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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6:19

목천 돈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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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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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px><tablebordercolor=#ece5b6> 파일:을지문덕.png木川 頓氏
목천 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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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시조 을지문덕(乙支文德)
집성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평안남도 평양시
인구 85명(2015년)

1. 개요2. 기원3. 집성촌4. 동국여지승람의 유래5. 을지문덕이 목천 돈씨의 조상인가?6. 인구7.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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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천 돈씨(木川 頓氏)는 한국사의 명장인 고구려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조로, 중시조를 을지수(乙支遂)로 두고 있는 성씨이다.

2. 기원

돈씨가보(頓氏家譜)에 의하면, 을지씨는 원래는 을(乙)씨였는데, 고구려 을지문덕 때에 '을지(乙支)'씨로 바뀌었다가 후에 '돈씨(頓氏)'로 변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을지문덕의 16세 후손 을지수(乙支遂)가 동생인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등과 함께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의병장으로 서경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졌고 돈(頓)씨를 사성 받았다. 이후 을지수의 증손인 돈예숭(頓禮崇)이 목천(木川)[1]으로 이주해 살면서 본관을 목천으로 하였다고 한다.

3. 집성촌

평양시 평남선 대평역(大平驛) 근방에 을지묘라고 전해 오는 큰 고분이 있는 이 인근에 돈뫼(頓山)라 하는 동네가 있고 이 곳에 을지문덕 장군의 후손들이라는 돈씨 집안 30~40호 가량이 있어 이 일대가 돈산군(頓山君)의 봉토로 여겨지고 있다.

4. 동국여지승람의 유래

동국여지승람에는 목천 돈씨에는 재밌는 설화가 하나 전해져 내려오는데, 본래 돈씨 집안은 백제 유민으로 고려에 누차 반기를 들어 태조 왕건의 미움을 사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성이 됐다가 뒤에 복성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자주 소란을 피워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豚)·상(像·코끼리)·우(牛·소)·장(獐·노루) 등 짐승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이들 성은 후에 (頓)·(尙)·(于)·(張)씨로 한자를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설화가 실린 동국여지승람은 편찬되었던 시기가 이미 고려 태조 때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조선 성종 때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 지역에 구전되던 민간 설화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을지씨 가문이 보덕국의 고구려인들같이 구 백제령으로 이주했다가 후백제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씨 외의 다른 성들이 후백제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한 기록은 전무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역시 그리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2]

5. 을지문덕이 목천 돈씨의 조상인가?

혹자는 목천 돈씨가 숭조 사업을 통하여 족보를 부풀린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숭조사업은 보통 비슷한 성씨의 인물을 이용한다.[3] 그런데 돈씨는 을씨가 을지씨로 또 을지씨가 돈씨로 개성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의 부연설명을 첨가해가면서도 굳이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을 시조로 만들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장 한나라 시대 효자로 유명한 인물인 돈기(頓琦)를 시조로 하는 것이 더 간편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나 중세시대에는 지역명을 따서 성씨를 짓는 경우가 흔했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국의 당씨(唐氏)는 중국(원나라)에서 도래한 성씨가 아니라 다원리(茶阮里)라는 지명이 당(唐)과 발음이 비슷해서 생겨난 성씨이다.[4]

평양 인근에는 목천 돈씨 가보와 관련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1935년 10월 1일~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준연의 답사기' 그리고 별건곤 34호참고에 연재된 을지문덕 묘 참배기에 따르면 을지문덕 묘의 위치와 그 묘 근처에 사는 돈씨를 인터뷰한 내용을 볼 수 있다.[5] [6]

결론은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의 후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인구

돈씨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황해도 안악군, 황주군 등 북한 지역에만 36가구가 있었다.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985년 16가구 69명이었고, 2000년에는 38가구 115명, 2015년에는 117명으로 조사되었다. 그 가운데 목천 돈씨는 86명이었다. [7]

7. 인물


[1]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2] 후백제에 우봉이라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한자가 又奉이다.[3] 신라김씨 왕실도 자신들의 선조를 김일제(金日磾)로 숭조한 기록이 문무대왕릉비에 등장한다.[4] 신라 단산(端山)의 석굴에 보관되어있던 고문헌들을 참고하여 조선 명종 시기에 제작된 야사집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 의하면 조선의 당씨(唐氏)와 독씨(禿氏)는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예맥계 부족 국가인 행인국(荇人國)의 출신 성씨이다.[5] 돈씨 문중의 일원인 돈종각(頓宗珏) 씨에 따르면 평남 강서군 잉차면 2리 현암산 동쪽 기슭에 을지문덕의 묘가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6]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 호에는 '조만식, 최윤옥, 김병연, 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잉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하여 현재는 어떻게 되었을지 알 길이 없다.[7] 목천 86명, 함평 12명, 태평 11명, 을지 5명, 기타 3명[8] 평양 10장사중 한명이었다고 하며,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도중 장렬히 전사하였다.[9] 1882년 ~ ?.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대평외리 출신. 1919년 3월 경 평남 대동군 대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형을 처분받았음. 201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