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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1:03:28

코무로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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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로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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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tsuya Komuro
파일:komuro_profile.webp
출생 <colbgcolor=#ffffff,#1f2023>1958년 11월 27일 ([age(1958-11-27)]세)
도쿄도 후추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가수, 작곡가, 사업가, 음악 프로듀서
학력 와세다대학 사회과학부 (중퇴)
소속사
[ 펼치기 · 접기 ]
Jun & Kei (1975~1994)
Office TIMEMACHINE (1975~1994)
Opera Gig (1992~1994)
Antinos Management (1992~2000)
TK state (1993~2000)
Rojam Entertainment (1998~2004)
요시모토 흥업 (2001~2007)
Tribal Kicks (2004~2007)
TKCOM (2007~2008)
에이벡스 매니지먼트 (2009~2018)[1]
a nine (2009~2018)
Pavilions Tetsuya Komuro (2021~)
활동 1975년 ~ 현재[2][3]
애칭 텟쨩, 테츠, 코무로, TK[4]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약력
2.1. 1958년 ~ 1983년2.2. 1984년 ~ 1986년2.3. 1987년 ~ 1992년2.4. 1993년 ~ 1998년2.5. 1999년 ~ 2002년2.6. 2003년 ~ 2009년2.7. 2010년 ~ 2017년2.8. 2018년 ~ 2019년2.9. 2020년 ~ 현재
3. 음악성4. 영향력5. 장비6. 개인사7. 기타8. 관련 가수/아티스트
8.1. 코무로 패밀리8.2. 주요 악곡 제공 아티스트8.3. 프로젝트 그룹
9. 관련 작사가/작곡가10. 대표작11. 디스코그래피
11.1. 솔로 음반11.2.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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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무로 테츠야 군은 일본인의 귀를 교육시켰다.
(「小室哲哉君は日本人の耳を教育した」)"
- 일본 음악계의 전설, 사카모토 류이치.

일본가수, 음악 프로듀서, 작사가, 작곡가, 편집자, 키보디스트, DJ 등 수많은 이력을 가진 음악가. 일본 대중음악계의 거물이자, 1990년대 J-POP지휘자라고 불린다.

스스로 레이블을 세워 여러가지 음악 장르를 두루 시도하고 일본 음악계 트렌드 자체를 주도하며 1990년대 중반 일본 전역에 코무로붐을 일으켰던 전설적인 프로듀서이다. 코무로가 작사, 작곡, 프로듀스한 음반들의 총 판매량은 1억 7천만여 장에 달한다. 2020년 기준 역대 일본 작곡가 싱글 판매량 2위를 차지하고 있다. #

잘 나가던 시절에는 페라리 마니아로,[5] 색깔만 다른 페라리 여러 대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했었고 수많은 여자 연예인들과 염문설을 뿌리기도 했었다.

2. 약력

2.1. 1958년 ~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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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은 시절.

3살 때부터 도쿄예술대학 교수로부터 가정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으며 초등학교 때 클래식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커다란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가 구입한 엘렉톤을 만지게 된 것이 건반 악기를 처음 접한 계기였고 1970 오사카 엑스포에서 전시된 신시사이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전자악기를 이용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집에서 가지고 있던 기타, 바이올린, 엘렉톤을 맘대로 팔아서 당시 16만 엔 이상의 고가였던 신디사이저(Roland SH-1000)를 구입했다는 것으로 보면, 집안도 음악에 뜻을 둔 부유한 가정이었던 걸로 보인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 때 50분 안에 16소절을 악보에 쓰는 시험이 있었는데, 교사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이 중에서 굉장히 잘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그 곡을 선생님과 다른 학우가 피아노리코더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코무로가 만든 악보였다. 당시엔 눈에 띄는 게 싫어 굉장히 싫었던 경험이나 스스로에 대해 자신은 있었다고 말할 만큼, 부모님과 주변 선생님들마저 놀라게 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큰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16세의 나이에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으로 다음 해 프로 뮤지션으로 데뷔하여 하쿠류[6], 하라다 신지 등의 백밴드를 경험하였다. 1978년 와세다대학 사회과학부로 진학한 뒤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은 주위에서도 기대받아 다른 학우들의 과제를 대신 떠맡기도 했다고 한다. 대학 재학중에 수많은 서양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프로 뮤지션으로써의 활동을 시작, 음악 활동을 위해 5년간 재학했던 와세다대학을 자퇴한다.

2.2. 1984년 ~ 1986년

대학을 중퇴한 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러 밴드를 결성하고 해산하다가, 'SPEEDWAY'라는 밴드의 멤버였던 우츠노미야 타카시(보컬), 키네 나오토(기타)와 함께 1984년 TM NETWORK를 결성. 초창기에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아류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 록 음악전자음악을 결합한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80년대 아이돌 전성기 시절 작곡한 곡들.

1984년 음악 활동으로 알게 된 주변 아티스트들의 추천 및 "가끔은 다른 사람의 곡을 만들어보는 것도 공부가 될 것이다"라고 등을 밀어준 소설가 콘노 사토시 덕에 작곡가로써 첫 메이저 작품인 오카다 유키코十月の人魚 수록곡 작업을 시작으로, 아이돌 붐이 성행한 1980년대에는 미야자와 리에, 마츠다 세이코 등 당대 다수의 아이돌에게 곡을 제공했다. 코무로가 처음으로 일류 음악가 반열에 오른 것은 1986년 와타나베 미사토의 'My Revolution'. 이 곡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 작곡상을 수상하며 작곡가로써 크게 활약하였다.

2.3. 1987년 ~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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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 NETWORK
왼쪽부터 키네 나오토, 우츠노미야 타카시, 코무로 테츠야
TM 시절의 대표적인 두 히트곡, 'Get Wild'와 'Self Control'.

1987년에는 TM NETWORK로 발표한 애니메이션 시티헌터의 주제가 'Get Wild'가 일약 대히트하며 인기 뮤지션으로 발돋움한다. 이후로도 (Get Wild 이전에 발매한) 'Self Control', 'SEVEN DAYS WAR', 'Still Love Her', 등 명곡을 쏟아내면서 존재감을 굳건히 한다. 물론 TM NETWORK의 성공에는 같은 멤버인 우츠노미야와 키네의 공헌도 상당히 컸고, 당시에는 코무로만이 주목을 받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1994년 TM NETWORK의 마지막 라이브인 '5.18 Last Groove'에 현 B'z기타리스트 마츠모토 타카히로를 출연시킨 적도 있다. 마츠모토 타카히로는 TM NETWORK 초창기 레코딩과 라이브 서포트 멤버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B'z 데뷔 당시에도 TM 활동을 병행하기도 했고 B'z로서 라이브 게스트로 서기도 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TM NETWORK 멤버들과는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마지막 라이브 뿐만 아니라 2004년에 열린 'TM NETWORK 더블 디케이드 투어' 때도 우정출연했다.
1988년엔 작곡 활동을 위해 영국런던으로 주거지를 옮겨 반년 간 체류, 그 시기 발매된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의 엔딩 곡 'BEYOND THE TIME ~뫼비우스의 우주를 넘어서(メビウスの宇宙を越えて)~'는 당시 애니메이션 관련 음반 순위를 석권, 이 곡은 현재까지도 건담 시리즈 팬들을 넘어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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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솔로 데뷔 앨범인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앨범의 자켓.
솔로 앨범으로 발매한 히트곡 'RUNNING TO HORIZON'.

