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후쿠치야마선 (타카라즈카선) 탈선사고 JR福知山線 (宝塚線) 脱線事故 | ||
<colcolor=#000000> 발생일 |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8분 | |
유형 | 탈선 | |
사고 원인 | 과속 및 ATS 설치 미흡 | |
발생 위치 |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쿠쿠치 3쵸메 27 (兵庫県尼崎市久々知3丁目27) | |
인명 피해 | <colcolor=#000000> 사망 | 107명[1] |
부상 | 562명 | |
운영 기관 | JR 서일본 | |
사고 열차 | 열차 번호 | 도시샤마에행 쾌속 5418M |
차량 | 207계 전동차 Z16+S18 편성 | |
노선 | 후쿠치야마선 (JR 타카라즈카선) |
사고 당시 앞에 있던 차량 (Z16편성 4량) 의 사고 전의 모습[2] |
사고 당시 뒤에 있던 차량 (S18편성 3량) 의 사고 후의 모습[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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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5년 4월 25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발생한 철도 사고로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함께 '2005년 일본철도 3대 참사'로 불리고 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포함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부상을 당했다.[4]서구권에서는 아마가사키역 주변에서 일어났다 해서 '아마가사키 탈선 사고 (Amagasaki derailment)'라고 한다.
2. 전개
사고 열차는 JR 서일본에서 운행하는 7량 편성의 후쿠치야마선 쾌속 도시샤마에역행 5418M 열차로, 207계 전동차로 운행하고 있었다.사고 당일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 (高見隆二郞, 23세)'는 경력 11개월의 초보 기관사로, 경험 미달로 인한 운전 미숙으로 인해 제한 속도를 어겨가며 과속을 했다. 이 탓에 이타미역 접근 시 급제동을 걸었음에도 정차 위치를 약 70m 가량 오버런하고 말았다.
당초에는 8m 오버런했다고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72m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사와 차장이 불이익을 두려워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 기관사가 열차 내 전화시스템으로 선배였던 차장에게 연락해서 이번 일을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으나 열차 내 전화로 차장이 보고하기도 전에 맨 뒷칸서 열차가 제대로 안 서는 바람에 늦었다며 항의한 손님이 있어 차장은 답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민원 응대를 한 다음 차장은 8m의 오버런이 있었다고 상부에 허위 보고를 한다. 기관실에서도 차장의 무선을 들을 수 있기에, 기관사도 축소 보고 내용을 들었을 것이다.
이 오버런으로 인해 열차를 제 위치로 다시 되돌리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정시로부터 약 1분 20초 가량의 지연이 발생했고, 오버런에 지연까지 겹치자 초조함에 쫓기게 된 기관사는 이타미역을 급히 발차하여 또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과속을 해 가며 이나데라역과 츠카구치역을 통과한 열차는 아마가사키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한, 우회전 곡선 구간[5]에 진입한다. 당시 이 곡선 구간의 속도 제한은 70km/h[6]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기관사는 조급한 마음에 무려 116km/h의 속도로 사고 구간에 진입하였다.[7] 당연히 열차는 관성으로 인해 커브 바깥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위험을 감지한 기관사가 급히 비상제동[8]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차량은 붕 떠 버린 상태였다.
