을 치고 있고, 왕들도 시큰둥 했던 분위기여서 오페라 등 극음악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그나마 왕실의 국가적 행사나, 생일, 여흥 등을 위한 극음악들이 조금 있었다. 이런 음악상태 때문에 프랑스나 독일 등 이웃국가로부터 '음악이 없는 나라'라는 소리를 듣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기악곡 측면에서는 가장 빨리 건반악기 음악에 눈뜬 국가이기도 했다.
4.1. 초기 바로크
초기 바로크 시대는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시대에는 궁정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많은 작곡가가 배출되고 악보출판업이 활발해졌다.극음악 쪽은 상술한 대로 영국에는 연극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부르며 하는 극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카스트라토와 화려한 기교에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영국 궁정에서는 가면극(masque)이라는 장르를 즐겼는데, 가면극은 프랑스의 궁정 발레처럼 화려한 무대 장치와 의상 속에서 춤, 독창, 합창, 기악 등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오락물이었다. 물론 이름대로 배우들[24]은 가면을 쓰고 춤을 췄다. 이 시기에 성악곡 부분에서 중요한 작곡가는 헨리 로즈(Herny Lawes,1596~1662)이다. 그는 통주저음을 수반하는 독창이나 이중창 등을 작곡했는데, 이것들은 레치타티보 노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기악곡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여전히 비올을 위한 '콘소트'가 유행이였는데, 헨리 로즈의 동생인 윌리엄 로즈나 존 젠킨스가 활약했다. 그가 쓴 곡들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내려온 춤곡들이나 환상곡들인데, 거기에 바로크적인 대비효과와 기발함이 가득하다. 이 곡들은 대부분 비올 악기들의 합주를 위해 쓰여졌지만 바이올린 이나 오르간 곡들도 있다. 이들의 곡의 특징은 영국의 기악음악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는 것으로, 국외의 영향은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로즈의 《여섯 개의 비올을 위한 파반느(Paven)》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에서는 독주곡보다는 여러 종류의 비올이 어루러지는 합주가 유행이었고, 바로크 시대까지 이어나가게 된다. |
종교음악에서는 앤섬(anthem)과 서비스(Service)등의 독자적인 종교곡들이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4.2. 중기 바로크
중기 바로크인 1649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화정이 수립되었는데, 청교도들의 규율은 대단히 엄격해서 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여서 모든 연극 공연을 금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발표되도 사람들은 음악극을 '음악회' 라 이름을 바꿔 교묘하게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하지만 청교도 혁명을 이끈 올리버 크롬웰은 음악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영국에서는 오페라라 불리는 장르가가 유행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오페라가 1656년의 매튜 로크외 《로도스 섬 공방전(The Siege of Rhodes》[25]과 《큐피드와 죽음(cupid and death)》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말하는 그런 오페라가 아니라 기존의 연극과 가면극을 섞어 놓은 것에 가까웠다.
1660년 왕정 복고 이후 청중들은 가면극이나 극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한편 찰스 2세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영국에서는 프랑스 궁정 발레와 프랑스 음악이 점점 영향력이 커지는 듯 싶으나 프랑스 오페라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26] 하지만 이 시기에도 주목할 만한 두 작곡가가 있는데 존 블로와 헨리 퍼셀[27]이다.
존 블로는 찰스 2세를 위한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가면극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전원 오페라에 더욱 가깝다. 서곡은 프랑스 음악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는 이탈리아 스타일을 채용했으며 나머지는 영국식 리듬과 선율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레치타티보인데 블로는 로크가 큐피드와 죽음에서 보여주었던 감정적인 레치타티보를 계승하고 있다.[28]
헨리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Dido and Aeneas, Z.626)》는 존 블로의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모델로 삼고 있음이 분명하며, 4명의 등장인물에 1시간의 연주시간을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규모이다. 스승이었던 블로와 마찬가지로 프롤로그는 역시 프랑스 음악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다 카포 아리아나 <디도의 애가>같은 경우는 영국에서 흔히 볼수 없었던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오스티나토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중에서도 영국적인 합창, 단순한 에어 등이 있다. 퍼셀은 영어 가사나, 극의 분위기에 맞춰 유연하게 음악을 붙이는 능력을 보여주는데,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마지막 합창 '꺾인 날개로'의 하행하는 음계는 큐피드의 꺾인 날개를 나타내면, 레치타티보에서 '폭풍' 같은 당어에는 빠른 성악 패시지를, 디도의 마지막 레치타티보에서는 죽어가는 디도를 느리고 반음계적인 하행 선율로 묘사하였다.
