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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7 12:39:34

창경궁 함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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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colbgcolor=#bf1400> 창경궁 함인정
昌慶宮 涵仁亭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633년 (창건)
1833년 (중건)
파일:창경궁 함인정.png
파일:pal_ckk_pct08_ori.jpg
<colbgcolor=#bf1400> 함인정[1]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

1. 개요

창경궁정자이다. 명정전의 서북쪽, 환경전의 남쪽에 있다.

'함인(涵仁)' 뜻은 '인(仁)에 흠뻑 젖는다(涵)'이다.

2. 역사

인조 이전 창경궁에는 없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왕실 연회를 열던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 인양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사라졌다. 저 때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 주요 건물 대부분이 같이 불탔다.#

1633년(인조 11년)에 인조는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 및 이전하여 창경궁을 재건했다. 이 때 옛 인양전 터에 헐어온 인경궁 전각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함인정이다.

이 때 어떤 건물로 함인정을 지었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궁궐지》에 적힌 내용은 '함인당을 헐고 옮겨 세우면서 그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가 훗날 함인정으로 고쳤다'이다. 그러나 1633년 창경궁 복구 당시 작성한 《창경궁수리소의궤》에는 '함인정의 5칸은 경수전 후행각 5칸을 옮겨 짓고, 나머지 4칸은 새로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후대에 작성한 《궁궐지》보다는 아무래도 당대에 적은 《창경궁수리소의궤》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후 왕들은 함인정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주로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했다.# 국상이 생겼을 때는 망곡하고 향을 올리는 곳으로도 이용했다.# 참고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일제창경궁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지만, 함인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주변의 행각과 문은 없어지고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 몇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파일:동궐도 함인정.png}}} ||
<colbgcolor=#bf1400> 〈동궐도〉 함인정
현재는 사방이 트여있다. 하지만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한 〈동궐도〉를 보면,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창호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고 기록에 의하면은 가운데 칸 북쪽에 벽을 세운뒤 일월오봉도를 그려넣었다. 1833년에 재건했을 때 바뀐 건지, 아니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지금처럼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4. 여담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경궁관리소.
[2]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3]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