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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6:52:56

궁예 신라 왕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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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신에 대학 학설
2.1. 헌안왕 부친설2.2. 경문왕 부친설2.3. 조작설2.4. 낙향 신라왕족설
3. 긍정론
3.1. 거병 전의 궁예에겐 족보조작을 할 힘이 없었음3.2. 왕실 족보의 매매·조작을 통한 사칭은 불가능하다3.3. 궁예 이전 신라 왕족들의 반란과 다른 성씨들의 반란들
4. 부정론
4.1.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4.2. 당대 조상 조작의 관행
4.2.1. 족보를 조작하더라도 반발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4.2.2. 궁예라는 인물의 비합리성
4.3. 궁예 설화의 허위성4.4. 고려 왕조의 입장

1. 개요

후삼국시대군웅이자 태봉의 건국 군주인 궁예신라 왕족 출신인지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을 서술한 문서.

2. 출신에 대학 학설

2.1. 헌안왕 부친설

경문왕 부친설과 함께 <삼국사기>에 기록된 설이다. 조선 초 편찬된 <동국통감>에서는 경문왕 부친설이 누락되고 헌안왕 서자설을 실었다. 현대에 헌안왕 부친설을 지지하는 연구는 다음과 같다.

2.2. 경문왕 부친설

헌안왕 부친설과 함께 <삼국사기>에 기록된 걸로, 고려 말 저술된 <제왕운기>에는 궁예를 경문왕의 서자로 서술했다.

경문왕 부친설을 지지하는 연구는 다음과 같다.

2.3. 조작설

현대에 제기된 학설로, 궁예가 신라 왕족이었다고 기술한 <삼국사기> 궁예전의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신라왕족 조작설을 다룬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2.4. 낙향 신라왕족설

궁예가 헌안왕, 경문왕의 소생이 아니더라도 원성왕과의 왕위분쟁에서 탈락한 김주원 가문처럼 낙향한 신라 왕족의 후예였을 것이라는 설이다.

3. 긍정론

3.1. 거병 전의 궁예에겐 족보조작을 할 힘이 없었음

궁예가 고위 신라 왕족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은 여러 가지 기록과 정황 증거가 있다. 궁예는 양길에게서 독립하기 전에 명주에 가서 호족 순식의 항복을 받았는데, 궁예가 그저 혈통도 알 수 없는, 아니 혈통이나 사칭하는 반란군 수령 나부랭이의 수하일 뿐이었다면 그렇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대에 흔히 이루어진 왕실의 선대조작은 일단 족보조작을 할 만큼의 재력과 세력을 확보한 후에야 가능했는데 궁예는 신라 말의 가난한 승려 내지 혼세의 비적대장 1에 불과(?)했기에 태봉 건국 전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때문에 확실히 혈통을 조작할 능력이 없었을 때 순식이 귀부한 것을 보면 궁예는 다른 진골귀족들의 음모로 선조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숙청당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왕의 초상화를 로 베었다는 일화를 비롯해서 신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궁예는 신라의 지배층에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궁예 자신이 당시 지배층과 모종의 악연이 있으며, 지배층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참고로 궁예 말고도 과거에도 지배층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김헌창이다.