7량 열차이지만 사진에는 6량 밖에 보이지 않는데, 사진에서 탈선해 아파트에 제일 붙어있는 칸은 2호차이다. 1호차는 아예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가 보이지도 않는데 당시 뉴스를 접한 시청자들은 선두에 있던 찌그러진 차량이 2호차인 것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 [ 사고 당시 2호차 내부. 충격적일 수 있으니 열람 주의. ]
그렇게 선로를 벗어난 열차는 오전 9시 18분경, 선로에서 불과 약 6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퓨전 아마가사키(エフュージョン尼崎, 2002년 준공)"라는 아파트를 들이받았다. 맨 앞 선두차인 1호차는 아예 건물 1층 주차장(필로티) 안으로 들어가서 주차된 오토바이 • 자전거 • 차들과 함께 뭉개졌고, 2호차는 건물(아파트 모퉁이)에 부딪히는 동시에 뒤따라온 3호차에 밀려나 함께 잭나이프 현상을 일으키며 처참히 구겨졌다. 4호차와 5호차는 아파트에 충돌하는 참사는 간신히 면했으나 역시 탈선하여 선로변에 널브러졌고, 오직 최후미의 6호차와 7호차만이 탈선의 마수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해당 열차가 통근전철이다 보니 승차권을 사면 해당 구간의 아무 전철이나 탈 수 있어 정확한 탑승 인원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대략 700명 정도가 승차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사고로 인해 그들 중 총 107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 99명은 완전히 찌부러진 1호차와 2호차 탑승객이었다.
당시 반대편 선로에는 특급열차[9]가 진입하고 있었는데 사고를 목격한 한 여성(47세)이 순간 기지를 발휘해 철도건널목의 비상버튼을 눌러 마주오던 특급열차를 정지시켰다. 자칫 발생할 뻔한 2차 참사를 방지한 공을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이 여성에게 홍수포장(紅綬褒章 こうじゅほうしょう, Medal with Red Ribbon)을 수여하였다.
또 사고 현장인 아파트 근처에 있는[10] '일본 스핀들 제조 (日本スピンドル製造株式会社)'[11]라는 회사 직원들이 소방관들의 구조 활동[12]에 도움을 줘서 이 회사 대표도 홍수포장을 받았다.
이외 주변 주택가 사람들도 구조 작업에 참여하였다.
3. 원인
3.1. 직접적 원인
우선 사고 구간은 곡선반경 300R의 급곡선으로, 본래 후쿠치야마선에는 없었던 구간이지만 1997년 JR 도자이선의 개통과 함께 직결운행 및 JR 고베선 아마가사키역과의 연계를 위해[13] 부득이하게 이설되어 만들어졌다.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나왔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사고 구간의 한계속도는 106km/h인 것으로 드러났고 사고 열차가 해당 구간을 116km/h로 주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직접적인 원인은 과속으로 확정되었다. 처음에는 133km/h가 넘어가야 차량이 전복된다고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승객이 아예 탑승하지 않은 빈 차일 때 기준이고 실제로 승객이 탑승한 경우는 이보다 훨씬 낮은 속도에서도 전도될 위험이 다분하다. 결국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감행한 과속이 부른 참사였던 것.
해당 구간의 ATS 장비가 구형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JR그룹 각 사는 제한 속도 초과를 막을 수 있는 ATS-P나 ATC 같은 유형의 신호시스템을 차근차근 적용 중이었으나 당시 후쿠치야마선은 ATS-P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열차의 경량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차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충돌강도를 갖추도록 되어 있고 물론 해당 207계 전동차는 그 조건을 만족했지만 전면 충돌강도에 비해 측면 충돌강도가 미흡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다.
3.2. 간접적 원인
직접적인 원인은 기관사 다카미의 과실과 열차방호장치의 문제였지만, 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과도한 경쟁과 JR 서일본의 후진적인 사내 문화가 있다.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戸)에서 각 한 글자씩 따 온 이른바 케이한신(京阪神) 지역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철도회사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주요한 도시 구간마다 어김없이 두세 개의 철도회사가 역 짓고 선로 깔아서 열차 돌리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동네다.