1989년 싱어송라이터로 솔로 데뷔한 그가 발매한 'RUNNING TO HORIZON'[7], 'GRAVITY OF LOVE'[8]오리콘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개인 활동을 늘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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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X JAPAN드러머 Yoshiki와의 합작 유닛 V2로도 활동하던 시기.
1991년 연말~1992년 초에는 X JAPAN드러머 Yoshiki와의 합작 유닛 V2로도 활동했었다. 포지션은 신디사이저&피아노&보컬.

1990년대에 이르러 TMN[9]은 앨범마다 오리콘 차트 1위를 찍으며 50만 장씩[10] 판매할 정도로 성공했지만, "TM의 곡은 초회 발매분은 잘 팔려도 이월 주문이 발생하지 않으니 곡이 팬들 이외에는 유명해지지 않는다" 라는 당시 신생 회사였던 AVEX의 마츠우라 마사토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베이스 중 하나인 댄스 뮤직이 고정팬들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에게 유명해질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며 DJ 활동을 겸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중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스튜디오에서 작업 활동을 하는 등의 고뇌에 빠졌다. 그러던 중 런던 체류 경험과 댄스 뮤직에 대한 관심을 살려 본격적으로 음악 프로듀서로서의 길에 들어서고자 1994년 TMN은 활동 중지에 들어갔다.

2.4. 1993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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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로 붐 시절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히트곡들.

TMN 해산 이후 1993년 말부터 개인용 스튜디오를 3채[11]나 세우고 믹싱 스탭들을 런던 등의 해외로 보낸 뒤 언제 누구와도 작업이 가능하게끔 환경을 정비하고 작곡에 밤을 새는 등 철저하게 제작 활동을 시작한 코무로 테츠야는 본격적으로 본인의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1993년 그가 프로듀싱한 에이벡스 1호 혼성 그룹 TRF가 'EZ DO DANCE'를 히트시킨 것을 시작으로, 1994년에는 솔로 여가수 시노하라 료코가 '恋しさとせつなさと心強さと'로 여성 솔로 최초 2밀리언을 기록하였고 솔로 여가수들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지기 시작한 1995년에는 아무로 나미에카하라 토모미가 그야말로 폭발적인 사회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히트하여 당시 여성들의 우상으로 단숨에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지원을 받은 소속사 에이벡스로부터 확실히 히트해야 한다라는 오더를 받고 직접 멤버로 참여하여 시작한 그룹 globe는 진짜로 히트하여 최초로 앨범 판매량 400만 장을 넘겼다. 코무로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 앨범에 대해 "제 음악 활동 중에서 얻은 모든 것을 투입했습니다. 처음 0초부터 57분 03초까지 앨범의 어디를 잘라내어 들려주더라도 부끄러운 곳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90년대 중반 수많은 밀리언 셀러 및 히트를 시켜 코무로 사운드라는 단어를 탄생시켰고 그야말로 코무로 붐을 일으켜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다는 '사회 현상'을 만들어내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곡이 4년 연속으로 레코드 대상을 독점하고 1996년에는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에 프로듀스 곡이 톱5을 독점하는가 하면, 1997년에는 세금만 11억 7천만엔을 내고 고액 납세자 전국 4위에 이르렀다. 이 시기 코무로 테츠야가 프로듀스한 음반의 총 판매량은 1억 7천만 장에 이른다. 그가 프로듀스하는 아티스트들을 통틀어 '코무로(속칭 TK) 패밀리', '코무로계'라고 불렀다. 코무로 붐이 종막으로 달려갈 때쯤인 1998년 데뷔한 tohko, 미쿠 레이카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같은 해 데뷔시킨 스즈키 아미는 한때 하마사키 아유미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2장의 밀리언 앨범을 달성하였다.

이 시기 코무로는 일본 대중음악계의 대표주자로서 세계에서 활약하였다. 1998년 전자음악계의 거장 "장 미셸 자르"와 함께 프랑스 월드컵을 기념해 "Together Now"라는 곡을 공동으로 작곡하였고 폐막식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자르와 함께 에펠 탑에서 열어 나중에 Electronic Night라는 이름으로 실황음반과 DVD를 발매하였다. 또한 양자의 스케줄 문제로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마이클 잭슨과의 공동 작업/공동 공연을 타진하였고,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영화 산드라 블록의 'SPEED 2'의 메인테마와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루퍼트 머독과 합작한 기업 'TK NEWS'를 설립, 중화권에서도 음악 사업을 전개하여 대만에서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가수 Ring이 대만 차트에서 4주간 1위하는 성과를 내었다.

이 시기의 코무로는 스스로 "당시엔 주로 80점~90점의 곡을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쫓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빨리 이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싶은 것과 일본 시장이 차이가 났었기 때문에 이 시기가 끝나서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자신의 시대를 하나의 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90년대를 회상하며 "4일에 1곡을 작곡했었다", "수많은 기록들이 기쁘지 않은건 아니었으나 전혀 실감되지 않았다", "돈을 스스로가 얼마만큼이나 썼는지 몰랐었다. 완전히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고 얘기했다.

이후 코무로 패밀리의 가수들이 활동을 축소하고 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 MISIA, 시이나 링고 등이 떠오르는 등 복합적 요인에 따라 코무로 붐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하였다. 코무로 붐의 종막에 대해서는 "그건 자연스레 왔었죠. 제 안에선 우타다 히카루씨가 나왔을 때 '새로운 시대가 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라고 얘기하였다.

2.5. 1999년 ~ 2002년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코무로 작품.

코무로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R&B, 트랜스,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R&B 장르로 프로듀스한 Kiss Destination의 'Girls, be ambitious!'는 30만 장을 판매하였고, 트랜스를 시도한 globe의 Lights 더블 앨범은 두 장 합쳐서 40만장을 판매하며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전의 붐 시대만큼은 못 미치는 결과였고 대중적 인기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또한 2000년2002년 사이 'orumok' 레이블을 통해 사카구치 미오, MIYUKI[12], Female non Fiction, R9 등의 유닛을 프로듀스했으나 전부 1~2장의 싱글만 남기고 사라졌다. 붐이 컸던 만큼 그에 대한 반발심과 반작용도 컸고 그에 따라 하락세도 엄청난 속도로 찾아왔다.