3.2. 왕실 족보의 매매·조작을 통한 사칭은 불가능하다

신라 당시는 가문과 혈통만은 엄격하게 따지는 골품제 혈족 사회, 신분 사회였고 상류층조차도 가문의 등급이 철저히 나뉘어졌으며 누가 몇 두품 가문 소속인지 아닌지는 가문 소속 인원들과 족보만 조사해봐도 금방 들통날 게 뻔했던 때였다. 신라 시대의 일개인의 족보조작과 진골 경주 김씨 편입이 마치 조선 후기처럼 그렇게 쉬웠으면, 최치원 등을 비롯한 유능하고 세력있는 6두품들이 그렇게 진골 가문을 사칭하지 못해서 절망하고 좌절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당시 힘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도 물론 선대를 조작했을 게 분명하다. 왕건도 그랬지만, 신라 말에 갑자기 각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오늘날의 권씨[1], 이씨, 장씨, 박씨 등 여러 본관별 성씨들이 출현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차마 경주 김씨 진골을 사칭하진 않았다. 작게는 세간의 조롱을 받고 크게는 조정의 어그로를 끌어 역적으로 몰려 토벌될 수 있었기 때문. 그 족보 매매가 횡행한 조선 후기에도 왕실 적통 족보는 절대로 팔릴 리가 없었다. 왕실에 원본이 있는 족보를 무슨 수로 매매하거나 위조를 한단 말인가? 조선 후기에도 그러했는데 신라 왕실에 족보가 없어서 맘대로 사칭이 가능했겠는가? 삼국지의 유비 정도로 서출의 먼 후손 급인 너무 먼 방계라면 황손인지 논란이 생길 수 있는 것이지만 궁예의 입지는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왕가의 선대조작이 관행이라 하나, 삼국의 시조들의 이야기는 어디가지나 술작(述作, 단편적 사실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새 얘기를 만드는 것)된 신화이고 설화이다. 신라 경주 김씨가 끌어들인 흉노족 투후 김일제나 왕건이 끌어들인 당숙종 갖고는 한나라나 당나라가 이미 망해 자빠진 나라라서 선대조작을 가지고 따질 사람도 없었던 반면 궁예의 시대에는 아직 골품제와 경주 김씨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웬 상놈이 왕족을 사칭했다간 천하에 망신살 뻗치면 다행이고 심한 경우 집안이 멸문당하기 딱 좋은 시대였다. 아자개와 견훤이 신라왕실 후손이라는 주장은 수백 년 후에 쓰인 고려시대 책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또 백제 부여씨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는 등 후백제 멸망 이후 훨씬 후대에 윤색 술작된 것이 뻔해서 당시 왕실 적통 사칭이 가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애초에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왕실 후손이면 경주 김씨여야지, 굳이 성이 이씨일 리도 없고.

참고로 힘센 놈이 무조건 선대조작을 한다는 주장은 이성계 여진족설 같은 불쏘시개나 뿌리는 혐한들의 개소리이다. 이성계 또한 전주 토박이 전주 이씨 분가 종친들과 만나서 대풍가를 읊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전주 이씨도 아니면서 전주 이씨를 사칭하고 장자를 음서로 관직에 진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고대 한반도에서 혈통은 그 자체가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지배층 귀족들까지 여러 두품으로 나누어서 가문별로 철저히 등급을 구별했던 신라에서 감히 누군가가 근거도 없이 자기가 진골이라고 사칭했다간 철저히 세인들의 비웃음만 샀을 것이다. 삼국 중 왕권이 가장 약했던 백제의 경우도 대성팔족의 대귀족들이 허수아비왕을 세워서 조종하는 형식을 취했지 직접 왕위를 찬탈하진 않았다. 왕(영류왕)까지 죽인 고구려의 유명한 권신 연개소문도 마찬가지로 허수아비왕(보장왕)을 세웠지 차마 찬탈은 하지 못했다. 고대사회에서 혈통이 정통성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 만약 궁예가 신라 왕족을 사칭했다거나 혹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이 떠도는 소문 정도로라도 존재했다면 신라 왕실에서 문제를 안삼았을 리가 없고 고려의 사서에도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며 견훤 역시 이걸 빌미 삼아 궁예를 강하게 공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서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고려사에선 나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공로 대부분을 왕건으로 꼽을 정도의 흑색선전을 펼친 이제현조차 궁예의 혈통에 큰 문제를 삼지 않았다.[2]

3.3. 궁예 이전 신라 왕족들의 반란과 다른 성씨들의 반란들

신라는 궁예 이전부터 이미 왕족들의 반란이 끊임없었는데 궁예와 가장 유사한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김헌창이었는데 반란 이후 궁예 못지않은 큰 땅을 가진 인물이었다. 반란을 하면서 종친들과 결탁 과정도 궁예가 김순식 등을 설득할 때와 비슷했었다. 이것의 연장선도 궁예였다. 이미 이러한 선례만 봐도 궁예가 신라왕족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게 가능할법했다.

