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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7:25:50

대중음악/1970년대

1. 개요2. 역사
2.1. 영국 음악계
2.1.1. 비틀즈 해체 후, 멤버들의 이야기
2.2. 미국 음악계
2.2.1. 미국 흑인 음악계
2.3. 뮤직 비디오공연 비즈니스의 발전과 카세트 테이프2.4. 197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 개요

1970년대 대중음악을 다루는 문서.

2. 역사

이 시기가 록 음악 최대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음악사를 들었다 놨던 비틀즈가 1970년대가 시작되는 1970년에 해체를 선언 한 뒤로 장르의 세분화가 가속화되었고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하드 록프로그레시브 록이 전성기를 맞고, 시각적 충격을 강조한 글램 록이 등장, 팝 록이 최전성기를 보냈으며, 팝 록에서 파생된 좀 더 잔잔한 분위기의 록인 소프트 록, 그리고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은 로큰롤의 원류 음악을 받아들인 루츠 록과 분파로 하트랜드 록, 컨트리 록이 등장하고 또한 개러지 록에 뿌리를 둔 펑크 록(Punk rock)이 등장한다.

펑크 록에서 파생한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도 등장, 댄스 록도 탄생한 시기이다. 고딕 록의 움직임도 시작됐으며, 1960년대 후반기에 탄생한 일렉트로닉 록이 정립, 발전했고, 인더스트리얼 록도 등장한다. 흑인 음악인 펑크(Funk)에 영향을 받은 펑크 록(Funk rock)도 등장했고, 블루스 록도 전성기를 맞으며, 록이란 록 음악은 거의 전부 등장한다.

한편 록과 대척점에 있는 흑인 음악 장르는 1970년대 초중반 소울펑크로 큰 재미를 본 뒤, 70년대 중후반 디스코가 제대로 터지면서, 팝 록과 소프트 록을 제외한 록 음악을 일시적으로 밀어 내고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시기의 소울디스코 등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백인 음악으로 인식된 록 음악과 흑인 음악 등이 크로스오버를 이루게 됐다.

2.1. 영국 음악계

1971년 롤링 스톤스는 롤링 스톤스 4대 명반 중 하나인 Sticky Fingers로 오히려 1960년대를 뛰어 넘는 인기를 구가하고 더 후도 그들의 명반 Who's Next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데뷔한 밴드중에서 1970년대에 인기를 끄는 밴드들이 등장하게 된다. 에릭 클랩튼을 중심으로 한 블루스 록 역시 큰 인기를 얻었으며, 70년대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인 Layla가 71년 초에 발매가 된다.[1] 롤링 스톤스와 더 후의 71년도 앨범의 명곡을 하나씩 적어두면 Brown Sugar, Baba O'Riley가 있다. 롤링 스톤스는 바로 다음 해 영국 밴드의 손으로 만든 아메리칸 록의 금자탑이라 평가받는 그들의 최고 역작 Exile on Main St.를 발매하나, 상업적인 면에서는 처참했는데 이후로 잠시 침체기에 든다. 그러나 Angie같은 발라드 명곡을 내놓기도 한다.

1970년대는 하드 록의 전성기로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중 레드 제플린[2]은 1971년 하드 록, 고전 메탈 최고의 걸작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언급되는 Led Zeppelin IV[3]를 내놓는데 레드 제플린의 아이콘이자 단일곡으로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명곡 중 하나Stairway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이 Stairway to Heaven은 은유적인 문학적 가사와 그에 걸맞은 소설 구성같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완벽한 구조, 전/초/후반부 마다 달라지는 장르, 8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명곡이다.

그들 커리어 최고의 작품 이후, 1973년 성공적인 Houses of the Holy[4] 앨범을 넘어 1975년 Physical Graffiti 앨범을 만들어 내는데 하나하나 각 분야의 최고라 불릴 수 있는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의 역량이 최고점에 달해 있는 작품이다. 수록된 대표적인 명곡으로 Kashmir[5]가 있다. 이런 명반들을 줄이어 내놓았는데.. 1977년, 로버트 플랜트의 5살 아들이 사망하며 팀 해체의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이겨내고 밴드로 돌아오는데도 불구하고 1980년, 존 본햄이 사망하며 레드 제플린은 해체하게 된다.

레드 제플린은 대중음악 역사상 멤버 모두가 가장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밴드다. 멤버 전원이 한 손에 들 정도로 대단한 역량을 지녔는데, 보컬의 로버트 플랜트[6], 기타의 지미 페이지[7], 베이스의 존 폴 존스[8] 그리고 드럼의 존 본햄[9] 레드 제플린은 언론에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음에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1970년대 총 앨범 판매량을 정산할때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다.[10][11] 레드 제플린[12]은 록 음악의 기술적인 면에서 전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고, 음악 외적으로 화려하고 섹시한 락스타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1971년 블랙 사바스딥 퍼플도 각각 Paranoid, Deep Purple in Rock같은 하드 록, 고전 메탈의 역사 남을 명반을 발매하며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블랙 사바스딥 퍼플레드 제플린[13]보다 헤비 메탈이라는 장르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메탈 리프를 뽑자면 딥 퍼플Smoke on the Water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정립해지기 시작한 헤비 메탈주다스 프리스트 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해간다.

1973년, 시드 바렛의 탈퇴 이후 방황기를 겪던 핑크 플로이드도 주목받는 밴드가 되었는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역작 The Dark Side of the Moon[14]이 발매되면서 역사상 전례없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누적 958주간 빌보드 200에 차트인했을 정도로 세계 음악계의 스테디셀러이기도 한 닼사문[15]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단일명곡이자 예술작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1975년, 또 다른 명반 Wish You Were Here을 발매하며 프로그레시브 록에서의 입지를 굳힌다.

핑크 플로이드부터 킹 크림슨 등 여러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도 시작됐다. 프로그레시브라는 이름답게 프로그레시브 록은 클래식부터 재즈 등 여러 장르의 음악적 요소 도입, 대곡 지향, 변박과 엇박 등을 이용한 치밀한 구성, 컨셉 지향적인 앨범, 각종 실험적 요소 등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장르를 묶어 부르는 말인데 이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가 시작하면서 대중음악계에 여러 큰 영향을 주었다.

