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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 معاوية | |
<colbgcolor=#C0C0C0><colcolor=#FFF,#FFF> 이름 | 무아위야 빈 아비 수피얀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
출생 | 597~605년 사이 |
헤자즈 메카 | |
사망 | 680년 4월 (향년 75~83세) |
우마이야 왕조 다마스쿠스 | |
재위 기간 | 우마이야 칼리파 |
661년 1월 ~ 680년 4월 (19년) | |
전임자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후임자 | 야지드 1세 |
부모 | 아버지 : 아비 수피얀 이븐 하르브 어머니 : 힌드 빈트 우트바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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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왕 중의 왕이노라
우마이야 왕조 초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하산 이븐 알리 부자를 상대로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끝내 승리하고 90년간 이어진 최초의 이슬람 세습 왕조를 개창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597년에서 605년 사이에 메카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메카의 유력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이었고, 아버지 아부 수피얀은 저명한 상인이었다. 수피얀은 아랍 다신교 신봉자로, 무함마드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며 다신교 배격 운동을 전개하자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 들었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갖은 탄압을 받은 끝에 메디나로 피신하자, 수피얀 일가는 메디나로 쳐들어가 무함마드를 끝장내려 했다. 그러나 수년 간의 전쟁 끝에 무함마드가 승기를 잡았고, 무슬림군은 630년 메카로 입성했다.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수피얀은 모든 부족민과 함께 이슬람교로 개종했다.[1] 이때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개종했고 무함마드의 서기장이 되었다.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그는 형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얀과 함께 무슬림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리아 정복전에 참여하여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활약해 무슬림군의 완승에 기여했다. 639년 형 야지드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제2대 칼리프 우마르에 의해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그의 처지는 영 좋지 않았다. 시리아에 주둔한 무슬림군 대부분이 역병으로 죽거나 무력해졌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현지 주민들은 이교도인 아랍인들의 지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들을 회유할 필요성을 느끼고, 시리아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랍 부족인 칼브 부족장의 딸 마이순과 결혼했다. 이후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동로마 제국의 과중한 과세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에 주민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와 함께 병력을 대폭 충원하고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으며, 우수한 장비를 가급적 확보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고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그 결과 시리아의 무슬림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장병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행정 체계를 대폭 수용해 행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는 시리아에 부임한 이래 해군을 보유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동로마 함대가 지중해를 항해할 수 있는 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해안선은 절대로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트 총독 압둘라 이븐 사드와 함께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을 설득하여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 후 기독교인 선원들과 무슬림 군대로 구성된 해군을 창설하여 해상 원정을 감행해 키프로스(649년)와 로도스(654년)를 잇따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의 리키아 해안에서 동로마 해군을 괴멸시켰다.(마스트 해전) 이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아나톨리아에 약탈 원정을 떠나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우스만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준비했다.
2.2. 1차 피트나
656년 6월,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이 메디나에서 폭도들에게 포위되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와디 알쿠라에서 우스만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철수했다. 이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칼리파에 즉위한 뒤 우트만의 살인자들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걸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반감을 품었다. 그는 알리가 칼리파 살인의 공범이라고 간주하고 반기를 들기로 했다.먼저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역시 알리를 칼리프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를 끌여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657년 그와 알리의 군대는 시핀에서 최초의 피트나 전쟁을 치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병사들에게 쿠란을 창 끝에 매달고 쿠란의 시구를 외치게 했다. 그러자 적의 피로 쿠란을 더럽혀질까 우려한 알리의 군대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알리 역시 무슬림끼리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알리는 그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협상 결과,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며, 알리는 그 외의 영토를 보유하기로 했다. 또한 알리는 무아위야의 요구에 동의하여 자신의 정식 작위인 아미르 알무미닌(신앙의 지휘관. 칼리파의 전통적인 명칭)을 협정 문서에서 생략했다. 강경파 인사들은 무아위야를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오직 알라만이 중재할 수 있다며 평화 협정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리의 진영을 이탈하여 카와리즈파를 결성했다.
이후 추가 협상이 있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결국 결렬되었다. 암르와 시리아 대표단은 그를 아미르 알무미닌으로 추대해 칼리파로 인정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658년 4월 또는 5월, 그는 시리아 민중과 군대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알리는 이 소식을 듣자 무아위야를 알라의 적으로 선포하고 무아위야와 그의 측근을 저주하는 기도를 아침 예배 때 행했다.