2000년을 끝으로 아무로 나미에가 코무로를 벗어나 힙합/R&B 등 블랙 뮤직으로 이행하였고,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가수 중 마지막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스즈키 아미도 같은 해 소속사 문제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globe처럼 본인이 멤버로 참여하며 야심차게 준비한 Kiss Destination은 초반에는 반응이 있었지만 가면 갈수록 반응이 미미해져갔다. 흔적만 남아있던 코무로의 영향력은 이 해를 끝으로 완전히 없어졌다. 2001년에는 소니 뮤직과의 프로듀서 계약이 해지되면서 18억 엔의 선착수금을 반환해야 했다. 실질적으로 2000~2002년 사이에 이렇다 할 결과물은 아무로 나미에의 'NEVER END', globe의 'Lights' 더블 앨범, song+nation, 그리고 Kiss Destination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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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적인 면으로는, 잘생긴 외모로 여성 편력도 화려해 80년대 초중반 '키라라와 우라라'라는 듀오 아이돌로 활동했던 오오야 카나코와 1988년에 한번 결혼한 적이 있으며, 4년간의 결혼 생활 후 합의 이혼 후 코무로붐과 함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카하라 토모미와의 열애를 시작한다.(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결별 후, 2001년 Kiss Destination의 보컬 ASAMI와 결혼하여 딸을 1명 두었으나 결혼 10개월 만에 이혼하였고 그리고 몇 개월 뒤 globe의 멤버였던 KEIKO와 결혼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때 ASAMI와 혼인 상태에서 KEIKO와 불륜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고 실제로 ASAMI가 이를 언급하였다. ASAMI와 이혼 뒤 합의한 위자료 7억 엔을 한 번에 내지 못하여 분납하기로 했으나 그 돈도 자금 악화로 2004년까지 밀려있었다.

코무로는 이때 에이벡스, 소니 뮤직과 사이가 틀어졌었는데(아래 '영향력' 문단 참고), 그 때문인지 본인의 사업에 매진하였다. TK NEWS에서 루퍼트 머독이 발을 빼고 난 후, 사명을 'Rojam'으로 바꾸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사업 및 해외 진출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고, 만회를 위해 무리해서 주식시장 상장을 했다가 IT 버블의 붕괴와 함께 주가가 폭락하면서 그만큼이 전부 코무로의 손실되었다. 이때의 손실액은 총 70억 엔으로 추산된다. 연쇄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 그는 소유하고 있던 고급 승용차와 크루저, 별장 등을 팔아야 했다. 즉, 코무로에게 2000년~2002년은 음악, 사업, 개인사 모든 면에서 실패를 거듭한 시기였다.

2.6. 2003년 ~ 2009년

2003년에 이르자 코무로가 프로듀서로서 관여하는 아티스트는 한 팀도 없게 되었다. ASAMI와의 이혼으로 Kiss Destination도 자연히 해체하면서 2003년부터 globeTM NETWORK의 활동에 집중한다. globe는 Lights 앨범의 성공에 힘 입어 X JAPAN의 드러머 Yoshiki를 영입하고[13] 도쿄 돔 공연, 한국 공연 등을 추진했지만 공연들은 판매 부진, SARS 등의 이유로 취소되었고 Yoshiki의 globe 활동도 흐지부지 끝났다.

기획사였던 Rojam Entertainment가 일본의 코미디언 전속 소속사인 요시모토 흥업에 매각되면서 코무로도 2000년대 중반 한동안 요시모토와 연을 맺었다. 그래서 이 시기 개그맨(게닌)들에게 곡을 준 적도 있다.[14] 한편 당시 런던 하츠 등에 자주 나오던 여성 방송인 아오타 노리코에게 곡을 주기도 하였다. 런던하츠 방송의 기획이었으며 전성기 당시 써놨다가 미발표했던 곡에 가사로는 버블 아오타의 유행어 '지저스'를 붙여서 발표하였다. 2007년에는 호스트바 호스트들로 이루어진 REAL이라는 그룹에 곡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기행 내지 이벤트성 기획들 외에 2004년~2008년 사이에 제대로 된 음악 활동으로는 TM NETWORKglobe가 각각 앨범 2장을 발표하였고, KEIKO의 솔로 앨범을 프로듀스하였다. 코무로 개인으로서는 앰비언트 음악 시리즈인 'Far Eastern Wind' 4연작을 발표하였고, DJTK, TKCOM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큰 반향은 없었지만 이미 이룰 것을 다 이룬 음악가로서는 취미 내지 팬 서비스로서는 의미 있는 활동들이었다. 문제는 이때 코무로는 빚더미에 앉아있었고, 이 활동들로 코무로의 재정 상황이 호전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 코무로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소니 뮤직에 선착수금을 반환하기 위해 빌려 쓴 은행빚에 더해, 전 부인 asami에게 주어야 할 위자료를 완전히 갚지 못하여 코무로에게 들어오는 저작권료가 전부 asami에게 위자료 및 양육비로 차압당하였다. 당장 현금이 딸리는 상황에서도 코무로는 KEIKO에게 고가의 선물을 사주는 등[15]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고, 결국 사금융에 손을 댈 정도로 자금난에 시달린 코무로는 우선 사금융에서 빌린 돈부터 해결하려는 요량으로 2006년에 한 개인 투자가에게 자신의 곡 806곡의 저작권을 10억엔에 양도하기로 하여 피해자로부터 5억엔을 선금으로 받았다. 그러나 이 곡들의 실제 저작권은 이미 양도되어 있어 코무로가 저작권을 양도할 수가 없었다. 즉 이중 양도를 통한 사기였다. 이에 이 개인 투자가는 2008년 11월 코무로를 사기 혐의로 고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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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당시 저작권 사기 혐의로 자택에서 연행당하는 장면.

작곡가, 작사가 등은 계약과 동시에 '음악 출판사'에 음원의 저작권을 양도하고 관리를 맡기는 것이 음악계의 관례이다. 코무로 악곡은 대부분 저작권이 바닝 계열, 라이징 계열, 에이벡스 계열의 음악 출판사에 양도된 상태였다. 양도라고 해서 그냥 넘겨주는 것이 아니고 음악 출판사에서 저작권료를 정산해서 권리자에게 지급하지만, 이때 코무로의 저작권료는 전처 asami에 대한 위자료와 양육비로 전부 차압되고 있었다. 이게 와전되어 코무로에게 저작권료가 아예 한 푼도 안 들어갔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들어오는 저작권료가 차압당했을 뿐이다. 만약 이혼 건이 겹치지 않았다면 충분히 저작권료로 빚도 갚고 생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코무로는 2019년 시점에서도 저작권료로만 연 1억엔을 벌었는데 2008년 당시 코무로의 연 저작권료가 1억엔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작권을 양도한 대신 이미 저작권료를 정산받고 있으면서도 이중으로 양도하려 한 것이니 고의적 사기에 해당한다. 이는 업계인만이 할 수 있는 악질적인 사기라고 할 수 있는데, 업계인이 아닌 일반인이 저작권에 관한 복잡한 시스템을 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예인들이 흔히 연루되는 자신은 명의를 빌려주었는데 알고보니~ 식의 다소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닌 그냥 뼈까지 발라먹기 위한 계획적 사기였던 것이다. 실제로 사건 관련 보도가 나가자 일반 대중들은 "왜 코무로 곡의 저작권이 다른 회사에 양도되어 있는가", "코무로가 저작권을 부당하게 뺏겼던 게 아닌가"라는 오해를 했다. 참고로 음악 출판사는 대부분의 주요 음악 시장에 있는 개념이지만 한국 음악 시장에는 아예 없다.[16]