글램 록 또한 유행했는데, 대중음악의 피카소라 불리는 데이비드 보위는 그전까지 다른 뮤지션들과 다르게 특이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으며, 본인의 음악에 페르소나를 도입하면서 정체성을 굳힌다. 데이비드 보위의 걸작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가 그 시초로 평가된다. 이는 대중음악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무대에서 각종 세트 기법과 연출을 도입하고, 각종 분장의상 등으로 무대에서 비주얼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전 시대까지는 아티스트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던 퍼포먼스에 힘을 주며,[16] 음악에도 시각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대중음악에서 공연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르소나에 있어서 마돈나의 선조이며, 마이클 잭슨에 앞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으니, 음악의 시각적 감상의 시조인 셈이다. 데이비드 보위뿐만 아니라 록시 뮤직 또한 글램 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글램 록의 비주얼 부분은 MTV 세대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공연이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7]

도 빼놓을 수 없는 밴드이다. 1975년, 그들 커리어 최고 명반 A Night at the Opera을 발매한다. 그 당시에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가 되며 엇갈린 극찬을 받고 있다. 수록된 퀸의 대표곡 Bohemian Rhapsody[18]은 뮤직 비디오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한편,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펑크 록이 등장함에 따라 록 음악은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19] 이들은 당시의 하드 록프로그레시브 록 등 연주가 너무 복잡하고 테크니컬한데다가 추상적인 가사를 쓰는 것을 증오했고, 기업화되어버린 록 밴드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 대신 사운드 면에선 더 원초적이고 단순한 로큰롤 음악을, 가사 면에선 뜬구름같은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거리의 생생한 현실 얘기를 다룬 쉬운 가사를 추구하였다.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등의 펑크 록 밴드들도 이 시기에 활동하다 장렬히 산화했다. 펑크의 대모라 불리는 패티 스미스는 이 시기 Horses라는 대중음악사에 아주 중요한 명반을 발매한다.

펑크 록을 대표하는 명반들로는 1976년에 발매한 라몬즈[20]Ramones 앨범은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 앨범의 가치를 알아본 관련업계 종사자들은 하나 같이 극찬을 했고, 흔히 펑크 록의 필수요소라 불리는 DIY 정신 충만한 업템포의 빠르고 경쾌한 쓰리코드, 다운 스트로크 위주의 기타 연주를 담은 단순한 음악은 사실상 이 앨범이 구체적으로 확립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1977년에 발매한 섹스 피스톨즈의 걸작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앨범이 있다. 이 앨범은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펑크 록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더 클래시London Calling[21] 앨범이 있다.

섹스 피스톨즈시드 비셔스이기 팝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론트맨이었는데, 시드 비셔스는 베이스도 제대로 칠 줄 모르는 베이시스트였지만, 무대 매너가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회자되곤 한다.

1970년대 후반기는 디스코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때 당시 침체기를 걷고 있던 롤링 스톤스가 기존의 하드 록, 컨트리와 디스코와 블루스 등을 융합해 Some Girls라는 명반을 내놓는다. 이 앨범으로 롤링 스톤스는 빌보드 앨범,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당시 포스트 펑크와 침체기라는 것이 없이 잘 나가던 팝 록이 디스코에 영향을 받아, 댄스 록이라는 장르가 탄생한다. 보통 시초작을 Gina X의 "No G.D.M.", 러스 발라드의 "On the Rebound", 그리고 롤링 스톤스의 Miss You가 꼽힌다. 이 롤링 스톤스의 Miss You는, 롤링 스톤스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크로스오버로 평가되기도 한다.[22]

2.1.1. 비틀즈 해체 후, 멤버들의 이야기

해체한 비틀즈 멤버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도 이 시기에 작품을 내며 활동한다. 폴 매카트니는 '윙스'를 결성해 McCartney 앨범을 시작으로 현재의 인디 팝 전체 장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인정받는 기발한 명반으로 여겨지는 Ram을 발매, 그리고 Band on the Run같은 앨범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23] 조지 해리슨All Things Must Pass[24] 앨범을 출시하는데, 3LP로 발매된 탓에 일반적인 LP 앨범에 비해 가격이 2.5배나 비쌌는데도 빌보드 앨범 차트에 7주 동안이나 1위에 랭크되는 등 상업적으로도 어마무시한 성과를 올렸다.[25] 1973년에 발매한 Living in the Material World도 크게 성공했다.[26] 링고 스타Ringo[27] 앨범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그리고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1970년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971년에는 Imagine[28]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의 타이틀이자 수록곡 Imagine[29]은 현재는 그 자체로 평화와 반전주의를 상징하는 대표곡이 됐다. UN부터 올림픽까지 다양한 국제 기관과 행사에서 사용되는 준(準)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매년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열리는 새해 맞이 볼 드롭(Ball Drop) 행사에 울러퍼지는 곡 중 하나다. 대략 밤 11시 57~59분 정도에 퍼포먼스가 나오는 관계로 미국의 공개적인 방송에서 나오는 한 해를 마감하는 노래가 되는 셈이 된다.[30] 그 후, 존 레논도 솔로 곡을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리면서 비틀즈는 모든 멤버가 솔로곡으로도 빌보드 1위를 기록하는 엄청난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존 레논 같은 경우, 1970년대 솔로활동 시기 평화주의, 반전주의적 정치 신념을 가지고 숱한 노래를 써내려갔다. 단순히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 반대 시위 등 여러 집회와 사회 운동을 직접 주도해서 20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중 한 명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당시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까지도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해 감시하였을 정도로 그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1975년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다가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존 레논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람에게 총을 맞았다.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고 피격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도착할 즈음에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는데,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 레논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

타임음악이 죽은 날[31]이라는 표지와 함께 추모를 표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대대적인 추모가 있었다.

2.2. 미국 음악계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한껏 영국에 밀리기만 했던 미국 록 음악계에서도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록 음악계를 넘어, 미국 대중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음악가, 브루스 스프링스틴[32]의 전성기가 열린다. 1964년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보고 충격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기타 가게로 달려가 싸구려 기타를 구입하여 활동을 시작했지만 연이은 실패를 맛본다. 그러다 1975년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Born to Run를 탄생시키는데, 이 명반은 미국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33] 하트랜드 록[34]의 탄생을 상징하는 명반이다. 미국의 양대 시사주간지 타임뉴스위크 표지를 동시에 장식한 사건은 당시 이 앨범이 미국을 얼마나 발칵 뒤집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어로스미스, 이글스같은 미국의 록 밴드들도 하나둘씩 등장하며 반격을 가했다. 에어로스미스는 Toys in the Attic로 미국의 저력을 보였고, 이글스는 1972년 데뷔부터 눈길을 끌기 시작하더니, 1975년 'One of These Nights' 앨범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위력을 보였다. 특히 1977년, 그들의 최고 명반 Hotel California는 미국에서만 3,000만 장을 판매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들의 5집 Hotel California의 타이틀곡이라 볼 수 있는 Hotel California는 국내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1968년에 성공적으로 복귀한 엘비스 프레슬리도 제2 의 전성기를 맞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한 시기이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었다.