658년 7월, 그는 이집트에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던 알리측 군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알리의 의붓아들 무함마드를 붙잡아 처형했다. 당시 알리는 카와리즈파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 무아위야의 세력이 갈수록 강성해짐을 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리의 군사적 역량이 탁월해서 무력으로 제압하기란 무리라고 여겼다. 그 대신 알리를 따르는 부족장들을 회유하여 자기 편으로 돌려 세우고 국경 지대 주민들을 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659년 또는 660년에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히자즈까지 공격하여 여러 오아시스 주민들의 복속을 받아냈다. 660년 4월 메카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그해 여름에 헤자즈와 예멘 정복에 성공하고 메카를 계속 압박했다. 이때 원정군 사령관 부스르 이븐 아비 아르타트는 도시 사나를 공략한 뒤 주민을 전부 학살하는 등 예멘에서 저항하는 자들을 철저히 짓밟았다.
알리는 이라크에서 군대를 모아 시리아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으나, 661년 1월 26일 쿠파의 대사원에서 새벽 예배를 위해 절하던 중 카와리즈파 암살자 압둘라흐만 이븐 물잠에게 암살당했다. 카와리즈파는 그 역시 암살하려 했지만, 그가 사전에 암살 시도가 있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배에 나오지 않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 후 알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무아위야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의 모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이라크로 진군할 채비를 갖췄다. 그러면서 새로운 칼리파로 추대된 알리의 장남 하산에게 서신을 보내 신변을 보장해주고 이맘으로서 지위를 인정해줄 테니 칼리파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6만 대군을 이끌고 하산이 있는 쿠파로 진군했다. 하산 역시 4만 군대를 일으켜 그를 향해 진군했다. 양군은 곧 사바트 인근에서 조우했다.
전투가 임박했을 때, 하산은 분열을 증오한다고 밝히며, 부하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따르라고 호소했다. 일부 병사는 이 말이 하산이 항복할 준비를 한다는 걸로 여기고 격분해 그를 공격했다.(...) 하산은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즉시 그를 호위하고 반란군을 죽였다. 한편 하산의 부관인 우바이드 알라 이븐 아바스는 걸출한 지휘관이었던 알리가 죽고 아군은 자중지란을 일으키는데 무아위야를 당해낼 가망은 없다고 판단하고 무아위야에게 귀순했다.
일설에 따르면, 정체 불명의 남자들이 무아위야와 하산의 소규모 분견대간의 충돌 때 하산이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가 패배를 초래했는 소문을 퍼트렸다. 소문을 듣고 격노한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영을 약탈했고, 하산은 호스로 궁전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무아위야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화 협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양군은 결말이 나지 않는 교전을 몇 차례 벌였다.
무아위야는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자신이 이길 확률이 높지만, 무력으로 칼리파를 찬탈했다는 악명을 살 것을 우려했다. 그는 하산과 추종자들과 화평을 어떻게든 이루기로 마음 먹고, 바누 쿠라이시에서 사절 2명을 보냈다. 마침 하산 역시 많은 무슬림이 내전으로 희생되는 것에 괴로워하던 차여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수니파 학자들에 따르면, 하산은 무아위야가 코란과 순나를 따라야 하며, 그가 칼리파 자리를 이름을 받아들이겠지만 추종자들에게 어떠한 복수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무아위야는 이를 받아들였고, 뒤이어 제시된 다음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고 한다.
1. 아와즈 지방에서 징수하는 모든 세금은 하산 이븐 알리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2. 연간 200만 디르함이 하산 이븐 알리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3. 전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을 선포해야 한다.
2. 연간 200만 디르함이 하산 이븐 알리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3. 전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을 선포해야 한다.
시아파 학자들에 따르면, 하산은 무아위야가 죽은 후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칼리파를 자신에게 돌려줘야 하고, 만약 자신이 무아위야보다 먼저 죽는다면 칼리파를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무아위야는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칼리파로 인정받은 그는 661년 예루살렘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뒤 메디나로 와서 백성들에게 연설했다.
"나는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길을 따라가길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약간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행운과 보상이 포함된 길을 따랐으니, 그것이 조금이라도 나에게서 너희에게 오는 것에 기뻐하라. 선은 계속되면 비록 작더라도 풍성해진다. 불만은 인생을 암울하게 만든다. (중략) 오, 백성들아!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행동을 따르는 것보다 단단한 산을 옮기는 것이 더 쉽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따르는 데 있어 어떤 이들보다 못하지만 나중에는 그 어떤 자도 나를 따라갈 수 없으리라."