반면 신라왕족이 아닌 다른 성씨를 가진 자들의 경우 고씨왕가의 후예인 대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보덕국조차 사라졌고, 이성계와 맞먹는 사병을 거느린 장보고 역시 반란의 낌새가 있다고 염장이 찌른 칼 한 방에 죽었고, 신라말 호족들 또한 일부는 왕을 칭하다가 궁예와 견훤 등이 빠른 진압으로 정리되었으며, 견훤 역시 경순왕을 세우고 이후 고창전투의 대패로 정통성을 크게 잃어 종친들 여럿이 항복하고 결국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붕괴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반면 왕건은 신라에게는 선양의 형식으로 물려받았고 그 이전부터 공산 전투의 치욕이 예상됨에도 신라를 도우기 위해 그러한 대패를 당할 정도로 신라로부터 정통성을 얻었어야 했다. 신라는 조선에 버금갈 정도로 왕권이 매우 강해 이사금 시절 신라왕들만 봐도 시조인 박혁거세부터 반세기 넘는 재위를 가졌는데 이는 고려나 조선은 물론 발해나 백제나 고구려의 태조나 시조보다 더 재위가 길어 신라로부터 정통성을 얻기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왕조도 1000년 가까이 지속되며 역성혁명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나라였다. 그래서 차대왕과 봉상왕과 버금가는 암군인 헌덕왕조차 18년이나 지키고 시해 등이 아닌 병사 혹은 자연사 등으로 죽으며 재위를 끝냈다. 그래서 왕족이나 종친 같은 진골출신들이 왕조를 엎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었고 왕족들 스스로가 왕조의 근간을 흔드는 반란 덕에 궁예가 이것의 연장선상이 되어 헌덕왕과 비슷한 재위기간을 가지며 삼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결국 궁예가 여러 실정으로 실각하며 왕건이 고려의 태조가 된 것이며 또한 고려는 신라의 왕위쟁탈전을 유독 부각시키며 신무왕조차 역적으로 규정했다.

4. 부정론

4.1.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

상기 긍정설에서는 '궁예는 그래도 권력에서 밀려난 경주 김씨 누군가의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석을 인정한다면 의문 하나가 또 남게 된다. 그러면 궁예는 누구의 아들이며, 왜 (권력에서 물러났을 경주 김씨 아무개가 아닌) 신라 왕의 아들이라고만 전해지고 있는가?

궁예는 태생부터 고아로서 원체 혈통을 추적할 만한 근거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진서로 인정받는 정사인 삼국사기 궁예전에도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의 아들이었으나 버려졌다'는 모호한 기록만이 전해질 뿐이며, 궁예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각 왕의 본기에는 궁예의 출생에 대해 일말의 기록조차 적혀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신라의 영토를 무려 2/3나 차지하고 신라를 매우 증오하여 멸도라고 부를 정도의 인물이 정말 신라 왕의 아들이라는 근거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인물의 아버지 되는 신라왕의 본기에 궁예의 출생 혹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일부라도 실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혈통에 대해서 사서에 이를 추적할만한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신라 왕자일 것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긍정설에서는 명주의 대호족인 순식이 귀부한 것을 두고 궁예의 신라 왕자, 혹은 왕족설을 긍정하지만 이것은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신분이 매우 중시되던 시대에도 어지러운 난세에는 의외로 신분이 높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고 세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례가 꽤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태생적인 신분이 낮거나 휘하의 세력이 빈약해도 그 사람의 인격, 능력, 용맹, 카리스마가 워낙에 대단하거나 혹은 장래성이 워낙에 뛰어나다고 판단되고, 또 그의 이런 면들 때문에 매료가 된다면 비록 신분이 높고 능력도 좋더라도 그의 밑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의외로 있다.

예를 들어 장량의 경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전국칠웅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 명문 집안 출신이었고, 본인의 능력도 워낙에 출중했지만, 미천한 농민 출신인 유방의 밑에 들어가 그의 신하로 활약했다.[3] 명책사 장량, 명재상 제갈량과 비교될 정도였던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책사 유기도 강남 한인으로 급제하기 그토록 어렵다는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한 엘리트 지식인이었음에도 비천한 농민출신이었던 홍무제를 섬겼다. 비록 궁예가 신라의 왕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순식과 그의 아버지 허월이 그의 매우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와 혁신적인 사상에 매료되고, 또 그의 장래성이 매우 기대가 되어 명주의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사에도 오늘날로 치면 세무서 공무원에 해당하여 나름대로 사회적 위치가 있었던 마태오가 일개 육체 노동자 출신인 예수의 밑에 들어가 복음서를 기록하고 순교까지 할 정도로 충직한 제자가 된 일화가 있었다.