포크 음악계에서도 다양한 활약이 있었는데, 밥 딜런의 경우 1960년대 출시했던 좀 더 포크 록에 가깝던 명반들이 아니라 기존의 포크 음악에 가까운 명반을 내놓는데, 1975년작 Blood on the Tracks이다.[35] 그다지인 보컬과는 별개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도 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전설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36] 또한 커리어 최고의 명반이자 가장 위대한 포크 앨범 중 하나인 Blue를 발매한다. 또한 같은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캐롤 킹[37]도 중요한 역작이라 불리는 Tapestry[38]를 발매한다. 이 명반으로 캐롤 킹은 최초로 그래미 상을 수상한 솔로 여성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는데, 그것도 무려 4관왕을 했다. 추가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이렇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수많은 앨범들이 쏟아지는 1960년~1970년대는 음악적으로 폭발하는 시기였다.

소프트 록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카펜터즈브레드의 성공은 소프트 록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불러왔다. 그리고 1977년 플리트우드 맥의 최고 걸작이자, 소프트 록의 상징으로 언급되며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뽑히는 Rumours가 발매된다. 전 세계 총 3,5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77년 발매되자마자 광풍을 몰고 왔던 앨범이다. 1977년 영화 최대의 아웃풋이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이라면 음악 최대의 아웃풋은 바로 Rumours라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영향을 불러왔고, 지금까지도 빌보드 200 100위권 안에 들어 있을 정도로 많은 리스너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앨범이다.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디스코 열풍이 불때도 팝 록소프트 록은 건재했다. 당시 소프트 록은 디스코와 함께 미국 음악계의 큰 주춧돌이었다.

그리고 서독크라프트베르크의 활동도 이 1970년대 부터다. 테크노의 시초격이자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혁신을 이끈 그룹이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들을 때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멜로디의 배치, 그리고 반복적인 리듬 등 우리가 이미 귀로 익어있는 다양한 문법들이 바로 크라프트베르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의 작품은 신스팝, 포스트 펑크, 힙합, 앰비언트 뮤직, 테크노 등의 다양한 일렉트로니카 음악 장르들, 그리고 현대의 EDM 씬의 음악까지 현존하는 모든 일렉트로니카 음악과 팝 음악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으며 마이클 잭슨, 콜드플레이팝 음악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아민 반 뷰렌, 에이펙스 트윈, 데드마우스 등 일렉트로니카 씬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까지, 많은 프로듀서에게 영향을 미쳤다. 1977년에 발매한 Trans Europa Express부터 독어/영어 다국어 녹음을 시작했다고 한다. 1978년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Die Mensch-Maschine를 발매한다.

독일일렉트로니카 그룹, 탠저린 드림도 이 시대에 데뷔한다. 크라우트 록의 거장이자, 크라프트베르크, 장 미셸 자르등과 함께 일렉트로니카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티스트다.

뉴 웨이브, 펑크 록 밴드 블론디도 이 시대에 데뷔해서 활동한다. 뉴욕 펑크 씬을 이끈 중요한 밴드로, 초창기 미국 펑크 록과 뉴웨이브 씬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Parallel Lines를 발매하고, 이 앨범의 싱글 "Heart of Glass"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예상치 못한 대히트를 거두는데, 빌보드 핫 100 1위, 대다수 유럽 국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미국을 넘은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다.

록 음악을 넘어, 음악적으로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토킹 헤즈의 활동 시기도 이 1970년대부터이다. 아프리카의 음악적 요소들을 서구 세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외적 요소를 일차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기반인 뉴욕 펑크의 도회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와 아프로비트의 훵키하고 복잡한 리듬을 잘 조화시키며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토킹 헤즈의 음악은 이러한 점에서 록 음악의 외연을 넓히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7년, Talking Heads: 77를 시작으로 그들의 활동을 알린다.

1970년대 후반기는 디스코소프트 록이 전성기이기는 했지만, 하드 록도 마냥 침체됐던건 아니었다. Foreigner보스턴이 큰 인기를 누렸다. 1976년 발매된 보스턴의 데뷔 앨범 Boston은 미국에서만 무려 1,7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Foreigner는 1977년 "Feels Like The First Time"을 빌보드 핫 100 4위에 올리고 같은 해 "Cold As Ice"가 빌보드 핫 100 6위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성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해인 1978년 "Hot Blooded"가 빌보드 핫 100 3위를 기록하며 대히트, 그 다음 해인 1979년 "Double Vision"이 빌보드 핫 100 2위를 기록하며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이 당시는 디스코 음악이 음반 시장과 미국 음악계, 나아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점령했던 1970년대 후반이었는데, 이들은 디스코는 커녕 디스코에서 영향을 받은 싱글이나 수록곡조차 만든 적이 없다. 무조건 미국적인 아레나 록/하드 록으로 승부한 것이다.

2.2.1. 미국 흑인 음악계

펑크(Funk)는 이 시기 대중음악의 중요한 장르였다.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스티비 원더,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 템테이션스, 빌리 프레스턴, 커티스 메이필드, Ohio Players, Kool & the Gang,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잭슨 파이브, Rufus, B. T. 익스프레스, Earth, Wind & Fire, 팔리아멘트를 포함한 수많은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이 70년대 초중반에 펑크 장르의 히트곡들을 발매했다. 이중에서도 대표적인 펑크 아티스트로는 제임스 브라운이다.

레이 찰스와 함께 R&B의 대부로 꼽히는 스티비 원더는 그의 대표곡이자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곡중 하나로 꼽히는 Superstition를 내놓는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전형적인 펑크 노래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노래는 1972년작으로, 펑크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기 전에 나온 노래이다. 단일곡 말고도 스티비 원더는 1973년 Innervisions, 1976년 Songs in the Key of Life 같은 천재성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든 걸작들을 발매한다. 모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된다.