물론 이러한 경쟁은 철도 서비스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JR 서일본은 고속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속달형 전철인 '신쾌속'은 통근용 전철인데도 불구하고 최고속도가 130km/h며, 표정속도도 85.2km/h에 달한다. 이러한 속도는 한국의 특급열차 등급인 경춘선 ITX-청춘 표정속도에 맞먹는다. 이러한 JR 서일본의 고속화에 맞서 간사이 권역의 사철은 JR 서일본에 비해 더 저렴한 운임을 내세워 경쟁하고 있다.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치킨 게임이 벌어져 각 회사들의 출혈이 크긴 하지만 서비스의 향상과 더불어 철도 운행의 정시성도 칼같이 지켜져서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JR 서일본이 받던 찬사의 이면에는 열차 운행시간을 초 단위로 점검하며 진행된 기관사들에 대한 압박이 있었고 이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크게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사고 당시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는 상술핬듯이 경력이 11개월밖에 되지 않는 초보였다. 비용을 절감[14]하기 위해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초보 기관사를 현업에 배치하였고 그는 열차 조작에 미숙한 나머지 오버런을 범하고 열차를 지연시키고 말았다. JR 서일본은 이러한 경우 '일근교육(日勤教育)'을 부과하곤 했는데 그게 교육이라기보다는 군기훈련에 가까운 형태여서 기관사들은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근교육을 받을 때는 근무조에서 제외되어 업무시간 내내 교육만 받는데 그 교육이라는 게 남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리포트 쓰기, 사규 옮겨쓰기, 제초·청소[15], 상사 면담[16]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실상 징벌적 조치다. 이미 2000년에 일근교육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일근교육이라는 부조리를 당하고 싶지 않았던 기관사는 열차 지연을 회복하고자 무리한 운전을 하다가 참변을 불렀다.
뿐만 아니라 JR 서일본은 제대로 숙달되지 않은 사람을 통근시간대 기관사로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통근시간대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많이 몰리고 연착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사고가 터지므로 베테랑 기관사들이 주로 맡는 시간대이며 신참 기관사는 고참 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정도로 하고, 그나마 진짜 피크에는 고참 기관사의 집중에 방해될까봐 신참을 아예 빼버리기도 할 정도로 회사 차원에서 크게 신경을 쓰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17]
상황이 비슷했던 JR 동일본을 예로 들면 이미 1990년대부터 안전 관리와 기관사 및 차장 교육을 철저히 진행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보조기관사로 일하면서 주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식으로 연수를 진행하고 운전실습은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대에, 그나마 옆에 관리하는 고참 기관사가 1~2명씩 꼭 동승한 상태로 이루어지며, 운전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정기관사 자격을 주지 않고 계속 실습기관사로 교육을 거듭하는 등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가하였다.[18] 그러나 JR 서일본은 고작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하고 승차 인원이 많아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경력이 안 되는 신참 기관사가 혼자 운전대를 잡도록 투입하는 등 교육도 제대로 안 했다. 이 점이 밝혀지면서 JR 서일본은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또한 당시 JR 서일본은 속달성만을 고려해 여유 시간이 없는 열차 시각표를 짰는데, 부족한 여유 시간이 기관사들에게는 작은 실수조차도 무조건 만회를 해내야 지연을 면할 수 있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져 결국 과속 같은 위험 운전을 시도하려는 유혹이 훨씬 커졌다는 지적이 있다.
4. 영향
대형 참사로 불리던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사고가 터져서 일본 사회에 몰고 온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사고 노선은 55일 간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JR 서일본은 경쟁 노선인 한큐 타카라즈카 본선을 통한 대체 운송을 실시했으며, 이 때 타카라즈카 본선은 극심한 혼잡과 지연에 시달렸다. 또한 사고 여파로 JR 후쿠치야마선 이용객 일부가 한큐 타카라즈카 본선으로 이전하는 효과가 있었다.
- 사고 당시 일부 JR 서일본의 직원들이 사고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볼링대회를 즐기고 낮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던 사실이 보도되어 큰 비난을 받았다.