그리고 궁예의 혈통긍정론에 따르면 궁예는 진작에 권력에서 밀려나 사실상 상놈으로 전락해버린 떨거지 출신인데, 그런 떨거지가 단지 왕족이라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더 세력을 갖추고 있었던 대호족 순식이 귀부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위 긍정론에서는 김헌창과 궁예를 비교하는데, 해당 문단에서는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을 때 여러 종친(김씨 가문)들을 포섭하였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후삼국시대에 워낙 많은 호족들이 난립하고, 그들에 대한 기록이 이름이라도 언급되면 많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사료를 뒤져 보아도 궁예에 호응한 경주 김씨 귀족들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다. 물론 궁예는 어느정도 세력이 커지자 서라벌을 멸도라고 부르고, 그곳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와 똑같이 신라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경주 김씨가 있었을 수도 있고, 오히려 '궁예가 그렇게 신라를 핍박하자 어떤 김씨가 궁예에게서 이탈하고자 했다' 라는 식의 기록이라도 있었다면 궁예가 왕족으로서 다른 경주 김씨들에게 지지를 받았다는 증거라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이 없다. 과거에는 왕순식이 경주 김씨라고 추정되었지만, 현재의 연구 결과는 순식은 단순히 호족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왕건에게 투항하며 왕씨 성을 받았을 뿐, 신라의 왕족이었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순식과 똑같이 명주 지방에서 큰 세력을 갖춘 김예라는 인물의 경우에는 김주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등에서 왕건을 지원해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을 뿐, 왕건의 집권 이전인 궁예 시대에도 궁예의 편에 섰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또한 김예가 김주원의 후손이라는 것 또한 강릉 김씨 족보 외에는 별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혈통이 의심되었던 역사적 인물의 사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한 예시로 삼국지의 유비또한, 한 황실 신분을 사칭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일부 제기되었으나, 현재에는 모두 논파된 가설에 불과하다. 유비의 경우, 유비의 아버지는 주군(州郡)에서 복무한 유홍(劉弘)이며, 할아버지는 동군범령까지 지냈던 유웅(劉雄)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유비가 노식으로부터 학문을 배울 때, 친척인 유원기라는 사람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어릴 적 유비가 '나도 황제가 타는 수레를 탈 것이다!' 라고 말했다가 또 다른 친척인 유자경이라는 사람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기록이 정사 삼국지등 사서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이미 유비의 집안은 후한 말쯤 되면 '거슬러 올라가면 한나라 황제가 있었다' 수준으로 몰락했을 뿐, 적어도 한 황실의 후손이라는 것 자체는 기록할 만한 자료가 확실했다. 그러나 궁예는, 당장 본인의 아버지가 경문왕인지, 헌안왕인지부터 확실하지 않아, '궁예의 아버지는 경문왕 또는 헌안왕이다' 라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정작 궁예보다 수백년 전에 살았던 유비의 기록이 더욱 상세한 판이다.

4.2. 당대 조상 조작의 관행

궁예가 47대 헌안왕이나 48대 경문왕서자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꽤 많다. 일단 저 두 왕이 아니라 45대 신무왕이나 46대 문성왕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천 김씨, 광산 이씨족보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물론 족보라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과장된 전승과 황당무계한 전설까지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유력 호족들은 족보 세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예를 들어 김씨박씨는 신라에만 있는, 그리고 통일신라 당대엔 중앙 귀족들의 성씨로서 일개 지방의 고구려 유민이 달고 있을 성씨가 아니지만 박직윤 같은 호족은 고구려적 정체성과 박씨 성을 모두 내세웠다. 그 외에도 김씨나 박씨를 자칭한 지방 호족, 경주에서 거리가 먼 지방의 토착민이 꽤나 많았다.