소울 음악은 이미 대중적인 양식으로 탄탄히 자리 잡아, 알 그린,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로버타 플랙, 디온 워윅 등의 거물급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미국 흑인 가수들이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197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0위 안에 든 곡 중 4곡이 소울 음악 아티스트들의 곡으로, 그 4곡은 5위를 기록한 에드윈 스타의 "War",[39] 6위에 오른 다이애나 로스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40] 7위를 기록한 잭슨 파이브의 "I'll Be There",[41] 10위에 오른 프리다 페인의 "Band of Gold"[42]이다. 8위를 기록한 레어 어스는 록밴드였으나 모타운 소속 아티스트였고, 연말 차트에서 8위에 오른 "Get Ready"는 스모키 로빈슨이 작사, 작곡한 템테이션스의 노래를 커버한 것이었다.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43] 총 17곡이었다.[44]

마빈 게이는 1971년에 기념비적인 걸작을 제작하는데 바로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꼽히는 What's Going On이다. 이 과정에서 모타운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으나 마빈 게이는 발표를 하지 않고 계속 뭉게면 더 이상 모타운에서 앨범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하며 발매를 강행하게 한다. 이전까지 부드러운 흑인음악을 내던 모타운에서 발매한 최초의 사회고발성 앨범이며 그 과정에서 아티스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한 권리를 쟁취하는 측면에서도 파격적이었다.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의식, 아티스트가 회사를 상대로 자존심을 지킨 사례이며 이후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같은 모타운 계열 후배들도 뮤지션의 권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줬다. 이 앨범의 과정이나 내용이 없었다면, 이후 흑인 음악 장르가 상당히 바뀌었을지 모른다. 대중음악계의 흐름을 바꾼 음반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197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5곡이었다.[45] 같은 해에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의 흥행 영화 샤프트가 개봉했는데, 아이작 헤이즈가 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Shaft"가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첫 싱글 "Theme from Shaft"도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로버타 플랙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dFace이 1위에 올랐고,[46]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8곡이었다.[47] 같은 해에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의 흥행 영화 슈퍼 플라이가 개봉했다. 커티스 메이필드가 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Super Fly"가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48] 앨범의 첫 싱글 "Freddie's Dead (Theme from Superfly)"이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4위, 앨범의 두번째 싱글 "Superfly"가 핫 100에서 2주 연속 8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타운이 주도하던 1960년대와 다르게 이 시점부터는 갬블 앤 허프가 설립한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라는 경쟁자가 나타났고 알 그린, 로버타 플랙과 같은 새로운 소울 음악 스타들과,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Funk 밴드들이 전성기를 맞게 되어 씬에 변화가 일어났고, 1970년대의 모타운은 레이블의 최전성기였던 60년대에 비해 미국 대중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기존의 모타운 소속 스타들이 1970년대 중후반에 커리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회사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197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백인 1명과[49] 흑인 2명으로[50] 구성된 팝 그룹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가 1위에 올랐고,[51]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7곡이었다.[52]

소울 음악 중에서도 특이한 양식의 소울 음악이 바로 필라델피아 소울인데, The Stylistics, The Spinners, The O'Jays 등의 그룹들을 주축으로 하여 7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누렸다. 이 당시 이렇게 소울 음악은 현재의 팝 음악처럼 대중적인 장르였기에 미국 백인들도 소울 음악을 시도하게 된 것이 바로 블루 아이드 소울이다. 기원은 60년대의 더 라이쳐스 브라더스이지만 전성기는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Hall & Oates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블루 아이드 소울 아티스트다. 흑인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데이비드 보위도 이 시기 Young Americans 앨범으로 "플라스틱 소울" 이라는 형태의 펑키한 블루 아이드 소울을 시도했다.

한편 위의 펑크 음악은 당시 발전한 신시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대중화된 디스코가 등장했다. 펑크(Funk) 음악의 하위 장르로, R&B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데, 디스코의 대중화는 74년도 Love Unlimited Orchestra의 Love's Theme, MFSB의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 George McCrae의 Rock Your Baby[53], The Hues Corporation의 Rock the Boat 등의 대성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디스코 음악은 1970년대 후반을 미국 음악계를 지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은 소프트 록을 제외한, 미국의 주류 장르던 마저 시들했고 기존의 다른 장르들은 거의 사장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미국 음악은 이 디스코 음악의 영향을 안 받은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동안 침체기에 들었던 롤링 스톤스는 이 주류를 받아들인 앨범 Some Girls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1974년은 디스코의 전성기가 시작된 해였다. 197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한 Love's Theme과 5위에 오른 잭슨 파이브Dancing Machine, 7위를 기록한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70년대 중후반이 디스코의 시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Love's Theme배리 화이트가 작곡과 프로듀싱을 했고, 배리 화이트의 개인 오케스트라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케네스 갬블-리온 허프가 작곡, 작사와 프로듀싱을 했고, 이들이 사장으로 있던 음반사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의 하우스 밴드였던 MFSB에 의해 연주되었으며 미국의 필라델피아 소울/R&B 걸그룹 더 쓰리 디그리즈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8곡이었다.[54]

1975년에는 호주에서 결성하고 영국에서 활동한 3인조 음악 그룹, 비 지스디스코로 음악적 방향을 바꿨다. 빌보드 핫 100 1위곡 Jive Talkin'[55] 7위를 기록한 'Nights On Broadway'가 등장하게 되었고, 밴드는 새로운 사운드에 결과적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중들도 화답하여 Main Course 앨범은 순식간에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게 되었고 빌보드 200에서 14위를 기록했다. 다음 앨범부터는 본격적으로 디스코를 차용했고 남은 70년대에 전 세계를 디스코로 물들이며 밴드의 최고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다. 비 지스는 빌보드 핫 100 1위곡 순위에서 9곡을 보유해 그룹 자격으로는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위는 20곡을 보유한 비틀즈, 2위로 12곡을 보유한 슈프림즈 다음이다.

같은 해에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는데, Shining Star가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를 기록하고[56]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위에 오르는 등 공전의 히트를 거두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6집 앨범 "That's the Way of the World"가 빌보드 200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57] 크게 성공한다. 앨범의 두번째 싱글 "That's the Way of the World"도 핫 100에서 12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0위를 기록하며 히트했다.

1969년부터 Funk 밴드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아이즐리 브라더스는 싱글 "Fight the Power"가 핫 100에서 4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9위에 오르며 크게 히트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13집 앨범 "The Heat Is On"이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했다.[58] 1973년에 Funky Worm으로 히트를 거둔 오하이오 플레이어스도 이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들의 싱글 "Fire"는 핫 100에서 1주 1위,[59]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1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6집 앨범 "Fire"도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하는[60] 성공을 거둔다.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1곡이었다.[61] 1975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블루 아이드 소울 곡들로는 연말 차트 3위를 기록한 엘튼 존 밴드Philadelphia Freedom,[62] 연말 차트 5위에 오른 프랭키 발리My Eyes Adored You, 연말 차트 8위를 기록한 데이비드 보위Fame[63]이 있다.