이 사기 사건은 코무로의 단독 범행은 아니고 공범이 있다. Tribal Kicks라는 회사는 코무로 테츠야가 개최하는 이벤트를 기획/운영하기 위해 설립되었는데, 이 회사의 사장 히라네 아키히코(平根昭彦)는 코무로의 연대 보증인으로 등록되어 있었고, 감사역 키무라 타카시(木村隆)는 코무로에게 1억 엔 이상의 돈을 빌려준 바 있다. 코무로가 파산하면 이들도 함께 재정 파탄에 빠질 것은 분명하므로 이 사기 사건을 공모한 것. 실제로 문제의 개인투자자를 코무로에게 소개한 것이 키무라였고, 코무로가 편취한 5억 엔 중 1.5억 엔은 키무라의 채무를 변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두 사람도 코무로가 체포된 후 함께 체포되었으며, 후에 코무로와 마찬가지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일본 언론들이 주요 뉴스로 연일 기사가 낼 만큼 큰 사건이 되었다. 코무로의 신뢰와 명성은 곤두박질쳤고 80~90년대 코무로의 음악을 듣고 자랐던 일본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체포 소식이 보도된 후 그의 모든 곡이 텔레비전라디오에서 한때 금지당했고 CD 판매까지 금지당했으며 매스컴과 음악계에서도 코무로를 악질 사기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안 된 시기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아내인 KEIKO와 함께 쓸쓸하게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코무로의 모습이 비춰서 과거의 화려했던 명성도 빚 앞에선 부질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과거 돈을 펑펑 쓰던 화려한 생활으로 유명했던 그의 통장엔 돈이 6,259엔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17]

2009년 5월 11일, 오사카 재판부로부터 징역 5년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을 선고받았다. 6억 5천만엔이라는 꽤나 부담스러운 액수의 추징금이 남아 있었으나 90년대 초반 프로듀서를 시작할 당시부터 연을 이어온 현 AVEX의 사장인 마츠우라 마사토(MAX 마츠우라)가 사비로 전액 변제해줬다. 90년대 후반 잠시 관계가 나빠지기는 했지만, 코무로와 마츠우라는 AVEX 창립 초기부터 공, 사적으로 파트너로서 함께 활동한 사이다. 초창기 유럽 클럽 음악을 수입해서 팔던 레코드상에 지나지 않았던 에이벡스가 대형 기획사이자 음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TRF, 아무로 나미에, globe 등이 히트한 덕분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지원해줄 수 있었던 것. 마츠우라는 변제 의사를 밝힌 후 법정에서 "코무로가 없었으면 ELT, EXILE, 하마사키 아유미, 코다 쿠미 등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선처를 탄원했다.

2.7. 2010년 ~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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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우라 사장의 금전적 지원과 지속적인 팬들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2009년 'a-nation09'에 globe의 멤버로써 출연, 팬들에게 사죄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며 활동을 재개하였다. 2010년 5월 혼성 그룹 AAA의 'Dream After Dream ~꿈으로부터 깨어난 꿈~/만나고 싶은 이유'를 시작으로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재개하였다. 2011년에도 하마사키 아유미, AAA, 키타노 키이, DiVA 등 다양한 가수들에게 곡을 공급하고, 10여년 만의 솔로 앨범인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2'를 발표하는 등 활동을 꾸준히 했지만, 아내이자 동료인 글로브의 보컬 KEIKO가 급성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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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에는 VOCALOID를 사용한 커버앨범 '코무로 테츠야 meets VOCALOID'를 출시. 1~10번 트랙은 유명 보컬로이드P들이 코무로 테츠야의 과거 곡들을 커버했으며, 11번 트랙인 LOVE IS ALL MUSIC은 코무로 테츠야가 직접 하츠네 미쿠를 사용해서 셀프커버했다. 2013년 2월 25일 trf의 신작 미니앨범 'PUSH YOUR BACK', 3월 6일 솔로 앨범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3'을 발표했고 이후 2013년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 S 주제곡인 fripSide의 eternal reality를 야기누마 사토시와 공동 작곡. 후반부 코러스에도 참여했다. 2014년에는 TM NETWORK 30주년을 맞아 7년만의 정규 앨범 QUIT30을 발표하였다. 2015년에는 globe의 'Remode' 등 다양한 앨범을 발표하였다. 2016년에는 AOA가 코무로의 히트곡 중 하나인 WOW WAR TONIGHT을 리바이벌하면서 MV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globe의 20주년을 맞이하여 발매한 커버 앨범 globe 20th -SPECIAL COVER BEST에서 HYDE와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가져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 2016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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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경에는 트위터를 통해 V2를 재결성한다면 hyde, Yoshiki와 함께 하고싶다는 의사를 내비췄다.

복귀 후 2010년대의 대표작은 AAA하마사키 아유미에게 제공한 곡들이라고 할 수 있다. AAA나 하마사키 모두 기존 팬덤의 힘이 없지는 않았지만, AAA는 코무로의 곡으로 오리콘 1위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인기 그룹 반열에 올랐고 하마사키는 완만한 하락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18] 코무로가 AAA와 하마사키의 당시 방향성과 능력에 맞게 적절한 곡을 써줬던 것도 사실이다. 코무로에게도 2010년대에 오리콘 1위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코무로와 AAA, 하마사키의 조합은 에이벡스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대중 음악가로서 이룰 것은 다 이뤄봤던 코무로가 전성기가 한참 지난 2010년대 초에 그만큼의 성과라도 이뤄냈던 것이 되려 놀라운 일이었다. 2012년 9월 C형 간염을 뒤늦게 진단받아 약물 치료를 하는 등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고, 2014년 TM NETWORK의 QUIT30 앨범 활동 이후로는 다시금 활동 범위와 상업적 성과가 축소되어갔다. 2015년 하마사키에 대한 곡 제공도 중단하고 TM이 재충전 기간에 들어간 이후에는 몇몇 아티스트들에 대한 단발성 곡 제공이나 TV, 라디오 프로그램의 BGM 제공을 주로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일본 후생노동성의 간염 예방 캠페인 "알자, 간염 프로젝트" 테마곡인 笑顔の明日로 다양한 유명인이 가창에 참가하였다. 2016년 Def Will이라는 신인 여성 댄스 그룹을 프로듀스하였으나 CD 싱글 없이 디지털 싱글만 발매하였다.

2.8. 2018년 ~ 2019년

2018년 1월 19일 이루어진 은퇴 기자 회견.