야사인 《삼국유사》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에 따르면 견훤이 진흥왕현손이라고 써 있는데, 정사인 《삼국사기》 <견훤열전>에는 견훤이 상주 출신 농민인 아자개의 아들이라는 말 외엔 신라왕실과의 연계성은 전혀 지적되지 않는다. 게다가 견훤은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전승도 있어 백제 왕실과도 연관이 있는데 이 또한 후백제를 세우면서 퍼뜨렸던 프로파간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출자가 어지럽게 전해지는 것부터가 당대에는 술작이 흔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고려 왕실도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출자가 변방민이라 그렇지 당대에는 한가닥 하는 집안으로 패서 출신 해적이었을텐데도 중국 당나라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뻔한 구라를 쳤다. 여기서 더 웃긴 점은, 고려 왕실이 자기 조상이라 말한 당나라 황실 농서 이씨도, 본래는 선비족탁발부[4] 계통이면서 자기들이 노자의 후손이라고 뻥을 쳤다는 것이다. 당나라 황실의 성은 이씨였는데, '노자'로 알려진 전설상의 인물도 이씨라고 알려져서이다.

그에 더해서 당숙종과 결혼한 자신들의 모계 조상이라는 진의라는 여자의 증조부로는 '성골장군' 호경이라는 인물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자세히 읽어보면 호경이 스스로를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했다는 것이지, 신라 왕실의 족보에 남아있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성골은 상대 신라에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최상위 왕족 이외의 의미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용어였다. 직접적으로 신라 왕의 후손을 자칭하진 않았지만 왕건도 신라 왕실의 후손이라고 생각될법한 논조의 프로파간다를 했다는 것. 당연히 그러한 기록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없고, 그냥 세력가들이 자기 혈통을 신라 왕가에 갖다붙이는 게 그 때 트렌드였구나, 하면 되는 것들이다. 궁예의 혈통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궁예의) 아버지가 확실히 누구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헌안왕의 아들이냐, 경문왕의 아들이냐 하는 것은 일부의 학자들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당대의 인물에 관한 출생 기록들이 대부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상대의 하나였던 진훤은 농부의 아들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법흥왕의 후손으로 나와있다. 왕건도 증조부가 당나라 숙종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등, 당시의 가문에 관한 기술들은 인정하기 어렵다. (추만호, <궁예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역사와 역사교육》 제2호, 1997.)

더군다나 아예 처음부터 고아였던 궁예의 경우처럼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우기는 경우라면? 궁예전의 기록과 같은 일이 실재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왕후나 정식으로 들인 후궁의 아이를 그런 식으로 토스했을 리는 없으니 궁예의 '친모'는 그다지 귀하지 않은 신분의 정부(情婦)일 텐데, 설령 그때까지 살아있어서 증언을 해 준다고 해도 궁예가 한창 내가 누구 아들이오 하고 떠벌리고 다녔을 당시(890년대 - 910년대), 친부로 궁예가 주장한 헌안왕 또는 경문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정적으로 궁예가 태어났을 즈음에 어느 사가에서 왕의 아이가 태어났고 또 버려졌음이 확인되었다고 해도 이 아이가 그 아이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친모'가 '유모'와 함께, 한쪽 눈을 못 뜨는 갓난 아기를 안은 사진이라도 찍어 두진 않았던 이상 말이다.
(가1)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或云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중략)

그리고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에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아진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궁예가 헌안왕경문왕 중 누구의 아들인지 확정하지 못했던 것((가1))이나 《삼국사기》 <본기>에 궁예의 출생에 관한 기사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약 (가1)에 나오는 바와 같은 왕자가 實在하였다고 하더라도 장성한 애꾸눈의 궁예가 과연 그 왕자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제 궁예왕자설은 일정한 목적하에 궁예와 그 측근들이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趙仁成, 弓裔의 出生과 成長, 《東亞硏究》 제17집, 1989.)