2.3. 칼리파 무아위야
칼리파에 취임한 뒤, 그는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정하고 궁정을 세웠으며, 쿠파에 있던 국고를 이곳으로 옮겼다. 10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 부족 병사를 권력 기반으로 삼아 봉급을 지속적으로 늘렸으며, 핵심 지지세력인 쿠다족과 킨드족의 귀족 2,000명에게 상속 가능한 영지를 지급했다. 그들은 또한 모든 주요 결정들에 대해 협의할 수 있고, 이를 거부하거나 또다른 제안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또한 알리처럼 암살당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칼리팔라(개인 경호대)와 슈르타(근위대), 마쿠라(예비 부대)를 설치했다. 칼리파의 재원은 시리아의 세입과 이라크와 아라비아에서 압수한 왕령지로부터의 수입에 크게 의존했으며, 부관들이 원정 중에 획득한 전리품의 5분의 1이 그에게 넘어갔다.그는 시리아 총독을 맡았을 때처럼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관료 체계를 유지했다. 디완이라 불리는 여러 관료 기구를 설립해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중앙집권화를 도모했다. 초기 아랍 문헌들은 그의 시대에 알 카탐(총리)과 바리드(연락 담당관)의 두 디완을 언급하며, 그들의 존재가 제국 내의 연락체계를 크게 향상시켰다고 밝혔다. 또한 사르준 이븐 만수르를 포함한 기독교 인사들을 중용했다. 여기에 로마 시대의 목욕 시설을 복구했으며, 679년 지진으로 파괴된 에데사 교회를 복원하는 등 기독교-로마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기독교 외에도 유대교, 사마리아인, 마니교 등 다른 종교 신봉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역사가 톰 홀랜드는 그의 시대에 모두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허락받았다며 호평했다.
심지어 그를 적대했던 인사도 과감하게 기용하기도 했다. 659년 이란 파르스 지방의 페르세폴리스에서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해방 노예 출신의 지야드가 이를 진압하고 알리로부터 파르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칼리파로 즉위한 그의 초빙을 받은 지야드는 그가 알리의 핵심 지지자였던 자신을 죽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는 지아드와 의형제를 맺고, 아버지의 이름인 수피얀을 그에게 붙였다. 이리하여 지야드는 '지야드 이븐 수피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지야드는 자신을 이토록 잘 대해준 것에 감격하여 바스라와 쿠파 총독을 역임하며 그곳의 반 우마이야 정서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쿠파에 대 모스크를 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적대감을 끝까지 드러내는 시민 5만 명을 671년 호라산의 메르프로 이주시켰다. 673년 지야드가 사망한 후 아들 우바이둘라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했다. 우바이둘라는 674년 부하라를 약탈했으며, 옥소스 강(아무다리야)을 도하한 첫 무슬림 장군이 되었다. 우바이둘라는 아버지에게 은총을 베푼 그에게 충성을 다했기에, 그의 치세 동안 동방 영토는 평안했다.
이렇듯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그는 정복 전쟁으로 눈길을 돌렸다. 674년 그의 아들 야지드 이븐 무아위야 아비 수피얀이 이끄는 해군과 육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다.(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한 기지들을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 각지를 휩쓸며 적이 굴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함대가 그리스의 불을 앞세워 반격에 착수하자, 이슬람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무슬림군은 67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기독교계 유목민인 미르다이트족이 예루살렘 부근을 약탈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679년 콘스탄티노스 4세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의 공물을 보내기로 했다. 한편, 무슬림군은 서쪽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 670년 시칠리아를 공격했으며, 같은 해 우크바 이븐 나피는 이프리키야(현재의 튀니지)를 공략하고 카이루완 시를 세웠다. 이 곳은 훗날 카르타고를 대신하여 북아프리카의 행정 중심지이자 군사 작전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가 된 칼리파의 세습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친족으로서 열살 때부터 무함마드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워 수많은 이의 지지를 받았던 알리가 바로 칼리프가 되지 못한 것도 세습을 극도로 경계한 이슬람 지도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아들 야지드 1세를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먹고 이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666년, 홈스의 총독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칼리드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압드 알-라흐만은 탁월한 군공을 세웠기 때문에 시리아 아랍인들로부터 차기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야지드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라흐만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670년 그의 집권을 받아들이고 칼리파 직위를 넘겨준 뒤 메디나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하산 이븐 알리가 사망했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무아위야는 자신의 아들 야지드 1세에게 칼리파 직위를 물려주고 싶었고, 하산을 계획에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그는 비밀리에 하산의 아내 자다 빈트 알 아샤트 이븐 카이스와 접촉하여 남편을 독살하면 막대한 돈을 주고 야지드 1세와 결혼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자다는 잇따른 권고에 넘어가 남편에게 꿀을 섞은 독약을 먹였다. 결국 그는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다. 남편을 죽인 자다는 다마스쿠스의 무아위야 궁정으로 서둘러 가서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무아위야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반면 수니파 측은 그가 자연사했다고 주장한다.