왼쪽: 존 블로의 오페라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의 프롤로그. 전형적인 프랑스 서곡에, 유려한 선율이 특징이다. 오른쪽: 헨리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Dido and Aeneas, Z.626)》 중 '디도의 탄식'(Dido's lamnet). 오스티나토 형식으로, 영국 음악 역사상으로 보더라도 가장 감동적이고, 여운적인 곡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
이런 대단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국인들은 연극을 좋아하였는데, 퍼셀도 어쩔 수 없이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을 작곡했다. 또한 그냥 연극이 아닌 '세미 오페라'(semi-opera)라는, 서곡이 있고 중간에 가면극이나 음악적인 부분들이 있는 장르이다. 이러한 세미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품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을 위한 《요정 여왕(The Fairy Queen, Z.629)》이다.
종교음악에서는 많은 음악가들이 여전히 앤섬과 서비스를 작곡했는데 프랑스의 그랑 모테트나 다른 가톨릭 국가들의 미사들과 다르게 상당히 소편성이 특징이었다. 대규모 편성이러해도 겨우 현악기 정도였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블로와 퍼셀의 대관식 앤섬들이다.
사실 음악가들이나 곡들만큼이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공공 연주회였다. 중류층들이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그에 맞는 훌륭한 음악가들이 수입을 올릴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공공 연주회는 1672년 12월 여인숙 옆에서 열렸다. 당시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면 매주 월요일 4시부터 시작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현대에 널리 보편화된 그런 연주회는 음악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한참 느린 것이었다.[29]
4.3. 후기 바로크
이렇게 암울했고, 계속 암울할 것으로 보였던 영국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면서, 점차 은행가나 중산층, 부유한 상인, 의회 정치가들이 귀족들만 보였던 사교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공공 카페나 클럽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 같은 화려한 볼거리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특히 런던의 음악활동은 궁정이 아니라 개인의 저택이나, 공원, 연주회장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1705년에는 '여왕의 극장' 헤이마켓 극장을 필두로 링컨스 인 필즈, 코벤트 가든 등의 오페라 극장이 설립되었고, 왕립 음악 아카데미, 성악 아카데미, 고음악 아카데미 등 협회등이 창설되었으며, 음악을 위시로 한 자선 사업 등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이러한 발판이 마련되자, 윌리엄 보이스, 토마스 안, 존 스탠리, 찰스 애비슨 등 영국 내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해외에서도 조반니 보논치니, 아틸리오 아리오스티, 니콜라 포르포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같은 당대의 톱 클래스 작곡가들이 영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명한 음악 비평가였던 찰스 버니, 존 호킨스, 로저 노스 같은 사람들도 영국인이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요한 마테존은 그의 저서 《신설 관현악단(Das neu-eröffnete Orchestre)》을 보면, 음악으로 이익을 원하는 사람은 영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후기 바로크 시대 영국의 음악 대우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가 영국에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 완전히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가 상영되었으나 흥행은 완전히 저조했고,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둘다 사용한 오페라 《피루스와 데메트리우스(Pyrrhus and Demetrius)》는 1708년 시즌에 23회나 사용했으나 청중들이 오페라의 반만 이해한다는 비판이 많아 프란체스코 만치니(Francesco Mancini)의 이탈리아어 오페라 《히다스페스(Hydaspes)》가 1710년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영국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와 카스트라토의 미래가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오페라들은 진짜 본토의 오페라들에 비해 음악적인 퀄리티가 떨어졌다.