4.2.1. 족보를 조작하더라도 반발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

상기 옹호론에서는 감히 왕실을 사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지적하고 있다. 이 논리는 물론 매우 타당하다. 국가의 권위가 나름 유지되고 있는 때라면 말이다. 그러나 궁예는 국가의 내적 통치력이 유지되고 있던 시기의 사람이 아니다. 궁예 이전에 이미 기훤이니 양길이니 하는 도적떼들이 신라 땅 상당수를 점유하고 사실상 독립국 행세를 하는데 신라 왕조는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후고구려가 건국되기 8년 전에 이미 견훤이 '참람하게도' 대놓고 왕을 자청하고 백제의 후계자를 자처함에도 신라는 무력하게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가 자기가 신라 왕족임을 사칭한다 하더라도 신라에서 이를 반발하기 쉽지가 않다.

어차피 궁예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신라는 수많은 군벌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궁예는 그런 개판이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양길의 부하를 거쳐 독립세력의 수장이 된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나는 신라 왕자다!' 라고 하더라도, 그 궁예를 진압할 능력이 없는데 괜히 '신라 왕족을 사칭하는 미친놈!'이라고 비난해 봐야 괜히 궁예의 분노를 사서 더 얻어맞기만 할 수 있으니 침묵했다고 보면 해석이 맞는다.

사례를 모아 보면 태조 왕건 또한 자기가 신라의 성골 호경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이것 또한 뻥일 가능성이 큰데, '왕건의 조상 호경'이 뻥인 것과, '궁예의 아버지 경문왕, 또는 헌안왕'은 동일한 수준의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왕가의 지위만 잃었을 뿐 명백히 살아 있는 경주 김씨들이 '왕건의 신라 왕족 사칭'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씨 가문이 경주 김씨의 방계라고 주장하는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궁예를 신라 왕족이라고 믿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다못해 왕건 가문을 '그래도 왕건도 왕실에서 밀려난 경주 김씨의 어딘가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잣대를 궁예에게도 똑같이 대볼 수 있다.

4.2.2. 궁예라는 인물의 비합리성

'감히 왕족의 족보를 사칭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냐?' 라고 하는데, 합리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역사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또는 '미친짓', '판을 그르친 오판' 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비합리적 결정 등이 넘쳐난다. 그리고 현 구성원이 생존해 있는 왕가를 사칭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전례가 없지 않다. 심지어 역사의 사례를 보면 실제 후손이나 친척이 살아 있는 가문의 일원을 사칭한 사례도 있다. 바로 중국 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이다.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진승은 자기가 진시황의 아들 부소라고 뻥을 쳤고, 오광은 자신이 항연의 후손이라고 뻥을 쳤다. 심지어 그 시기에는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호해와 부소의 죽음을 증언할 진나라의 고위층들이 살아 있었고, 항연의 후손인 항량항우가 버젓이 살아 있었던 때인데도 말이다. 까놓고 말해 궁예와 진승, 오광은 그렇게 다른 인물도 아니다. 그나마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아직 진나라에 여력이 있어서 장한이 금세 진압해버렸지만, 궁예는 자기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대두되기 이전에 수많은 군벌들이 신라를 반쯤 박살내놓고 남은 여력을 빼앗아버린 상태에서 본격적인 행보를 밟았을 뿐이다.

또한 태봉 말년에 궁예가 당대의 이름난 고승인 석총을 때려죽여 불교 교단과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는 행위, 스스로의 왕비와 자식들까지 때려죽이며 공포정치를 벌인 행위, 대놓고 미륵불을 자청하며 스스로 사이비 경전을 쓰는 행위 등은 아무리 좋게좋게 보더라도 도무지 합리적 행위라고 볼 수 없다. 합리적 차원에선 모두 궁예 자신의 지지를 깎아먹고 공포를 느낀 불만계층을 양성하여 결국 왕건의 쿠데타로 귀결된 행위기 때문이다. 이렇게 궁예라는 인물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정신나간 광증을 보인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자기 스스로가 신라 왕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뻥을 쳤다고 보는 것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4.3. 궁예 설화의 허위성

궁예 출생·성장담의 내적인 구조만 살펴 봐도 궁예 신라 왕자설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서, 궁예가 왕의 아들임을 증언해 주는 인물은 오직 궁예의 어머니 한 명 뿐이다. 유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궁예는 이 사람에게 출생의 비밀을 들은 후에도 어머니라고 부른다. 애초에 궁예의 어머니로 거론되기도 하는 장보고의 딸 역시 장보고가 염장에 암살되어 가문이 몰락한데다 신라 기준으로는 평민이었으므로 별도의 유모를 고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유리명왕의 것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해당 설화에서 어머니는 궁예가 신라 왕자라는 어떠한 물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설화에 가까운 야사에 불과하지만, 갑자사화 때는 피 묻은 적삼이 근거로 제시되기라고 했다.