675년 또는 676년, 모든 지방의 대표단이 다마스쿠스로 소환되었다. 이븐 알 아티르만은 대표단에게 무아위야의 업적, 신민의 의무, 야지드의 탁월한 자질 등을 설명하며 야지드가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단은 바스라 귀족 알-아흐나프 이븐 카이스를 제외하고 지지를 표명했다. 무아위야는 몇 차례 거절하다가 거듭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아들의 승계를 공인했다. 압두르 라흐만 빈 아부 바크르, 압둘라 이븐 우마르, 후세인 이븐 알리, 압둘라 빈 아즈-주바이르, 압둘라 이븐 아바스[2]가 야지드의 승계에 반발하자, 무아위야는 이들을 각각 불러모아서 설교단 아래에 서서 설교 때 군중이 주목하게 했다. 그들은 굴욕을 당할까 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수니파의 주장에 따르면, 무아위야는 야지드에게 후세인 이븐 알리를 학대하지 말고 후한 선물을 베풀어서 감화시키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반면 시아파 측은 그가 야지드에게 후세인이 왕조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경계하라고 주의를 줬다고 주장한다.
680년 4월 26일,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사후 야지드 1세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3. 평가
무함마드에게 적대했던 아랍 귀족 아부 수피안의 아들이라는 영 좋지 않은 출신으로써 몸을 일으켜 자신의 이슬람 아랍 왕조를 세우고 세습시킨 무아위야의 정략과 비무슬림 이교도 이민족들을 포용한 그의 관대함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역사적으로 무아위야의 세습 왕조 건립은 이슬람 제국을 무슬림들의 원초적 지향점이자 황금시대로 여기고 있던 정통 칼리프 신정 국가[3]를 왕조 국가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이슬람의 분열, 즉 수니파와 무하마드 혈족 알리의 계통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시아파 탄생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시아파에서는 예언자 가문의 칼리프 직위를 찬탈한 이단자 겸 찬탈자로써 증오를 받고 있으며, 경건한 수니파 일부에서도 이슬람 제국의 종교성을 퇴색시키고 무슬림 제국을 일개 왕정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과두제 제국을 특정 가문이 세습하는 왕조 제국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에 필적할 수 있다.[4]무아위야는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고, 기독교도 병사들을 거느렸으며, 기독교도인 마이순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야지드가 다음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야지드가 기독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실시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무슬림 인구(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들을 통치해야 하는 입장이고 거대한 제국을 통치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거대 국가를 경험해 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이 점 때문에 우마이야 왕조는 소수 종교인, 피지배 민족들을 상대로 유화적인 정책을 쓰고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페르시아인 기술자와 지식인, 전직 관료, 군인들을 채용해 행정 제도를 구축하고 문화와 기술을 흡수했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인 우대 정책을 실시하고 점차 소수 종교인과 피지배 민족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여 불만을 양산했다. 이슬람 문명 버전 인종차별 반대 운동 겸 페르시아 고취 운동인 슈우비야 운동도 우마이야 왕조의 민족 차별에서 기원했으며 종교세 납부를 강요받은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과 페르시아인, 소수 종교인 출신 관료들의 지지를 받은 아바스 왕조에게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현대 기준에서 봤을 때 우마이야 왕조가 소수 종교와 피지배 민족에게 마냥 유화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4. 여담
- 무아위야의 치세는 중국사의 당나라 초기, 한국사의 삼국통일전쟁의 절정기와 겹친다. 그가 1차 피트나에서 승리한 661년은 백제부흥운동이 막 시작된 때였고, 치세 말엽이던 676년에는 신라 문무왕이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당나라가 동방에서 전력이 분산되는 동안 우마이야 왕조는 당나라의 영향권 끄트머리였던 트란스옥시아나 땅까지 순조롭게 영향력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니 간접적으로는 약간의 관련이 있다.
- 독서가 취미였으며 하루 일과가 끝나면 주로 역사서를 탐독했다고 한다.
- 애견가였다고 한다. 어떤 시인이 자신을 충직한 개로 비유하자 화는 커녕 오히려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몇년 전에 비밀리에 무슬림이 되었다고 추정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2] 알리의 사촌.[3] 단 우마르, 우스만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슬람교도들의 순수한 전성기로 여겨지던 정통 칼리프 시대도 여러모로 문제를 노정하고 있었다.[4] 다만 우마이야 왕조를 쫓아 내고 들어선 아바스 왕조도 비아랍인 차별주의만 철폐했을 뿐이지 역시 세습 왕조라는 점에서 증명하듯이, 어쩌면 우마이야 왕조 시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슬람 제국의 왕정화는 결국 어느 정도는 선지자 무함마드 시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팽창된 이슬람 제국의 정교한 관료제 속에서 나타난 필연에 가까운 현상이었고, 선지자 무함마드 본인은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엄격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꽤나 유연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세습 관료제까지는 어찌저찌 이해해 줬을 지도 모른다. 결국 역시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아랍인 제일주의라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