이런 상태에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1711년 2월 카스트라토 니콜리니 주연의 《리날도(Rinaldo, HWV 7)》를 무대에 올렸는데 6월까지 열다섯번이나 계속 공연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30]. 다시 하노버로 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온 헨델은 연이어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며 여전히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왼쪽: 아틸리오 아리오스티, 오페라 《루치오 베로》 中 '오, 너희는 나의 눈을 바라게 되리' 오른쪽: 지오반니 보논치니의 오페라 《그리젤다(Griselda)》中 '경외하는 영광을 위해(Per la gloria d´adorarvi)' |
후에 1719년 조지 1세의 후원 아래 귀족들이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발족하며, 이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고 후원 기관이었고, 일류 작곡가와 가수들, 상설 오케스트라와 극장 이용등, 작곡가 작품의 출판의 후원 등 재정의 최대 뒷받침 기관. 그야말로 오페라가 만들어지고, 상연되기에는 최고의 기관이었다. 이로 이탈리아 본토와 겨뤄도 결코 꿀리지 않을 고퀄리티의 오페라들이 많이 상연되었다. 헨델의 《줄리오 체자레(Giulio Cesare, HWV 17)》나 《타메를라노(Tamerlano, HWV 18)》, 아리오스티의 《베스파시아노(Il Vespasiano)》와 《루치오 베로(Lucio Vero)》, 보논치니의 《아스타르토(Astarto)》, 《칼푸르니아(Calfurnia)》 등 전 유럽을 봐도 전혀 안꿀릴 오페라 등이 만들어졌다. 이런 오페라 세리아 등은 작품성 뿐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도 대단했다.
하지만 아카데미 운영권에 대한 논쟁과 1티어 가수들 서로의 병림픽 때문에 당시 아카데미는 크게 휘청이고 있었는데, 거기에 가세에 영국 음악계가 존 게이 대본의 《거지 오페라》로 오페라 세리아에 도전장을 던진다. 이 오페라는 대화 사이에 유럽 각국의 곡조들을 삽입했는데, 존 게이는 당시 영어 대본을 쓰면서 영국의 정치 나 당시 수상 로버트 월폴, 오페라 세리아 등 모든 것을 깠기 때문에 서민들의 동감와 인기를 이끌어내며 62일동안 계속 상연되는 대단한 인기를 누린다. 재정, 인기 악화로 인해 1728년 아카데미는 문을 닫고, 다음해 2차 아카데미를 열었다. 초창기에는 성공시키는 듯 했으나 청중의 관심이 오페라 세리아로부터 멀어져 버려 1737년에 2차 아카데미도 문을 닫게 된다.
종교적 음악에서는, 오라토리오라는 장르가 크게 인기를 끌게 된다. 오페라가 거의 몰락하자 헨델은 오페라와 비슷한 오라토리오로 눈을 돌린 것. 당시에 이런 종교적 레파토리를 극장에서 공연하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후 헨델은 꾸준히 다양한 오라토리오들을 작곡한다. 또한 헨델은 웅장한 대관식 앤섬이나 궁정을 위한 대규모 앤섬들도 작곡하였다.
왼쪽: 찰스 에비슨의 《합주 협주곡 d단조》 전 악장이 특이하게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소나타의 편곡이다. 오른쪽: 존 스텐리의 《오르간 협주곡 E장조(Concerto for Organ Op. 10 No. 1)》 |
기악곡 측면에서 보면, 역시 헨델의 《수상음악》이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가 유명하다. 엑스-라-샤펠 조약을 기념하여 장대한 불꽃놀이를 펼칠 계획이였는데 거기에 걸맞은 트럼펫 9, 호른 9, 팀파니 3, 오보에 24 등 어마어마한 대편성을 자랑한다. 또한 몇 권의 그의 협주곡집들은 여전히 코렐리의 합주협주곡 양식을 채택하나, 프랑스 서곡과, 춤곡, 로마와, 베네치아의 협주곡 양식 모두를 포괄하는 작품이다. 또한 그의 후배 작곡가들인 보이스나 애비슨, 스탠리 등이 트리오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을 많이 작곡하였고, 비평가나 대중들에게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양식이나 감정 또한 헨델의 기악곡들과 비교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걸작이다.