- 사고 이후 JR 서일본 2대 회장이자 초대 사장인 츠노다 다츠오(角田達郎) JR 서일본 고문이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지병인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사고 차량인 207계 전동차는 JR 서일본의 코퍼레이트 컬러인 파란색 띠가 둘러져 있었으나(구도색 열차 모습) 사고의 악몽을 연상시킨다는 여론으로 남색과 오렌지색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작된 후속 모델인 321계도 남색과 오렌지색 띠를 둘렀다. (신 도색 모습)[19]
- 사고 열차 번호인 '5418M'은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비슷한 시각을 운행하는 열차는 5818M으로 바뀌었다가 시각표 개정을 거쳐 현재는 5422M으로 운행하고 있다.
- 일본의 철도모형 제작 업체인 TOMIX와 KATO는 207계 모형의 생산을 중단하였다. JR 서일본 홈페이지에서 PDF로 제공하던 종이 철도모형에도 207계는 삭제되었다. 현재는 TOMIX와 KATO 모두 207계를 생산 중이지만 변경된 도색 모델로만 발매한다.
- 지나치게 빡빡한 열차시각표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받자 이를 개정하여 후쿠치야마선 전 열차가 종전에 비해 운행소요시간이 늘어났다. 사고 구간의 제한 속도는 70km/h에서 60km/h로 낮아졌다. 그 외 어반 네트워크 구간에서도 시각표가 개정되어 소요시간이 약간 증가하는 변화가 있었다.
- 사고 재발 방지 대책으로서 2005년에 아마가사키 - 신산다 구간에서 제한 속도를 초과하면 무조건 긴급제동장치가 동작하는 ATS-P 신호가 설치되었다.[20] 이후 2009년에 신산다 - 사사야마구치 구간에도 ATS-P 신호가 설치되었다.
- 2006년 3월 시각표 개정 때 산요 신칸센 500계 노조미의 신오사카 - 하카타 구간 소요 시간이 2분 늘어나 최단 2시간 21분에서 2시간 23분으로 늘어났다. 이전에는 최고 속도를 304km/h로 내야 여유 있게 정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 충돌한 아파트는 JR 서일본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였다. 2018년에야 추모 시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 위치
- 이 사고보다 앞선 2003년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유족 17명이 JR 서일본 노동조합 측의 초청으로 이 사고 추모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 사고 이후 JR 서일본 홈페이지에는 이 사고에 대한 사과문이 메인에 올라가 있다. 홈페이지를 리뉴얼하면서도 사과문을 유지하고 사고 개요와 사고 후 반응, 사고에 대한 대응에 대한 페이지를 전부 메인 페이지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놨다. 심지어 한국어판 홈페이지에도 이 사고를 언급하는 안전 헌장을 띄워 놓고 있다. #[21]
- JR 서일본은 사고 이후에도 사고 당시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직원 대접과 소홀한 차량 관리 때문에 언제 비슷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블랙 기업으로 악명 높다.
- 2017년 1월 3일에는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아카하타 단독 보도로 청취 조사에 응한 JR 서일본의 운전사의 증언을 기록한 필기 내용이 정보 공개를 통해 밝혀졌다. #
- 2006년 개최된 사고 1주기 추모 행사에는 사고 당시 기관사 다카미 류지로를 제외한 106명만 명단에 올랐다. 본 사건이 일본 국내에서 기관사에 의한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으로 취급되어 재판에 회부된 터라 사고 당시 기관사는 제외되었다. 다만, 이후 진행된 1심, 2심 및 2017년의 최고재판소 3심에서는 JR 서일본이라는 조직 전체의 문제라고 판단해 죽은 기관사 개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린 상태이다.
5. 유사 사고
- 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JR羽越本線脱線事故): 본문 참조.
- JR 닛포 본선 탈선전복사고(JR日豊本線脱線転覆事故) : 이 사고도 위의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비슷하다. 2006년 9월 17일 JR 큐슈 소속 특급열차 '니치린'으로 운행중이던 485계가 미나미노베오카역에 진입하던 중 전차선의 이상을 발견하고 급정지했는데 정지 직후 회오리 바람에 열차가 날아갔다. 참고로 이 회오리바람은 주위에 접근 중이었던 태풍 산산의 영향으로 발생한 적란운에 동반된 바람이었다. 해당 열차는 이미 태풍의 영향으로 발생한 강풍으로 서행하면서 약 40분 정도 지연되어 노베오카역에 도착했고 강풍이 계속되어 미나미노베오카역에서 운행종료를 할 예정이었다. 사고가 났을 때도 시속 25km로 서행운전. 이 사고로 6명이 부상당했다.