2018년 1월 16일, 2011년에 쓰러진 뒤 재활 중인 아내 KEIKO를 친정에 보내고 미혼모인 간호사를 집으로 초대하여 불륜을 저지른 게 주간문춘을 통해 보도되었다. 기사 이에 대해 코무로는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불륜을 부정하고 아내를 간호하며 생겨난 정신적인 피로와 함께 C형 간염돌발성 난청으로 왼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은퇴를 발표하였다. 기사 은퇴하기까지의 과정 은퇴 기자 회견 영상. 체력 저하로 인해 창작 능력 또한 상실된 것이 은퇴의 주 요인이라고 한다. 거기다 나이도 벌써 60대에 접어들었으니... 불륜 의혹에 대해서는 간호사와는 대화를 나누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을 뿐이며, 남성으로서 성 기능이 퇴화했다는 것을 밝히며 육체적 관계 또한 없었다고 항변했다. 불륜이 꼭 성행위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치부를 스스로 밝혔다는 점에서 동정 여론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기자회견 이후 일본의 여론은 코무로 쪽에 동정적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간병 스트레스를 코무로가 기자회견에서 잘 파고든 것이 유효했다. 또한 보도한 주체가 주체다보니 주간지의 가십성 보도에 대한 피로도가 이번 사건으로 터지면서 불길이 문춘쪽으로 번진 것이 크다. 문춘의 기자는 '은퇴를 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여론은 좋지 않다. 불륜은 비판 받을 일이지만, 코무로가 성 기능 감퇴라는 치부를 밝히며 은퇴 선언을 하는 강수를 두었고, 마침 시기가 헤이세이 시대의 끝무렵이다보니 8~90년대 코무로의 곡을 들으며 자랐던 일본인들에게는 코무로에 대한 분노보다는 은퇴에 대한 동정과 아쉬움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문춘이 이후 몇 차례 후속 보도를 내기는 했지만 여론에 큰 변화는 없었다. 코무로의 언플 능력이 빛을 발한 사례.

정작 이 건에서 가장 큰 피해자이자 직접 당사자인 KEIKO는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대신 KEIKO의 가족들이 문춘의 후속 기사를 통해 코무로의 기자회견을 반박하기는 했다. 반박의 요점은 코무로가 KEIKO를 제대로 간호하지도 않았고, KEIKO가 초등학생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코무로의 말과는 달리 KEIKO는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KEIKO 본인이 드디어 2018년 연말 트위터 갱신을 재개하였다.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는 등 건강을 많이 회복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KEIKO 본인이 멀쩡히 운동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하는 모습을 어필하는 것을 볼 때 코무로의 기자회견에 과장 또는 의도적 거짓말이 섞여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인터넷에서는 코무로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이 종종 올라온다. 그리고 1년 후, 코무로가 KEIKO와 이혼 조정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보도되며 코무로에 대한 인식은 다시 나빠졌다. 어찌됐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뮤지션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여러가지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

라스트 아이돌, 스마트폰 게임 주제가 Guardian, 영화 써니: 강한 마음, 강한 사랑 음악 등 등 은퇴 선언 전 진행하던 작업이 마무리된 후, SNS 계정을 삭제하는 등[19] 은퇴 수순에 들어갔다. Guardian에서 사용한 신디는 Roland JUNO-DS 61(white).

2019년 7월, 후쿠시마후타바 군의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부흥 이벤트 FUTABA 1 DAY SUMMER SCHOOL에서 은퇴 후 1년 반만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벤트는 아키모토 야스시가 제창한 것이며 강연자로 코무로 외에 히라테 유리나, 안무가 TAKAHIRO, SHOWROOM 사장 마에다 유지 등이 참가하였다.

2020년 3월 12일, 3년만에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갱신하고 근황을 공개했다. 필리핀에서 아동 구호활동 단체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9. 2020년 ~ 현재

2020년 7월 아키모토 야스시의 강력한 요청으로 노기자카 46 신곡 route 246을 작곡 하면서 복귀하게 되었다. 과거 KEIKO와의 이혼 조정 건이 보도되면서 여론이 갈린 상황이었는데, 복귀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론이 더 악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곡 발표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노기자카46의 자체 디지털 음반 성적을 크게 상회하며, 디지털 차트[20], 스트리밍 등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노기자카46이 일본 정상의 아이돌 중 하나긴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이들도 코무로 테츠야의 네이밍 또한 곡의 화제성에 한몫 했다고 하는 편. 다만 디지털 한정 싱글이라 피지컬로 병행발매되는 싱글보다 디지털 순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은 감안해야하며, 2주차 이후부터는 순위가 상당히 내려갔다. 참고 자료.

그 후로는 2021년 TM NETWORK의 재결성 라이브를 하는 등, 조용하게 활동하고 있다. 2021년 11월, 재즈를 주제로 한 LP 솔로 앨범 <JAZZY TOKEN>을 팬클럽 "TETSUYA KOMURO STUDIO" 한정 판매 형식으로 발표했다.

3. 음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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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and의 신디사이저 JUPITER-80이다.[21]

테크노, 유로댄스, 트랜스, 하우스, 팝 록, 신스 팝, 정글, 힙합, 레게, R&B, 포크 음악, 얼터너티브 록, 프로그레시브 록, 앰비언트, 세미 클래식, 크로스오버, 엔카 등 여러 폭 넓은 장르의 곡조를 만들어냈다는 특징이 있다. 복귀 후에는 일렉트로 하우스 등의 최신 EDM도 시도했는데 올드한 느낌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EDM스러운 요소는 놓치지 않았다. 본인만의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다루면서도 오랜 기간[22] 준수한 품질을 유지했다는 것은 대중 음악가로서 우수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1990년대 J-POP 댄스 뮤직의 1인자로 알려져있지만, 댄스 음악만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코무로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장르는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등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이며, 음악 생활도 록 밴드에서 시작하였다. globe의 대표작 FACES PLACES는 얼터너티브 록을 시도하여 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hitomi는 포크적 색채의 팝을 주로 내세웠다. 또한 90년대 중반 일본에 블랙 뮤직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힙합, 레게, R&B 등을 J-POP계에 도입하려 하였는데, 아무로 나미에의 Don't wanna cry는 R&B적인 색채가 가미되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H.A.N.D.라는 남성 4인조 유닛을 통해 본격적인 힙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코무로 사운드의 커다란 특징은 '갑작스러운 전조'에 있는데 이것을 자주 사용하게 된 계기는 'TM NETWORK'의 퍼스트 앨범 레코딩 때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작동하여 음이 변한 것을 듣고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러한 멜로디가 정착되었다. 그가 작곡한 음악에는 공통된 특유의 코드가 들어가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만 들어도 이것이 코무로의 곡임을 알게 해준다. 아예 일본 실용음악 업계에서는 코무로가 자주 애용하던 코드진행인 VIm-IV-V-I(C장조 기준으로 Am-F-G-C)을 아예 '코무로 진행(小室進行)'라는 이름으로 부를 정도.

작곡 능력에 비해 가창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이건 몇몇 작곡가들(싱어송라이터 제외)도 그러니 코무로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면 유희열, 정재형. 노래 부를 때 음색이 특이한 것도 있지만 별다른 테크닉 없이 쥐어짜는 목소리인 데다가 음색도 영 좋지 않다. 이 특유의 목소리는 본토에서도 '모기 목소리(モスキートボイス)'라면서 까인다. 예를 들어 오리콘차트 1위까지 먹은 솔로 활동 곡 'RUNNING TO HORIZON'(1989)의 경우 가수를 모른 상태에서 처음 들어보면… 네↓무→레↑ 나↑이↓ 고제↓~ 니~찌~[23] 그리고 1991년 Yoshiki와의 합작 유닛 V2의 타이틀 곡 '背徳の瞳〜Eyes of Venus〜' 역시 보컬이 영 좋지 않다. 보컬과는 별개로 요시키의 미친듯한 드럼과 코무로의 광란의 키보드 합주는 엄청나다. 둘 다 전성기 시절이라 기량이 무시무시했을 적. 음치는 아니지만 발성과 음색의 문제.