그 다음도 이상하다. 궁예가 그런 말을 듣고 한 일은 승려가 되겠다며 집에서 나가 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물러나서 보게 되면 더 기막힌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어머니는 그렇게 기른 자식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기록에서 퇴장한다. 반면에 궁예는 일국의 군주가 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출생담을 세상에 알린 이는 누구라고 봐야 하는가? 당연히 궁예 본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과연 이러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 신뢰성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애당초 궁예전의 설화 자체가 개연성이 결여된 부분이 많다. 귀하디 귀한 임금의 자녀를 일관 따위가 내치자고 건의하고, 국왕이란 양반이 몇 가지 불길한 징조만으로 아직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갓난아이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은 아무리 고대 사회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가운데 아이가 중오일(重午日) 즉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으니 불길하다고 하는 것은 맹상군의 고사로서 당대에도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을텐데 말이다.

만에 하나 궁예가 진짜 신라의 왕자라고 해도 궁예전에 쓰여 있는 어린 시절 얘기는 허구로 보는 게 현명하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주인공의 미래에 대한 복선(태어날 때 나타난 불길한 징조, 비행 청소년이었던 어린 시절), 시점의 전지성(당사자들이 밝히기 꺼렸을, 일관이 헌안왕에게 한 경고나 유모가 눈을 찔러서 궁예가 애꾸가 된 사실 등을 기록자가 아는 것), 극적인 전환(왕자가 한 순간에 평민으로 전락함, 정체성을 깨닫게 된 아이가 집을 떠나 세상에 나오게 됨) 등 소설적 기법들이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

가령 임용한의 경우에도, 궁예의 신라 왕족 혈통 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적은 없으나, 적어도 '궁예설화 만큼은 상당한 허구' 라고 주장한다. 내용이 엉성하며 너무 작위적이라는 것. 아이를 죽이겠다고 높은 곳에서 떨어트렸는데, 정작 그 아이가 떨어져 죽었는지 시체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 유모는 한 눈이 찔려 피 흘리고 울부짖는 아이를 들고 궁궐에서 도망치는 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아무리 신라 말기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지만, 궁궐에서 고작 여자와 애꾸 갓난아이 하나조차도 도망치는 걸 못 막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를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내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 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귾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칼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은 논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요약하자면

4.4. 고려 왕조의 입장

왕건의 고려는 태봉을 멸망시키고 건국된 나라이기에 궁예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으니, 자칭 미륵이라고 하는 애꾸눈의 임금이 진짜 신라 왕자가 아니었다면 이를 문제삼지 않았을 리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고려 입장에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이어야만 했다.