- 에세데 사고: 본문 참조.
- 스페인 갈리시아 고속열차 탈선사고: 본문 참조.
- 스트라스부르 TGV 탈선 사고: 본문 참조.
6. 영상
시뮬레이션으로 돌린 영상.(연령 인증 필요)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량 내에 수백명에 달하는 승객들이 있었다.저는 분해서 분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의 생명을 빼앗고 두 사람의 미래를 빼앗고
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JR그룹이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나요? 괜찮을 리가 없어요.
벌레 잡듯이 ○○을 죽이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질 수는 없어요.
저를 지옥으로 떨어트린 JR과 싸워주세요.
-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로 사망한 남성의 연인(32)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
○○의 생명을 빼앗고 두 사람의 미래를 빼앗고
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JR그룹이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나요? 괜찮을 리가 없어요.
벌레 잡듯이 ○○을 죽이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질 수는 없어요.
저를 지옥으로 떨어트린 JR과 싸워주세요.
-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로 사망한 남성의 연인(32)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
사고 2개월 뒤의 사고 구간 영상 (1:05~18초 특히 주목) |
안내방송 내용:
다음은, 아마가사키, 아마가사키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JR 고베선 고베 방면과 JR 도자이선으로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JR 타카라즈카선에서의 탈선 사고로 인해 아마가사키에서 타카라즈카 구간에 대해 열차의 운행을 중지하였으나, 오늘 6월 19일부터 운전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용해주시는 고객님들께 장기간에 걸쳐 큰 불편과 폐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다음은, 아마가사키, 아마가사키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JR 고베선 고베 방면과 JR 도자이선으로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JR 타카라즈카선에서의 탈선 사고로 인해 아마가사키에서 타카라즈카 구간에 대해 열차의 운행을 중지하였으나, 오늘 6월 19일부터 운전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용해주시는 고객님들께 장기간에 걸쳐 큰 불편과 폐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사상 최악의 참사 Runaway Train로도 만들어졌으며 전문가들과 생존자들을 섭외해서 방송을 만들어서 송출했다. |
7. 기타
- 2014학년도 EBS의 영어 과목 수능 연계 교재인 인터넷수능에 이 사고를 설명한 지문이 수록되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언급되었지만 내용이 이 사고와 상당히 일치한다. 원본(32페이지 Culture 이하)
- 2018년에 사고 당시 열차가 충돌했던 지점(옛 이퓨전 아마가사키 아파트)에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이 조성되었는데 열차가 직접 충돌했던 아파트에 저층부 일부를 남겨 두어 보존했다. 기사[22]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의 1층은 1호차가 충돌하면서 돌입했던 내부(필로티)와 그 앞 지하 부분까지 보존되어 있다. 사진 조성 중에 유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파트 벽에 기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 탈선사고가 난 이후 5418M은 결번 처리 되었다.