그런데 본인의 형편 없는 가창력과 달리 정작 노래들의 난이도는 또 미친듯이 높다는게 특징. 90년대 대중가요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매우 높은 음역대와 급격한 곡조의 변화 때문에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한다. 1절이 끝나고 얼마 쉬지도 않았는데 랩파트를 넣는다던가, 퍼포먼스가 격렬한 댄스곡의 러닝타임이 5분은 기본으로 넘어가고, 심지어 그 노래들이 음역대가 낮은 것도 아니다.[24] 이렇다보니 가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노래들이 많다. 당시 코무로 사단의 가수들이 globe KEIKO와 아무로 나미에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실력없고 상업적이기만 한 한철 가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실력 논란에는 가수 자신의 실력 문제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난이도가 높은 코무로의 작곡 스타일 탓도 있다. 아무로는 코무로를 벗어나 블랙 뮤직으로 이행하면서 노래 부르는 법을 완전히 고쳐야 했으며 카하라 역시 코무로 곡에서 벗어나면서 가창력이 월등히 좋아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가창력이 매우 좋았던 tohko는 초반에만 반짝 했을 뿐 인기를 지속하지 못했다.

작사에선 아무로 나미에에게 준 곡 'CAN YOU CELEBRATE?'의 영어 표현이나 가사의 의미가 이상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코무로는 "사운드에 맞는 표현을 선택했다"고 얘기했다. 작사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은 와타나베 미사토와의 작업이 시작이라고. TRF의 명곡 '寒い夜だから…(추운 밤이니까…)'는 스튜디오에서 나오니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4. 영향력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 대중 음악계에서 프로듀서와 작곡가가 전면에 부각되는 일은 흔치 않은데, 코무로는 이례적으로 매스 미디어 노출을 통해 대중들에게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음악 방송 무대에 가수와 함께 피아노/키보드/기타를 치며 직접 출연했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 결과 코무로의 이름이 일종의 브랜드가 되었고, 가수는 상관 없이 코무로의 곡이면 CD를 사는 사람도 많았다. 이는 코무로가 작곡가나 프로듀서이기 전에 인기 밴드 TM NETWORK의 멤버로서 본인이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단순히 곡만 잘 쓰는게 아니라 시장의 동향을 읽고 팔리는 물건을 만드는 비즈니스 감각이 대단히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은퇴 이후 방영된 코무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90년대 초반 '여자 고등학생'들이 트렌드의 발신처가 되어가는 것을 읽고, 자신이 프로듀스한 곡들의 CD를 무료로 주고 교내 방송에서 틀어달라고 요청하는 등 여고생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입소문을 타게 했다고 한다. '나는 미래를 만든다' 라는 성공과 마케팅에 관한 책까지 썼을 정도.

코무로라고 하면 AVEX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코무로의 거점은 TM NETWORK 시절부터 소니 뮤직이었다. 당시 대중가요계로 진출을 시도하던 에이벡스와 프로듀서로서 새로운 음악을 하고자 하던 코무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둘의 관계가 깊어졌을 뿐. 이 과정에서 코무로가 주축이 될 예정이었던 소니 산하의 '안티노스 레코드'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25]. 상기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코무로는 에이벡스, 소니 뮤직, 포니캐년 등의 음반사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본인이 음반사보다 우위에 서서 활동했다. 이런 코무로의 능수능란함에 질린 에이벡스는 90년대 후반 코무로와 관계를 끊었었다. 그래서 98년 이후 데뷔한 tohko, 스즈키 아미 등은 에이벡스가 아닌 소니, 포니캐년 등에서 음반을 냈고, 에이벡스 레이블에 남아있던 globe도 이 시기 한때 프로모션이 줄어들었다.

이런 면모들은 코무로의 상업적 성공에 큰 발판이 되었지만 코무로 붐 당시에도 코무로가 음악가라기보다는 사업가이고 음악을 한다기보다는 비즈니스를 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키웠다. 한 명의 프로듀서가 기획부터 작곡까지 모든 걸 다하다보니, 자연히 노래들도 비슷비슷하고[26] 상업적인 포인트에만 포커스를 둔 듯한 모습 때문에 '양산형 프로듀서'라며 까이기도 하였다. 아예 코무로를 보이콧하는 라디오 채널도 있었을 정도. 정작 ORUMOK, Rojam 등 본인의 사업은 하나같이 실패했다.

코무로는 당시 90년대 한국가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누구누구 사단' 으로 묶여 언급되던 풍토는 코무로 사단에 비롯된 것이며, 코무로의 음악 중 댄스 음악은 이상민, 김창환 같은 프로듀서들의 스타일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코무로가 프로듀서했던 TRF, globe, 아무로 나미에 등을 벤치마킹하거나 따라한 가수들도 많이 나왔으니 그 영향력이 어마무시했다. 다만 코무로의 곡을 한국 가수가 커버한 사례는 CAN YOU CELEBRATE?가 두 차례 커버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편이다.

5. 장비

신디사이저 개발에 참여한 적 있는데 전성기 당시 야마하 신디사이저를 애용한 그는 초보자들에게 맞게 설계한 신디사이저인 EOS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코무로는 61건반을 메인으로 사용하였다. 코무로의 무대를 배치하는 신디사이저를 봐도 라이브 내내 대다수가 61건반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아예 61건반으로만 배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니면 Nordlead, Virus등의 가상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를 같이 사용하거나 또는 소프트웨어 신디사이저의 컨트롤러 역할도 한다. 대표적인 모델이 롤랜드의 Fantom G6, Fantom S, DX7이나 DX7IIFD 등의 신디사이저, EOS 시리즈, JD-800.

코무로가 라이브에서 사용했던 신디사이저 및 장비들이 알고 싶다면 이 사이트이 사이트를 참고해볼 것.

6. 개인사

코무로의 음악가로서의 능력과 음악계에서의 업적과는 별개로, 개인사에 관해서는 옹호를 받기가 어렵다.

첫 번째 결혼은 "키라라와 우라라"라는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던 오오타니 카나코(大谷香奈子)와 88년에 하였으며, 4년 후인 92년 협의 이혼하였다. 이 결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 없으나, 이혼 2년 후인 94년 오오타니 카나코의 친남동생, 즉 코무로의 전 처남인 오오타니 켄고(大谷健吾)가 코무로 프로듀스를 받아 가수로 데뷔한 것을 보면 이 결혼은 원만히 끝난 것으로 판단된다.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후인 94년 토오미네 아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무명 아이돌 시모가와라 토모미를 만나 교제하였다. 그에게 카하라 토모미라는 예명까지 지어주면서 1995년 데뷔시켰고 톱 아이돌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몇 년 안 지나 관계에는 금이 갔다. 당시 코무로와 카하라는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카하라가 방송 녹화를 마치고 귀가하니 코무로의 물건이 전부 사라져있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카하라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연애 관계에서 언젠가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통보 방식이 세련되고 어른스러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다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이 건의 경우 어느 쪽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의 결별은 일본에서 엄청난 스캔들이 됐다. 결별 후 방송에 출연한 카하라 토모미를 보면 노래를 부르면서도 영혼이 빠져나간듯 표정이 없는데, 패널로 출연한 연예인들이 그런 그녀를 동정해서 애써 분위기를 띄워줄 정도였다.