197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0곡이었다.[64] 같은 해에 발매된 스티비 원더의 18집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빌보드 200에서 14주 비연속 1위를[65] 기록하고 197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둔다. 앨범의 첫 싱글 "I Wish"와 두번째 싱글 "Sir Duke"도 크게 히트했는데, I Wish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 Sir Duke는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77년, 비 지스는 미국 위주로 전성기를 누렸던 장르인 디스코를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를 통해 단숨에 세계인의 인기를 받게 한 장르로 변화시켰다. 이 사운드트랙 앨범에서는 비 지스에게 3곡의 빌보드 차트 1위곡을 안겨 주었다. How Deep Is Your Love, Stayin' Alive, Night Fever가 그 곡들이며 한 세대를 디스코 세대로 바꿔놓았다.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다른 가수 이본느 엘리먼(Yvonne Elliman)에게도 If I Can't Have You라는 노래를 주었고 이것 역시 빌보드 1위를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More Than A Woman'은 비 지스 버전과 타바레스(Tavares) 버전, 두 버전이 실려있고, 마찬가지로 히트했다. 이 시기부터 디스코로 대표되는 댄스 음악의 전성기가 시작된다.[66]

토요일 밤의 열기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성공에 기름을 부었고, 4,000만장이 팔려나가며 당시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사운드트랙 앨범 탑5에 항상 들고 있다. 비 지스가 전 세계 음악 왕좌에 앉는 절정의 시기였다. 비 지스의 사운드는 1977년 크리스마스 시즌 시작부터 9개월 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삼형제가 쓴 7개의 곡이 27~37주 연속으로 차트 1위를 주름잡았다. 3곡은 비 지스의 이름으로 나왔고, 2곡은 동생 앤디 깁의 이름으로,[67] 1곡 씩 이본느 엘리만의 If I Can't Have You, 프랭키 발리Grease이다.

197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2곡이었다.[68]

1978년 3월, 1964년 4월의 비틀즈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작곡한 곡으로만 빌보드 핫 100 차트 10위권 안에 5곡을 채워넣었다. Night Fever, Stayin' Alive, If I Can't Have You, 'Emotion'[69], 'Love Is Thicker Than Water'[70]가 그 곡들이다. 배리 깁은 연속으로 4곡을 빌보드 1위에 올린 작곡가가 되었다.

197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1곡이었다.[71]

197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0위 안에 든 곡 중 7곡이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으로, 그 7곡은 2위를 기록한 도나 서머의 "Bad Girls",[72] 3위에 오른 시크의 "Le Freak",[73] 5위를 기록한 피치스 & 허브의 "Reunited",[74] 6위에 오른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75] 7위를 기록한 도나 서머의 "Hot Stuff",[76] 8위에 오른 빌리지 피플의 "Y.M.C.A.",[77] 9위를 기록한 아니타 워드의 "Ring My Bell"[78]이다.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1곡이었다.[79]

하지만 1979년 여름에 있었던 디스코 폭파의 밤으로 이 화려했던 디스코의 전성기는 끝나고, 이를 통해 뉴 웨이브, 하드 락 등의 백인 음악이 인기를 얻게 되지만, R&B 역시 변화를 추구한다. 그게 바로 포스트 디스코컨템퍼러리 R&B 음악.

한편으로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힙합 음악이 태동하고 있었는데 펑크(Funk), 레게, 소울 음악, 재즈 등의 영향을 받으며 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1979년 발표된 슈거힐 갱의 Rapper's Delight은 레코딩 된 랩 음악의 시초를 알렸다.

2.3. 뮤직 비디오공연 비즈니스의 발전과 카세트 테이프

음악 수준 뿐만 아니라 뮤직 비디오도 이전 시대보다 발전을 보인다.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핑크 플로이드 같은 아티스트들의 뮤비를 거쳐 단편 명작 수준으로 수준을 끌어올린 것도 이 시대 퀸의 Bohemian Rhapsody다. 이를 위해 일류 영상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큰 제작비와 세심한 공을 들여 제작하였고, 당대의 첨단적인 촬영 기법과 특수효과가 총동원되었다. 후처리를 거치지 않고 촬영 과정부터 특수 효과를 적용했다는 점도 유명하다.[80]

1970년대 중반경부터 당시 두 인기 밴드였던 ABBA에 의해서 뮤직 비디오가 더욱 보편화됐다. 퀸의 Bohemian Rhapsody이 당시로서는 블록버스터급 뮤직 비디오여서 많은 관심을 모았고, 그리고 퀸과 동시대의 인기 밴드였던 ABBA는 1974년경부터 모든 싱글 발표 곡들에 그 각 가사들을 단편극처럼 영상 스토리화하거나 댄스풍 영상으로 만든 뮤직 비디오를 촬영해서 전 세계 TV에 방영시켜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는 이후 다른 팝 뮤지션들에게도 신곡 발표때마다 뮤비를 제작하는 관행을 널리 유행시키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1970년대는 후술할 공연 비즈니스의 발전과, 서구 선진국들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등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도 가정용 TV가 대중들에게 한창 보급되던 시기라서 세계의 대중음악팬들이 "단지 듣는 것 뿐 아니라 보면서 즐기는 음악"에 대한 욕구와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은 다음 시대에 MTV의 탄생과 함께 1980년대 대중음악의 아이콘, 마이클 잭슨을 필두로 받아들이게 된다.

카세트 테이프가 점차 대중화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주 음반 매체였던 LP는 부피가 크고, 재생 매체마다 음질차가 큰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개발되었다. 카세트 테이프는 1980~1990년대의 대중 음악 시장의 급속 팽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LP는 가격도 비쌌고 부피가 커서 재생에 한계가 있었는데, 카세트 테이프가 등장하면서 수천 원 전후의 가격으로 LP보다 엄청나게 작은 크기에 좋은 휴대성까지 갖춘 덕분에 음반 시장 발달에 크나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데이비드 보위가 무대에 각종 연출 방법과 세트 기법을 대중음악 공연에 끌어와 도입시켰으며, 보위를 포함한 각종 록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하는 1970년대는 공연 비즈니스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다.

레드 제플린롤링 스톤스아레나 록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레드 제플린의 시대 이전까지 록 밴드는 콘서트장에서 30분~1시간 정도만 잠깐 노래를 부르고 나가는게 관례였고 비틀즈의 부도칸 공연이나 셰이 스타디움 공연도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비틀즈 등의 유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연 시간을 최소 2시간 이상으로 확 늘리고, 화려한 무대 의상과 조명을 통해 후대 글램 메탈 밴드들 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 전반의 무대 세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퍼포먼스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 보위부터,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같은 관객 친화적이고, 활동적인 프론트맨을 보유한 밴드들이 크게 이끌었다. 앞서 언급한 믹 재거,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이기 팝, 퀸의 프레디 머큐리,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 등이 있었으며, 이는 다음 시대에도 이어지며 발전한다.