왜나하면 고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바로 넘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옛 사로국 수준으로 전락한 신라를 인수했다고 해서, 신라가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의 전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왕건이 신검을 물리치고 후백제의 영토와 인민을 흡수했다고 해서 그 나라가 고려의 전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고려의 직접적인 전신은 어디까지나 궁예의 태봉 왕조였다. 그러니 고려 입장에서는 태봉이 반드시 정통성 있는 왕조이어야만 했다. 물론 설화를 믿는다 해도 궁예는 당대 신라 왕실에겐 한참 방계였으며 애초에 직계 신라 왕실부터가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완전한 정통성을 세우기엔 좀 무리가 많았을 것이다. 아무리 왕족 출신이라 해도 김헌창의 난의 경우처럼 본국이 멀쩡히 있는데도 아예 따로 나라를 세우는 건 역시 역적질이 되기 때문. 게다가 당대에는 중앙에서 배제되어 몰락한 진골 출신들이 현실 권력을 따라 혈통상으론 한참 아래인 호족들의 신하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궁예는 이미 큰 세력을 갖춘 국왕이었으니 태봉 왕조의 권위를 세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사마씨의 서진이, 후한이 무너진 후 정립한 삼국 중에서 정통으로 인정한 나라는 한 황실의 후손이 세운 촉한이 아니라 자신이 타도한 전 왕조인 조위였다. 조선 역시 말기의 임금을 가짜로 깎아 내리긴 했어도 고려의 왕씨 왕조 자체를 가짜 왕조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훗날의 명나라조차 몽골족이라면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도 공식적으론 원의 천명을 명이 이었다고 주장했다(북원이 멀쩡히 있는데도!).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가 스스로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그 전신인 태봉부터가 정통성을 가진 왕조여야 했고, 그렇게 내세우기에는 그 나라의 건국자인 궁예가 신라 왕족이라는 것만한 게 없었다. 고려로서는 궁예가 '내가 경문왕, 헌안왕의 아들이요' 하고 떠들고 다녔던 게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들대로 태봉의 임금이 신라에 대해 서라벌을 멸도라고 부르고 그 나라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빠짐 없이 몰살하거나 신라 왕의 초상에 칼질을 하여 흉터를 남기는 등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고려로서는 궁예가 신라 왕자인 것이 정통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더 유리했다. 그렇다면 궁예는 신라 왕자로서 모국이었던 신라를 핍박한 불효, 불충한 인물이자 패륜을 저지른 인물이 되므로 정변의 명분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담은 할머니가 신라 왕가 출신인 신성왕후였던 현종의 가계가 대대로 이어지며 많이 덜어졌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고려 초기의 지식인들로서는 꽤나 신경쓰이는 문제였을 것이다. 당대의 금석문에서도 그와 같은 고민의 일단이 드러난다.
于時羅運傾否, 兵火頻起, 弓裔亂紀, 甄萱盗名, 天命有歸, 國朝新造...
이때부터 신라의 국운이 쇠퇴해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고 궁예는 기강을 어지럽히며 견훤이름을 훔쳤는데, 천명이 다시 돌아오고 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져서...
大安寺廣慈大師碑 (950년)
광종 대에 세워진 이 비문에서 찬자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야기하며 그 주범으로 태봉의 궁예와 후백제견훤을 소환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혐의는 같지 않았다. 비문에 따르면 견훤의 잘못은 '이름을 훔친 것'이다. 여기서 '이름'이란 말할 것도 없이 '왕이라는 이름[王號]'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견훤의 죄는 임금을 참칭한 것, 즉 역적질을 한 것이다. 왕을 참칭한 것은 궁예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그러나 비문이 지적한 궁예의 죄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기강을 어지럽힌 것', 즉 정치를 잘못한 것이다. 혼군일지언정 역적, 가짜 임금은 아닌 것이다.

고려의 문인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궁예가 가짜 왕족 출신이라면 그 왕위를 찬탈한 왕건은 그저 찬탈자가 될뿐이다. 또 그 전에, 신라 영토 2/3를 점유한 궁예가 왕위 계승권 같은 것과 완전히 무관한 한낱 도적떼 두목에 불과했다면, 왕건이 그런 자에게 고개 숙이고 들어간 일은 역적질에 동참한 거밖에 안 된다. 당연히 고려인들은 자기 나라의 창업 군주를 역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중략) 故弓裔見棄於其臣...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중략)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보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론이 딱 그런 논지다.

여담으로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왕족 또는 왕자라는 추정이 있었던 궁예가 경문왕의 아들이자 신라의 왕자로 묘사된다.

[1] 다만 안동권씨는 신라 경주 김씨에서 분적한 것이 맞다.[2] 정작 왕건은 궁예의 실각 이후 팔공산 전투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현재도 런건이라 조롱당하며 고창 전투 전까지 궁예가 차지한 땅조차도 지키기 매우 힘들었다.[3] 다만 장량의 원래 목표는 전국칠웅 한나라의 부활이었고 유방과는 우연히 만나 뜻이 잘맞았지만 그의 주군은 한왕 성이었기에 홍문연 이후 촉으로 가는 유방을 따라가지 않았다가 한왕 성이 항우에게 제거되자 탈출해서 유방을 주군으로 모시기 시작했다.[4] 선비족 중에서 가장 융성했던 씨족으로 한때 흉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가장 융성했던 것으로 보아 토착 지배층 세력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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