8. 둘러보기
역대 일본의 대형 사고 및 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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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79년 11월 28일257 24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1977년 9월 27일34 일본항공 715편 추락사고 1975년 1월 1일24 아오키호 버스 추락 사고 1974년 11월 9일33 다이쥬오 요마루 침몰 사고 1974년 3월 3일346 48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11월 29일103 다이요 백화점 화재 1972년 11월 28일61 일본항공 446편 추락 사고 1972년 11월 16일30 호쿠리쿠 터널 화재 1972년 6월 14일86 일본항공 471편 추락 사고 1972년 5월 13일118 센니치 백화점 화재사건 1972년 3월 19~20일24 후지산 대량 조난 사건 1971년 10월 25일25 킨테츠 오사카선 열차 충돌사고 1971년 7월 30일162 전일본공수 시즈쿠이시 공중충돌 사고 1971년 7월 3일68 동아국내항공 63편 추락 사고 1970년 4월 8일79 덴로쿠 가스 폭발사고 1970년 1월 24일24 캘리포니아 호 침몰사고
- [ 196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69년 4월 15일31 미 해군 C-121 추락 사고 1969년 2월 5일31 반코 호텔 화재 1969년 1월 4일31 보리바아마루 침몰 사고 1968년 11월 2일30 이케노보만게츠죠 화재 사고 1968년 8월 18일104 히다 강 버스 추락사고 1966년 11월 13일50 전일본공수 533편 추락 사고 1966년 3월 11일30 키쿠후치 호텔 화재 1966년 3월 5일124 영국해외항공 911편 추락 사고 1966년 3월 4일64 캐나다 퍼시픽 항공 402편 사고 1966년 2월 4일133 전일본공수 602편 추락 사고 1965년 10월 7일209 마리아나 해역 어선 집단 조난 사고 1965년 6월 1일237 야마노 탄광 가스 폭발 사고 1964년 2월 27일20 후지 항공기 추락 사고 1966년 2월 4일133 전일본공수 60편 추락 사고 1963년 11월 9일458 미이케 탄광 폭발사고 1963년 11월 9일161 츠루미 사고 1963년 2월 26일47 토키와마루 침몰 사고 1962년 11월 18일39 제1 무나카타 호 침몰 사고 1962년 5월 3일160 미카와시마 사고 1962년 5월 3일28 히에이산 버스 추락 사고
- [ 195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8년 8월 12일33 시즈오카현 전일본공수 추락 사고 1958년 3월 7일26 미 해병대 C-119C 추락 사고 1958년 1월 26일167 난카이마루 조난 사건 1957년 4월 12일113 제5 키타가와마루 침몰 사고 1956년 10월 15일42 롯켄 열차 충돌 사고 1956년 1월 1일124 야히코 신사 사건 1955년 7월 28일36 하시호쿠 중학교 수난 사건 1955년 5월 11일168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1955년 4월 16~17일73 아베 광업 보타산 붕괴 사고 1955년 2월 17일99 성모의 양로원 화재 사건 1954년 10월 8일22 우치우마루 침몰 사고 1954년 9월 26일1159 토야마루 침몰사고 1954년 9월 26일35 이와나니 화재 1954년 2월 1일35 홋카이도 미 해병대 C-46D 추락 사고 1953년 8월 15일107 다이쇼이케 댐 붕괴 사고 1953년 6월 18일129 타치카와 미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1953년 2월 14일21 오카츠타마 화학공업 폭발 사고 1953년 2월 4일80 신세이마루 침몰 사고 1952년 9월 24일31 다이고타이요마루 조난 사고 1952년 4월 9일37 일본항공 301편 추락 사고 1951년 11월 3일32 오즈행 버스 화재 1951년 7월 15일28 텐류가와 버스 추락 사고 1951년 5월 19일42 오하라 극장 화재 1951년 4월 24일106 사쿠라기초 사고 1950년 11월 7일34 하시가와노 버스 추락 사고 1950년 9월 26일23 미 해병대 C-54D 추락 사고 1950년 7월 26일25 미 공군 C-47D 추락 사고 1950년 4월 21일35 카타가와현 미군 C-54기 추락 사고 1950년 2월 11일22 구마모토 버스 추락 사고