2.4. 197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 에릭 클랩튼과 그의 친구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 패티 보이드가 얽힌 일화가 있는 곡이다. 자세한건 항목 참고.[2] 역대 음반 판매량이 공식적으로 약 3억 장 이상으로, 역사상 6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엘튼 존, 마돈나 다음에 위치한다.[3] 전 세계 총 3,7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대중음악 역사상 6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록 장르 음반 중 3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4] 레드 제플린이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다. 레게, 펑크,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 등을 시도하였다.[5] 문학적인 가사와 8분의 긴 시간이 특징이며 전체적인 음악풍은 중동, 인도풍이나 약간은 레게사이키델릭 록의 느낌이 있다.[6] 가장 위대한 록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며 로버트 플랜트를 제외하고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수많은 록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보컬이다. 음역대 또한 매우 넓어서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서 로버트 플랜트보다 음역대가 더 넓거나 비슷한 보컬은 액슬 로즈프레디 머큐리밖에 없다.[7] 쇼팽의 클래식 곡까지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할 정도의 어마 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를 빼면 지미 페이지 위에 있는 하드 록 기타리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8] 존 엔트위슬, 잭 브루스,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윌슨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베이시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수많은 악기들을 수준급으로 다루기에 3집에서부터 이 능력이 빛을 발했으며 그중에서도 4집, 5집, 6집 세 앨범이 위대한 앨범이 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9] 현대 드럼의 기본 주법을 창시한 드럼의 신이다. 이견이 없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로 평가받는다. 어지간한 드럼 교본에는 존 본햄의 이름이 무조건 등장하며 그렇기에 드럼을 배운 사람들 중 레드 제플린은 잘 몰라도 존 본햄을 모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10] 70년대 활동 음악가만 따지면 엘튼 존이 위이지만, 이는 라이온킹 등 8~90년대의 커리어까지 다 합친 수치다. 순수 1970년대만을 쳤을때는 레드 제플린이 1위다. 이는 ,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등 1970년대에 인기 있던 다른 음악가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다.[11] 한편 의외로 빌보드 핫 100에서는 신통찮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내 인기는 한참 아래였던 도 빌보드 핫 100 1위 곡은 2개를 냈고, 핑크 플로이드도 1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냈는데, 레드 제플린의 빌보드 핫 100 최대 기록은 Whole Lotta Love가 기록한 3위였다. 이는 레드 제플린이 싱글 발매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발매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Stairway to Heaven같은 인기 곡들마저 싱글로 내지 않았을 정도.[12] 레드 제플린은 역사상 3번째로 많은 RIAA 다이아몬드(1,000만장) 인증 판매고를 올린 앨범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참고로 1위는 9회를 올린 가스 브룩스, 2위는 6회를 올린 비틀즈이다.[13] 헤비 메탈을 창시한 밴드를 꼽을때, 가장 널리 알려져있는 밴드 중 하나이나 역설적으로 헤비 메탈 색체가 가장 적은 밴드기도 하다.[14] 전 세계적으로 총 4,3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록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Thriller 앨범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15] 기존의 앨범들이 전형적인 명곡을 위주로 좋은 명반을 만들었던 반면, 이 앨범은 곡 대다수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 앨범 자체를 하나의 음악처럼 만든 경우기 때문에 이 곡의 모든 곡들은 메들리 형태로 이어져 있으며, 따라서 수록곡 전체를 한번에 들어야 완벽한 감상이 가능하다.[16] 롤링 스톤즈 등, 적극적인 프론트맨을 보유한 밴드들은 이 시기에 보위처럼 퍼포먼스에 더욱 힘을 쏟기 시작한다.[17] 록 뮤지컬의 확립에도 기여했다.[18] 앨범에 대한 평가도 포함해서, 작품이지만 갑자기 지나치게 평가가 높아진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고 너무 과소평가가 됐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이건 서로 개성이 있는 곡들을 억지로 줄세우기를 해야해서 역사성이나 창조성, 개성 등 따져야 하는 입장이라 그렇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늘 명곡 취급을 받는다.[19] 특히 영국이 그 영향이 가장 강했다.[20] 미국 록 밴드이다. 펑크 록의 계보때문에 분류가 이렇게 된 듯 하다.[21]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이며, 과장해서 락 음악은 London Calling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추후의 락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22] 흑백음악의 크로스오버가 70년대에 등장한 것은 거의 확실하나, 최초의 음악이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시기 음악가로는 영국데이비드 보위가 손꼽히기도 한다.[23] 개별 곡들도 포함해서 모두 빌보드, UK 차트 1,2위를 쓸어담던 앨범들이다.[24] 록 역사상 최초의 트리플 앨범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25] 이 앨범은 1971년 한해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고 한다.[26]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핫 1위 등.[27] 빌보드 앨범 차트 2위, 싱글 1위 2곡.[28] 빌보드, UK 차트 1위를 달성했다.[29] 빌보드 핫 100 3위에 올랐으며, 차트 1위에는 실패했으나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려 1971년 연말결산 차트에서 3위에 올랐다.[30] 저녁 6시 정각 행사 시작을 알리는 볼 레이징(Ball Raising, LED 볼을 꼭대기로 올리는 행사)이 이뤄지며, 밤 11시 56분 쯤 존 레논의 <Imagine>이 나오며, 노래가 끝나면 1분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볼이 내려오는데 이것을 볼 드랍이라고 한다. 그리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프랭크 시나트라의 <New York, New York> 등이 순서대로 맨해튼 한복판에 울러퍼진다.[31] 돈 맥린의 American Pie에 등장하는 가사인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에서 따온 표현. 1959년 2월 3일, 즉 비행기 추락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한꺼번에 객사한 날을 가리킨다. 그후 다시 쓰이게 된 것이다.[32] 미국에서 그의 별명은 다름아닌 'The Boss'다.