카하라와 결별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은 99년, 코무로는 자신이 프로듀스한 그룹 dos의 댄서였던 asami와 교제를 시작한다. asami와는 Kiss Destination이라는 듀엣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활동 기간 중 혼전임신을 하여 2001년 속도위반으로 재혼하였고, 얼마 후 asami는 딸 코토리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1년도 안 된 2002년 5월 이혼하였다. 그리고 asami와 이혼한 지 또 1년도 안 된 2002년 10월 자신이 멤버이자 프로듀서인 그룹 globe의 KEIKO와 세번째 결혼을 하였다.

코무로와 asami의 이혼 사유는 코무로와 KEIKO의 불륜이었다. 심지어 불륜을 시작한 시기는 asami가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있던 시기였다. 혼전 임신으로 자녀가 태어날 예정인 상태에서 불륜을 저지른 것은 인격이 분자 단위로 파탄났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카하라나 KEIKO에 비해 asami의 인지도가 낮아서 이 사건이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에서는 KEIKO도 엄연히 불륜 가해자이므로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KEIKO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코무로에게 혼인 파탄의 절대적 책임이 있었으므로, 코무로는 asami와 이혼하면서 7억 엔이라는 거액의 위자료에 더해 딸 코토리의 양육비까지 지급하여야 했다. 이는 코무로의 재정난을 가중시켜 결국 코무로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코무로가 5억 사기 사건을 일으키고 법정에 설 때까지도 KEIKO는 코무로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으나 2011년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져 일상 생활에 지장을 겪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코무로는 KEIKO를 정성껏 간호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었지만 2018년 간호사와의 불륜 의혹이 보도되며 다시 한 번 개인사로 물의를 빚었다. 불륜 의혹 자체는 코무로의 기자회견을 통해 일단락되었지만, 2019년 10월 주간문춘을 통해 코무로가 KEIKO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되며 다시금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주간문춘에 따르면 코무로는 여전히 저작권 사용료로만 연 1억 엔의 수입을 자랑하고[27] 월세만 100만 엔인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이혼 대가로 KEIKO에게 고작 월 8만 엔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주간문춘이 가십지라고는 하지만 이 정보가 나온 곳이 어딜지를 생각하면 (문춘은 이미 2018년 7월 당사자인 KEIKO의 가족들과 인터뷰한 바 있다.) 신빙성이 있는 정보이다. 비록 KEIKO도 불륜 가해자이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KEIKO가 코무로와의 혼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겪었던 고충과 노력을 알고 있는 대중들이 코무로의 행동을 좋게 볼 리가 없다. 에이벡스 마츠우라 사장이 KEIKO와 이혼을 진행하던 코무로를 트위터에서 공개 저격하기도 했다. 다만 마츠우라 사장이 2021년 연말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코무로 테츠야의 대단한 점이라는 영상을 올린 것을 보면 마츠우라와 코무로의 관계는 회복된 듯 하다.

7. 기타

게임 제작에도 손댄 적이 있다. 그가 디자인하고 시스템 사콤에서 개발한 가볼 스크린(ガボール スクリーン)이라는 게임. 가볼이라는 이름 자체는 TM NETWORK의 CAROL 앨범에서 키네 나오토가 쓴 소설 속에 나오는 음악 그룹에서 따왔다. 플레이스테이션 1로 발매된 어드벤처인데, 한때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유명했던 그답지 않게 일단 외견만 보면 스크린샷에서 보이는 포스LSD 맞먹기 짝이 없다. 다만 일단 명확한 게임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28] LSD와 비교하기는 좀 힘들다. 하드코어게이밍 101의 리뷰 '가볼'이라는 이름은 이후 2001년 DJ DRAGON과의 프로젝트 유닛의 이름으로도 사용했다. 한국에서도 활동했던 가수 조앤이 이 유닛의 싱글 '幸せの表現'에 참가한 적이 있다.

기동전사 건담 vs 건담 NEXT 가동 당시, 코무로 테츠야 5억엔 사기 사건이 터지면서 그가 작곡한 역습의 샤아 주제가인 'BEYOND THE TIME' 재생이 문제가 될 상황이 놓이자 기판 게임 설정 맨 마지막의 BGM SETTING 항목을 만들어서 ON으로 하면 역습의 샤아 발진 영상에서 해당곡이 제거되고 액시즈에서 해당하는 곡이 나올 상황에서 Z건담의 전투 BGM이 대신 나오도록 하는 특이한 검열방식을 도입했다. 사건 진행상황에 따라선 영원히 ON 상태로 고정되어서 곡이 더미 데이터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사건은 잘 마무리 되어서 정상적으로 재생될 수 있었고, 당시 유저들은 사건이 마무리 되자마자 별다른 데이터 수정작업 없이 음악이 나오는 걸 보고 '내부 설정으로 코무로 테츠야 BGM ON/OFF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농담이 섞인 추측을 했었다. 이후 후속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은 없어졌다.

타이페이에 이름이 "코무로 테츠야"인 빌딩이 있다. 코무로 본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건물주가 코무로 악곡을 좋아해서 붙인 것이 아닐까 추정될 뿐.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와 친분이 있다. 우라사와가 코무로의 중학교 후배로, 20세기 소년을 통해 해당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8. 관련 가수/아티스트

8.1. 코무로 패밀리



코무로 테츠야가 프로듀스하거나, 코무로의 곡으로 히트를 친 가수들을 코무로 패밀리라고 불렀다. 이들이 단체로 잘 나갔던 시절을 코무로 붐이라고 부른다. 코무로 붐은 1998년부터 차차 꺼지기 시작해서, 2000년 스즈키 아미의 활동 종료를 끝으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2000년 3월 이들 코무로 패밀리가 발표한 악곡의 판매량이 3천만 장을 넘어서 기념으로 3장짜리 베스트 앨범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는 절판.

코무로 패밀리는 보통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유닛들만을 가리키지만 정의가 확실히 규정된 것은 아니라 한두 곡만 코무로에게 받았어도 코무로 패밀리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아래는 가장 좁은 의미의 코무로 패밀리(순서는 코무로 프로듀스를 받은 연도순).

8.2. 주요 악곡 제공 아티스트

코무로 프로듀스는 아니지만 코무로의 악곡을 받았던 적이 있는 가수/그룹들은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아티스트들의 목록.