- [ 194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49년 9월 22일29 이노타니 대교 붕괴 사고 1949년 4월 30일63 나타치 기뢰 폭발 사고 1948년 3월 31일49 킨테츠 나라선 열차 추돌 사고 1948년 1월 28일188 죠오마루 조난 사고 1948년 1월 5일36 메이테츠 세토선 열차 탈선 사고 1947년 5월 29일41 미 공군 C-54 추락 사고
[1] 일본 국내에서는 사고를 일으킨 기관사 1명을 제외하여 106명으로 서술하기도 한다.[2] 사고로 인해 폐차되었다.[3] 뒤쪽에 있던 차량이라 앞에 있던 차량보다 비교적 손상이 적었다. 수리하면 다시 운행할 수 있는 듯하지만 지금도 수리하지 않고 미야하라 검차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보통 대형 사고가 나면 해당 사고를 기림과 동시에 더 이상 이런 사고를 내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사고 차량 1~2량을 그대로 보존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본 사고의 1량과 2량은 너무나도 손상이 심하여 보존할 수 없었기에, 3량을 보존하였다.[4] 사망자 가운데 재일 한국인인 전칠영(당시 35세 여성)이 있었고 부상자 중에는 양창원(당시 50세 남성)이 있었으며 이 참변의 장본인인 20대 초반의 기관사 '다카미 류지로'도 이 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5] 이 구간을 통과한 뒤, 고가 구간에서 한 번 더 왼쪽으로 꺾으면 아마가사키 역에 들어올 수 있다.[6] 현재는 60km/h로 변경되었다.[7] 다카미 기관사는 이미 이전에 100m 정도 오버런해서 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타미역에서의 오버런과 지연으로 인해 더욱 조급해졌을 것이다.[8] 비상제동이 아닌 일반제동이었다는 설도 있다. 회사 내에서 비상제동 사용 시 재교육이라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충격으로 인해 제동간이 비상제동으로 전환되었다는 설이다.[9] 신오사카발 키노사키온센(城崎温泉)행 키타킨키 3호(北近畿3号) 열차이다.[10] 바로 앞에 있다.[11] 정밀제조기기, 집진기, 에어샤워룸 등 제조하는 업체이다.[12] 직원 차량을 동원하여 싣고 갔다고 전해진다.[13] 즉, 금정역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14] 기관사도 경력이나 근무 기간, 직급에 따른 임금 차이가 당연히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경력이 많은 즉 높은 호봉의 숙련된 기관사일수록 임금이 올라간다.[15] 선로에 떨어진 비둘기 똥을 솔로 닦아내는 작업[16] 면담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폭언과 욕설을 오랜시간 듣는 것이었다.[17] 사실 연착정도만으로 끝나면 다행이고 최악의 경우 사상자까지 발생할 수 있다. 대한민국도 2013년 철도파업 당시 열차 출입문 개폐 조작은 한국교통대 재학생이 대체투입해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결국 80대 승객이 열차 문에 발이 끼인 채 끌려가 사망했다.[18] 이건 한국철도공사도 마찬가지다. 가끔 기관사 승무를 교대하는 역에서 고참 기관사가 앉을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교대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19] 이후 207계는 체질개선공사로 321계에 더 가까워지도록 개조되었다.[20] 원래 계획대로라면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설치되었어야 했지만 비용 절감과 JR 서일본의 안전 경시 풍조로 ATS-P 설치를 미뤄 왔다. 만약에 계획대로 설치되었다면 사고 당일 급커브 구간 진입 전에 비상제동장치가 동작하여 사고 발생을 막을 수 있었다.[21] JR 동일본도 2005년부터 우에츠 본선 탈선 사고에 관한 공지가 계속 올라와 있다. 다만 이 사고는 강풍의 의한 사고로 JR 동일본의 잘못이 아니다.[22] 탈선 사고의 여파로 인해 붕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저층부를 남기고 허물었다.[23] JR 서일본과 KLM이 연착 등으로 스케줄이 늦어지면 어떤 사정이든 무조건 조종사에게 패널티를 먹이는 점과 다카미 류지료, 야콥 펠트하위전 판 잔턴 조종사가 시간에 쫓기다가 결국 사고를 낸 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