[1] 프랑스어로 하프시코드.[2] 왼쪽의 바이올린을 들고있는 인물은 장바티스트 륄리,
류트를 연주하고 있는 인물은 궁정의 류트 연주자 로베르 드 비제(Robert de Visée)로 추정된다.[3] 하지만 얼마 가지 않은 1670년 륄리와 몰리에르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이후 몰리에르는 샤르팡티에 같은, 당시에 2류 취급받았던 작곡가들과 협력하기도 했다.[4] 이 작품은 페렝이 루이 14세의 허락을 받아 1669년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창설한 후 무대에 올린 최초의 작품이다. 원래는 페렝이 륄리보다 먼저 오페라 제작 독점권을 받아냈는데.....[5] 모 이탈리아인은 륄리의 오페라 보면서 아리아 기다리다가 음악이 끝났다고(...) 썼다.[6] 온음표가 가장 많이 쓰인다.[7] 사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오르간 음악은 굉장히 불친절한 게, 딸랑 3단악보만 주고, 연주할 건반, 사용할 스톱 알아서 해! 이런 식이었다.(...).오르가니스트:어쩌라고그에 비해 프랑스의 출판된 오르간 악보들에는 사용할 스톱들, 건반을 바꿀 부분들을 상세하게 알려준다.야!신난다[8] 참고로 그 당시 라모의 나이는 50세였다. 대기만성의 예라 볼수 있겠다.[9] 라모는 근대 화성학의 창시자로 인정되므로, 화성학 부분에 있어서는 거의 본좌 수준이었다.[10] 이 일로 시작한 것이 바로 '부퐁 논쟁'이다.[11] 전술한 루이 쿠프랭은 프랑수아 쿠프랭의 큰아버지가 된다.[12] 순서라는 뜻이다.[13]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협주곡의 어원.[14] 이 저녁 기도곡과 몬테베르디의 미사곡 중 하나, 두 곡 모두 몬테베르디가 1610년 출판한 모음집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6성 미사와 저녁 기도>(Sanctissimae Virgini Missa senis vocibus ac Vesperae)에 들어있다.[15] 물론 서곡이라던가 합창같은 걸 끼워넣는 것은 작곡가 마음이다.[16] 전술한 종교 협주곡과 비교하기 위하여 기악 협주곡이라 한다.[17] 이 협주곡집은 코렐리 사후에 출판되었으므로, '합주 협주곡'이라는 명칭을 코렐리가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코렐리는 독주 협주곡을 작곡하지는 않았다.[18] 대체로 남부는 가톨릭, 북부는 개신교였다.[19] 비올라 다 감바에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하프시코드에 요한 아담 라인켄.[20] 당시에 이런 장르를 칸타타라 부르지는 않았다.[21] 뒤편에 프라우엔키르헤, 앞에는 드레스덴 궁정 교회가 보인다.[22] 대표적인 작곡가들이 텔레만, 요한 마테존, 헨델, 슈퇼첼, 라인하르트 카이저 같은 작곡가이다.[23] 콘체르티노가 아닌 리피에노 파트에.[24] 대부분 귀족들이었다.[25] 소실되었다.[26] 애초에 대중들은 연극에다 계속 음악을 붙이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27] 사실 밑의 두 작품들도 타국처럼 대중을 대상으로 성공을 한 것은 아니다.[28] 예를 들면, 아도니스가 죽기 전에 비너스와 나누는 레치타티보에 보면, 지그재그로 도약하는 선율과 반음계적 수법 등으로 아도니스의 죽음을 적절히 음악적으로 묘사한다.[29] 비평가였던 로저 노스에 따르면 이 초기 연주회의 구성은 주로 비올라 다 감바나 바이올린 연주나 비올 콘소트, 혹은 이탈리아의 노래 등등이었다고 한다.[30] 하지만 헨델이 흔히 받는 비판인 자기 표절을 이 오페라에서도 어김없이 사용해서 아리아 몇 곡을 자신의 이탈리아 칸타타나 알미라와 아그리피나 등 전 작품에서 가져왔다.
류트를 연주하고 있는 인물은 궁정의 류트 연주자 로베르 드 비제(Robert de Visée)로 추정된다.[3] 하지만 얼마 가지 않은 1670년 륄리와 몰리에르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이후 몰리에르는 샤르팡티에 같은, 당시에 2류 취급받았던 작곡가들과 협력하기도 했다.[4] 이 작품은 페렝이 루이 14세의 허락을 받아 1669년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창설한 후 무대에 올린 최초의 작품이다. 원래는 페렝이 륄리보다 먼저 오페라 제작 독점권을 받아냈는데.....[5] 모 이탈리아인은 륄리의 오페라 보면서 아리아 기다리다가 음악이 끝났다고(...) 썼다.[6] 온음표가 가장 많이 쓰인다.[7] 사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오르간 음악은 굉장히 불친절한 게, 딸랑 3단악보만 주고, 연주할 건반, 사용할 스톱 알아서 해! 이런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