8.3. 프로젝트 그룹

9. 관련 작사가/작곡가


수많은 코무로 프로듀스 가수들의 작사와 작곡을 모두 코무로가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므로[30], 코무로 패밀리의 음악 작업에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작사, 작곡가들이 참여하였다. 아마가타 나오미와 같이 대외적으로 코무로 패밀리로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 프로듀싱은 쿠보 코지가 맡는 경우도 있었다. 코무로의 Rojam 사업이 잘 진행되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대형 연예 기획사들처럼 코무로 본인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휘하에 여러 프로듀서와 작곡가들을 두는 형태로 성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10. 대표작

11. 디스코그래피

프로듀스한 가수들 외에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시리즈를 비롯해 본인의 싱글과 앨범들, 그리고 작곡, 프로듀스 악곡들을 모아놓은 컴필레이션 앨범 등이 있다.

11.1. 솔로 음반

11.2. 컴필레이션 앨범

코무로가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스 등을 한 곡들을 모아놓은 컴필레이션 앨범도 다수 있다.


[1] 코무로 본인이 에이벡스 소속이었던 것은 5억 사기 사건 이후이다. 90년대에는 코무로 본인이 에이벡스 소속이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코무로가 프로듀스하는 아티스트들 중 일부가 에이벡스 소속이었고 코무로와 에이벡스의 관계가 밀접했던 것일 뿐이다.[2] 2008년 5억 엔 사기혐의로 활동 중단하다가 2009년에 복귀[3] 2018년에 KEIKO와의 이혼 문제로 은퇴를 선언했다가 2020년에 복귀했다. 다만 연예계까지 복귀한 것까진 불명.[4] JYP, SM, YG처럼 코무로(K) 테츠야(T)의 영어 줄임말.[5] 전성기 때는 한번에 7대를 소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 출장 때에도 반드시 페라리를 렌트해서 타고 다녔을 정도의 매니아.[6] 한국 이름은 전정일. 재일교포 2세인 뮤지션 겸 배우.[7] 시티헌터 3의 오프닝 곡.[8] 이 싱글이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마츠다 세이코의 연속 1위 달성 기록이 24곡에서 끝나버렸다. 물론 이는 당시 마츠다의 싱글이 전작과 크게 음악적으로 달라졌던 것도 한 몫 했다.[9] 1990년 TM NETWORK에서 TMN으로 이름을 바꿨다.[10] 90년대 중후반 음반 전성기와 달리 80년대나 90년대 초반은 이 정도도 많은 판매량이었다.[11] 이중 마지막으로 세워진 하와이 호놀룰루의 TRUE KISS DISC STUDIO는 통 제작비 1,2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투입되었다. 1999년 완공 당시 미국 내에서도 고급 스튜디오 중 하나로 인식되었으며, 코무로 테츠야의 스태프들이 리한나, 닥터 드레, story of the year 등의 밴드들과 작업하기도 했다. 이 스튜디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니 뮤직 산하 TRUE KISS DISC 레이블과 연관이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이후 에이벡스에 팔아치워서 오늘날에는 에이벡스 호놀룰루 스튜디오가 되어버렸다.[12] 스즈키 아미가 뽑힌 ASAYAN의 오디션에서 시청자 투표로 밀려 2위를 한 모로쿠마 미유키이다. 낙선 2년 후 코무로에게 발탁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이 코무로 붐은 이미 꺼져있었고 데뷔곡 Feel the Revolutions는 스즈키의 데뷔곡 love the island와 퀄리티 차이가 매우 심하였다.[13] 상술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1992년에 V2라는 유닛으로 같이 활동한 적 있었다.[14] TKプロジェクト ガチコラ[15] KEIKO의 고향인 오이타의 축구팀 스폰서를 하기까지 했다. 이는 훗날 5억 사기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16] 이 음악 출판사라는 개념은 녹음기와 음원이라는 개념이 발명되기 전인 근세 시대부터 존재했다. 원래는 악보를 출판할 권리를 작곡가 대신 관리하였다. 그래서 음악 '출판'사라고 불리는 것이다.[17] 정확히는 코무로의 개인통장이 아니라 Tribal Kicks의 법인 통장이다.[18] Love songs 앨범은 전작으로부터 8개월만에 나왔음에도 판매량을 무난히 유지하였다. You & Me는 간만에 유튜브 조회수도 잘 나왔고 무엇보다 하마사키에게는 음원 인증을 받은 마지막 곡이 되었다. 이후의 하락세를 생각하면 그나마 선방한 것.[19]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스타그램은 계정이 복구되었다.[20] 오리콘 디지털차트/빌보드 재팬 주간 4위(일간 최고 2위)[21] 뒤에 있는 분홍 것은 건담이다. 우연인지 정말 좋아해서 입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체포되던 당시 입고있던 옷이 유니클로×기동전사 건담컬래버레이션 싸구려 티셔츠 였다고 한다.[22] 작곡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86년 My Revolution부터 2000년 스즈키 아미의 INFINITY EIGHTEEN VOL.1과 아무로 나미에의 NEVER END까지만 쳐도 14년. 거기에 복귀 후 2010년~2012년 AAA나 하마사키 아유미에게 제공한 곡들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23] 해석하면 '잠들지 못하는 오전(새벽) 2시'[24] 이러한 스타일로 악명 높은 대표적인 노래가 아무로 나미에의 a walk in the park.[25] 이 안티노스에서 나온 코무로 관련 음반은 'TK1998'이라는 EP&라이브 비디오 세트 뿐이다. 대신 이후 아사쿠라 다이스케 프로듀스 아티스트들이 안티노스 레이블에서 음반을 냈다. 2002년 에픽레코드에 합병되었다.[26] '음악성' 문단에 서술되어 있다시피,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코무로만큼 다양한 장르로 히트곡을 배출한 작곡가/프로듀서는 쉽게 찾기 힘들다. 다만 시간이 흘러 몇몇 곡들만 기억되다보니 일본 현지에서도 코무로의 곡이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27] 코무로가 저작권을 레코드 회사에 빼앗겨서 저작권료를 못 받는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저작권 관리 체계에 대한 무지가 낳은 오해이다. 상단 5억 사기 사건 관련 내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28] 디스크를 수집하여 곡을 모으는 것이 목표이다. 뮤직비디오도 볼 수 있지만, 정작 이 게임에 코무로의 곡은 2곡 뿐이고 나머지는 쿠보 코지의 곡들이다.[29] 코무로의 솔로 데뷔 앨범을 공동 프로듀싱한 1956년생 뮤지션.(라이브 세션도 했다.) 가쿠슈인-버클리 음대 출신으로, 이 사람도 상당한 엘리트이다.[30] 코무로 패밀리의 경우 코무로가 전곡을 혼자 작곡한 것은 카하라 토모미, globe, Kiss Destination, 그리고 H.A.N.D. 정도이다. 참고로 프로듀싱과 작사/작곡은 별개의 영역이다.[31] 코무로의 음악 중에서 명곡 중의 명곡이다. 그리고 코무로 본인이 작곡한 곡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이자 제일 공을 들이는 노래이며 TM NETWORK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곡이다. 오죽하면 TM 라이브에서 필수요소로 떠오르고 재결성할 때도 역시 이 곡으로 발매했다.[32] 하마다 마사토시와의 프로젝트 그룹.[33] TM NETWORK의 BE TOGETHER를 리메이크.[34] 사이보그 009 2001년 TVA 1기 엔딩곡으로 사용되었는데 정작 엔딩곡은 원곡과 창법이 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