[33] 이 음반이 발매된 1975년 8월 25일은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지 4개월째 되는 날짜이자,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까지 겪으면서 미국 국민들은 미래를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찬 시각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PTSD, 마약과 같은 사회적 문제도 1970년대에 대두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의 영광은 베트남 전쟁에서 처음으로 패전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를 뉴저지의 청소년, 노동자들의 시점을 무대로 이러한 삶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을거란 믿음에 가득찬채 마을을 떠나는 모험을 다룬 찬송가에서, 증오와 폭력으로 물든 거리의 비극, 갱단들의 총격전을 그려나가는 서사시로 이루어진 앨범은 1970년대의 미국의 상황을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34] 컨트리 뮤직과 블루스, 로큰롤을 기반으로 하여 미국 노동자들의 비애를 다룬 장르이다.[35] 앨범 제작 당시 사라와의 파경으로 인하여 딜런이 느낀 절망과 분노,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들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과 이별에서 오는 복잡한 심경과 고뇌 등은 밥 딜런 특유의 모더니즘 문학적인 가사와 함께 앨범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이는 딜런이 자기고백적 싱어송라이터의 본좌 위치에 오르는데 한 몫하였으며, 이후의 싱어송라이터들에게도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앨범은 역대 최고의 Breakup album(이별 뒤 나온 앨범)이란 평을 받기도 한다.[36] 캐롤 킹과 더불어 여성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언급할 때 항상 언급되는 아티스트이다. 북미권에서 조니 미첼 이후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중에서는 조니 미첼의 영향권 아래에 없는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악계, 특히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에게 조니 미첼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37] 팝, 소프트 록, 싱어롱라이터이다.[38] 조니 미첼의 Blue와 함께 더불어 1970년대 자기 고백적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명반을 언급할때 자주 언급되는 앨범이다.[39] 빌보드 핫 100 3주 연속 1위[40]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41]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42] 빌보드 핫 100 3위[43] 흑인과 백인이 멤버로 있는 밴드들도 포함되었다.[44] 에드윈 스타 - War (5위), 다이애나 로스 -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6위), 잭슨 파이브 - I'll Be There (7위), 프리다 페인 - Band of Gold (10위), 잭슨 파이브 - ABC (15위), 잭슨 파이브 - The Love You Save (16위),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Elf Agin) (19위), 에릭 버든 앤드 워 - Spill the Wine (20위), 파이브 스테어스텝스 - O-o-h Child (21위), 멜라니, 더 에드윈 호킨스 싱어즈 - Lay Down (Candles in the Rain) (23위), 템테이션스 - Ball of Confusion (That's What the World Is Today) (24위), 더 모멘츠 - Love on a Two-Way Street (25위), 잭슨 파이브 - I Want You Back (28위), 스티비 원더 - Signed, Sealed, Delivered (I'm Yours) (31위), 클레런스 카터 - Patches (35위), 브룩 벤턴 - Rainy Night in Georgia (37위), 체어멘 오브 더 보드 - Give Me Just a Little More Time (39위)[45] 템테이션스 - Just My Imagination (Running Away with Me) (9위), 알 그린 - Tired of Being Alone (12위), 허니 콘 - Want Ads (13위), 더 언디스퓨티드 트루스 - Smiling Faces Sometimes (14위), 코닐리어스 브라더스 & 시스터 로즈 - Treat Her Like a Lady (15위), 진 나이트 - Mr. Big Stuff (18위), 마빈 게이 - What's Going On (21위), 빌 위더스 - Ain't No Sunshine (23위), 더 프리 무브먼트 - I've Found Someone of My Own (26위), 오션 - Put Your Hand in the Hand (33위), 잭슨 파이브 - Never Can Say Goodbye (40위), 더 퍼즈 - I Love You for All Seasons (45위), 드라마틱스 - Whatcha See Is Whatcha Get (46위), 스티비 원더 - If You Really Love Me (48위), 아레사 프랭클린 - Spanish Harlem (49위)[46] 빌보드 핫 100 6주 연속 1위[47] 로버타 플랙 -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1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 The Candy Man (5위), 조 텍스 - I Gotcha (6위), 빌 위더스 - Lean on Me (7위), 알 그린 - Let's Stay Together (11위), 더 샤이-라이츠 - Oh Girl (13위), 척 베리 - My Ding-a-Ling (15위), 루서 잉그램 - (If Loving You Is Wrong) I Don't Want to Be Right (16위), 스타일리스틱스 - Betcha by Golly, Wow (18위), 스테이플 싱어즈 - I'll Take You There (19위), 마이클 잭슨 - Ben (20위), 빌리 프레스턴 - Outa-Space (22위), - Slippin' into Darkness (23위), 더 메인 인그리디언트 - Everybody Plays the Fool (29위), 더 피프스 디멘션 - (Last Night) I Didn't Get to Sleep at All (31위), 코닐리어스 브라더스 & 시스터 로즈 - Too Late to Turn Back Now (34위), 더 오제이스 - Back Stabbers (35위), 멜 & 팀 - Starting All Over Again (38위)[48] 1972년 10월 셋째 주부터 11월 둘째 주까지[49] 토니 올란도[50] 텔마 홉킨스, 조이스 빈센트 윌슨[51]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52]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 -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1위), 로버타 플랙 -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3위), 마빈 게이 - Let's Get It On (4위), 빌리 프레스턴 - Will It Go Round in Circles (8위), 다이애나 로스 - Touch Me in the Morning (10위), 클린트 홈즈 - Playground in My Mind (12위), 빌리 폴 - Me and Mrs. Jones (15위), 도비 그레이 - Drift Away (17위), 스티비 원더 -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 (19위), 아이즐리 브라더스 - That Lady (21위), 실비아 - Pillow Talk (22위), 스티비 원더 - Superstition (26위), 더 오제이스 - Love Train (32위), 배리 화이트 - I'm Gonna Love You Just a Little More Baby (33위),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 - Say, Has Anybody Seen My Sweet Gypsy Rose (34위), 에디 켄드릭스 - Keep on Truckin' (35위), 블러드스톤 - Natural High (39위)[53] 74년도 당시 전 세계적으로 1,100만 장 이상이 판매되며 디스코의 전 세계적인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곡이다.[54]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 - Love's Theme (3위), 잭슨 파이브 - Dancing Machine (5위), MFSB featuring 더 쓰리 디그리즈 -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 (7위), 아레사 프랭클린 - Until You Come Back to Me (That's What I'm Gonna Do) (11위), 쿨 & 더 갱 - Jungle Boogie (12위), 스타일리스틱스 - You Make Me Feel Brand New (14위), 알 윌슨 - Show and Tell (15위), 블루 매직 - Sideshow (19위), 에디 켄드릭스 - Boogie Down (30위),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 Be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Me (34위), 로버타 플랙 - Feel Like Makin' Love (35위), 더 메인 인그리디언트 - Just Don't Want to Be Lonely (36위), 빌리 프레스턴 - Nothing from Nothing (37위), 조지 맥크레이 - Rock Your Baby (38위),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 I've Got to Use My Imagination (41위), 더 휴즈 코퍼레이션 - Rock the Boat (43위), 스티비 원더 - Living for the City (45위), 디안 워윅, 더 스피너스 - Then Came You (46위)[55]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2위[56] 1975년 5월 넷째 주[57] 1975년 5월 셋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58] 1975년 9월 둘째 주[59] 1975년 2월 둘째 주[60] 1975년 2월 둘째 주[61]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Shining Star (7위), 미니 리퍼튼 - Lovin' You (14위), 칼 더글러스 - Kung Fu Fighting (15위), 토니 올란도 앤드 던 - He Don't Love You (Like I Love You) (19위), 밴 맥코이 & 더 소울 시티 심포니 - The Hustle (22위), 라벨 - Lady Marmalade (23위), - Why Can't We Be Friends? (24위), 메이저 해리스 - Love Won't Let Me Wait (25위), 스티비 원더 - Boogie On Reggae Woman (26위), 아이즐리 브라더스 - Fight the Power (29위), 오하이오 플레이어스 - Fire (31위)[62] 필라델피아 소울 장르의 곡이다.[63] 펑크(Funk) 장르의 곡이다.[64] 조니 테일러 - Disco Lady (3위), 더 맨해튼스 - Kiss and Say Goodbye (6위), 더 미라클스 - Love Machine (7위), 실버 컨벤션 - Fly, Robin, Fly (14위), 다이애나 로스 - Love Hangover (15위), 도로시 무어 - Misty Blue (19위), 더 실버스 - Boogie Fever (20위), 핫 초콜릿 - You Sexy Thing (22위), 실버 컨벤션 - Get Up and Boogie (That's Right) (24위), KC 앤 더 선샤인 밴드 - (Shake, Shake, Shake) Shake Your Booty (26위), 코모도스 - Sweet Love (27위), 맥신 나이팅게일 - Right Back Where We Started From (28위), 리듬 헤리테이지 - Theme from S.W.A.T. (29위), 오하이오 플레이어스 - Love Rollercoaster (30위), 루 롤스 - You'll Never Find Another Love Like Mine (32위), 비키 수 로빈슨 - Turn the Beat Around (38위), 도나 서머 - Love to Love You Baby (41위), 다이애나 로스 - Theme from Mahogany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43위), 러퍼스 피처링 샤카 칸 - Sweet Thing (44위), KC 앤 더 선샤인 밴드 - That's the Way (I Like It) (45위)[65] 1976년 10월 셋째 주부터 1977년 1월 둘째 주까지 13주 연속 1위, 1977년 1월 다섯번째 주에 1주 1위[66] 물론, 로큰롤이나 다른 부류의 음악 장르도 댄스 음악으로 쓰였지만, 좀 더 장르로서 분류되는 개념으로 이렇게 쓴다.[67] 이 중에는 Shadow Dancing이라는 노래도 있었는데, 이 노래는 비 지스의 다른 노래들 못지않게 히트쳐서 1978년 빌보드 연말차트 1위를 차지했다.[68] 더 이모션스 - Best of My Love (3위), 핫 - Angel in Your Arms (5위), 셀마 휴스턴 - Don't Leave Me This Way (7위), KC 앤 더 선샤인 밴드 - I'm Your Boogie Man (11위), 스티비 원더 - Sir Duke (18위), 마빈 게이 - Got to Give It Up (20위), 더 실버스 - Hot Line (25위), 로즈 로이스 - Car Wash (26위), 마릴린 맥쿠 & 빌리 데이비스 주니어 - You Don't Have to Be a Star (To Be in My Show) (27위), 코모도스 - Easy (33위), 나탈리 콜 - I've Got Love on My Mind (35위), 더 잭슨스 - Enjoy Yourself (40위)[69] 사만다 생의 곡.[70] 앤디 깁의 곡.[71]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 - Boogie Oogie Oogie (9위), 코모도스 - Three Times a Lady (10위), 시크 - Dance, Dance, Dance (Yowsah, Yowsah, Yowsah) (20위), 조니 마티스, 데니스 윌리엄스 - Too Much, Too Little, Too Late (28위), 레이디오 - Jack and Jill (31위), 댄 힐 - Sometimes When We Touch (33위), 도나 서머 - Last Dance (34위), 로버타 플랙, 도니 해서웨이 - The Closer I Get to You (38위), 더 오제이스 - Use ta Be My Girl (42위), 나탈리 콜 - Our Love (43위), 힛웨이브 - The Groove Line (49위)[72]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73] 빌보드 핫 100 6주 비연속 1위[74]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75] 빌보드 핫 100 3주 비연속 1위[76] 빌보드 핫 100 3주 비연속 1위[77] 빌보드 핫 100 2위[78] 빌보드 핫 100 2주 연속 1위[79] 도나 서머 - Bad Girls (2위), 시크 - Le Freak (3위), 피치스 & 허브 - Reunited (5위), 글로리아 게이너 - I Will Survive (6위), 도나 서머 - Hot Stuff (7위), 빌리지 피플 - Y.M.C.A. (8위), 아니타 워드 - Ring My Bell (9위), 도나 서머 - MacArthur Park (12위), 포인터 시스터즈 - Fire (15위), 시크 - Good Times (20위), 에이미 스튜어트 - Knock on Wood (22위), 맥신 나이팅게일 - Lead Me On (24위), 더 잭슨스 -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 (25위), 레이디오 - You Can't Change That (30위), 피치스 & 허브 - Shake Your Groove Thing (31위), 디안 워윅 - I'll Never Love This Way Again (32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After the Love Has Gone (38위), 도나 서머, 브루클린 드림즈 - Heaven Knows (39위), 보니 포인터 - Heaven Must Have Sent You (43위), 시스터 슬레지 - He's the Greatest Dancer (45위), 빌리지 피플 - In the Navy (48위)[80] 최초의 TV/컬러 뮤직비디오는 1960년대 중반에 비틀즈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는데, 당시 워낙 바쁘던 비틀즈가 여러 음악관련 방송들에 다 출연할 수가 없어서, 곡 분위기와 가사에 맞는 영상을 찍어서 곡 런닝타임에 맞게 편집하여 방송국에 보냈던 것이다. 처음엔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이후엔 갈수록 더 신경을 써서 제작해서 Strawberry Fields Forever 등의 뮤비에서는 시각적 효과를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한다. 이후 이는 핑크 플로이드, 비치 보이스 등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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